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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道敎), Taoism, 중국 한족 민족종교, 장각, 장릉, 노자, 황로교, 도가는 정치철학, 태평도(太平道), 오두미도(五斗米道), 신선방술(神仙方術), 불로장생

Jobs 9 2025. 5. 12.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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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道敎)

Taoism

성도
중국 산둥성 타이산
시작 시기
기원전 6세기 (논란 있음)
창시자
노자 (논란 있음)
경전
도장(道藏)
신관
다양하나 보통 다신론
근원
도가 사상, 고대 중국 민속신앙

 

중국 한족의 민족종교이다. 중국 본토는 물론 대한민국, 일본, 동남아시아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도가와 헷갈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도가는 정치철학이고 도교는 여기에 당대 중국의 여러 토속신앙을 혼합하여 이것을 종교로서 발전시킨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이 점에 대해선 학자들 간에도 견해가 엇갈린다.

 

고대 중국의 전설상의 통치자 황제와 도가의 이론가라 할 수 있는 노자를 신봉한다고 하여 '황로사상' 또는 '황로교'라고도 한다.

 

 

종교로서의 도교는 종교로서의 유교와 함께 우리에겐 약간 생소한 개념이지만 국외에서는 확실히 종교로 파악한다. 적어도 유교보단 종교적 색채가 훨씬 진한 편으로, 유교처럼 종교인지 아닌지 논란이 되진 않는다. 도가 자체가 세속적인 유가와 달리 탈속적인 특성이 있는데다, 다양한 중국 신앙까지 집대성해 담아놓았기에 확연히 종교임이 드러난다.

 

종교로서의 도교는 삼국지로 유명한 장각의 태평도(太平道)와 장릉의 오두미도(五斗米道)를 시초로 하여 남북조시대에 구겸지가 지금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실제 자신들을 도교라 지칭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이며 당나라 시대에는 국가에서 장려하는 종교로서 힘이 세지기도 했다. 현대 도교는 크게 전진교(全眞敎)와 정일교(正一敎) 등이 있다.

 

중국 외에도 베트남, 태국,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동남아 지역과 화교의 세가 매우 강한 지역에서는 이 종교의 사원 또는 도교와 관련된 장식을 민간 건물 내에서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에서는 이상할 만큼 기세를 못 펴는 종교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재래의 토착 제천신앙/신선 사상과, 이미 토착신앙과 융화를 이루던 불교에 흡수되었고, 일본에서는 음양도와 슈겐도 형성에 일부 영향을 끼치긴 했지만 도교 자체가 특별히 독립교단으로 출현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의 불교와 민간신앙에는 의외로 꽤 많은 도교적 요소들이 녹아 있다.

 

1990년대 말~2000년도에 들어서는 도교 자체를 중국만의 민간 신앙보다는 동북아시아 지역 전체의 자연주의 사상/토착, 민간신앙과 문화의 교류 측면으로 연구하는 관점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는 문화교류사의 발전과도 연결되는 부분이기도 하다.5

 

신자수는 2억 명 정도 한다.

 

 

 

역사

 

 

도교의 기원

 

도관 내부의 모습.

 

 

도교의 시작은 간단하지 않다. 흔히 노자(태상노군)가 창시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옳지 않고, 기본적으로 원래 구성되어 있던 샤머니즘의 토양 위에 도가 사상의 몇몇 내용이 덧붙여져 도교가 발생하고 이후 도가 사상을 지속적으로 흡수해 발전하고, 추가로 유교와 불교의 요소를 받아들이면서 지금의 형태가 이루어졌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보통 도교의 시작을 오두미도(五斗米道)로 보므로, 오두미도 이전과 오두미도까지를 도교의 기원으로 설명하고 오두미도 이후는 도교의 변천사로 설명한다.

 

 

 

오두미도(五斗米道) 이전

 

도교의 기원은 크게 중국의 원시 토착 종교와 신선방술(神仙方術), 도가사상의 세 가지로 나뉜다.

 

 

 

원시 종교

 

고대의 사람들은 자연 현상에 대한 과학적 지식이 부족했다. 따라서 초자연적인 상상력을 이용해 나름대로 자연 현상을 설명해 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애니미즘, 샤머니즘, 토테미즘과 같은 원시 종교들이 생겨났다. 이 중 도교의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원시 종교 형태는 애니미즘과 샤머니즘이다.

 

고대 사람들은 자연 현상의 원인을 '자연 그 자체에 깃든 신비한 힘'으로 생각하고, 자연에는 정령 혹은 신이 깃들어있다고 생각했으며 영력이 강한 사람이 자연의 이런 신들에게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상으로 인해 사람들은 팔신제(八神祭) 혹은 강산제(江山祭) 등 의례를 행하고 도신(跳神: 굿), 점복(占卜), 금기(禁忌), 조험(兆驗: 재앙이나 큰 사건의 징조를 알아채는 것), 참위(讖緯: 예언), 부주(符呪: 부적과 주문)와 같은 무속문화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원시 종교의 무속 문화는 민간신앙에 머무르다가 오두미도의 성립으로 도교에 흡수되어 부록파(符籙派)를 형성했다. 특히 원시 종교에서 비롯된 도교의 부록파의 내용은 민간에서 크게 유행하여 민간도교의 중심 흐름을 이루기도 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도교 부록파의 조선시대 베스트셀러(?)는 정감록이다.

 

 

 

신선방술(神仙方術)

 

춘추전국시대 때부터 이미 중국에는 신선방술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이러한 신선방술을 연구하는 것을 방선도(方仙道)라고 하고 방선도를 익히고 연구하는 사람들을 방사(方士)라고 불렀다.

 

이들의 목표는 불로장생을 위해 신선이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선도의 목표는 도교가 형성될 때 도교의 핵심 내용으로 자리 잡았다. 또 이런 본능에 충실한(?) 목표 덕분에 도교가 민간에서 크게 유행할 수 있었고 상류층에서도 인기를 끌 수 있었다. 목표가 오래 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늙지도 않으면서 편안하게 오래 사는 것'이었기 때문에 민간에서도 인기를 끌 수 있었던 듯. 어쩌면 민간의 백성들에게는 오래 사는 것만큼 건강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이 매력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방선도의 방사들은 크게 두 계파로 나눌 수 있는데, 바로 심선파(尋仙派)와 수선파(修仙派)다.

 

심선파는 "심산유곡에 숨어있는 신선을 찾아가서 신선이 되게 해달라고 하고 영약도 전수받자!"는 파벌로, 삼신산 같은 신선들이 모여사는 가상의 장소를 상상해낸 것도 그렇게 진시황을 포함한 여러 제왕들을 낚아서 울궈먹은 것도 이들이며 이들은 태산, 화산, 형산, 항산, 숭산의 오악(五岳)과 같은 명승지와 심산유곡에는 신선들이 살고 있어 이들을 찾아 불로장생약과 신선술을 전수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수선파는 명산대처에 은거한 뒤 스스로 수련을 통해 신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방파이다. 이들은 연구를 통해 도교의 신선이론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심산유곡에 들어가 각종 광물과 약초 등을 이용해 몸을 깨끗이 하여 신선으로 만들어주는 불로장생약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이들의 신선이 되는 수련법이나 불로장생약 제조법은 이후 중의학(中醫學)의 형성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들의 연구는 이후에 여러 사상적 보완을 거쳐 외단을 제조하거나 내단을 수련하는 방법에 영향을 끼쳐 도교의 단정파(丹鼎派)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심선파와 견주면 여러모로 생산적인 편이었지만, 시대상의 한계를 이기지 못했는지 수은을 불로불사의 약으로 여기고 장기간 복용하다가 단명하기도 했다.

 

신선방술을 연구하는 방선도의 방사들은 이후 장생불로(長生不老), 육신성선(肉身成仙: 육신을 신선으로 만든다)와 같은 도교적 생명관의 기초를 마련하고 도교의 수련법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외단(外丹)과 내단(內丹)' 개념의 형성과 발전에 결정적인 기초를 제공하였다.

 

이 당시의 선술은 진시황의 불로초 전설이나, 마왕퇴 한묘의 백서(비단에 적힌 글)에 그려진 도인법 그림 등으로 그 흔적을 알 수 있다.

 

여담으로 이런 방선도 측의 이론을 보면 중국 본토보다 삼신산, 봉래산 등 한반도와 만주, 발해만 일대를 포함한 동북방 일대가 성지로 두드러지는 측면이 있는데, 이는 방선가들의 주 출신/활동지역이 이쪽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의 방선도는 동북방 지역 사머니즘과의 유사성이 짙으며, <태평경>은 <열선전>에 따르면 조사(祖師)인 백화(淸和)를 요동인으로 적었고, 그 후계자인 간길(干吉), 궁숭(富崇)등도 이민족 문화가 강한 발해만 연안 출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들의 행적으로도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대충 감 잡았겠지만, 당시 방선가들은 지금으로 치면 의사 겸 무당들이었다. 한마디로 '위치닥터(Witch doctor, 주의呪醫)'. 이때에는 신선이란 존재도 방사의 선행과 기도에 응감해 선약을 전해주는 신적인 성격이 짙었다. 또한 한국의 신종교 중 특히 증산계가 종교의 성격적/교리/교단적인 측면에서 유사성이 강해 종교학계에서 연구를 하고 있다.

 

 

도가 사상

 

도가 사상은 도교의 교리와도 연결되는 도교의 핵심 사상이며, 도교의 발전과 함께 도교의 개념과 사상은 계속해서 신선의 수련법에 영향을 끼쳤다. 애초에 도교가 도교라고 불리는 이유도, 도교가 도가 사상의 세계관이라든가 핵심 사상을 받아들이고 함께 발전해 나갔기 때문이다.(물론 도교의 발전 = 도가 사상의 발전이라는 공식은 약간 무리가 있다.) 이 덕분인지, 노자(老子)는 도교의 최고 3신인 도덕천존 혹은 영보천존의 화신으로 여겨지며, 가끔 원시천존 그 자체로도 여겨진다. 또 장자, 열자, 문자, 항상자 등 도가 철학자들은 도교의 신선 혹은 조사(祖師)로 받들어진다.

 

人能修至道,身乃作真仙

사람은 능히 도에 이를 수 있으며, 이에 몸은 진정한 신선을 이룬다.

송휘종 어제 보허사(步虛詞) 4수 중에서

 

도가 사상의 핵심 개념인 도(道)는 일단 도교에서 최고의 가치를 지녔으며, 도를 얻으면, 즉 득도하면 신선이 된다. 또 도교의 이론 체계와 신앙은 도가 사상을 통해서 정립되었다.

 

바로 위에서 설명한 도(道)는 우주와 자연의 궁극적인 원리를 가리키는 말로 뭐라 표현하기 힘들고 특정한 형태나 고정된 정의를 내릴 수 없는 모든 존재와 현상의 근원이자 자연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힘을 의미했다. 인위적인 행위가 아닌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따르는 것을 지향하며 흔히 말하는 무위(無爲)는 억지로 행동하지 않고 자연의 흐름을 따르고 조화를 이루는 것을 말하며 우주 만물의 근본(혹은 근원)으로서 천지와 인간, 그리고 자연을 모두 포괄하며 인간은 도를 따르는 것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었고 우주적, 자연적 질서의 원리이자 삶의 본질적 방향성을 가리키며 인간이 그 흐름을 따를 때 궁극적 조화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형체나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는 그 자체로 눈에 보이지 않고 인식할 수 없는 특정한 형태로 제한되지 않는 모든 것과 존재의 근원이었고 자연이기에 모든 것이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며 여기서 말하는 자연은 인위적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의미하며 인간이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을 이상적인 상태로 보고 자연의 흐름에 맞춰 살 것을 권장했고 우주의 모든 것이 상호 작용하고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의미했고 물처럼 비어 있으되 모든 것을 포용 및 포괄하는 유연성을 지녔고 물이 담긴 그릇에 따라 모양을 바꾸는 것처럼 도 또한 모든 것에 적응하고 저항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품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무한하고 영원하며 시작과 끝이 없는 존재였고 변화하는 모든 현상 너머에 있는 불변의 원리였고 끊임없는 변화의 원리를 내포해서 모든 것이 변화하고 순환하며 이러한 변화 속에서 자연스러운 질서와 조화를 유지하는 힘이었고 모든 것과 존재를 창조하는 힘을 지닌 모든 것과 존재의 근원이었으나 그 자체로 무형이었고 만물이 도로부터 창조되나 그 자체로 고정된 창조의 모습이 없으며 이러한 점으로 신비롭고 무한한 가능성을 나타냈다. 매우 포괄적이고 심오한 우주와 근본적인 원리였고 끝없는 변화의 원리를 내포하고 있어 정적인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며 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도의 흐름 하에 존재하고 소멸하며 만물의 창조와 생성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기에 모든 것과 존재는 이 도로부터 나왔고 그 자체로 창조와 생성을 지탱하는 근본 원리였고 우주적 원리이자 만물(혹은 우주)의 근원으로 모든 것과 존재, 현상을 포괄하고 모든 것과 존재의 창조와 변화, 유지의 원천이며 우주의 조화를 이루고 유지하는 힘이었다.

 

자연과 우주의 균형을 유지하는 능력을 지녔는데 음양의 조화와 오행의 순환은 이 도의 원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우주의 모든 것과 존재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게 하며 만약 갈등이나 불균형이 발생할 때 자연스럽게 이를 조절하고 조화로운 상태로 되돌리며 끊임없는 변화와 순환을 일으킬 수 있어서 우주는 정적인 것이 아닌 도의 흐름 하에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하며 계절의 변화, 생명체의 탄생과 죽음, 주기적인 자연의 순환은 이 도의 변화를 상징했다. 도를 이해하고 따르는 것으로 자연의 힘과 조화를 이루고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그 힘을 활용할 수 있었고 무위(無爲)로서 자연스럽게 모든 일을 이루었고 만물을 창조하고 조화롭게 유지하며 변화와 순환을 일으키는 우주의 근본적인 능력이었고 우주의 질서를 통제하고 유지하는 힘으로 작용해 우주의 모든 변화와 운동은 도의 힘에 이루어지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모든 것과 존재를 창조하고 조화를 이루며 자연스럽게 변화시키는 본질적 힘을 지녔고 무위의 힘, 포용과 변화의 힘, 생명력과 치유의 힘, 우주와 인간을 변화시키는 영적인 힘으로 나타나며 모든 존재와 현상을 포괄하는 우주적 힘의 원천이었다. 음과 양 등 반대되는 것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포괄했고 영원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특성을 지녀 불변하고 시간을 초월하는 원리임에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주의 형태와 현상을 통해 나타났고 경계가 없고 형태가 없고 무한히 적응하기에 종종 공허 혹은 공허와 연관되었고 우주 만물의 근원으로서 모든 것과 존재를 나오게 하고 창조하게 하는 한편 다시 도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창조의 원리였고 모든 존재와 생명에게 영양을 공급하고 차별이나 노력 없이 존재하는 모든 것과 존재를 지탱 및 유지하고 흐르는 강물처럼 도는 세계와 우주에 생명을 주고 균형을 유지했다.

 

 

 

무축도(巫祝道)와 황로도(黃老道)

 

무축도는 원시 종교의 무속 문화가 체계적으로 정립된 것이다.

 

황로도는 황로학파와 방선도가 결합한 것인데, 황로학파란 춘추전국시대 각 제자백가 학파의 여러 인물들이 제나라에 모여 자유롭게 학문을 토론하던 직하학궁稷下學宮에서 생겨난 학파로, 황제(黃帝)의 황과 노자(老子)의 노를 딴 것이다. 도가의 사상에 유가와 묵가의 적극적인 사회, 정치참여 정신을 흡수하여 도가의 소극적인 은퇴사상을 극복한 학파였다. 황로학파는 도가 사상의 원칙에 따른 정치술을 주장하였으나 한 무제 때 유학 위주 정치체제에 밀려 정치적인 영향력을 상실하고 방선도와 영합하게 되어 노자와 황제를 신격화하는 종교인 황로도가 되었다.

 

그리고, 동한 순제 때에 오두미도의 창시자인 장도릉(張道陵)이 오두미도(=천사도)를 창시하고, 영제 때 우길의 진전을 물려받은 장각이 태평도를 창시하면서 본격적으로 도교가 성립하게 되었다.

 

 

 

오두미도(五斗米道)와 태평도(太平道)

 

도교의 시작은 보통 오두미도로 보고 도교의 창시자는 오두미도의 창시자인 장도릉으로 보는데, 태평도가 있음에도 주로 오두미도만을 도교의 근원으로 보는 이유는, 태평도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삼국지의 군웅들에게 패퇴당하고 결국에는 천사도(=오두미도)로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태평도는 장각이 태평경(太平經)을 얻어 창시했다. 태평경은 도덕경을 계승하여 '도를 천하의 어머니로 삼고, 도는 만물을 낳는다'는 사상과 함께 불로장생의 방술과 신선이 될 수 있는 신선술 그리고 무격에 대한 내용이 실려있었다. 장각은 태평도를 창시하면서 태평경에 언급된 이상적인 사회를 실현시키고자 했다. 그는 스스로를 태현양사(太賢良師)라 칭하였으며 제자나 신도들을 받아들일 때 먼저 머리를 조아리고 자기가 지은 모든 죄를 고백하여 사죄하게 하였고, 부적을 내리고 주문을 외우면서 질병과 재앙을 소멸하는 의식을 행했다. 이렇게 교화를 시작한 지 십 수년 만에 수십만 명이 가담하여 조직을 종교와 군사의 합일 조직인 36방(方)으로 만들고 방마다 거수(渠帥)라는 통속자를 두었다. 그 뒤 장각은 교도들을 이끌고 반란하여 '황건적의 난'을 일으켰으나 10개월 만에 진압되어 남아있는 사람들은 천사도(=오두미도)에 가담했다.

 

오두미도의 교주 장로는 한중을 차지한 뒤 태평도처럼 폭력적으로 확장을 꾀하는 대신, 한중 지역을 종교 사상에 입각해 평화롭게 통치하는 것에 만족했다. 이후 조조가 장로를 토벌하러 왔을 때 장로는 패배를 앞두고 도시를 태우고 도망가는 대신 순순히 항복했고, 조조는 이를 높이 사 장로를 열후에 봉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이 덕분에 오두미교는 탄압당하며 사라지지 않고 도교로 발전하며 후대까지 이어질 수 있게 되었다.

 

오두미도는 '천사도(天師道)'라고 불렸는데, 태상노군이 장도릉을 삼천법사정일진인(三天法師正一眞人)으로 봉했다고 하여 그를 장천사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오두미도라고 불린 이유는 입교할 때 신도들에게 쌀 다섯 되를 받았기 때문이다.

 

천사도, 즉 오두미도의 교조는 노자, 주요 경전은 도덕경이며, 장도릉은 특별히 '노자상이주(老子想爾注)'를 지어 교리를 정하였다. 노자상이주에서 장도릉은 도는 하나(一)이고 "하나의 형체가 흩어지면 기가 되고, 형체가 모이면 태상노군이 된다."라고 하여 노자를 '도道의 화신'으로 규정하였다. 또 도서(道書) 24편을 저술하여 천사도의 심오한 뜻과 교도들의 행동강령을 가르쳤다.

 

교구를 24개 치(治)로 나누고 제주(祭主)를 두었는데, 제주는 한 구역을 책임지는 수장으로 신도의 교화와 제사 등을 주관하는 법사(法師)의 역할을 했다. 또 그는 정실(靜室)을 설치하여 신도가 재계하고 기도하며 회개하는 장소로 삼았다.

 

천사도의 1대 교주 장도릉은 122세(!) 되던 해에 교의 최고 지도자들을 소집하여 천사의 직위를 아들 장형에게 넘겨주고, 더불어 역대 천사는 그의 적손들에게 전승토록 했다. 그리고 그의 손자가 바로 그 삼국지의 장로다. 이후 천사도는 용호산을 본산으로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었지만, 중국에 공산당이 들어선 이후에는 대만으로 이주하여 거기서 명맥을 잇는다.

 

 

 

도교의 변천사

 

천사도 이후로 도교는 계속해서 발전을 거듭했는데, 도교는 오랜 세월을 거치며 꾸준히 이론을 보완, 발전시켜 왔고 유교와 불교의 삼교가 서로서로 영향을 미치며 경쟁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도교의 변천사를 여기에 모두 적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도교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과 함께 그들로 인한 도교의 변화의 흐름만을 간략하게 적도록 한다.

 

 

 

위진남북조시대

 

천사도 이후 도교가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립해 나가는 시기다.

 

위촉오 삼국시대에 오나라에는 갈현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태극갈선옹(太極葛仙翁)이라고 불렀다. 그는 천태산(天台山)에서의 다년간의 수련을 통해 득도한 후 상청(上淸), 삼동(三洞), 영보(靈寶) 등의 경전을 전수하였는데, 이후 증손자 갈소보가 영보파(靈寶派)를 창립하였다. 이 세 경전은 이후 여러 후인들에 의해 발전되어 도교의 중요한 맥을 이루었다.

 

동진 때에 있었던 도교 역사상 첫 번째 여도사이자 여학자인 위화존은 명문가 출신으로서 어려서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신선술에 관심을 두게 되어 천사도에 가입했다. 위화존은 도교의 양생이론을 깊게 연구하여 삼단전(三丹田), 팔경(八景), 이십사진(二十四眞) 등 양생이론을 만들었고, 수련 경험을 글로 남겼다. 또 팔색은서, 태상보문, 태동진경, 황정, 치정제귀법등의 경전을 수집, 연구 끝에 일련의 완성된 교리와 교의를 갖추었는데, 후에 모산파는 위화존의 이론을 기초로 삼고 위화존을 자신들의 시조로 받들었다. 위화존 덕분에 도교의 양생술과 여러 수련법은 의학과 함께 체계적으로 정립되었고, 각 교파의 조사들이 변형하여 다양한 양생법이 세상에 나왔다.

 

동진 때의 저명한 도학자인 갈홍은 연단과 의학에 정통했다. 그는 종조부 갈현의 호인 갈선옹을 따라 소선옹小仙翁이라 일컬어지기도 하는데, 스승인 정은에게 연단비술(煉丹秘術)과 갈현의 비법을 남김없이 전수받았다. 그는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나부산에 들어가 득도를 하고 연단과 저술 활동을 하였는데, 특이하게도 갈홍은 신선방술과 유가의 삼강오륜을 결합하여 충효와 인을 근간으로 삼아야 불로장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그때까지 전해오던 도교의 신선이론과 수련방술을 더욱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는데 특히 연단의 이론과 방법 및 연단의 제조방면에서 탁월한 업적을 거두어 수나라당나라시기의 연단술 발전에 대단히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대표 저술로 포박자가 있는데, 그의 포박자 내편은 위진남북조 시대의 도교이론과 방술을 집대성하여 도교의 신선학이론체계를 세우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

 

남북조 시기에는 장로가 죽고 난 후 천사도가 크고 작은 반란에 연관되어 지배층의 견제를 받자 천사도 조직은 뿔뿔이 흩어져 수많은 교들이 난립하였다. 하지만 이때 육수정, 구겸지, 도홍경으로 대표되는 도교 사상가들이 등장하여 중구난방이던 도교의 이론 체계를 재정비하고 도교를 다시 진작시켰다. 사상과 관념, 각종 의범을 제대로 갖추고 미신 등의 사상을 개선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으며, 이 과정에서 천사도가 '북천사도(北天使道)'와 '남천사도(南天使道)'로 나누어지기도 하였다.

 

남북조 시기에 도교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종교로서의 의례 등이 명확히 갖추어지고 신선 이론의 체계적인 정립이 이루어지면서 서서히 마음수련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도교에서 이러한 마음의 수련의 비중은 이후 점점 확대되어 전진교나 무당파에 이르러는 외단을 도외시하고 내단만을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한다.

 

육수정은 남북조 유성 시대의 저명한 도사이자 남천사도의 창립자인데, 어려서 유학을 배웠으나 도교의 장생술을 보고 속세를 등지고 도가 높은 스승을 찾아 신선이 되고자 했다. 그는 여산에서 수도하며 제자들을 거두어 포교활동을 했으며, 천사도를 진작시키기 위해 도교 경전의 목록을 삼동경서(三洞經書)로 총괄하여 정리했다. 그는 도교의 제도와 복식, 계율과 의식을 정비하고 등을 정비하고 '유불도의 삼교합일'을 주장했다. 그는 재초, 즉 몸의 정갈함을 위해 목욕과 금주를 하며 자극적인 냄새가 나는 음식을 피하고 마음의 정갈함을 위해 욕심을 부리지 않고 속세에 얽매이거나 불결한 생각을 하지 않는 ‘재’와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초’를 중시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러한 예배, 송경, 사신의 삼법으로 마음과 행동을 정결히 하면 득도할 수 있다고 하였다. 육수정 덕에 도교의 위세가 크게 넓어졌는데, 그가 개혁한 교단을 ‘남천사도’라고 부른다.

구겸지는 어렸을 때부터 천사도를 신봉하였다가 숭산에서 수도한 뒤 위나라의 수도로 가 태무제로 하여금 도교를 위나라의 국교로 삼게 하고 도교를 개혁하였다. 그는 먼저 이전에 있었던 부조리한 법도와 쌀로 세금을 받던 제도를 없애고 신도들에게 계율을 준수하고 열심히 예배하고 수련하면 신선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도교 신선의 계보를 정리하였고 도교를 개혁하여 사회 각 계층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종교로 바꾸었다. 이렇게 구겸지가 개혁한 교단을 '북천사도' 혹은 신천사도(新天使道)라고 한다.

 

도홍경은 모산종의 창시자이다. 그는 유불도 삼교의 이론에 정통하였고 불교와 도교의 수련을 모두 실천하며 불교와 도교의 융합을 도모하고, 모산에서 외단과 상청파의 양생술을 연구하였다. 그러나 도홍경은 무엇보다 양생을 위해 마음과 몸의 수련을 함께 하는 것을 중시했다. 그가 창시한 모산종이 상청파의 중심세력이기에 후일 상청파를 모산파라고도 불렀다.

 

그 외에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백가도, 이가도, 삼황파, 누관파, 상청파, 영보파 등이 주요 도파로 꼽힌다.

 

 

 

수나라 - 당나라 시대 내단론의 등장

 

이때에는 도교가 크게 흥성하여 이론적으로 많은 진보를 이루었다. 특히 수나라 이후 당나라 초기까지 연단술, 즉 외단 제조에 대한 이론이 엄청나게 발전했고 덩달아 중국의 화학 기술 수준도 급성장했다. 하지만 그 결과물인 단약은 수은을 주 재료로 한 독약이어서, 불로장생하겠답시고 단약을 먹어댄 제왕 및 도사들은 불로장생은 커녕 정상적인 수명을 유지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당나라 대의 도사 소현랑은 외단이 아닌 몸 안의 내단을 키워야 한다는 내단론을 주장하였다.

 

소현랑은 스스로를 청하자라고 불렀는데 태역太易31과 단도丹道를 발명하여 ‘보장론(寶藏論)’이라 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영지靈芝(=영약=외단=불로장생약)를 먹으면 신선이 될 수 있는데 구하지 못할 수가 없다고 하자 “영지는 너의 몸 가운데 있는 것이다”라고 하여 외부에서 불로장생약을 찾기보다 수련을 통하여 스스로 내단內丹을 만들 것을 주장하였다. 이로부터 도교의 내단 수련법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는 육체와 마음을 동시에 수련하는 성명쌍수性命雙修의 수련법을 주장했는데 이것은 내단수련의 핵심이 됨과 동시에 도교의 수련법을 신체를 단련하는 연형煉形에서 정신을 단련하는 연심煉心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남북조 시대부터 수당시대까지 도교와 불교는 종교적 주도권을 얻으려 격렬한 논쟁을 벌였는데, 이는 서로에게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의 상처를 입히는 한편, 상대의 공격을 방어하고 상대의 이론을 공격하고자 연구를 거듭하게 하였다. 결국 오랫동안 이어진 논쟁은 불교와 도교 양측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끌어내어 결과적으로 도교와 불교의 이론 및 체계를 엄청나게 발전시켰다. 또한 이때의 논쟁으로 인해 불교와 도교의 사상이 서로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결국 당나라 때 도교는 불교의 이론과 사상들을 대거 흡수하고 도사 소현랑의 내단도內丹道를 바탕으로 빠르게 발전하였는데, 이로 인해 당나라 때는 손사막, 장만복, 이전, 오균, 두광정, 팽효, 담초 등의 뛰어난 도교 사상가들이 출현하였으며 이들에 의해 내단이 도교의 핵심적인 개념으로 부상하고 내단의 수련법이 크게 발전하였다. 더구나 노자의 이름이 이이(李耳)인 것을 들어 노자를 당나라 황족의 시조로 받들었다. 666년 당고종이 '태상현원황제(太上玄元皇帝)'라는 존호를 올렸고, 그후 당나라 황제들이 존호를 추가하거나 바꾸다가 754년 당현종이 '대성조고상대도금궐현원천황대제(大聖祖高上大道金闕玄元天皇大帝)'라는 거창하기 그지없는 존호로 바꾸었다.

 

 

 

송나라 도교의 부흥과 화산파의 등장

 

수당 시대 이후 송, 원 대에는 도교가 크게 부흥하였고 내단론이 계속해서 발전하여 도교의 주류 이론으로 완전히 자리잡아 발전을 거듭했다.

 

송나라 대에는 흥도억불 정책으로 인해 모산파와 화산파, 천사도가 크게 흥하였고 당시의 유명한 도사 진단은 전통적인 도가 학설을 중심으로 유가와 불가의 사상을 두루 융합하여 체계적인 내단 이론을 만들었으며, 특히 주역을 깊이 연구하여 도가의 문화에 유가의 사상을 흡수하였다. 또한, 남송 대에 왕중양은 전진도(全眞道)를 창시하였다.

 

전진도는 유불도의 삼교합일을 주장하고 '도덕경', '반야심경', '효경'을 필수 경전으로 삼았는데, 처자식과 부귀공명을 버리고 육식이나 비린 것을 먹지 않으면서 내단을 연단하여 고통스러운 유한한 세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진도는 이전의 도교에서 주장한 육신의 불사를 부정하고 단지 양신(陽神)만이 불사한다고 주장하여 부록을 사용하지 않고 내단의 수련만을 중시하였다. 이후 명나라 대에 이르러 전진도는 쇠락하였다가 청나라 대에 잠깐 중흥하였다.

 

금나라 초 북방에서 소포진이 창시한 태일교는 부록을 중시하고 기도를 통해 병을 고치고자 했으며, 정명도는 특이하게도 도교의 정명, 불교의 대승, 유가의 충서 등 삼교의 세 가르침은 길은 다르지만 결국엔 한 곳으로 귀착된다 하여 충효를 실천하고 마음을 맑게 비우면 신과 통하지 않아도 득도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원나라 때 숭도 정책은 사라지지 않아 용호파, 각조파, 모산파의 삼산부록파와 전진도, 태일교, 진대도가 일어났으며 여러 유파들이 있었으나 결국 수많은 부록파들과 천사도를 합하여 만들어진 '정일도'와 '전진도'로 나누어 흡수되어 천하가 양대 도파로 정리되었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 내단 이론도 또한 양호한 발전을 이루었다.

 

 

 

명나라시대 상황

 

우당산 중국

무당산에 영락제가 세운 금전. 본래 건물 전체가 도금되어 있었다고 한다.

 

명 대에는 명 태조 주원장부터 도교를 숭상하였으며, 랍탑도인 장삼봉이 무당산에 무당파를 창립하였다. 장삼봉은 전진의 도사였다가 종남산에서 내단을 만드는 비결을 얻고 무당산에서 수련하였다. 그는 청정한 마음으로 내단을 수련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그 과정에서 '무武'를 강조했다. 그래서 장삼풍은 무당권법을 창안했으며 육합신권을 수련하여 내가권법(內家拳法)이라고 하였는데 이것들은 수많은 도교의 이론과 내단 수련법을 무술에 접목한 것이었다. 이후 무당내가권은 크게 발전하여 형의권, 팔괘장, 태극권이 만들어지고 이후 수 많은 무술과 유파가 발생하여 그 유명한 중국권법이 형성되었다카더라.

 

사실은 장삼봉은 시대별로 같은 이름이 여럿 나오는 불분명한 인물이며, 장삼봉과 무당산은 명나라대 정치적 목적으로 국가에서 띄워준 케이스다. 또한 중국무술 운운은 완벽한 후대의 날조다. 소림권이 달마에게 유래했다는 둥 XX 전통무술은 고구려/화랑이 익히던 호국무술이라는 둥, 기원을 과거로 잡을수록 권위가 선다는 착각에서 비롯한 것. 실제 태극권은 명말 진왕정, 형의권은 명말 희제가, 팔괘장은 청나라말 동해천을 시조로 한다. 내가삼권은 근대에 탄생한 만큼 각자 계보를 정확히 밝히고 있으며, 무당산 쪽에서 멋대로 장삼봉 이름을 팔아 사기 치는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는 공식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유교를 나라의 근본 이념으로 삼는 나라였기에 비록 황족의 후원이 있기는 했으나 국가운영의 중심사상은 도교가 아닌 유교에 두고 있었고, 불교와 도교를 반반씩 중심 사상으로 잡던 당송 시대와 달리 도교의 힘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이때부터 국가 중심의 관방도교는 점차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반대로 민간신앙에서는 송, 원 시기부터 점차 대두되기 시작한 민간도교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옥황상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신들이 하부에 위치하는 도교의 신화세계도 이 시기를 거치며 완성되었다.

 

 

 

근세 도교의 쇠퇴기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청나라는 원래 자신들이 주로 믿던 불교(특히 티베트 불교)를 숭상하고 도교를 억제하였다. 중국 역사 내내 유교, 도교, 불교는 항상 긴장상태에 있었으며, 유교는 중국의 전통 통치기구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기 때문에 억압할 수 없었지만, 도교와 불교는 군주의 성향에 따라서 한쪽은 우대를, 한쪽은 탄압을 받기도 했다. 청나라의 국교는 티베트 불교였기 때문에 도교가 탄압을 받은 것이다. 청 초에는 한인들을 달래기 위하여 정일도를 비호하고 교주를 정일진인으로 임명하여 2품으로 삼았으나, 결국에는 숯불억도 정책으로 인해 천사라는 이름이 진인으로 격하되고 품계도 2품에서 5품이 되었다.

 

건륭제 시절부터는 노골적으로 도교를 탄압했고, 포교를 금지하니 결국 도교는 쇠락하게 되었다. 다만, 그래도 도교의 성직자인 도사한테는 변발을 강요하지 않고, 기존의 상투머리를 계속 유지할 수 있게 하는 특권을 부여하였다.

 

명청 시기를 거치면서 도교는 국가 제초의례 중심의 관방도교는 완전히 사라졌다. 민간신앙적이고 주술적 기복 중심의 민간도교가 중심을 차지하고, 여기에 개인의 양생을 추구하는 수행도교 일부만이 남게 되었다.(단전호흡, 기체조 등으로 유명하다)

 

 

 

현대의 도교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망하자 도교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은 중지되었고, 1919년에 민국도교협회가 창설되어 많은 도교 종단들이 참여하였다. 하지만 5.4 운동과 신문화운동 당시 도교는 전근대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호된 비판을 받았고, 그 당시 나온 많은 근대 사상가들은 도교를 중국을 후진국으로 빠뜨린 미신으로 비판했다. 이 당시부터 학생세력은 도교 사원(도관)에 대한 공격이 있었다. 1930년대 여러 도교 종파들은 국민당정부에 종교단체로 등록할 수 있냐고 문의했고, 국민당정부는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았으나, 결과적으로 이후 터진 중일전쟁 때문에 이뤄지지 못했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집권하자 도교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공산정부는 도관들의 주수입이었던 부적판매, 지나친 공양을 엄금하고, 특히 공개장소에서 종교행위를 금지했다. 국민당 정부와 가까웠던 교파인 정일파는 탄압 때문에 대륙에서는 자취를 감추었다. 많은 도관들이 학교나 공공장소로 전환되고, 도사들은 노동자나 농민으로 환속해야 했다. 더욱이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모든 종교는 탄압을 받았고, 홍위병들은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도교 사원을 미친 듯이 부수고 도사들도 린치를 당하는 등의 사태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도교만 딱 집어 탄압한 것은 아니고, 문화대혁명이 구습이라고 본 모든 종교가 다 이런 대접을 받은 것이다.

 

이후 덩샤오핑이 실권을 잡으면서, 중국 정부가 전통문화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탄압을 중지하고 중국에서는 다시 도교가 융성한다. 도교는 사실 기복신앙과도 밀접히 관계있고, 체제에 상관없이 인간의 불안한 심리는 있기 마련이라, 중국의 웬만한 도시에는 대부분 도관이나 사당이 있고 나름 여기 참배하러 오거나 점 보러 오는 사람도 많다. 심지어 공산당원들도 점 보러 도사를 찾아가거나 재물을 기원하는 신상을 집에 놓기도 할 정도로, 중국에서는 깊이 생활화되었기 때문에 이를 미신으로 근절하기란 불가능할 정도이다.

 

다만 도교라는 것이 사이비 종교로 변질되어 홍건적의 난이나 백련교도의 난처럼 종교반란세력이 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중국 정부는 여러모로 감시의 눈을 번득인다. 도교 계통 종교인 파룬궁이 철저히 탄압을 받는 것이 바로 예이다.

 

원래 도교라는 것이 명청 시절부터 이미 원시도교 시절의 무축적/기복신앙적 성격이 다시 대두된 민간도교 시대다 보니 자체적인 교단/교리/경전이 있다고는 하지만. 대부분 한국의 무당이나 무속 신앙과 섞인 불교 모습과 하등 크게 차이 나지 않고, 사람들의 시선도 그다지 좋지 않아 한국인들이 무당보다 스님이나 사제를 더 수준 높게 생각하는 것처럼 이 지역에서도 비슷한 취급이다. 특히 동남아는 상좌부 불교가 깊이 뿌리내린 지역이라 도교도 화교 거주지 중심으로 퍼졌다.

 

 

 

 

도교의 핵심 사상

 

도교의 목적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목적은 '늙지 않고 오래 사는 것(불로장생)'이다. 하지만 속세에서 불로장생은 언제나 실패하였기에 속인들과는 육신부터 다른 선인이 되어 목적을 이루고자 하였다.

 

도교는 내세를 중시하는 기독교, 이슬람 등의 종교들과는 달리, 사람을 중시하고 생명을 소중히 하는 한 줄 요약: 살아서 잘되자 중인귀생(重人貴生)의 생명관을 바탕으로 몸과 마음을 함께 수련하는 성명쌍수(性命雙修)의 수련으로 역수반원(逆修返源)하는 성선成仙이론을 확립하였다.

 

신선은 득도(得道), 도통(道通)하여 영원불멸한 도와 하나가 된 사람으로 수련을 통해 정기신(精氣神)의 셋을 기신(氣神)의 둘로 되고 기신을 신(神) 하나가 되게 한다. 그리고 그 신이 도가 되어 결국에는 영원불멸의 도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불사의 육체를 지니고 장생불사할 수 있는 것이다.

 

도교에서는 인간의 몸은 '소우주'이며 우주가 인간의 몸에 들어있기 때문에 우주의 모든 신들이 인간의 몸 구석구석에 깃들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도교에서는 태양의 신은 오른쪽 눈에, 달의 신은 왼쪽 눈에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신들은 인간의 몸과 마음이 정결하지 않고 하늘에 죄를 지으면 사람의 몸을 빠져나가려 하는데, 신들이 인간의 몸을 빠져나가면 사람이 죽게 된다고 한다.

 

특히, 어떤 신들은 사람이 먹는 음식들의 정精을 받아먹고 사람의 수명을 깎아내리려 한다. 따라서 사람은 정의 공급원인 곡기를 끊어 나쁜 신들을 잠재우고 마침내 기(氣)만을 호흡하다가 마침내는 기를 한 번 호흡하고는 내보내지 않고 그대로 몸에 담아 몸을 보함으로써 몸을 정갈히 해야 한다. 이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앉아 잡념을 지우고 무념무상에 빠져들어 마음을 정갈히 함과 동시에 내관(內觀), 즉 자신의 내부를 고요히 관찰하여 자신의 내부에 있는 신들과 우주를 보아야 하고 나아가 그 우주를 이루고 작동시키는 현묘한 질서인 도를 알아야 한다. 그렇게 도를 알게 됨으로써 도道와 하나 되고 우주(宇宙)와 하나 되어 영원불멸한 우주와 같이 사람도 영원불멸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도가 현실로 드러났을 때 생겨나는 덕과 지혜를 밖으로 내보이지 않는 것인데, 자연의 삼라만상에 도가 있음에도 도의 현실화된 모습인 덕과 지혜를 내보인다는 것은 도가 도임을 깨닫지 못하고 하는 행동이요, 따라서 그것은 도를 알지 못하는 자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노자와 장자가 도를 아는 것은 쉬워도 그것을 말하지 않는 것은 어렵다고 한 것이다. 이렇게 도를 알고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하여 물과 같아지는 경지에 이르러야(상선약수上善若水) 비로소 '득도했다' 하는 것이다.

 

이러한 도교 성선成仙 수련 방법의 초점은 도교 초기의 천사도부터 당 초까지는 그 방법으로 도인술(道人術), 선단(仙丹: 불로장생하는 약)과 같은 '양생법'을 이용하였다. 언젠가는 반드시 썩는 곡식이 아닌 영원불멸하는 금속, 그중에서도 정제된 수은으로 만드는 외단 즉 단약을 섭취하고 곡기를 끊는 육체적인 방법을 통해 영원불멸하고 순수한 육체를 우선적으로 얻는 명命(육체)의 수련에 맞추어졌었다. 부가적으로 마음의 수련과 윤리의식 고취 등을 내세웠다. 하지만 양생법, 특히 선단을 이용한 불로장생술로는 신선이 되기 힘들어 보였다. 죽어서 승천하기는 쉬운 방법들이다.

 

그리하여 유교/불교와의 끊임없는 교류는 도교의 신선 수련 방법의 초점을 순수한 육체를 우선적으로 갖추는 수련 방식보다 곡기를 점차 끊어 내고 기를 호흡하고 명상을 함으로써 몸과 마음의 탁하고 음陰한 기운을 남김없이 털어내어 양신陽神을 이루어 도를 얻고 영원불멸한 존재가 되는 마음의 수련 방식으로 옮겨놓았다. 결국 이후 내단의 중요성이 부각되었으며 도사 왕중양은 신선이 되면 육체를 버리고 양신陽神 이 빠져나와 불사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아무튼 전진도 이후에는 아예 내단만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러니까 전기의 도교는 언젠가 썩는 곡식으로 만들어진 몸은 썩어서 죽게 되니까 썩지 않는 금속을 먹자!(육체수련 중심, 외단론 중심)이었던 것이고, 후기의 도교는 수련으로 우주와 합일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자!(심성수련 중심, 내단론 중심)으로 방향이 바뀐 것이다.

 

이러한 후기 도교의 경향으로 인해 민간 도교가 아닌 수련 도교에서는 여러 부적술과 제사 의식 또한 단순히 술법으로 이득을 취하기보다는 신을 만날 수 있을 만큼 마음을 비우고 '좌망'(坐忘: 앉은 채로 자신을 잊음)할 수 없을 때에 할 수 없이 몸 안에 있는 신을 바깥으로 불러 만나보고자 하는 것이요, 이름난 명산을 유람하는 것도 그곳에 살고 있을 신을 만나 보고 가르침을 얻기 위해 하는 것이다.

 

도교 사상 중에 편재라는 용어가 있는데 이는 '모든 존재(혹은 만물)를 통솔, 통제하고 지배하는 신체 없는 존재 혹은 만물의 주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모든 것을 포함하고 관통하는 만물과 모든 존재의 근본적 원천 및 근원, 본질이고 물질적 형상과 신체를 지니지 않고 시공간을 초월하고 어떠한 제한 없이 모든 것과 존재를 통제하고 포괄하고 지배하는 능력과 모든 지식을 지니고 모든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이해해 만물과 모든 존재가 어떻게 조화롭게 작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알고 모든 존재가 조화롭게 작용할 수 있도록 조정하고 모든 것이 편재가 의도와 계획에 따라 운행되도록 했다.

 

도교의 신 혹은 신격들의 창조적 활동의 원천이자 세계를 운영하는 주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했고 궁극적인 실재에 해당되는 도가 시간, 공간, 물리적 한계를 초월해 모든 곳과 것 안에 편재하고 내재하고 존재하고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면에 스며들어 있다는 사상이자 보편성을 뜻했고 편재 혹은 도(道)는 시간, 공간과 어떠한 경계에 의한 제한을 받지 않은 채 모든 곳과 것 안에 존재하고 우주의 모든 것과 현상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도에서 그 존재가 파생되고 모든 것의 상호 연결성과 통일성을 의미했고 도가 우주와 자연의 질서를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전체 우주와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과 존재의 기초가 되고 편재하는 현실에 대한 도의 심오한 이해를 반영했다.

 

도는 모든 것이 발생하는 창조적 원천이나 세계와 인간 경험 내에서 발생하는 변형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창조적이고 변화적인 잠재력이었다.

 

 

 

도가와의 차이?

 

도가와 도교는 엄밀히 따지면 전혀 별개의 개념이라는 주장들이 있다. 도가는 노자 같은 사상가에 의해 나타난 철학사상의 하나지만, 도교는 장각, 장릉 같은 교주에 의해 확립된 종교들을 출발점으로 본다. 도교가 종교로서 발전하면서 도가사상 등을 끌어들였지만 사상적 지향점은 크게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가와 도교는 그렇게 엄밀하게 구분되는 개념도 아닐 수 있다. 우선 도가=철학, 도교=종교로 보는 관점부터가 문제가 있다. 과연 철학과 종교가 그렇게 엄밀히 구분되는 개념인가? 그것도 동아시아의 맥락에서? 아니, 시간적으로만 봐도 이 때는 고대다. 수학 과학 연구하던 피타고라스 학파도 종교적 특색을 지니고 있었던 시절이다. 당장 불교만 보더라도 불교 교리를 철학이라고 말하고, 그 외의 불교 의례를 종교라고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도교 역시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철학/종교의 이분법에 따라 사고하는 결과로 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덤으로 도교가 그리 많이 연구되지 않은 이유도 있다.)

 

하지만 노자/장자의 사상은 애초에 서로 지향점이 다르고, 노/장이라는 범주를 억지로 묶어 만든 "도가 철학"의 지향점 역시 신비주의적 수양론이나 영생, 불멸에 대한 의지와는 전혀 다르다는 주장도 있다.

 

노자에 대한 주석서를 집필한 사람들 중에는 물론 도교 사상에 빠진 신비주의자들도 있지만, 그 이전에 법가로 흔히 분류되는 한비자도 있다는 것에 주목하자. 한비자는 노자의 텍스트 내에 나타난 통치술에 대한 비유를 상당히 정확히 꿰뚫어 보았으며, 영속적이고 안정적인 통치에는 무위(無爲)의 도(道)를 따르는 술책으로 민(民)이 자발적으로 복종하도록 만드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노자 주해서를 통해 지적했다. 즉, 노자의 사상은 외형적으로나 종교적인 사상으로 보이지, 이러한 외형적 비유를 통해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국가 지배 체제를 제안한 엄연한 정치철학이다.

 

그리고 장자의 경우 일단 노자와도 다른 노선을 걷는데, 장자는 노자가 말하는 도(道)와 같은 초월적, 형이상학적 관념의 존재 자체를 거부했으며, 또한 이러한 관념에 따르는 국가나 기타 지배 체제 자체를 혐오했다. "어리석은 자(愚者)들이 꿈(夢)을 꾸면서 군왕이시어!(君乎), 종놈아!(牧乎)라고 외치는데, 정말로 고루하다!(固哉)"는 그의 말을 통해, 그가 어리석은 꿈이라 지적한 것이 지배자-피지배자가 구분되는 국가 체제라는 것이 명백해지며, 호접지몽 등을 통해 그가 그토록 깨어나라고 강조한 꿈 역시 국가주의적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재차 확인 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국가 체제를 피해 도교적으로 혼자 영생을 누리거나 산 속에 은거하는 길을 택했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것이, 도교에서 말하는 "양생"이 어쩌고 하는 신비주의적 목적 역시 국가가 내세우는 통치 이념과 다름없는 헛소리라는 것을 장자 본인이 못 박고 있기 때문이다. 도교 수행자처럼 혼자 영생을 누리겠다는 목적으로 산 속에서 70년을 신선처럼 산 노인이 하루아침에 호랑이에게 잡아먹혔다는 우화가 괜히 장자에 수록된 것이 아니다. 장자의 수양론에서 자주 등장하는 물(物)과 통(通)하라는 이야기는 국가, 이념 등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며 세상의 모든 개체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라는 이야기지, 절대 자연 속에 틀어박혀서 신선놀음을 하라는 소리가 아니다.

 

물론 전 문단의 의견 역시 특정한 경향의 의견에 불과할 뿐,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자세한 것은 스스로 공부해 보고 판단하도록 하자. 2000년대 기준으로 도가와 도교를 분리해 놓고 보자는 주장은 주로 일본 학계 쪽에서 보는 시각이다. 반면 원조 중국 학계에서는 도가와 도교의 연결성을 강조하는 쪽에 속한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한국의 도교 문화 - 행복으로 가는 길" 도록에 수록된 논문 참조.

 

 

 

민간 도교의 모습

 

도교가 발전을 거듭하면서 도교 수련자는 다음과 같은 생활지침을 제시받았다.

 

1. 벽곡수행을 하면서 맵고 짠 자극적인 음식을 버리고 고기도 삼가며 최대한 소식하고

2. 각종 무술과 단전호흡을 비롯한 여러 가지 수련방법으로 몸을 꾸준히 단련하며

3. 심산유곡 같이 조용한 곳에서 명상을 통해서 자기 안의 여러 신들을 만나고 도를 깨달아야 한다.

 

하지만 현대인이라면 몰라도 옛날의 평범한 백성들이 이것을 다 지킬 수 있을 리가 없다. 따라서 도교는 민간인들에게 신선이 되기 위한 방법을 따로 마련해 주었다.

 

도교에서 죽은 사람의 혼은 명부로 가서 재판을 받은 뒤 지옥에서 벌 받을지, 천상계로 가 장생불사의 몸이 될지, 다시 환생할지 결정되는데, 선행을 많이 하면 할수록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다고도 말한다. 다만, 선행을 아무리 많이 해도 악행을 한 번 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고... 다행히도 악행을 많이 했어도 도교의 제의를 통해 속죄하고 용서를 구하면 벌이 감해질 수 있다고도 한다. 보통 사람이 중간에 악행을 단 한 번도 하지 않고 선행을 1200번 연달아하면 죽어서 신선이 되어 장생불사 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도 신선의 중간급인 지선(地仙)의 경우. 천선(天仙)은 1만 2천 번을 연달아해야 한다.

 

그 외에 민간 도교는 민간인들이 직접 원하는 기복성이 발달하여, 도교 부록파의 부록술과 여러 의식이 그 뜻이 조금씩 변형되어 복을 부르고 화를 몰아내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점복과 참위(=예언) 등으로 민중을 달래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역으로 불교 등과 섞여 신비주의적 성격을 지닌 민중 반체제 운동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사실 부록파 자체가 민간신앙에서 유래하였기에 변형이라기보다는 원래 형태로 돌아갔다는 표현이 더 맞지만.

 

 

 

 

 

도장(道藏)

 

도교에도 불교의 대장경에 해당하는 집성된 경전이 있는데, 이를 도장(道藏)이라 한다. 대표적으로는 명나라 시기에 1445년과 1607년에 각각 정통도장(正統道藏)82과 속도장(續道藏)이 간행되었다. 이전 시기 간행된 도장은 소실/훼손되어 전질이 보존된 것이 없는 반면, 정통도장과 속도장 세트는 서적이 보존되고 있어 중시된다.

 

청나라 가경제 시기엔 도장집요(道藏輯要)가 간행되기도 하였다. 다만 이는 도장(道藏) 사용의 편의를 위한 축약본으로 정통도장에서 200여 종의 도서를 발췌해서 만든 발췌본이자 축약본이다.

 

 

분파

 

도교의 종파

후한말
태평도  오두미도(천사도)
위진남북조/수당
북천사도  남천사도  상청파  영보파
북송
신소파  청미파
남송/금
전진교  태일교  진대도교
정일도  정명도
용문파  오류파

 

 

 

한국의 도교

 

도교의 영향을 받은 신종교인 동학의 성지 경주 용담정.

한국의 도교에 대해서는 크게 자생설과 도입설, 중도설이 있다.

 

자생설은 중국의 도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한국의 자체적으로 독립 교단화된 도교가 존재했다는 것으로, 조선시대의 도교서적인 해동이적이나 청학집에서 약간 등장하며, 일제시기 이능화의 <조선도교사>에서는 아예 이 주장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다만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문헌들이 대부분 국내 문헌 위주의 주장인데다, 문헌 기록에 대한 해석이 자의적이어서 문제가 있다고 보는 의견이 많다.

 

도입설은 중국의 도교 교단이 국내에 유입되면서 한국에 도교가 퍼졌다는 주장으로,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조선조 해동전도록에서 나타나는 주장이다. 그러나 원시도교의 성립기에 이민족 신앙의 영향을 배제하고, 중국 중심주의적인 해석이 강하다는 비판이 있다. 원시도교의 문헌인 태평경이나 포박자에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중국 주변 이민족의 샤머니즘 신앙이 도교 형성에 영향을 주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있고, 종교학적으로도 원시도교(방선도)는 이민족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중국인들이 도교사를 언급할 때는 아직 완전한 종교의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면서 방선도 부분을 빼버리거나 대충 넘어가고 태평도와 오두미교부터 도교로 보는 경우가 많다.

 

중도설은 현재 사학계/종교학계의 일반적인 주장으로, 단군신화나 한국 토착신앙과 관련된 고고학 자료/역사기록 등을 토대로 한국에 자생적으로 존재하는 무속신앙/신선신앙/제천의식 등의 원시도교와 유사한 토착신앙이 존재했고, 이러한 신앙을 기반으로 중국에서 도입된 도교가 융합하여 현재 한국의 민간신앙/신종교의 근간이 되었다고 보는 주장이다. 현재까지 나온 설 중 가장 논리적이고 학술적인 뒷받침이 잘되어있는 설이라고 볼 수 있다.

 

문헌으로 가장 오래된 한국의 도교 유입 기록은 기원후 624년 고구려 영류왕 때로, 고구려의 요청으로 당나라에서 도사와 천존상을 보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보장왕 때 연개소문에 의해 기존 고구려 왕실/귀족층과 결합한 상태이던 불교계를 억압하기 위해 당나라에서 도교를 받아들이고 장려하였으며, 이러한 행보가 당시 고구려 내의 분열을 오히려 부채질하여 고구려 멸망에 부분적으로 관여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도교적인 신들과 신수들의 모습, 별자리 신앙, 문헌에 등장하는 고구려의 제천의식을 기반으로 그 이전부터 한국에 원시도교적인 토속신앙이 존재했다고 보고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한국의 도교 문화 특별전에서는 한사군 시절의 도교(특히 외단도교)와 관련된 약재/의례용품류의 유물을 전시한 바 있다.

 

백제의 경우 도덕경의 구절을 언급한 막고해의 발언 기록이나 도교적인 세계관이 반영된 산수무늬 벽돌과 금동대향로 등 조형물, 도교의 토지신(토백)이 등장하는 무령왕 매지석을 통해 어느 정도 도교 문화가 유입되었다는 추정은 있으나 고구려처럼 직접적으로 교단화된 도교가 유입되었다는 기록이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며, 다만 일본에 불교 문화를 전하면서 주금사나 도교의 술법인 기문둔갑에 대한 책들을 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신라에서는 신라사선(四仙)에 대한 기록이나 화랑들을 신선에 비유한 기록, 최치원의 난랑비서문 등을 통해 고구려 못지않게 도교가 활발하게 도입되었으며, 동시에 풍류도로 대표되는 토착신앙과의 융합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불교가 이미 중심 종교로서 우세한 자리를 잡고 있었고, 불교와 토착 신앙과의 융합도 강해 후발주자였던 데다 토착신앙과 유사하고, 불교가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전래되면서 이미 중국에서 도교와 상호 영향이 시작되어 공통분모가 많이 생긴 상황에서 도교가 고유의 색을 가진 채로 깊이 파고들 만한 여지는 없었다. 자연히 도교는 독립된 교단이 아니라 불교/토착신앙과 융합하는 형태로 한국 문화의 한 구성원이 되었고, 이는 지금까지 내려와 현재 한국 불교와 무속 신앙에서는 중국 도교적인 성격을 가진 요소를 많이 찾아볼 수 있으며, 그 중 한 예를 들자면 불자들이 애독하는 경전 중 하나인 <북두칠성연명경>85을 보면 불경이라고는 하지만 칠성신에게 비는 것은 토착신앙/도교적인 요소며, 경전에서 석가모니가 아니라 중국 도교의 신인 태상노군이 주연으로 언급된다. 조선시대 문헌인 증보해동이적에서도 '원래 불교와 도교는 주문을 읽고 부적을 쓰는 데서 유사점이 많은데다, 조선에서는 서로 섞여 어느 게 불교고 어느 게 도교인지 알 수 없다'는 기록이나, 남궁두에 대한 기록에서 남궁두의 스승이 스님이면서 신선술을 연마한 도사로 기록된 점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로 들면서 송나라와 활발한 교류를 통해 본격적으로 중국의 도교가 유입된다. 적극적으로 도교를 수입한 예종 때 최초로 도관 복원궁이 세워지고 중국에서 파견된 도사들이 초제를 지냈다. 하지만 이때도 기존에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불교와 토속신앙과 충돌보다는 동화되는 형태를 보였고, 도교는 왕실과 지배층 중심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면서 기존 한국의 종교들과 서로 공존하는 형태로 유지된다. 이때 고려에서 유행한 도교는 수련도교가 아닌 제초도교로서 신선이 되기 위한 수행이나 종교의 교리 연구보다는 도교식의 초제(재초)를 통해 국가와 왕실의 복을 빌고 재액을 물리치는데 집중된 철저한 기복신앙이었다.

 

 

 

조선시대의 도교

 

한반도에서 도교의 신선 수련이 발달한 것은 놀랍게도 유학을 중시한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조선시대에 들어 유학을 중시하면서 불교와 도교, 토속신앙의 의례를 음사로 규정하고 유교적인 윤리주의와 유교적인 제례를 중시하게 되었다. 물론 이때도 기복신앙적인 제초도교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나 국가의례에서 도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이전에 비해 쇠퇴하였고, 나중에는 마니산의 참성단 초제 정도만이 남게 된다. 이때부터 도/불 융합적인 민간신앙의 발달과 몇몇 지방 양반가에서 가풍으로 내단수련과 선행을 중시하는 이른바 내단파가 등장하면서 국내에서의 도교의 수행이론 역시 정리되는 모습을 보인다. 현재 국내의 여러 단학 수련단체에서 중요시하는 용호비결이나 개운조사파에서 중시하는 선불가진수어록등의 서적이 모두 이러한 시기에 등장한 책들이다.

 

여기서 도교의 이해에 있어서는 민간신앙과 내단파의 관점이 조금 차이를 보였다. 민간신앙에서는 도교/불교/민간신앙이 뒤섞이면서 민간신앙에서 도교의 수경신 행사를 비롯한 몇몇 도교의례의 도입과 더불어 도교적인 신의 위격/호칭이 사용되었고, 이는 이후 정감록을 비롯한 도참서 및 구세주를 자처하는 민간 반란 세력의 형성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나 내단파에서는 종교적인 부분보다는 유교/도교의 사이에서 심성을 닦고 선행을 중시하며, 삼교의 어느 극단에 치우침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중도주의를 주장하는 모습을 보인다.

 

조선시대 종교적 도교의 경우, 관성제군 신앙이 선조 이후 명나라를 통해 유입된다. 이러한 관성제군 신앙은 조선말 무상단으로까지 이어진다. 무상단은 삼성을 중시했는데, 삼성은 관성제군, 문창제군, 부우제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 후기를 거쳐 근세로 들어오면서 민족의식의 발달과 유교의 경직화, 신분제도의 붕괴 등을 거치면서 사회가 혼란스러워졌고, 이때 들어서야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교단화된 도교가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한반도의 특성상 중국처럼 순수한 도교 교단을 갖추기보다는 유불선 삼교와 토착신앙이 섞인 성격을 하고 있었으며, 이때를 전후하여 등장한 도교 혹은 도교적 요소가 다분한 민족종교 교단들로는 동학, 남학, 정역파, 증산교의 교단들이 있다.

 

특히 동학과 증산교단은 도교의 신인 상제(上帝)에 대한 언급(동경대전에 상제라는 표현이 나온다.*)과 더불어 다양한 도교계 신령들과 원시/민간도교에서도 공통적으로 보이는 부적을 태운 물을 마시는 의례와 이 과정에서 믿음을 강조하는 모습, 선계(仙界), 신선, 무위이화(無爲而化) 등의 다양한 도교적 관념과 표현이 등장한다. 물론 이들 신종교의 사상은 중국 도교의 사상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각자 독자적인 사상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일본의 도교

 

일본에 처음 도교가 전래된 것은 백제를 통해서였다. 위덕왕 24년(577)에 백제에서 일본으로 불교와 관련된 사람들을 파견하였는데, 이 중에 주금사(呪禁師)가 있고, 무왕 3년(602)년에는 승려 관륵이 일본에 여러 책을 전했는데, 그중에 도교와 관련된 역서(曆書), 둔갑(遁甲), 방술(方術)에 대한 책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렇게 일본에 도교가 전해지면서 일본서기에 상세(常世)신앙이 나타나는데, 이곳은 신선들이 사는 세계로 이곳에 사는 상세신에게 제사를 지내면 가난이 해결되고 젊어진다는 믿음이 널리 퍼졌으나 중앙 정부의 통제로 교단화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본격적으로 일본에 도교가 흥하게 된 시기는 나라 시대, 헤이안 시대를 거치면서부터였다. 이 시기 일본은 중국에 직접적으로 유학승/견당사를 파견하면서 중국이 제초도교가 들어와 점을 치고 개인의 구복을 비는 방기주술이 크게 발달하였고, 일본의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지나치게 미신적인 경향을 띄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비노 마키비(吉備眞備)처럼 도교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많은 도교서적을 수입한 자들도 있었으며, 이는 헤이안 시대에 들어 화려한 귀족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외래문화를 토착화시키면서 그 유명한 음양사가 등장했다.

 

반면에 백성들은 귀족들의 착취를 당하면서 그들 나름대로의 구원을 꿈꾸었고, 도교의 은둔적이고 기복적인 성격은 민중들에게도 잘 맞아 민중들과 민간신앙에도 파고들었다. 중앙정부의 관청인 음양료에 속하지 않은 음양사들인 외법사들 역시 많이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 시절 일본 도교는 하나의 독립된 종교 교파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도교의 주술 위주로 일본에 들어와 귀족층을 중심으로 후원을 받아 성장하였고, 또 그런 집단들이 주류로 인정받는 상황이었다. 외법사들은 통제의 대상이었고, 민간신앙에 흡수된 도교는 일본에 들어올 때부터 기복적인 주술 위주로 들어와 독자적인 색깔을 드러내는 수준은 되지 못하였다. 더욱이 일본에서는 종교적 신비주의를 강조하는 밀교가 발달하였기에 타 종교와 융합되기가 한국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귀족 중심적이던 헤이안 시대가 몰락하고 막부 정권이 들어서면서, 기존의 일본 도교계는 된서리를 맞았다. 항상 언제 죽을지 모르는 무사계급에게 도교의 신선사상이나 불로장생 사상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이들에게는 생사를 초탈한다는 사상을 가진 불교가 더 구미에 맞았고, 당시 일본의 종교계에서도 객관적으로 놓고 보면 도교보다는 당연히 불교의 사회적 영향력이 더 컸다. 당연히 도교는 귀족들의 몰락과 더불어 주류 무대에서 밀려나고, 궁중의 음양사는 민간에서 떠돌이 주술사로 일하는 박사로 변하였다.

 

이후 일본의 도교는 한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민간신앙(신토, 슈겐도)과 불교에 흡수되어 독자적인 교단을 이루지는 못한다. 에도시대에 들어서 중국 도교의 경전들과 더불어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민간 도교가 전래되나, 이 역시 독립된 교단의 형태를 이루지는 못했다. 일본에서 도교는 민간 신앙과 불교의 일부로 대부분 흡수되었다.

 

 

 

 

 

도교 교세는 쇠퇴하는 중이다. 중화권은 아시아에서 가장 무신론 비중이 높으며 유불선이 오늘날 한국의 고사처럼 역사에 기록된 것이 아직 많이들 남아서 홍콩의 소방서는 관우상을 갖다 놓는다. 무신(武神)으로서 경찰이나 소방관 등의 안전을 지켜준다고 생각해서이다.

 

화상이 하는 가게는 어디나 1월 1일에 돈 많이 벌게 해 달라는 고사를 지낸다. 물론 젊은 층으로 오면 세속주의가 대세라 미신이라고 여긴다. 기껏해야 대만에서만 선전하지만, 이 동네도 도사들이 많이 세속화하여 일본 정토종계 승려들이나 신토의 아르바이트 무녀들처럼 평소에는 일반인으로 살다 초제 요구가 들어오거나 하면 그럴 때만 도사복을 입고 도교의례를 하는 등 수도자로서의 도사의 모습은 많이 사라졌다. 알바 도사 중국 본토에서도 대형 도관들을 소림사처럼 무술공연자 양성 학교로 쓰고 공산당 휘하 조직에서 도관들을 관리하는 등 영 상황이 좋지 않다.

 

베트남도 도교의 영향이 적지 않아 응우옌짜이, 응우옌빈키엠 등이 그 영향을 받았다.

 

그 외에도 도교를 배타적 요소가 전혀 없는 종교라고 생각하고 앞으로의 새로운 대안이 도교라고 인식하는 부류도 있다.

 

선단을 만드는 기술인 연단술은 아직도 암암리에 행해지고 있다. 물론 한국에서도 하는 사람이 있다.

 

도교에서는 신(神)의 대우가 좋지 않은데, 도교에서 중하급 수준의 신들은 아직 득도를 못해서 수련 중이다. 물론 이들은 도에 대해 평범한 인간보다 엄청 많은 것을 깨달았으며 신통한 능력을 지니고 있어 인간을 도와줄 수도 있고 인간의 스승이 되어 도에 대해 가르쳐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신들도 도를 얻지는 못했기에 인간을 득도하게 만들어 줄 수는 없다. (물론 득도를 한 사람도 도가 사상에 의하면 도를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해 줄 수 없긴 하다.) 물론 도교의 모든 신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원시천존 같은 고매한 존재들은 이미 그 경지를 훨씬 넘어선 존재들이다. 다만 그만큼 일반인들과의 거리감도 커서 역사적으로도 도사님들을 숭배했고, 민간도교에도 열중이다.

 

따라서 신선이 되기 위해 수련하는 도사는 마음을 정갈히 하고 부적이나 제사를 통해 신들을 초청해 득도하는 방법을 묻기도 하지만, 결국 나중에 가면 좌망이나 내관을 통해 자신의 내부에 있는 '신이라는 스승'을 뛰어넘어 우주 전체를 관조하고 더 나아가 스스로 도를 깨우쳐 우주의 질서와 법연을 확고히 하여야 한다. 참고로 도교의 사원은 도관(道觀), 남자 수도자는 도사(道師)나 건도(乾道), 여자 수도자는 여관(女冠)이나 곤도(坤道)라 한다. 당나라의 양귀비도 한때 여관이었다.

 

현재 중국 도교 종파 중 하나인 화산파 남천문의 장문인은 한국인이다. 곽종인이라는 여성이라고 한다.

 

흔히 말하는 절밥처럼 도교 역시 도교 요리라는 고유의 요리법이 있다. 도교의 사상과 목적을 살려 도교 역시 음양과 오행사상을 기반으로 차가운 음식과 뜨거운 음식의 공존과 조합을 만들었다.

 

또한, 혼돈이라는 것 자체를 모든 것의 근원, 모든 가능성의 총체라는 긍정적 의미로 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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