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이탈리아 발생 이유, 이탈리아에서의 르네상스 문화
14세기부터 시작된 르네상스는 유럽 전역에서 꽃을 피웠지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찬란하게 르네상스를 맞이한 지방은 바로 이탈리아였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이탈리아 반도였을까? 이에는 여러 복합적인 원인들이 있지만 크게 아래 5가지 원인을 꼽을 수 있다.
1. 로마 제국의 유산과 동로마 제국의 지식 전파
2. 봉건제의 부재와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
3. 지중해 중계무역으로 쌓은 막대한 부
4. 교황을 포함한 수많은 경제적 후원자들의 존재
5. 흑사병의 창궐로 인한 세계관 변화
첫째, 이탈리아 반도는 로마 제국의 중심지였고, 그 전통이 그리스도교 세계로 편입된 이후에도 남아 있었다.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로마 유적만 봐도 알 수 있듯 고대 로마의 문화는 여전히 이탈리아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또한 오랫동안 동로마 제국과의 활발한 교류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파괴되었던 고대 로마의 문헌과 기술력을 거의 복원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에 의해 동로마가 멸망했을 때 서방으로 피난한 동로마 예술가 기술자 등 지식인 대부분이 이탈리아로 향했다. 피렌체 공화국의 정치가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가 동로마 제국의 학자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과의 교류를 통해 동로마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망명하는 동로마 그리스 학자들의 보금자리를 제공하며 연구를 도와 학문의 진작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 대표적인 예.
둘째, 중세 유럽을 지배하고 중세인의 삶을 결정짓던 대표적인 체제인 봉건제가 유독 이탈리아에서는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반도가 나폴리와 교황령을 제외한 수많은 도시국가와 소국들로 분열되어 강력한 군주가 나타나지 못했던 것이다. 교황령의 존재도 이탈리아 지역을 안정적으로 가르는 데 영향을 주었다. 한편 유럽 중심년전쟁]](1337~1453), 산간 도서 밀라노 지역을 제외한 유럽본토의 중세 흑사병(1346~1353) 등으로 인해 문화부흥이 주춤한 상태였다.
셋째, 12세기부터 이탈리아의 각 도시들은 무슬림 해적을 소탕하는데 성공을 거두었고 그 후에 지중해를 장악하여 중계무역의 중심지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중계무역 특성상 여러나라의 문화에 대한 접근성이 높기 때문에 많은 문물이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도시의 상인들은 부와 힘을 얻고 교양과 문화적 수준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상인들은 특유의 이해타산적 계산으로 인해 그리스도교 등 종교의 꼬드김, 상업에 방해가 되는 윤리적 규범에도 넘어가지 않았고(심지어는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아군을 패며 한 몫 두둑히 챙기기도 하였다.), 자신들과 비슷한 속성(자신의 재능을 기반으로 성장한 인물)의 직종들인 예술가, 철학자, 인문학자, 수학자들에게 큰 후원을 해주기 시작했다. 덕분에 많은 예술가들이 여유롭게 활동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넷째, 아비뇽 유수(1309~1377)가 끝나고 로마로 돌아온 교황은 교권을 다시 세우고, 황폐화 된 로마를 재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와의 이탈리아 전쟁(1494~)으로 북부 이탈리아가 털리기 시작할 즈음 율리오 2세(1503~)는 교황령 확대를 꾀하며 전쟁에 나선다(...) 막대한 군자금이 필요하므로,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막대한 헌금(면죄부)을 끌어들였으며, 또한 이 돈으로 이탈리아 각지의 유명한 르네상스 기술자들을 로마로 불러들여 천지창조, 아테네 학당 등이 제작되었으며, 더 나아가 성 베드로 대성당(공사기간: 1506~1626) 등을 재건하기에 이른다. 중세의 끝에 논란이 있고, 중세가 끝났는데 교회의 권력이 오히려 더 강해 보이는 이유, 그리고 르네상스가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의 복원을 추구한다면서 역설적으로 가톨릭 분위기가 풍기는 르네상스 작품들이 다수 존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코 디 로마(1527)가 터지면서 다 날려먹었지만(...)
다섯째, 흑사병이 전 유럽을 휩쓸었기 때문이다. 유럽 전체 인구 3분의 1의 목숨을 앗아간 흑사병은 유난히 이탈리아에서 더 잔혹했다. 도시화가 많이 진행되어있었던 이탈리아는 흑사병에 대단히 취약했고 1347년 피렌체는 흑사병으로 인구의 절반을 잃었다. 흑사병이 유행할 때에 사람들은 신에게 기도를 올렸지만 아무 쓸모가 없었다. 일반인은 30% 정도의 사망률을 나타냈지만 정작 신이 보호한다는 사제들은 사망률이 40% 중반이 넘어갈 정도로 훨씬 높았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호해주지 않은 신에게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죽음에 익숙해진 이탈리아인들은 사후의 영성보다는 현세의 삶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농부와 노동자들이 픽픽 쓰러져죽어나가면서 노동자들의 가치는 급상승했다. 봉건 영주의 세력이 약화되고 임금 노동자가 출현하며 귀족이 아닌 새로운 계급이 자본을 축적해나갔다. 초기적인 자본주의가 태동한 것이다. 이 모든 요소들은 결국 하나로 모여 르네상스의 서막을 열어젖히게 된다.
유독 르네상스기 이탈리아에서도 피렌체의 발전은 독보적이었다.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메디치 가문의 존재였다. 오랫동안 은행업으로 재력을 쌓아온 메디치 가문이 예술을 크게 장려하고 사랑했던 덕분에 전 유럽의 예술가들이 피렌체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특히 피렌체의 지배자였던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의 경우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산드로 보티첼리 같은 역사에 길이남을 예술가들을 모두 후원했고 수많은 작품들을 의뢰하며 일감을 몰아줬다. 일부 역사가들은 르네상스가 메디치 가문 등장 이전부터 이미 진행되고 있었던 점, 그리고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등이 모두 피렌체와 가까운 토스카나 태생이었던 점을 강조하며 피렌체가 르네상스의 중심이 된 것은 행운의 일치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역사
배경
1300년대 이탈리아는 이미 남북 간의 빈부 격차가 완연히 드러나던 상태였다. 한때 로마 제국의 중심지였던 라티움과 남부 지방은 북부에 비해서 가난했고 세계의 수도로 불리던 로마는 폐허로 가득한 유적 도시였다. 교황은 프랑스의 압력에 굴복해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옮기는 굴욕을 겪었고 교황령은 제대로 관리되지 못했다. 남쪽의 시칠리아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시칠리아 토후국, 시칠리아 왕국 시대를 거치면서 약 350여 년 동안 전성기를 누렸지만 중세 후기 들어서는 교역 주도권을 북부 상업도시들에게 빼앗기며 날로 쇠퇴하고 있었다.
반면 북부 도시들은 활기가 넘쳤다. 아예 유럽 전체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써 동로마 제국과 아랍 등지와 거래하며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쌓았던 것. 향신료, 염료, 비단 같은 동방의 값비싼 특산물들이 제노바, 피사, 베네치아 같은 도시들을 거쳐 전 유럽으로 팔려나갔다. 특히 항구도시들의 발전이 두드러졌는데, 베네치아는 무려 5,000여 척에 달하는 대함대를 운용하며 동방항로를 틀어쥐었고 제노바 역시 그에는 못미치지만 역시 거대한 해상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내륙 도시들도 번창한건 마찬가지였다. 피렌체나 밀라노 같은 도시국가들은 포 계곡의 비옥한 농경지에서 엄청난 부를 창출했고 프랑스, 독일, 저지대 국가들에게서 양모나 밀, 귀금속 따위를 수입했다. 특히 피렌체는 모직 직물 생산으로 북이탈리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국가로 급부상하기까지 했다.
북이탈리아의 경제 발전은 날로 눈부셨다. 동방과 서방을 잇는 거대한 교역 네트워크의 젖줄을 거머쥐고 얼마 가지 않아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사실상 독립할 정도로 강대해졌다. 복식부기, 합자회사, 금융시스템, 외환 시장, 보험, 정부 부채와 같은 개념들이 속속 등장했다. 피렌체에서 발행한 금화 '플로린'은 국제 공용화폐가 되었고 피렌체는 국제금융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경제 발전으로 인해 상인 계급들이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했는데, 상인들의 부상과 기존 귀족층들의 쇠퇴로 인해 초기적인 자본주의가 시작된다. 상인들은 본인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사치를 과시했고 이는 경제 활성화로 이어졌다. 또한 상인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고리대금, 비기독교인들과의 교역 금지, 군주의 자의적인 재산 몰수처럼 자본주의를 억압하는 법률들이 하나하나 철폐되며 북이탈리아의 경제 성장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다만 1300년대에 소빙기가 찾아오며 유럽 경제는 잠시간 침체로 들어갔다. 기후변화로 인해 농업생산량이 크게 악화되었으며 기근, 인구 감소가 이어졌다. 특히 영프 사이간에 발발한 백년 전쟁은 유럽 전체의 경제를 교란시켜버렸고 1345년 에드워드 3세의 빚 탕감 때문에 피렌체에서 가장 거대한 두 은행 '바르디 은행'과 '페루치 은행'이 붕괴되어 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의 확장으로 동유럽의 경제 교역로가 올스톱 상태로 빠졌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도 흑사병의 창궐이 가장 큰 타격이었다. 흑사병은 인구 밀도가 높던 북이탈리아에 치명적이었고, 피렌체는 50년 동안 25~50%에 가까운 인구 감소를 경험했으며 1378년에는 직물 노동자들이 반란을 일으킬 정도로 사회적 혼란을 겪었다.
르네상스의 시작
흑사병의 창궐은 역설적이게도 르네상스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혼란이 르네상스의 발전에 기여했다.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으면서 노동력의 가치가 크게 뛰었고 생존자들은 죽은 자들의 재산을 물려받아 훨씬 부유해졌다. 노동자들의 임금이 올라갔고 인구 감소로 인해 부가 재분배되었다. 15세기 초 흑사병 사망률이 감소하자 사회는 다시 안정세로 돌아갔다. 사치에 소비할 잉여 재산이 많아지자 경제에 다시 활기가 돌았고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새로운 수요는 장인 계급과 상인 계급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특히 앞서 일어난 바르디 은행과 페루치 은행의 붕괴로 인해 메디치 가문이 그 공백을 틈타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14세기의 침체기 시절에 부유층들이 공격적인 투자를 멈추고 대신 예술과 문화에 더 투자를 하면서 르네상스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있다. 이 시기가 바로 단테 알리기에리와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의 활동기이기도 하며, 르네상스의 첫 물결이 이탈리아를 적신 시기라고 평가받는다.
앞서 언급했듯이 라틴 문학과 철학, 서적 등은 실전되지 않은 채 이미 서유럽 세계에서도 꾸준히 연구되고 읽히던 대상이었다. 서유럽에서 잊혀진 것은 바로 고대 그리스 시절의 문학과 사서들이었다. 그리스의 과학, 수학, 철학은 잊혀지지 않았으나 호메로스, 데모스테네스, 투키디데스 같은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들은, 이슬람 세계를 통해 이베리아 반도에서 번역된 것을 제외하면 동로마 제국의 학자들 위주로 읽히고 있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며 수많은 동로마 학자들이 이 서적들을 들쳐메고 서유럽으로 유입됐다. 수백년 간 잊혔던 옛 고대 그리스 작가들의 작품이 다시 서유럽에서 부활한 것이다.
밀라노 공국과 피렌체 공화국 간의 잔인한 전쟁도 이탈리아 르네상스 발전에 한 몫 했다. 북이탈리아의 도시 밀라노는 14세기 후반 들어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가 이끄는 비스콘티 가문의 지배에 놓인다. 잔인하고 유능했던 지도자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는 북이탈리아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그에게 눈엣가시처럼 보였던 게 바로 또다른 강국 피렌체였다. 피렌체는 연합군을 구성, 밀라노와 전쟁을 벌였는데 1402년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가 급사하기 직전까지 치열하게 전쟁을 치렀다. 피렌체 공화국은 전제군주적인 밀라노와 싸우면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공화주의적인 이상을 내세웠는데, 이러한 공화주의적 이데올로기는 르네상스의 확산에 맞물리며 전 유럽에 큰 영향을 미쳤다.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에는 여러 도시국가들이 난립하는 구조였다. 수 백여개의 도시가 있었으나 가장 강한 건 밀라노, 피렌체, 피사, 시에나, 페라라, 만토바, 베로나, 베네치아였다. 중세 후기 북이탈리아는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간의 정치 싸움에 휘말려들었는데, 각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교황파 세력 '구엘프', 황제파 세력 '기벨린' 둘 중 하나에 소속되어 서로 치고받고 싸웠다. 도시국가 내부적으로도 파가 갈려서 구엘프와 기벨린은 정말 서로 죽일 듯이 싸워댔다. 무력의 필요성이 부각되며 도시들은 서로 앞다퉈 용병을 고용하기 시작했고, 15세기 들어서는 강한 도시들이 인근 도시들을 무릎꿇리며 어느 정도 교통 정리가 된다. 피렌체는 1406년 피사를 정복했고, 베네치아는 파도바와 베로나를 점령했으며 밀라노는 파비아와 파르마 등지를 복속시켜 세력화했다.
르네상스 시기에는 이 도시국가들이 미친 듯이 싸워댔다. 이탈리아인 대장이 이끄는 독일계, 스위스계 용병 무리인 '콘도티에리(condottieri)'가 돈을 받고 대신 전투를 치렀다. 해상에서는 제노바와 피사, 베네치아 3국이 경쟁을 벌였다. 제노바는 피사의 세력을 줄이는 데에 성공했지만 15세기 세력이 쇠퇴하며 베네치아에게 해상 패권을 넘겨줬다. 육상에서는 피렌체와 밀라노, 베네치아 3국이 패권을 나눠가졌다. 1454년에는 '로디 조약'으로 40년 동안 3국 사이의 평화를 지킬 수 있었다. 베네치아가 해상 패권을 꽉 휘어잡고 있었던 덕분에, 이같은 평화를 기반으로 이탈리아인들은 저멀리 동남아시아까지 원정을 나가며 세계로 뻗어나갔다.
메디치 가문
130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피렌체의 지배 가문은 '알비치 가문'이었다. 그러나 은행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메디치 가문이 힘을 키우더니 알비치 가문의 아성에 도전하기 시작한다. 메디치 가문의 창시자라 불리는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는 교황청과 밀접한 관계를 바탕으로 세를 불려나갔다. 그 다음에는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가 대를 이어 메디치 은행을 당대 유럽 최대 규모 은행으로 발돋움시켰다. 1433년 알비치 가문이 수작을 부려 코시모를 피렌체에서 쫓아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바로 다음 해에 친 메디치 성향의 시뇨리아가 당선되며 즉각 귀환했다. 알비치 가문과의 경쟁에서 최종 승리한 메디치는 이후 약 300여 년 동안 피렌체의 지배 가문이 되었고 사실상 피렌체를 상징하는 가문으로 떠올랐다.
당시 피렌체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저지대, 이탈리아를 잇는 거대한 상품 무역로를 장악한 상태였다. 워낙 중요한 도시였기에 1439년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8세가 직접 피렌체를 찾아 피렌체 공의회에 참석했을 정도. 동로마가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망하자 수많은 학자들이 피렌체로 몰려왔고 메디치 가문이 세운 아카데미아는 신플라톤주의 사상 연구의 산실이 되었다.
피렌체는 1532년까지 공화국으로 남아있었다. 이 공화정 시기의 피렌체는 명실상부한 르네상스의 중심이자 대표였는데 이 1490년과 1520년 정도 사이의 몇 십년에 달하는 짧은 기간을 '하이 르네상스(High Renaissance)'라고 부른다.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와 로렌초 디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 이 두 형제는 예술에 막대한 투자를 쏟아부으며 르네상스 발전에 전념했고 생애 별다른 공직을 맡지 않았음에도 대중들 사이에서의 인기를 바탕으로 사실상 피렌체의 군주로 군림했다. 특히 코시모의 능력이 대단히 뛰어났는데, 1454년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와 로디 조약을 맺어 밀라노와의 길고긴 전쟁을 끝내 북이탈리아에 일시적인 평화를 가져오는 한편 예술과 문화 진흥에 힘써 피렌체를 유럽 최고의 문화 강국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코시모가 죽자 유약한 피에로 디 코시모 데 메디치가 그의 뒤를 이었으나 5년 만에 사망했다. 그가 죽자 피렌체는 코시모의 손자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가 장악했다. 로렌초는 '대인 로렌초(Lorenzo Magnifico)'라고 불릴 정도로 코시모의 뒤를 잇는 역대급 위인이었다. 가문에서 어릴 적부터 교양 교육을 받아 예술에 대한 인식이 대단히 뛰어났고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후원자들 중 하나였다. 그는 피렌체의 100인 위원회를 70명으로 줄여 메디치 가문의 통치를 공고히 하기도 했다. 다만 사업상에서는 코시모만큼 성공적이지 못해서, 그의 임기 하의 메디치 은행은 서서히 기울어갔다. 밀라노와의 관계는 여전히 우호적이었지만 반대로 교황과의 관계는 악화하여 교황이 그를 죽이려 시도한 적까지 있다. 암살 시도는 실패했지만 대신 그의 남동생 지울리아노가 죽었고, 로렌초는 이를 빌미로 교황과의 전쟁을 일으켜 메디치의 피렌체 장악력을 강화했다.
전이탈리아로의 확산
피렌체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르네상스는 점차 시에나, 루카 등 인근 토스카나 도시들로 퍼져나갔다. 토스카나 문화는 얼마가지 않아 곧 북이탈리아 전체의 지배 문화가 되었고, 특히 문학 분야에서는 압도적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토스카나 방언이 1타 언어였다. 또다른 강국 밀라노 역시 1447년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가 권력을 잡은 이후로 빠르게 변모했다. 스포르차 가문도 메디치를 따라 예술에 막대한 투자를 퍼부었고 르네상스 최고의 예술가들 중 하나인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를 끌어들이는 등 피렌체 못지않은 북이탈리아의 문화 강국으로 성장했다.
아드리아 해를 장악하고 북이탈리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던 베네치아 역시 르네상스의 물결에 빠르게 동참했다. 특히 베네치아에서 발흥한 르네상스는 아예 '베네치아 르네상스'라고 따로 부를 정도로 번영을 누렸는데, 베네치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는 인근 페라라, 만토바, 우르비노 등의 도시들에도 전파됐다. 북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남부 이탈리아도 르네상스에 휩쓸렸다. 1443년 아라곤의 알폰소 5세가 나폴리를 정복하고 남부 일대를 안정화시켰는데, 이 알폰소 5세 역시 당대 유행하던 르네상스 기풍을 받아들여 프란체스코 라우라나, 안토넬로 데 메시나, 시인 야코포 산 나자로, 인문주의 학자 안젤로 폴리치아노 등을 후원하는 등 나폴리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한때 세계의 수도라는 명성을 자랑하던 로마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1417년에 이미 교황이 아비뇽에서 다시 로마로 돌아왔지만, 르네상스 초기까지만 해도 로마는 여전히 폐허 유적 도시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1447년 새롭게 교황에 즉위한 니콜라오 5세가 로마를 새롭게 단장시키기 위한 대규모 프로젝트에 착수하며 로마 르네상스의 서막이 열리게 된다. 인문주의 학자 출신 실비우스 피콜로미니는 1458년 비오 2세로 즉위하기까지 했다. 교황들은 메디치 가문과 보르지아 가문 등 부유한 가문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면서 자연스레 르네상스에 큰 관심을 가졌다. 식스토 4세는 니콜라오 5세의 유지를 이어 시스티나 경당 건설을 명령했고 바티칸 도서관 건립 등 로마 전체를 아름다운 르네상스풍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식스토 4세의 뒤를 이은 알렉산데르 6세는 하드리아누스 영묘를 산탄젤로 성으로 요새화했다.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을 시켜 교황 사도궁 '보르지아 아파트'를 화려하게 장식했으며 수많은 교회와 성당들을 개축했다. 비오 3세의 짧은 통치 이후 즉위한 율리오 2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초석을 놓았고, 시스티나 경당에 그려진 그 유명한 '천지창조' 등 천장화 역시 이 율리오 2세 시대에 그려졌다. 전사 교황이라 불리던 율리오 2세는 프랑스의 입김을 걷어내고 교황령을 재건했는데 이 국력을 토대로 막대한 예술 투자를 했던 것이다. 그의 뒤를 이은 레오 10세 역시 예술광이었다. 르네상스 시기 최고로 많은 후원을 퍼부은 교황으로 라파엘로를 대폭 밀어주는 등 그림을 매우 장려했다. 다만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을 위해 율리오 2세가 모아둔 돈을 죄다 탕진하다가 면죄부를 팔아치워 교회의 권위를 스스로 깎아치는 등 훗날 종교개혁의 빌미를 주기도 한다.
르네상스가 전 이탈리아로 확산되면서 르네상스의 성격도 조금씩 변해갔다. 1400년대 후반 들어서는 지배 계급과 귀족들이 르네상스의 이상을 완전히 독점하기 이르렀다. 초기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무명에다가 돈도 없는 가난한 자들이 많았지만, 후기로 갈수록 귀족들의 금전적 지원에 힘입어 새로운 기득권층이 되어버렸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점점 취향이 귀족적, 세속적으로 변해갔으며 르네상스 예술은 갈수록 사회 권력층의 입김이 강해졌다.
또한 문화 운동으로서의 르네상스는 이탈리아 전체 인구의 극소수에게만 영향을 끼쳤다.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가장 도시화된 지역이었으나 인구의 4분의 3은 여전히 시골에 살며 농업에 종사했다. 이 농부들의 삶은 르네상스 시대나 중세 시대나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봉건제가 발달하지 못한 북이탈리아의 경우 대부분이 자영농이거나 소작농이었지만, 이들은 르네상스가 오든말든 딱히 신경 쓰지 않았으며 실제로도 일상 생활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다만 도시는 완전히 상황이 달랐다. 도시는 점차 귀족들만큼이나 배타적인 상인 계급들이 장악해나갔다. 이 상인들은 무역으로 얻은 막대한 부를 가지고 도시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으며, 이 부를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데에 아낌없이 뿌렸다. 그 아래에는 상인들의 비호를 받는 예술가와 장인들이 있어 높은 대접을 받았다. 장인이 별로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던 다른 유럽 지방들에 비하면 확연히 차이가 있는 부분. 이 상인, 예술가, 장인 트리오가 함께 르네상스의 발전을 이끌어나갔던 것이다. 다만 도시의 비식자층인 하류층들, 빈곤층은 르네상스에 별 관심이 없었다. 이들 역시 농민들처럼 르네상스의 영향을 딱히 받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당시 북이탈리아의 빈부격차는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는데, 압도적인 부를 홀로 독차지한 몇몇의 막대한 후원 덕분에 오히려 르네상스가 발전했다는 가설도 존재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쇠락
분명 유럽 대륙의 정세가 혼란하고 지중해 무역이 성행하던 15세기까지는 나름대로의 군사력과 재력, 정보망을 틀어쥔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여러모로 유리한 입지에 있었다. 도시국가의 군주들이 무식한 힘싸움보다는 문화와 부의 과시를 통해 자존심 경쟁을 벌인 것도 한몫했다.
15세기 말까지는 백년전쟁 등으로 대륙의 사정이 혼잡해서 외침의 걱정은 없었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백년전쟁을 마무리한 후 이탈리아에 군침을 흘리기 시작하고, 여기에 신성 로마 제국과 스페인을 비롯 거의 전 유럽을 한 손에 틀어쥔 합스부르크의 강대한 황제 카를 5세의 출현으로 이탈리아는 강대한 영토 국가들의 영향하에 놓이기 시작한다. 이제 프랑스나 스페인 등의 영토 국가는 이탈리아 개별 도시 국가로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군사력이 강해진 것이다.
16세기가 시작되면서 이탈리아는 유럽 강대국들 사이에서 땅따먹기의 현장으로 변하고 특히 1525년 이탈리아를 둘러싼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가 카를 5세에게 박살나서 이탈리아는 사실상 합스부르크의 지배하에 놓이고 만다. 이에 당황한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어떻게든 이탈리아 내에서의 자주권을 확보하고자 코냑 동맹을 결성해 발버둥쳤으나, 이것을 명분으로 카를 5세는 교황의 비열함을 비난하면서 가톨릭 군대로 하여금 교황령을 털어버리는 진풍경을 연출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사코 디 로마. 이 전쟁에서 시원하게 털린 교황이 6개월이나 유폐에 가까운 피난 생활을 하는 동안 로마는 쑥대밭이 되었고 로마에 세워진 르네상스풍 건물은 개박살나서 현재 로마 시내에서는 르네상스풍 건물을 찾아보기 힘든 지경이다.
사코 디 로마는 사실상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종결지었다고 평가된다. 이후 이탈리아의 부는 고갈되고 문화는 생명력을 상실하는 한편 대부분 지역이 외세의 지배에 놓이고 만다. 이 시점을 흔히 '르네상스가 알프스 이북으로 건너간 분기점'이라 칭한다. 이후 결국 교황을 포함한 모든 이탈리아 도시국가가 카를 5세 밑에 굴종하는 처지로 전락했으며, 이탈리아는 지난 세기의 영화를 대륙에 내준 채 3류 세력으로 전락하고 만다.
반면 유럽 각국으로 이식된 르네상스는 그 나름대로 각국의 토양에 문화가 융성하게 꽃피는 기폭제가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뛰어난 철학자, 인문학자, 예술가, 건축가들이 출현할 수 있었다. 특히 15세기 이탈리아 못잖게 상공업과 개방성을 중시했던 네덜란드의 경우 자체적으로 회화 예술이 붐을 일으켰다. 당시에 확산된 금속 활자 인쇄술 덕분에 15세기말부터 유럽 널리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전파되지만, 유럽 전체가 균일하게 르네상스를 경험하지 않았다.
또한 종교에 대한 회의적 시각은 종교개혁에도 영향을 주었고, 군주론이라든가 인문주의에서 파생된 사회계약설은 훗날 유럽 각국의 절대왕정 체제 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적어도 계몽주의의 새로운 바람이 도래하기 전까지는 각국 귀족과 군주들의 후원 하에서 다방면의 발전이 계속될 수 있었다.
사실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활발하게 진행이 되었음에도 이탈리아 내부에서 전문적으로 르네상스를 연구한 학자들은 많지 않았다. 이는 이탈리아 통일전쟁 이전까지 이탈리아가 여러 군소 도시국가로 나누어있었던 탓이 크다. 오히려 이탈리아 외부 국가들에서 연구가 활발했는데 19세기까지 이탈리아는 외지인들에게 경이의 땅이자 관심의 대상이었고 당연히 그 땅에 사는 사람들보다 외지인들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위에 언급한 조르조 바사리 등 이탈리아인의 시각에서 르네상스를 연구한 학자도 존재한다.
르네상스를 시간적, 지역적으로 명확히 구분할 수는 없다. 여러 곳에서 점진적으로 시작된 것이며 마찬가지로 중세가 언제 어디서 끝나는지도 얘기할 수 없다. 보통 시작된 장소로는 이탈리아 중부 피렌체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직접적으로 전해진 로마제국의 제도를 유지하며, 서유럽 지역보다 훨씬 풍부한 문화와 문명을 지녔고, 헬라어를 사용하며 고대 그리스 문화를 계승 발전 시켰던 비잔틴제국, 동로마 제국의 붕괴가 있다. 이로 인한 일련의 사건들로 전쟁을 피하기 위해 서유럽으로 왔던 비잔틴 출신 학자와 기술자의 유입과 그들이 지니고 온 책자의 번역, 비잔틴 지역에서 탈취한 문헌과 책들을 유통시킨 유럽과 중동지역 출신의 대규모 도서 거래상의 활동들이 큰 영향을 주었다.
이탈리아는 지리적으로 이슬람 세계, 비잔틴 세계와의 접촉을 유지하여 서유럽과의 가교 역할을 해왔다. 11세기 이후 상업의 발달과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도시의 활성화로 도시는 점차 도시국가 형태의 자치도시가 되었다. 13세기 말의 경제성장기에는 사회계층의 변화가 심해져서 특유의 시민문화가 형성되었는데 도시국가는 그 특성상 고대의 도시국가와 유사한 점도 있어 로마법이나 정치제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조건들은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발생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가장 먼저 일어난 이유
독일계 스위스 역사학자인 부르크하르트는 그의 탁월한 저서인 [이탈리아에서의 르네상스 문화]를 통하여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가장 먼저 일어나게 된 이유를 다섯 가지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다.
① 문화적 관점 : 이탈리아 반도에 고대 로마의 유산이 고스란히 남아있으며 고대 로마의 영광을 부활 재생하려는 국민의식이 만연해 있었다.
② 정치․경제적인 관점 : 이탈리아 반도에는 다른 유럽에 비해 도시국가의 체제가 발달되어 있었고 도시를 움직이는 계층은 상공업과 무역업으로 큰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③ 지리적인 관점 : 이탈리아는 대륙과 해양을 잇는 반도국가이며 고대 로마 이래 동서 문물이 만나는 지역이어서 문화다원주의가 숨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④ 이탈리아인의 천성에 대한 관점 : 이탈리아인들은 다른 유럽인에 비해 합리적이고 현세적이며 생활의 전부를 예술화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심미안을 가지고 있었다.
⑤ 역사적인 관점 : 중세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던 동로마 제국이 쇠락과 함께(1453년 동로마 제국의 멸망) 많은 석학들과 예술가들이 난세를 피하여 고대 그리스-로마의 서적을 가지고 이탈리아로 이주하게 되고 이로 인해 이탈리아 학자들 사이에 고전연구의 열기가 일어나게 된다.
부르크하르트가 보는 르네상스와 그 문제점
예술품으로서의 이탈리아 도시국가
14-16세기의 이탈리아 반도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북부 지역은 많은 도시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중부는 로마교황이 다스리는 교황령이며, 남부는 나폴리 왕국의 영토였다.
북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14세기에는 약 30개 정도의 도시국가들이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이 도시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밀라노, 피렌체, 베네치아, 제노바 같은 것들로 유럽의 다른 국가들과 거의 맞먹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고 있었다. 지중해 무역과 모직물 산업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등 봉건국가의 왕들은 권력을 영주들과 나누어 갖고 있었으므로 큰 영토에도 불구하고 그에 걸맞는 군사력을 동원할 수 없었다.
부르크하르트는 이 시기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유럽 최초의 근대국가라고 주장한다. 그 통치자들이 중세법이나 관습, 기독교 교리에 의지하지 않고 냉정한 정치적 타산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15세기에 들어와 이탈리아의 정세가 혼란스러워지며 수많은 전제군주들이 몰락하고 용병대장들이 권력을 찬탈하는 일도 왕왕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주들이 더욱 긴장하고 신중하며 계산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부르크하르트는 이런 근대국가를 만드는 일에 가장 앞선 도시가 베네치아와 피렌체이며 특히 피렌체가 세계 최초의 근대국가라고 믿었다. 그곳에서 새로운 정치적 원리와 이론들이 생겨나고 그것들이 실험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는 날카로운 현실정치를 주장한 마키아벨리 같은 인물이 중요하다. 그가 자신의 <군주론>에서 군주들에게 사자와 같은 용맹함과 여우의 교활함을 주문하며 정치에서 도덕적인 고려를 제거하도록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가 르네상스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을 최초의 근대국가로 규정하고 그것을 예술품으로까지 치켜올렸으나 근대국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 단지 도덕에서 벗어나 냉정하고 계산적으로 정치를 했으니 근대국가라는 것인데 그런 식의 막연한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수십 개의 도시국가들이 서로 경쟁했으므로 권모술수나 계산이 더 따를 수밖에는 없었으나 정치를 하는 데 종교적, 도덕적 명분들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었다. 또 중세시대에 유럽 다른 지역의 왕이나 봉건 영주들이 반드시 종교나 도덕적 가르침에 따라 행동한 것도 아니다. 종교적, 도덕적인 명분과 정치적 실용주의는 어디에나 섞여 있었다. 따라서 이탈리아를 특별한 경우로 볼 수는 없다.
또 근대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제도 면에서 중앙집권화, 행정의 합리화 등이 따라야 한다. 이념적으로도 국가주권의 개념이 분명하게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당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근대국가라고 하기는 어렵다.
근대적 개인의 탄생
부르크하르트는 또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적 조건이 근대적 개인주의가 나타날 완전한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근대성을 중세의 지적, 문화적 후진성과 대비시키고 있다.
그는 중세 사람들은 신앙심, 어린아이 같은 선입견, 망상에 싸여 있었고 자신을 오직 종족, 민족, 정파, 가족 등 집단 속의 존재로만 생각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 이러한 한계가 가장 먼저 사라지고 사람들이 개인으로서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탈리아에서는 13세기 말부터 인간의 개성이 넘쳐나기 시작하며 개인주의를 향한 길이 열리게 되는데 그것은 이탈리아가 중세의 억압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이런 개인이 강력하고 다방면의 재능을 가진 본성과 어울려 최고의 개성을 만들어낸 것이 바로 부르크하르트가 말하는 '만능인(l'uomo universale)'이다.
단테 같은 시인, 알베르티 같은 건축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화가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이렇게 개인주의 위에 서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인들은 코스모폴리탄적이고 자유로운 정신을 가졌고 개인의 업적에 따라 명성을 얻으려고 하는 근대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부르크하르트는 '개인'이나 '개인주의'에 대해 분명히 정의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주장하는 개인성의 개념이 반드시 스스로가 개인이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대신 인간의 개인성은 완전성, 명예의 달성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기의식이나 자기반성 없이 개인성이 나타나기는 어렵다. 실제로 당시 이탈리아 사회에서 사람들이 스스로를 개인으로서 의식했다는 증거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당시 사람들은 계속 집단 속에서 정체성을 느꼈다. 또 부르크하르트가 일찌감치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길드나 가문, 교회 등은 14, 15세기에도 계속 중요한 역할을 했다. 따라서 르네상스 시대에 '근대적 자아'가 나타났다는 주장은 사실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게다가 이름을 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자아의식과는 별 관계가 없다. 이름을 내거나 자기를 과시하고 싶어 하는 태도는 어느 시대 인간들에게서나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가 개인성을 말하며 그 주된 증거로 내세우는 것은 그들의 천재적인 능력에 의해 크게 유명해진 위의 몇몇 예술가들의 예이다. 특별한 소수의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개인성을 일반화하고 있는 것이다.
부르크하르트도 자신의 주장에 근거가 별로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에게는 분명해 보이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한 발을 빼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근거도 부족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슨 심보에서일까.
고대의 부활과 인문주의
우리는 보통 르네상스에 있어 고전고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고대 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르네상스 문화가 새롭게 꽃 필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부르크하르트가 반드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고대의 부활과 고전세계의 재발견이 르네상스의 본질적인 요소는 아니며 그리스 · 로마 문화는 이탈리아인들의 천재성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르네상스는 단편적인 모방이나 편집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르네상스인의 창조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도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 사실 르네상스 문화에서는 그리스 · 로마 시대의 고전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인문주의가 핵심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문법, 수사학, 시, 역사, 도덕철학의 5개 주제를 가르치고 연구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당시에 이런 주제를 연구하고 가르친 이탈리아의 학자, 시인, 성직자, 법률가, 관리, 공증인 들을 인문주의자(humanist)로 불렀다. 르네상스 시대의 거의 모든 주요 인물들은 이런 인문주의자들이거나 그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동안 인문주의는 상당히 잘못 이해되어 왔다. 그것을 신이 아니라 인간적인 면을 강조하고 종교가 아니라 세속성을 강조하는 '철학'으로 보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인문주의는 결코 세속적인 경향을 가진 것은 아니다.
14세기 시인인 페트라르카를 포함해 지도적인 인문주의자들은 거의 모두 종교적인 가치에 의해 행동했다. 또 르네상스 시대에 인문주의는 실용적인 교과목이었다. 결코 철학으로 생각되지도 않았고 심각한 학문적인 주제로도 생각되지 않았다.
이 시기에 인문주의가 등장하고 호응을 받은 것은 당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체제가 로마 공화정과 비슷한 면을 갖고 있었고 따라서 지배계급의 자식이나 형제들을 위한 교육에 그리스나 로마의 많은 저술들이 쓸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대의 문헌들이 다시 각광을 받아 수집, 번역되고 연구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고대 문물에 대한 전반적인 관심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대학에서 가르친 것은 주로 중세 기독교 철학인 스콜라 철학이다. 그리고 그런 경향은 17세기까지도 유지되었다. 인문주의가 중세 철학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부르크하르트나 그 제자들처럼 인문주의를 철학으로 보고 철학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해의 산물이다. 인문주의는 당시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계관이나 사회적 이상을 제공하지는 못했다.
자연의 과학적 인식
부르크하르트는 또한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인들이 세계와 인간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역시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깃들어 있는 타고난 재능 덕이었다. 제노바 사람들은 이미 1291년에 대서양의 카나리아 군도를 발견했고 또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으려는 시도를 했다.
그렇게 된 것은 그들이 고대 문헌을 잘 알기 전에도 이 세상의 사물을 객관적인 눈으로 보고 다룰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부르크하르트는 고대의 지리학자들이 길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들이 그렇게 빨리 완전성에 도달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했다.
이것은 지리학뿐 아니라 자연과학 전체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제 책과 전통의 억압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자연의 탐구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는 당시의 세계관에서 벗어난 이런 사이비 과학들에 대해 대체로 관용으로 대했다는 것이다.
또 그는 이탈리아인들이 자연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낀 첫 번째 근대인들이라고 믿었다. '신곡'을 쓴 단테가 첫 인물이고 서정시인인 페트라르카, '데카메론'을 쓴 보카치오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발견도 마찬가지이다. 이 시기에 개인과 인간 본성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방식이 고대 문헌의 영향을 통해 새롭게 정의되고 채색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르크하르트는 과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인물이었으므로 이러한 그의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인들은 중세시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물활론적(物活論的)으로 바라보았다. 살아 있는 생물체로 본 것이다. 근대인처럼 기계론적으로 본 것이 아니다. 이는 다빈치나 단테, 알베르티 모두 마찬가지이다.
또 이들은 자연도 중립적으로 보지 않고 가치 판단을 집어넣어 생각했으며, 따뜻한 것이 추운 것보다 좋고 나무가 돌보다 좋으며 변화하지 않는 것이 변화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르네상스 말기에 들어서서 수학적 방법에 의해 자연현상의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는 자연현상 안에 숨어 있는 수학적 구조를 밝히려는 의도가 아니라 간결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인문주의적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다.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도 17세기 이후의 수학적 정신이 아니라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전통 속에 있으며 당시 유행하던 점성술을 믿은 인물이다. 그는 당시 사람들이 받아들이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 체계가 천체의 움직임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믿어 아리스타르쿠스의 태양중심설을 받아들이려 했으나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다. 다만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가 후대의 천문학자들에 의해 너무 복잡하게 변형된 것을 단순화, 순수화하려 한 것뿐이다.
그가 1543년에 쓴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라는 책이 당시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여진 것은 이렇게 그의 우주론이 중세적 우주론과 큰 차이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천동설이나 그의 지동설이나 결함이 많아 천체의 움직임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가 교회로부터 박해를 받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태도는 17세기에 실험과 관찰을 보다 중시한 갈릴레이나, 자연세계를 수학적 원리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본격적으로 한 데카르트와 뉴턴에 오면 달라진다. 이렇게 르네상스 과학은 17세기의 과학과 직접 연결되지는 않는다.
계급의 해체와 종교적 요소의 쇠퇴
부르크하르트는 신분의 해체가 분명히 그 시대의 일반적인 특징이라 믿었는데 그것은 특히 12세기 이후 귀족과 시민이 도시의 성벽 안에서 함께 살며 그렇게 되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주교직이나 수도원장직, 수녀원장직들이 본질적으로 출신에 따라 주어지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또 그는 최고 수준의 사교생활에서는 신분의 구분이 모두 무시되었고 교육수준과 교양이 중요했다고 말한다. 어느 신분이나 가문에서 출생했느냐 하는 것은 그가 상속재산을 받아 노닥거릴 여유를 갖는 것 외에는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또 여성은 남성과 대등한 지위에 있었고 교육을 받은 상층계급의 여성은 남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개성을 발전시켰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이 시기 이탈리아의 사회적 지위가 신분과 가문이라기보다 교육과 능력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 근대적인 평등한 사회였다는 것이다. 그가 신분 대신 계급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그런 이유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주장도 사실과는 맞지 않다. 당시의 이탈리아가 이웃 국가들보다 발전된 경제를 가졌고 더 복잡한 사회였던 것은 사실이나 아직도 신분제도에 크게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차별도 여전했다. 여성은 가부장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이것은 부르크하르트가 주장하는 여성 인문주의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군주나 귀족 가문의 교육받은 일부 여성들도 결혼을 하면 그것으로 글 쓰는 생활을 접어야 했다. 그러니 여성이 남성과 같이 개성을 발전시킬 수 있었고 남녀가 평등했다는 말은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다.
이런 면을 아는 데는 개인의 일기나 세금장부, 여러 기관들의 사료가 풍부하게 남아있는 피렌체가 도움이 된다. 그런데 실제 연구에 의하면 르네상스 시기의 피렌체는 별로 진보적인 변화를 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경제의 발전이나 자선 단체 같은 데에서 약간의 근대적인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옛날 모습이 대체로 유지되었다. 대가족제는 일반적이었고, 귀족들과 평민의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피호관계라는 독특한 사회제도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또 피렌체인의 가치관이 더 세속화된 것도 아니고 더 합리화되지도 않았다. 따라서 15세기 피렌체 시를 근대화나 진보라는 단순한 논리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와서 이탈리아에서 종교적 요소가 약화되고 세속성이 강화되었다고 주장한다. 르네상스인들이 고대를 알게 된 이후 신성한 기독교적 이상을 위대한 역사를 숭배하는 것으로 대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교회가 영적,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사람들을 비 신앙과 절망의 품으로 내몰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시대의 이탈리아인들이 점성술, 마법 같은 미신적인 행위에서 구원을 얻으려 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인문주의자들이 고대의 비기독교적 문화에 접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비종교적인 인물들은 아니었다. 일반인들의 태도도 마찬가지이다. 종교개혁 이전 이탈리아의 교회가 많이 부패하고 타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부르크하르트가 주장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상태에 있었다. 그의 이런 반종교적 태도는 자신이 무신론자였던 것과 함께 19세기 후반 유럽의 일반적인 탈 기독교적 풍조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