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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 폴란드, 유대인, 공산주의 혁명가, 사상가, Rosa-Luxemburg

Jobs9 2024. 12. 12.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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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
Rosa-Luxemburg

출생
1871년 3월 5일
러시아 제국 프리비슬린스키 자모시치
(現 폴란드 루벨스키에주 자모시치)
사망
1919년 1월 15일 (향년 47세)
바이마르 공화국 베를린
국적
독일
직업
경제학자, 철학자, 사회 운동가
정당
독일 공산당
학력
취리히 대학교 (1897년 법학 박사)
배우자
구스타프 뤼베크 (1897년 4월 결혼)
종교
무종교 (무신론)

 



독수리는 때때로 닭보다 낮게 날 수는 있지만 닭은 결코 독수리처럼 높이 비상할 수는 없다. 이 모든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독수리였으며 독수리로 남을 것이다. 
블라디미르 레닌


결과적으로 로자 룩셈부르크의 독특한 정치적ㆍ이론적 관점들의 표현들은 사문화되었고, 그는 혁명의 성지를 순례하는 폴란드와 독일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단지 말뿐인 찬사 속에서 기억되고 있다. 혁명 독재를 두고 행했던 그의 비판은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가서나 주목받았다. 물론 대전 이후 그와 같은 비판이 유행하지만, 그것은 호환성 있는 자극제로서라기보다는 역사적 골동품으로 취급되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 그의 사상에 대한 어떤 관심들은 이른바 '신좌파'가 레닌의 당 이론을 거부하고 수정주의를 공격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칠 줄 모르는 혁명적 잠재력에 계속 의존하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대안적 모델을 모색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레셰크 코와코프스키,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흐름" 2권

 

 


로자 룩셈부르크

 

폴란드 출생의 독일의 공산주의 혁명가 겸 사상가.
1898년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해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독일 혁명 직후 사회주의 혁명을 시도하나 우익 준군사 조직(자유 군단)에 의해서 살해당한다. 

공산당 창당 이전
1871년에 러시아 제국령 폴란드 자모시치의 유복하고 교양 있는 아슈케나지 유대인 가정에서 로잘리아 룩센부르크(Rozalia Luxenburg)[3]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병을 얻어서 그때부터 다리 길이가 서로 짝짝이로 달라져(혹은 엉덩이 통증으로) 절름발이가 되었다. 이후 그녀의 가족은 바르샤바로 이주하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는 동유럽 유대인스러운 세계 시민주의에 깊게 영향을 받게 되며, 이는 그녀가 폴란드어,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와 이탈리아어 등 6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이후 그는 그녀의 나이 15살에 유대인 혁명 서클과 폴란드 프롤레타리아당에 가입해 총파업 주도 등의 반정부 활동을 벌였으며, 이후에는 학업을 위해 유럽에서 유일하게 여성 입학을 허용하는 스위스 취리히 대학교에 입학한다. 여담으로 프랑스 같은 경우에는 90년대에 허용되어 비슷한 상황인 마리 퀴리와 그의 언니가 프랑스로 유학하였다.  

취리히 대학교 철학부에 입학한 그녀는 이듬해 법학부로 전과해 국민 경제학과 공법학 등을 전공하면서 경제학, 역사학, 정치학 등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하였다. 그녀는 이곳에서 평생의 연인이자 동지가 될 레오 요기헤스를 만났고 본격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1897년 폴란드의 산업 발전(Die Industrielle Entwicklung Polens)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4], 1898년 취리히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독일 지인의 아들 '구스타프 뤼베크'와 위장 결혼 하여 독일 시민권을 취득한 후,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여 1898년부터 제2차 인터내셔널에 참가하고 있던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한다. 

이후 사민당 좌파에서 활동하며 명성과 악명을 동시에 떨쳤다. 마침 당시 사민당의 중심 이론가인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 중심으로 수정주의 논쟁이 펼쳐지고 있었는데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를 비판하기 위해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를 저술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단번에 유명 인사로 떠오른다. 

1905년 러시아 피의 일요일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바르샤바로 돌아가 폴란드 사회민주당을 창당하고 폴란드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게 되는데, 이 당시 계급 투쟁보다는 반러시아 운동과 폴란드 독립을 먼저 주장하던 폴란드 공산주의자들과 충돌하게 된다. 반국민주의자이자 국제주의자였던 그녀는 민족주의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게 경계하였는데, 그녀는 민족주의가 민족이라는 거창한 미명하에 계급 투쟁을 방해, 억압하거나 민족 간 또는 민족 국가 간의 이기주의를 부추겨 결국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우려는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현실화된다. 폴란드 독립운동보다 계급 투쟁을 우선시한 그녀는 폴란드의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러시아 황제의 첩자라는 비난을 듣기도 하였으며, 이때 그녀는 러시아 경찰에 체포되어 구금되는 등, 본격 혁명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수감에서 풀려난 그녀는 이후 베를린으로 돌아와 사민당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면서(1907~1914) "자본 축적론"을 집필하기도 한다. 그녀의 독자적 활동은 1914년에 더욱 본격화되는데, 1914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중 연설에서 군국주의 비판과 당시 독일 제국 황제이던 빌헬름 2세를 비판하였다는 죄목으로 투옥되지만 마침 군국주의에 회의적인 여론의 문제로 재판은 흐지부지되고 풀려났다. 

이후 전쟁 지속을 결의하는 독일 사회민주당을 떠나 "군국주의와 반군국주의"라는 책의 저자인 카를 리프크네히트, 클라라 체트킨 등과 함께 인터내셔널단(Die Internationale)을 결성하고, 로마 시대 노예 검투사의 반란을 일으켰던 스파르타쿠스(Spartacus)의 이름을 따서 스파르타쿠스 연맹으로 개명한다. 스파르타쿠스 연맹은 혁명을 통해서 전쟁을 끝내고 프롤레타리아 정부를 세우는 것이 목적이었으며, 로자 룩셈부르크는 전쟁에 반대하는 총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1916년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체포되어 또다시 2년 반 동안 투옥된다. 1917년 2월과 10월에 발생한 두 차례의 러시아 혁명을 감옥에서 맞은 그녀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환영하면서도, 혁명을 주도한 볼셰비키의 독재화를 우려했다. 1918년에 감옥에서 집필한 "러시아 혁명(사후 1922년 출판)"에서는 레닌과 트로츠키에게 경의를 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볼셰비키의 권위주의적 독재와 부르주아 민주주의 억압, 민족주의적 태도 등을 비판하고, 혁명이 관료주의화되고 부르주아적 독재로 귀착될 것에 대해 경고하였다. 

 

 

공산당 창당
1918년 독일 11월 혁명으로 감옥에서 나온 그녀는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스파르타쿠스 연맹의 기관지인 "적기(Die Rote Fahne)"를 창간하고 사민당을 격렬히 공격한다. 그해 12월 스파르타쿠스 연맹과 다른 사회주의 세력을 규합하여 1919년 1월 1일 독일 공산당을 창당하였다. 

당시 로자의 노선은 당장 혁명을 일으키려 하지는 않았다. 혁명 당시 3분의 2 이상의 노동자/병사 평의회들이 아직 사민당의 지지 세력 안에 있었다. 스파르타쿠스 연맹과 로자가 사민당의 총선 제안을 반대하려 하자 대부분의 평의회들은 그 주장에 반대했다. 스스로 무장을 내려놓고 사민당과 총선을 준비하려는 평의회들을 보고 로자는 독일 프롤레타리아는 스스로 정치적 자살을 선택했다라고 한탄했다. 그러나 로자는 아직 독일 내 공산주의 세력에게 희망이 있다고 보았다. 사민당은 경제적, 정치적 실패와 왕당파들에 대한 타협으로 인해 지지세를 잃고 있었고, 공산당을 사민당의 진보적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로자는 기왕 결의된 이번 선거에서 사민당에 대한 대안 세력으로서의 정당을 건설하기로 마음먹었다. 로자와 스파르타쿠스 연맹, 공산주의 청년 조직들은 12월 23일 당 창립 준비 대회에 모였고. 그녀는 거기서 이렇게 말했다. 


부르주아들의 튼튼한 요새인 의회 선거에 뛰어들어 폭풍처럼 그 요새로 들이쳐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이슈를 혁명을 위해 사용해야 하며 선거 또한 우리를 튼튼하게 만들 방법입니다. 

그녀는 혁명적 사회주의자였으나 대중적 반란(봉기)를 만들어낼 토대가 신생 공산당에는 아직 부족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아직 노동자/병사 평의회들이 건재하기에 다가올 사민당의 실책과 경제 위기 속에서 독일 공산당이 전진할 수 있을 것이라 본 것이다. 그 기틀을 다지기 위해 선거 여론전을 통해 대중의 지지를 만드는 것이 로자의 당시 주장이었다.  

그러나 12월 23일 창립 대회에 참가한 수백여 명의 대의원들은 대부분 스파르타쿠스 연맹이나 급진 좌파 청년 조직을 통해 들어와 겨우 1년도 안 되어 큰 영향을 미치고 있던 레닌의 혁명에 크게 경도되어 있었다. 대의원 대부분은 로자의 지지자였지만 적극적 선거 참가에는 반대 입장을 내었고 로자 역시 큰 반대 없이 공산당의 다음 투쟁 노선에 찬성표를 던졌다. 실제로 그녀는 베를린에서 당을 지도하며 혁명에 지도부로서 활동하였다. 그렇다고 공산당이 선거를 아주 준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바로 다가오는 1월 19일이 총선일이었고, 여러 여론 조사에서 신생 공산당은 유의미한 지지를 얻으며 의석을 얻을 것이 확정된 상황이었다. 

 


준비되지 않은 혁명


베를린은 범좌파의 지지세가 강한 곳이었고 그중에서도 공산당에 많이 동조하는 곳이었다. 베를린 경찰 총국의 총장 또한 독립사민당과 공산당의 지지자였기에 활동 또한 편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어떠한 절차도 거치지 않고 베를린 경찰 총장과 시정 내의 노조원들을 일괄 해고 했으며, 해고 통지서도 해고자 본인이 아닌 아예 기업 노동조합에 보내버렸다. 

당연하게도 총장과 공무원들의 복직을 요구하며 기업 노동조합은 베를린에서 총파업을 강행했으며 사민당은 이때를 노리고 바로 준비되어 있던 자유 군단을 풀어 파업을 잔인하게 억압했다. 수십만의 노동자들이 동조 파업을 시작하고 기업 노동조합의 지도부는 공산당, 독립사민당, 사민당 좌파에게 파업을 지지할 봉기를 일으켜 주기를 요청했다. 공산당 지지세의 노동자/병사 평의회들이 무장하며 봉기를 시작하면서 1월 봉기의 막이 올랐다. 

그러나 해고자 복직과 사민당 정권 비판 이외의 강력한 대중적 요구가 부재한 상태에서 혁명은 지지부진했다. 한때 100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키고 스파르타쿠스 연맹 조직이 베를린 시내를 장악했지만, 거기까지였다. 혁명은 철저하게 그들만의 세상이었고 외부에서는 그 어떤 동조 움직임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음
봉기가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해방구들이 점차 점령되면서 봉기군은 베를린의 신문사에 갇힌 꼴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로자와 리프크네히트에게는 공산당과 수십만 당원, 지지자들이 있었고 사회민주당 또한 독립사회민주당의 중재로 반란군과 마지막 협상 중이었기에 공산당원들은 로자에게 탈출을 종용했다. 

그러나 로자는 탈출을 거부하고 체포당했다. 로자는 자유 군단에게 체포되어 감옥으로 가는 동안 의도적으로 길거리에서 조리돌림을 당하다가 개머리판으로 얻어맞고,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들이여, 단결하라!"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살해되었다. 그리고 스파르타쿠스 사건의 또 다른 주역 중 한 명이자 로자의 동지인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 또한 같은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이 사건은 훗날까지도 좌파 진영 내 독일 사회민주당과 독일 공산당의 협력을 막는 원인이 되었으며 독일 공산당은 코민테른 성립 후, 이오시프 스탈린의 지령 아래 사회주의 파시스트와 부르주아 의회제도 공화국을 타도한다는 명분 아래 지속적으로 여러 번 폭동을 일으키며, 나치당과 함께 바이마르 공화국 근간을 흔드는 원인이 되었다. 스파르타쿠스 연맹의 생존자를 중심으로 성장한 독일 공산당이 독일 사민당과 지속적으로 반목하며, 결국 나치에게 정권을 내줄 때까지 갈등하며 반목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좌파 일각에서 '개혁주의'와 타협할 수 없는 근거로 들먹여질 정도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에서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1919년 1월 15일 베를린의 밤, 에덴호텔 중앙홀로 군인들은 한 유대인 여자를 질질 끌고 나왔다. 그를 둘러싼 자유 군단(Freikorps) 소속 군인들은 그에게 야유와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저거 뭐야. 그 늙은 창녀잖아!”

한 군인이 그녀의 머리와 관자놀이를 개머리판으로 후려치고 있었다. 패전 후에 그들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빌헬름 2세의 퇴진과 군대의 해산을 요구하는 선동가 로자 룩셈부르크를 비밀리에 제거하기 위해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녀의 입과 코에서 핏덩어리가 물컹물컹 쏟아져 내렸다. 그녀의 시신은 란트베어 운하의 다리로 옮겨졌고 물속으로 던져졌다. 

다만 이와 다르게 자유 군단이 로자를 사로잡은 뒤 살해한 다음 감옥으로 이송 중 성난 군중에게 린치되었다고 발표했다는 말도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를 다룬 영화와 다큐멘터리 양쪽 모두에서 이렇게 묘사되었다. 

당시에는 시체도 찾지 못했다.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도


'붉은 로자도 사라졌네 / 그녀의 몸이 쉬는 곳조차 알 수 없으니 /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유를 말했고 / 그 때문에 부자들이 그녀를 처형했다네' 


라고 시를 쓴 바가 있다.

운하에 던져진 로자의 시신은 5월 31일에 발견됐으며, 이후 혁명 동지들과 함께 베를린의 프리드리히스펠데 공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극우 반공이었던 나치 시기에 훼손된 적이 있었지만, 이후로도 1월마다 꾸준히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되었다. 또한 란트베어 운하의, 로자가 물속으로 던져진 곳에는 추모 조형물이 설치되었다. 

 

사망 배경에 얽힌 독일 사회주의사


독일 사회민주당은 1913년 제1정당이 될만큼 입지를 굳혀나갔고, 피를 거의 흘리지 않은 독일 혁명으로 카이저의 제국 정부의 자리를 사실상 군부의 동의 속에 인수했다. 즉 독일 사회민주당은 주류 세력 중 하나였다.

따라서 독일 사회민주당은 로자 룩셈부르크와 달리 이미 장악한 정권을 가지고 혁명을 일으키는 산통을 깰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혁명을 들먹였다가는 볼셰비키와 같은 패거리냐는 의혹으로 우파 세력의 반란을 낳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사회민주당이 과거 사회민주당원이었던 또 다른 좌파를 공격함으로써 좌파의 대분열을 낳았고, 나치당과 히틀러의 부상에 맞서는 대연합 전선을 구축하지 못하게 해 히틀러의 집권에 기여하게 되었다. 

반면 비판자들 중에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같은 혁명을 일으키려는 세력들이 오히려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치당과 같은 과격한 정치 집단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인정을 받은 것은 바로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키려는 집단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로자의 혁명 역시 공상적이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스파르타쿠스 연맹에 기반한 독일 공산당조차도 로자의 노선보다는 비슷하지만 룩셈부르크는 혁명과 민중의 자발성을 강조했다. 문제는 공산당은 (정권을 잡을 수는 있어도) 결국 나치당도 자연히 망할 거라고 믿고 독일 사회민주당과 반목하는 한편, 혁명을 시도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즉, 룩셈부르크의 노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차라리 그의 노선과 주장은 저런 수직적, '과학적' 사회주의 혁명론이 아닌 노동자, 농민 자체의 자발성, 자치성을 강조하는 아나키즘이나 자유 지상주의적 사회주의 운동이 강했던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에서 오히려 더 각광을 받았을 정도다. 

전후 동독에서 그를 기념하여 로자의 우표를 발행하고 로자의 동상을 건립해 의장대가 지키게 했다. 베를린 U반에도 로자의 이름을 붙인 로자 룩셈부르크 플라츠역이 있었을 정도.[9] 그는 반레닌주의자로서 레닌주의를 비난했으나, 의외로 친소 국가인 동독이 기념한다는 게 특이한 점이다. 

한편 고향인 폴란드에서는 그가 폴란드 독립보다는 세계 혁명을 주장한 점 때문에 평가가 좋지 않다고 한다. 심지어 공산주의 체제 시절에도 룩셈부르크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았다.

 

 

사상


레닌과 대립했다는 부분에 있어 좌파 공산주의자로 오해되기도 하지만, 룩셈부르크는 스스로 좌파 공산주의자로 인식하지 않았음은 물론 후대 좌파 공산주의자들도 룩셈부르크를 그들의 사상적 지주로 여기지 않았다. 도리어 룩셈부르크는 민족 문제 등 일부 쟁점을 제외하면 레닌과 비슷한 입장을 견지했다. 

룩셈부르크의 저작으로는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Das Kapital)에 대한 해설이 있다. 그가 주장한 대표적인 이론으로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혁명론이다. 이는 1905년 러시아의 소비에트 운동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혁명에서 대중들의 자발성을 옹호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녀는 전위당을 통한 혁명을 주장하던 블라디미르 레닌과 정치적 입장이 약간 갈리긴 한다.

그렇다보니 그의 말 중 가장 많이 인용되는 말이 바로 이 대목이다. "사회주의는 노동자의 이름으로 독재를 행하는 훌륭한 사람들이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라는 것은 노동자의 자기 해방이 아니면 안 된다. 누구도 당신을 위해 사회주의를 가져다줄 사람은 없다." 

때가 때인지라 독일에 망명했었던 블라디미르 레닌과는 절친한 동지였다고 한다. 특히 사민당이나 멘셰비키에의 비판에 대해서는 말이다. 하지만 1917년 러시아 혁명 직후 제헌 의회를 구성하는 총선에서 레닌의 볼셰비키 당이 패배하자 의회를 무단으로 해체한 것에 대해서 맹렬하게 비판했다. 평의회에 기초를 둔 대중들의 자발적 조직에서 발원한 러시아 혁명에서, 의회의 해체는 대중들의 참여를 배제하는 기제로 작동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여성 문제에 대해


여성주의자이자, 과격파 공산주의자였던 로자 룩셈부르크지만, 유명한 서프러제트 운동에는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당시 서프러제트 운동이 부르주아 여성들의 참정권 운동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남성 특권’에 맞선 투쟁에서는 사자처럼 행동하는 부르주아 여성들은 대부분 참정권을 얻고 나면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반동 진영의 유순한 양이 될 것이다.”라는 말도 했다. 또한 여성해방론,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원조인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와 클라라 체트킨과 가까이 지내며 여성의 날을 제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민족 문제에 대해


피식민 국가의 민족주의를 중요한 혁명적 운동으로 본 블라디미르 레닌과 달리, 룩셈부르크는 민족주의에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룩셈부르크는 폴란드 사회당의 사회주의자와 함께 투쟁했는데 당시 사회당은 좌파 민족주의 성향이 강해 러시아 노동 계급보다 폴란드 지배 계급과 연대하는 것을 더 우선시했다. 그렇다 보니 룩셈부르크는 민족주의가 국제 노동자 계급의 단결을 저해하는, 조속히 해체되어야 할 이데올로기로 바라보게 되었다.

 

 


제가 이 사람의 이론에 100퍼센트 동의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문제의식에 의미 있는 것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 대중의 자발성에 대한 그의 확신은 다소 지나치고 너무 감성적이기도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믿음과, 그것에 기초한 민주주의에 대한 상상력은 엘리트에 의해 주도되는 민주주의의 폐단을 일찍이 간파했다는 점에서 음미할 바가 큽니다. 또 한 가지 그는 짧지 않은 그의 생애에서 한 번도 뒤를 돌아다보지 않았습니다. 너무 일찍이 그리고 너무 빈번히 뒤나 옆을 둘러보는 사람들과 좋은 대비가 됩니다. (...) 아무튼 미완성이고 부족한 것이 더 많았던 이 나이도 아주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온 생애라는 점에서 (...)  
노회찬 인터뷰 中, 2004년

 


의외로 노회찬이 가장 존경하던 인물이었다고 한다. 1996년 노회찬이 독일에 방문했을 때 현지에서 공부하던 친구이자 사회학자 이진경과 함께 그의 묘를 참배하고, 장미와 소주를 사 올리기도 했는데 당시의 사진이 남아있다. 
같은 혁명가인 남편 레오 요기헤스(1867~1919)와의 로맨스로도 유명하다. 로자가 더 사랑하는 경우였는데, 결혼 생활보다는 혁명에 정신을 쏟은 남편과 그래도 나름대로 결혼 생활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로자의 심리가 드러나는 편지를 읽으면 로자가 심히 안쓰러워진다는 평이 많다. 로자와 같은 유태인이었던 레오는 로자가 죽고 두 달도 안 돼 똑같이 살해되었다. 향년 51세. 그는 로자의 죽음의 진실을 밝힌 뒤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인다. 


이상의 시에서 가끔 언급되는 인명이기도 하다.
그가 살해된 뒤 5개월 뒤에 시신 1구를 건져 매장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묘지가 파괴되어 시신이 사라진 뒤, 2009년 5월에 그의 시신으로 추정되는 머리와 손발이 없는 시신이 한 법의학 연구실의 지하에서 90년 만에 발견되었다. 당시에는 두개골 수집이 인기라서 머리가 없고, 시체를 유기할 때 돌을 묶었기에 손발이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한국 군사 독재 시절 철통같은 금서, 검열 풍토에서도 사회주의자였던 로자 룩셈부르크의 평전이 검열을 통과한 적이 상당했다고 한다. 국가 이름인 룩셈부르크로 착각했기 때문. 정작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의 책은 맑스로 착각돼서 검열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1986년에 로자 룩셈부르크를 다룬 영화가 나왔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자유란 이름으로 2010년 12월 12일 ZDF에서 다큐멘터리가 방송되었다. 

게임 Hearts of Iron IV의 대체 역사 모드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도 등장했는데, 0.23 패치 전까지는 폴란드의 생디칼리슴 지도자를 맡고 있었다. 또한 러시아 적군계 인사에 의한 레닌주의도 존재하는데, 레닌주의 파벌은 현실과 달리 급진 사회주의 파벌로 나온다. 본편에서는 룩셈부르크가 공산주의 국가가 될 때 변경되는 이름이 로자 룩셈부르크이다. 

대통령 각하 만세라는 대체 역사 소설에서는 독일이 1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하면서 죽지 않고 저항 활동을 하고 있으며 결국 폴란드 독립을 성공시킨다. 얄마르 샤흐트에게 악마에게 영혼을 판 폴란드 갈보년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소설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극우 쿠데타에 염증이 난 독일 국민들의 투표로 사민주의와 같은 좌익계 정당이 의석을 많이 차지한 덕에 스파르타쿠스 봉기가 일어나지 않았고 원래 역사와 다르게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살아남을 수 있었다. 폭력이 아닌 민주주의와 같은 투표로 혁명이 가능하다고 믿는 인물이라 적백내전으로 극단화된 코민테른과 노선을 달리한다. 작중에 등장하는 마르가리타 얀코프스카[16]의 동지로도 등장한다. 이웃한 지역에 살았고 여성 폴란드 혁명가가 흔하지 않아서 서로 만나서 토론하고 민족과 계급에 대해서 토론을 자주 나눴다. 

 

 

관련 서적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상》
노동자 연대 측 출판사인 책갈피에서 영국의 트로츠키주의자 토니 클리프가 쓴 책을 번역한 책이다. 말 그대로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상을 개략적으로 정리한 책이다. 그 어려운 "자본의 축적"도 이 책에서 개략적으로 다루고 있고,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에 반대하며 혁명을 준비했던 로자 룩셈부르크를 알 수 있는 좋은 책이다. 레닌과 스탈린 이래 소련이 나아간 노선을 비판하는 관점에서 서술된 책이기 때문에 소련을 사회주의로 규정하지 않고, 국가 자본주의로 규정한다. 입문 차원에서 읽어볼 만하다. 
《레드 로자》
로자 룩셈부르크의 일생을 개략적으로 다룬 그래픽 노블. 다만 특성상 로자 룩셈부르크를 미화하고 반대되는 인물들을 폄하하니 주의하자. 단적으로 노동자 출신으로 노조 활동으로 정계에 입문한 에베르트를 살짝 기회주의자처럼 묘사하였다. 
《정치 경제학 입문》
로자 룩셈부르크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입문하는 사람들을 위해 적은 글. 말 그대로 '입문'이기에 사회주의 고전들 중에서는 매우 읽기 쉬운 편이다. 로자 특유의 '자본 축적론'에 대해서도 간략히 지나가듯이 나온다.
《자본의 축적》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사회 민주주의의 위기》
《러시아 혁명》

 

 

 

 

RED DREAMS AND THE NEW MILLENNIUM: NOTES ON THE LEGACY OF ROSA LUXEMBURG 


Rosa Luxemburg always seemed larger than life. An intellec-tual and a social activist, possessed of enormous charisma, she exacted tremendous loyalty from her friends and often a grudging admiration from her enemies. Many of you undoubtedly know about her struggles as a woman and a Jew in the socialist labor movement and her martyr’s death at the hands of the Freikorps during the Spartacus Revolt of 1919. Her letters published following these events, and the castigation of her legacy during the "bolshevization" of the KPD during the 1920s, provide abundant evidence of her courage, her sensitivity, and her humanism. None of this, however, gives her any particular salience for the present. Luxemburg disliked turning personal issues into political ones. She would have remarked that there were many less heralded men and women—just as sensitive and just as brave—who died just as tragically. Luxemburg would have said: "look to my work." 

*The following is the text of a lecture given at the Rosa Luxemburg Foundation in Berlin on June 19, 2000.


Especially in our neoliberal culture, however, her form of principled political engagement has become as unfashionable as the values she held dear. Luxemburg was consistent in her attacks upon the unprincipled quest for purely economic reform and unwavering in her contempt for authoritarianism. She was a Marxist with a romantic vision of revolution and an economistic belief in the ultimate "breakdown" of capitalism. She remains the most important representative of a libertarian socialism inspired by internationalism, economic justice, and a radical belief in democracy. 


Appropriating her legacy, however, involves more than regurgitating the old slogans and searching for citations from her pamphlets and speeches. Luxemburg was no slave of Marx. She knew things had changed since his time and she worried publicly over the "stagnation of Marxism": the outmoded claims about political events inherited by the party regulars, including the independence of Poland, no less than the unresolved questions about the workings of capitalism. Since her death, even more profound changes have taken place. And what is good for the goose is good for the gander. The same critical method Luxemburg employed against Marx must now be turned against what appears inadequate about her own views. It is indeed a matter of freeing thinking from an outmoded teleology and drawing the political consequences. Perhaps the following will offer some steps in the right direction.


Orthodoxy had little appeal for Rosa Luxemburg. But she too believed that capitalism would create its own gravediggers. And if she liked to quote the famous line from Engels that the future hinged on the choice between "socialism or barbarism," no less than most of her contemporaries, she knew which would ultimately prove victorious. Everything about her politics derived from her understanding of capitalism and its impact upon the agent for its transformation: the proletariat. Indeed, from the very beginning, she intuited that the political power of capital rested on the degree of organizational and ideological disunity among workers.


Luxemburg's concern with internationalism followed from this insight and her dissertation written at the University of Zurich, The Industrial Development of Poland (1898), already provided the outline for her distinctive critique of national self-determina-tion. Polish independence had been a demand of the left for generations and it was echoed by Marx and most of his followers. In her dissertation, however, Luxemburg argued that Polish independence would only slow the progress of capitalist development and thus the growth of the proletariat within the empire as a whole. Unqualified support for this goal would privilege symbolism over the need for a constitutional republic to replace the imperial regime. The arguments of Marx and his followers, she maintained, were actually anti-Marxist and self-defeating. 


Luxemburg saw any endorsement of nationalism a breach of proletarian principle. Her work highlighted the way it strengthens capitalism by dividing workers, justifies the wars in which they will fight, and inhibits their ability to deal with what she correctly considered an international economic system. She would develop these themes further in her major economic work: The Accumulation of Capital (1911). 


This work, too, was critical of views taken for granted in the labor movement. Marx had claimed that capitalism is based on investment and without it the system will collapse. But he also maintained that production will outstrip demand and, subse-quently, there seemed no reason why capitalists should continue to invest. Something within the very structure of capitalism must, she reasoned, allow for the consumption of its surplus and thereby offer an incentive for ongoing investment. Imperialism was her answer. 


New markets and cheap resources, the prospect of modernizing pre-capitalist territories, seemed to provide the safety valve for capitalism. More than that: she viewed their existence as the condition for the survival of capitalism. Should these precap-italist territories ever become capitalist in their own right, which the dynamics of economic production guaranteed, then the international system would suffer an immediate “breakdown.” But that remained for the future. In the meantime, spurred by their own self-interest, Luxemburg believed capitalist states would fanatically compete with one another for a steadily diminishing set of colonies. She saw militarism and nationalism intensifying with the growing imperialist ambitions engendered by capitalism. Luxemburg considered none of this open to reform. She understood war as an intrinsic element of the capitalist system. Thus, the need for revolution. 


No less than most social democrats, she longed for a republic. The European labor movement prior to World War I functioned on a continent still dominated by monarchies and the commitment to a republic was the political dividing line between right and left. Conservative programs everywhere called for authoritarian institutions and restraints on "the masses." Social provided the alternative vision. Insisting that the working class would expand with the expansion of capitalism, assuming that its parties embodied the proletarian class interest, it only made sense to call for the creation of political institutions in which the labor movement could organize freely and ultimately rule as the majority. 


Luxemburg was never a utopian: the new socialist society was always identified with a certain institutional arrangement for the practice of politics. Her critique of "revisionism" in Reform or Revolution (1899), which made her famous in the labor movement, was far less based upon contempt for reform than on how an unqualified "economism" undermined the revolutionary commit-ment necessary to institute a republic. Luxemburg herself fought for numerous reforms including the forty hour week. She did not reject reform out of hand, but believed it should be employed to whet the appetite of the masses for more radical demands. Luxemburg was no different than Kautsky or Lenin or most other members of the socialist left regarding the connection between reform and revolution. She was unique only in her understanding of what was necessary to bring the revolution about and the purpose it should serve. This indeed was what she sought to articulate in Mass Strike, Party, and Trade Unions (1906).


The Russian Revolution of 1905, what Trotsky called the "dress rehearsal" for 1917, was its inspiration. A series of spontaneous strikes beginning in Baku in 1902 gradually engulfed the Russian Empire. These seemingly spontaneous actions were, of course, indirectly influenced by years of often underground party activity. Luxemburg employed this insight in developing a general standpoint. The party should involve itself less in pursuing its immediate organizational interests than forming the perquisite consciousness required by the proletarian masses for the political struggle. The relation between party and base should retain a certain "creative tension" in order to mitigate the bureaucratic tendencies of the former and the adventurist experiments of the latter. 


This is exemplified, according to Luxemburg, in the mass strike and herein lies the core of her notion regarding the "self-administration" of the working class. Deriving from a tradition reaching back to Rousseau, and the Paris Commune, the idea of democracy is seen as demanding the practical exercise of democracy. The republic would serve as the formal framework in which the substantive exercise of democracy would take place and workers would be able to administer their own affairs. Her beautiful letters written amid the factory takeovers in Warsaw during 1905 evidence her enthusiasm for the burgeoning "soviet" or "council" movement and the introduction of democracy into everyday life. 


But this new enthusiasm never fully supplanted her original goal. Luxemburg intuited that only a republic could guarantee the maintenance of civil liberties. Genuine democracy is not simply equivalent with the will of the majority, she realized, but with the ability to protect the minority. Her famous line from The Russian Revolution (1918) was not simple an apercu. There is a sense in which her entire political project rested on the belief that "freedom is only and exclusively freedom for the one who thinks differently." 


Luxemburg foresaw how the communist suppression of bourgeois democracy in 1917 would unleash a dynamic of terror ultimately paralyzing the soviets and undermining public life in the nation as a whole. Even in 1919, while the Spartacus Revolt was brewing in Germany, Luxemburg vacillated between her traditional commit-ment to a republic and the new popularity of workers' councils. Only when she was outvoted would she completely identify with the "soviet republic" (Raterepublik) and the policy of her less sober followers intent on emulating the events in Russia. 


The Russian Revolution indeed inspired revolutions through-out Europe and the formation of communist parties around the world. Luxemburg was skeptical about the plans for a Communist International. She was fearful about its domination by the fledgling USSR and the identification of socialism with its interests. Authoritarianism was not understood by her as some historical “deviation” demanded by the present, which the dialectic would set right in the future, but as an infringement upon that future. She considered neither the party nor the revolution as an end unto itself. It was the rights of working people with which Rosa Luxemburg was concerned. This ultimately made her a rebel in both major camps of the labor movement. It is also what makes her salient for the present 


Rosa Luxemburg lived during what has appropriately been called the "golden age of Marxism." The years between 1889-1914 witnessed a growing labor movement with a thriving public sphere whose political parties were everywhere making an ever greater claim to power. It was a time when each could see the socialist future appearing as present. That time is over. Marxism can no longer be construed as a "science;" the industrial proletariat is on the wane; and the labor movement is obviously no longer what it once was. 


"Actually existing socialism" had its chance and little suggests that workers' councils can either deal with a complex economy or guarantee civil liberties. New utopian speculations cannot compensate for the lack of any serious institutional alternative to the liberal republican state. The political goal of the revolution initially sought by Luxemburg has been realized. Presenting socialism as the other, the emancipated society, no longer makes sense. It is necessary to approach the matter in a different way. 
 

Modern capitalism is no longer the system described by Charles Dickens. Its liberal state has been used to improve the economic lives of workers, foster participation, and provide the hope for a redress of grievances. Luxemburg was wrong: the choice is not between socialism or barbarism. Not only has history shown that the two are not mutually exclusive, it has also shown there is much room in between. The issue is no longer capitalism in the abstract, or even the erection of socialism, but the need for a response to neoliberal elites intent upon rolling back the historical gains made by the labor movement in the name of market imperatives. 


Or putting it another way: the contemporary problem is not the prevalent commitment to economic and political reform, which concerned Rosa Luxemburg, but the lack of such a commitment. Revolution is simply not the issue in the western democracies and this, in turn, has general implications for the meaning of socialism under modern conditions: it must be redefined as a practice intent upon mitigating the whip of the market through the state and abolishing the exercise of arbitrary power by the state. 


Such an entire enterprise is predicated on little more than an ethical commitment. Teleology, if not ideology, has lost its allure. Capitalism can survive and, more importantly, most people believe it will. Luxemburg was mistaken in maintaining that imperialism is the only way of dealing with overproduction. Capitalist governments can ward off disaster by subsidizing industries, manipulating fiscal policies, and introducing welfare legislation. Capital itself can reorganize and, if necessary, intensify exploitation. The success of neoliberalism may indeed show the validity of Luxemburg's claim that the fight for economic reform is a "labor of Sisyphus." 


Without an articulated alternative and a meaningful form of revolutionary agency, however, it is still necessary to roll the rock of reform back up the hill. This cannot be left in the hands of social democratic and even many ex-communist parties intoxicated by neoliberalism and the unprincipled compromises associated with the "third way" or what is now being called "progressive governance." Those with more radical beliefs in social justice must now look not merely to workers, but the new social movements. Justice is a river with many tributaries. Women and gays, minorities and environmentalists, have a stake in protecting the gains made by labor in the past as surely as labor has a stake in furthering many of their concerns in the future. The mass demonstrations in Seattle and Washington during 1999 and 2000 provide a case in point: they not only exerted real pressure on the Democratic Party, and momentarily united competing groups in a spirit of internationalism, but raised precisely those calls for international labor standards and environmental protection repressed in the mainstream discourse over globalization. 


Nothing so demeans the internationalist spirit cherished by Rosa Luxemburg like the current insistence of some leftists upon the primacy of ethnic aspirations or national sovereignty over the international obligations of states to the planetary community. The choice between furthering relatively democratic ends through imperfect institutions and allowing genocide in Rwanda or Sierra Leone is no choice at all. Luxemburg was never fooled into believing that insistence upon national sovereignty would align her with the masses of the formerly colonized world rather than the corrupt elites who still rule them in the most brutal fashion. 


Luxemburg may not have anticipated the rise of national liberation movements and she was surely mistaken in believing that World War I had put an end to purely national conflicts. But there was a way in which she understood nationalism far better than her opponents. Luxemburg realized that nationalism like authoritarianism has its own dynamic and that it cannot simply be manipulated for socialist purposes or forestalled by the prospect of economic gain. Instead of relying upon historical "laws," or the march of the "dialectic," Luxemburg correctly insisted on establishing a plausible relation between means and ends. 


Diseases like cholera, dysentery, and AIDS are ravaging continents. Entire species are disappearing, global warming is taking place, pollution is intensifying, garbage is littering the planet. All this while a global society is taking shape in which wealth and resources are becoming ever more inequitably distributed, political power is ever more surely devolving into the hands of transnational corporations, and petty ideologues are ever more confidently whipping up atavistic passions with the most barbaric consequences. The nation state is incapable of dealing with most of these developments and the usual invocations of national sovereignty, or the disclaimer on any form of international intervention under any circumstances, is simply an abdication of responsibility. 
 

No less than Machiavelli and Kant, Luxemburg would have agreed with the dictum: "he who wills the end also wills the means thereto." Either planetary issues of this sort will have the possibility of being dealt with in the international arena through existing international institutions with the powers of sanctioning transgressors or they will assuredly not be dealt with at all. Human rights and new forms of transnational welfare policy constitute the only concrete hope for a livable planet.  


The question facing the left is whether to embrace outmoded forms of thinking or provide new meaning for an old vision. 


Internationalist, socialist, and democratic principles must be adapted to meet new historical conditions without surrendering their bite. This is no easy undertaking and the possibilities for opportunism are enormous. But, then, Rosa Luxemburg never walked away from a challenge: I don't think she would walk away from this one ei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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