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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은혁, 헌법재판관, 서울서부지방법원 부장판사, 1963년, 강원도 고성, 서울대 정치학과, 인민노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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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은혁

馬恩赫 | Ma Eun-hyeok

 

출생

1963년 9월 27일

강원도 고성군 거진면

(現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 거진읍)

현직

헌법재판소 재판관 선출자

서울서부지방법원 부장판사

 

 

 

1963년 9월 27일, 강원도 고성군 거진면에서 5남 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나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치학과(81학번)를 졸업했다. 1984년 5월 26일 육군에 입대하여 1986년 11월 27일 병장으로 만기전역하였다.

 

1987년 결성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의 창립 멤버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

 

1997년 제39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2000년에 사법연수원을 제29기로 수료한 뒤 같은 해 대구지방법원 예비판사로서 처음 법복을 입었다.

 

2004년, 인천지방법원 행정재판부에 있었다. 음주상태에서 승용차를 운전해 면허취소 사유에 해당할 경우 다른 운전면허도 취소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2007년,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재판부 판사로, 군사 통제 보호구역에서 산나물을 채취하다 지뢰를 밟아 중상을 입은 40대 여성에게 국가가 65% 책임비율로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마은혁 판사는 지뢰가 매설돼 민간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경우, 군부대장은 경계표지 등을 설치해 경고해야 하는데, 해당 사고 장소에서는 이런 표지를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노회찬 전 의원과 친분이 있어, 2009년 노회찬 전 의원이 재직 중이 아니었던 시절, 노회찬 마들연구소의 도서 출판기념회에 30만 원의 후원금을 기부하여 논란이 있었다. 법관으로서 정치적 중립을 어긴 게 아니냐는 비판이 있었지만 마은혁 판사는 특정 정당을 지지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맺어온 인연 차원에서 참석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대법원에서도 징계할 사안은 아니라고 결론 내렸고, 구두 경고로 대신했다.

 

하지만 당시 미디어법과 관련해 민주노동당 당직자들이 국회 로텐더홀을 점거해 기소된 사안에서, 마은혁 판사가 민주당 인사는 기소하지 않고 민노당 인사들만 기소한 것은 공소권 남용이라는 이유로 공소 기각 판결을 내렸다. 이로 인해 조중동 등 보수 언론과 한나라당 등 정치계에서는 부아가 돋아 있었고, 후원회 참석은 여기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어버렸다. 때문에 마은혁 판사가 속한 우리법연구회도 강력하게 비판받아, 연구회 소속 판사들의 명단 공개를 요구받았다. 이후 해당 판결은 항소심에서 원심(제1심)을 파기하고 원심법원으로 환송한다는 주문으로 돌아왔다.

 

당시 연구회 회장이던 문형배 부장판사가 학술단체로서 논문집을 펴낼 때 거기에 싣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고, 그대로 되었다. 당시 수록된 명단에는 정계선 판사도 있었다.

 

김지형 대법관이 설립한 노동법연구소 해밀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2019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처음으로 경력대등재판부가 신설되었는데, 마은혁 판사는 민사9부 대등재판부 부장판사로 전보되었다.

 

 

 

헌법재판관 후보자 관련

 

 

2024년 12월

9일, 국회 몫의 헌법재판소 재판관 후보로 과반 의석을 차지하는 더불어민주당에 의해 정계선과 함께 헌법재판소 재판관 후보자로 추천되었다. 헌법재판소 재판관(마은혁) 선출안(의장) - 의안번호: 2206312 12월 23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는 여당 국회의원이 불참하여 반쯤 파행인 상태로 진행되었다. 재판관 임명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법연구회 출신인 문형배 재판관과 한솥밥을 먹게 될 예정이다. 26일 14시 57분, 마은혁, 정계선, 조한창 헌법재판관 후보자 임명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31일,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에 의해 정계선, 조한창 헌법재판관이 먼저 임명이 재가된 반면 본인은 마지막까지 임명이 보류되었다. 이에 대해 최상목 대행은 여야 합의가 이뤄진다면 마은혁 후보자에 대해서도 임명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2025년 2월

3일, 헌법재판소에서 마은혁 재판관 선택적 불임명 행위에 대한 위헌 여부 결정이 나올 예정이었으나,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측의 변론 재개 요청을 헌재가 받아들이면서 결정이 연기되었다. 10일 2차 변론기일을 끝으로 변론기일이 종료되었으나, 아직까지도 선고일이 정해지지 않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 11차 최종 변론기일까지 임명이 되지 않을 경우 이 이후에 임명이 되어도 심판에는 참여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14일, 국회에서 마은혁 임명 촉구 결의안이 가결되었다. 25일, 헌법재판소가 2월 27일 오전 10시에 권한쟁의심판의 결론을 선고하겠다고 입장을 냈다. # 27일, 마은혁 후보자에 대한 권한쟁의 심판이 일부 인용되었다.

 

인용: 최상목 대행이 마 후보자를 임명하지 않은 것은 국회의 권한을 침해한 위법한 행위

 

각하: 마 후보자에게 재판관 지위를 부여해달라는 지위확인 등에 관한 부분은 부적법

 

이 결정으로 인하여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은 헌법재판소법 제66조 내지 제67조에 따라 마은혁 후보자에 대한 임명을 해야 하는 법적 의무가 분명하게 발생했다. 그러나 이 결정으로 헌법재판소가 직접 마은혁 후보자를 헌법재판관으로 즉시 임명하거나 즉시 헌법재판관으로의 지위를 부여하거나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하여금 임명을 즉시강제하는 효력을 발휘하진 못한다. 한편 이에 대해 최상목 대행은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밝혔으나 언제 임명할지 여부에 대해서는 여전히 뚜렷하게 밝히지 않았다. 

 

2025년 3월

4일, 최상목 대행이 국무위원 간담회를 소집하여 마은혁 선출자의 헌법재판관 임명에 관한 의견을 듣기로 했다. # 그러나 결국 또 다시 임명이 유보되었다.

 

2025년 4월

4일,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 심판에서 만장일치로 인용 선고를 내려 파면되었다. 한덕수 권한대행이 마은혁 선출자의 임명을 본인의 탄핵 기각 이후에도 거부한 만큼, 조기대선을 통해 선출된 21대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인 6월 초에야 임명이 될 것으로 예측된다.

 

 

 

정치 성향 논란

 

서울남부지법에서 판사로 근무하던 2009년 11월, 한·미 FTA에 반대하며 국회를 불법 점거한 민주노동당 당직자 12명에 대해 전원 공소기각 결정을 내렸다. 또한 2009년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 후원회에 참석하여 정치적 중립 위반 논란이 일었다.

 

 

아내는 2009년 10월 사별했다. 헌법재판관 후보자 청문회에서 사별한 아내를 언급하다 울컥하며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

헌법재판관 후보자 청문회 당시 삼성전자 주식을 딱 1주만 보유해 의문을 자아냈는데 이에 마 후보자는 기업에 대한 적대적인 생각을 가진 것 아니냐는 김한규 의원의 질문에 "제가 재산 관리에 너무 관심이 없다 보니까 친구가 앱을 깔아서 알려주면서 산 것"이라며 해명했다. 

 

국회(더불어민주당) 몫 헌법재판소 재판관 후보자로 지명되어 임명까지는 '시간문제'였으나 이것이 진짜로 '시간문제'가 되어 버렸다. 정치적인 이유로 임명 절차가 지연되는 바람에, 동 시기에 지명되었던 정계선이나 조한창과 달리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 등 여러가지 굵직한 현안에 대한 심리를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심지어 인사청문회에서의 핵심 키워드가 '대통령 탄핵심판'일 정도였는데, 정작 본인은 타의에 의해 이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고 끝내 탄핵심판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상기한 배경으로 임명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가운데서 마은혁 본인의 임명 여부를 두고 8인 체제 헌법재판소는 마은혁 본인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헌법재판관 선별적 임명권 행사 권한쟁의 심판까지 이루어지게 되었다. 재판관 임명보류에 대한 헌법재판으로는 이 사례가 최초다. 혼란한 정치 상황으로 인하여 마은혁 본인은 가만히 있는데 타의에 의해 지명되고 임명이 보류되고 이에 관한 권한쟁의까지 벌어지는 상황인 셈.

 

2020년 3월에 서울중앙지법 민사항소 9-2부에서 정철민 부장판사 및 판사 강화석과 함께 영화 청년경찰(2017) 제작사 무비락에 화해 권고 결정을 내렸다.










마은혁 향한 좌파·친북몰이…그 거짓과 망령의 실체

 

 

마은혁 헌법재판관 후보자(이하 직함 생략)를 겨냥한 국민의힘의 이념 공세가 점입가경이다. 대한민국 사법부의 현직 부장판사인 그를 국민의힘은 ‘친북 주사파’, ‘전향하지 않은 좌파 혁명주의자’로 몰아세운다.

 

결론부터 말하면 틀렸다. 그는 ‘친북’도 ‘주체사상파’도 아니었다. 학생 시절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경도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졸업 후 노동자 정치조직과 진보정당 운동에 투신한 20대 후반 무렵엔 서구적 의미의 사회민주주의 좌파로 전향해 있었다. 40년이 다 되어가는 일이다. 국민의힘의 마은혁 공격은 ‘허수아비 때리기’다.

 

인민노련이 지하 혁명조직?

 

마은혁의 사상 이력을 이야기하려면 그가 학업(서울대 정치학과)과 군복무를 마치고 1980년대 후반에 몸담았던 ‘인민노련’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인민’과 ‘노련’이란 명칭의 어감이 북한과 연계된 듯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정식 명칭이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이다. 인민노련은 6월 항쟁이 절정에 달했던 1987년 6월26일 인천 부평에서 출범을 선언했다. 당시의 문제의식은 지역에 분산된 소모임들을 통합해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노동운동으로 재편하고, 노동자의 소모임이나 임금인상투쟁을 넘어선 정치활동을 전개하면서, 전국적인 노동자 정치조직을 만들기 위해 인천에서부터 지역정치조직을 먼저 만들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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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범 당시 인민노련은 친북 성향의 자주파와 마르크스-레닌주의 계열 평등파의 연합 조직이었다. 이질적인 두 세력은 치열한 내부 투쟁을 벌였는데, 여기서 패배한 자주파가 4개월만에 떨어져 나갔다. 인민노련은 그 시절 노동운동을 정치적으로 지도하는 ‘비합법 전위조직’을 표방했지만, 무리하게 체제 전복을 위한 폭력혁명을 준비하지도, 지하정당 건설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북한의 수령체제나 주체사상에 대해선 강한 반감을 가졌고, 북한 편향의 통일운동에 대해서도 일관된 비판 노선을 견지했다.

 

이후 인민노련은 1987년 대선 당시 민중후보 백기완 선거운동본부에 결합하며 ‘정당 건설을 통한 독자적 정치세력화’라는 문제의식을 다져나갔다. 1989년 공안기관의 탄압으로 지도부가 와해된 뒤엔 다른 노동자 정치조직들과 통합해 1991년 공개 조직인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한사노 창준위)로 전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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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은혁 헌법재판관 후보자를 ’북침론’과 연결시켜 색깔 공세를 펴는 국민의힘 정치인들. 홍준표 대구시장이 5일 서울 여의도 국회를 방문해 마은혁 후보자 임명에 반대하며 단식을 하고 있는 박수영 국민의힘 의원을 격려하고 있다. 연합뉴스

마은혁 헌법재판관 후보자를 ’북침론’과 연결시켜 색깔 공세를 펴는 국민의힘 정치인들. 홍준표 대구시장이 5일 서울 여의도 국회를 방문해 마은혁 후보자 임명에 반대하며 단식을 하고 있는 박수영 국민의힘 의원을 격려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사노 창준위(이후 한노당 준비위로 전환)가 한국 진보정당 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의미 가운데 하나는 당시까지 노동자 정치운동을 규율해온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결별했다는 것이다. 1991년 12월을 전후로 한노당 준비위는 비합법 전위정당 노선을 포기하고 공개적인 노동자정당 창당을 선언했다.

 

이후 구속자 석방을 탄원하는 과정에서 핵심 인사들은 사회주의 이념과 폭력혁명 노선,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을 폐기한다. 말 그대로 ‘집단 전향’이었다. 이후 한노당 준비위는 장기표·이재오·김문수 등 재야 명망가가 주축이던 민중당과 통합했고, 원내 진출에 실패한 뒤엔 ’진보정당 추진위원회’를 결성해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 운동에 매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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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은혁이 몸담았던 인민노련은 출범 초기의 짧은 시기를 제외하면 ‘사회주의 지하당’과는 거리가 먼 현장 중심의 ‘실사구시적’ 노동자 정치조직이었다. 이 조직이 인천지역에 끼친 영향력은 사회운동과 노동운동 모두에 지대한 것이었다.

 

20대의 마은혁은 어떤 사회주의자였나

 

마은혁이 진보정당운동 이론가로 전국에 이름을 알린 건 1992년 4월 민중당 해산 뒤 결성된 진보정당추진위원회에서 강령 기초작업 상임위원으로 활동하면서다. 당시 한국 진보세력은 1991년 사회주의권 붕괴로 극심한 이념적 혼란에 빠져 있었다. 당시 마은혁이 진정추 기관지 <노동과 진보> 5호에 쓴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 사회주의 나라의 몰락의 교훈에 대하여’라는 팸플릿은 1990년대 한국 진보정당 운동의 이념적 좌표를 정립한 것으로 평가된다.

 

8쪽 분량의 이 팸플릿에서 마은혁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했던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은 마르크스주의 자체의 한계를 드러내는 위기의 표현이며,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시대적 제한성을 지닌 마르크스의 글과 이론이 아닌, 구체적 현실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통해 '지금 이곳'의 문제 해결에 집중해야 한다는 현실주의적 입장을 강조했다.

 

주목할 만한 대목은 이 팸플릿에서 마은혁이 정리한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다. 그는 “사회주의 사회의 몰락의 교훈과 관련해 민주주의라는 문제만큼 중요한 문제가 없다”며 “민주주의는 사회주의와 같은 것은 아니지만, 사회주의는 민주주의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민주주의적 사회주의가 있고 독재적인 사회주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회주의적 관계는 민주주의적 기초 위에서만, 그리고 민주주의의 만개 속에서만 보장된다”고 선언했다. 1970년대 이후 유럽 좌파들이 채택했던 ’민주주의와 함께 가는 사회주의’가 한국의 진보정당 운동의 강령적 테마로 처음으로 자리잡는 순간이었다.

 

 

‘민주주의와 함께 가는 사회주의’는 1997년 만들어진 국민승리21과 2000년 창당된 민주노동당을 거쳐 진보신당과 노동당, 정의당의 강령에까지 그 정신이 이어지고 있다.

 

 

 

마은혁은 북한과 통일문제를 어떻게 봤나

 

1992년 마은혁이 연세대 교지 <연세> 겨울호에 기고한 ‘새로운 통일정세와 진보진영의 대응방향’이란 글 역시 진보정치 이론가 마은혁의 현실주의 세계관을 잘 보여준다.

 

그가 이 글에서 비판하는 것은 “현실의 흐름에 뒤쳐진 진보진영의 낡은 통일관”이었다. 이 글에서 마은혁은 “‘모든 통일은 선’이라는 식의 낭만적·감상적 통일운동”을 비판하면서 ”북한사회에 대한 미화와 북한의 통일정책에 대한 무분별한 수용으로는 결코 대중적 지지를 획득할 수 없으며 통일운동을 사회 민주화와 순기능적으로 연결시킬 수 없다”고 단언했다.

 

북한의 지배체제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김일성 부자에 의한 권력세습 문제”를 언급하며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민주주의보다 훨씬 수준이 낮은 봉건적 왕조 체제 시절의 유물이며, 북한사회가 얼마나 뒤떨어진 사회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실례”라고 평가했다.

 

한국과 소련의 수교에 대해선 ‘두 개의 한국’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반대하면서 ‘북-일 수교’나 ‘북-미 관계 개선’에 대해선 “사태의 진전”이라고 평가하는 한국 통일운동 세력의 이중잣대를 두고선 “북한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정면 비판했다.

 

운동세력 내부에서 '통일의 유일한 경로'로 지지받던 ‘연방제’에 대한 그의 관점 역시 주목해야 한다. 마은혁은 연방제를 “통일문제에 있어 힘있는 세력이 자신이 통일세력임을 선전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명분”이라고 봤다. 그러면서 “진보진영은 자신들이 바라는 통일사회의 상이 현재의 북한사회와 전혀 관계가 없음을 (분명히 하고), 북한정권의 통일정책에 대해서도 비판적 안목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렇듯 마은혁은 한국의 진보세력을 괴롭혀온 사회주의와 북한 문제에 대해 철저한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가운데 지극히 상식적이고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정치적 진로를 탐색해 간 진보진영의 이론가였다. 이런 그에게 ‘친북 프레임 씌우기’나 ‘색깔론 공격’은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이른바 ’전향’에 대하여

 

1980년대 학생운동 세력의 상당수가 주체사상이나 급진 사회주의 노선에 기울었던 건 사실이다. 일부는 별다른 ‘통과 제의’ 없이 정치권에 안착했다. 권력의 게임 규칙을 일찍부터 터득한 그들은 시장의 문법에도 신속하게 적응하며 정치·경제·문화자본의 점유 지분을 빠르게 불렸다. 마침내 사회적 주류의 지위마저 공고히 한 그들에게, 젊은 시절 든든한 ‘민주의 기지’라 여겼던 북한은 ‘달래고 구슬려 시장에 편입시켜야 할 특수관계국’이요, 사회주의는 ‘청년기의 투철했던 정의감을 과시하는 이념적 액세서리’일 뿐이다. 과정이 조용하고 점진적이고 자연스러워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을 뿐, 그들의 전향은 오래전에 이미 완성됐다.

 

“저는 법관의 길을 걷게 되면서 대한민국 헌법에서 규정하는 국민주권주의, 자유민주주의, 사회복지국가원리, 법치주의 등의 가치를 체득하였고 25년 가까이 주권자인 국민이 위임한 사법권을 행사하면서 헌법에서 규정하는 가치에 따라 법률을 해석하고 적용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마은혁이 지난해 12월23일 헌법재판관 인사청문회에서 한 말이다. 더이상 무슨 말을 더하고 빼겠는가. 최고 사법기관인 헌법재판소의 재판관이라면 국가관과 사회의식은 꼼꼼히 따져봐야 옳다. 하지만 정치활동을 한 대부분의 시기에 북한과 현존 사회주의 국가에 비판적 관점을 일관되게 견지했던  마은혁에게 ‘왜 김문수처럼 공개 전향을 하지 않느냐’고 몰아붙이는 건 무지에 찬 폭력이다. 마은혁은 시대에 뒤쳐진 몽상가들과도, 세속적인 86세대 정치인들과도 다른 삶을 살았다. 국민의힘은 마은혁이란 헌법재판관을 가질 권리를 국민에게서 빼앗아선 안 된다.

 

덧글. “전철은 사람을 싣고 서울로 오지만/ 빈 전철은 사상을 싣고 인천으로 간다”.  시인 황지우가 쓴 ‘인천으로 가는 젊은 성자들’의 첫줄이다. 1980년대 후반 수배를 당해 공안당국에 쫓기던 동생 황광우를 생각하며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황광우는 당시 노회찬, 주대환 등과 함께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하고 있었다. 마은혁 덕에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인민노련 소속이었다. 그 인민노련에 바쳐진 황지우의 헌사는 이렇게 끝맺는다. "버림받고 더러운 모든 것들이/ 신성하다/ 나는 연락하러 그곳에 간다"

 

‘버림받고 더러운 모든 것들’로부터 한사코 눈 돌리고 살아온 이들이 마은혁의 삶을 폄훼하고 공격한다. 씁쓸함을 넘어 기가 막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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