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백제의 제24대(재위:479∼501) 왕.
이름은 모대(牟大) 또는 마제(麻帝)·여대(餘大)라고도 한다. 제22대 문주왕(文周王)의 동생인 곤지(昆支)의 아들로서 담력이 뛰어나고 활을 쏘는 솜씨가 빼어났다. 동성왕(東城王)은 삼근왕(三斤王) 때 병관좌평(兵官佐平) 해구(解仇)의 반란을 평정하고 실권을 장악한 진로(眞老) 등의 세력에 의해 옹립되었다. 진씨(眞氏) 세력은 동성왕이 유년의 나이로 왜에 체류하고 있어 국내의 정치적 기반이 없는 것을 고려해 왕으로 옹립한 것으로 보인다.
삼근왕을 이어 즉위한 동성왕은 웅진천도(熊津遷都) 초기의 정치적 불안을 종식시키고,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처를 취하였다.
금강 유역권을 지배기반으로 한 신진세력들을 중앙귀족으로 등용해 자신의 세력 기반을 구축하며, 한성(漢城)에서 온 남래귀족(南來貴族)과의 세력균형을 꾀해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웅진시대 초기에는 한성시대 이래 왕비족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해씨(解氏)와 진씨, 그리고 목협만치(木劦滿致)를 중심으로 하는 목씨(木氏) 등이 여전히 정권의 중심에 있었다. 또한 정권을 장악하고자 서로 치열한 대립을 거듭하고 있었으며, 왕권조차도 이들의 정치적 향방에 좌우됨으로써 혼란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동성왕은 오랫동안 왜에서 체류하여 국내정세에 정통하지 못했고 정치적 기반도 미약하였다. 또한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음을 감안하면 처음부터 국정을 장악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해구의 반란을 평정하였고 또한 동성왕의 즉위에 절대적 역할을 한 덕솔(德率) 진로가 동성왕 4년 ‘병관좌평겸지내외병마사(兵官佐平兼知內外兵馬事)’로 임명되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동성왕 즉위 초반까지 남래귀족들과의 정치적 타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성왕대 전기는 웅진시대 초기의 관행인 실세귀족을 중심으로 정국이 운영되기는 했지만 후기에는 남래귀족의 활동이 거의 보이지 않는 대신 신진세력들이 중용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동성왕은 정치의 중심지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옮겨진 이상 금강유역에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유력세력들을 주목하게 되었으며, 이들을 등용시켜 실세인 남래귀족들을 견제하고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여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정국을 안정시키려 했다. 또한 유력세력들 역시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자 하는 현실적 욕구가 팽배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신진세력으로는 사씨(沙氏)·연씨(燕氏)·백씨(苩氏) 등을 들 수 있다. 신진세력들은 점차 세력기반을 확대해 동성왕 후기에는 해씨·진씨 등 남래귀족을 대신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게 되어 지배세력에 변화를 초래하였다.
동성왕은 신진세력을 중앙정계에 등용하면서 기반세력의 대소와 충성도에 따라 적절하게 관직을 부여했다. 특히 유력한 토착세력에게는 좌평제도(佐平制度)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좌평직은 백제 최고의 관직으로 중앙 정계에 확고한 기반이 없었던 이들을 등용한다는 것은 매우 파격적인 조치였다. 동성왕대 이전까지 좌평직에 오르는 인물들은 모두 왕족과 해씨 진씨 등 외척세력에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동성왕은 재위 6년에 사약사(沙若思)를 내법좌평(內法佐平), 8년에 백가(苩加)를 위사좌평(衛士佐平), 19년에 연돌(燕突)을 병관좌평으로 등용하였다. 이것은 진씨와 해씨 등 남래귀족들의 전횡을 방지하고 정국을 주도하겠다는 동성왕의 의지가 얼마나 확고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특히 사씨는 백제 왕실의 웅진천도를 계기로 새롭게 중앙귀족으로 진출하였다. 동성왕 6년에 내법좌평 사약사가 남제(南齊)에 사신으로 파견되고 있으며, 17년에는 사법명(沙法名)이 남제와 대립관계에 있었던 북위(北魏)를 격파하는데 공을 세우고 남제로부터 작위를 받고 있다. 사씨는 동성왕대에 대외교섭이 활발히 전개되자 이를 이용하여 대외적 측면에서 활동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적 기반을 다져나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웅진천도 이후 미약해진 왕권은 동성왕대에 크게 회복되었다. 왕권이 강화될 수 있었던 직접적인 이유를 남래귀족을 견제하기 위한 신진세력의 흡수라는 대내적인 정국 운영의 개편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인 외에도 동성왕의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들 수 있다. 대외정책의 성공여부는 내정의 안정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웅진천도 이후 백제는 고구려 수군에 의해 서해의 해상교통로를 차단당했다. 동성왕은 집권 초기부터 남제와의 외교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며 국제적 고립을 타개하기 위해 동성왕 2년 남제에 사신을 파견, 대 중국 외교관계를 재개하였다. 문주왕 2년 고구려의 저지로 대송외교(對宋外交)에 실패한 이후 약 5년만에 재개되는 중국에 대한 외교였다. 이는 남제와의 관계를 통해 적대세력인 고구려와 북위를 견제함은 물론 신라와의 외교관계에서의 주도권 장악과 가야·왜에 대한 정치외교적 우위를 유지하는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동성왕대 남제와의 교섭은 백제가 고구려에 대한 정책을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기반 확립에 커다란 뒷받침이 되었다.
동성왕은 신라와의 외교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에 대처하기 위해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어 신라의 이찬(伊飡) 비지(比智)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그리하여 신라가 살수원(薩水原)에서 고구려와 싸울 때 원병을 파견했고, 고구려에게 치양성(雉壤城)을 공격받았을 때는 신라에 원병을 요청하는 등 공동전선을 형성해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백제와 신라 동맹군의 승리는 양국으로 하려금 고구려의 공세에 대응하는 나제동맹(羅濟同盟)의 필요성과 유효성을 절감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백제와 신라사이의 신뢰는 매우 돈독해졌다.
한편,『남제서』백제전에는 동성왕이 사법명·찬수류(贊首流) 등의 장군을 중국 요서(遼西)지역에 파견해 북위군을 격파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기사는 백제의 요서지역 진출의 근거자료로 활용되고 있으며, 여기에 보이는 왕·후·태수·장군 등의 관명은 백제의 해외경영 문제와 관련해 주목되는 자료이다.
하지만 당시 중국 본토와 만주 상황으로 보아 요서지역이나 산동지방에 백제의 군현(郡縣)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은 적은 것으로 보인다. 설사 존재했다 하더라도 그 군사력만 가지고 북위의 침공을 막아내고 대승을 거두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488년과 490년에 있었던 ‘위로침공’으로 표현된 전쟁은 백제가 고구려군을 격퇴한 것으로 보고 있다.
동성왕은 궁실을 중수해 수도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우두성(牛頭城)·사현성(沙峴城)·이산성(耳山城) 등을 축조해 수도의 방어망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사정성(沙井城)·가림성(加林城) 등을 쌓고 중앙 관리를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이 밖에 탐라(耽羅)가 공납을 바치지 않자 이를 응징하기 위해 무진주(武珍州)까지 출정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궁궐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을 세우고 진귀한 짐승을 길렀으며, 이것을 비판하는 신하의 간언을 물리치는 전제군주적인 풍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동성왕은 신진세력을 등용해 구귀족과 신귀족 사이에 세력균형을 도모하고, 일련의 왕권강화책을 추진해 천도 초기의 정치적 불안정을 극복하였다. 그러나 신진세력이 점차 증대해 왕권에 압력요소로 작용하게 되자 동성왕은 신진세력에 대한 견제조처를 취하게 되었다.
그러한 조처 중의 하나로 공주지역을 기반으로 한 위사좌평 백가를 가림성 성주로 강제로 내보낸 것을 들 수 있다. 동성왕의 이 같은 견제는 백가를 위시한 신진세력의 불만을 초래했고, 마침내 백가세력은 동성왕이 사비서원(泗沘西原)에서 사냥하는 틈을 타서 왕을 암살하였다.
동성왕의 죽음에 대해『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왕이 도(道)가 없고 포학하므로 국인(國人)이 제거했다고 하였다. 이 때의 국인은 백가를 비롯한 반왕파세력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백가세력에 의한 동성왕의 암살은 전제적 왕권강화에 대한 귀족들의 반발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동성왕대에 추구된 일련의 정책은 한성함락 이후 축소된 백제 왕실의 지배기반을 확대시켜 주었고, 나아가 무령왕(武寧王)·성왕(聖王)대의 정치적 안정과 문화발전의 토대를 놓아주게 되었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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