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르하치
청 초대 황제
천명제 | 天命帝
출생
1559년 2월 21일
건주여진 허투아라 숙수후부
(現 랴오닝성 푸순시 신빈 만족 자치현)
즉위
1616년 2월 17일
건주여진 허투아라 숙수후부
(現 랴오닝성 푸순시 신빈 만족 자치현)
사망
1626년 9월 30일 (향년 67세)
후금 성경 복릉 융은문
(現 랴오닝성 선양시 위훙구)
능묘
복릉(福陵)
재위기간
청 초대 황제
1616년 2월 17일 ~ 1626년 9월 30일
청나라(후금)의 창업군주. 이성계, 왕건, 유방 등의 보통의 창업군주들이 흔히 그렇듯 일반적으로 청태조나 천명제보단 성명 및 휘인 아이신교로 누르하치나 그냥 간단하게 누르하치로 자주 불린다.
1583년 건주여진족 추장에 오른 뒤 건주여진을 통합하면서 강성해졌다. 그러자 상국 행세를 하던 명나라가 이를 견제하기 위해 경쟁 부족인 해서여진과만 무역을 하겠다며 건주여진에게 금수조치를 내렸다. 이에 명과 원한 관계도 있던 누르하치가 반기를 들며 만주를 통합하고 기세를 몰아 명나라까지 쳐들어갔으나, 명나라의 마지막 명장으로 평가받는 원숭환에게 영원성 전투에서 막혀 철수한 뒤 얼마 안가 사망했다.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의 아이신(愛新)은 쇠를 뜻하고, 기오로(覺羅)는 큰 여섯 부족을 말한다. 즉, 아이신기오로는 쇠 부족이라는 뜻이다. 누르하치(努爾哈赤)의 뜻은 만주어로 멧돼지 가죽이라고 한다.
누르하치는 랴오닝성 출신으로 오도리 만호부(斡朶里 萬戶府)의 만호였던 먼터무(孟特穆)의 6대손이었다. 아버지 탁시와 할아버지 기오창가는 여진족이었지만 고려 출신 귀화인의 후손인 명나라 요동 총병 이성량에게 복속해 있었다.
생애
청나라(후금)의 초대 황제인 청태조 천명 고황제 아이신교로 누르하치의 생애에 대한 항목.
가계 및 어린 시절
누르하치는 랴오닝성 출신으로 오도리 만호부(斡朶里 萬戶府)의 만호였던 먼터무(孟特穆)의 6대손이었다. 아버지 탁시와 할아버지 기오창가는 여진족이었지만 고려 출신 귀화인의 후손인 명나라 요동 총병 이성량에게 복속해 있었다.
누르하치의 조상들은 수극소허부(또는 수크수허 아이먼) 소속으로 전체 부를 다스리는 족장은 아니었고 닝구타 버일러 연맹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 닝구타 버일러 연맹은 대대로 명나라에 복속해 있었다. 그리고 건주위의 여진족들은 명나라와의 교역으로 계속 문화 수준이 높아져 있었으며, 수렵-채집-유목생활을 버리고 점점 정착생활을 하게 되었다.
누르하치의 조부 기오창가는 허투아라를 다스리며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이중 4남이 탁시였다. 누르하치는 탁시의 장남으로 태어났고, 어릴 때부터 기골이 장대했다. 명나라의 문화적인 영향 때문에 누르하치는 어릴 때부터 글(한문)을 배워 다른 정복왕조의 개창자처럼 문맹이 아니었고, 여진족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이었던 말타기와 무예도 열심히 익혔다. 하지만 9세 때 생모가 죽고 아버지가 계모 하다나라 컨저를 맞자, 계모 밑에서 학대를 받았고 퉁갸씨 가문의 딸과 결혼한 후 18세라는 여진 사회에서는 늦은 나이에 분가하여 처가에 머물렀다. 아버지는 가축 몇 필과 노비 몇 명을 주면서 누르하치를 분가시켰다. 이때 누르하치는 넉넉한 상태가 아니었고, 만주의 산에서 약초와 산삼을 캐내 명나라 상인들에게 파는 심마니 노릇으로 생계를 이었다. 그는 만주뿐만 아니라 명나라 북방의 여러 곳을 떠돌면서 중국어와 몽골어를 익혔다. 하지만 이런 약초상 생활에 싫증이 난 누르하치는 요동 총병 이성량의 휘하에 입대했다. 승마와 활쏘기에 재주가 있었기 때문에 당장 이성량의 눈에 들었고, 그는 이성량 휘하에서 점점 승진했다.
조부와 부친의 죽음
1583년 24세 되던 나이에 누르하치의 삶에 큰 변화가 생겼다. 당시 여진의 한 추장인 아타이 장긴이 고성(古城)에서 명나라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아타이의 난) 이성량이 지휘하는 명나라군은 즉시 반란 진압에 나섰고, 이성량에 복속해 있었던 누르하치의 조부 기오창가와 부친인 탁시는 아타이 장긴을 설득하려고 성안에 들어갔다. 그 이유는 아타이의 아내가 기오창가의 손녀, 즉 누르하치와는 사촌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누르하치가 속한 수극소허부(또는 여진어로 수크수후 아이먼)의 족장 중 한 명이자 투룬 성주 니칸 와이란은 명군에게 공격을 하도록 설득했고, 명군의 공격에 반란군 및 반란군을 설득하러 성에 들어간 탁시와 기오창가는 모두 사망하게 되었다.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누르하치는 이 때문에 이성량에게 크게 항의를 했다. 이성량은 누르하치에게 사과하고, 그를 좌위지휘사로 승진시키는 한편, 명나라 조정은 칙령 30통과 말 30필을 누르하치에게 배상금조로 주었다. 그리고 조부와 부친의 시신을 정중히 누르하치에게 인도했다. 누르하치는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비명에 세상을 떠났지만, 벼슬도 높아졌고 재산도 불어났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이어 자기 가문의 추장이 되는 행운도 얻었다. 그렇다고 해서 누르하치가 이들의 죽음을 기뻐한 것은 아니고, 이를 계기로 명나라에 깊은 한을 품고 복수를 꿈꾸게 되었다.
여진족의 통일
당시 여진족의 상황
여진족은 예전에는 읍루, 말갈족이라고 불리던 사람들로, 기원전부터 대체로 한족이나 예맥계(한민족계) 민족에 비해 문화수준이 낮아서, 중앙집권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부족국가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역사적으로 고구려, 발해등의 예맥계 민족이나 그밖의 요나라등에 복속해 있다가 12세기 민족적 자각으로 만주에서 금나라를 세워 요나라를 멸하고 송나라를 장강 이남으로 쫓아내 약 100여년간 화북을 지배했다. 하지만 몽골족이 칭기즈칸의 지도아래 일어서고, 이어 몽골제국이 남송과 협공을 통해 남북으로부터 금나라를 공격하자 멸망했다. 화북에 남아있던 여진족은 상당수 몽골족에게 학살당하고, 만주에 남아있던 여진족들은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부족별로 몽골제국이 이름을 바꾼 원나라에 복속해 있다가 이후 원나라가 명나라에 쫓겨 몽골고원으로 도망가자, 만주까지 진출한 명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원래 만주 지역은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잠시 당나라가 관할했으나, 698년 발해가 세워지고, 이후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가 지배하다가 북원의 장수인 나하추가 명나라에 귀순하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한족 왕조인 명나라의 관할이 되었다. 명나라는 이렇게 민감한 지역인 만주를 다스리기 위해, 일반 행정구역처럼 6부의 이부에서 관할하는 것이 아니라 병부에서 관장하도록 했다. 왜냐하면 여진족 자체도 안보상으로 문제였거니와, 만주 서쪽에 있는 몽골도 명나라의 안보에 위험한 존재였다. 그리하여 이곳에는 대군이 주둔하며 군인이 행정과 군사를 총괄했다. 이성량은 이곳을 다스렸는데, 점점 요동을 사적으로 영지화했다.
한편 남만주에 분포하던 여진 부족들 상당수는 조선왕조에도 복속했는데, 이들을 번호라고 한다. 조선왕조는 이들을 자국 백성으로 간주했다. 원래 조선왕조는 여진족의 영역이었던 함흥평야에서 자란 이성계시절에는 여진족에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여진족 또한 조선왕조 초반의 여러 내란(조사의의 난 및 이시애의 난)에도 개입할 정도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후 명나라의 여진에 대한 통제력이 강화되면서 여진과 조선과의 관계는 멀어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는 이들이 통제 밖으로 벗어나지 않도록 교역을 허가하기도 하고, 여진 추장들에게 조선의 벼슬을 주는 등, 여러모로 관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남만주의 여러 여진 부족들은 명나라와 조선의 영향 아래서 점점 경제가 발전하고 있었으며, 이는 부족국가에서 중앙집권국가로 발돋음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건주여진 통일
누르하치는 이렇게 24세의 젊은 나이로 자기 일족의 추장(수러 바일러)이 되었다. 누르하치는 그의 일족을 무순의 동쪽 지방으로 옮기고 다스렸다. 하지만 누르하치가 추장에 오른 것에 반대한 누르하치의 일족도 많았는데, 이들은 누르하치의 원수인 부족장 니칸 와이란과 손을 잡았다. 누르하치의 부족은 큰 규모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의 병력은 100여 명에 불과했으며, 그래서 누르하치는 여동생인 아지가를 가하샨 하스후와 혼인시키고, 창슈와 양슈, 사르후의 수령 노미나와 동맹을 맺은 후, 조부와 아버지의 원수인 니칸 와이란을 죽이려고 했다.
1583년 누르하치는 원수인 니칸 와이란을 제거하기 위해 공격을 개시했는데 니칸 와이란은 번번히 도망쳤다. 누르하치는 자신의 작전이 자꾸 누설되는 것을 알고 동맹자인 노미나가 니칸 와이란과 내통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결국 누르하치는 노미나를 계략으로 죽이고 사르후를 차지했다. 이어서 니칸 와이란을 계속 추격했으나 친족이 배신하여 다시 중지했다. 누르하치는 친족들의 배신을 토벌했고 1583년까지는 모든 친족의 반항을 진압하여 이들로부터 충성을 맹세받았다.
1584년 동악부(동오 아이먼)의 족장인 아하이는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던 누르하치를 두려워하여 먼저 싸움을 걸었다. 이에 양측은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누르하치는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본거지인 허투알라에 돌아왔다. 상처를 회복한 누르하치는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 뭉친 여러 여진 부족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9월에는 혼하부(후너허 아이먼)를 손에 넣었다.
1586년 결국 니칸 와이란의 거점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니칸 와이란은 명나라로 도망갔고, 누르하치는 명나라에게 그를 인도해줄 것을 요구했다. 당시 명나라 측 지휘관이었던 이성량은 누르하치를 달랠 겸, 니칸 와이란의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누르하치에게 넘겨주었고, 누르하치는 그를 참수하여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이렇게 세력을 키운 누르하치는 주변 부족을 공격하여 1587년에는 저천(哲陳)부, 1588년에는 마지막으로 완안부를 복속시켰다. 이로써 누르하치는 건주여진 8부를 모두 지배하게 되었다. 불과 병력 100여 명을 가졌을 뿐이었던 누르하치는 단 5년 만에 병력 15,000명의 병력을 가진 건주여진 전체의 지도자가 되었다.
해서여진 복속
건주여진이 통합된 직후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누르하치의 세력을 주시하던 명나라는 조선에 상륙한 일본군을 막기 위해 한반도로 향했고, 이틈을 타서 누르하치는 동쪽에 있는 해서여진을 통합하기 위한 작전을 짜게 되었다.
해서여진의 주요 부족은, 울라(烏拉)씨, 호이파(輝發)씨, 하다(哈達)씨, 예허(葉赫)씨 등 4개 부족이었다. 이들은 스스로 금나라의 후예를 자칭하고 있었으며, 당시까지만 해도 해서여진은 건주여진보다 세력이 더 컸다. 같은 여진 동족이었지만 해서여진과 건주여진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명나라가 교역권을 가지고, 해서여진과 건주여진, 그리고 각 부족끼리 서로 반목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문에 누르하치 이전에 두 여진 대부족의 사이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났다.
명나라가 조선에서의 대일 전쟁에 정신이 팔린 동안,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은 해서여진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해서여진은 1593년 9월 구러산 전투 당시, 4개 부에다가 일부 몽골 부족을 끌어들여 9개 갈래의 병력 30,000명으로 병력이 10,000~15,000명이었던 건주여진을 쳤지만 누르하치의 눈부신 지휘 끝에 건주여진이 승리했다. 이때부터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주의를 끌게 되었으며, 명나라측에서는 이후
군대가 위세를 떨치며, 멀고 가까운 곳이 모두 복종하고 있다.(軍威大震,遠邇懾服)
라며 우려를 표했다.
구러산 전투 이후, 건주여진 내부에서 누르하치와 그의 동생 슈르하치의 사이가 나빠져 누르하치가 동생을 죽이는 등, 형제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누르하치는 이후 하다부, 호이파부, 울라부를 차례차례 항복시켜 예허부를 제외한 해서여진을 휘하에 복속시켰다. 이 시점부터 누르하치는 여진족 전체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때 조선 사신들도 북경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누르하치의 군대를 목격하고, 광해군에게 이들이 절대로 야만족의 군대가 아니라 군율이 엄정하며 모두 갑주를 입을 정도로 무장도 충실했다고 보고했다. 당시 조선측은 누르하치를 "누르하치 추장"이라는 의미에다가 비하의 의미로 "종 노"(奴)를 써서 노추(奴酋)라고 불렀는데 광해군의 조선 조정에서도 이들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으며, 《광해군일기》에 160번이나 나올 정도였다. 광해군은 함경도와 평안도쪽의 경계를 소홀히 하지 말라는 명령을 계속 하달했다.
두만강 동쪽, 현재의 백두산 동쪽에 살았던 야인여진은 문화 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부족 단위로 복속시키지 않고, 그냥 개인별로 팔기에 소속시켰다고 한다. 어쨌든 야인여진도 부족별로 편제되지는 않았지만 상당수가 후금 쪽으로 간 것은 맞다. 그래서 누르하치가 일어선 이후 함경도쪽의 여진족의 노략질은 없어졌다. 인구가 적었던 만주족의 형편상, 청나라는 산해관 안으로 들어간 이후에도 넓은 의미에서 동족인 야인여진인들을 중국 본토로 데려와 만주족의 규모를 조금이라도 늘리려고 노력했으나, 그것을 거부하고 만주 - 연해주의 산악 지역에 살았던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분명한 여진족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만주족에 편입되지는 않았다.
누르하치는 해서여진과의 전쟁 와중인 1606년 수러 쿤둘언 한에 등극했다.
후금 건국
해서여진을 통합한 누르하치는 1616년 허투알라에서 후금의 건국을 선포하고, 수러 겅옌 한으로 즉위했다. 생여진의 완안(完颜)부가 1115년에 세운 옛 금나라를 계승해 국호를 아이신(aisin, 金)으로 정하고, 연호를 압카이 풀링아(abkai fullingga, 天命)라고 했다.
명나라와의 전쟁
이성량
위에서 보았듯이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요동총병 이성량 휘하에서 성장한 인물이었다. 이성량이라는 인물은 ‘요동왕’이라는 별명을 가졌을 정도로 요동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누르하치는 이성량의 부대내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이성량의 양아들이라는 소문도 퍼져 있을 정도로 이성량과 사이가 좋았다. 명나라는 만주를 장악한 이래 이이제이와 분할지배를 통해 여진족을 분열시키고, 서로 싸움을 붙였으며, 일부 여진족은 명나라편에 붙어서 동족을 공격하거나 북원(몽골) 원정에 동원되었다.
이성량은 능력이 출중해서 여진족을 분열시키고 북원의 좌익을 견제하는 공작을 성공적으로 해냈으며, 특히 북원의 대칸인 차하르부의 투먼 칸의 공격을 몇번이나 저지했다. 그래서 당시 암군인 신종 만력제의 재위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명나라의 북방은 안정되어 있었다. 이렇게 이성량이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진족들은 이성량을 두려워했고, 누르하치조차 이성량이 좌천되기 전까지는 명나라에 직접적으로 도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성량은 만주를 영지화하고 전횡을 일삼았으며, 사치도 엄청났다. 이렇게 이성량은 점점 독립 군벌처럼 행세하기 시작했다. 당시 만력제가 등극하고 있었음에도 군비를 마음대로 쓰며 만주를 개인왕국화하는 이성량의 행태를 북경의 조정에서 두고 보기 힘들어졌다. 게다가 이성량은 휘하 여진병을 이용하여 왜란으로 약화된 조선을 침공해 전주 이씨를 대체하고 한반도를 지배할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이성량의 행태가 너무 심각하여 결국 1591년 웅정필에게 탄핵되어 자리를 잃었다. 이후 어떻게 다시 복직하여 요동으로 돌아갔으나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1608년 다시 재탄핵되었고, 베이징에 돌아와 사망했다.
그러나 이렇게 이성량을 해임한 것은 결과적으로 명나라의 섣부른 판단이었는데 이성량이 아무리 타락했다고 하더라도 몽골이나 여진 같은 전투민족들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명 조정은 이성량을 파면시키고 경험도 없는 사람을 보내버렸다. 새로운 인사들도 본국에서 들었던 것과 달리 예상외로 강한 누르하치의 세력에 놀랐고, 함부로 제압하지 못했다. 여기서 누르하치의 선택은 대적도 아닌 뇌물이었다. 누르하치는 해서여진과의 전쟁 중에 적을 동시에 여럿 만드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고, 일단 명나라에게는 굽신거리면서 이성량의 후임자들에게 뇌물을 바쳐 명나라 조정을 안심시켰다. 게다가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이 싸우는 것은 명나라가 보기에는 그동안 여진족을 분열시켰던 이이제이책이 먹혀들어간다고 생각하는 면도 있어서 그다지 경계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예전의 건주-해서 전쟁과는 달리 아예 해서여진을 복속 및 합병하려고 했고, 명나라는 여기서 누르하치의 대전략을 읽는 데 실패했다.
그래도 명나라는 당시의 건주여진 따위는 충분히 제압할 힘이 있었지만, 불운했던 것은 건주여진이 이렇게 누르하치 휘하에서 흥기할 때 쯤, 명나라가 만력 3대정에 휘말린 것이었다. 이 '만력 3대정'은 누르하치에게 있어서는 천재일우로 이후 명나라의 시선은 전부 이 3대정에 집중되어 누르하치는 아웃 오브 안중이 되어버렸다. 만력 3대정 중에 건주여진은 해서여진 및 야인여진을 모두 통합했다.
이성량은 두 번이나 좌천되었어도, 누르하치가 유일하게 두려워하고 존경한 명나라 장군인 듯하다. 이성량이 죽은 다음에야 누르하치는 소위 "7대한"을 이야기하며 명나라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했다. 또한 훗날 조선으로 망명하지 않고 청나라에 남은 이성량의 후손들은 한인 팔기에 소속되어 청나라에서도 대접을 받았다.
사르후 전투
이성량이 죽자, 거칠 것이 없어진 누르하치는 1618년 "7가지 한(恨)" (또는 7대한)을 내걸고 명나라에 선전포고를 단행했다. 원래 건주여진이 이름을 바꾼 후금은 명나라의 신하국을 자처했으나, 이 7대한을 발표한 시점에서는 대명 침공을 공식적으로 밝힌 것이었다.
첫째, 명나라는 아무 이유없이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죽였다.
둘째, 명나라는 해서여진을 우대하고, 건주여진을 푸대접했다.
셋째, 명나라는 서로 합의한 국경선을 마음대로 바꾸고, 이를 넘어온 건주여진인을 죽였다.
넷째, 명나라는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의 전쟁에서 해서여진을 도왔다.
다섯째, 명나라는 누르하치와 약혼한 예허부의 딸을 몽골의 하르하부에 주도록 권했다.
여섯째, 명나라는 건주위가 개간한 땅과 토지를 파괴했다.
일곱째, 명나라는 만주 사정을 잘 모르는 소백지(蕭栢芝)를 파견하여 건주여진을 완전히 무시했다.
이후 후금의 수도인 허투알라 옆에 있는 명나라의 거점이자, 여진족과 명나라 간의 교역 도시였던 푸순(무순)을 함락시켰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누르하치의 군대는 상인으로 위장해서 무순에 입성한 후, 약탈을 하고 도주하여 명나라 군대를 성밖으로 유인했고, 명나라 군대가 이를 추격하자, 숨겨둔 복병으로 역습, 섬멸시킨 후 무순에 입성했다고 한다.
무순을 함락시키면서 누르하치는 다른 유목민족 왕조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군사력만 믿고 중국을 정복했다가 단명한 다른 유목민족들과는 달리, 왕조를 오래 유지할 수 있도록 국가를 경영해보고 백성을 다스려 본 한족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한 것이었다. 이때 이성량의 손자였던 명나라 유격 이영방이 후금에 항복했다. 이영방은 후금에서 매우 후대를 받고 벼슬이 높아졌으며, 누르하치의 아들인 아바타이의 딸과 재혼하여 손주사위가 되었다. 그 이후에도 사르후 대전에 참가해 명나라군을 격파하는데 공을 세웠고, 정묘호란때도 선봉에 서서 조선을 침공했다.
또한 누르하치는 한족 포로 중에서 대단한 지략을 가진 선비 범문정을 얻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범문정의 집안은 역모에 휘말려 만주로 귀양을 온 처지였는데, 명나라에서 벼슬길이 막히자 명나라를 증오하게 되어 만주족을 도와 출세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후 범문정은 제4대 성조 강희제때까지 후금ㆍ청나라 황제 4명을 섬기면서 여러 계책을 내 후금이 동북 만주의 지방 정권에서 광활한 대륙을 지배하는 중화제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렇게 누르하치는 민족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세력을 키울 수 있는 인재라면 파격적인 자리와 혜택을 주고 초빙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여진족 특유의 군사력에 큰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한족의 인재들까지 갖추니 누르하치의 세력은 점점 커졌다. 이 방침은 제2대 태종 숭덕제 홍타이지 시대에 와서도 변함이 없었고, 이후에도 홍승주, 오삼계 및 모문룡의 부하들과 같은 명나라 측 한족 장수들이 후금의 이런 후한 대접을 보고 편을 바꾸어 결과적으로 청나라가 대륙을 장악하는 데 선봉에 섰고, 명나라 잔당 및 남명을 멸망시키는 데도 큰 활약을 했다.
이어 자신들이 점령한 명나라 도시들의 한족들을 상대해서도
그대들도 짐의 백성이니라.
고 안심시키며 그대로 생업에 종사하도록 하는 한편, 점령된 도시의 명나라측 관원이 귀순 의사를 밝힐 경우 자리를 유지시켜주고 그대로 다스리도록 했다. 그리고 별 효과는 없었지만 한족과 여진족을 함께 거주하게 했다. 누르하치는 시들어가는 명나라를 대신해 진짜 금나라를 재건하려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1619년 4월, 명나라는 후금이 더 커지기 전에 싹을 잘라버리기로 결심하고 임진왜란에도 출정한 바 있었던 양호를 총대장으로 삼아 중국 전토에서 끌어모은 10만~16만 명에 달하는 대군으로 동서남북 4면에서 후금의 수도인 허투알라를 포위 공격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조선과 아직 후금에 복속하지 않은 해서여진의 예허부까지 끌어들였다. 이를 맞는 후금군은 약 6만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후금은 황사바람이 불어 명나라군의 장기인 화력전을 하기 어렵고 명나라의 4개 부대가 손발이 안맞는 틈을 타서 기병을 이용한 기동력으로 각개격파하는 방식으로 4개 부대를 차례대로 패퇴시켰다. 이 역사적인 대전에서 전사한 후금군은 약 2천 명에 불과했지만, 명나라군의 전사자는 4만 7천 명에 달했고 전사한 장수만 300명이 넘었다. 병력 1만 5천을 투입한 조선군도 무려 8천 명이 전사하는 극심한 손해를 입었다. 이를 사르후 전투라고 하며, 이후 명나라에게 미개한 여진족의 연맹 정도로 치부하던 후금은 확고히 위협 세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사르후에서의 대승에 이어 누르하치는 자신에게 복속하지 않고 있었던 예허부도 곧 정복했다. 1621년에는 만주에 마지막으로 남은 명나라 거점인 심양과 요양을 함락시켰다. 이것으로 누르하치는 요하 동쪽에서 명나라의 세력을 몰아내고, 요동을 손에 넣었다.
사르후 전투 이후인 1621년 요양에서 5 km 떨어진 곳에 동경성을 짓고 천도했다. 기존의 수도였던 허투알라는 방어에는 유리했지만 인구 부양력이 낮은 지역이라 인간 사냥과 정복으로 늘어난 인구를 부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 누르하치는 여진족과 한족이 한 집에서 동거하도록 조치했는데, 이는 한족들이 여진족들이 이용하는 우물에 독을 푸는 등 민족간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결국 5년 동안 이런 크고 작은 갈등이 지속되자 인내심이 바닥난 누르하치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요양의 한족들을 대규모로 학살하고, 남은 이들을 노예로 삼은 뒤 동경성을 떠나 심양으로 천도한 것이었다. 이는 하술할 영원성 전투와 함께 그의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실패였다.
영원성 전투
후금은 만주를 거의 장악했지만, 명나라의 하급 무관이었던 모문룡은 명나라의 패잔병을 모아 조직한 후 조선의 철산 가도에 주둔하여 후금군을 치고ㆍ빠지기 수법으로 괴롭혔다. 특히 수군을 동원하여 요동반도와 요하 강을 거슬러 올라가 후금의 심장부인 심양이나 푸순까지도 공략하곤 했다. 이 때문에 후금은 전군을 대명전에 투입하지 못하고, 요하나 요동반도 방면의 수비에 할당해야 했는데, 이것은 인구와 병력이 부족한 후금에게는 큰 문제였다.
마찬가지로 명나라도 1620년대부터 중국 전역에서 농민 반란이 발발하여 대후금전에 전력을 투입할 수 없었다. 명나라는 수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산해관 이북의 모든 병력을 이남으로 철수하여 만리장성을 방어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하지만 병부주사인 원숭환은 이에 반발하여 산해관과 만주의 중간에 있는 영원성에서 농성하자고 주장했다. 원숭환의 전략은 영원성을 지키되, 후금이 영원성을 우회하면 영원성에서 출진하여 후금의 보급로를 끊는 것이었다. 결국 원숭환의 주장이 채택되었으나, 명나라에서는 1만 명도 되지 않는 병력으로 원숭환에게 후금군을 막도록 했다.
1625년까지 후금군은 끈질기게 후방에서 괴롭히던 모문룡군을 몰아내고 뤼순을 탈환하여 요동 반도를 평정했다.
이어 누르하치는 전 병력인 6만 명을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여 영원성을 공략했다. 이때 원숭환이 지휘하는 수비 병력은 1만 명도 되지 않았지만, 영원성은 성벽이 견고했고 홍이포 11문을 비롯한 수성용 병기들을 대량으로 운용했다. 1626년 2월 10일부터 22일까지 벌어진 농성전 끝에 후금군은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고, 이를 영원성 전투라고 한다.
최후
영원성 전투에서 후금군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재기불능으로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소수의 정예기병이 중심이 된 후금 / 청군은 공성전에 유달리 약했고, 요양 및 심양을 공략할 때도 계략으로 명군을 성밖으로 끌어내거나 혹은 성안의 세작으로 공작을 펼친 후 함락시킨 것이었다. 10여 년 이후 병자호란때도 끝내 남한산성 자체는 함락시키지 못했지만 강화도를 함락시켜 조선의 항복을 받아냈다. 송산전투때의 금주성도 포위만 하고 있다가 식량을 모두 소진시켜 항복을 받았다. 원숭환이 지키던 영원성도 마찬가지로 공략에 어려움을 겪었고, 산해관도 결국 명나라가 멸망하고 이를 지키던 장군인 오삼계가 항복하고서야 넘을 수 있었다.
1626년 8월 11일 67세 나이로 붕어했다. 청나라의 기록에는 "병으로 죽었다."라고 나온다.
누르하치가 홍이포를 맞고 부상을 입어 사망했다는 말도 있으나, 일단 정사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되려 정사에는 누르하치의 사망 직전에 탄저병이 돌기 시작했다는 기사가 있기 때문에 병으로 죽었다는 기록을 비추면 탄저병에 감염되어 죽은 것처럼 보인다.
홍이포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기에는 영원성 전투 이후 겨우 석 달 만에 누르하치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몽골 고원으로 진격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자신들의 군주가 부상을 입었다면 본진인 요동으로 돌아가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우선이지 않겠는가? 대포에 맞았는데 부상이 심각하지 않았다는 가정은, 대포를 살살 쏘는 것도 아니고 상상하기 어렵다. 게다가 기록에 따르면 당시 명군의 화포에 맞아 사망한 사람은 누르하치가 아니라 그의 친족일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만주실록》등의 기록에서 누르하치가 영원성 전투 패배를 자책하는 걸 보면 그에게 심리적인 타격을 입힌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아직 공성 능력이 충분하지 않았던 후금 입장에서 영원성 전투 패배는 자신들의 약점을 그대로 노출한 것으로, 누르하치에게는 사실상 산해관 입성이 저지됐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영원성 전투에서 일생 처음으로 참패하여 체면을 구긴 누르하치는 땅에 떨어진 후금군의 사기를 되살리려 했고 영원성 전투 3개월 후인 5월, 직접 내몽골로 친정하여 할하부를 정벌하고 이들의 항복을 받았다. 또한 6월에 몽골 귀족인 오오바 훵 타이지가 후금의 수도인 심양으로 찾아오자 직접 걸어나와 맞이한 행적도 있다. 이런 좌절감이 병으로 이어져 사망에 이르렀을 가능성도 충분히 제기할 수 있다. 어쨌든 당시 평균 수명을 훨씬 넘긴 68세로 사망한 것을 보면 사실 살만큼 살다가 사망했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그의 뒤를 8남인 홍타이지가 이었다. 1636년, 홍타이지는 후금의 국명을 대청(大淸)으로 개칭했고 누르하치는 청나라의 태조로 불리게 되었다. 사후 홍타이지는 누르하치를 복릉(福陵)에 안장했다.
고궁박물관의 누르하치 화상은 실제 《만주실록》 삽화에 그려진 모습과 상당이 다른데, 홍타이지의 화상과 비슷하게 그리다 보니 실제의 모습과 많이 다르게 묘사된 것으로 보인다. 고궁 박물관의 화상은 누가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 《만주실록》, 신충일의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 등 각종 사서 및 기록에 따르면 공통적으로 체구는 크지 않지만 다부진 편이었으며, 턱수염은 없고, 봉황의 눈과 큰 귀를 지녔고, 얼굴이 길고 야무지며, 코가 크고 곧은 편이었다고 한다.
야사에 따르면 아버지가 수달(...)이었다고 한다. 수달이 누르하치의 어머니를 사모해서 밤에 찾아와 누르하치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덕분에 누르하치는 수영을 매우 잘했다고 한다. 이 소문을 들은 한 도인이 찾아와 천자가 될 명당 자리를 알고 있는데, 물속 깊은 곳이라 자신이 들어갈 수가 없으니 누르하치에게 묻어달라고 부탁하고 부탁을 들어주면 누르하치에겐 왕이 될 명당 자리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천자의 자리에 자기 조상의 유골을 묻어 결국 누르하치가 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하지만 이런 전설은 왕조의 시조를 신격화하기 위해 만들어지곤 하니 진지하게 받아들일 건 아니다. 수영을 잘 해서 별명이 수달이었다면 현실성이 있지만...
누르하치는 유비의 오호대장군이나, 칭기즈 칸의 사준사구와 비슷하게 후금 개국오대신(后金 開国五大臣)이 있었다. 이들은 누르하치와 의형제 사이였으며, 특히 누르하치 사후 후계구도에서 이들이 중심을 잡아주었기 때문에, 후금판 왕자의 난이 발발하지 않고 제8왕자인 홍타이지가 안정적으로 칸위를 계승할수 있었다고 한다.
피옹돈(費英東, Fiongdon): 구왈기야 씨족의 족장 가문인 구왈갸 하라(瓜爾佳氏) 출신. 누르하치의 맏손녀사위이기도 하다. 진만인적(眞萬人敵)이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한다.
어이두(額亦都, Eidu): 니오후루 하라(鈕祜祿氏) 출신.
후르한(扈爾漢, Hūrhan): 퉁기야 하라(佟佳氏) 출신. 누르하치의 양자이기도 하다.
호호리(何和理, Hohori): 동고 하라(董鄂氏) 출신.
안피양구(安費揚古, Anfiyanggū) : 기오르차 가문 출신으로 누르하치의 호위병이기도 했다. 숑코로 바투루(송골매의 용사)라는 칭호가 있었다고 한다.
개인의 전투력도 대단했다. 승마와 활쏘기는 당시 여진족 가운데에서도 최고라고 일컬어졌다. 전투에서도 항상 진두에 섰으며, 완안부의 전투에서는 선두에서 달려드는 적병 100여 명을 쓰러뜨리고 적진에 돌진했다고 한다. 저천부와의 대결에서는 누르하치와 부하 두 명이 800여 명에 포위되었으나, 순식간에 20명을 쓰러뜨리고 포위에서 빠져나왔다.
약초상 노릇을 할 때, 여진족 기준 홍삼을 개발했다고 알려져 있다. 명나라 상인들이 조선 인삼의 값을 떨어뜨리려고 인삼이 썩을 때까지 사주지 않자, 이를 쪄서 말려 가공하는 방법을 개발, 명나라 상인들의 얄팍한 수를 무너뜨렸다고 한다.
적에게 홀로 쫓길 때, 자신이 키우던 개가 적의 군마의 다리를 물어 쓰러뜨렸고, 이 때를 틈타 달아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부터 만주족이 개고기를 먹는 것을 금했다고 하여 만주족은 개를 먹지 않는 풍습이 있다.
삼국지연의, 수호전 덕후였다. 여러 유목민족 출신 정복왕조 개창자와는 달리 누르하치는 문맹이 아니었고, 어렸을 때 한문을 배워 중국고전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삼국지에서 유비의 고사를 읽고 금나라를 부흥시키려는 포부를 가졌다고 한다. #
명나라에 대해서는 굉장히 강경했지만 조선에 대해서는 상당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조선은 여진족이 통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전처럼 여진족을 무시했고, 누르하치가 국서를 보냈어도 조선은 이전처럼 상당히 무례한 답신을 보냈다. 이미 건주여진을 통일한 후부터 조선에 우호관계를 맺자고 졸랐으나, 조선은 여진을 역사적으로 얕잡아 보았기 때문에 대등한 관계를 맺자는 이야기에 호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전에는 조선과 특별한 마찰은 벌어지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주로 누르하치 추장 약자의 의미에 비하의 의미로 "누"의 공식 음차인 "힘쓸 노"(努)가 아니라 "종 노"(奴)를 써서 노추(奴酋)라고 기록되었다.
임진왜란 때 지원군 지원을 두 차례나 제안하기도 했다. 1592년 8월에 '조상의 나라'인 조선에 원병을 보내겠다고 제안했다. 당시 명나라에서 원군 지원에 대해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던지라 조선에게는 가뭄의 단비와 같은 소식이었지만 명나라의 눈치를 보느라 거절했다. 이어 임진왜란이 거의 종료될 시점인 1598년 1월에도 원병을 제안해서 조선 내부에서도 전투보다는 화친에 주력했던 명나라의 모습에 분개해 "원군 받아서 왜놈들 때려잡읍시다!"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지만 결국은 거절했다.
이때 누르하치가 원군을 자청한건, 아무래도 통합 과정에서 주변국인 명이나 조선의 인정을 받으면 다른 부족에 비해 여진족 내에서 정치적 우위를 점유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물론 누르하치가 이때만 해도 진짜 순수하게 친조선파라서 조선을 도우려 했을지도 모르지만, 만주족(여진족)과 한민족은 이미 고려 시대부터 지속적으로 전쟁을 여러번 치러왔는데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여진족과 한민족이 서로 감정적으로 특별한 우호적 관계라고 보긴 어려웠다. 당장 누르하치 때도 후술되어있듯 자신을 홀대하는 조선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한 적이 있고, 사후 그의 아들인 홍타이지 시절 병자호란으로 조선을 침략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던 것을 보면 이 당시 여진족이 부족 전반적으로 조선에 호감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님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런걸 보면 누르하치도 실리적인 측면을 가지고, 조선을 도운 대가로 조선과 교역할 권리를 얻어내어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거나 임진왜란으로 조선이 전쟁 중인 틈을 타 원군이란 명목으로 조선 영토에 영향력을 확대할 의도를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최소한 첫 번째 원정 제안은 실제로 도우려 했을 가능성이 있는 게, 전쟁 초반에는 가토 기요마사의 군이 만주까지 넘어와서 누르하치의 거점과 매우 가까운 성을 잠시 점령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당시 일본군이 전력으로 만주를 공격했다면 누르하치도 말려들게 될 것이었고, 당시 힘을 기르고 있었던 누르하치의 입장에서는 만주에 쳐들어오기 전 조선에서 미리 일본군을 제압하는 것이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여진족을 통합해 후금을 세운 다음에도, 누르하치는 명나라에 대해서는 7대 원한을 운운하며 강경하게 선전포고했지만 조선은 먼저 건드리진 않았다. 누르하치는 사르후 전투에서 명나라를 물리치고 요동을 장악했는데, 조선이 명나라와 연합해 후금을 치려다가 참패한 사르후 전투 이후에 강홍립이 투항하자 이를 받아들이고 강홍립을 억류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강홍립이 누르하치 앞에서 삼배구고두를 거부하자 불같이 화를 내고 조선 포로를 모두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강홍립과 조선군의 항복을 협상한 둘째 아들 아이신기오로 다이샨이 "포로를 살려주기로 약속했다."고 말리자 조선군 포로를 학살하려던 계획을 단념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군 포로가 탈출하여 그중 일부가 여진 부락을 습격하고 강간 사건을 저질렀고, 이 와중에 다수의 포로가 처형되었다. 어쨌든 여기에 연루되지 않은 포로는 살아서 조선에 돌아올 수 있었지만, 파병군 1만 3천 명 중 3천 명 미만만 돌아올 수 있었다. 강홍립은 누르하치에게 "우리 조선은 명나라의 의리 때문에 귀국과 별 원한이 없지만 어쩔 수 없이 참전하였습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했고, 누르하치는 이를 받아들여 강홍립 및 조선 장수 포로들을 비교적 후대했다. 누르하치는 건국 이후 조선 조정에 계속 국서를 보냈고, 광해군은 이에 답서를 보내려고 했으나 광해군의 집권 기반인 대북파는 다른 당파보다도 오히려 더욱 극렬히 누르하치를 인정하는 것을 거부해 몇년간 광해군 명의의 답서는 누르하치에게 가지 못하고 다만 평안도 감사의 명의로 누르하치에게 조선 조정의 뜻이 전달되게 된다.
당시 조선에서는 칸에 오른 누르하치를 금국한(金國汗) 대신 건주위마법(建州衛馬法)으로 칭했다. 광해군 또한 누르하치에게 서찰을 보낼 때 건주위마법족하(建州衛馬法足下)라고 써놔서 누르하치가 노발대발했다고 하는데, 이유는 위 칭호를 쓴다는 건 동등한 군주의 위치로 보는 게 아니라 일개 장수 및 지방관으로 하대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르하치는 이렇게 자신을 무시하는 조선에 상당한 불쾌감을 가졌지만 주적이 명나라이며, 조선과의 마찰은 명나라에 어부지리를 안겨줄 것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대응을 자제했다.
청복릉
누르하치가 사후에 안장된 복릉(福陵)은 청나라가 중원을 얻기 전에 조성되어서 아들 홍타이지의 소릉과 함께 선양시에 소재해 있는 단 둘뿐인 청나라 황제릉이다.
사르후 전투 이후 명나라의 장수인 모문룡은 요동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다가 조선으로 도망쳤는데, 이를 추격하던 후금군은 압록강을 건너 모문룡군을 추격했다. 모문룡은 후금의 기병대에 참패하고, 이후 바다에 약한 후금군을 피하려 철산 가도에 주둔하게 된다. 광해군 시기에는 누르하치가 이렇게 조선과는 충돌을 피했고, 광해군도 명나라 - 후금 사이에서 일종의 이중 외교를 해서 조선과 후금 간의 충돌은 없었다. 다만 이후 인조 정권이 노골적인 반청(反淸) 정책을 시행하면서 양국의 사이는 악화된다.
평가
여진족 특유의 제도이자 경제와 사회 단위 겸 전쟁 당시 분대의 역할에 해당하는 팔기군을 편성했다. 19세기가 되면서 팔기군은 무용지물이 되긴 하지만, 적어도 청나라 초기에 대륙을 장악하는데는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 만주어를 기록하기 위한 만주 문자를 확립했다. 누르하치는 여진족이 자신의 언어를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현상을 안타깝게 여겼다. 누르하치는 1599년 어르더니 박시와 가가이 자르쿼치로 하여금 몽골 문자를 기반으로 한 만주 문자를 개발시켰다. 이들은 몽골 문자에서 표기가 불가능한 만주어의 음을 표기할 수 있는 자모를 추가했다. 그리하여 만주어의 표기법을 공식적으로 확정지었고 만주 문자는 이후 계속 쓰이지만 19세기가 되면 만주족 대부분이 모어로 한어(=중국어)를 사용함에 사용 빈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건주여진 시절부터 명나라의 관제를 모방하여 정부 기구를 구성하고 조정과 6부를 두었다. 그래서 만주족이 북경을 점령한 후로도 명나라의 6부를 그대로 승계하여 대륙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누르하치는 만주족이 미개 상태를 청산하고 문화 민족으로 발돋움하려면 농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반농반목ㆍ수렵-채집 민족이었던 만주족을 농경 민족화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점령지에서 대규모 학살을 저지르던 몽골과는 달리 점령지의 한족들을 그대로 두어 생업에 종사시키고, 후금 시절에는 만주를 개간하기 위해 화북에 살던 수많은 한족 포로들을 만주로 이주시키고 그곳에서 농경을 하도록 했다. 반(半)유목 민족이었던 만주족을 정주민족으로 만들기 위해서 지배층 만주족과 피지배층 한족을 함께 살게 했지만, 이는 민족 갈등을 부르는 부작용도 냈다. 만주족 경제는 물물교환으로 돌아갔지만, 누르하치는 화폐도 도입했다. 물론 당시 만주의 경제가 그다지 발달되지 않았던 데다가, 화폐를 주조할 기술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는 별로 효과가 없었고 화폐 경제가 발달한 명나라를 점령한 후에야 만주족은 화폐를 널리 사용했다. 만주족의 전신인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는 몽골의 흥기를 막지 못해 망해버렸다. 누르하치는 이를 교훈 삼아 몽골족을 포섭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후금이나 청나라 황제는 스스로 몽골의 대칸을 자칭했다. 자신들에게 순응하는 몽골 부족들을 후금 체제로 끌어들여 팔기에 소속시켰다. 이들은 대대로 청나라 황실과의 결혼을 통해 청나라의 귀족으로 자리매김했고, 몽골 기병들은 만주병들이 맛이 간 19세기까지도 청나라의 온전한 전투력으로 남았다.
조부와 부친의 원수를 갚고 분열된 부족을 통일해서 중화제국을 공격하고 새로운 제국을 세웠다는 점에서는 칭기즈 칸과 비슷한 점이 많다. 또한 요나라의 창업자인 야율아보기나 옛 선조 금나라의 창업자인 완안아골타와도 비슷한 점이 있다. 다만 누르하치가 이전 정복왕조의 창업군주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적극적인 포용력이었다. 누르하치는 만주족이 대륙을 경영하기에는 아무래도 실력이 모자라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고, 자신들보다 선진적인 한족의 인재나 문화를 적극적으로 흡수하거나 포용하여 270여 년 사직의 기틀을 이루었다. 이 뿐만 아니라 만주족만으로는 명나라와 대결하기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명나라의 이이제이 계책 및 금나라를 멸망시킨 역사적 악연으로 여진족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몽골족을 적극적으로 우대해 포섭하였고 누르하치와 홍타이지 시절 아이신기오로씨에 충성을 맹세한 내몽골 부족들은 청나라가 신해혁명으로 망할 때까지도 청나라에 충성하여 청나라의 정복전쟁의 선봉에 섰다. 이런 방침은 누르하치를 이은 후손들도 그대로 계승하여, 한족 등을 적극 포섭해 이자성군에게 멸망한 명나라를 이어받아 빠르게 중원 대륙을 장악했다. 이후 청나라는 통일왕조로서 100년 이상 번영을 누리는데, 이런 전성기는 다른 한족 왕조의 전성기보다 훨씬 더 길며 다른 유목제국의 왕조보다도 훨씬 더 큰 영향력을 중국 역사에 남겼다.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만한 면이 많은 창업자지만, 현대 중국에서는 한족의 흑역사라고 볼 수 있는 만주족 지배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 언급이 잘 안되는 듯하다. 물론 살아생전 중원엔 결국 입성하지 못한 누르하치라, 이후 중원을 차지하고 위세를 떨친 후대 황제들인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등에 누르하치가 묻히는 측면도 있다.
가족
조상
원조부: 범차(范嗏)
태조부: 동휘호(童揮護)
열조부 - 시호: 조조 원황제(肇祖 原皇帝), 이름: 아이신기오로 먼터무(애신각라 맹특목, 愛新覺羅 孟特穆)
현조부 - 이름: 아이신기오로 충샨(애신각라 충선/동산, 愛新覺羅 充善/董山)
고조부 - 이름: 아이신기오로 시버오치피양구(애신각라 석보제편고, 愛新覺羅 錫寶齊篇古)
증조부 - 시호: 흥조 직황제(興祖), 이름 - 아이신기오로 푸만(애신각라 복만, 愛新覺羅 福滿)
조부 - 시호: 경조 익황제(景祖 翼皇帝) 이름: 아이신기오로 기오창가(애신각라 각창안, 愛新覺羅 覺昌安)
부황 - 시호: 현조 선황제(顯祖 宣皇帝), 이름: 아이신기오로 탁시(애신각라 탑극세, 愛新覺羅 塔克世)
형제자매
누르하치의 아버지인 탁시는 여러 처첩으로부터 5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이들 중 누르하치는 탁시의 장남이었고, 네 형제는 차례로 무르하치(이복형제), 슈르하치, 야르하치, 바라야(이복형제)이고, 두 자매는 차례로 장녀(시호, 이름 미상), 점하고 가 있다. 이 형제들은 장남인 형을 도와 후금의 개국에 공헌을 했고, 슈르하치는 그 중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으나, 대명 온건파였기 때문에 점점 형이랑 사이가 벌어졌다. 특히 1607년, 해서여진 우라부와의 대결에서 누르하치는 공세를 명령했으나, 슈르하치는 자신의 부대를 빼내 구경만 하여 이 갈등은 극에 달했다. 누르하치는 이후 슈르하치의 역모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며, 슈르하치의 부하들과 아들 일부를 참하고 슈르하치를 옥에 가두었다. 슈르하치는 1611년 48세 나이로 옥에서 사망했다.
비 및 후궁
일부다처제를 시행하는 만주족의 풍습에서 부인과 첩은 엄격한 구분이 없었으며, 태어난 아들에 대한 적서 차별은 없었다. 다만 여러 부인들 사이의 서열은 있었다. 서열은 복진, 소복진, 서(庶)복진 등으로 구분된다. 이외에도 아무 직함을 받지 않았지만 잠자리 시중을 드는 여자 노비도 많아서, 사서에 기록된 것만 28명의 여인이 있었고 이후에 후금이 청으로 바뀌면서 황제국이 된 이후 "효자고황후"로 추존된 여인은 1586년 결혼한 셋째부인 예허나라씨였다. 이 사람이 홍타이지(황8자)의 생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