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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새리얼 그린, 남부 전역 지연전, 킹스마운틴 전투

Jobs 9 2021. 4. 28.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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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새리얼 그린의 등장

 

새러토가 전투의 두 영웅이었던 호레이쇼 게이트와 베네딕트 아놀드가 불명예스럽게 사라지면서 이제 대륙군이 커다란 위기에 처하는 듯 했다. 하지만 호레이쇼 게이츠의 뒤를 이은 너새리얼 그린은 이러한 불리한 전황 속에서 놀라운 지연 작전을 펼치며 반격을 모색하게 된다. 너새니얼 그린은 로드 아일랜드 출신으로 AD 1774년부터 민병대 활동을 시작했고 이듬해인 AD 1775년 5월에는 보스턴 포위전을 위해서 조직된 로드 아일랜드 감시군(Rhode Island Army of Observation)에 소속되면서 대륙군의 준장으로 임명되었고 보스턴이 탈환된 이후 보스턴 사령관으로 임명받았으며 AD 1776년 소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너새리얼 그린은 AD 1776년 조지 워싱턴의 뉴욕 전역과 뉴저지 횡단 퇴각에 동참했고 트렌턴 전투(Battle of Trenton)에서 대륙군의 두 부대 중 하나를 지휘하며 승리에 기여했다. 그 뒤로도 조지 워싱턴의 대륙군이 AD 1777년 필라델피아를 상실하고 포지 계곡으로 물러난 뒤 이듬해 AD 1778년 3월 병참감이 되었고 뛰어난 일처리로 조지 워싱턴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너새리얼 그린은 야전 지휘를 선호했고 이에 AD 1778년 6월에 벌어진 몬머스 코트하우스 전투(Battle of Monmouth Courthouse)에서 우익을 지휘하며 승리에 일조했다. 하지만 같은 해 8월 프랑스 군과 연합하여 벌인 로드 아일랜드 탈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더욱이 군 행정에 대한 대륙회의의 간섭을 두고 충돌하면서 병참감 직을 사임했으나 캠던 전투에서 호레이쇼 게이트가 패배하자 그를 대신하여 같은 해 10월에 남부 지역의 대륙군 재건을 위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킹스마운틴 전투의 승리

 

그동안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대륙군 잔존 병력은 북쪽의 노스 캐롤라이나로 후퇴하였고 그 뒤를 배내스터 탈턴의 영국군이 뒤쫓았다. 그는 매관매직이 성행하는 영국군 내에서도 오로지 실력으로 승진을 거듭한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AD 1780년 5월 29일에 벌어진 왁스호 전투에서 에이브러햄 뷰포드의 대륙군을 격파했으나 항복하려는 포로까지 살해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미국인들에게 '블러디 탈턴(Bloody Tarleton)'이나 '블러디 밴(Bloody Ban)'으로 불리며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실제로 배내스터 탈턴이 전투 의사를 포기한 미국인들을 학살했는 지는 불분명하지만 미국 내부에서 영국군에 대한 반감이 더욱 커지게 된 것은 분명하였다.

이후 AD 1780년 10월 7일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대륙군 측 애국파 민병대와 영국군 측 왕당파 민병대 사이에서 벌어진 킹스 마운틴 전투(Battle of Kings Mountain)에서 애국파 민병대가 승리했다. 이로 인해 후방이 위험해지자 찰스 콘월리스도 노스 캐롤라이나로 진격하는 것을 잠시 연기해야 했다. 이 때문에 킹스 마운틴 전투는 남부 지역에서 대륙군 측이 거둔 결정적인 승리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된다. 다만 애국파 민병대들은 왁스호 전투에서 배내스터 탈턴이 벌인 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그들 역시 항복하려는 왕당파 민병대에게 '탈턴의 자비(Tarleton's Quarters)'라며 계속해서 공격하여 무참히 살해해 버렸다.

 

 

너새리얼 그린의 지연 작전

 

너새리얼 그린이 남부 지역에 도착했을 때 남부 지역의 대륙군은 찰스 콘월리스의 영국군에 비해서 질적과 양적으로 모두 형편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전황이 암울하기 그지 없었다. 비록 킹스 마운틴 전투의 승리 덕분에 찰스 콘월리스의 영국군이 노스 캐롤라이나로 진격해 오는 것은 잠시 저지했으나 여전히 영국군이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너새리얼 그린이 가지고 있는 병력은 2,307명에 불과했으나 이는 서류상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그보다도 더 적은 1,482명에 불과했다. 더욱이 그 중에서 정예군이라고 할 수 있는 메릴랜드 출신의 대륙군은 949명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2월 3일 노스 캐롤라이나의 샬럿에 본부를 마련한 너새리얼 그린은 영국군을 상대로 정면대결을 벌이는 것은 무모하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부대를 둘로 나누어 영국군도 분산되도록 유도하는 작전을 구상하였다. 이를 위해서 대니얼 모건에게 한 부대를 맡겨 카토바 강 서쪽을 담당하게 했고 나머지 병력을 자신이 직접 이끌며 영국군을 기습하거나 유인하여 함정에 빠뜨리는 방법으로 상대하였다. 너새리얼 그린의 의도는 자신의 부대가 영국군의 발목을 잡고 있는 동안 북부 지역에서 증원군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너새리얼 그린의 지연 작전이 적중하면서 AD 1780년 말부터 이듬해인 AD 1781년 초까지 찰스 콘월리스의 영국군은 너새리얼 그린의 부대와 무려 15차례나 전투를 벌였지만 완벽하게 제압하지 못한 채 소모전만 되풀이했다. 비록 찰스 콘월리스의 영국군은 총 규모가 4,000명 정도가 되었지만 여기저기 분산되어 전투를 벌이는 너새리얼 그린의 대륙군을 상대하기 위해 자신들도 이곳 저곳에 분산 배치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연전을 펼치는 너새리얼 그린의 부대를 뒤쫓느라 찰스 콘월리스의 영국군도 매우 지쳐버렸다.

 

너새리얼 그린의 지연전술은 프랜시스 마리온의 유격전까지 더해지면서 그 효과가 더욱 커졌다. 프란시스 마리온은 일부 흑인까지 포함된 수십 명의 민병대를 이끌고 영국군의 소규모 정찰대와 보급대를 습격하며 괴롭히기 시작했다. 특히 프랜시스 마리온은 후퇴시 늪지대 사이를 자유자재로 이용하여 지형지물에 익숙하지 못한 영국군을 조롱하였는데 이러한 모습 때문에 영국군은 프랜시스 마리온에 '늪지의 여우(Swamp Fox)'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였다. 프란시스 마리온은 맬 깁슨 주연의 영화인 <패트리어트-늪 속의 여우(원제 The Patriot, 2000)>의 바탕이 되었다.

 

 

카우펜스 전투의 승리

 

한편 너새리얼 그린과 함께 남부 지역의 대륙군을 지휘하게 된 대니얼 모건은 프렌치-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 AD 1754년 ~ AD 1763년)에 종군한 적이 있어 전투 경험이 많았고 미국 독립 전쟁이 시작된 이후에는 AD 1775년의 보스턴 포위전에 참여했으나 같은 해 말 퀘벡 전투(Battle of Quebec)에서 대륙군이 패배하면서 영국군의 포로로 붙잡혔다가 AD 1777년 1월 포로 교환을 통해서 석방되었다. 그리고 500명의 소총병 부대를 지휘하며 새러토가 전투의 승리에 기여했지만 건강 상의 이유로 AD 1779년 잠시 전역해야 했다. 하지만 1년 뒤 준장으로 복귀하였고 이제 남부 지역에서 너새리얼 그린을 보좌하게 된 것이었다.


대니얼 모건은 메릴랜드 출신의 대륙군 400명과 대부분 버지니아 민병대 200명이 합쳐진 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노스 캐롤라이나의 브로드 강과 패콜릿 강 사이를 방어하였다. 그리고 조지아와 사우스 캐롤라이나 출신의 민병대 소수가 새롭게 합류하였다. 그 사이 찰스 콘월리스는 노스 캐롤라이나에 대한 진격을 계획했지만 킹스 마운틴 전투(Battle of Kings Mountain)의 패배로 잠시 연기해야 했다. 이제 대니얼 모건의 대륙군이 찰스 콘월리스의 영국군의 좌익을 위협하기 시작했고 향후 대니얼 모건이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나인티 식스를 공격할 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정찰 정보까지 전해지자 AD 1781년 1월 2일 26살의 배내스터 탈턴에게 드라군 및 기병대를 이끌고 나인티 식스로 가도록 했다.

 

배내스터 탈턴은 나인티 식스에 도착한 뒤 대니얼 모건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를 뒤쫓기 시작했고 찰스 콘월리스로부터 추가 병력도 지원받았다. 그러자 대니얼 모건은 찰스 콘월리스와 배내스터 탈턴 사이에 포위되는 것을 우려하여 북쪽으로 후퇴했다. 하지만 1월 16일 대니얼 모건은 겨울 홍수로 물이 불어버린 브로드 강을 건너는 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이미 배내스터 탈턴이 바짝 뒤쫓아 오고 있었기 때문에 야간에 근처의 소 목장인 '해너스 카우펜스(Hannah's Cowpens)'로 부대를 이동시켜 전투를 벌이기로 결심했다.

그 뒤 배내스터 탈턴이 1월 17일 새벽 3시에 도착함에 따라 야간 전투로 '카우펜스 전투(Battle of Cowpens)'가 시작되었다. 저돌적인 성격이었던 배내스터 탈턴은 휘하 병사들이 오랜 추격으로 굶주리고 지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착한 직후 두 개의 언덕을 먼저 장악하고 있던 대니얼 모건의 대륙군에 대한 돌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대니얼 모건이 종심 방어진을 편성하여 영국군이 펼친 돌격의 위력을 반감시켰고 영국군의 돌격이 둔화되자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여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카우펜스 전투는 킹스 마운틴 전투와 함께 영국군의 노스 캐롤라이나 진격을 막아내고 대륙군이 사우스 캐롤라이나를 탈환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한 결정적인 전투로 평가된다.

 

 

길퍼드 코트하우스 전투의 선전

 

카우펜스 전투의 패배 소식에 다급해진 찰스 콘월리스는 서둘러 너새리얼 그린의 대륙군을 격멸하기 위해서 나섰다. 이에 너새리얼 그린이 후퇴하면서 댄 강까지의 경주가 벌어졌으나 찰스 콘월리스는 카우펜스 전투에서 상당 수의 경보병을 상실했고 보급도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에 너새리얼 그린이 먼저 강물이 불어난 댄 강을 무사히 건너 안전한 버지니아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찰스 콘월리스도 힐즈브러에서 숙영지를 편성한 후 물자를 징발하였다. 그리고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왕당파를 징집하려고 했으며 이미 영국군의 세력이 많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여의치 않았다.

AD 1781년 3월 14일 찰스 콘월리스가 딥 강의 요새에 머물고 있을 때 너새리얼 그린이 버지니아와 메릴랜드에서 새롭게 모집한 병력 약 4,500명과 함께 노스 캐롤라이나의 그린스보로 근처의 길포드 코트하우스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비록 찰스 콘월리스가 당장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2,100명에 불과했지만 전투를 결심하고 길포드 코트하우스로 향했다. 하지만 이미 너새리얼 그린도 수비 태세를 굳건히 하고 있었기 때문에 3월 15일 벌어진 길포드 코트하우스 전투(Battle of Guilford Court House)는 90분 간의 비교적 짧은 전투 시간에 비해서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비록 한 때 대륙군이 승기를 잡는 듯이 보이기도 했지만 영국군 포병의 무차별 사격과 배내스터 탈턴의 기병대의 돌격 덕분에 전황이 역전되었다. 이렇게 하여 길포드 코트하우스 전투는 영국군의 승리로 끝났으나 정작 피해는 영국군 측이 더 컸다. 너새리얼 그린이 AD 1780년 전임자인 호레이쇼 게이츠가 캠던 전투에서 당했던 큰 피해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전황이 불리해지자 과감하게 병력을 철수시켰던 덕분이었다. 길포드 코트하우스 전투에서 대륙군의 피해는 총병력 4,500명 중 264명에 불과했으나 영국군은 총 병력 2,100명의 4분의 1이 넘는 526명의 병력을 상실했다.

 

찰스 콘월리스의 철수와 남부 지역 전역의 종식

 

찰스 콘월리스는 길포드 코트하우스 전투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가용할 수 있는 병력 숫자가 약 1,500명 정도로 줄었기 때문에 더 이상 단독으로 남부 지역에서 대륙군을 상대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찰스 콘월리스로서도 버지니아로 북상하여 그 곳에서 활동 중인 윌리엄 필립스 및 대륙군의 배신자인 베네딕트 아놀드의 군대와 합류하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노스 캐롤라이나 점령을 포기하고 월밍턴 해안으로 이동하였다가 버지니아의 피터즈버그로 철수하였다. 이로서 노스 캐롤라이나는 물론 사우스 캐롤라이나와 조지아 등의 남부 지역 전역이 대륙군의 수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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