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유대인
네덜란드 유대인(네덜란드어: Nederlandse Joden; 히브리어: יהדות הולנד)의 역사는 포르투갈과 스페인 출신의 스파라드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과 다른 네덜란드의 몇몇 도시에 정착하기 시작한 16세기 후반과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왜냐하면 네덜란드는 특이한 종교적 관용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포르투갈 유대인들은 수십 년 동안 랍비의 권위 아래 살지 않았기 때문에, 조상의 종교를 받아들이는 첫 세대는 유대인의 믿음과 실천을 공식적으로 지시받아야 했다. 이는 비록 박해를 받았지만 조직적인 공동체에서 살았던 중부 유럽의 아슈케나즈 유대인과 대조된다. 17세기 암스테르담은 유대인 생활의 중심지로서 중요하기 때문에 "네덜란드 예루살렘"으로 불렸다. 17세기 중반, 중부와 동부 유럽의 아슈케나즈 유대인들이 이주했다. 두 집단은 종교적 자유의 이유로 박해를 피해 이주했고, 이제 랍비의 권위 아래 분리되고 자율적인 유대인 공동체에서 유대인으로서 공개적으로 생활할 수 있었다. 그들은 또한 세계 무역의 주요 중심지인 네덜란드의 경제적인 기회에 이끌렸다.
네덜란드는 한때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의 부르고뉴 상속의 일부로서 스페인 제국의 일부였다. 1581년, 북부 네덜란드 지방은 스페인과의 확장된 갈등을 해소하면서 가톨릭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주요 동기는 당시 스페인의 통치하에서 금지되었던 개신교, 기독교를 실천하는 것이었다. 종교적 관용, "양심의 자유"는 새로 독립된 국가의 필수적인 원칙이었다. "포르투갈 민족의 히브리인" 포르투갈 유대인들은 인종적으로 강하게 포르투갈인으로 확인했고 근대 초기에 양면성을 가진 아슈케나즈 유대인들을 보았다. 포르투갈 유대인 공동체의 운세와 규모는 17세기 후반 아슈케나즈 인구가 빠르게 증가한 반면, 네덜란드의 무역이 영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훼손된 후 감소했다. 아슈케나즈는 그 이후로 숫자에서 우세를 유지하고 있다.
네덜란드 공화국의 종말 이후, 프랑스에 영향을 받은 바타비아 공화국은 1796년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그들을 완전한 시민으로 만들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세워진 군주제 아래에서, 나폴레옹 3세는 그들의 공동체에 대한 유대인 공동체 지도자들의 모든 규율을 제거했고, 그들을 국가의 기능자로 만들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가 점령한 동안, 네덜란드의 홀로코스트는 특히 잔인했는데, 유대인 인구의 약 75%가 나치 강제 수용소와 절멸 수용소로 추방되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독일 유대인 가족이 암스테르담으로 도망친 안네 프랑크이다. 이전 유대교 회당에 소장되어 있는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박물관은 네덜란드의 유대인 역사와 관련된 주요 컬렉션을 가지고 있다.
현 시대의 종교
네덜란드 유대인은 총 3만여 명(약 30%) 가운데 9천여 명이 유대인 7대 종교단체 중 하나와 연결돼 있다. 규모가 작고 독립적인 유대교 회당도 있다.
유대인 매체
네덜란드의 유대인 텔레비전과 라디오는 NIK미디어가 제작한다. NIK미디어의 일부는 주지스 암로프로, 매주 일요일과 월요일(5월 말부터 9월 초까지 제외) 네덜란드 2 텔레비전 채널에서 다양한 유대인 주제에 대한 다큐멘터리, 이야기, 인터뷰를 방송한다. NIK미디어는 또한 5번 라디오에서 음악과 인터뷰를 방송한다.
네덜란드 유대인 공동체에 유대인 뉴스를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춘 유대인 웹사이트가 몇 개 있다. 단연코 가장 눈에 띄는 것은 Joods.nl 인데, 이 웹사이트는 네덜란드의 거대한 유대인 공동체와 메디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도 유대인 문화와 젊은이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문화적 차이
네덜란드에서 독특하게, 아슈케나즈와 스파라드 공동체는 가까운 곳에 공존했다. 다른 문화적 전통을 가진 그 공동체들은 일반적으로 분리되어 있었지만, 그들의 지리적인 근접성은 다른 곳에서 발견되지 않는 문화간의 영향을 낳았다. 주목할 만한 것은, 유대인들의 작은 집단이 공동체를 설립하려고 시도했던 초기에, 그들은 누가 이용할 수 있는지에 따라, 랍비들과 두 문화의 다른 관리들의 서비스를 이용했다.
두 문화의 근접성은 또한 다른 곳에서 알려진 것보다 더 높은 비율의 근친 결혼으로 이어졌고, 결과적으로 네덜란드 혈통의 많은 유대인들은 그들의 종교적 관계를 믿는 것처럼 보이는 성을 가지고 있다. 모든 네덜란드 유대인들은 수세기 동안 아이들의 조부모의 이름을 따서 아이들의 이름을 지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스프라드 전통으로 여겨진다. (다른 곳의 아슈케나짐은 전통적으로 살아있는 친척의 이름을 따서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을 피한다.)
1812년, 네덜란드가 나폴레옹의 통치하에 있는 동안, 모든 네덜란드 거주자(유대인 포함)는 시민 당국에 성을 등록해야 했는데, 이전에는 세파르딤만이 이를 준수했다. 비록 아슈케나짐 가문이 시민 등록을 피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수백 년 동안 비공식적인 성 체계를 사용해 왔다.
경제적 영향
네덜란드의 식민지 개척과 국제 무역에서 유대인은 큰 역할을 했고, 이전 식민지의 많은 유대인들은 네덜란드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식민지 강대국들은 무역로를 장악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고, 네덜란드인들은 상대적으로 성공하지 못했고, 18세기 동안 경제는 쇠퇴했다.
시골 지역의 많은 아슈케나짐은 더 이상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그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이주했다. 이것은 많은 수의 작은 유대인 공동체들을 완전히 붕괴시켰다 (주요한 종교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10명의 성인 남성이 필요했다). 전체 공동체들이 유대인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한 도시로 이주했다. 1700년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인구는 6,200명이었고, 아슈케나짐과 세파르딤은 거의 같은 숫자였다. 1795년까지 그 숫자는 20,335명이었고, 대다수는 시골 지역의 가난한 아슈케나짐이었다. 19세기 중반까지, 많은 사람들이 해방의 발전이 더 나은 기회를 제공하는 다른 나라로 이주했다.
유대인 몰려든 암스테르담, 16세기 세계경제 중심
1576년 앤트워프에서 반란을 일으킨 용병들에 의해 시민 7000여 명이 살해당하자 유대인들은 앤트워프를 탈출해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당시 암스테르담 지역엔 유대인들과 종교개혁 여파로 박해를 피해 온 개신교도들이 한창 몰려들고 있었다. 또 1568년에 시작된 스페인 왕국에 대한 네덜란드의 독립전쟁이 진행 중이었다.
스페인 왕국이 ‘네덜란드’를 지배하다
당시 유럽 왕들은 나라를 마치 사유물처럼 취급했다. 15세기 초 프랑스 중동부와 네덜란드 영지를 보유한 부르고뉴 공국과 플랑드르 백국이 정략 결혼으로 합쳐졌다. 그 뒤 합스부르크가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1477년 부르고뉴 공작의 외동딸과 정략 결혼함으로써 부르고뉴와 플랑드르는 합스부르크 영토가 되었다. 그러자 프랑스 루이 11세가 영유권 분쟁을 시작하며 막시밀리안을 공격했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은 1481년 프랑스군을 격퇴해 플랑드르와 네덜란드를 지켜냈다. 그러다 보니 신성로마제국이 지배하는 플랑드르를 포함한 저지대는 가톨릭이 극성을 부리는 스페인 왕국과는 달리, 비교적 유대인들에게 안전한 곳이었다. 때문에 이베리아반도에서 박해가 있을 때 유대인들은 이곳으로 피신했다. 개종한 유대인을 일컫는 ‘마라노’들 역시 종교재판을 피해 이곳으로 옮겨 왔다.
이렇게 결혼을 통한 영토 확장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통’이 된다. 막시밀리안 황제는 아들 필립 왕자와 딸 마르가레타 공주를 결혼 동맹의 수단으로 활용해 1496년 스페인 왕국과 겹사돈 관계를 맺는다. 그는 스페인 왕국의 후아나 공주를 며느리로 맞이하고 그의 딸을 스페인 왕국의 후안 왕자에게 시집보냈다. 이 결혼으로 훗날 막시밀리안은 스페인뿐 아니라 나폴리와 시칠리, 사르디니아 그리고 신대륙의 식민지를 획득하게 된다. 이후 스페인 왕국의 후안 왕자가 일찍 죽는 바람에 막시밀리안의 아들 필립 왕자에게 시집온 며느리 후아나가 스페인 왕국의 상속녀가 되었다. 이로써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페인 왕국까지 지배하게 된다.
해가 지지 않는 합스부르크가의 영토
그 뒤 필립은 스페인 왕국의 왕이 될 아들 ‘카를’이 1500년에 태어나자 그가 다스리던 플랑드르 지역을 포함한 저지대를 아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래서 저지대가 스페인 왕국의 땅이 된 것이다. 저지대를 선물로 받은 이 아들이 훗날 유럽의 패자가 된 스페인 왕국의 카를로스 1세 왕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윈 그는 1516년 스페인 왕국을 다스리시던 외할아버지 페르난도 2세가 돌아가시자 16세의 어린 나이에 스페인 왕에 올라 신대륙 식민지까지 다스리게 된다. 플랑드르 헨트(켄트)에서 태어나 자란 카를로스는 스페인 왕국의 지배 아래 있는 저지대를 비교적 너그럽게 다스렸다. 카를로스는 1519년 친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가 돌아가시자 신성로마제국의 왕관과 전 합스부르크가의 영지를 상속받아 스페인 왕국의 카를로스 1세이자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로서 스페인에서 오스트리아에 이르는 대제국의 수장이 되었다.
이처럼 유럽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대영토를 확보한 이외에도 신대륙과 동남아의 필리핀 등 광대한 식민지까지 더하여 합스부르크가의 영토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되었다. 이후 합스부르크가의 위세는 수 세기간 지속됐다.
루터의 종교개혁과 유대인
1517년에 시작된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유대인들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출현은 유대인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종교개혁으로 유대인들에 대한 노골적인 박해는 끝났다. 유대인들이 증오했던 수도사와 수도원들도 신교에서는 없어졌다. 유대인들은 종교개혁을 환영했다. 초기에 신교도와 유대인들은 비교적 잘 지냈다.
마틴 루터도 처음에는 유대인을 옹호했다. 그가 가톨릭을 공격했던 내용 중의 하나가 가톨릭이 유대인들을 너무 무자비하게 취급했다는 것이었다. 가톨릭의 사제와 수사들이 유대인들을 공격하고 박해한 일을 루터는 강렬한 어조로 비난했다.
루터는 “유대인들은 지상에서 가장 좋은 혈통이다. 성령은 그들을 통하여 성경의 모든 책을 세상에 주시기를 원했다. 그들은 자녀요, 우리는 손님이요 나그네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을 개종시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그리스도의 사랑이요, 초대 교회 교부들이 권했던 친절과 관심이 그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일부 유대인들은 루터의 말에 큰 기대를 걸고 그를 환영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관망했다. 그 뒤 루터는 교황의 박해를 피해 피신 중에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독일 지역의 말들이 서로 달라 지난한 작업이었지만 그 통에 근대 독일어의 근간이 정리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인쇄술 덕에 각지로 전파될 수 있었으며 루터의 의견에 호응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루터는 교황의 권위를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유대인에게 도움을 구했다. 1523년에 쓴 <예수 그리스도는 나면서부터 유대인>이라는 소책자에서, 루터는 도대체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고 말하면서, 유대인들의 자발적인 집단 개종을 바랬다. 그러나 루터가 번역한 성서보다는 탈무드 쪽이 훌륭한 성서 해석을 해놓았다면서 유대인들이 개종을 거부했다.
이때부터 루터는 돌변했다. 유대인들을 거세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어 간행된 <유대인과 그 허위에 대해>라는 소책자는 홀로코스트를 향한 거대한 첫 발짝이라 할 만큼 유대인에 대해 과격한 독설을 퍼부었다.
먼저, ‘유대인의 시나고그에 불을 지르고, 타고 남은 것들은 몽땅 뻘 속에 파묻은 다음, 그 초석이나 불탄 재가 사람 눈에 뜨이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루터는 부추긴다. ‘유대교의 기도서를 파기하고, 랍비가 설교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 그리고 유대인의 집을 때려 부수고, 그곳에 사는 사람을 한 지붕 밑이나 마구간에 몰아넣은 다음, 그들에게 이 땅의 지배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야 한다’, ‘유대인이 길거리나 저자 거리에 들어갈 수 없도록 해야 한다.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이 유해하고 독기 있는 구더기들을 강제 노동으로 내몰아서 이마에 땀을 흘리고 자신들이 먹을 빵을 벌게 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영원히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말로 공격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의 영향력이 커지자 반유대적인 소책자를 쓰기 이전부터, 그는 1537년 작센에서 유대인을 추방했고, 1540년에는 독일 거리 곳곳에서 내쫓았다.
장 칼뱅, 상인 곧 유대인을 지지하다
이에 견주어 훗날 영국 청교도 혁명의 사상적 지주가 된 프랑스인 장 칼뱅은 상인들을 지지했다. 당시 유럽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자들은 낮은 사회적 지위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상인들에게 칼뱅은 자신의 직업에 충실한 것이 신에게 봉사하는 길이라고 설교했다. 그 무렵 ‘상인(merchant)’은 유대인과 같은 뜻으로 쓰일 때가 많았다. 특히 해상무역에 직간접적으로 종사하는 유대인을 ‘merchant’라 불렀다. 중세 말 유대인들은 대부분 모직물 분야의 머천트 어드벤처스(Merchant Adventurers) 회사의 일원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칼뱅의 주장은 당시로서는 파격이었다. 그리하여 상업이 융성했던 네덜란드에 칼뱅파가 퍼지게 된다. 그는 인간이 스스로의 구원을 확신하면서 세속적인 직업 활동과 합리적이고 금욕적인 일상생활을 함께 영위해야 함을 강조했다. 칼뱅은 근대적 직업관과 생활윤리를 제시해 근대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칼뱅은 이렇게 유대인에 대해서 호의적이었다. 칼뱅은 이자를 받고 대부하는 일에 대해 찬성했다. 칼뱅은 5% 이자율 한도 내에서는 빌려주어도 좋다고 했다. 그리고 루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 후 등장한 일부 신교도들도 고리대금업에 대해 관대한 입장을 폈다. 네덜란드 신교도와 영국 청교도들이 이자 상한선을 정해놓고 대부업을 허용한 것이다. 이것이 이 두 나라가 근대에 접어들어 금융 산업을 기반으로 상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이유이기도 하다. 칼뱅은 그의 저서를 통해 유대인의 주장을 객관적으로 전하는 바람에, 루터파로부터 ‘유대화’ 되었다는 질책을 받을 정도였다.
합스부르크, 둘로 갈라지다
그 무렵 저지대 사람들은 루터의 종교개혁 영향으로 신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부르고뉴 공국, 곧 지금의 네덜란드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혼인으로 스페인 왕가도 계승하자 1516년부터 스페인 왕 겸 독일 황제인 카를(카를로스) 5세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그 무렵 카를 5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스페인 왕, 독일 왕, 이탈리아 왕, 오스트리아 대공, 네덜란드 영주 등 20여 가지 직함을 가졌다. 그는 유럽에선 70군데 이상의 영지를 소유한 군주였고, 신대륙에선 브라질을 제외한 중남미 전체, 그리고 동남아에선 실론(스리랑카)과 필리핀의 지배자였다. 필리핀은 당시 왕자였던 ‘필립의 땅’이란 뜻이다. 그는 넓은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한곳에 머물지 않고 스페인에서 독일로, 이탈리아로 동분서주하며 전쟁을 벌였다. 카를은 이슬람의 종주국 오스만 투르크와 전쟁을 벌였고, 교황과 싸웠으며, 독일 내 신교도 제후들과 대치했다.
유럽 전역을 휘저으며 넓은 영토를 통치하다 지쳐버린 카를 5세는 이 큰 영토를 혼자 다스리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그는 1555년 스스로 물러나면서 스페인 왕국과 스페인계 합스부르크령 곧 네덜란드를 포함한 저지대와 해외 식민지는 아들인 펠리페 2세에게 물려주고 나머지 독일계 합스부르크령과 신성로마제국의 왕관은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에게 물려줌으로써 합스부르크가가 둘로 갈라서게 된다.
네덜란드, 1568년 독립전쟁을 시작하다
이로써 카를 5세의 뒤를 이은 펠리페 2세가 1556년에 스페인 왕이 된다. 스페인의 전성기이자 쇠락기의 시작을 열게 되는 펠리페 2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자신을 세계 가톨릭의 수호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플랑드르 지방 저지대 신교도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종교재판소를 세우고 가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신교도 가운데서도 칼뱅주의자들이 가장 행동적이고 저돌적이었다. 이들은 상공업에 열심히 종사하는 한편 종교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공격적이었다. 저지대의 상인들은 펠리페 왕의 중과세 정책과 상업 규제에도 반발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종교탄압과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과 과다한 세금 징수는 북부 네덜란드로 하여금 독립을 염원하게 만든다. 여기에 불을 붙인 게 당시 북유럽을 휩쓸던 ‘성상 파괴 운동’이었다. 신교도들 특히 칼뱅주의자들은 가톨릭 성당에 설치되어 있는 마리아상 등 많은 조각들을 우상 숭배로 여겨 이를 공격해 파괴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이윽고 1566년 8월에 반란을 일으켜 저지대 전역의 400개 이상의 가톨릭 성당들을 부수고 불태웠다.
당시 펠리페 2세가 급파한 스페인 총독 알바 공은 대량 학살로 불온사상을 뿌리 뽑을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이듬해 그는 급속하게 확산되던 반란을 진압하고 신교도 1만 8천 명을 처형했다. 그리고 무역에 중과세를 부과했다. 이러한 중과세로 인해 네덜란드 경제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된다. 그러자 1568년 반란의 불길이 더욱 거세져 전국적인 반란이 일어났다. 펠리페 2세는 즉각 알바 공을 지휘관으로 삼아 1만 명의 진압군을 파견했다. 이에 네덜란드 17개 주 가운데 자유도시가 많았던 북부 저지대의 7개 주는 일제히 궐기하여 독립전쟁에 돌입했다. 스페인 진압군은 전쟁에서 포로를 인정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이것이 80년간 계속된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시작이었다.
앤트워프 유대인들 암스테르담으로 옮겨오다
암스테르담이라는 이름은 원래 ‘암스텔강의 둑’이란 뜻이다. 13세기에 어민들이 암스텔강에 둑을 설치하고 정착한 데서 유래하였다. 그 뒤 14세기에는 한자동맹에 가입하여 함부르크의 맥주 수출항으로 번창했다. 16세기 중엽부터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든 곳은 앤트워프나 브뤼헤보다 스페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이었다. 이는 종교적 관용을 베푼 네덜란드의 유대인 수용 정책 덕분이었다. 네덜란드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들하고 결혼하거나 국교를 비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유대인들을 받아들였다. 이는 오히려 유대인들이 원하는 바였다.
게다가 앤트워프가 1585년에 스페인에 다시 정복되자 절반 가까운 시민들은 북부 네덜란드로 탈주했다. 그나마 그때까지 남아 있었던 유대인들도 이때 대부분 암스테르담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앤트워프 시민 일부는 다른 나라로 떠나갔는데 그 가운데 만여 명이 런던으로 이주했다. 이 가운데 상당수가 유대인이었다. 당시 영국은 유대인의 공식 입국을 허용하지 않았을 때였지만 해상무역의 진흥을 위해 유대인의 입국을 눈감아 주었다. 아니 영국이 불러들였다고 보는 게 옳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당시 영국이 무역에 있어서는 ‘양모’라는 단일 품목 수출과 ‘앤트워프’라는 단일 수출 시장에 목매고 있을 때였다. 또 영국 왕실의 긴급 자금 조달과 관련하여 영국 내 유대 금융인이 없었기 때문에 국내에서 자금 조달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앤트워프에 대리인을 파견하여 필요한 자금을 융통해 쓰던 실정이었다. 당시 그 대리인이 무역상이자 외교관이었던 ‘토머스 그래셤’이었다.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래셤의 법칙을 발표한 그 사람이다. 이때 앤트워프에서 건너간 유대인들이 그 뒤 영국의 해상무역을 이끌었다. 그리고 그들이 1600년 영국 동인도회사와 1605년 레반트회사를 설립하여 동방무역을 주도했다.
이러한 유대인의 이주는 당시 플랑드르 경제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반면 암스테르담 경제는 급속히 발전했다. 그러자 유럽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대거 모여들었다. 더불어 암스테르담이 부흥하자 유럽 각국의 부유한 상인과 예술가들이 이곳으로 밀려들었다.
네덜란드, ‘종교의 자유’ 선언
1579년 네덜란드는 건국 헌장에 ‘종교의 자유’를 선언했다. 이것이 강력한 흡입력을 발산하여 네덜란드는 유럽 전역에서 종교 난민들을 흡수했다. 유대인들이 각지에서 네덜란드로 몰려들었다. 영국에서 국교인 성공회에 대항한 칼뱅주의자들도 심한 박해 때문에 네덜란드로 피신해 왔다. 이때부터 네덜란드에서 종교의 자유는 불가침의 영역으로 존중되었다.
세상의 대부분 종교는 무소유와 청빈을 강조한다. 그런데 유독 부의 축적이 신의 축복으로 여기는 종교가 두 개 있다. 바로 유대교와 칼뱅주의에 뿌리를 둔 청교도이다. 당시 네덜란드 경제의 주축이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과 영국에서 박해를 피해 건너온 칼뱅주의자들이었다.
“칼뱅주의자들은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곧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증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막스 베버는 이같이 이들 청교도로부터 자본주의가 유래했다고 설명했다. 반면 베르너 좀바르트는 “자본주의는 유대인을 따라 들어왔다.”고 이를 반박했다.
여하튼 유대교와 칼뱅주의 정신과 자본이 네덜란드를 세계의 무역, 금융, 산업 중심지로 만들었다. 스페인에서 목숨을 지키기 위해 부득이하게 가톨릭으로 개종했던 마라노들도 암스테르담의 자유로운 종교 환경 덕분에 다시 자신들의 본래 모습을 되찾았다. 이름을 다시 히브리어로 바꾸고 남자는 할례를 행하면서 유대교로 되돌아갔다.
암스테르담,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되다
1576년 ‘앤트워프의 학살’ 사건으로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대거 몰려온 지 15년 만인 1580년대 말에 이르러 암스테르담 규모는 이전보다 3배나 커졌다. 당시 암스테르담은 앤트워프 항구가 가지고 있던 시장을 빠르게 잠식해 가면서 유럽 최대 항구로 급성장했다.
유대인들은 16세기 말에 이르러 암스테르담 상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경제사에서 근대 들어 두 번의 ‘유대 대상인의 시기’가 있었다. 1590년부터 1609년 사이의 20년을 첫 번째 ‘유대 대상인의 시기’라 부른다. 그만큼 경제사에서 중요한 변화가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의미이다. 곧 ‘중상주의’가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닻을 올린 것이다. 조나단 이스라엘 런던대 교수는 이 시기에 네덜란드가 세계 무역을 주도하면서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고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되었다고 한다.
유대인들, 저지대서 소금 상권 장악... 한자동맹 물리치다
저지대는 스헬데강, 라인강, 뫼즈강의 낮은 삼각주 지대 주변에 위치한 17개 자치주로 이루어진 느슨한 연합체로, 합스부르크가의 결혼동맹으로 1516년부터 스페인령이 되었다. 오늘날의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지역 일대이다.
15세기 말 이베리아반도에서 추방당해 저지대에 정착했던 유대인들에게 이 지역은 종교의 자유를 제외하고는 그리 풍요로운 곳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열악한 환경이었다. 저지대는 국토의 4분의 1이 해수면보다 낮아 댐을 쌓아 간척한 땅이었다. 그러다 보니 소금기가 많아 농업과 목축업이 부적합했다.
오죽하면 함께 모여 식사해도 자신이 먹은 거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더치페이’가 발달했겠는가. 16세기 들어 수산업과 염료 산업이 발전하기는 했으나 모직물 산업과 금융 산업이 발달한 플랑드르 지방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지하자원이나 특별한 생산물이 없는 척박한 곳이었다.
1576년 ‘앤트워프 약탈 사건’으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이 이러한 척박한 환경 속에서 상업과 교역을 키워나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 역사를 살펴보면 유대민족은 형극의 역사를 반드시 영광의 역사로 바꾸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즈니스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러한 네덜란드의 생태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유대인들의 노력은 내다 팔 국내 자원이 빈약한 까닭에 더더욱 중계무역에 주목했다.
다이아몬드 산업, 암스테르담과 앤트워프가 겨루다
앤트워프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옮겨가자 이번에는 암스테르담이 다이아몬드 유통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앤트워프도 이내 재정비하여 오늘날에는 벨기에의 다이아몬드 수출액이 네덜란드를 앞서고 있다.
이렇듯 오늘날까지도 다이아몬드 산업은 유대인들의 독과점 사업이다. 워낙 이익이 많이 남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주특기인 ‘일괄 독점 체제의 완성’은 이 산업에서도 꽃을 피웠다. 그들은 생산지와 가공지 그리고 판매지의 모든 유통구조를 일괄 장악한 독점 시스템을 이용해 수급을 조절하여 고가의 판매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이는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 유통업체인 드비어스의 창시자 세실 로즈의 작품이다. 그는 공급과 수요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만이 다이아몬드 가격을 고가로 묶어 둘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생산과 공급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그 첫 단계로 그는 1888년 드비어스사를 설립하여 판매를 독점했다. 그리고 광산을 사들이기 시작함으로써 공급을 장악하여 단일 채널의 다이아몬드 시장을 구축했다. 이후 20세기 후반에 러시아와 캐나다 등에서 경쟁 생산업체들이 등장했으나 그들 역시 대부분 유대인들로 담합 체제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이는 다이아몬드가 만약에 자유로운 경쟁 체제로 시장에 공급되기 시작하면 하루아침에 돌 값이 될 수 있음을 뜻한다.
바이킹의 소금 찾아 삼만리
중세 유럽에서 소금 상권을 장악한 민족이 해상 교역을 주도했다. 8~11세기의 스칸디나비아 지역 바이킹들은 약탈 못지않게 교역에도 힘써 수로를 통한 교역망 개척은 주로 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은 수심이 얕은 강에서도 탈 수 있는 가늘고 긴 롱십(longship)을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강물이 끊기면 배를 끌거나 둘러메고 다른 수로를 찾아 이동하면서 교역망을 개척했다. 당시는 약탈과 거래가 혼재했던 시기였다.
덴마크 지역 바이킹이 9세기 저지대와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로 내려온 것은 해안가에서 소금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주요 교역품이자 주식인 절임 대구를 염장할 소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발트해는 평균 수심이 55m에 불과한 대륙붕으로 겨울철 결빙 시기에는 해수 증발이 없고 주변 강들에서 흘러나오는 민물로 인해 염도가 낮아 소금 생산이 불가능했다.
노르망디에 내려온 바이킹들이 파리를 자주 습격하자 프랑스 왕은 바이킹의 수장 롤로와 911년 화해 조약을 맺고 그에게 공작의 지위를 주어 아예 노르망디를 내주었다. 이후 바이킹들이 시칠리아 등 지중해로 침공한다. 이 역시 소금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 뒤 롤로의 후손 윌리엄 1세는 1066년 영국을 정복하여 영국 왕가의 시조가 된다. 이로써 정복왕 윌리엄은 영국 왕이자 노르망디 공작의 지위를 겸하게 되어 노르망디 지역은 영국 왕의 영토가 되었다. 이때 윌리엄 왕은 영국의 경제를 활성화하고, 다른 바이킹족들이 영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대규모 요새 겸 성들의 건축 자금 마련하기 위해 프랑스의 유대인들을 영국으로 불러들였다.
한자동맹의 번영
암흑의 중세에 바이킹의 뒤를 이어 경제적 번영을 누리는 곳이 있었다. 그곳은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북유럽 한자동맹의 도시 국가들이었다.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이란 독일 북부 연안과 발트해 연안 도시들 90여 개가 힘을 합쳐 결성한 상업 동맹이자 자체적인 해군을 보유한 무역 공동체를 일컫는 말이다. 이들 상인집단은 14세기 덴마크와의 10년 전쟁에서 승리하여 세력권을 공고히 했다.
한자동맹도 소금 교역을 통해서 번창하기 시작했다. 북해 연안에는 대구를 비롯한 생선이 많이 잡혔다. ‘물 반, 고기 반’이라는 말이 생소하지 않을 정도로 거의 무진장으로 잡혔다. 그러나 생선은 쉽게 상했다. 햇빛에 말려서 건어물로 만들면 장기 보관이 가능했으나, 북유럽은 대체로 흐린 날씨가 연중 이어졌다. 그래서 염장을 하거나 훈제해야 했다.
훈제에는 값비싼 목재가 너무 많이 소요되었고 공급마저 충분치 못했다. 남은 방법은 염장밖에 없었다. 염장은 물론이고 훈제하기 위해서도 소금이 필요했다. 그러나 어장에서 가까운 곳에서는 소금이 많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멀리 발틱해 연안 지역에서 암염 광산이 개발된 이후부터 북해 어장의 생선들이 유럽의 중요 식량자원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자 동맹의 도시들은 소금과 생선의 교역을 통해서 경제적 번영의 토대를 닦았고, 소금과 생선의 교역은 다른 특산품의 교역까지 활발하게 했다.
유대인. 소금으로 승부보다
스칸디나비아 근처 발트해에서 잡히던 청어가 14세기부터는 해류의 변화로 네덜란드 연안 북해로까지 밀려드는 이변이 일어났다. 그러다 1425년경부터는 어장의 중심이 아예 발트해로부터 북해로 이동했다. 네덜란드인들은 너도나도 청어잡이에 나섰다. 그 결과 당시 매년 여름이면 약 1만t의 청어가 잡혔다.
그 무렵 네덜란드는 총인구가 100만 명 정도였는데 고기잡이와 관련된 인구만 30만 명이었다. 거의 전 세대가 청어잡이와 연관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청어잡이는 전 국민의 밥줄이었다. 14세기 중엽 네덜란드의 한 어민 ‘빌렘 벤켈소어’는 선상에서 작은 칼로 한칼에 청어의 배를 갈라 이리를 제외한 내장을 꺼내고 머리를 없앤 다음 바닷물을 85% 증발시킨 함수(鹹水)에 절여 통에 보관하는 염장법을 고안해 냈다. 바다에서 잡은 청어를 잡는 즉시 함수에 절이고 육지에 돌아와서 소금에 절이는 거였다. 이렇게 하면 1년 넘게 보관할 수 있었다.
그러다 이런 작업을 위해서는 폭넓은 갑판의 배가 필요했다. 그들은 1416년 ‘뷔스(buss)’라는 갑판이 넓은 청어잡이 전문 선박을 개발했다. 적재량은 100t에 달했고, 염장 숙련공은 물론이고 통 만드는 기술자도 동승했다.
네덜란드는 이 두 가지 기술혁신을 통해 주변 경쟁국들을 압도했다. 조업 중에 보급선이 와 소금을 갖다주고 잡은 생선을 가지고 가, 항구로 회항할 필요 없이 계속 조업하면서 염장 작업도 직접 배 위에서 할 수 있게 됐다. 이로써 네덜란드 어선은 청어 이동 경로를 따라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연안까지 종횡무진으로 조업했다. 어장 쟁탈로 네덜란드와 스코틀랜드는 세 번이나 전쟁을 치렀다.
냉장고가 없는 당시에 소금에 절인 청어는 전 유럽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이렇게 청어를 저장하고 수출하는 데에는 소금이 필수품이었다. 절임 청어 원가의 대부분은 청어가 아니라 소금이 차지했다. 당시 식량이 부족하고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보관 기간을 획기적으로 연장시켜준 절임 청어는 전 유럽에서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1년에 140일이 넘는 기독교 육류 금식 기간에도 생선은 먹을 수 있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유럽 각지에서 몰려온 상인 수백 명이 매일 아침 소금에 절인 청어를 유럽 전역으로 가져가 돈을 벌었다. 당시 필요한 소금의 일부는 브뤼헤나 앤트워프를 통해 수입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독일이나 폴란드 암염 광산에서 한자동맹 무역망을 통해 공급받아 왔다.
스페인 왕국에서 추방당해 저지대에 온 유대인들이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청어를 절이는 데 필요한 대량의 ‘소금’이었다. 그 무렵 소금은 비쌌다. 유대인들은 바로 이 점에 착안했다. 그들은 먼저 한자동맹으로부터 공급받는 소금 대신 이베리아반도의 천일염을 수입했다.
천일염이 암염보다 값이 쌀 뿐 아니라 질은 말할 나위 없이 훨씬 더 좋았다. 이로써 유대인들은 청어 절임 소금을 암염에서 천일염으로 서서히 대체해 나갔다. 이는 네덜란드를 소금 중개무역 중심지로 만들어 준 중요한 시초였다. 유대인들은 소금 공급을 토대로 자연스레 절임청어 유통의 독과점 체제를 이룰 수 있었다.
유대인, 최초의 천일염 ‘정제 소금’으로 고객을 사로잡다
그리고 이들은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갔다. 천일염을 다시 한번 ‘정제’할 생각을 한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천일염은 암염보다 순도도 높고 깨끗했다. 그런데도 이를 다시 정제하여 더욱 고운 소금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당시 소비자는 소금의 순도, 모양, 때깔 등 소금의 질에 민감했는데 특히 양질의 음식에 쓰일 소금에는 더 그랬다.
유대인들이 이러한 고객의 요구에 맞춘 것이다. 이 요구에 부응해 역사상 처음으로 거친 소금을 소비자가 원하는 질대로 만드는 소금 정제산업이 유대인에 의해 최초로 발달했다. 유대인들은 대서양 연안 천일염으로 결정이 더 작고 염도가 높은 소금을 만들기 위해 이를 다시 끓여 불순물을 제거하고 증발시켜 순도 높고 고운 결정을 만들었다. 유대인은 이렇게 고객을 만족시켜 돈 버는 법을 알고 있었다.
16세기 중엽에는 총 400개의 대서양 연안 소금정제소에서 4만t의 소금을 생산했다. 이는 당시 저지대 소금 필요량의 절반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그럼에도 이 정제 소금이 멀리 오스트리아나 독일에서 육로로 가져오는 암염보다 쌌다. 한마디로 이베리아반도의 정제 천일염은 대단한 가격 경쟁력과 품질 경쟁력 모두를 갖고 있었다. 이로써 북해 지역이 발트해를 제치고 소금 중계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유대인, 한자동맹을 역사 속에 파묻다
경쟁에서 밀린 한자동맹 도시들의 북해 주도권은 여기서 끝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만큼 소금이 교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다. 채굴하기도 어렵고 운반도 힘든 독일어권 지역의 암염 대신 유대인들은 양질의 천일염을 정제하여 대량으로 들여와 한자동맹과의 무역전쟁에서 이긴 것이다. 소금이 경제권역 간의 주도권을 바꾼 것이다.
당시 한자동맹이 망한 이유는 또 있었다. 그들은 유대 상인들이 발행하는 환어음을 거부하고 매매 대금으로 현지 화폐만을 고집했다. 그러니 당시 북부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상권을 쥐고 있었던 유대 상인과는 상업이 연계될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소금의 독점적 공급이 깨지고 판매가 줄면서 금융이 꽉 막힌 그들에게 유동성이 줄어들자 급격히 쇠퇴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청어를 절이고 남는 천일염과 정제 소금은 인근국들에 싼값에 되팔아 소금 유통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로써 유대인은 소금의 품질은 높이고 가격은 암염에 비해 낮추어 생산지-유통-소비지 일체를 지배하는 독과점 체제를 이루었다. 유대인들은 유통시킬 국내 자원이 부족하자 이렇게 경쟁력 있는 원자재나 상품의 부가가치를 높여 재수출하는 중계무역을 키워나갔다. 네덜란드의 척박한 환경이 오히려 전화위복이었던 셈이다.
환어음 거래 활성화로 상업 활동이 활발해져
고대로부터 상인들이 몸에 귀중품이나 금은 주화를 갖고 다니는 것은 매우 위험했다. 그래서 귀한 상품이나 주화를 운반해야 하는 상인들은 항상 대규모 상단을 구성해 함께 다니면서 용병들을 고용해 그들을 호위케 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위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그들 디아스포라 간 교역에 있어 주화 대신 어음을 사용했다. 어음은 거래 당사자 간에 일정한 시기에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금액을 주겠다고 약속한 증서다. 처음에는 어음 발행자가 채권자에게 직접 지급하는 약속어음이었다.
그런데 앤트워프 유대인들이 어음의 뒷면에 채권의 양도를 기재하는 ‘이서’(裏書)를 함으로써 처음으로 상인들 사이에 서로 이전되고 할인시장에서 유통되기도 했다. 이것이 환어음으로 수표 역할을 했다. 강력하고 거대했던 한자 상인들이 환어음을 받지 않아 망하는 것을 본 유럽 상인들은 유대인들의 환어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환어음이 유통되자 신용거래가 자리 잡고 시중 유동성이 늘어나는 효과를 보여 상업 활동이 활발해졌다.
네덜란드의 부, 청어로부터 시작되다
유대인들은 청어 처리에도 일대 혁신을 이루었다. 바로 ‘분업화’를 도입한 것이다. 고기 잡는 사람, 내장 발라내는 사람, 소금에 절여 통에 넣는 사람 등으로 나누어 작업을 진행했다. 숙련공들은 1시간에 약 2천 마리의 청어 내장을 발라냈다. 이로써 절임 청어의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증가했다. 그러자 청어의 포획부터 시작하여 처리와 가공 그리고 수출은 기업화되기 시작했다. 청어 절임이 본격적인 산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후 유대인들은 네덜란드에서 오늘날의 수협 격인 ‘어업위원회’를 만들었다. 동 위원회는 의회로부터 법적인 권리를 부여받아 체계적인 청어 산업을 관리 감독했다. 어업위원회는 품질 관리를 위해 저장용 통의 재질과 소금의 종류, 그물코의 크기를 정했다. 그리고 가공 상품의 중량, 포장 규격 등 엄격한 품질기준을 만들어 네덜란드산 청어가 뛰어난 품질을 지속적으로 지킬 수 있도록 관리했다. 그리고 어획 시기를 한정해 청어 산업의 장기적인 포석과 더불어 공급을 조절하여 청어 산업의 고부가가치화를 이끌었다. 이를 바탕으로 유럽 시장에서 다른 나라에 견주어 우수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관 공정 체계의 완성과 유통의 장악, 그리고 공급 조절 곧 ‘독과점 전략’은 원래 유대인들의 장기였다.
유대인들은 염장 대구가 영국과 프랑스 해군과 상선의 필수품이 되었듯이 네덜란드 해군과 상선 모두에 소금에 절인 청어를 공급했다. 이로써 안정적인 공급처를 확보했다. 그리고 규모의 경제를 살려 절임 청어를 품질이 균일한 경쟁력 있는 상품으로 만들어 전 유럽에 판매했다.
지금도 네덜란드 사람들은 절임청어, ‘더치 헤링(dutch herring)’을 즐겨 먹는다. 주로 꼬리를 잡고 통째로 먹기도 하고, 양파를 곁들여서 샌드위치로 먹기도 한다. 청어의 비릿한 향과 양파가 조화를 이루면서 은근히 입맛을 당기는 묘한 매력의 국민 음식으로 사랑받고 있다.
청어 뼈 위에 건설된 암스테르담
유대인, 3차례에 걸쳐 암스테르담으로 몰려오다
네덜란드 염장 청어가 인기인 이유
청어는 지방질이 많아 빨리 상했다. 그래서 상하기 전에 염장 처리하려면 만선이 안되더라도 빨리 항구로 돌아와야 했다. 네덜란드 어부들은 14세기 중엽부터 청어를 배 위에서 작은 칼로 내장과 가시를 처리하여 바닷물을 85% 증발시킨 함수(鹹水)에 염장하는 ‘선상 염장’ 기술을 개발함으로써 이제는 항구에 자주 돌아갈 필요가 없어졌다. 이는 주변 경쟁국들을 따돌리고 청어 어획고를 획기적으로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함수로 염장한 청어는 소금에 절인 청어에 비해 짜지 않아 생선 식감이 훨씬 좋았다. 함수로 염장한 청어가 네덜란드 사람들이 즐겨 먹는 ‘생청어’(Dutch Herring)이다. 여기에 식초를 부어 절이면 ‘식초 절임 청어’, 연기에 말리면 ‘훈제 청어’, 소금으로 2차 염장하면 1년 이상 유통할 수 있는 ‘염장 청어’가 된다. 이로써 경쟁국에 비해 맛이 좋은 네덜란드 염장 청어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청어 산업은 국가 산업이 되었다.
청어잡이 배의 진화
이제 네덜란드 어부들은 북해 앞 바다뿐 아니라 청어 떼를 쫓아 스코틀랜드와 아이슬란드 지역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기존의 작은 고기잡이배로서는 원양 항해가 무리였다. 그래서 15세기 중반부터 청어잡이 전용 선박 ‘헤링버스’(Herring Buss)가 개발되었다.
네덜란드 저지대 원주민들은 8~11세기에 이주한 바이킹 후손들이 많았다. 바이킹 배는 길쭉하고 물에 얕게 잠기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들은 청어잡이 배를 기동성 좋은 바이킹 롱쉽(long-ship)을 토대로 선상 작업에 편리한 형태로 개량했다. 우선 선상에서 청어 내장과 가시를 처리한 후 통에 담는 작업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갑판 넓이를 라운드쉽(round-ship) 모양으로 키웠다.
그리고 어업 방식도 진화했다. 청어잡이 배가 항구로 회항하는 대신 보급선들이 식량과 함수, 소금을 싣고 와서 청어를 가져가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이로써 청어 잡는 어부들이 바다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청어잡이 배 또한 더 많은 청어와 소금, 그리고 더 많은 선원들을 태워야 했기에 헤링버스 크기는 지속적으로 커져 16세기 말에는 140~200톤 규모에 달했다. 이렇게 커진 배는 청어잡이 시즌(5~9월)이 끝나면 청어 관련 무역선으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들은 배 만드는 기술을 비밀에 부쳐 설계도의 외부 유출을 엄격히 금했다.
유대인, 3차례에 걸쳐 암스테르담으로 몰려오다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에 몰려든 시기는 크게 3차례이다. 1차 이주는 스페인 왕국에서 추방된 1492년과 포르투갈에서마저 추방된 1497년, 2차 이주는 앤트워프 학살 사건에서 탈출한 1567년, 3차 이주는 앤트워프가 스페인에 정복당한 1585년이었다.
유대인들이 1차 이주하여 활발히 활동하던 1514년의 암스테르담 인구는 1만여 명에 불과한 작은 항구도시였다. 그 뒤 2차례에 걸쳐 유대인들의 이주가 더 이루어져 암스테르담 인구가 급격히 불어났음에도 1590년 암스테르담 인구는 4만 명 남짓이었다. 이후 유대인들은 암스테르담의 항구 기능을 정비하고, 대대적으로 간척사업을 벌이고, 운하를 파서 세계적인 항구로 발전시켰다. 이에 힘입어 인구도 급격히 불어나 1620년에 10만, 1670년에 20만 명의 대도시로 급성장하게 된다. 그 무렵 암스테르담 인구의 11%가 유대인이었다.
청어 산업 호황이 조선업 발전을 이끌다
1차 이주 때 이베리아반도에서 추방당해 몰려온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에 정착하면서 스페인 천일염을 수입해 소금 상권을 장악함으로써 한자 상인들을 몰아내고 자연스레 청어 산업과 조선업을 주도하게 되었다.
유대인의 ‘표준화와 분업화’로 청어잡이가 호황을 누리다 보니 고기잡이 배가 많이 필요했다. 이는 조선업 발전으로 이어졌다. 또 조선업이 발전하다 보니 화물선 제작 능력이 좋아졌다. 네덜란드 산업은 이처럼 수산업에서 시작하여 배를 건조하는 조선업과 해운업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발트해 무역이 네덜란드 무역의 어머니
조선업이 발달하니 목재업이 호황을 누렸다. 100톤이 넘는 청어잡이 배를 대량 건조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목재가 필요했다. 선박용 목재는 땔감용 나무보다 재질이 우수해야 했다. 대형 선박 한 척 건조하는데 약 2,000그루의 참나무가 필요했다. 6만 평 숲에서 100년 동안 키워야 확보할 수 있는 양이었다. 그런데 저지대는 소금기가 남아 있어 큰 나무가 없었다.
유대인들은 처음에 라인강을 이용해 강 주변의 독일 내륙 숲에서 자른 통나무들로 뗏목을 만들어 암스테르담까지 가져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모자랐다. 유대 무역상들은 삼림이 풍부한 스칸디나비아로 눈을 돌렸다. 그들은 배 밑바닥이 평편한 배로 스웨덴과 덴마크 사이의 수심이 낮고 물살이 빠른 ‘외레순 해협’을 지나는 경로를 개척해 발트해 무역을 주도하게 된다. 이후 핀란드와 스웨덴에서 통나무를 대량 수입해 목재 제재소와 조선소를 확장했다. 1497년부터 1503년 사이에 발트해를 드나들면서 통관세를 지불한 선박의 70%가 네덜란드 배였으며 그중 78%가 유대인이 많이 사는 홀란트 주의 배들이었다.
어업과 무역의 성장은 더욱 조선업 발전을 촉진했다. 유대 무역상들은 목재 수입을 위해 빈 배로 발트해까지 갈 수는 없어 배에 뭐라도 실어야 했다. 그들은 소금과 절임 청어 그리고 플랑드르 모직물, 프랑스 포도주, 독일 아마와 맥주 등을 발트해 지역에 수출하고 목재와 곡물 그리고 조선업에 필요한 자재들을 수입했다. 이 중 일부를 자체 소비하고 나머지를 서유럽과 지중해 도시에 내다 팔고, 돌아오는 길에 정제되지 않은 소금과 기타 제조업 제품들을 수입하는 중계무역을 발전시켰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청어 절임에 필요한 질 좋은 소금을 추출하는 정제업이 크게 발전했다.
발트해 무역의 백미는 곡물 중계무역이었다. 16세기에 유럽 인구가 크게 늘어나 식량이 모자랐다. 1500년경 8,100만 명이었던 인구가 1600년경에 1억 400만 명으로 28%나 늘어났다. 식량 생산성이 낮았던 근세에 인구가 크게 느니 도시 규모가 커지면서 지중해 도시들이 기근에 허덕였다. 네덜란드 무역상들이 당시 유럽 최대의 곡창 폴란드에서 수입한 식량은 중계무역을 통해 지중해 지역에 비싸게 수출했다. 특히 1550~1650년까지 폴란드 곡물은 서유럽인과 지중해 사람들에게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식량이었다. 결국 네덜란드의 발트해 무역이 지중해까지 삼켜버린 셈이다. 네덜란드 무역선은 지중해 곳곳에 진출했다.
앤트워프 반란과 네덜란드 독립전쟁
16세기 중반까지 네덜란드의 약진은 놀라웠다. 하지만 이는 스페인 제국의 향신료 중계무역을 독점한 앤트워프의 성장에는 견줄 바가 아니었다. 그 무렵 앤트워프가 유럽 무역의 중심이었으며 암스테르담은 앤트워프의 외항 역할에 불과했다. 단적인 예로, 1543~1545년 암스테르담은 저지대 수출의 4%에 불과했고 앤트워프는 80%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랬던 것이 1567년 앤트워프 용병 반란으로 시민 7천 명이 학살당하면서 유대 무역상들이 대거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오면서 두 도시의 상황은 역전을 맞이하게 된다. 앤트워프의 무역 네트워크가 고스란히 암스테르담으로 옮겨진 결과였다. 앤트워프 학살 사건을 계기로 1568년 스페인 지배를 거부하는 네덜란드 독립전쟁 곧 ‘80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유대인들은 독립전쟁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유럽 곳곳의 유대인 디아스포라 자본을 끌어들여 전쟁 채권시장을 발전시켰다.
유대인, 동방 상품의 유통과 설탕 산업으로 부를 일구다
네덜란드는 청어 산업 호황과 더불어 한자 상인을 물리치고 이렇게 북유럽과 발트해의 무역 주도권을 획득했을 뿐 아니라 유대인들 덕분에 베네치아로부터 포르투갈 그리로 앤트워프로 이어졌던 동방 상품의 유럽 유통권을 인계받았다. 이후 본격적인 네덜란드 시대가 전개된다.
그 무렵 소금도 비쌌지만 그 보다 더 비싼 것이 설탕이었다. 유대인이 떠난 앤트워프의 설탕 정제산업도 1585년 이후 자연스럽게 암스테르담으로 넘어왔다. 암스테르담이 앤트워프를 대신하여 브라질, 카나리아 제도 등지에서 온 원당의 집산지가 되었다. 당시로선 설탕 산업이 가장 돈 많이 버는 첨단산업이었다. 이로써 암스테르담이 당대 최대의 상업 도시가 된다. 나중에는 중상층까지 값비싼 설탕을 애호하자 암스테르담 시정부는 1602년 ‘사치품 사용 제한령’을 내려 설탕의 국내 소비를 막았다.
해상무역 증대와 비례해 커지는 상선들
네덜란드의 해상무역이 증대하자 상선의 크기도 커졌다. 그 과정을 보자. 13세기 삼각돛을 활용해 맞바람을 이겨내는 ‘자이빙’이라는 기술이 개발되자 종래 인간 근육의 힘으로 노를 저어 움직이던 갤리선은 그 역사를 마감하고 범선에 자리를 내주었다. 1450년경 역풍에 유리한 삼각돛과 순풍에 유리한 사각범의 장점을 혼용해 강한 계절풍을 타고 큰 바다를 항해하는데 적합한 캐랙선이 등장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배가 바로 캐랙선이다. 그 뒤 해상무역이 증대하자 상선의 크기도 커졌다. 캐랙선의 크기는 점차 늘어나 15세기 400톤 정도였던 것이 16세기에는 1,000톤 이상이 되었다.
이후 해적의 출몰이 잦아지자 16세기에 등장한 군선이 갤리온선이다. 캐랙선과 갤리온선은 외형상 크게 다르지 않으나 갤리온선은 처음부터 군용으로 쓰기 위해 만들어진 배로서 적을 제압하기 위해 크게 만들었다. 16세기 말엽의 갤리온선은 크기가 더 커졌다. 보통 1,000톤에서 2,000톤 규모로 거대한 몸집에 비해 길이를 늘리고 폭을 줄여, 물의 저항을 최소화했다. 옆으로 대포를 일렬로 장착하고도 속도가 빨랐다. 또한 적재 용량을 늘리기 위해 선체의 폭이 수면 부근에서 넓어지는 둥근 형태를 취하는 동시에 높이는 줄여 안정성을 향상시켰다. 빠르고 강한 갤리온선의 등장은 해상무역을 확산시켰고 많은 식민지에 유대인 커뮤니티인 디아스포라들을 탄생시켰다.
원래 유대인들은 중세 해양국가 제노바와 베네치아 때부터 선박 제조와 항해에 대한 남다른 기술을 갖고 있었다. 이 기술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전해져 대항해 시대를 여는 원천기술이 된다. 이후 사각돛과 삼각돛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갤리온선의 덕을 톡톡히 본 곳은 네덜란드였다. 그 무렵 네덜란드는 유대인들 덕분에 해상무역뿐 아니라 조선업 경쟁력도 세계 최강이었다.
네덜란드 국가경쟁력, 대형 수송선의 대량 건조기술
해상무역이 급증하면서 조선업은 대형화하기 시작했다. 16세기 중반부터 조선업은 유대인들의 주도로 ‘경량화’와 ‘표준화’에 승부를 걸었다. 그래야 배가 가벼워 빨리 달릴 수 있고 만들기 쉽기 때문이다. 이를 토대로 배의 크기를 키워 화물 적재량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경쟁국인 영국 배들이 중무장한 채 사람을 많이 태울 목적으로 튼튼하게 건조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 네덜란드 선박들은 최소의 선원으로 최대의 경제효과를 얻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게다가 조선 기술자들에 의해 조선소용 밧줄, 목재 제재용 톱과 조선소용 기중기와 같은 첨단 장비와 기계가 발명되어 근대식 조선소가 탄생했다. 이로써 네덜란드에서는 가볍고 표준화된 ‘보급품 수송함’의 대량 건조기술이 1570년에 개발되었다.
가장 큰 특징은 처음으로 중간 돛대(topmast)가 사용되어 수직으로 두 개의 돛을 연속 끌어내려 펼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또 돛대에 장착된 ‘복합도르래’로 인해 이전에 만들어진 배에 비해 5분의 1 정도의 인원만으로 돛 관리가 가능해졌다. 한마디로 선박의 속도는 크게 향상되었으며 관리 인원은 최소화되었다. 이는 경제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대단한 기술이었다.
게다가 선박 기자재 ‘표준화’로 선박 건조 비용이 영국의 60%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곧 화물 유통 경쟁력의 차이로 이어졌다. 화물 운송 운임을 경쟁국 대비 절반 이하로 낮출 수 있었다. 이로써 네덜란드 조선업은 당대의 최고 산업이 된다. 또한 네덜란드가 진출한 해외 항구에서도 네덜란드식 선박 기자재 표준화가 정착되어 네덜란드 선박의 수리는 해외에서도 손쉽게 처리되었다.
훗날 선박 기자재 표준화로 선박 건조를 빠르게 하기로 유명한 ‘자르담’ 조선소에서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의 부국강병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신분을 숨기고 100여 명의 사절단에 끼어서 목수로 일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플류트선, 속도 빠르고 화물 많이 실을수 있어
배불뚝이 저중심설계로 악천후도 잘견뎌
암스테르담이라는 이름은 원래 ‘암스텔강의 둑’이란 뜻이다. 13세기에 어민들이 암스텔강에 둑을 설치하고 정착한 데서 유래했다. 그 뒤 14세기에는 한자동맹에 가입하여 함부르크의 맥주 수출항으로 번창했다. 16세기 중엽부터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든 곳은 앤트워프나 브뤼헤보다 스페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이었다. 이는 종교적 관용을 베푼 네덜란드의 유대인 수용정책 덕분이었다. 네덜란드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들하고 결혼하거나 국교를 비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유대인들을 받아들였다. 이는 오히려 유대인들이 원하는 바였다.
간척사업에 풍차가 본격적으로 사용되다
‘수면보다 낮은 땅’이라는 뜻의 네덜란드는 전 국토의 25%가 바다보다 낮은 탓에 수시로 바닷물이 들어왔고, 비가 내릴 때마다 강물이 넘쳤다. 비가 오고 나면 빗물이 빠져나가지 못해 사람들은 나무 신발을 신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범람하는 물과 싸우며 살아야 했기에 물을 다스리는 치수 시설이 발달했다. 바람의 힘을 이용해 물을 퍼내는 풍차가 그중 하나이다.
네덜란드는 산이 거의 없고 전 국토가 평평했기 때문에 일 년 내내 북해에서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바람의 나라였다. 이 바람을 이용해 풍차를 돌렸다. 풍차 날개의 최대 회전속도는 바람의 세기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1분에 평균 24회 정도 회전한다. 이를 이용해 바닷가에 뚝을 쌓고 풍차로 바닷물을 빼내어 간척지를 개발했다.
유대 무역상들은 중계무역이 늘어나자 16세기 말에 암스테르담 항구 기능을 확대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이른바 ‘새로운 항구도시 건설 프로젝트’였다. 이는 부채꼴 형태의 운하 체계를 이용하여 습지의 물을 빼내고, 군데군데 늪지를 매립하여 항구를 확장하는 장기 프로젝트였다. 이 간척사업에 풍차가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풍차 동력 활용해 목재업과 조선업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이다
그런데 풍차가 물 빼내는 용도 이외에도 유용한 용도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1594년 네덜란드의 한 발명가는 풍차 날개의 움직임에 맞추어 수직으로 톱질을 할 수 있는 장치를 개발해 최초의 풍력 활용 제재소를 발명했다. 네덜란드에서 16세기 말 목재 제재소가 호황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이렇게 때맞추어 풍차 동력을 활용한 ‘목재 제재 기술’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풍차는 증기기관 등장 이전 좋은 동력원이었다.
덕분에 목재 제재업과 조선업에 표준화와 분업화를 도입하여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었다. 잔(Zaan) 강 유역에 600개가 넘는 풍차가 세워져 최초의 공업단지가 만들어졌다. 풍차 제재소들이 생산한 목재는 네덜란드 내부 수요뿐 아니라 여러 국가로 수출되었다. 그 뒤 풍차의 동력을 활용해 방직 등 직물업도 발전했다. 유대 무역상들은 영국과 스페인에서 양모를 들여와 직조하고 염색까지 해서 이를 유럽 전역에 팔았다. 대표적 직물업 중심지 레이덴은 17세기 유럽 최대 직물공업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풍차 동력으로 제당업, 염료가공, 제지, 도자기 제조 등 제조업과 출판, 운송, 상업 등 서비스산업까지 다양한 분야가 균형 있게 발전했다.
네덜란드의 운명을 바꾼 플류트선
목재업이 발전하자 이는 즉시 조선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595년 홀란트 주 암스테르담 북부 호흔(Hoorn)의 조선소에서 갑판이 좁고 선복이 큰 형태의 배가 개발되었다. 이른바 플류트(Fluyt)선이다. 배불뚝이 배 또는 뚱보선이라 불릴 만큼 앞뒤가 둥글둥글하고 갑판은 좁고 상품 싣는 선복이 넓은 배다.
이 배가 만들어진 과정을 살펴보자. 16세기 중반 베네치아에 게토가 생기자 그곳에서 해상무역과 조선업에 종사하던 유대인들이 게토에 갇히지 않으려고 대거 암스테르담으로 옮겨 왔다. 그 뒤 목재 가격이 올라 선박 건조 비용이 상승했을 때, 베네치아는 16세기 식 표준을 고수한 반면, 암스테르담 유대인들은 기존의 갤리온선보다도 좀 더 가볍고 조종하기 쉬운 배를 개발했다. 이것이 베네치아와 네덜란드 간 조선업과 해운업의 승패를 가르는 분수령이 되었다. 게다가 이탈리아와 그 인근 나라들에는 배 만들 큰 나무들이 대부분 벌채되어 희귀해졌다. 반면 네덜란드는 핀란드 등에서 배 만드는 큰 원목을 얼마든지 수입할 수 있었다. 이후 조선업과 해운업은 네덜란드의 독보적인 산업이 되었다.
영국도 이에 지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네덜란드 유대인의 과감한 모험정신 앞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무렵 발트해를 지나려면 통행세를 물어야 했다. 그런데 통행세 부과 기준이 갑판의 넓이였다. 당시는 해적들의 출몰이 빈번하여 대부분 배에는 양옆으로 수많은 대포를 장착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단하고 굵은 목재를 써서 갑판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유대인들은 말 그대로 죽기 아니면 살기식으로 대포를 장착하지 않거나 12~15문 정도의 대포만 설치하여 무장을 최소화했다. 대신 상대적으로 값싼 나무로 화물칸을 배불뚝이로 만들고 갑판은 좁게 만들어, 제작 경비와 함께 통행세도 절감하는 방안을 채택했다. 곧 플류트선은 흘수선(waterline)에서 갑판으로 올라갈수록 선폭이 좁아졌다. 그래서 네덜란드 선박은 양옆은 통통하고 둥글지만, 갑판은 매우 좁았다.
오늘날의 컨테이너선인 셈이다. 이 배는 갑판이 좁고 긴 대신 선창이 넓어서 많은 화물을 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돛이 매우 효율적으로 배치되어 있어 선박이 가벼워 속도도 빨랐다. 플류트선의 설계는 초기 갤리온선의 설계와 유사해 그리 크지 않았다. 보통 플류트선 한 척의 적재 용량은 약 250t~500t에 길이는 25미터 내외였다. 게다가 배불뚝이 저중심 설계라 출발 및 정지가 쉽고 폭풍우 같은 악천후에도 잘 견뎠다.
발트해의 통관세에 대해서는 또 다른 주장도 있다. 플류트선이 통행료를 줄이기 위해 갑판을 좁게 개발했다는 것은 끈질긴 신화라는 이야기이다. 1562년부터 1632년까지 70년 동안 통행료 기록부에 의하면, 징수관이 선하증권을 사용하여 선박의 선적 용량 곧 배의 너비, 길이, 깊이를 평가한 다음 이에 따라 통행세를 매겼다는 것이다.
플류트선 건조비가 적게 든 이유
네덜란드 앞 바덴 갯벌은 우리 서해 갯벌과 함께 세계 5대 갯벌의 하나이다. 곧 밀물과 썰물의 차가 큰 갯벌에서는 썰물 시에도 배가 안정적으로 정박해 있으려면 밑바닥이 뾰족한 유선형의 배 곧 ‘첨저선’이 아닌 밑바닥이 평편한 ‘평저선’이라야 한다.
즉 플류트선은 용골(선박 바닥의 중앙을 받치는 길고 큰 재목)을 먼저 만들어 그 속에서 제작하는 첨저선과는 달리 배 밑바닥이 평편한 평저선이라 땅 위에서 직접 건조할 수 있어 선박 건조비가 싸게 먹혔다. 영국에 비해 60% 수준이면 족했다.
게다가 배의 크기도 마음대로 키울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배의 용적이 최대치가 되도록 설계되어 적재 화물도 첨저선에 비해 두 배 이상 실을 수 있었다.
네덜란드 해상운임, 다른 나라의 1/3
이런 이점 이외에도 발트해에서 다른 나라 선박이 1번 왕복할 동안, 항해 속도가 빠른 플류트선은 2번 왕복할 수 있었다. 플류트선은 2-3개의 마스트(돛을 달기 위하여 배 바닥에 세운 기둥)에 가로돛을 달았고, 마스트 높이는 갤리온의 마스트 높이보다는 높았는데 이는 빠른 속도를 위한 것이었다.
또한 돛 줄을 조작하는 복합 도르래(block and tackle)를 돛대에 최대한 많이 달아 승선 인원이 보통 9~10명으로 영국 동급선박의 30명에 비해 저렴하게 운행할 수 있었다.
플류트선은 보통 12문의 대포를 장착했는데 때로는 더 많은 화물을 운반하기 위해 대포를 떼어내어 해변에 남겨두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목숨을 담보로 화물 운송비를 1/3까지 낮추었다. 이로써 네덜란드가 세계 해운업계를 평정했다. 그런데 대포를 장착하지 않은 배는 가벼워 해적선으로부터 빨리 도망칠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이로써 네덜란드인은 “바다의 마부”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해상운송 물량이 폭증하자 이런 장점을 가진 배를 대량 건조했다. 이를 위해 조선소의 설비와 자재, 계측장비 등을 표준화했다. ‘표준화’ 또한 유대인 장기였다. 청어 산업에 이은 표준화가 조선업에서도 위력을 발했다. 이로써 배를 저렴하고 빠르게 건조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는 16세기 중엽에 이미 북방무역의 70%를 장악했다. 보유 상선 수도 나머지 전 유럽의 상선 수보다도 많은 1800척이나 되었다. 1602년 동인도회사 출범 이후 상선 건조는 대폭 늘어났으며 특히 1625년부터는 약 1만 명의 조선소 노동자들이 매년 400~500척의 선박을 건조해 네덜란드 상선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1497년부터 1660년까지 외레순 해협을 통과한 선박이 약 40만 척이었는데 이 중 60%가 네덜란드 선박이었다. 1670년 네덜란드 상선은 총 56만8000톤의 운송량을 기록했으며 이는 유럽 전체의 절반 이상이었다.
목숨보다 신용...17세기 네덜란드가 번영한 이유
네덜란드는 라인강과 마스강, 발강 하류에 걸쳐 있어 중세부터 내륙 수로를 이용한 물류가 발달했다. 플류트선은 배 밑바닥이 평편한 평저선이라 얕은 수심의 바다나 강에서도 운용할 수 있어 수로를 이용해 강을 거슬러 올라가 화물을 배달했다. 플류트선이 더 이상 못 올라가는 수심이 얕은 강에서는 선상에서 작은 배를 내려 가능한 한 고객 가까이에 화물을 배달해주었다. 이러한 서비스에 고객들은 감동했다.
중세 이래로 라인강 유역 나루터와 상업 도시에서는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상권을 주도하고 있었다. 중세 십자군 전쟁 때 가장 많은 학살을 당한 사람들이 라인강 변의 유대인들이었다. 이때 동구와 러시아로 피란 간 유대인 후예들이 독일계 유대인이라는 뜻의 ‘아슈퀴나지’이다. 16세기 암스테르담 유대인들은 라인강 주변 유대인 디아스포라들과 협동해 내륙 물류 산업을 장악했다. 또한 당시 유럽의 주요 항구인 앤트워프, 세비야, 런던 등이 얕은 바다를 끼고 있거나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당도할 수 있었던 것을 감안할 때 플류트선은 화물선으로 가장 효율적인 배였다.
네덜란드 포경 산업의 발전
1596년 네덜란드 항해가 빌렘 바렌츠가 북극해의 스발바르 제도를 발견했다. 그 인근에 고래와 물개, 바다코끼리가 많았다. 포경은 기원전 6000년 이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 인근이 최초 포경지의 하나였다.
초기 포경업은 주로 해안가에서 이뤄졌다. 작은 배를 타고 바다로 몰려 나가 고래가 지칠 때까지 몇 시간이고 뒤를 쫓아가 호흡이 가빠진 고래가 물 위로 떠오를 때 고래에게 집단으로 작살을 던져 잡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연해에서 고래가 사라지면서 먼바다로 나가게 된다. 먼바다에서 큰 배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고래를 발견하면, 선상의 작은 배를 내려 노를 저어 가서 작살을 던져 사냥하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대형 고래인 긴수염고래만은 사냥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고래들은 헤엄치는 속도가 빨라 범선이나 노를 젓는 배로는 따라잡기 어려웠다. 당시 네덜란드인들은 포를 이용한 작살로 고래 잡는 기술을 발명하여 그곳을 장악했다. 이로써 네덜란드는 1610년경부터 고래잡이 분야에서도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어 대량의 고래기름과 고래수염을 얻을 수 있었다. 이후 고래기름은 오랫동안 밤거리 가로등에 사용되었다. 게다가 고래 고기는 찬 음식으로 분류되어 육식이 금지된 금식일에도 먹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생선으로 알려져 오랜 기간 서구인의 사랑을 받았다.
그 무렵 네덜란드 포경선단은 약 150척에서 250척으로 이루어졌으며 한 해에 잡은 고래 수만 750~ 1250마리에 달했다고 한다. 그 뒤 네덜란드와 영국의 포경선단은 240여 년간 독점적 포경으로 북극해 일대의 고래를 거의 멸종 단계로 몰아넣었다.
목숨보다 중요한 신용
16세기 전후 포르투갈이 동양으로 가는 바닷길을 열었다. 1498년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가마가 개척한 해로는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야 했고, 1521년 스페인의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일주한 해로는 남아메리카 남단을 지나야 했다. 네덜란드는 더 빠른 길을 찾고 있었다. 북극 바다를 지나면 아프리카의 희망봉이나 남아메리카의 마젤란 해협을 지나지 않고 빠르게 아시아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뱃길을 거치면 1만2000㎞이지만 아프리카를 돌아가면 2만4000㎞이다. 운항 거리와 시간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었다. 스페인 왕국에 맞서 독립전쟁을 벌이면서도 네덜란드는 끊임없이 북동항로를 찾는 배를 내보냈다. 그 선두에 빌렘 바렌츠 선장이 있었다.
빌렘 바렌츠 선장은 북쪽으로 항해하면 아시아에 도달할 최단 항로를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기에 모험에 나섰다. 그는 1594년 1차 항해에서 이미 노바야젬라 섬에 도달하고 주변 섬들을 발견해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이듬해 2차 항해에 실패하는 통에 한 푼의 보조금도 받지 못했지만 굴하지 않고 1596년 3차 항해길에 올랐다.
바렌츠 선장은 화물을 싣고 새로운 북극 항로를 찾아 한여름에 3차 항해길에 올랐다. 그들은 여름철이면 24시간 낮이 지속되는 ‘백야 현상’으로 얼지 않은 바다에서 최단 북극 항로를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배는 빙하에 갇히게 된다. 선원들은 닻을 내리고 빙하 위에 올라 갑판을 뜯어 움막을 짓고 불을 지폈다. 그들은 8개월 동안을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지냈다. 배의 갑판을 뜯어 불을 피우고, 최소한의 음식으로 버티다 그 식량마저 떨어지자 북극곰과 여우를 사냥해 허기를 채웠다. 그사이 네 명이 죽었다.
선장과 선원들은 1597년 6월 작은 배 두 척에 나눠 타고 항해에 나섰지만, 일주일 뒤 쇠약해진 바렌츠 선장은 숨을 거두었다. 결국 선장을 포함해 8명이 죽음을 맞았다. 하지만 이렇게 죽어가면서도 위탁받은 화물에 있는 식량과 의복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오십여 일 뒤, 얼음이 풀리면서 생존자 12명이 러시아 상선에 구조되었다.
구조된 선원들이 그해 11월 돌아왔을 때 네덜란드는 감동에 젖었다. 위탁화물인 옷과 식량이 온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얼어 죽고 굶어 죽으면서도 화물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경쟁국에 비해 값싼 운송료와 더불어 네덜란드가 해상운송을 장악하게 된 이유는 바로 ‘신용’이었다. 냉엄한 도덕률과 생명보다 소중히 여겼던 명예 의식과 상도의에서 17세기 네덜란드의 번영이 꽃피었다.
사람들은 감동했다. 목숨 바쳐 지킨 ‘상도의’는 네덜란드 상인들의 자부심이 되어, 네덜란드를 상징하는 영원한 기록이 되었다. 유대인의 상업적 재능에 더해진 ‘신뢰’를 바탕으로 네덜란드 무역상들은 원양 항해의 대명사가 되었다. 미국의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그의 <트러스트: 사회도덕과 번영의 창조> 저서에서 ‘신뢰’가 국가 경쟁력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라고 했다. 네덜란드 국가 경쟁력의 원천이 바로 ‘신뢰’였다.
노르웨이와 러시아 북서부 앞에 있는 바렌츠해는 빌렘 바렌츠 선장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게다가 바렌츠 선장이 죽기 전해인 1596년에 발견한 스발바르 제도에서 대량의 석탄이 발견되어 네덜란드에 큰 부를 안겨다 주었다. 그는 죽어서도 애국자였다. 47년 짧은 생을 보낸 바렌츠는 네덜란드 10유로짜리 동전의 주인공으로 여전히 살아 있다.
청어가 발전시킨 네덜란드 경제
1620년에 이르러 네덜란드 어선은 2000척이 넘었는데 대부분 70톤에서 100톤에 이르는 청어잡이 배였다. 선원들이 한 척당 15명 정도 승선했으니 단순 계산으로도 3만 명 이상의 어부가 조업했다. 1630~1640년대에는 연간 약 3만2500톤의 청어를 처리해 당시 유럽 전체 청어 포획량 6만 톤의 절반을 넘겼다. 이렇게 네덜란드의 부는 청어로부터 시작되었다.
청어잡이와 청어의 가공 처리, 통 제작, 망, 어선 건조 등 관련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합하면 그 수가 약 45만 명에 달했다. 당시 국내 노동인구의 태반이 청어와 관련된 산업에 종사하고 있었던 셈이다. 수산업에서 촉발된 활황은 배 만드는 조선업과 해운업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이는 또 목재업·무역업·금융업의 발전을 낳았다. 청어 어업이 네덜란드 경제와 해운 그리고 무역과 금융업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다.
대부업이 유대인 몫이 된 이유
고대로부터 이자는 금기시되어 왔다. 고대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자 불임설”을 주장했다. 돈은 그 자체로 이윤을 낳을 수 없다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자 받는 행위를 맹렬히 비난했다. “고리대금업은 가장 미움을 받는다. 그것이 미움을 받는 데에는 마땅한 이유가 있다. … 왜냐하면 화폐란 교환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지 이자를 늘리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자는 고대로부터 비난 받아 왔다.
기독교 또한 이자를 금했다. 이자는 돈을 빌려준 시간에 대해 받는 반대급부인데 시간은 신께 속한 영역이기 때문에 이를 이용하여 인간이 이자를 받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돈을 빌려주는 것을 ‘금융’이라 부르지 않고 ‘고리대금’으로 불렀다. 중세는 아무리 값싼 이자라도 어쨌든 이자를 받고 돈을 꿔주면 고리대금이라고 칭했다. 기독교는 교회법인 카논 법률에 이자놀이를 불법으로 명시해 1179년부터 이자 받는 사람들을 아예 파문시키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교황 니콜라스 5세는 예수님을 팔아먹고 처형한, 영원히 저주받을 족속인 유대인들이 고리대금업을 하도록 ‘공식적으로’ 허용함으로써 순결한 기독교인들을 죄악으로부터 지키도록 했다. 가톨릭이 유대인에게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행위를 허용한 것은 어차피 지옥으로 떨어질 사람들이니까 이런 역할을 맡겨도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더구나 대부 활동으로 경제 부흥을 촉진시킬 필요도 있었다.
반면 유대교에서는 “이방인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는 받을 수 있되 너의 형제에게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어서는 안 된다”라는 구약성경의 구절을 근거로 이방인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을 수 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탈무드도 이자를 많이 받는 고리대금은 엄격히 금했을 뿐 아니라 그러한 고리대금업자를 살인자와 동일시했다. 기독교도들은 대부업 자체가 죄가 되기 때문에 이를 기피했고 자연히 대부업은 유대인의 몫이 되었다. 그 때문에 중세 기독교 국가의 왕실과 귀족들은 국고 관리를 주로 유대인에게 맡겼다. 유대인의 대부업은 이자를 원천적으로 부정한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었다.
이자 제한 폐지로 채권 시장이 활성화되다
1179년 라테란 공의회에서 “대금업자는 파문한다”고 선언하자 각국 군주가 돈 빌리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후 기독교 사회에서는 과연 대금업이 무엇이냐에 대한 소모적 논쟁이 이어졌다. 한편 국제 무역이 증가하면서, 어음 거래 또한 늘어났다. 어음 거래를 막으면 경제가 돌아가지 않아 어음 거래는 금융 거래가 아닌 매매의 연장이므로 대금업에서 제외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자 자금 융통을 위해 어음을 발행하면서도 마치 실제 거래가 있었던 것처럼 꾸몄다. 이런 어음을 ‘건식 어음’이라 했다.
상업상의 실제 어음과 건식 어음을 구분해 가려내는 일은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16세기 초 프랑스 신학자 장 거송(Jean Gerson)이 “차입자를 가혹하게 옥죌 목적으로 대출할 때”만 대금업이 금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독일의 에크(Eck)는 『5% 계약에 관한 연구』(1515년)라는 책을 통해 5% 이자야말로 하느님에게 용서받을 수 있는 합리적 상한선이라고 거들었다. 푸거 가문에서 뒷돈을 댄 결과였다. 그러자 교황 레오 10세가 같은 해 『가난한 사람을 위한 대출법』을 통해 5%의 이자 수취를 합법화했다. 레오 10세는 다름 아닌 메디치 은행 대표이자 피렌체 공화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위대한 로렌초(로렌초 데 메디치)’의 아들이었다.
그 무렵 광산업을 통해 큰돈을 번 북부 독일의 유대 푸거가에 빚 지지 않은 통치자들은 별로 없었다. 당시 푸거가는 바티칸 교황청의 최대 채권자였다. 따라서 가톨릭교회는 대부업 금지를 더 이상 고집할 수 없었다. 1517년 ‘라테라노 공의회’는 이자 받는 대부업에 대한 대부분의 금지 조항을 폐지했다. 금융업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이다. 이때부터 유럽 금융의 중심은 북부 독일 한자 도시들에서 유대인이 금융을 주도하는 앤트워프로 이동했다.
1545년 스위스의 종교개혁가 칼뱅이 레오 10세의 결정에 다시 의문을 제기했다. 왜 이자가 꼭 5%이어야 하는가? 칼뱅이 히브리 성경을 오래 연구한 결과 대금업으로 해석할 수 있는 단어는 두 가지였다. “깨문다”는 뜻의 네섹(neshek)과 “늘린다”는 뜻의 타빗(tarbit)이었다. 이 중 성경에서 명백히 금지하는 것은 네섹뿐이라는 것이 칼뱅의 결론이었다. 갚을 능력이 없는 불쌍한 자는 깨물지 말고 대가 없이 도와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얼마든지 이자를 받고 대출해줄 수 있는 것이다. 칼뱅은 대금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가톨릭의 경제관을 뒤집었다.
이는 사회적으로 금융업이 공인되고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자금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따라 이자가 결정되었다. 곧 빌리려는 돈보다 빌려주려고 하는 돈이 적으면 이자는 올라가지만, 그 반대 현상 곧 빌리려는 돈보다 빌려주는 돈이 더 많으면 이자는 내려갔다. 이로써 수급 원리에 따라 작동하는 채권 시장이 활성화될 수 있었다.
저지대 채권시장의 탄생
앤트워프 유대인들은 상업과 무역에 환어음과 차용증 제도를 정착시켜 신용사회를 구축했다. 당시 저지대에서는 ‘부채증서의 양도에 관한 법률’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를 토대로 유대 상인들은 환어음을 통해 빠르게 자본을 모으고 순환시킬 수 있어 은행 등 금융업이 발달해 신용거래 기초를 마련했다.
이러한 신용을 바탕으로 1550년대 유대 금융인들은 채권시장을 활성화시켜 정부도 강제 공채제도 대신 채권시장을 통해 공채를 발행해 대부받는 관행을 정착시켰다. 당시에는 전쟁이 나면 귀족들이 평소 세금을 내지 않는 대신 전쟁 공채를 사서 전쟁 자금을 지원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나중에 이 전통은 강제화되었다.
저지대 주 정부와 도시들은 세 종류의 공채를 발행했다. ‘오블리가티엔(Obligatien: 단기채권)’은 ‘무기명 채권’으로 이를 소지한 사람들은 언제든지 은행에서 현금으로 매각할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중세 베네치아 이래로 자기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무기명 유가증권을 선호했다.
장기 채권으로는 ‘로스렌텐(Losrenten)’이 있었다. 이는 종신연금으로 무기명 채권과 달리 공적 원장에 자기 이름을 등록하고 정기 이자를 받았다. 이 증권은 시장에서 매매될 수 있었고, 소지자가 죽으면 상속되었다. 마지막으로 ‘레이프렌텐(Lijfrenten)’이 있는데 이는 소지자가 죽으면 지급이 중단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로스렌텐과 비슷했다. 곧 사망하면 지급이 중단되는 종신형 연금과 후손에게 대물림이 가능한 상속형 연금의 차이였다. 이러한 채권시장이 가장 발달한 곳은 유대인이 많이 모여든 앤트워프였다. 영국 왕실도 큰돈이 필요한 경우 앤트워프에서 융통해 썼다.
간척지 인센티브가 암스테르담을 탄생시키다
험난한 자연환경을 극복한 저지대 간척의 역사가 네덜란드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저지대는 빙하기를 거치면서 해수면과 지반의 침강과 융기를 통해 현재의 지형을 형성했다. 저지대는 해수면보다도 낮은 곳에 위치해 있고 그 흔한 언덕조차 보기 힘든 평평한 늪지대와 갯벌이 대부분이었다.
간척지 인센티브가 암스테르담을 탄생시키다
네덜란드 텍설(Texel)섬에서 덴마크 남부 해안까지 이어지는 바던해 갯벌은 세계 5대 갯벌 중에서도 가장 큰 갯벌이다. 밀물과 썰물의 조수 간만 차가 3m가 넘고, 길이는 약 500㎞, 넓이는 약 1만㎢에 달한다. 라인강, 마스강, 스헬더강 등 북부 유럽의 3대 강이 만드는 삼각주를 중심으로 저지대가 펼쳐져 있다.
그러다 보니 저지대 해안가가 모두 강 하구에 쌓인 침적토와 갯벌과 늪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홀란트주는 늪지대 간척사업을 독려하기 위해 주민들이 간척한 땅에 대해서는 소유권을 인정해주고 세금도 면제해 주었다. 그러자 1270년경 어민들이 암스텔(Amastel)강에 둑Dam을 쌓고 다리를 놓아 늪지대를 간척하여 정주하기 시작했다. 이 마을 이름이 그대로 암스테르담(Amastel+dam=Amasterdam)이 되었다.
발트해 무역과 라인강 무역이 만나다
저지대 앞 바다 북해는 북위 60도 중위도 저기압대에 걸친 까닭에 기상 악화가 잦고 바람이 많이 분다. 심할 경우 폭풍해일이 들이치는데, 이 폭풍해일이 북해 연안선을 만드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연구도 있다.
1282년 발생한 해일이 북해에 있는 텍설섬 부근 모랫둑을 무너뜨리면서 바닷물이 들어와 자위더르해가 만들어졌다. 이 재해가 암스테르담을 항구도시로 만드는 운명의 첫 신호탄이었다. 침적토가 쌓인 암스테르담 부근까지 큰 배가 들어오면서 해상 무역이 시작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암스테르담까지 들어온 발트해 상선들에 의해 작은 마을이었던 암스테르담이 항구로 점차 발전하게 되었다.
이후 암스테르담 상인들은 라인강과 연결되는 강 하구에 위치한 마을의 특성을 살려 라인강을 타고 올라가 내륙 수로 교역망을 넓혀나갔다. 이때 라인강 주변에 많은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포진해 있었는데 이들이 라인강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암스테르담의 항구 기능이 커지자 이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암스테르담은 1367년 한자동맹의 하나인 ‘쾰른동맹’에 참가하여 라인강 내륙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유럽은 위도에 따라 기후 차이가 크다. 북부 유럽은 숲이 울창하고 농사짓는 데 적합했고, 남부 유럽은 포도주 등 술과 소금을 얻는 데 유리했다. 이렇게 남북의 생산품이 달랐기 때문에 무역이 필요했다. 암스테르담 상인들은 발트해 상선들에게 남부 유럽의 술과 소금을 팔았고, 남부 유럽에는 발트해 상선들이 가져온 목재와 곡물을 팔았다.
1421년 11월 대규모 홍수로 북부 저지대 10개 도시가 물에 잠겼다. 이후 사람들은 해안에 방조제를 쌓기 시작해 간척사업을 본격적으로 벌였다. 간척사업으로 생긴 땅을 ‘폴더’라 불렀다. 이렇게 저지대 사람들은 간척사업을 통해 땅을 넓혀갔다. 바람의 힘을 이용해 물을 빼내는 풍차는 간척사업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도구였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온 유대인들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저지대에 모여든 것은 15세기 말부터였다. 곧 1492년 스페인에서의 추방, 1497년 포르투갈에서의 추방으로 인해 유대인들이 저지대에 몰려왔을 때 대부분은 플랑드르 항구도시에 정착했고, 일부가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당시 암스테르담 인구는 수천명에 불과했다.
북부 저지대 사람들은 쓸 만한 땅을 만들기 위해 제방을 쌓고 수로를 팠다. 그러면 물기는 빠지지만 땅이 주저앉는 지반침하 현상이 발생했다. 땅이 꺼지면 바닷물이 밀려든다. 그러면 제방을 더 높이 쌓고 풍차로 물도 계속 퍼내야 했다. 그래서 그곳 늪지대 사람들은 나무로 만든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
둑을 쌓고 바닷물을 빼낸 후 생긴 땅은 소금기가 있어 농경지로 바로 쓰지 못했다. 소금기를 빼내기 위해 땅을 말려 소금을 얻은 뒤, 하천으로부터 담수를 끌어와 민물 호수를 만든 후 나중에 민물을 빼내면 농경지로 쓸 수 있었다. 둑을 쌓고 바닷물을 빼내고 다시 하천의 민물을 끌어오다 보면 자연히 생기는 것이 운하였다.
이렇게 간척에 성공해 생긴 땅은 다른 유럽 나라들과 달리 군주나 교회에 예속되지 않고 주민들의 소유가 되었다. 이는 절대 봉건주의 곧 군주나 주교의 통치권에 예속되지 않고 주민들이 마을의 주인이라는 의미였다.
그 무렵의 유럽 다른 나라들과 달리 시민들이 땅을 자유로이 사고팔 수 있었으며, 상업이 발달하면서 상인들이 군주나 영주로부터 도시의 자치권을 사들였다. 이는 훗날 ‘네덜란드 공화국’ 탄생의 토대가 된다. 그러다 보니 저지대는 특정 종교나 사상에 대해 제약이 없었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온 유대인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은 없었다.
유대인들이 키운 항구도시, 암스테르담
유대인들도 나서서 간척사업을 하면서 암스테르담을 베네치아와 비슷한 항구도시로 만들기 위해 ‘항구도시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당시 암스테르담 항구에는 상업지역과 늪지대가 혼재되어 있었다. 그런데 늪지대의 토탄을 채취해 팔면 돈이 되었다. 토탄은 식물류가 오랜 기간 땅속에 퇴적돼 생성된 석탄 초기 과정의 물질로 연료로 쓰였다.
이렇게 늪지대의 토탄을 파내면 드러나는 모래 자갈층 밑바닥에, 물에 잘 썩지 않는 참나무 말뚝들을 촘촘히 박고 그 위에 돌과 흙을 덮어 인공섬을 만들어 집을 지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땅과 집을 획득했다. 지금의 암스테르담은 70%가 간척지로 약 90개의 인공섬이 1500여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암스테르담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추방당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모여드는 유대인 덕분에 1514년에 이르러서야 인구가 1만1000명에 도달했다. 당시 북부 저지대 인구 백만명 중 20%가 1만명 이상 규모 도시에 살았다. 이렇게 도시화율이 높다는 것은 농업 환경이 좋지 않아 장원 제도가 발달하지 못했고 대신 항구도시에 어업 관련 종사자들과 유대인과 같은 상인층이 많아졌다는 의미다.
그 뒤 암스테르담 유대인들이 소금 상권을 장악하고 청어 산업을 주도하면서 저지대는 새로운 도약의 토대를 다지게 된다. 이후 유럽 곳곳의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모여들었다. 이 무렵 안트베르펜 유대인들도 암스테르담으로 건너오면서 1541년 이후 안트베르펜 경제가 후퇴하면서 상대적으로 암스테르담이 융성하기 시작했다. 그 뒤 암스테르담 인구는 1557년 2만2000명을 넘어섰고 1564년 3만명을 돌파했다.
유대인들, 네덜란드 독립전쟁 자금을 적극 지원하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결혼동맹을 통해 저지대와 스페인을 지배하게 되었다. 16세기 중엽 스페인 왕국은 저지대에 군인을 주둔시켜 이단심문을 통해 가톨릭을 강요했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온 유대인과 칼뱅파에게 문제가 생긴 것이다.
게다가 유대인을 추방해 세수가 급감한 스페인 왕국은 재정 파탄에 시달리자 저지대에 세금을 무겁게 부과해 스페인 왕국 국세의 40%를 저지대에서 뜯어갔다. 이러한 종교재판과 중과세 정책에 항거하는 상인들이 반란 움직임을 보이고 있을 때 1566년 칼뱅주의자들이 ‘성상 파괴 운동’을 벌여 저지대 성당들을 모두 파괴했다. 이를 반역으로 간주한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1만명의 군대와 함께 악명 높은 알바 공작을 파견했다. 이 일로 8000명이 처형당하고 10만명이 국외로 탈출했다.
이에 반발해 저지대 17주는 1568년 독립전쟁에 돌입했다. 이른바 ‘8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전쟁 중 스페인 왕국의 재정 파산으로 인해 안트베르펜에 주둔한 용병들에게 2년 치 월급이 밀리자, 1576년 용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방화와 약탈을 자행했다. 이 통에 시민 7000명이 학살당했다. 이때 많은 유대인이 안트베르펜을 탈출해 암스테르담으로 옮겼다.
1578년 지금의 벨기에 지역 남부 10주는 스페인 군대에 굴복해 가톨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유대인과 칼뱅파가 많이 사는 홀란트주와 제일란트주 등 북부 7주는 1579년 위트레흐트동맹을 결성해 항전을 계속했다. 이와 동시에 건국 헌장에 ‘종교의 자유’를 선언했다. 이로써 종교의 자유를 찾아 더 많은 유대인과 프랑스의 위그노(칼뱅주의를 추종하는 프랑스 개신교도)들이 모여들었다.
이러던 차에 1580년 스페인이 포르투갈을 합병했다. 스페인은 포르투갈을 합병하면서 암스테르담 유대 상인의 동방물산 유통 참여를 배제하고 독일 함부르크 유대 상인들에게 이 권리를 넘겼다. 유통 거점이 암스테르담에서 함부르크로 바뀐 것이다. 이때 부상한 가문이 독일의 유대 가문 푸거(Fugger)가였다.
게다가 이듬해인 1581년 7월에는 북부 저지대 7주가 주도하여 더 이상 왕정이 아닌 의회를 통해 각 주가 권한을 행사하는 세계 최초의 연방제 국가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을 탄생시켜 독립을 선언했다. 유대교와 영국에서 성공회의 박해를 피해 피난 온 칼뱅파 청교도와 프랑스의 칼뱅파 위그노는 구약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과 교리가 일맥상통하여 궁합이 잘 맞았다. 특히 상업과 금융에 대한 시각과 부의 축적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네덜란드와 스페인 간에 독립전쟁이 격화되자, 유대인들은 이제 네덜란드마저 스페인에 정복당하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더 이상 피란 갈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독립전쟁 자금 지원에 적극적이었다. 유대인들이 많이 사는 홀란트주와 제일란트주가 연방분담금 곧 국방비의 대부분을 부담했다. 홀란트가 65%, 제일란트가 15%로 두 주가 80%를 담당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주 정부가 발행하는 전쟁채권을 열심히 사주었다. 7주 중에서 홀란트가 가장 넓고 조세 부담률도 높아 네덜란드를 아예 ‘홀란트’라고도 불렀다.
소매금융의 출현, 개인에게 직접 채권을 팔다
암스테르담의 금융혁명은 16세기 중엽 유대 대상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상인들은 은행 대부를 받던 방식에서 탈피해 부자들에게 직접 채권을 팔았다. 곧 기존 은행가에 채권을 팔던 것과는 달리, 개인 부호들에게 직접 채권을 팔기 시작했다. 자금 조달에서 ‘소매금융’이 시작된 것이다. 이는 영국보다 100년, 미국의 남북전쟁 시 채권보다 300년 앞선 것이었다. 이러한 기법이 유대인의 이동 경로를 따라 이후 런던을 거쳐 300년 뒤 미국으로 이어진 것이다. 미국 남북전쟁 때 제임스 쿡은 북부 연합채권을 은행권을 통하지 않고 개인들에게 팔아 명성을 얻은 바 있다.
유대인, 전쟁 채권시장을 활성화하다
1568년 시작된 네덜란드 독립전쟁 초기에는 불확실성으로 인해 정부가 발행하는 장기 공채가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용을 담보로 채권을 발행해 전쟁 자금을 지원했다. 유대 징수 청부인들이 발행하는 단기채권 ‘오블리가티엔’은 정부의 자금 융통에 도움을 주었다. 징세 청부 제도란 나라에서 세금을 거둘 때, 민간 청부인에게 도급을 주어 그 사람이 먼저 할당된 세금을 납부하고, 그 뒤 청부인이 자기 수익을 보태 세금을 거두던 제도이다. 이렇게 급한 불을 끈 네덜란드 유대인들은 독립전쟁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해외 디아스포라 자본을 장기 채권시장에 끌어들여 전쟁 자금을 지원했다.
자영농에 의해 농업혁명이 이루어지다
16세기 들어 저지대에서 농업혁명이 일어났다. 영주에게 속박되어 있는 장원 제도 아래 농노들과 달리 저지대는 간척지 개발로 자유롭게 의사를 결정할 수 있는 자영농이 많았다. 이런 사회 시스템 덕분에 농업에서도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유럽은 기후 여건상 밀과 보리 같은 밭작물이 주요 곡물이다. 그간의 삼포제는 경작지의 3분의 1을 휴경지로 정해 생산에서 제외하는 단점이 있었다. 그리고 목축과 퇴비 생산을 위해 목초지가 따로 있어야 했다. 그런데 휴경 대신 땅을 네 부분으로 나눠 계절에 따라 ‘귀리나 보리, 클로버, 밀, 순무’ 순으로 돌려짓기가 시작되었다. 이로써 중세부터 600년간 이어진 삼포제 농법을 극복하고 ‘4포제 윤작법’이 시행되었다.
토양에 질소를 공급해 지력을 회복시키는 클로버와 파종 후 2~3개월이면 수확이 가능한 순무는 가축 사료로도 이용되었으며, 퇴비를 사용할 때보다 더 많은 농작물을 생산했다. 결과적으로 경작 면적이 3분의 1 이상 늘어나는 효과를 보았다.
게다가 잎이 풍성한 순무를 저장했다가 겨울 동안 가축 사료로 사용하여, 예전처럼 가축 먹이를 구할 수 없는 겨울이 오면 대부분 가축을 도축하던 관습에서 벗어나 일년 내내 가축을 사육하여 고기를 공급할 수 있었다. 이는 네덜란드가 낙농국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자영농에 의해 농업혁명이 이루어지다
유대인들은 당시 이미 시장경제 원리에 정통했다. 수출과 산업에 필요한 고부가 가치 작물을 재배하고 값싼 식량은 대부분 수입했다. 고부가 가치 작물 중 하나가 직물 염색 원료로 쓰는 작물의 재배였다. 유대인들은 아마와 삼 그리고 자주색 염료 식물 ‘꼭두서니’와 남색 염료 식물 ‘판람근’(대청)을 재배했다. 직물 산업과 염색 산업에 꼭 필요한 작물들이었다.
유대인들은 고대로부터 자주색 염색 기술을 비기에 부쳐 비밀로 간직해왔던 민족이다. 고대의 자색은 가나안 해안가 뿔고둥 내장에서 추출한 체액으로 만들어 무척 귀했다. 이 염료로 염색한 최상품 옷감 1파운드는 로마 은화 5만 데나리온으로 같은 무게의 금값에 해당했다. 그래서 자주색을 ‘황제의 색상’ 또는 ‘추기경의 색상’이라 하여 중세까지만 해도 일반인들은 입을 수 없는 고급 색깔이었다.
대청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청이라는 관목식물 잎을 거두어 퇴비처럼 식히면 노란 즙이 흘러나오는데 공기 중에 놓아두면 진한 쪽빛을 띤다. 쪽빛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인기가 좋았던 대청 염료는 심지어 파란색의 금이라고 해서 ‘블루 골드’로 불릴 정도였다. 유대인들은 영국산 생모직물을 수입해 이를 자주색과 남색으로 염색해 비싼 값에 수출했다.
자주색과 남색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염색이 아니었다. 염색할 때 쓰는 매염제의 구성 성분과 정확한 함량은 오랫동안 유대 공동체 안에서만 전수되는 비밀이었다. 다른 나라들은 직물에 아무리 색을 들이려 해도 세탁 과정에서 색이 바랬다. 따라서 오랫동안 유대인들이 천연염색 기술로 큰돈을 벌었다.
1540년 최초의 염색 서적이 보세티에 의해 기술되어 이후 다른 나라들은 인도로부터 아열대 작물인 남색 천연염료 인디고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쟁력 면에서 네덜란드를 따라올 수 없었다. 이후 레이던이 유럽 최대의 직물과 염색산업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유대인들은 레이던에서 그들의 경전 탈무드를 인쇄하기 위해 출판업도 발전시켰다. 값비싼 천연염료가 인공 합성염료로 대체된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이다.
저지대 사람들은 1570년대부터 자연환경에 맞춘 전문 농업을 발전시켰다. 점토 지역에는 곡물을 재배하고, 경작할 수 없는 곳에서는 목축업을 하고, 도시 근교에서는 튤립 같은 원예작물을 재배했다. 당시 네덜란드의 고부가 가치 경제작물, 유제품, 과일, 원예는 유럽 최고 수준이었고, 맥주의 향료인 홉은 맥주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위그노들이 합류하다
프랑스의 칼뱅파인 위그노들이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로 옮겨온 것은 1572년 8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수천명의 위그노가 살해당한 뒤였다. 이후 5년에 걸쳐 전쟁과 학살이 거듭되면서 위그노들이 저지대로 많이 피란 왔다. 위그노들은 유대인보다 80년 늦게 암스테르담에 발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