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 정부 건국 준비 활동
● 국제회의의 진행
1. 카이로 회담(1943)
- 제2차 세계 대전 중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일본 항복 후의 문제 합의
- 참가 국가 : 미국, 영국, 중국의 수뇌 참가
- 합의내용 : 상호 협력과 전후 일본의 처리 문제 합의, '적당한 시기(in due course)'에 한국의 독립 약속
2. 얄타 회담(1945. 2.)
- 미국, 영국, 소련의 수뇌 참여, 소련의 대일전 참전 문제 합의
3. 포츠담 회담(1945. 7.)
- 미국, 영국, 중국의 수뇌 참여, 일본의 즉각적 항복 요구, 한반도 독립 약속 재확인
연합국의 한국 독립 약속의 내용
미ㆍ영ㆍ중 3국은 조선 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in due course)에 조선이 자주독립할 것을 결의한다. 이 목적으로 3국은 일본과 교전 중인 나라들과 협조하여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기에 필요한 중대하고 장기적인 작전을 진행한다.- 카이로 선언(1943) 카이로 선언의 여러 조항은 이행되어야 하며, 또한 일본국의 주권은 혼슈, 홋카이도, 규슈, 시코쿠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될 것이다.- 포츠담 선언 |
- 1943년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중국의 장제스는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전후 처리 문제에 관해 협의하였다. 이 회담에서 연합국은 최초로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였고, 이러한 약속은 1945년 7월 독일에서 열린 포츠담 회담에서 재확인되었다. 포츠담 회담은 미국, 영국, 소련의 수뇌가 참석하였는데, 이 회담에서 일본의 전후 처리 방침과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을 권고하는 대일 정책이 결정되었다.
- 두 회담의 한국 독립 약속은 우리의 민족 투쟁을 국제 사회가 인정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카이로 선언에서 연합국은'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애매한 표현을 두어 일제의 항복 이후 한국 문제를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처리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 건국 준비 활동의 전개
1.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건국 강령 발표
- 건국 강령: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추구한 조소앙의 삼균주의에바탕 → 보통 선거에 의한 민주 공화국 건국, 주요 산업 시설의 국유화, 무상·의무 교육
- 건국의 단계:국토 탈환 → 광복 후 민주 공화국 건설
2. 조선 독립 동맹의 활동
- 조선 독립 동맹:중국 화북 지방의 사회주의 계열이 결성(1942) → 조선 의용군을 창설하여 중국 공산당과 활동
- 건국 강령 발표:조선 민주 공화국 건설 표방, 남녀평등권의 확립, 대기업의 국영화와 토지 분배의 실현 추구
- 임시 정부와 통합 협의 중 일제의 패망으로 논의 중단
3. 조선 건국 동맹의 활동
- 조선 건국 동맹 결성(1944):여운형 주도로 국내에서 좌우 세력의 합작으로 결성 → 전국적으로 조직 확대, 일본군의 후방 교란을 위해 군사 위원회 준비, 조선 독립 동맹과 협동 작전 모색
- 목표:일본 제국주의 축출, 민주주의 국가 수립 추구
- 광복 직후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로 계승
민족 통일 전선의 형성
● 민족 혁명당과 조선 의용대
1. 민족 혁명당 결성(1935)
- 민족 독립운동의 단일 정당 목표 → 한국 독립당, 조선 혁명당, 의열단 등이 참가
2. 우익 계열 탈당
- 김원봉의 주도 → 조소앙, 지청천 탈퇴 → 조선 민족 혁명당으로 개편
3. 조선 민족 전선 연맹 결성(1937)
- 약화된 민족 통일 전선 강화
4. 조선 의용대의 창설과 활동
- 결성(1938):조선 민족 전선 연맹의 군사 조직
- 활동:중국 국민당과 연합 활동, 심리전·포로 심문·첩보 활동·후방 교란 활동 전개
- 이동(1940년 이후):일부는 조선 의용군, 일부는 한국 광복군에 합류
-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활동하던 조선 의용대는 1940년부터 이동하기 시작하여 일부는 충칭으로 나머지 일부는 화북 지방의 옌안으로 이동하였음
● 조선 독립 동맹과 조선 의용군
1. 화북 조선 청년 연합회
- 항일 조·중 연합, 독립 해방 목적
2. 조선 독립 동맹 조직(1942)
- 결성 : 화북 조선 청년 연합회가 화북 지역으로 이동해 온 조선 의용대원을 흡수하여 조직
- 조선 의용군 : 옌안에서 창설,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의 편입, 중국 공산당과 연합 활동
●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한국 광복군의 활동
1. 한인 애국단의 활동
- 목적 : 만보산 사건으로 생긴 중국인의 반한 감정 해소, 침체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활성화
- 활동 : 이봉창의 일왕 폭살 기도(1932), 윤봉길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1932) → 중국 국민당 정부가 임시 정부를 지원하는 계기
2. 임시 정부의 이동
- 이동 배경 : 상하이 사변, 윤봉길 의거, 일본의 중국 침략
- 이동 시기 전략 : 초급 간부 양성(한인 청년의 중국 군관 학교 입교, 국군 편성 계획 수립), 정부와 의정원 확대 개편(전시 체제 준비), 군사 위원회 설치, 군사 계획 수립, 군사 특파단 파견(한국인 대상의 모병 활동, 일본군 내 한국인 탈출 공작)
- 일본의 침략을 피해 중국 국민당과 함께 이동 → 충칭에 정착(1940)
3. 한국 독립당 결성(1940)
- 한국 국민당 + 한국 독립당 + 조선 혁명당 → 한국 독립당(김구 중심)
- 우익 세력의 통합 운동,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여당 역할 담당
4. 건국 강령 발표(1941)
- 조국 광복을 염두에 두고 정치 이념과 독립 전쟁 준비를 알리는 건국 강령 발표
5. 한국 광복군의 창설과 활동
- 창설(1940) : 임시 정부 직속 무장 부대로 창설, 총사령관 지청천 → 김원봉을 중심으로 이동해 온 조선 의용대의 일부 병력 편입(1942)
-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 : 군사 협정 체결 → 중국 군사 위원회의 지휘·감독
- 대일 선전 포고(1941) : 연합군의 일원으로 연합 작전 준비
- 영국군과 합동 작전 전개 : 인도·미얀마 전선에서 심리전 참여
- 국내 진공 작전 계획 : 미국 전략 정보처(OSS)의 지원으로 국내 정진군 편성 및 훈련 시행 → 일제의 항복으로 실행하지 못함
Q ㉠ 정당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우리는 한국 국민당, 조선 혁명당, 한국 독립당 등 3당의 과거 조직을 공동으로 해산하고 통일적인 ㉠ 을/를 창립하며 창립의 의의를 국내외에 알린다. …(중략)… 중국의 용감한 항일 전쟁은 이미 4년째에 접어들었다. 외적의 붕괴와 중국의 대승리는 이미 기정사실로 공인되고 있다. 이런 천재일우의 시기에 맞춰 함께 왜적을 몰아내고 조국을 광복하는 것이 우리의 중대한 사명이다. |
① 조선 혁명 선언을 활동 지침으로 삼았다.
②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여당 역할을 하였다.
③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의 창설을 주도하였다.
④ 한국 광복 운동 단체 연합회를 결성하였다.
【해설】 정답 ②
이 사료의 키워드는 중국의 용감한 항일 전쟁이 4년째이라는 것으로, 1937년 중일전쟁이 발생하고 4년째는 1940년이다.
②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중경에 정착하여 3당이 합당하여 한국독립당이 만들어졌다. 김구가 주도하며 임시정부의 여당 역할을 하였다.
오답
① 의열단 ③ 조신 민족 혁명당
④ 김구는 한국 국민당 등 민족주의계 단체를 통합하여 한국 광복 운동 단체 연합회를 결성하였다.
✽ 한인애국단 창설(1931, 김구, 상하이)
창조파 소외 목적 : 의열단 제휴
이봉창, 윤봉길 의거(32, 봉봉삼니)
임정의 이동 시작
중국 국민당의 후원
✽ 임정의 충칭 도착(1940)
많은 사업
4차 개헌 : 김구 주석 중심의 단일 지도체제
여당창당 : 한국독립당(건국강령발표 41, 조소앙의 삼균주의)
한국 국민당 + 한국 독립당 + 조선 혁명당 → 한국 독립당(김구 중심)
한국광복군 창설
Q 밑줄 친 이 단체 에 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는 만주 지역의 독립군과 각처에 산재해 있던 무장투쟁 세력을 모아 충칭에서 이 단체를 창설하였다. |
①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의 일부를 통합하여 군사력을증강하였다.
② 초기에는 중국군사위원회의 지휘와 간섭을 받았다.
③ 중국의 화북 전선에서 일본군에 대항하여 팔로군과 연합작전을 전개하였다.
④ 중국 주둔 미국전략정보국(OSS)과 합작하여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해설】 정답 ③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충칭에서 창설하였다(1940).
① 한국광복군은 1942년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를 흡수하여 군사력을 보강하였다.
② 한국광복군 행동 준승은 총9개의 항으로 구성되었는데, 광복군은 중국군 참모총장의 지휘를 받아야 하고, 지휘체계는 중국 군사위원회를 거쳐야 한다고 명시되었다.
③ 조선의용군은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과 함께 호가장 전투를 수행하는 등 항일 독립 전쟁을 전개하였다.
④ 한국광복군은 미군(OSS부대)과 연합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하였으나 일본의 패망으로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였다.
✽ 한인애국단 창설(1931, 김구, 상하이) ✽ 임정의 충칭 도착(1940)
창조파 소외 목적 : 의열단 제휴 많은 사업
이봉창, 윤봉길 의거(32, 봉봉삼니) 4차 개헌 : 김구 주석 중심의 단일 지도체제
임정의 이동 시작 여당창당 : 한국독립당(건국강령발표 41, 조소앙의 삼균주의)
중국 국민당의 후원 한국광복군(지청천) 창설 광복군사열 창씨사방 1940
한국 광복군의 창설과 활동
- 창설(1940) : 임시 정부 직속 무장 부대로 창설, 총사령관 지청천 → 김원봉을 중심으로 이동해 온 조선 의용대의 일부 병력 편입(1942)
-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 : 군사 협정 체결 → 중국 군사 위원회의 지휘·감독
- 대일 선전 포고(1941) : 연합군의 일원으로 연합 작전 준비
- 영국군과 합동 작전 전개 : 인도·미얀마 전선에서 심리전 참여
- 국내 진공 작전 계획 : 미국 전략 정보처(OSS)의 지원으로 국내 정진군 편성 및 훈련 시행 → 일제의 항복으로 실행하지 못함
공무원 두문자 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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