명리학이란 운명의 이치에 관한 학문이며, 음양오행(陰陽五行)이라는 잣대로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려는 학문이라고 정리한다. 아울러 명리학을 통해 나 자신을 깊이 알 수 있으며, 나아가 나와 너, 나와 우리의 관계의 문제까지 아울러 인생의 고비마다 만나게 되는 숱한 갈등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저자인 강헌은 명리학이야말로 자신에게로 가는 지도이자 내비게이션이라고 단언한다. -강헌- |
강호 동양학의 세 줄기는 사주와 풍수, 한의학이다. 이 세 과목은 과거 조선 시대의 과거 시험에서 실용적 분야로 분류되는 잡과(雜科) 출신들인데, 각각 천, 지, 인 삼재(三才) 사상의 골격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명리학이란 그중에서도 천문을 인문으로 전환한 것으로, 하늘의 이치를 인간의 운명의 이치로 해석한 분야에 해당한다. 천문이 시간이라면 풍수는 지리, 곧 공간의 문제를 다룬다. 마지막으로, 한의학은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인간의 몸과 정신 그 자체를 연구한 분야다. 그리고 이 세 분야는 모두 음양오행이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비롯된 세 자식들이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지위는 동등하지 않다. 1970년대부터 한의학은 제도권 안으로 들어와 대학에 학과가 개설되면서 학문으로 인정받았지만, 앞의 두 개 사주와 풍수는 학문은 고사하고 아직 저잣거리의 잡설이거나 미신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강하다. 조용헌은 한의학은 학문적 시민권을 획득했고, 풍수는 그래도 영주권은 땄지만, 명리학은 여전히 불법 체류자 신분이라고 재치 넘치게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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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불안에 대한 정확한 해답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확인, 자신의 생각에 대한 확신, 그리고 자신이 혼자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는 믿음을 갖는 것이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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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명리학과 서양의 점성학은 최근까지 "인간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주류였다. 어차피 운명은 결정되어 있으니, 그 순리대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명리학의 중요한 고서에서도 "상격(上格)이다, 하격(下格)이다"라는 식의 귀격(貴格)과 천격(賤格)을 은연중에 나누고, 실제 삶을 거기에 끼워 맞춰 설명하는 대목들이 많이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식의 숙명적인 인생관 혹은 세계관은 태어나면서 신분이 정해지는 봉건시대에는 잘 어울린다. 농민 신분으로 태어났으면 농민으로 살다가 죽는 것이 자연스럽다.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다.
운명이 정말로 결정되어 있다면 어떤 학문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운명은 결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조언할 뿐이다."
그렇다. 이제 인간의 운명에 관해 이렇다 저렇다 가르쳐 주기보다는 "운명은 운명의 주체인 자기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니, 이제 우리는 그저 조언을 해 줄 뿐이다. 행복할 수 있는 방법과 길을 알려주는 일종의 카운슬링 역할이 우리의 할 일이다"라고 한다.
명리학은 지난 1000년간 동아시아에서 발전해 온 '현세의' 철학이다. 이것은 전생의 업이나 내세의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중국 특유의 현실주의적 세계관에서 비롯되었다. 좀 더 좁혀서 말하면 명리학은 죽음도 관심의 대상이 아니며 태어나서 살아 있는 동안만 유효한, 그것도 개체적 단위의 인간에 대한 판단의 체계다. 죽음을 예언한다거나 다수가 동시에 겪게 되는 재앙 같은 것도 명리학은 설명하지 못한다. (그것까지 설명한다면 그것은 접신의 영역이다.)
수천 년간 동양 인문학은 우주 원리론의 뿌리가 된 음양과 오행 사상에 기반하고 있지만 명리학은 철저하게 인간의 구체적 성격의 파악과 행동결정에 개입한다. 명리학의 음양오행에서 빌려온 가장 중요한 관점은 '변화'다. 고정되고 결정된 것이 아니라 끝없이 운동하고 바뀌는 힘이다. 그것은 바로 우주의 원리면서 인간과 인간의 삶의 본질이다. 움직이지 않으면 인간의 삶은 끝난 것이고, 명리학도 그 순간 끝난다.
그러므로 한 인간의 운명이 단순히 태어난 연월일시에 의해 고정되고 결정된다는 이해야말로 명리학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오독이다. 명리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운명이 고정되거나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천변만화하는 우주적 속성의 한 부분으로, 인간의 근원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변치 않고 말해 주는 학문이다.
명리학이 결정론에 오랫동안 포획된 것은 그것이 속세의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더욱 확실한 이야기에 귀가 솔깃하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성도 한몫을 했다.
인간과 인간의 삶,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은 크게 보아 우주적 요소다. 그럼, 우주에 좋고 나쁜 것이 존재한다는 말이 성립할까? 그런 것이 있을 리 없다. 다만, 성질이 다른 것이 존재할 뿐이다. 그저 서로 다른 가치, 다양한 가치를 지닌 요소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나라는 존재와 나라는 존재의 삶이 어떤 성격을 가졌고, 그 성격에 따라 잘 맞는 것과 안 맞는 것이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명리학은 기본적으로 "인간과 그 삶을 이루는 많은 요소를 어떻게 조화롭게 구성할 것인가, 그 조화롭게 구성된 요소를 가지고 어떻게 해야만 인간이 가진 가치를 잘 드러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지, 어떤 가치가 절대적으로 우월하니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다른 것을 무시하거나 종속시켜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운명이 정해져 있느냐는 질문도, 좋은 사주인지 나쁜 사주인지에 대한 질문도, 그 전제부터 잘못된 것이다.
그럼 명리학은 무엇인가? '운명'이라는 말에 이미 많은 것이 들어 있다. 이 말 자체가 이미 운명은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운'(運)은 '운용한다, 운전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명'(命)은 주어진 요소들을 가리킨다. '명'과 '운'을 합친 말이 바로 '운명이고', 이것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명리학'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 각자 자기만의 소명을 갖고 태어난다. 이것이 명이다. 그 명을 키우고 발현시켜 자신의 삶 속에서 실현하는 것은 오로지 그 주체의 몫이다.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서, 같은 운명을 타고났다고 해서 그 두 사람의 삶이 같은 것은 아니다. 왜 그럴까? 그 명을 잘 운용한 사람과 그 명을 잘 운용하지 못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 둘 사이에는 너무나 큰 차이가 존재한다. 우리는 각자의 삶에 주어진 명의 가치는 동일하다는 것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모두가 다 소중하고 존엄하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어진 명을 바탕으로 그것을 어떻게 잘 운용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그 해법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명리학은 아주 유용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한 사람의 생명과 삶에는 하나의 우주가 걸려 있다. 하지만 "자신의 삶, 자신의 운명의 주체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현세에서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나를 알고 너를 만나며, 나아가 우리를 깨닫는 과정을 명리학은 굉장히 합리적으로 설명해 준다. 명리학의 개념의 틀 자체가 음양과 오행, 계절과 시간이라는 자연의 섭리 속에서 인간의 본성을 추출하고, 우주의 섭리를 통해서 자기 자신의 존재 요소들을 깨닫게 해 주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
명리학은 인간의 삶에 대한 의문을 풀어내려는 다양한 인문학적 체계 중 하나다.
이미 조선 시대에 많은 성리학자도 명리학에 관심을 가졌고, 동학의 많은 접주들도 명리학을 자기 삶의 중요한 지침으로 정하고 일상적으로 공부했다. 어쩌면 우리의 초, 중등 기초 교육체계가 서양 기준으로 바뀌지만 않았더라면, 우리는 좀 더 명리학을 가깝게 접하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기본적으로 초등학교에서부터 명리학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명리학이야말로 그 어떤 서양의 학문 체계보다도 인간과 우주의 관계, 인간 그 자체의 본질에 접근하는 데 있어서 많은 혜안을 던져주는 합리적인 학문으로 보기 때문이다.
- 강헌, <명리, 운명을 읽다>, 돌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