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Humanities/서양사 Western History

더러운 전쟁, 아르헨티나, 좌익 페론주의자 백색테러, 콘도르 작전, CIA지원

Jobs9 2023. 1. 18. 16:25
반응형

Guerra sucia. 20세기 중후반 중남미 지역에서 있었던 우익 독재정권의 좌익 탄압 정책을 가리키는 말.

가장 유명한 건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이지만, 이는 아르헨티나가 가장 스케일이 크고 너무 티 나게 집단 성폭행과 살인을 심각하게 해 대서 잘 알려진 것이며 실제로는 냉전 후반 1970~80년대 니카라과, 브라질, 우루과이, 볼리비아, 과테말라, 콜롬비아, 파라과이, 칠레 등 중남미 우익 독재정권 전반이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비슷한 짓을 했다.

실질적으론 특정 국가 내에 있었던 단일한 사건이 아니라 중남미 현지, 미국, 스페인의 삼각관계에서 형성된 냉전 후기 일련의 조직적인 국가적 폭력, 우파 테러 전반을 일컫는 광의의 의미로 쓰인다. 서독, 프랑스, 이탈리아도 관여했다는 의혹이 있다.

세계기록유산에도 더러운 전쟁과 관련된 기록물이 4건 등재되어 있다.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


우리는 모든 반란분자들을 죽일 것이며, 다음으로 그들의 협력자들을 죽일 것이다. 그 다음은 그들에게 동조하는 자들이며, 그다음은 무관심한 자들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주저하는 모든 사람들을 죽일 것이다. (Primero mataremos a todos los subversivos, luego mataremos a sus colaboradores, después a sus simpatizantes, enseguida a aquellos que permanecen indiferentes y, finalmente, mataremos a los tímidos.)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시장이던 이베리코 생장이 1977년 5월에 한 연설에서 남긴 말. 1977년 5월 6일자 가디언지에 실렸다. 

1970년대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에서 좌익 및 페론주의자들을 상대로 벌인 백색테러. 

이사벨 페론의 실정에 불만을 품은 아르헨티나 군부세력은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육군 총사령관을 중심으로 1976년 3월 24일에 아르헨티나의 당시 정권에 불만을 품은 미국의 암묵적인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레이날도 비그노네가 물러난 1983년 12월 10일까지 총 4명의 군사 독재자가 7년 동안 집권했다. 이들은 정권 안정을 위해 좌익들과 민주주의자들을 일소하고자 했고 그 일환으로 벌인 것이 이 '더러운 전쟁'이다. 

당시 아르헨티나 군부가 자행한 악행들은 아예 '남미의 나치'라는 별명까지 붙게 만들 정도로 심각했다. 아르헨티나가 비델라를 포함한 군사 독재자들의 지배 하에 있던 1976년부터 1983년까지 단 7년 동안 공식적으로는 1만 2천명, 최대 수치로는 3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실종'되고 5만 명이 투옥되고 고문당한 것으로 추정되며, 비델라 본인이 말년에 옥중 인터뷰에서 인정한 사망자만 해도 7000~9000명에 달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더러운 전쟁' 기간 동안 아르헨티나에서 납치, 고문, 살해 또는 실종된 사람들의 수는 불분명한데, 이는 군부가 인권탄압 피해자 명단 목록을 법원에 제공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아르헨티나 군부는 임금 인상을 요구한 노동조합 지도자, 평화주의자와 인권 단체 활동가들도 '공산주의자'나 '기독교와 서구 문명의 적'이라고 몰아가며 연행하고 고문했고, 심리학자와 사회학자들까지 '의심스러운 직업을 가졌다'는 이유로 잡아갔으며, 단지 연행자가 소장한 수첩에 이름이 적혀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잡혀간 사람도 있었다. 

이때부터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그야말로 나락으로 추락했다.

 

콘도르 작전
아르헨티나는 브라질, 칠레, 볼리비아,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 중남미의 5개국 우익 독재정권과 함께 좌파 척결을 공동 목표로 삼으머 ‘콘도르 작전’을 벌였다. 미국은 중남미의 안정을 명분으로 이러한 군사독재 정권을 적극 지원했는데, 실제로 아르헨티나를 포함한 중남미 군부독재정권들이 공동으로 벌인 콘도르 작전은 CIA의 물적, 기술적 지원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군인들은 매일 밤 골목에서 시민들을 감시하고 체포하였으며, 이 만행을 인접국가까지 펼쳤다. 희생자 대부분은 자동차 수리점으로 위장한 군부독재정권의 조사실에서 고문,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남미의 군부독재정권의 정적 및 반대파 탄압의 특징은 경찰이 반대파를 체포해 재판에 회부하고 형벌을 때리는 정식 절차가 아니라, 납치나 고문 및 비공식적 린치 등을 즐겨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남미의 군부가 좌파 인사를 색출하기 위해 벌인 '콘도르 작전'으로 10만여 명이 사망하고 40만여 명이 고문당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에 30만~200만 명에 달하는 아르헨티나 시민들이 군부의 무자비한 학살을 피해서 라틴계 국가를 제외한 외국으로 망명했지만 탈출하는 걸 법으로 금지했기에 탈출하다 잡혀 죽은 사람들도 많았으며 탈출에 성공해서 살아남은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미국, 유럽 등지로 탈출한 사람마저도 국가 간 범죄인 인도 협약에 의해 송환되어 처벌되거나 요원을 보내고 현지에서 납치한 뒤 죽이기도 했으며, 이들을 도운 미국인, 유럽인까지 처벌하였다.

당시 일어난 일들을 예시로 설명하자면, 아르헨티나의 국민 시인 후안 헬만의 며느리 마리아 클라우디아 이루레타 고이에나도 희생자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임신한 상태로 '자동차 수리점'으로 납치되어 그곳에서 딸을 출산한 뒤 아르헨티나 공군기로 우루과이로 옮겨진 후 머리에 총을 맞고 바다에 던져져 살해됐다. 또한 헬만의 아들도 1976년 쿠데타로 집권한 호르헤 비델라 독재정권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총살당한 뒤 기름통에 넣어져 페르난도 강에 던져졌다. 이렇게 죽어간 그들이 남기고 간 딸 마카레나 헬만은 2010년대 초반에야 진짜 신분을 확인하고 할아버지 후안 헬만과 만날 수 있었다. 

 

정적 납치와 고문
일부 정신병자와 사디스트들이 저지르는 일들 -이 같은 일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일어난다- 모두를 정부가 통제할 수 없다.
알바노 하르긴데귀가 반유대주의 정책을 부인하며 1981년 10월 10일에 한 일간지에 발표한 성명에서. 군부 정권의 핵심 인사마저 간접적으로 시인할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당시 군부의 가혹행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군사정권이 출범하자 아르헨티나 전역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 일어났는데, 이에 비델라 정권은 군과 경찰 그리고 관제단체인 반공동맹이 불순분자라고 지목한 인사들을 해외까지 추적해 비밀리에 납치해서 재판도 없이 340여 개의 비밀수용소에 무기한 구금한 후, 무자비하게 고문한 뒤 역시나 재판 없이 살해했다. 

라울 알폰신 시기인 1984년에 발간된 군부독재 치하의 인권탄압을 다룬 눙카 마스 보고서에 나온 바에 따르면, 이 보고서에 기재된 8960명의 '실종자' 중 62%가 집에서 납치된 경우였으며, 직장과 학교에서 납치된 사람도 13%였고, 심지어 24.6%가량은 거리에서 대놓고 납치된 경우였다.

군부가 연행할 사람을 납치할 때는 여러 명의 군인들이 총으로 무장하고 늦은 밤에 집에 들이닥친 뒤 연행할 사람을 끌고 가기 전에 집에서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고문을 가했고, 심지어 이에 항의하는 가족들에까지도 폭행을 가했으며, 피해자들을 연행한 후에는 집에 있는 물건들을 전리품처럼 약탈했다. 뿐만 아니라 집에서 납치를 할 때에는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납치할 사람이 사는 지역 전역을 정전시키거나 헬리콥터가 그 지역을 돌아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쿠데타 직후에는 최소 5,182명이, 1977년 말까지의 2년 미만의 기간 동안에는 무려 18,000명이 비밀수용소에 감금되었고, 총 8,625명이 장기간 억류되었다고 한다. 물론 고문 피해자의 80%, '실종자'의 95%는 정부 전복을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지식도 없는 민간인에 불과했다.

이렇게 수감된 사람들은 거의 전부가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는데, 당시 아르헨티나 군부 정권이 쓰던 고문은 사디즘으로 분류될 정도로 같은 군사독재 국가였던 칠레와 파라과이 정도를 제외하면 인류 역사에 그 전례를 찾을 수 없을 수준으로 잔혹했다. 

그리고 '더러운 전쟁' 당시 사망자 혹은 '실종자' 중 약 30%가 여성이었는데, 이들 중에서는 단순히 반정부 인사의 가족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끌려간 경우가 많았으며, 대부분 어린 자녀들과 함께 납치되었다. 아르헨티나 군부는 이 여성들을 탄압하기 위해 고대나 중세에도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악랄한 성고문을 이용했는데, 실제로 당시 군부는 군인들과 경찰들, 흉악범들까지 동원해 여성들에게 성폭행과 윤간을 자행했으며, 심지어 이들은 해당 민주화 인사로 하여금 그의 아내와 딸이 강간당하는 모습을 강제로 지켜보게 하거나 여성 수감자들에게 동물용 발정제와 최음제를 투약시킨 후 특별히 훈련시킨 군견과 경찰견을 동원해 여성들을 수간시키는 등 극악무도한 대악행까지 수시로 저질렀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 고문실 중 가장 악명높았던 해군공병학교 지하감옥에서는 매일같이 구타, 물고문, 전기고문 등의 다양한 고문들을 당하는 사람들의 신음 소리로 주변이 울릴 정도였다고 하며, 군인들은 고통스러워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을 시끄럽다며 총으로 쏴 죽인 후 그렇게 숨진 사람들을 고문으로 의식을 잃은 사람들과 함께 밤마다 비행기에 태워 라플라타 강이나 바다에 던져 버렸다. 

뿐만 아니라 법적 처벌로써의 연좌제도 행해지면서 12살도 안 된 아이가 부모 앞에서 고문을 당하는 등의 일도 있었다고 하며,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 당시에는 월드컵 결승전이 치러지던 당일 그 시각에 그 경기가 치러진 경기장 바로 옆 건물에서 반정부 인사를 고문하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 아르헨티나에서는 바빈야르 학살과 비슷하게 반정부 인사들을 결박하고 컨테이너에 넣은 뒤 여러 대의 차에 실어 언덕으로 옮긴 후 미리 파 놓은 거대한 구덩이 가장자리에 앉힌 상태로 동시다발적으로 총을 쏴 죽이는 방식으로 처형하는 경우도 흔했는데, 이런 방식으로 한 번에 50명 이상이 죽는 경우도 있었으며 구덩이에 불에 붙인 막대기를 던져 넣어 시체를 불사르는 경우까지 있었다. 

심지어 2015년에 발견된 스페인 국립 법원의 문서에 따르면, 비델라 정권은 이렇게 연행되거나 '실종'된 사람들의 재산을 몰수한 후 스페인에 여러 유령회사를 설립하여 돈세탁을 한 후 미국, 이탈리아, 스위스 등지의 은행에 계좌를 등록해 비자금으로 만들었는데 이렇게 군부가 갈취한 금액은 무려 약 37억 달러에 달했다고 한다.


죽음의 비행
아르헨티나 군대가 나치보다 더 나쁜 짓을 했다.
전직 아르헨티나 해군 장교 아돌포 실링고(Adolfo Scilingo, 1946~)가 1994년에 한 회고 중

비델라 정권은 반정부 인사들에게 '다른 감옥으로 이송 예정이다', '곧 석방될 것이다'라고 속여서 안심시킨 뒤, 백신이라고 속인 채 전신 마취제를 주사해 피해자를 재운 후 옷을 벗긴 채 마약을 먹이고 컨테이너에 몰아넣거나 양쪽 발을 시멘트로 굳히기도 했으며 추와 돌에 묶어 놓기도 한 뒤 형식적인 재판도 안 거친 상태로 헬기에 태워 산 채로 라플라타 강이나 태평양, 대서양에 던져 넣어 반정부 인사들을 처형하는 일이 매우 흔했다.  

물론 바로 옆 나라인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에도 '죽음의 비행'이 있었지만 비델라 정권은 한술 더 떠 아예 '죽음의 비행'만을 위한 전용 비행 대대까지 만들었을 정도였을 정도로 '죽음의 비행'을 즐겼다고 한다. 당시 아르헨티나에서 자행된 '죽음의 비행'으로 공식 수치로만 789명이, 일반적으로는 5000명이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2건의 '죽음의 비행'에 참여했던 아돌프 실링고의 증언에 따르면, 1977년부터 1978년까지 매주 수요일에 비행이 있었고, 한 비행에서만 17명이 사망하는 일도 있었으며, 그 기간 동안 총 180~200번의 비행이 자행되며 1500~2000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심지어 정신병을 앓다가 1971년에 정신병원에서 요절한 비델라의 아들인 알레한드로를 비델라의 요구로 돌봐준 프랑스인 수녀 2명조차 단지 실종자의 행방을 알려달라는 요구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1977년 12월에 고문당한 뒤 산 채로 바다에 투척당했다. 심지어 이를 부하들의 독단적인 행위라 보는 것도 완전히 불가능한 게, 비델라는 자기의 아들을 돌봐준 이 수녀들이 체포된 사실을 통보받았다고 한다.


아동 대량 유괴와 강제 입양
강제 입양은 비델라 정권의 행각들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악행인데, 실제로 비델라는 아이들이 '불온한 사상'에 물들면 안된다는 이유로 반정부 인사의 어린 자식들을 납치한 후 강제로 친정부 인사들에게 입양시켰다. 

당시 군부는 사망하거나 '실종'된 여성들 중 약 10%, 전체 사망자 혹은 '실종자' 중 약 3%에 달하는 임산부들(군부에게 강간을 당해 임신을 당한 경우도 포함)만큼은 살려뒀는데, 몇몇 임산부들은 아이를 낳을 때까지는 다른 수감자들에 비해서는 대우를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임산부들은 좁은 수용소 안에 있는 비밀 산부인과에서 감금된 채 머리가 두건으로 가려진 후 팔목에 수갑이 채워진 채 아비도 모르는 아이를 출산해야 했으며, 이렇게 낳은 아이를 볼 수 있던 산모들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어떤 임산부들이 고문을 받으며 고통의 비명을 지르다가 자신도 모르게 아이를 출산하면 바로 옆 방에 대기하고 있던 간호사가 아이를 받았다는 증언도 있다. 

임산부가 아기를 낳고 나면 산모들은 용도폐기가 되었다는 듯 총살당하거나 군용기에 실려가서 산 채로 바다에 던져졌다. 그리고 수용소에 끌려간 임산부는 출산일까지 감시당하다가 출산 후에 총살당했다. 당시 아르헨티나에서는 16살짜리 임산부가 길거리에서 납치당하고 수용소에서 출산한 후 아이와 같이 '실종'되는 일도 있었고, 심지어 임산부에게서 갓 태어난 아기가 총살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임산부가 낳은 아기들은 출산 직후 문서 날조로 신분이 조작된 후 아르헨티나 군인과 경찰 등 친군부 인사들에게 강제로 입양되어 친군부 성향의 인사로 자라게 되었고, 당연히 납치되기 전 출산한 아기들이나 유아, 즉 말을 못 하거나 아직 부모에 대한 인식이 없을 정도로 어린아이들도 친정부 인사들에게 강제로 입양되었다. 이렇게 유괴된 아이들은 약 400~500명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아이 입양 정책은 스페인의 정신과 의사 안토니오 바예호-나헤라가 이론을 제공했다고 한다. 프랑코 독재 정권을 위해 일한 나헤라는 "반정부 인사들이 주장하는 공산주의 등의 이념은 일종의 정신 질환이며 이들로부터 티묻지 않는 건강한 아이들을 만들어 아이들을 구출해 스페인 민족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야 한다"는 이론을 설파했고, 프랑코 정권도 집권 기간 반체제 인사의 아이 3만 명을 납치해 친정부 인사 가정 등에 입양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어린 반정부 인사들의 아이들이 잔혹한 탄압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될 경우 이 아이들이 정권에 위험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비델라 정권은 '테러리스트'의 사상이 '주입'되기 쉬운 환경에서 아기들을 '구출'하여 군인들에게 보내 '전복적인' 부모의 사상 대신 '올바른' 군인들의 사상을 주입해 아기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도 있었으며, 자기들이 많은 사람들을 죽여 아르헨티나의 인구가 모자랄 수도 있기 때문에 정치범인 여자 죄수로부터 아이들을 잉태시켜 낳게 해 그 아이들을 핵심적인 친정부 인사들로 만들면서 아르헨티나의 인구도 늘리겠다는 일거양득의 생각도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이것을 계획한 군부는 당국이 운영하는 구치소들 중 3곳(해군 학교도 포함)에는 산부인과까지 설치하여 아이의 출산을 장려(?)했다고 한다. 

거기에 자기의 아버지로 한평생을 믿어왔던 사람이 알고 보니 친부모를 살해한 후 생후 2주도 안 된 본인을 유괴한 불구대천의 원수인 경우도 있었으며, 심지어 양부모 중 아빠가 친부인 경우도 현실에 있었는데, 정확히는 친부가 친모를 강간하여 임신시키고 출산까지 수용소 같은 곳에 가뒀다가 출산하자 죽이고 자녀를 입양이라는 명목으로 탈취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진상이 알려지자 강제로 입양당한 아이들이 자살하거나 양부모를 살해한 경우까지 생겼다.

 

찰리 작전(Operation Charly)
그리고 비델라는 1979년 11월부터 파나마,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등의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비밀 군사 활동 센터를 설치해 군인들과 다른 독재 정권, 준군사적 대반군에게 아르헨티나의 '경험'을 수출하여 군사적 지원을 제공한 '찰리 작전'도 시행했다. 아르헨티나는 이 '찰리 작전'을 통해 다른 남미 국가들에게 '무자비할 정도로 완벽한 사회 통제 기술', 즉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고문과 강제 실종 기법들을 수출했다. 

이 작전은 미국이 떠나서 공산주의에 무방비로 노출된 남미를 지켜야만 한다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실시되었는데, 이 작전을 입안한 사람은 상술한 로베르토 비올라 중장이었다. 

실제로 이란-콘트라 사건으로 유명한 니카라과의 반군 콘트라가 당시 아르헨티나의 지원으로 탄생했고, 온두라스에서도 비델라의 '방식'을 전수받은 군인들이 대낮에 거리에서 대놓고 반정부 인사들을 납치한 뒤 비밀 감옥으로 끌고 가 최소 184명을 살해했으며, 당시 내전 중이던 과테말라에서는 아르헨티나 군사 고문이 정부군이 농촌에서 수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는 데에 관여했다. 

그리고 볼리비아에서 코카인 밀매업자들이 조달한 자금으로 1980년 7월 17일에 일어난 쿠데타에도 아르헨티나가 파견한 비밀 요원의 지원이 있었다고 하며, 이 쿠데타로 집권한 루이스 가르시아 메자(Luis García Meza Tejada, 1929~2018)가 자행한 단 1년간의 독재로 1천 명이 죽었는데, 메자 정권 시기에 쓰인 고문 수법도 아르헨티나인 특별 고문이 전수해 준 것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비델라는 찰리 작전을 시작하기 직전인 1979년 9월에 미주인권위원회(IACHR)가 아르헨티나에 방문한다고 하자 해외의 '반아르헨티나 캠페인'에 대한 맞대응으로 미국의 BCW에 의뢰하여 "우리 아르헨티나인은 의롭고 인도적입니다"(Los argentinos somos derechos y humanos)라는 슬로건을 만들어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전역의 운전자에게 25만 개의 범퍼 스티커로 배포했다고 한다.


반유대주의 정책
지금 인류의 위기는 이 세 사람에 기인합니다. 19세기 말에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론'으로 사회에 대한 기독교 개념을 파괴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초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으로 가족에 대한 기독교적 개념을 파괴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905년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으로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독교적 개념을 파괴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 유대인 세 명은 서구 문명과 기독교 문명에 반대되는 사상을 전파시킴으로써 세상을 혼돈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에밀리오 에두아르도 마세라(Emilio Eduardo Massera, 1925~2010) 해군 참모총장이 1977년 11월 25일에 La Opinión에서의 인터뷰에서 남긴 말 

또한 비델라는 '유대인들이 반정부 게릴라 단체에 우호적이다'는 이유만으로 1900~3000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했는데, 실제로 당시 아르헨티나 인구의 1%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유대인이 전체 '실종자'+사망자의 약 7~10% 정도를 차지했다고 한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많은 고문 피해자들은 반유대주의적 발언을 하는 심문관은 물론, 고문실 벽에 새겨진 아돌프 히틀러와 하켄크로이츠의 모습을 봤다고 하며 교도관들이 구속자들에게 '히틀러 만세'를 외치게 하거나 감방에서 히틀러의 연설 녹음을 자주 트는 등의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물론 유대인 수감자들은 구치소에서 유별나게 심한 가혹행위를 당했지만 헤르만 괴링의 선례를 따라 한 유대인은 '전형적인 독일인의 얼굴'을 가졌다고 고문을 면제받은 경우까지 있었다. 

심지어 유대인을 우호적으로 묘사한 책들이 금서로 지정되고 나치와 반유대주의와 관련된 책들이 권장 도서가 되는 등 당시 아르헨티나 정권은 네오 나치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명백한 친나치 성향을 보여주었다. 정작 웃기게도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쓸 무기 중 95%는 이스라엘로부터 공급받았다.


민주화 이후 과거청산
군부정권의 몰락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이 된 라울 알폰신은 집권(1983년 12월 10일~1989년 7월 8일)하자마자 호르헤 비델라와 레오폴도 갈티에리 등의 군부 독재자들이 자행한 반인륜범죄 청산을 시도했다. 그는 이전에 군부가 스스로 만들어놓은 자동사면법을 폐기하고 대통령 직속으로 위원회를 설치해 더러운 전쟁 기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1984년에 결과물로 발표된 보고서가 바로 ‘눈카마스(Nunca Más)’였다. 약 50,000페이지에 달하는 이 보고서는 실종자 8,960명의 명단과 약 340곳의 비밀 지하감옥 등 수용시설의 위치와 실상이 자세히 적혀 있는 성과물이었으며 더러운 전쟁 동안 자행된 수많은 인권유린 사례들이 바로 이 ‘눈카마스’에 의해 밝혀졌다. 

그러나 알폰신은 1986년 12월에 ‘60일 이내에 모든 군정 관련자들에 대한 기소를 마무리한다’는 ‘기소종결법’을 내놨으며, 1987년 6월에는 중하급 장교들은 단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며 기소대상에서 제외시켜 주는 ‘강제명령에 따른 복종법’이 통과되었다. 이후 1989년에 들어선 카를로스 메넴 정권도 두 차례의 대규모 사면을 통해서 과거 인권유린의 책임이 있는 군인들과 그 뒤 과거청산 작업에 저항해 네 차례나 반란을 일으켰던 군인들을 풀어줌으로써 알폰신의 과거사 청산은 흐지부지 되어버렸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여전히 군부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과거 군정 책임자들, 중하급 장교들의 조직적인 반발과 쿠데타 위협 앞에서 사회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했다는 옹호론도 있다. 

이후 2003년 5월에 좌파인 네스토르 카를로스 키르치네르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과거 청산이 다시 시작되었다. 과거사 청산을 위한 기구가 다시 설치되어 지금까지(2015년) 5,400여 건의 인권유린 사례를 추가로 접수했으며, 재판 녹취록, 영상 자료, 언론 자료, 수만 명의 실종자와 가족들에 대한 DNA 뱅크에 이르기까지 150만 건의 자료를 모으고 디지털화하고 있다. 2013년에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지 30주년을 맞아 그동안 묻혀왔던 군대의 모든 비밀자료들을 공개하겠다는 국방장관의 발표도 있었다. 

2005년 6월에 아르헨티나 대법원은 1986년의 기소종결법에 위헌 판결을 내림과 동시에 의한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2005년 10월 연방검찰이 인권유린 가해자 295명을 한꺼번에 체포하는 등 약 460여 명 이상이 구속 및 수감되어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추가로 762명에 대한 체포영장이 신청되어 재판에 넘겨져 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자행되었던 악행들의 최고 책임자인 호르헤 비델라 전 대통령은 3번이나 법정 최고형인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결국 2012년 7월 5일에 이루어진 최종 재판에서 영아 납치 혐의가 인정되어 아르헨티나 법원으로부터 50년형을 선고받은 후 복역 중인 2013년 5월 17일에 감옥 독방에서 사망했다.

오늘날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수장되었던 라플라타 강변에 기억의 공원이 조성되었으며, 무자비한 고문이 행해졌던 해군공병학교에는 군정 역사박물관이 건설되었다고 한다. 

 

미국과 더러운 전쟁
“어두운 시대 초기의 미국 정책에 논란이 있다”“우리가 지향하는 이상에 미치지 못했을 때 민주주의는 이를 인정해야 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미국은 인권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데 늦었다. 특히 아르헨티나가 그렇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출처)“美, 아르헨티나 ‘더러운 전쟁’ 대응 못했다” 인정

군사 쿠데타 발발 40주년에 아르헨티나를 방문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아르헨티나의 독재정권을 유지하는 데 미국이 부역했음을 인정하고 더러운 전쟁과 관련해 미국이 보유한 군사·정보 기밀자료를 추가로 공개해 독재정권 유지에 미국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밝히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로이터통신은 미국 대통령이 사과했다고 보기에는 미흡하다고 전했다. 

 

 

 

멕시코의 '더러운 전쟁'
1968년에서 1982년까지 일어난 멕시코 정부와 학생운동 세력의 갈등.

멕시코는 1930년대 이래 제도혁명당이라는 좌파 정당이 정권을 독점해오는 일당 우위 정당제 국가였으나 장기집권으로 점차 보수화되어 갔고, 이로 인해 좌파 성향의 학생운동이 자라나 정권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러한 갈등은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을 앞두고 일어난 반정부 시위를 과격 진압하면서 폭발했다. 멕시코시티 올림픽은 멕시코가 한창 7%대 고도성장을 보이면서 국력을 과시하려고 야심 차게 벌였던 사업인데 여기에 엄청난 돈을 쓴다는 게 알려지자 시민들이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마침 정부에서 점점 반정부 세력의 주 구성원인 학생운동을 옥죄자 개막식 전날에 멕시코 시티 틀라텔롤코(Tlatelolco) 광장에서 수천 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는데 멕시코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는 등 과격 진압을 벌였다. 이때 죽은 학생은 대략 300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이후 멕시코의 반정부 운동은 점차 과격해져갔고 일부는 아예 무기를 들어 게릴라에 나섰다. 정부도 이에 대응해 과격하게 반정부 운동을 진압하는 등 양측이 끊임없는 갈등을 벌였다. 1971년에도 멕시코 시티에서 반정부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해 120명이 죽는 코르푸스 크리스티(Corpus Christi) 참사가 벌어졌다. 또한 멕시코 정부는 반정부 인사들을 잡아들여 고문 등을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갈등과 탄압은 1970년대에 멕시코 정부가 반정부 운동가들을 사면하고 이들의 정당을 합법화하면서 진정되기 시작했다. 일부 반정부 세력은 여전히 무기를 놓지 않았으나 1982년이 되면 이들도 합법적 공간 안에서의 투쟁으로 방침을 전환한다. 

2000년에 비센테 폭스가 대통령이 된 이후 더러운 전쟁 기간 중에 있었던 멕시코 정부의 인권 탄압에 대한 진상조사가 이뤄졌다. 


스페인의 '더러운 전쟁'
1983년에서 1987년 사이에 있었던 바스크 분리주의 테러단체 ETA와 반분리주의 테러단체 GAL의 갈등을 말한다.

바스크 민족주의를 극렬하게 탄압했던 프랑코 정권이 물러가고 스페인은 민주화되었으며 바스크의 자치권도 회복되었지만 바스크의 분리주의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프랑코 정권 시절부터 테러 활동에 나섰던 ETA는 1980년대에도 테러 활동을 멈추지 않았으며, 이에 대해 반분리주의자 세력도 스스로 무장하고 BVE(Batallón Vasco Español), 그리고 이를 확대개편한 GAL(Grupos Antiterroristas de Liberación/반테러리스트 자유 단체)을 조직하여 바스크 분리주의자에 대한 테러 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분리주의자들에 대해 고문, 유괴, 살인 등의 범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이들은 몇몇 분리주의와는 무관한 인사를 상대로 테러를 벌이다가 궁지에 몰리기도 했으며 결국 1987년에 해산되었다.  

GAL의 대원들은 대원 스스로가 특별히 강한 신념을 가지고 활동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지원을 받는 살인청부업자처럼 활동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았는데, 실제로 1996년에 GAL의 활동에 스페인 경찰이 개입했고, 당시 내무부 장관과 정보기관이 그들의 활동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져 정치적으로 큰 논란이 된 바 있다. 특히 내무부 장관이 연루되는 바람에 당시 총리였던 펠리페 곤살레스도 GAL의 테러를 묵인한 게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