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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큰롤, Rock'n Roll, 척 베리, 빌 헤일리, 리틀 리처드, 엘비스 프레슬리, 쟈니 캐쉬, 칼 퍼킨스, 제리 리 루이스, 로이 오비슨, 버디 홀리, 진 빈센트, 에디 코크런, 리치 발렌스, 빅 바퍼, 비틀즈, 롤링 스톤스, 디온

Jobs 9 2025. 3. 24.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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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큰롤

Rock'n Roll

 

기원

장르 R&B, 블루스, 재즈, 컨트리, 부기우기, 가스펠

지역 미국

등장 시기

1940년대 후반

시대

1940년대 후반 - 현재

전성기(1차) 1955년 - 1958년

전성기(2차) 1960년대 중반 (브리티시 인베이전)

사용 악기

보컬, 일렉트릭 기타, 베이스 기타, 드럼, 피아노, 색소폰

파생 장르

록 음악, 팝 음악

대표 음악가

척 베리, 빌 헤일리, 리틀 리처드, 엘비스 프레슬리, 쟈니 캐쉬, 칼 퍼킨스, 제리 리 루이스, 로이 오비슨, 버디 홀리, 진 빈센트, 에디 코크런, 리치 발렌스, 빅 바퍼, 비틀즈, 롤링 스톤스, 디온 등

 

 

Rock and roll | Rock & roll | Rock 'n' roll | R&R

 

1950년대 미국 남부에서 시작된 음악 장르이다. 이것이 "록 음악"으로 발전해 지금까지 이른다.

 

로큰롤은 블루스, 재즈를 바탕으로 하여, 컨트리 뮤직의 느낌이 혼합된 형태로 형성된 것으로써,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미국에서 크게 유행했다.

 

로큰롤이란 단어는 "rocking and rolling"(배가 흔들리다)는 오래된 관용구에서 유래한 것이며, 음악에 맞추어 추는 춤이 흔들리는 배처럼 매우 격렬했기에 나온 표현이다. 여기서 Rock은 음악 특유의 강렬한 테크닉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쓰이며, Roll은 흑인 음악 특유의 그루브와 소울을 의미한다. "로큰롤(Rock and roll)"이라는 말은 현재까지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뜻이 있는데, 그 쓰임은 비슷하다. 아메리칸 헤리티지 사전(American Heritage Dictionary)과 메리엄 웹스터 사전(Merriam-Webster Dictionary) 모두 로큰롤을 "록 음악"의 동의어로 정의하고 있으나 올워드닷컴(Allwords.com)은 그 중 특히 1950년대의 록음악을 가리키고 있다. 워낙 광범위하여 록 음악계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로큰롤의 토대는 1920년대의 블루스, 재즈 장르, 그리고 1930년대 컨트리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직접적인 뿌리는 리듬 앤 블루스라고 본다.리듬 앤 블루스까지는 어디까지나 흑인 뮤지션들 위주의 장르였고, 아직까지는 백인 뮤지션들의 확고한 주류 음악이라고 평가받지는 못했다.

 

로커빌리는 초기의 로큰롤 양식인데, 1940년대 후반~1950년대 초반의 초기 로큰롤을 살펴보면 주로 피아노나 색소폰이 리드악기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기타를 추가하거나 리드악기를 기타로 대체하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 백비트가 두드러지는 부기우기 리듬을 기본으로 하며, 후기에는 스네어드럼이 거의 빠짐없이 포함되었다. 클래식 로큰롤에서는 일반적으로 두 대의 일렉트릭 기타(리드 기타와 리듬 기타), 더블 베이스, (1950년대 중반 이후)베이스 기타, 드럼을 사용한다.

 

1950년대에 로큰롤은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전세계를 사로잡은 로큰롤의 엄청난 인기는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끼쳤다. 프라이멀 스크림의 멤버 바비 길레스피(Bobby Gillespie)는 "척 베리가 <Hail, hail, rock and roll, deliver me from the days of old>라는 가사를 들고 나왔는데, 정말 제목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척 베리는 로큰롤을 통해 범세계적인 영혼 해방의 물꼬를 텄다."라고 회고하였다.

 

로큰롤은 단순한 음악양식을 넘어 영화나 텔레비전 등을 통해 라이프 스타일과 패션, 사고방식, 언어 등에도 영향을 주었다. 로큰롤은 다양한 하위 장르를 만들어냈으나 초기의 백비트와 같은 특징을 가지지는 않는다. 현재는 이 하위 장르들을 통칭 "록 음악"이라 부른다.

 

 

 

간략한 역사(1950년대 로큰롤)

 

발단

1940년대 후반, 전쟁의 상처가 아물어 가기 시작하고 대중음악은 여전히 재즈와 가벼운 스탠다드팝 위주로 점령당한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젊은 세대들은 평화가 찾아오고 점점 사회가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 하에 풍요로운 시대를 누리게 된다. 전시 체제가 청산되고 미국은 발전된 자본주의 시대로 들어서면서 청년들의 급여도 향상되었고 이전시대와는 다른 금전적 풍요를 누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젊은이들은 자신들만의 문화를 찾기 시작했고 이는 새로운 트렌드의 추구로 나타난다.

 

복잡하고 어려웠던 재즈 음악 외에도 스탠더드 팝(프랭크 시나트라, 빙 크로스비, 냇 킹 콜, 페리 코모등)은 사실 철저히 성인취향의 음악이었고, 10대 젊은이들에게는 좀 더 자극적이고 단순하며 경쾌한 가사의 음악이 필요했다. 그래서 당시 도회지의 젊은이들은 흑인의 리듬 앤 블루스나 하드 밥 음악을 들었다. 이는 폭력교실(원제:The Blackboard Jungle), The Wild One을 비롯한 1950년대 젊은이들의 생활을 그린 영화나 소설에 잘 묘사되어있다.

 

1950년대 중반쯤 되면 미국 흑인 음악은 이미 미국의 10대들에게 퍼질만큼 퍼진 상태였다. 이미 젊은 세대는 새로운 음악의 출현을 목말라 하고 있었고 레코드회사도 바보는 아니었기 때문에 10대들에게 자극적으로 다가갈 수 있지만 기성세대의 눈에 그다지 위험하지 않은 가수를 찾는데 혈안이 되었다. 미국은 예나 지금이나 생각보다 보수적인 청교도 국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1950년대 초반, 컨트리 뮤직 가수이자 지역 DJ였던 빌 헤일리는 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음악이 탄생하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직접 실행에 옮겼다. 당대 흑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리듬 앤 블루스 곡에서 저속한 속어나 과격하고 음울한 연주를 제거하고 직접 연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빌 헤일리는 1954년 재즈/리듬 앤 블루스 뮤지션인 빅 조 터너의 "Shake, Rattle and Roll"을 커버하여 발표했는데 이게 대박이 터진다. 그리고 이듬해 "Rock around the clock"이 영화 폭력교실에 삽입되면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게 된다. 전국의 폭주족들 가죽재킷에 빌 헤일리 앤 더 히즈 코멧츠(Bill Haley & His Comets)의 이름이 새겨지게 되고, 영화관에서는 일대 소란이 일어나고, 10대 불량배들은 이 노래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참 아이러니했던 것이, 이미 빌 헤일리의 나이는 30대에다가, 부인도 있고 아이도 키우는 유부남이었다. 새로운 음악에 목말라하던 10대 청소년들이 기성세대 아저씨의 노래에 열광한 것

 

 

로큰롤의 탄생

 

로큰롤 이전의 시대는 재즈와 블루스가 대중음악인 시대였다. 하지만 복잡해지고 어려워진 재즈는 대중의 외면을 받았으며 블루스는 현대 모든 대중음악의 조상격으로 재즈와 리듬 앤 블루스, 더 나아가 록큰롤에 이르기까지 기본 베이스 음악으로써 불쏘시게 역할을 하였다.

 

아무튼 재즈와 블루스에서 발전한 리듬 앤 블루스 음악은 우후죽순 새로운 아티스트들을 등장시키기에 이른다. 록 기타주법을 최초로 완성시킨 척 베리라든가, 반항과 불량과 기괴함을 최초로 시도했던 리틀 리처드라든가, "폼 나는" 남자 인생을 주로 소재로 삼았던 칼 퍼킨스, 무법자 이미지로 유명했던 쟈니 캐쉬, 로큰롤 피아니스트로서 훌륭한 주법을 완성해낸 제리 리 루이스, 멤피스의 무서운 아이들 브루넷츠(후에 조니 브루넷 트리오로 이어지는)등이 모두 1954년~1955년 사이에 등장한 뮤지션들이다.

 

이 시기에는 리듬 앤 블루스 음악이 서서히 로커빌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로커빌리의 상대적으로 촌스러운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당시 10대들 사이에서 널리 쓰인 속어인 "록 앤 롤"이 사용되기 시작했고, 로큰롤은 로커빌리에서 분화되어 나오기 시작한다.

 

시간상으로 따져보자면 빌 헤일리가 새로운 리듬 앤 블루스를 1950년대 전반 내내 선보여 오다가 1954년 전국적인 붐을 일으키게 되고, 1955년 척 베리가 기타주법을 선보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리틀 리처드가 격동적인 피아노 주법을 도입한다.

 

이때쯤 이제 신기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는데, "흑인처럼 노래하는 백인 가수가 나오면 게임 끝난다"는 것이었다. 이미 빌 헤일리가 "백인의 흑인음악"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놓았기 때문에 이는 어려운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미국 각지의 다양한 레코드 회사들은 이러한 아티스트를 찾는데 혈안이 되고, 이때 선 레코드에서 발굴해낸 불세출의 아티스트가 바로 엘비스 프레슬리다. 이때가 1955년. 엘비스 프레슬리가 얼마나 상업적 성공을 거뒀는지는 설명 자체가 불필요 하다.

 

1955년부터 쟈니 캐쉬, 칼 퍼킨스, 엘비스 프레슬리는 함께 전미 투어에 나서게 되고, 이때부터 이들이 명성은 확고부동한 위치를 갖게 된다. 이들이 뿌린 씨앗은 1956년을 로커빌리의 해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1956년 칼 퍼킨스의 "블루 스웨이드 슈즈"와 쟈니 캐쉬의 "폴섬 프리즌 블루스", 엘비스 프레슬리의 "하트 브레이크 호텔"이 발매되고, 로커빌리는 전국적인 음악이 된다. 이들은 모두 백인이었으며 인종에 관계없이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로커빌리가 좀 더 블루스의 부기우기 셔플리듬에 컨트리적 감성이 가미된 것이라면, 로큰롤은 리듬 앤 블루스의 스트레이트한 리듬을 잘 계승했다. 이러한 스트레이트한 음악은 전 미국을 강타하게 되고 전세계로 퍼져나가게 된다.

 

 

 

전성기

 

"과거에 리듬 앤 블루스로 불렸지만 이제 로큰롤이라고 불리는" 이 음악이 미국을 강타하고 전 세계로 퍼저나가게 되자, 다양한 뮤지션들이 뒤를 이어 등장하기 시작했다. 쉽게 말하면 1956년 이후의 뮤지션들은 모두 앞서 말한 로커빌리 뮤지션들을 보고 가수가 되기로 마음먹은 세대.

 

이 시기에 등장한 뮤지션들은 로이 오비슨, 버디 홀리, 진 빈센트, 에디 코크런, 리치 발렌스, 빅 바퍼등이 있다. 또한 완다 잭슨, 재니스 마틴같은 여성 로커빌리 뮤지션도 등장하기에 이른다.

 

영국에서는 미국을 흉내낸 뮤지션들이 출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빈스 테일러, 빌리 퓨리, 조 브라운, 위 윌리 해리스, 클리프 리처드등이 훗날 영국 록의 토양에 밑거름이 되는 뮤지션이 된다.

 

대개 1955년부터 1958년까지를 로큰롤의 전성기로 친다. 후반부로 갈수록 로커빌리 방식의 그루브한 셔플 리듬의 로큰롤에서 스트레이트한 로큰롤로 변화하는 것도 주목할만한 양상이다(척 베리의 Johnny B. Goode이 1958년 발매된 것은 기념비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로큰롤은 미국에서 그리서라는 서브컬쳐를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그리서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로큰롤 패션인, 리젠트머리에 가죽 쟈켓과 청바지를 입은 젊은이들을 말한다(머리에 기름을 잔뜩 발랐기 때문에 그리서). 이 서브컬쳐는 세계 각지로 퍼져나가면서 이름과 모양을 약간씩 달리 하면서 전세계를 휩쓸게 된다. 예를 들면 영국에서는 로커스로 불렸고, 북유럽에서는 Raggare라고 불렸다.

 

 

 

몰락

 

로큰롤의 종말은 의외로 일찍, 그것도 불현듯이 찾아오게 되었다. 1950년대 후반이 되자 상당히 보수적이었던 미국 사회와 언론은 무언가 그들을 제어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반항과 자유의 상징이었던 로큰롤은 기성세대의 눈엣가시였고 그들은 무언가 사고가 터지길 바라고 있었다.

 

1958년이 되자 로큰롤 뮤지션들 주변에서 잡음이 끊이지 않게 된다. 제리 리 루이스는 13살짜리 미성년자 사촌 동생과 결혼한 것이 알려지면서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게 되고, 쟈니 캐쉬는 마약에 빠져 헤롱대고 있었다. 리틀 리처드는 갑자기 목사가 되겠다며(...) 은퇴를 했고, 척 베리는 미성년자 여자아이를 데리고 주 경계선을 넘다가 걸려서 법적, 도덕적인 치명타를 입고 수감된다. 앨런 프리드는 1958년 관객들에게 "경찰은 여러분이 즐기길 원하지 않을겁니다"라고 이야기 했다가 폭동을 선동했다는 죄로 수감되고, 이후 뇌물을 받고 특정 곡들을 틀어준 사실이 밝혀지면서 방송에서 하차하고 벌금형을 선고받는다.

 

이러한 스캔들에 로큰롤이 지속적으로 시달리게 되자, 엘비스의 매니저 '대령' 톰 파커는 기가막힌 전략을 생각해 내는데, 바로 입대하는 것이다. 미국은 당시 전시가 아니었기 때문에 굳이 군대에 갈 필요가 없었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10여년밖에 안 되었고, 한국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착실한 젊은이"의 이미지를 얻기 위해 자진입대를 결정한 것이다. 엘비스가 나이가 들면 반항적인 느낌의 로큰롤 청춘스타라는 이미지만으로는 한계가 있을테니, 자진 입대를 통해 기성세대의 반감을 누그러뜨리고, 이후 보다 폭넓은 팬층에게 사랑을 받는 '국민가수'로 전환시키는게 장기적인 안목에서 꼭 필요하다는게 톰 파커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엘비스는 전역 후 60년대 내내 로큰롤 음악활동보다는 삼류 영화들에 자주 출연하며 배우 활동에 더욱 주력했고, 60년대 후반에 점프슈트를 입고 라스베가스에서 공연을 시작하면서 음악계에 컴백한다.

 

1959년 버디 홀리와 리치 발렌스, 빅 바퍼를 태운 비행기가 악천후로 인해 추락사고를 일으키게 되고, 이 세명의 젊은 로큰롤 뮤지션들 또한 세상을 떠나게 된다.

 

1960년, 진 빈센트와 에디 코크란은 영국에서 투어를 돌고 있었다. 그들은 공항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는데, 그만 택시의 타이어가 터지는 바람에 교통사고를 일으키게 되고, 에디 코크란은 사망하고 진 빈센트는 평생 다리에 심각한 장애를 가지게 되고 다리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다량의 술과 약물을 복용하게 된다. 결국 이는 그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러한 결과, 1961년부터 62년까지 Runaround Sue, The Wanderer, Lovers Who Wander를 연속으로 히트시킨 디온(가수) 만이 남게된다. 이때부터 로큰롤은 몇년간 깊은 잠에 빠진다. 대신 빌보드 차트에서는 로큰롤에게서 파생되긴 했지만 아예 가사가 없는 기교 중심의 서프 음악이 대중들을 사로잡기 위해 여러 사운드를 발전시켰고, 후에 나올 신세대 록 뮤지션들이 이에 영향을 받아 사이키델릭을 비롯한 여러 시도를 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또한, 60년대 초에 처비 체커의 The twist가 역사에 한획을 그으면서 트위스트 열풍이 불었다. 이 두 가지가 로큰롤을 몇년간 붙들어 놓으며 완전히 한물간 장르가 되어 버리는 상황은 피할수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로큰롤은 그 본래의 정신과 활력을 잃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된다.

 

이렇게 로큰롤이 시들해지게 된 건, 위의 교통사고처럼 뜻하지 않은 사고의 탓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로큰롤 1세대인 기존 로큰롤 뮤지션들의 창작력이 고갈되고 더이상 새로운 음악적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아서 음악적으로 정체되어버린 상태였다는 점도 큰 원인이었다. 음악적으로 더이상 딱히 새로운게 안나오니 음악팬들도 차차 질려하며 흥미를 잃기 시작했고, 로큰롤 뮤지션들 스스로도 이젠 나올만 한건 다 나왔나 보다라며 로큰롤의 미래에 대한 확신과 열정을 잃어갔기 때문이었다.

 

어떤 분야든지 이런 답보적인 상황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새로운 세대로의 교체 및 외부로부터 뭔가 신선한 바람이 유입되는게 필요하기 마련이다.

 

 

부활

 

정작 미국 본토에선 로큰롤이 다 소탕되었다고 믿었지만, 대서양 건너편에서 로큰롤의 음악적 유산을 간직한 비틀즈와 롤링 스톤스를 비롯한 영국 밴드들이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통해 로큰롤 열풍의 부활을 알렸다. 그리고 이 밴드들은 더 나아가 로큰롤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새로운 록 음악의 시대를 개척한다. 브리티시 인베이전 이후 수 십년 간 대중 음악계에서는 록 음악이 주류 장르로 자리메김 하게 되었고, 그 이후 파생되고 탄생한 수 많은 대중음악 장르의 음악적 기반이 되었으니, 그야말로 새옹지마.

 

영향력은 The Association, Gary Lewis And The Playboys, Classics 4 정도가 적당한 예.

 

 

 

 

몰락과 부활의 반복

 

"요즘 록 음악의 문제점은 밴드들이 록(Rock)은 잘하지만 롤(Roll)은 못하는데 있다."

— 키스 리처즈

 

이후 로큰롤은 블루스와 더불어 록 음악의 가장 기본적인 기반이 되었으며 브리티시 인베이전 이후 사이키델릭 록, 하드 록등 여러 록음악의 중요한 세부 장르들을 탄생시키게 된다. 하지만 1970년대에 이르러 록 공연 문화와 밴드 시장이 거대해지게 되면서 사람들은 더 빠르고 더 복잡하고 더 화려한 음악들을 선호하게 되면서 로큰롤은 잊혀지게 된다. 물론 초기 메탈, 글램록에서는 로큰롤, 블루스적인 측면이 많이 남아있으나 80년대 이후에는 메탈이 하드록과 구별되는 헤비 메탈로 진화하고 글램 록이 음악적인 측면을 배제한 화려한 측면만 강조한 글램 메탈로 진화하게 된다. 이렇게 속주등의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더 진화했지만 로큰롤 음악이 가지고 있는 그루비함, 대중성이 많이 퇴색된 록 음악에 많은 사람들이 회의감을 가지게 된다. 물론 70년대에서 팝의 시대인 80년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섹스 피스톨즈를 비롯한 펑크 록과 엘비스 코스텔로, 브루스 스프링스틴같은 솔로 아티스트들, 블론디, 더 카스, 토킹헤즈같은 뉴웨이브 아티스트, 레너드 스키너드, CCR, 다이어 스트레이츠같은 루츠 록 아티스트 등 여러 아티스트들이 기술적인 측면에만 집착하는 다른 록 아티스트들과 구별되는 음악들을 들려주고 히트곡도 많이 만들었으나 결국 헤비 메탈과 글램 메탈에게 록 시장의 주도권을 내주게 된다.

 

이렇게 80년대에는 밴드들이 부족한 리듬감과 창의성을 샤우팅, 속주, 통속적인 가사등의 과장된 구성으로 감추자 대중들도 점점 외면하게 된다. 이렇게 점점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한 록 시장에 나타난 밴드가 바로 너바나다.

 

다시 록음악의 본연적인 정체성, 작가주의 정신, 대중성, 기성세대와 상업주의에 저항하는 야수성을 되살리자는 너바나의 외침은 얼터너티브 록과 그런지음악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렇게 90년대에 영국에서는 오아시스, 블러, 스웨이드, 펄프 등의 밴드들과 미국에서는 펄 잼, 너바나, 스매싱 펌킨스 같은 밴드들이 초대형 히트곡도 내고 명반들도 내면서 다시 록 음악의 인기를 되살리고 영광의 시대인 1960년대가 재현되고 제2의 비틀즈, 롤링 스톤즈, 더 후, 킹크스, 레드 제플린이 나올것만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90년대에는 60년대와 다르게 록 음악만 있었던게 아니기에 R&B, 힙합과 팝의 인기를 꺾기에는 무리였고 상술한 90년대 밴드들은 보컬의 자살, 매너리즘, 멤버들의 불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선배들의 벽을 넘지 못하고 명반 1,2개만 내고 잊혀지게 된다.

 

이후에 90년대 후반으로 들면서 얼터너티브 록은 라디오헤드 류의 음악들로 변하게 되는데 이 음악들의 특징은 작가주의 정신과 창의성에는 부합했으나 위의 밴드들이 보여주었던 로큰롤 정신(야수성, 대중성)들이 결여되어있다. 2000년대로 오면서 스트록스니 화이트 스트라입스, 프란츠 퍼디난드같은 복고풍의 로큰롤 밴드들이 다시 성공하면서 라디오헤드류의 얼터너티브 록이 왕좌를 가지고 있던 록음악의 주도권을 다시 가져오나 싶었으나 복고음악의 근본적인 문제인 매너리즘의 벽을 못넘고 롱런에 실패한다. 이후 라디오헤드류의 얼터너티브 록이 2020년대 현재까지도 유효하게 된다.

 

요약하자면 많은 평론가들은 로큰롤을 단순히 음악 장르를 넘어 록 음악 역사를 양분해서 설명하는 것도 가능할 정도로 록 음악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음악이라고 간주한다. 위에서 인용한 키스 리처즈와 엘비스 코스텔로의 말처럼 요즘 밴드들은 록(Rock)은 잘하지만(Roll)은 못한다는 발언도 결국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로큰롤은 어떤 음악

 

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 미국은 베이비 붐(Baby Boom)으로 인해 인구가 급증했다. 대부분의 가정에는 라디오와 흑백텔레비전이 자연스럽게 보급되었고, 음악을 포함한 여러 문화 콘텐츠들은 새로운 매체들을 통해 대중의 호응을 얻고, 나름의 영향력을 쌓아갔다.

1950년대 본격적인 팝의 시대를 활짝 열어준 음악은 로큰롤이었다. 긴 전쟁 기간 동안 움츠러든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고, 춤추게 했던 이 음악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정신을 표출했던 블루스와 재즈에 백 비트(backbeat)가 가미되고, 미국 남서부 지방을 중심에서 불려지던 컨트리와 가스펠이 뒤섞인 형태였다. 당시, 미국 클리브랜드에 위치한 WJW 방송국의 인기 DJ였던 앨런 프리드(Alan Freed)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 [Rock’ Rock’ Rock’]에서 이렇게 말했다.

“로큰롤은 많은 시냇물이 모여 만들어진 강이다. 재즈, 래그타임(ragtime), 카우보이송, 컨트리, 포크, 이 모두가 로큰롤의 강한 비트에 기여했다.”

 

로큰롤의 형성과 본격적 Pop 시대의 개막

1940년대 후반까지 흑인 고유의 특성과 정신이 잘 반영된 재즈와 블루스는 사람들에게 레이스 뮤직(RaceMusic)으로 불렸는데, 이는 문자 그대로 인종주의적인 의미를 내포했다. 이후, 미국 대중음악 잡지 빌보드(Billboard)의 기자 제리 웩슬러(Jerry Wexler)가 우울한 분위기의 블루스 음악에 전자 기타나 피아노, 드럼으로 리듬을 더한 음악들을 통칭하여 ‘리듬 앤 블루스 레코드’라고 불렀고, 인기 DJ 앨런 프리드는 이런 음악들을 자신의 프로그램에서 틀 때마다 종종 ‘Rock and Roll’이라고 외쳐댔다.

1950년대 이전 음악 팬들 인식 속에는 ‘블루스/재즈=흑인 음악’, ‘컨트리=백인 음악’이란 공식이 있었다. 베니 굿맨(Benny Goodman) 같은 몇몇 스윙 밴드를 제외하고 흑인과 백인이 한 울타리에서 음악을 하는 것도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리듬 앤 블루스와 로큰롤이 라디오의 전파를 타면서 흑인 음악과 백인 음악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허무는 풍토를 조성했다.

흑인과 백인의 범 장르적인 행보도 이 때부터 본격화된다. 흑인 아티스트 중에서 척 베리(Chuck Berry)는 [Maybellene], [Thirty Days] 같은 곡들에서 컨트리 스타일을 구사하기 시작했고, 백인 아티스트 빌 헤일리(Bill Haley)는 [Rock a Bet Boogie], [Two Hound Dogs]에서 리듬 앤 블루스와 스윙적인 요소를 적극 차용하여 연주했다.

피아노로 독특한 로큰롤 스타일을 구사했던 리틀 리처드(Little Richard)

 

로큰롤과 앨런 프리드(Alan Freed)

록(Rock)의 사전적 의미는 ‘흔들다’, ‘요동시키다’, ‘춤추다’ 등이 있지만, 피아노 블루스에서 묵직하고, 리듬감 있는 베이스 연주 양식을 의미하기도 했다. ‘구르다’, ‘둥글다’를 뜻하는 롤(Roll)은 속어로 흑인들이 술에 취한 후 갖는 성관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로큰롤이란 단어 자체가 지니는 동적이면서도, 육감적인 뉘앙스는 두 단어의 본질적인 의미와 어느 정도 연관성을 갖는다.

로큰롤의 음악적 성격은 흑인들의 우울한 ‘블루스’가 ‘리듬 앤 블루스’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조성되었다. 특히, 1950년대 유행했던 로큰롤 뮤지션들이 유년 시절 컨트리와 재즈, 스윙 음악 등을 듣고 자란 것은 로큰롤 뮤직의 리듬감과 동적인 요소에 많은 기여를 했다.

로큰롤이란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39년 컨트리 가수 버디 존스(Buddy Jones)의 곡 제목, ‘Rockin' Rolling Mama’로 보는 견해가 많으나, 많은 사람들이 이 용어를 대중화시킨 인물로 앞서 언급한 앨런 프리드를 꼽는다. 그는 미국 미시시피주 클리브랜드 소재 WJW 라디오에 심야 프로그램 ‘더 문독 하우스 로큰롤 파티(The Moondog House Rock And Roll Party)’를 새롭게 편성하고, DJ를 맡는다. 당시 앨런 프리드는 클리브랜드에 음반점 랑데부(Rendezvous)를 경영하던 리오 민츠(Leo Mintz)와 평소에 친분을 쌓아오면서, 백인 고객들의 흑인 음반 구매가 현저하게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위축된 소비 탓도 있었지만, 백인들의 감성을 고스란히 반영한 컨트리 음악이 음반 시장에 주를 이룬 것도 한몫 했다. 앨런 프리드는 이런 현상에 착안하여, 백인들이 어느 정도 컨트리 음악에 싫증을 낼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름의 틈새시장을 공략한다. 그는 1951년 7월 11일 첫 방송부터 백인들에게 흑인 음악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파격적인 기획과 편성을 시도하게 된다. 당시, 이런 과감한 시도는 컨트리로만 채워지지 않던 대중들의 허전한 마음 한 구석을 충족시켜줄 수 있었고, 로큰롤의 인기와 함께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다.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 중인 앨런 프리드

 

그는 라디오 DJ 이외에도 매체의 힘을 등에 업고, ‘문독 쇼(Moondog Show)’라는 공연을 기획하고 영화에도 출연하여 로큰롤 전도사로서 활약해 팝 음악사에 한 획을 그었다. 하지만, 1958년 미국 전역을 들썩이게 한 페이올라(Payola)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자신이 쌓아온 인기와 명성을 한 순간에 무너트리게 된다. DJ가 방송에서 음악을 틀어주는 대가로 가수와 매니저들에게 뇌물을 받아 문제가 된 이 사건에는 앨런 프리드 외에도 많은 인기 DJ들이 연관되어 있었다. 조사 결과 앨런 프리드는 레코드사들에게서 3만 달러가 넘는 돈을 받은 사실이 밝혀졌고,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이 판결 난 지 5년 후 앨런 프리드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의 나이 43세였다.

비록, 앨런 프리드의 말년은 허망했지만, 그가 로큰롤을 포함한 팝의 역사에 지대한 공헌을 한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페이올라 사건으로 인해 오랜 시간 동안 그가 쌓은 명성과 업적이 가려졌지만, 1986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Rock And Roll Hall Of Fame And Museum)에 그의 이름이 헌액되면서 로큰롤 아버지로서 명예도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대개, 블루스의 W.C 핸디(W.C. Handy)나 컨트리의 지미 로저스(Jimmie Rodgers)처럼 장르마다 음악적으로 혁신적인 모습을 보여준 아티스트들에게 아버지란 호칭이 붙는다. 하지만, 앨런 프리드는 음악을 하는 아티스트가 아니었음에도, 로큰롤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점을 기리는 뜻에서 사람들은 앨런 프리드를 로큰롤의 아버지로 명명한다.

 

로큰롤의 선구자, ‘척 베리(Chuck Berry)’

“로큰롤 음악을 들어봐요. 낡은 방식을 골라도 괜찮아요<br />백 비트가 있어서 놓칠 수 없지요. 어떤 낡은 박자를 사용해도 돼요 <br />당신이 나와 춤추길 원한다면, 그게 바로 로큰롤이죠”<br />(Just let me hear some of that rock and roll music. Any old way you choose it.<br />It’s got a back Beat, You can’t lose it. Any old time you use it.<br />It’s gotta be rock and roll music, If you wanna dance with me.)

- 척 베리의 곡 [Rock’n Roll Music] 中에서

척 베리(Chuck Berry, 1926 ~)

 

1950년대를 흔들었던 척 베리의 노래 [Rock And Roll Music]의 첫 소절이다. 이 노래는 1957년에 공개된 싱글로, 그 해 빌보드 싱글 차트 ‘Billboard Hot 100’에서 8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후에, 비틀즈(TheBeatles)가 척 베리의 38세 생일을 기념하여 녹음한 후, 자신들의 네 번째 스튜디오 앨범 [Beatles For Sale]에 수록했다. 그들은 앨범에서 [It’s got a backbeat]를 [It’s got a black beat]로 바꿔 불렀는데, 록 음악이 흑인에게서 나왔음을 알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바꾼 것이다.

척 베리 하면 생각나는 것이 엉덩이를 쭉 빼고 한 쪽 발을 든 채 유쾌한 웃음을 지으면서 기타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모습이다. 그는 1950년대 클럽에서 여러 밴드들과 공연을 하면서, 블루스 아티스트 머디 워터스(Muddy Waters)에게 발굴되어 세상에서 빛을 보게 된다. 척 베리는 블루스, 재즈, 스윙을 모두 수용하면서도 컨트리의 요소도 가미해, 그만의 독창적 연주 스타일을 완성했는데, 이는 로큰롤 기타 스타일의 표본이 되었다.

척 베리는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가사, 공연 도중 관객과 대화하듯 툭툭 뱉는 추임새, 그리고 역동적인 무대 매너와 연주로 당시 로큰롤의 주 관객층이었던 십 대들에게 큰 환호를 받았다. 비틀즈와 롤링 스톤즈같이 1960년대에 등장한 록 밴드들은 척 베리의 음악을 좋은 교본으로 삼아 기반을 다지기도 하였다. 또 파도 타듯 흘러가는 고유의 기타 주법은 향후 록 음악과 서핑 음악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55년 빅 히트를 기록한 [Maybellene]을 포함하여, 비치보이스가 가사만 바꿔서 발매한 [Surfing USA]의 원곡으로 잘 알려진 [Sweet Little Sixteen], 그리고 초창기 비틀즈가 함부르크에서 자주 연주했던 [Roll OverBeethoven] 등 혁신가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로큰롤 음악들을 많이 남겼다.

빌 헤일리, 로커 빌리 스타일로 대중을 흔들어 놓다.

 

리허설 중인 ‘빌 헤일리 앤 히즈 코메츠’

네이버 뮤직에서 음악듣기

척 베리가 로큰롤의 기초를 형성한 인물이라면, 빌 헤일리(Bill Haley, 1925-1981)는 로큰롤의 대중적인 호응을 이끌어내고 미국 이외의 나라에 로큰롤을 전파한 인물로 평가된다.

이마 앞으로 내린 꼬부랑 머리가 트레이드 마크인 빌 헤일리는 원래 1950년대 초반부터 컨트리 가수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의 음악은 굴러가는 듯한 컨트리 비트에 박력 있는 블루스가 가미된 모습이었는데, 당시 음악 평론가들은 이런 독특한 스타일을 ‘로커빌리’라고 칭했다. 로커빌리는 후에도 엘비스 프레슬리(ElvisPressley), 칼 퍼킨스(Carl Perkins)의 주무기가 되면서, 음악의 성격을 특징짓는 하나의 용어로 자리 잡았다.

1952년부터 그는 빌 헤일리 앤 히즈 코메츠(Bill HaleyAnd His Comets)라는 밴드를 만들어 활동하였는데, 멤버들의 역동적이고 요란한 무대 매너는 항상 많은 화제를 낳았다. 이들은 영화 [폭력 교실(Blackboard Jungle)] OST로 수록된 곡 [Rock Around The Clock]을 1955년 7월 9일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올려놓으면서 이후 로큰롤 팬덤의 최전선에 놓이게 된다.

밴드의 음악은 평소 쾌활한 빌 헤일리의 성격을 많이 반영하고 있었고, 이들이 연주하는 밝고 단순한 로큰롤 음악들은 대중들로 하여금 쉽게 로큰롤을 접할 수 있게 해줬다. 이러한 면모는 [Rock A Beatin’ Boogie], [Crazy Man Crazy] 같은 곡들에서 경쾌한 기타와 박력 있는 드럼 비트로 잘 나타난다.

로큰롤의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 온 영화 [폭력 교실(Blackboard Jungle)]의 포스터

이듬해, 엘비스 프레슬리의 등장으로 미국 시장에서 빌 헤일리의 인기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평소 대중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항상 관찰하고, 자신의 음악이 어떤 시장에서 통할 지 잘 알았던 빌 헤일리는 이후 영국을 포함한 유럽 각지에서 로큰롤을 전파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누렸다.

로큰롤의 황제, 만능 엔터테이너 ‘엘비스 프레슬리’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

 

그의 이름만 들어도 어디선가 "You ain’t nothin’ but a hound dog. Cryin’ all the time…"(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 ‘Hound Dog’ 첫 소절)이 들리는 것 같다. 1954년만 하더라도 엘비스 프레슬리(ElvisPresley, 1935 – 1977)는 극장 안내원과 트럭 운전사로 생계를 유지해나가던 멤피스의 시골 청년이었다. 그가 어머니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4달러를 들여 녹음한 [That's All The Time (Mama)]는 프로듀서 샘 필립스의 마음을 사로잡고, 엘비스는 RCA 레코드 사와 정식 계약을 하게 된다. 사실, 엘비스 프레슬리가 3만 5천 달러의 거금을 받고, RCA와 계약한 직후에는 그의 잠재된 끼와 탤런트가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1956년 [Heartbreak Hotel]이 싱글 히트 1위를 차지하면서, 드디어 그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1956년 한 해 동안 [Don’t Be Cruel], [HoundDog], [Love Me Tender] 등을 포함하여 총 5곡의 싱글을 1위에 올려놓는다. 1958년에 군 입대 이후에도 그가 발표했던 곡들과 녹음해두었던 곡들은 많은 인기를 얻으면서, 시대의 아이콘으로 각광받는다.

훤칠하게 생긴 외모와 함께 묵직한 목소리로 끈적한 흑인의 느낌을 잘 살려냈던 엘비스 프레슬리는 폭발적인 쇼맨십과 수많은 히트곡으로 대중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또 그는 영화나 TV 프로그램 등 각종 매체를 종횡무진 하면서, 로큰롤 시대 최고의 슈퍼스타로 활약하였다.

로큰롤, 1950년 문화를 이끌다.

1950년대 중, 후반에 로큰롤이 대중 장르로 자리 잡은 것은 팝 음악 역사에 있어서 의미가 크다. 앞서 언급한 척 베리, 빌 헤일리, 엘비스 프레슬리 외에도, 천재적인 작곡 실력을 보여주었지만 불의의 사고로 요절한 아티스트 버디 홀리(Buddy Holly), 열정적인 무대 매너로 관중을 사로잡은 리틀 리처드, 그리고 거친 로큰롤을 들려준 에디 코크런(Eddie Cochran)에 이르기까지 많은 아티스트들은 로큰롤의 다채로운 느낌을 창조해냈다.

억압의 틀을 깨듯,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기타를 치며 노래 불렀던 아티스트들은 젊은 세대들의 심정을 대변해주었다. 또한 다양한 매체의 등장과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된 분위기는 로큰롤 음악이 세대를 넘어 대중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드는데 큰 몫을 했다.

블루스, 재즈, 스윙, 컨트리를 자연스럽게 수용했던 로큰롤은 팝 음악의 본질적인 특성인 개방성, 대중성을 추구하면서도, 시대의 유행을 이끈 장르였다. 이후 록, 포크, 펑크, 디스코 등의 다양한 장르가 형성되고, 대중들에게 자연스럽게 유입될 수 있도록 물꼬를 튼 음악이 로큰롤이라는 점도 팝 음악 역사에서 의미가 크다.

 

 

추천앨범

척 베리의 첫 번째 히트 싱글 [Maybellene]을 포함하여 [Johnny B Goode], [Rock And Roll Music] 에 이르기까지 로큰롤의 초석을 다진 음악들이 이 컴필레이션 앨범에 수록되어 있다. 스튜디오 앨범 [After SchoolSession]에 실렸던 [Too Much Monkey Business]와 [Roll Over Beethoven] 같이 척 베리 초창기 음악들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빌 헤일리가 1954년에 발표하여, 영화 [폭력 교실]을 통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곡 [Rock Around TheClock]을 타이틀로 한 앨범이다. 앨범에는 [Shake], [Rattle And Roll]을 비롯하여, “Rock Rock RockEverybody, Roll Roll Roll Everybody”라는 후렴구가 인상적인 [Rock-A-Beatin’ Boogie]가 수록되어 있다. 빌 헤일리가 미국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로큰롤 음악들이 궁금하다면, 이 앨범을 추천해본다.

  • Elvis Presley
    아티스트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의 첫 번째 정규앨범이다. [Heartbreak Hotel]을 비롯해 [Blue Suede Shoes], [I Got A Woman], [I Want You, I Need You, I Love You] 등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로큰롤 음악이 아티스트 한 명의 정규 앨범에 실려있는 것이 지금 봐도 놀라울 따름이다.

점잖은 이미지에 천재 작곡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버디 홀리(Buddy Holly). 1959년 2월 3일 경비행기가 추락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떠오르는 로큰롤 스타였다. 비록 3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등져야 했지만, 버디 홀리가 세상에 남긴 음악들은 현재까지도 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면서 로큰롤 역사의 보고로 남아있다.

빌보드는 예전에 리틀 리처드(Little Richard)를 ‘가장 폭발적이고 유쾌한 로큰롤 아티스트’라고 평가했다. 리듬과 필이 충만했던 리틀 리처드는 [Tutti Frutti], [Ready Teddy] 등을 포함하여, 로큰롤의 또 다른 레시피를 창조해낸 아티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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