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德壽宮)은 서울 중구 정동(貞洞)에 있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궁궐로서, 대한민국의 사적 제124호이며 면적은 63,069m2이다. 원래의 면적은 현재보다 넓었으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축소되었다.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조선 초기 세조가 남편을 잃고 궁궐을 떠나는 맏며느리 수빈 한씨(인수대비)를 가엽게 여겨 개인 사저로 마련해주었고, 이후 한씨의 차남 자산군이 보위에 오르게 되어 궁궐에 들어가자 장남인 월산대군이 물려받았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로 왕의 거처로 쓰면서 궁이 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은 뒤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는데, 그해 완성된 창덕궁으로 떠나면서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붙여주었다, 1623년에는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1897년(고종 34)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이 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비로소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 큰 화재로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이듬해에 다시 중건했으며, 1906년엔 대안문(大安門)이 수리된 뒤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하게 됐다.
1907년(순종 1)엔 순종이 즉위 후 궁호가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개명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궁역이 대규모로 축소되고 전각들이 대부분 훼철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경복궁이 소실되었던 1611년 ~ 1615년에는 조선의 정궁, 1897년 ~ 1907년에는 대한제국의 황궁이었다.
지금의 정문인 대한문(大韓門)
덕수궁의 정문은 대한문이다. 원래 이 문은 대안문(大安門)이었으나 1906년 대한문(大漢門)이라 개명하였다. 현재의 위치는 도시계획에 의해 서쪽으로 물러난 자리이며, 궁궐의 정문이 동향하고 있는 것은 창경궁의 경우와 같으나, 원래는 중화문 앞쪽에 정문이 있었다고 한다.
궁문의 건축양식은 단층의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식 우진각지붕이다. 궁의 정문으로 단층인 것은 이 문이 유일하다. 오늘날에는 기단과 계단이 묻혀 버렸으나 전에는 다른 궁의 정문과 같이 기단과 석계가 있었다. 대한문이란 현판은 조정 중신 남정철의 글씨이다.
이곳에는 월요일과 혹서기, 혹한기(영하 5도 이하), 우천시를 뺀 매일 오전 11시, 오후 2시, 3시 30분에 30분가량 '왕궁 수문장 교대의식'을 재연한다. 당시 국왕이 거처하는 궁성 내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지역으로 궁궐을 수비하는 특수부대가 있었으며 이 군대를 '금군'이라 했다.
궁성에는 '수문장청'이 설치되어 종6품에 해당하는 수문장을 비롯한 금군이 '궁성문 개폐의식, 경비, 순찰하는 업무 등을 수행하였다. 왕궁 수문장 교대의식은 영국 왕실의 근위병 교대의식과 비견되는 화려하고 품위 있는 한국전통 궁중 문화 재현행사이다.
수문장 교대의식은 정해진 절차와 신호에 따라 행해지며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교대군이 도착해 수문군과 암호를 통해 신분확인 절차를 밟는 '군호응대' - 엄고수(북으로 교대간 신호를 보내는 임무를 맡은 자)가 첫 번째 북을 여섯 번 울리면 수문장을 보좌하는 참하가 교대군의 참하에게 열쇠를 인계하고 승정원 주서(교대의식의 감독관)와 액정서사약(궁성문의 열쇠를 관리하며 교대의식을 감독하는 사람)이 열쇠 함을 인계하는 '초엄' , 두 번째 북이 세 번 울리면 수문군의 수문장과 교대군의 수문장이 교대명령의 진위를 확인한 후 순장패를 인수인계하는 '중엄', 세 번째 북이 두 번 울리면 기수 4명과 군사 6명으로 구성된 수문군과 교대군이 마주 서서 정렬한 후 군례를 행하고 서로 임무를 교대하는 '삼엄' - 교대한 부대는 궁궐의 외곽 경비 임무를 수행하는 행렬을 실시하는 '행순'의 절차를 밟는다.
금천교(禁川橋)
모든 궁에는 명당수가 흐르는 어구(御溝)가 있고, 거기에는 석교가 설치되어 있다. 이는 궁궐을 드나드는 모두가 맑고 바른 마음으로 나랏일을 살피라는 뜻으로 건너게,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놓은 돌다리. 두 개의 나란한 무지개 다릿발이 드리워진다.
그런데 덕수궁인 경우 지세 자체가 왕궁이 들어앉을 만한 곳이 아니어서인지 인공적으로 명당수의 금천교를 만들었다. 현재는 어구가 연못처럼 변형되어 있다. 이 금천교는 두 개의 홍예로 구성되어 있다.
중화문(中和門)과 중화전(中和殿)
중화문은 궁궐의 중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집인데, 건축 양식은 중화전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원래의 중화전은 중층정전이었으며, 그때의 중화문은 현재의 문보다 규모가 더 웅대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화전과 같이 평면 규모에 비해 기둥 높이가 훤칠하여 다른 궁궐 전문(殿門)에서 볼 수 없는 비례감을 보여주는 문이라 할 수 있다.
중화문에서 중화전에 이르는 돌마당에는 문무백관의 위치를 나타낸 품계석이 세워져 있다. 중화문에서 중화전에 이르러면 상·하월대의 석계를 통해야만 된다. 하월대는 3단 장대석의 기단으로 최하단에 지대석을 놓고 2단의 장대석을 엇갈려 쌓은 후, 최상단에 갑석(甲石)으로 박음하였다. 석계는 5단으로 구성하였는데 중앙부 제2단 디딤돌 위 양편에 서수(瑞獸)를 놓아 석계 전체를 3등분하였다.
중앙 양 석수(石獸) 사이의 중심에는 넓은 판석의 답도(踏道)를 마련하고 석계 양쪽 소맷돌 위치에는 삼각우석(三角隅石)을 놓고 끝쪽에 머리부분만 있는 서수(瑞獸)를 조각하였다. 하월대의 석계도 하월대의 석계와 같은 수법인데, 소맷돌이 곡선으로 된 점과 디딤돌이 3단만 있어 하월대보다 2단이 낮게 된 점이 다르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형식을 취하고 있는 중화전은 중화문과 함께 1902년 건립되었으나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1906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이 건물은 조선조 최후의 궁궐 정전이다. 즉위식과 조회를 비롯한 주 행사를 치르는 덕수궁의 정전(正殿). 보물 819호.
중화전 내부 중앙에 마련된 어좌는 어간 고주 사이에 단(壇)을 마련하고 그 위 중앙에 용대를 놓았으며, 용대 뒤편에는 투각곡병(透刻曲屛)과 일월오악병풍(日月五嶽屛風)을 놓았다. 어단(御壇)에는 앞면과 좌우 측면에 보계(寶階)가 있고 난간(欄干)을 설치했다. 어좌 위에는 보개(寶蓋)를 마련하였는데, 적주(吊柱)에 낙양각하고 그 위로 닫집을 얹어 장엄하게 장식하고 있다.
석어당(昔御堂)
덕수궁 내의 유일한 이층 건물로, 1904년의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같은 해에 다시 다른 전각들과 함께 중건했다. 원래의 석어당은 임란 때 선조가 피난으로부터 환도하여 승하할 때까지 16년간 거처하였던 곳이며,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이 건물 앞뜰에 꿇어앉혀 죄를 책한 곳이기도 하다. 임금들이 임진왜란의 상황을 상기하는 선조임금의 추모처이자 인목대비의 유폐처이다. 단청을 칠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아래층이 정면 8칸, 측면 3칸이고, 위층이 정면 6칸, 측면 단간인 굴도리집으로, 올라 다니는 계단은 서쪽 끝에 설치되었다. 중층이면서도 가식이 없는 민간풍의 건축양식을 나타내고 있어 친근감을 준다.
덕홍전(德弘殿)
덕홍전은 고종황제가 내외빈객들을 접견하던 건물이다. 1911년에 건립되어 현존 전각(殿閣) 중에 가장 나중에 건조된 전각(殿閣)의 하나이다. 기단은 장대석을 돌려쌓고 알맞은 기둥 높이에 간결한 익공(翼工)을 얹어 처마를 받게 하였다. 팔작지붕의 마루에는 양성(兩城)하고 귀마루에는 용두와 잡상(雜像)을 얹어 잡귀와 화재에 대비하고 있다.
현재는 건물 내부에 카펫과 전등이 놓이고 대한제국 문장인 황금 이화문(李花文, 오얏꽃무늬)들을 새겨 잘 꾸며 고종황제의 침전으로 복원하여 당시의 궁중 생활상을 볼 수 있도록 꾸며 놓았다.
함녕전(咸寧殿)
덕수궁 동쪽에 자리한 고종황제의 생활처인 침전이자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한 건물이기도 하다. 1904년 화재로 인해 소실된 것을 같은 해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 9칸, 측면 4칸인데 서쪽 뒤편에 4칸이 더 붙어 ㄱ자형으로 되었다. 앞에서 보면 중앙 3칸은 근간으로 하여 개방하였고, 나머지 부분은 전부 거실로 이용하도록 되어 있다. 기둥 위에 올린 공포는 익공식이며, 건물이 거대한 데 비해 장식은 간결하다.
함녕전과 덕홍전 남쪽의 행각이다. 행각의 위치는 크게 변하지 않았으나 건물은 일정기에 개수되어 많이 변모하였다. 함녕전 앞에는 행각 3칸에 문을 두었고, 덕홍전 앞면에도 3칸의 대문을 두고 그 좌우에 각각 3칸의 행각을 붙여 함녕전 행각과 내부에서 서로 통하게 하였다.
함녕전 내부에서 앞쪽 주간의 분합문을 바라본 모습이다. 사분합의 띠살문을 전면 3칸에 달고 그 위쪽으로 광창(光窓)을 달아 실 조명을 밝게 하려 하였다. 띠살 분합문은 비교적 간결 단순한 무늬를 택하였고, 광창은 빗살무늬의 살을 넣어 분합문과 조화되도록 하였다. 문과 창의 시원스러움이 청간(廳間)의 공간을 한층 더 넓고 높게 돋보여 주고 있다. 대청과 온돌방 사이에는 장지문을 달았는데, 각 문마다 중앙에 정자살을 넣어 내부공간의 아늑함을 표출하고 있다. 대청의 한 공간 내에서 서로 다른 분위기를 맛볼 수 있는 한국적 공간의 실례라 할 수 있다.
정관헌(靜觀軒)
함녕전 뒤뜰 동산 속에 지은 것으로 궁궐 안의 양관(洋館)으로는 최초의 것이다. 1900년경에 건립되었으며 고종이 다과(茶果)를 들며 쉬거나 외교관의 연회처로 사용된 건물이다. 덕홍전과 함녕전 사이로 소나무가 우거진 길을 올라가면 된다.
정면 7칸, 측면 5칸의 장방형의 평면으로 내부 공간은 벽을 트고 외진(外陣)과 내진(內陣)으로 구분 되었는데, 내진고주는 굵은 원주로 되어 있고, 외진주는 목제 기둥을 사용하여 주두를 로마네스크 형식으로 하였고, 주간(柱間)상부는 투각(透刻)으로 장식하였다. 외연주 하부는 철제 난간을 돌렸는데 무늬는 투각으로 서록(瑞鹿), 송(松), 박쥐, 당초(唐草) 등을 넣어 한국적인 느낌을 풍겨주고 있다. 서양식 주방을 놓았으며 지붕은 구리판으로 되어 있다.
즉조당(卽阼堂)
중화전의 북쪽에 위치한 건물로 광해군과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하였고 집무하였다. 1904년 화재를 입어 소실된 것을 같은 해에 중건한 것이다. 궁의 침전으로서는 규모가 크지 않으나,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간결하고 짜임새가 돋보인다. 전면 동쪽으로 편향하여 3칸의 퇴(退)를 두어 개방하였고, 내부는 거실로 이용하였다. 건물에 비해 높은 기단을 두었고, 서쪽의 준명당과 연결되도록 2칸 복도를 두고 있다. 현판‘卽阼堂’은 고종의 어필이다.
덕수궁에는 원래 괴석(塊石)을 배치한 공간이 없었는데,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침전 주위에 괴석이 배치되어 있으므로, 침전이었던 즉조당 전정(前庭)에 괴석을 배치한 것이다. 1984년 창경궁에서 옮겨왔다.
준명당(浚明堂)
신하와 사신의 접견처. 다락집 복도(雲閣)로 즉조당과 연결되어 있다.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집으로 중화전 북쪽, 즉조당 서쪽에 위치한다. 고종황제가 이곳에 거처하기도 하였고, 한때 고종의 초상화와 순종의 초상화가 봉안되기도 하였다. 또한 고종은 이곳에서 외국 사절들을 영접하기도 했다.
내전으로 동쪽에 자리 잡은 즉조당과 같은 기능의 건물로 양식도 유사하다. 즉조당의 퇴간(退間)이 동쪽으로 치우쳐 있는 데 비해 준명당의 근간은 서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석조전(石造殿) 전정(前庭, 분수대)와 덕수궁미술관(석조전 서관)
석조전 앞의 전정은 1900년 영국인 브라운이 발의하여 영국인 기사 하딩의 설계로 착공되어 1910년 준공을 보게 되었다. 전정은 분수와 연못을 중심으로 서양식 정형(整形) 정원을 꾸몄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유럽식 정원이라 할 수 있다.
석조전의 남북축선 위에 동서가 대칭되도록 중심에 분수대를 놓고 원형과 방형이 조합된 연못을 파고 그 안에 네 마리의 물개를 동서남북으로 배치하였다. 연못 주변은 방형으로 2단의 낙차를 두어 구획하고 조경했다.
1937년 이왕직박물관으로 지은 석조전 별관(서관)은 연면적이 1,104평이며, 해방 뒤 석조전의 부속 건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덕수궁 현대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덕수궁미술관은 근대미술 전문기관으로서 근대미술의 조사· 연구, 작품의 수집과 보존, 기획 및 상설전시, 각종 교육프로그램의 개발과 실시, 학술과 출판, 근대미술 작품과 정보의 국제적 교류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도심 외곽에 위치한 국립현대미술관 본관의 관람 불편 요소를 해소하여 강북권에 새로운 문화공간을 활성화 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석조전 동관인 궁중유물전시관(遺物展示館)
이 건물은 1900년 착공하여 1910년 완공된 지상 3층 연건평 1,247평의 석조 건물이다. 외관은 19세기 초 서구에서 유행하던 신고전주의적 양식으로 영국인 기사 하딩에 의에 설계되었고 공사초기에는 한국인 심의석, 러시아인 사바틴, 일본인 오가와 등이 감독하였으며, 후반에는 영국인 데이비슨이 감독하였다.
건물의 구조는 1층은 시종들의 대기 장소, 2층은 접견장소로 이용됐으며 황제부부는 3층에 거쳐하셨다. 현재는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궁중유물전시관은 5대궁 12개 능 · 원에 분산 · 소장되어 오던 중요 궁중유물을 한데 모아, 보다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관리와 왕실문화 생활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1992년 12월 개관되었다. 전시실은 크게 역사실과 유물전시실로 나뉘어 지고 1실부터 10실까지 유물의 재질별, 주제별로 분류 전시하고 있으며, 이러한 유물들은 왕실에서 사용하던 당 시대 최고의 장인들이 만들어낸 우리 민족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또한 우리관에서는 매년 주제를 달리하는 특별전을 마련하고 있으며,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사회교육으로 조선시대 왕실문화 관련분야의 전문강좌를 실시하여 시민과 함께 하는 문화 박물관의 역활을 하고 있다.
광명문(光明門)와 흥천사 종(興天寺鐘)
광명문은 원래 함녕전의 정문으로 함녕전 남쪽에 있었는데, 흥천사 종과 자격루, 신기전기화차 등을 전시할 목적으로 일제 때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여 문의 기능을 잃고 말았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전문 형식으로, 중앙 도리간에 판비가 있었으나 이전되면서 없어졌다. 가구는 원주 위에 주심포를 올리고 창방위에는 장화반(長花盤)을 얹어 주심도리를 받고 있으며, 맞보형식의 대량을 중심고주에서 받게하여 중도리를 얹고 있다. 문의 가구 기법은 견실하며 전문(殿門)으로서는 규모도 크고 내용도 충실하다.
흥천사는 태조 이성계가 1397년(태조 5년) 계비 신덕왕후(新德王后)의 명복을 빌고 정릉(貞陵)을 수호하기 위해 세운 절이다. 1400년 정릉이 도성 밖으로 옮겨지고(현재의 성북구 정릉동) 난 후에 정릉은 왕실의 원찰로 1510년까지 남아 있었다. 이 흥천사 종은 1462년에 만들어 내걸은 종이다. 1510년 흥천사가 불타면서 창덕궁을 거쳐 현재의 위치에 보관되었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범종에 속한다.
보루각(報漏閣) 자격루(自擊漏)
자격루는 중종 31년(1536)에 만든 물시계다. 세종 16년에 장영실 등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자동시보장치를 물시계에 연결하여 저절로 움직이고 시각을 알리는 자격루를 만들어 조선 왕조의 표준시계로 썼다. 보각루 자격루는 세종 때의 자격루를 중종 때 유전(柳專) 등이 개량하여 새로 만든 것이다. 지금은 정밀하고 복잡한 시보장치는 없어지고 3개의 물그릇과 2개의 물받이통만 남아 있다. 원래 창덕궁 보루각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신기전기화차(神機箭機火車)
신기전(神機箭)은 고려 말 최무선(崔茂宣)이 만든 주화(走火)라는 무기를 세종 30년에 개량한 것으로 대나무 앞부분의 화살에 쇠촉을 달고 그 뒤족에 원통형의 종이 약통을 부착하여 불을 붙이면 발사되는 병기이다.
발사할 때는 신기전기가 실려있는 화치의 발사각도를 조절한 뒤 신기전 약통에 붙어 있는 점화선을 한 데 모아 불을 붙이면 발사되었다. 신기전의 사정거리는 100~15미터 가량이다. 제작 당시의 설계도가 남아 있는 것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벙기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