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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트웨인, 필명, By the mark twain

Jobs9 2023. 5. 15.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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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트웨인

 

미국의 소설가. 《톰 소여의 모험》 같은 작품으로 한국에서는 아동소설 작가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미국 풍자 문학, 나아가 미국 문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인물

모든 미국의 현대문학은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으로부터 나왔다. 그전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 후로도 없었다.
ㅡ 어니스트 헤밍웨이
미국 문학의 아버지.
ㅡ 윌리엄 포크너

 

마크 트웨인 이름
마크 트웨인은 필명으로 본명은 새뮤얼 랭혼 클레먼스(Samuel Langhorne Clemens)이다. 사실 그는 마크 트웨인이라는 필명 말고도 '토머스 제퍼슨 스노디글라스'라는 필명을 쓰기도 했지만 이 이름으로 낸 작품은 그다지 평이 좋지 않아서 쓰지 않게 되었다. 

마크 트웨인이란 필명은 그가 젊은 시절 증기선에서 도선사로 일하면서 증기선이 항구로 도착할 때 물속 깊이를 재던 말에서 따왔다고 한다. 물 깊이를 패덤(fathom; 1 패덤 = 2야드 = 182.88 cm)이라는 단위로 측정하는데, 정확히 몇 패덤이라고 나오면 "By the mark~~"로 알린다. 이때 2 패덤이 나올 경우 "two"라고 하지 않고 "twain"이라고 한다. 즉, 정확히 2 패덤이 나온다면 "By the mark twain."이라고 말한다. 2 패덤(약 3.66m)은 강을 지나가는 배가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는 평균 깊이다. 

한 가지 더 알려진 가설로는, 마크 트웨인이 바에 가서 술을 마실 때, 그는 항상 술을 두 잔 시켰다고 한다. 때문에 그는 바텐더에게 나를 보면 술을 항상 두 잔 내오라며 카운터에 2를 새겨놓으라고(Mark down two) 부탁했는데 이에서 필명을 따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첫 번째 이야기보다 신빙성은 떨어진다고 한다.
 
마크 트웨인이라는 필명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아이제이어 셀러'라는 이름의 미시시피 강 수로 안내인이었는데, 그는 수로 안내인 생활에서 겪은 것을 토대로 잡다한 이야기를 지어내어 마크 트웨인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다. 그런데 새뮤얼 클레먼스가 그 이야기들을 신문에서 익살스럽게 흉내 냈다. 그 뒤로 셀러는 다시 글을 발표하지 않았고 클레먼스가 마크 트웨인을 필명으로 썼다.


1835년 미국 미주리 주 플로리다에서 태어났다. 4살 때 가족이 미시시피 강변의 소도시 해니벌(Hannibal)로 이사를 갔는데, 후에 여기서 《톰 소여의 모험》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하지만 11살 때 아버지를 폐렴으로 잃은 그는 인쇄소에서 수습공으로 일하게 되었다가 이게 인연이 되어 브라질을 탐험하고 미시시피 강을 누비는 증기선 키잡이일도 했다. 

1840년대 미국 서부에서 금이 발견되어 미국에서 골드 러시가 일어나자, 약간의 토지를 매입해 금을 찾았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그 탓에 빚이 늘어나 신문사 일을 했는데 여기에 첫 단편들을 실은 것이 호평을 받아 본격적으로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1861년 미국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수로안내인 직업을 잃고 남부군으로 2주 정도 참전한 적이 있다. 왜 고작 2주냐면 그가 전쟁을 겪으며 전쟁에 큰 회의감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노예제 폐지론자였던 그로선 아이러니한 행적. 외적 요인으로는 그가 속해있던 민병대가 사라지자 탈영했다고 한다. 

작가가 된 이후로는 그가 쓴 사실주의 글들에 대해 비판이 많이 들어왔는데, 특히 캘리포니아에 있을 때 언쟁에 많이 말려들었다고 한다. 특히 이러한 언쟁은 그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바에서 일어났는데, 언쟁의 끝에 참지 못한 상대가 권총 듀얼을 신청하면 트웨인은 슬금슬금 도망쳐 나와 기차를 타고 다른 마을로 가 다시는 그곳에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한 번은 아무리 까대도 상대가 상대를 않자 마크 트웨인은 신이 났는지 더 신나게 까댔는데 참다못한 상대가 결투를 신청하자 그제야 시무룩해졌으나 결투 전 친구가 기지를 발휘한 덕분에 위기를 넘겼다. 문제는 하필이면 이때쯤 입법된 결투금지법을 유명 인사들이 위반했다는 것에 치안판사가 단단히 화나서 감방에 갈 뻔했다는 것. 이 일로 인해서 마크 트웨인은 결투를 몹시 싫어해서 결투하는 사람이나 결투를 부추기는 사람만 보면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 총으로 쏴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고.. 

후술된 독설가적인 면모와 대조적으로 가정적으로는 매우 자상하고 착실한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아내 올리비아 랭던 클레멘스를 매우 사랑하여 아내와의 금슬이 좋았고 아내가 아프면 그는 이런 글을 나무에 걸어둘 정도였다.
새들아, 너희들이 우는 것은 본능이니 울지 말라곤 하지 않겠지만 되도록이면 좀 멀리서 울면 안 되겠니? 지금 우리 아내가 잠을 자고 있단다.
부인과 결혼한 에피소드가 있는데, 한 신문사에서 여행을 보내주며 여행에서의 영감으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했는데 그 여행 중 우연히 지금 부인의 오빠를 만난다. 당시 조금씩 유명세를 얻어가던 트웨인이었기에 그의 작품을 읽은 적이 있는 오빠가 그를 자신의 선실로 초대하는데, 거기서 트웨인은 미래 부인의 사진 혹은 그림을 보고 반해 버렸다. 그리고 오빠의 초대를 받아 그의 집에 가서 부인에게 청혼하지만, 부인은 장인의 반대 등으로 트웨인의 청혼을 거절한다. 그러자 그는 비장의 수를 쓰는데 바로 마차에서 스스로 굴러떨어지는 것이었다. 결국 허리를 다쳐 며칠간 그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동안 끈질기게 청혼을 한 결과 부인이 결국 받아들여 결혼에 골인하였다고 한다. 10번 찍었더니 넘어왔다?

다만 선량한 가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사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가족들과의 사이는 매우 좋았지만 4명의 자녀 중 3명을 병으로 일찍 잃었기 때문. 장남 랭던은 생후 19개월 만에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 이때 슬픔이 얼마나 컸던지 자서전에서 트웨인은 추운 겨울 날씨에 아들을 바깥에 데리고 나간 게 잘못이었다며 크게 자책했을 정도다. 큰딸 수지도 랭던처럼 뇌수막염으로 1896년에 24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게다가 아내도 오랫동안 병에 시달리다 심부전으로 1904년, 59세의 나이로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설상가상으로 아내가 죽은 지 5년 뒤인 트웨인이 죽기 1년 전인 1909년에 남은 막내딸 진마저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트웨인의 동생도 증기선 폭발 사고로 사망했다. 그나마 둘째 딸 클라라는 88세까지 장수했지만 그녀의 딸인 손녀 니나도 36세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다수의 가족들이 요절했기 때문인지 트웨인은 죽기 전 우울증에 시달리다 1910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장례는 둘째딸 클라라와 그의 절친한 친구인 편집인 하월스가 뉴욕의 장로교회에서 치러주었으며 그가 죽었을 때 장례식에 지인과 팬들 3천명이 조문객으로 와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그가 핼리 혜성이 지나갈 때 태어나서, 살아생전 트웨인 자신은 "혜성이 다시 지나갈 때 세상을 떠날 것"이라고 말했고 실제로 이루어졌다. 마크 트웨인이 사망하기 바로 전날에 핼리 혜성은 지구에 가장 근접한 위치였다.

 


당대의 인종차별과 제국주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을 강도높게 비판하는 등 지금 보면 굉장히 선구자적인 마인드를 가진 인물이었다. 남부연맹군, 정확히는 친노예제 민병대에 자진 입대해서 2주간 복무했다 탈영하는 과오도 있었지만, 그는 열렬한 노예폐지론자(Abolitionist)였으며, 여성참정권을 주장했고, 소수인종에게 동정적이었다.

다만 《톰 소여의 모험》에선 아메리카 원주민 출신의 혼혈인 조가 악역으로 나온 걸 두고 비난하는 분석도 있다. 하나 이것은 당시 시대적인 배경이나 한계를 무시한 과잉 비난에 가깝다는 의견도 있는데, 마크 트웨인이 살던 시대와 소설의 배경은 1800년대 중후반이다. 이 시대에는 게으르고 무지하나 천진난만한 흑인, 무책임하고 도덕관념이 없는 아메리칸 원주민 캐릭터가 문학적 요소로 자연스럽게 쓰이던 때다. 물론 소수자 문제에 관심이 깊던 마크 트웨인이 굳이 아메리카 원주민 관련 캐릭터를 악역으로 설정했어야 되냐에 대해선 생각이 갈릴 수도 있지만, 그럼 그의 문학 작품에서 악역은 무조건 백인만 해야 된다는 논리도 좀 웃기긴 하다. 결국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은 어느 인종이든 있기 마련이라.. 

실제 마크 트웨인은 당대 기준 계몽주의자로 당시 유행하던 제국주의도 혐오했다.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 시절 조국인 미국이 필리핀에 군대를 파병할 때만 해도 제국주의 국가 스페인으로부터 미국이 필리핀을 독립시키려는 전쟁으로 여겨 환영했지만, 미군이 필리핀 현지주민들을 학살하는 행태에 분노를 느끼고, 《전쟁을 위한 기도》라는 책을 써서 미국을 학살자라며, 호된 비난을 쏟아냈다. 때문에 이 책은 미국에서 24년간이나 출판이 금지되었다가 그가 죽고 나서 13년이 지난 1923년에서야 출판할 수 있게 된다. 필리핀 침공에 대해 "하느님이 내게 명령했다"다는 발언으로 정당화하려던 매킨리 대통령에 대해서도 "남북전쟁 이래 미국에 내린 최악의 재앙. 그는 정치계의 톰 소여이며 무게 잡을 기회가 50%면 캐나다까지 가고, 그 기회가 100%면 지옥까지도 갈 작자이다."라는 증오어린 평가를 내렸다.

그 밖에 아프리카와 아시아, 북중미에서 벌어지는 백인 제국주의자들의 학살과 지배를 혐오했고 이를 풍자하는 글도 많이 남겼다. 때문에 "열등한 필리핀을 백인이 지배해야 한다"며 필리핀 침략전쟁 및 학살을 옹호하고 또한 백인 우월주의 사상인 백인의 의무를 내세운 러디어드 키플링을 극도로 혐오했다. 하지만 키플링의 문학적 재능은 칭찬하고 존경하는 의미를 담은 글도 쓴 것을 보면 인정할 건 인정했던 모양.

그 밖에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2세를 악마라고 비난하며 그가 콩고에서 저지른 학살을 엄청 비난했고 레오폴드 2세보단 덜하긴 했지만 아프리카를 식민지배하는데 앞장서서 자원과 영토 탈취와 원주민 노예화 등 악행을 저질렀던 세실 로즈를 반어법으로 찬양하면서 비꼰 인물이기도 하다.

트웨인이 쓴 글에 나온 분노 어린 문장을 보면 당시 기독교에 대한 그의 생각을 알 수 있다.
우리들의 기독교에 대하여 크게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 악랄하고 피를 흘리며 무자비하고 약탈하는 것. 이것이 참된 믿음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비기독교 국가에서 우리의 신앙이라면서 자행되는 일이다. 지옥을 들이대면서 벌이는 범죄를 성경이란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일이 오늘날 우리들의 기독교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만일 예수가 지금 이 세상에 있다면 그는 절대 기독교 신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의 종교는 끔찍한 종교일 뿐이다.

트웨인이 늘그막에서 쓴 이 글은 100년 동안이나 알려지지 않았다가 2010년에서야 그의 사망 100주기 기념 행사에서 비로소 공개됐다.

다만 트웨인의 "공식적"인 종교는 장로회였고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장로회 교회를 지을 때 헌금도 했다고 한다. 이신론자까지는 아니고 진보적 개신교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해당 글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먹어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행태를 비판한 것일지도 모른다.

기독교 근본주의를 강하게 질타했던만큼 안티테제라고 할 수 있는 진화론에 대해선 긍정적인 제스처를 보였다. 또한 과학 분야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정치적으론 굉장히 냉소적인 사람이었다. 저서 《도금 시대》(Gilded Age)에선 미국 정치인을 싸잡아 더럽다고 엄청나게 풍자했으며 정치적 비리와 선거에 대한 여러 일화를 콕 짚으며 독설을 퍼부었다. 때문에 미국 정치인들에게 비난도 많이 받았으며 교회에서도 그를 사탄이라고 많이 비난했다고 한다.

나름 유명한 일화로 한 신문 칼럼에 "어떤 미국 정치가들은 개자식이다!"라는 공개 디스를 날렸는데, 항의와 고소에 직면하자 사과문으로 "어떤 미국 정치가들은 개자식이 아니다."('어떤'의 부정은 '모든', '개자식이다'의 부정은 '개자식이 아니다.')라는 말로 고쳤던 적이 있다. 참고로 이는 《논리야 놀자》 같은 주로 어린이용 논리학 서적에서 자주 써먹는 예문 중 하나이다. 물론 아이들 도서이니 '멍텅구리'라는 단어로 순화되었다. 혹은 '대부분의 미국 정치가들은 개자식이다'라고 썼다가 항의를 받아 '일부 미국 정치가들은 개자식이 아니다'라고 했다는 버전도 있다. 이 경우에도 역시 그 말이 그 말. 후일 몬티 파이튼의 비행 서커스의 사과문이 이와 비슷한 형식으로 영국 정치계를 통렬히 풍자했다.  

트웨인이 살아있을 당시 유럽 각지에서 예수가 못박힌 십자가가 우리 교회에 있다는 헛소리를 하며 교회 홍보를 했는데, 그게 유럽 각지에서 너도나도 서로들 그런 홍보를 했기에 그는 이렇게 비아냥거렸다.
그 십자가들을 죄다 모아 배를 만들어 예수가 못박힌 십자가들로 만든 배라는 이름을 지어서 전세계를 떠돌며 선교해 봐라. 전세계에서 기독교에 대한 비웃음을 실컷 받을 거다. 

YMCA 간사이자 미국의 목사이던 앤서니 콤스톡(Anthony Comstock. 1844~1915)도 "진화가 안 된 원숭이"라고 호되게 깠다. 콤스톡은 "대중문화가 사탄의 창조물"이라는 주장을 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로 당대에 악명이 높았다. 보수성이 얼마나 심했냐면 콤스톡 때문에 한동안 미국 우체국에서는 해부학 교과서를 소포로 보낼 수 없었을 정도다. 허구한 날 콤스톡이 트웨인을 비롯한 당대 유명 작가들의 소설이나 글, 기타 만화, 그림, 시, 예술 및 의학과 과학 서적 등을 죄다 음란하고 불경하다고 비난했기에 살아생전 미국 문인, 예술가들에겐 엄청난 비난과 풍자를 당했다. 

 

 

마크 트웨인 어록


고전을 칭송하지만, 정작 읽은 사람은 드물다.
현실이 소설보다 낯선 이유는, 소설은 있음직한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뭘 몰라서 곤경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알고 있다면 곤경에 빠지지 않으리라는 착각 때문에 곤경에 빠지는 것이다.
당신이 신문을 읽지 않는다면, 당신은 정보가 없는 사람이다. 당신이 신문을 읽는다면, 당신은 정보를 잘못 얻는 사람이다.

 

 


율리시스 그랜트 미국 대통령의 자서전을 완성하여 출판한 바 있다. 마크 트웨인 자신이 자서전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말년에 경제적 곤란을 겪게 된 그랜트가 몸까지 아프자 가족들에게 유산이라도 남겨주기 위해 자서전을 집필해 헐값에 팔아치우려고 했는데, 사연을 들은 자기가 끼어들어 자서전 완성을 도우며 그랜트 일가에 저작료가 많이 갈 수 있는 방향으로 출판 계약을 도와주었고, 덕분에 그랜트는 사후 유족에게 20만 달러 상당의 인세를 유산으로 남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랜트 대통령과는 다른 인연도 있다. 그랜트가 막 대통령에 취임했을 당시, 마크 트웨인은 네바다 주 상원의원인 친구의 소개로 그랜트와 만날 수 있었다. 이때 마크 트웨인은 너무 긴장했는지 "참으로 당황스럽네요."라고 말하며 제대로 대화를 하지 못했다. 이후 1879년 그랜트가 해외 순방을 마치고 귀국을 환영하는 행사장에서 두 사람이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그랜트는 인사 대신 "저는 당황스럽지 않는데 당신은 지금 어떤가요?"라고 말했다. 마크 트웨인과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을 그대로 기억하곤 놀린 것. 마크 트웨인은 자서전에서 이를 언급하며 그랜트 대통령이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서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한 에밀 졸라를 전적으로 지지하며 "나는 졸라를 향한 깊은 존경과 끝없는 찬사를 보낸다. 군인과 성직자 같은 겁쟁이 위선자 아첨꾼들은 한 해에도 백만 명씩 태어난다. 그러나 잔 다르크나 졸라 같은 인물이 태어나는 데는 5세기가 걸린다."며 졸라를 옹호했으며 그가 알 수 없는 사고로 죽자 그를 추모하는 글도 남기면서 살해당한 게 아닐까 여기기도 했다.
상기했듯 트웨인은 (근본주의)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이면서도 특이하게도 백년전쟁의 전쟁영웅 잔 다르크엔 관심이 많아서, 그녀를 다룬 소설을 가명으로 쓰기도 했다. 왜 잔 다르크에 그토록 관심이 많았는지는 의문. 어린 시절 우연히 바람에 날아가는 종이를 잡았는데 잔 다르크 위인전 중 일부였다는 전설이 있다. 아쉽게도 그녀의 시성(諡聖. 기독교에서 특정 인물을 성인으로 선포하는 일)은 그의 사후 10년 뒤에 이루어졌다.
니콜라 테슬라와 친한 친구 관계였다. 테슬라가 평생 가까이 지낸 사람이 채 5명이 안되었던걸 고려하면 그야말로 절친이었던 듯. 테슬라도 자기 연구소에 트웨인이 찾아오면 기꺼이 자기 발명품을 보여주곤 했다고 한다.
여성 브래지어의 후크를 발명한 발명가이기도 하다. 그의 아내가 당시 끈으로 묶게 되어 있는 브래지어 끈 때문에 옷 입는걸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착안해서 발명 특허까지 받았다. 하지만 당시 여성들은 브래지어 대신 코르셋을 많이 입고 다녔기 때문에 트웨인이 발명한 후크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이 후크가 대박을 칠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아내는 '발명 같은 거 하려고 하지 말고 글이나 쓰세요'라고 조언했다. 지금 전세계의 모든 여성들이 입는 브래지어에 다 달려있는 후크를 생각해 보면 격세지감. 하지만 이후에도 니콜라 테슬라와 교류를 하면서 계속 발명에 관심을 가져서 '풀없는 신문 스크랩북'이나 보드게임 등을 발명하기도 했다. 그 후 제임스 페이지라는 사람이 만든 '페이지 식자기'(자동으로 식자를 교환해 가면서 인쇄할 수 있는 기계)에 30만 달러를 투자했으나 비슷한 기계가 먼저 개발되는 바람에 쫄딱 망했다. 여기에 별도로 운영하던 출판사마저 도산하여 파산한다. 파산한 후 빚 갚으려고 쓴 작품들이 백치 윌슨의 비극, 잔 다르크, 하드리버그를 타락시킨 사나이. 트웨인의 발명품과 식자기 이야기는 2015년 9월 6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다루었다.
마크 트웨인의 큰 누나의 외손녀는 《키다리 아저씨》의 작가 진 웹스터이다. 웹스터의 아버지이자 트웨인의 외조카 사위는 트웨인 작품을 출판한 출판사 사장이기도 했다. 허나 출판사가 파산하고 웹스터의 아버지가 약물 과용으로 자살하여 둘의 관계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미국의 SF소설 작가 존 스칼지의 작품 《마지막 행성》 초반부에는 주인공 존 페리가 사는 행성의 이름으로 '허클베리'가 나오는데, 이 이름에 관해 "어느 마크 트웨인 광이 붙였는지 모르겠다"는 주인공 존 페리의 독백이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허클베리 행성의 두 위성에는 각각 '소여', '베키'라는 이름이 붙었고, 허클베리 행성의 3개 대륙에는 마크 트웨인의 본명인 '새뮤얼', '랭혼', '클레먼스'가 붙었다. 뿐만 아니라 이중 클레먼스 대륙에서 길게 이어지는 화산섬들에는 마크 트웨인의 아내 이름인 '리비'의 이름이 붙었으며, 바다의 이름은 트웨인의 첫 번째 단편 <켈라베라스의 높이 뛰는 개구리>에서 따온 '켈라베라스 해(海)'이다. 
작전주에 손을 댔다가 25,000달러를 허공에 날려버린 적이 있다. 21세기 현재 가치로 약 300만 달러에 달한다. 그 후 소설 Pudd'nhead Wilson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October. This is one of the particularly dangerous months to invest in stocks. Other dangerous months are July, January, September, April, November, May, March, June, December, August and February."
번역: "10월, 이 달로 말할 것 같으면 주식투자에 특히 위험한 달 중 하나이다. 다른 위험한 달로는 7월, 1월, 9월, 4월, 11월, 5월, 3월, 6월, 12월, 8월, 그리고 2월이 있다."
눈치를 챘겠지만 1년 12달이 다 나와 있다. 결국 주식엔 손대지 마라는 소리다. 그 정도 손해를 봤으니 주식투자라면 이가 갈릴 만 하다.
1897년 빅토리아 여왕의 다이아몬드 주빌리(즉위 60주년 행사) 취재를 위해 뉴욕 저널(New York Journal) 특파원으로 영국에 가 있었는데 뉴욕 헤럴드(New York Herald) 신문에서 마크 트웨인이 런던에서 빈곤한 상태로 심하게 아픈상태이며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는 기사를 쓰자 그 다음날 "내 사촌인 제임스 로즈 클레멘스가 몇주전에 런던에서 중병에 걸렸었지만 지금은 건강하며 내 병에 대한 기사는 그의 병에서 비롯된 말인거 같다. 내 죽음에 관한 보도는 과장되어 있다.(The report of my death was an exaggeration.)" 라는 말을 뉴욕 저널 기고문에 같이 보내며 기자들을 비난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은 이후 《브이 포 벤데타》의 대사나 《킹스맨: 골든 서클》의 공식 포스터 등에서 자주 인용되는 문구가 되었다. 
"천국에 시가가 없다면 난 그곳에 가지 않겠다"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엄청난 쿠바산 시가 애호가였으며 동시에 파이프 담배 애호가이기도 하였다.
TRPG 캐슬 폴켄슈타인(Castle Falkenstein)에서는 노턴 1세를 캘리포니아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밀어줘 당선되게 하였고, 모든 인종과 종족을 아우르는 선정을 펼치게 하여 이윽고 곰 깃발의 캘리포니아 제국의 황제로 등극시킨 킹 메이커로서, 자기는 수상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때 마크 트웨인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는 루머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이 아니며 마크 트웨인은 생전에 한반도에 온 적이 없다. 드라마 제중원(드라마)에서 마크 트웨인이 러일전쟁 종군기자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해서 주인공과 만나는 장면을 묘사한 적이 있는데, 이를 역사적 사실로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대체역사소설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 방한한 미국 대표단 내의 문화계 대표로서 나왔다. 대표단장인 그랜트가 전 대통령 신분으로 왔음에도 이 둘이 친분이 있다는 서술이 없었고, 후에 주인공 이형이 테슬라를 영입하기 위해 에디슨과 접촉하는 장면이 있지만, 그 이전에 테슬라와의 친분에 관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Never argue with a fool, onlookers may not be able to tell the difference.
바보와 논쟁하지 마라. 구경꾼들이 차이를 식별할 수 없을지 모른다.
ㅡ 마크 트웨인(Mark Twain)
공식적으로 타자기만을 사용해서 원고를 집필한 최초의 작가로 꼽힌다. 마크 트웨인 본인은 톰 소여의 모험이 최초라고 주장했지만, 후대의 연구에 따르면 마크 트웨인의 다른 작품인 <미시시피강의 추억>이라는 추측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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