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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1세, Napoléon, 유럽 민족주의 촉진, 영웅 또는 전쟁광, 나폴레옹 법전

Jobs 9 2025. 3. 16.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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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은 유럽인들에게 '고대 로마제국의 굴레에 얽매일 필요가 없으며 누구라도 능력만 있으면 황제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을 가르쳐 주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스 제1제국 초대 황제

 

나폴레옹 1세

Napoléon I

 

출생

1769년 8월 15일

프랑스 왕국 아작시오

(現 프랑스 코르시카 코르스뒤쉬드주 아작시오)

사망

1821년 5월 5일 (향년 51세)

영국령 세인트헬레나 롱우드

재임기간

프랑스 통령정부 제1통령

1799년 11월 9일 ~ 1804년 5월 18일

재위기간

프랑스인의 황제

1804년 5월 18일 ~ 1814년 4월 11일

이탈리아 국왕

1805년 3월 17일 ~ 1814년 4월 11일

프랑스인의 황제 (복위)

1815년 3월 20일 ~ 1815년 6월 22일

 

 

나폴레옹 1세, Napoléon

 

 

말 위에서 도시를 살펴보는 황제를 — 그 절대정신을 — 나는 보았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나폴레옹의 생애는 1천 년 내 가장 비범했다. 그는 분명 위대하고 특출한 인물로서 생애만큼이나 자질도 비범했다. 그는 확실히 내가 본 인간 중에서 가장 대단했고, 우리 세대에 살았던, 아니 여러 세대 동안 살았던 인간 중 가장 놀라운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

 

 

유럽 전통 무너뜨린 나폴레옹

 

나폴레옹은 왜 위대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나폴레옹이 황제에 대한 유럽인들의 인식을 확 바꾸었다는 점이다. '황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문제에서 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루었다. 

 

대혁명으로 건설된 프랑스공화국의 황제로 취임하기 35년 전인 176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코르시카섬에서 출생했다. 프랑스보다는 이탈리아에 더 가까운 이 섬은 이전에 페니키아·로마제국·이슬람세력·제노바 등의 식민지였다. 지중해의 정치판도가 바뀔 때마다 섬의 식민 지배자도 바뀌었던 것이다.

 

제노바 공화국은 지금은 이탈리아의 일개 도시에 불과하지만, 16세기까지만 해도 지중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해상강국이었다. 나폴레옹이 출생하기 1년 전인 1768년까지만 해도, 코르시카의 주인은 제노바였다. 나폴레옹이 엄마 뱃속에 생기던 해에 섬의 식민 지배자가 제노바에서 프랑스로 바뀌었던 것이다.

 

프랑스 식민지의 백성으로 태어났으므로, 언뜻 생각하면 나폴레옹은 프랑스에서 출세하기보다는 프랑스를 상대로 독립운동을 했어야 한다. 그도 한때는 코르시카 독립운동 쪽으로 '살짝' 기운 적이 있다. 하지만, 잠깐이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프랑스에서의 출세를 생의 목표로 삼았다.

 

식민지 청년이 25년 만에 본국의 황제가 되다니 

 

로마제국의 계승자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칭호, '황제'

 

유럽에서는 황제 칭호는 로마제국의 계승자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는 로마제국 멸망 이후 유럽 최강대국들이 로마제국 계승권을 내세우면서 패권을 행사한 데 따른 전통이었다.

 

동로마제국·서로마제국·프랑크왕국·신성로마제국 군주가 황제 칭호를 사용한 것은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로마제국의 법통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의 계승자가 황제 칭호를 사용하고 여타 국가들은 그 계승자를 중심으로 형식상으로나마 통합되는 것이 유럽의 오랜 전통이었다. 유럽인들에게 있어서 로마제국의 기억은 이처럼 강력한 것이었다.

 

'하나의 유럽' 출범을 가능하게 한, 로마제국의 전통 

 

"그렇다면 '오스트리아 황제'란 표현이 서양사 서적에 자주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할 수도 있다. 유럽의 역사학자들 중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습관적으로 오스트리아 황제로 부르는 이들이 있다. 신성로마의 영역이 독일·오스트리아였고 그때만 해도 독일보다는 오스트리아의 비중이 컸으며 나중에 신성로마가 오스트리아로 연결되었다는 인식에서 습관적으로 그렇게 부를 뿐이다.

 

"그럼 러시아제국(제정 러시아)이 황제 칭호에 상응하는 차르란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할 수도 있다. 러시아 군주가 차르 칭호를 사용한 것은 러시아가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법통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차르(tsar)란 표현 자체도 시저(카이사르, caesar)에서 나온 말이다.

 

러시아를 몽골제국으로부터 해방시킨 이반 3세(1440~1505년)가 동로마제국 황제의 조카를 부인으로 맞이했기 때문에, 러시아 입장에서는 로마제국 계승권을 주장할 '건더기'가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까지도 로마 계승권을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은, 로마제국의 그늘이 유럽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잔존했는지 잘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날 유럽이 여타 지역보다 신속히 역내 통합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도 오랜 통합의 전통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유럽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창설을 추진했고 이를 발판으로 1993년에 유럽연합(EU) 결성까지 이룩했다. 이는 오랫동안 로마제국 계승자를 중심으로 역내 통합을 유지해온 역사적 전통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로마제국의 마지막 계승자인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된 1806년부터 유럽연합이 결성된 1993년까지의 시간적 간격은 '불과' 187년간이다. 유럽인들에게 있어서 '유럽이 통합되지 않은 시간'은 전체 유럽 역사에서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로마제국 '정통성' 무시하고 황제가 된 최초의 유럽인 

 

이처럼 유럽에서는 로마제국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지 않고는 황제 칭호를 사용할 수 없었다. 로마제국의 정통성과 거리가 멀었던 프랑스 군주들이 황제 칭호를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프랑스왕 프랑소와 1세(재위 1515~1547)가 한때 황제 자리에 도전하기는 했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선거에 출마했을 뿐이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왕국이 형식상으로나마 신성로마제국 밑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로든 로마제국의 후예임을 자처하지 않고는 황제가 될 수 없었던 유럽. 이런 유럽의 전통을 일거에 무너뜨린 인물이 바로 나폴레옹이었다. 그는 로마제국의 정통성을 무시한 상태에서 황제 자리에 오른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로마 계승권을 주장할 만한 '건더기'가 있었다면 그도 그랬을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그런 명분이 없었다. 또 그는 그럴 필요도 없었다. 대혁명으로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이 어수선한데다가 그 자신이 불세출의 군사적 업적으로 세상을 감탄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상태에서 당당히 황제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황제 즉위가 갖는 상징성을 극대화시키고자 쇼를 연출했다. 로마교황 비오 7세를 황제 대관식에 초청해놓고는 일부러 망신을 준 것이다. 대관식 장소인 노트르담 성당에 비오 7세가 먼저 가서 기다리게 해놓고는 자신은 뒤늦게 나타난 것이나, 교황이 왕관을 씌워 주려 하자 얼른 빼앗아 스스로 왕관을 쓴 것 등은 자신의 황제 즉위가 기존 전통을 파괴하는 혁명적 사건임을 보여주기 위한 연출이었다.

 

"구시대의 전통은 언제라도 깨질 수 있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다는 뉴스를 듣고 가장 불쾌했던 인물은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프란츠 2세였다. 그는 소식을 듣고 순간적으로 화를 벌컥 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보더니 "아, 그랬구나!" 하면서 자기 무릎을 쳤다고 한다. 로마제국과 관계없이도 황제가 될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한 것이다.

 

안 그래도 신성로마제국을 유지하기 벅찼던 프란츠 2세는 자신이 관할할 수 있는 영역만을 떼어내서 스스로 오스트리아 초대 황제가 되었다. 이로써 신성로마제국은 해체되었다. 1806년의 일이다. 2000년 이상 유럽을 지배하던 로마제국의 정통성은 이렇게 나폴레옹에 의해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유럽에서는 로마제국과 관계없이 황제 칭호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유럽인들에게 '고대 로마제국의 굴레에 얽매일 필요가 없으며 누구라도 능력만 있으면 황제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을 가르쳐주었다. 구시대의 전통은 언제라도 깨질 수 있는 것이며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는 자만이 자기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나폴레옹은 가르쳐주었다.

 

"황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 앞에서 나폴레옹 이전의 사람들은 "로마로 가야 한다"고 답했다. 어떤 형태로든 로마제국과 관련성을 맺어야 한다는 뜻에서였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능력만 있으면 그냥 이 자리에서도 할 수 있다"고 답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룬 인물이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이탈리아계 프랑스인으로, 프랑스 왕국의 변두리였던 코르시카 섬에서 변호사의 자녀로 태어나 프랑스에서 최하위 군사학교인 브리엔 군사학교에 입학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1789년 프랑스 혁명의 혼란한 시대 속에서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통해 프랑스 혁명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이후 1799년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를 통해서 프랑스 제1공화국의 통령으로 집권하였다. 이후 35살에 황제에 올라 혁명을 퇴보시켰지만, 동시에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서 프랑스 혁명을 통해 수립된 자유주의 이념을 유럽에 전파시켰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정복 활동은 유럽의 민족주의를 촉진하여, 19세기부터 오늘날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프랑스어 이름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보나파르트는 이름이 아니라 성씨이고, 나폴레옹이 이름이다. 이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전체 이름을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으로 표기하는 실수를 저지르곤 했다. 다만 서적 등에서는 보나파르트로 적는다. 아마도 이름 + 성씨 구조의 서양식 작명을 몰라서 그랬거나 황제가 되면서 이름인 나폴레옹으로 불렸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유럽 군주의 명칭은 일반적으로 이름이 왕명이 되고 성씨는 왕조의 명칭이 되기 때문이다. 황제가 되기 전에는 당대에 보나파르트라고 불렸다.

 

이탈리아어 이름은 나폴레오네 디부오나파르테(Napoleone di Buonaparte). '나폴레오네'로 쓰든 프랑스어인 나폴레옹으로 쓰든 이름의 뜻은 '황야의 사자'이다. 그러나 그가 그의 이름을 코르시카 사투리로 발음하면 ‘라 파이유 오 네(La paille au nez. 코에 박힌 지푸라기)'로 들려 많은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이름은 멋지지만, 성씨 부오나파르테(보나파르트)는 게르만족 롬바르드족의 성씨 보니파르트가 어원으로서 영어로 하면 Good Part(좋은 부분)라는 뜻이다.

 

프랑스 황제로서의 칭호는 나폴레옹 1세. 프랑스 제국의 황제위 요구자들 또한 '나폴레옹 ~세' 라는 명목상의 칭호를 대대로 쓰고 있다. 이탈리아 국왕으로서의 칭호는 나폴레오네 왕인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탈리아 왕국을 포함한 여러 이탈리아계 국가의 군주들 중 유일하게 이름이 나폴레오네였기 때문에, '나폴레오네 2세' 라는 이름의 군주가 배출되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이탈리아에서의 칭호가 '나폴레오네 1세' 가 되는 일은 이탈리아의 군주제가 부활해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유럽에서 군주는 이름으로만 부르는 것이 원칙이고 성까지 부르면 그 사람을 군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도가 깔려 있기 때문에, 그가 황제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전제 하에서는 성을 빼고 나폴레옹, 혹은 나폴레옹 1세로만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 실제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나 영어, 프랑스어 위키백과의 표제어는 나폴레옹 또는 나폴레옹 1세로 되어 있다. 반면 나폴레옹을 적대하던 유럽 각국에서는 황제 즉위 뒤에도 그를 보나파르트라고 부르는 일이 많았으며, 황제 즉위 이전의 활동이나 생전 퇴위 등의 영향 때문인지 현대 시점에서도 성을 붙여서 부르는 경우가 많다.

한문으로는 음차하여 나파륜(拿破崙)이라고 표기한다. 한국에는 나폴레옹의 음차가 '나팔륜'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일반적으로 '破'는 한국어로 '파'라고 읽지 '팔'이라고 읽지는 않는다.




생애

 

유년기

 

나폴레옹은 1769년 8월 15일 코르시카에서 카를로 부오나파르테의 아들로 태어났다. 코르시카가 1768년까지 제노바의 지배하에 있었던 만큼 나폴레옹의 집안은 이탈리아 혈통으로 랑고바르드족에서 내려온 토스카나 출신 부오나파르테(Buonaparte) 가문의 후예였다.

그당시 귀족이 대체로 그렇듯이 나폴레옹은 어린 시절부터 유년 사관학교에 보내졌다. 물론 코르시카에서는 나폴레옹의 집안도 명문가였지만, 이 시기 사관학교는 프랑스 혁명 이전 대귀족 자제들의 경연장이었다. 당연하게도 코르시카라는 벽촌 출신의 하급 귀족 자제에 지나지 않았던 그는 사관학교에서는 우스꽝스러운 코르시카 사투리를 쓰는 촌놈으로 놀림을 받았다. 동기들에게도 죄다 무시당했는데, 유일하게 동기생 중 브리엔이라는 학생이 그와 친하게 지냈고, 이 인연으로 브리엔은 밑에서도 서술하듯이 나폴레옹의 부관이 된다. 이 시절에는 괴롭힘도 당하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반항심으로 더욱 독하고 끈기있게 자라난 듯하다.

물론 프랑스 본토에서도 상류층인 귀족 자제들만 모인 사관학교 내에서는 촌동네 출신이라 상대적으로 없어 보였을 뿐, 코르시카에서 부오나파르테 집안은 잘나가는 명문가 집안이다. 그러나 명문가임에도 집안 재산이 아주 넉넉하지 않았고, 그런 와중에 집안 가장인 아버지가 프랑스 정부로부터 뽕나무밭 운영을 이유로 9,000프랑에 달하는 농업 보조금을 받은 뒤 위암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나폴레옹의 학창 시절 보나파르트 가문은 거액의 부채에 시달리며 경제적으로 크게 몰락했다. 때문에 나폴레옹 본인도 어머니를 도와 학업과 집안일을 병행하느라 좀 꾀죄죄한 옷차림을 하는 등 따돌림을 당할 만한 면은 있긴 했다. 그래서 그런지 하급 장교 시절 말 많고 월세를 독촉하던 하숙집 여주인과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 황제로 즉위한 뒤에 다시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이때도 하숙집 주인은 나폴레옹을 몰라봤다고 한다.

하지만 확실히 군사적 재능은 일찍부터 있었다. 일화에 따르면 한번은 폭설이 내렸고, 유년학교 재학생들은 두 편으로 갈려 눈싸움을 하게 되었는데, 나폴레옹의 편은 몰리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자기 편이 위기에 몰리자 스스로 지휘관을 자처하여 "지금 상황이 긴박하니 내가 우리 편을 지휘하겠다. 이쪽에 있는 사람들은 눈덩이를 뭉치기만 하고 나머지는 눈덩이를 던지기만 하라. 내가 가리키는 쪽을 집중적으로 공격해라."하며 자기편을 이끌었다. 나폴레옹은 선택과 집중을 이용하여 적을 무너뜨리고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부터 유년 학교에서 나폴레옹의 이름은 크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의 학업 성적은 졸업 석차만 보면 58명 중 42등으로 낮은 편이었지만 이 성적은 나폴레옹이 1학년 때 3학년들과 경쟁한 성적이다. 나폴레옹은 학교 생활 중 아버지 샤를이 위암으로 39살의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가장을 맡아야 했는데, 이 상황에서 1학년에 3년 과정을 마스터하고 시험을 통과한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포병은 수학과 물리 지식이 상당히 요구되었고, 마침 그가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흥미를 느끼는 과목도 수학과 지리학이었다. 그가 단순히 군사적 재능만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후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길 수 없었을 것이다.

나폴레옹 본인은 사실 육군이 아닌 해군에 지원하고 싶어했다. 그 유명한 라페루즈 백작의 항해에도 참가 직전까지 갔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설득으로 해군 지원을 그만두고, 왕립 포병 군단에 들어가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이후 어마어마한 사건이 발생해서 해군이 재기불능 수준으로 완전히 박살나버린다는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묘한 일.

초급 장교 시절에도 손에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하며 쥐꼬리만한 월급의 상당 부분을 책을 사는 데에 소비했다고 한다. 그러나 순전히 자기 개발을 위해서 책을 읽은 것은 아니고, 연애 소설 등도 꽤나 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젊은 시절에 루소의 광팬이었음은 자인한 바 있고, 심지어 심취해서 연애 소설을 쓰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 샤를이 부관으로 재직하면서 잘 알던 코르시카 독립운동의 거물인 파스콸레 파올리(1725년 ~ 1807년)와 갈등을 빚게 된다. 파올리는 코르시카 해방군을 조직해 코르시카를 착취한 제노바로부터 코르시카를 해방시킨 독립운동가로, 제노바로부터 해방되자마자 제노바로부터 코르시카를 구매한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운동이 무력으로 막히자 영국으로 망명했으며, 샤를이 요절한 뒤 프랑스를 증오하는 친영파로써 코르시카에 돌아왔다. 그는 프랑스 총독과 사이좋게 지내던 전 부관 샤를에 대하여 배신감을 느껴 보나파르트 가를 박대했고, 이에 파올리를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한 나폴레옹 일가는 파올리가 딴마음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프랑스 혁명정부에 알리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이 사실이 파올리에게 발각되자, 이는 친 파올리파와 친 프랑스파간의 전면전을 불러왔고, 지지세력면에서 상대가 되지않던 나폴레옹 일가는 결국 완전히 코르시카를 완전히 포기하고 프랑스로 가게 된다.

여담으로, 이후 파올리는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자신을 대통령으로 하는 공화국 정부를 수립하려 했지만, 실질적인 지배자인 영국은 이곳에 코르시카 왕국을 세웠고, 이 왕국의 국왕은 당연히 파올리가 아닌 영국왕 조지 3세였다. 하지만 이미 영국은 툴롱 전투에서 툴롱을 잃고 스페인까지 프랑스 혁명정부와 화친한 마당에 코르시카를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군대를 철수시켰다. 결국 파올리는 영국으로 망명할 수 밖에 없었고, 그곳에서 사망했다. 파올리는 이탈리아(= 제노바 공화국)로부터 코르시카를 독립시켰지만, 정작 본인은 코르시카가 이탈리아의 일부라고 주장하며 코르시카어를 억압하고 이탈리아어를 권장했으며, 또 자신은 공화주의자였지만 정작 프랑스 공화국에서 탈퇴한 결과로 영국왕을 섬기는 식민지 왕국을 세우게 된 아이러니한 인물이다. 그래도 그 역시 코르시카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위인이었던 만큼, 코르시카에는 파올리의 흉상이나 추모비가 세워져 있으며 그 역시 위인으로 대우받고 있다. 사실 코르시카보다는 미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데, 미국 독립 전쟁을 준비한 독립운동가, 일명 자유의 아들들이 파올리가 제노바로부터 독립하고 세운 코르시카 공화국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군인

 

프랑스 혁명과 내전

 

1785년 16세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불과 4년 뒤인 1789년, 프랑스 혁명이 터진다. 나폴레옹은 휴직한 후 코르시카로 귀향하여 의용병 대대의 장이 되었다. 코르시카 의용병대의 대대장이 되면서 이 당시 나폴레옹의 계급은 중령(Lieutenant Colonel)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 이때 첫 실전이자 사고를 쳤는데, 1792년 2월 혁명 이후 정부로부터 교회에 대한 재산 몰수가 진행되며 코르시카 섬과 나폴레옹의 의용병대에게도 수도원 해산 지시가 내려졌다. 지역 신망이 두터웠으므로 아작시오 수도원에서 병사들과 이에 반대하는 지역 일꾼 및 백 사람들 간에 실랑이가 오갔는데, 그러던 중 오발 사고로 인하여 부하 소위 한 명이 죽게되었다. 이에 분노한 나폴레옹이 강경 진압을 하고자 코르시카에 주둔하고 있는 프랑스 정규군에게 지원과 탄약 증원을 요청하였으나 지휘관인 마이야르(Maillard) 중령이 이 요청을 거절하고 되려 의용병대 해산을 명령한다. 나폴레옹측은 이 명령을 무시하고 다음날 아침 의용병들과 교회에 쳐들어가 정문에서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고, 민간인들이 무차별적으로 죽게 된다. 여기까지도 문제가 많으나, 의용병대는 곧 나폴레옹의 통제에 벗어나 상점과 축가를 털며 약탈과 파괴를 하였다. 나폴레옹의 첫 출전이나 다름없던 이 사건은 처음으로 나폴레옹의 지휘 실책을 드러냈을 뿐 더러, 이 사건으로 당시 코르시카를 주름잡던 파올리에게도 반감을 사게 되었다.[

한편, 같은 달인 1792년 2월 프로이센 왕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이 프랑스를 침공해왔고, 시국이 이렇자 1792년 5월 28일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의용병들과 함께 파리로 복귀하고자한다. 나폴레옹은 휴직 기간을 한참 넘긴데다, 코르시카 의용병대로 머물던 중 앞서 말한 사고도 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복귀하면서 신변 보호와 변호 등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전쟁과 혁명으로 장교의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든 프랑스 정부는 복귀한 나폴레옹을 바로 대위로 임명하고 그해 7월 10일 4포병대대에 배속시킨다. 

한편, 1793년 1월 루이 16세가 처형되자, 유럽의 여러 군주제 국가들은 자국민들도 자극받아 혁명을 일으켜 왕정을 전복시키는 것을 두려워해서 대(對) 프랑스 전쟁을 벌이게 되었고, 프랑스는 홀로 영국, 합스부르크 제국, 프로이센 등의 군사강국과 맞서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혁명군 태반이 조직적인 군대경험이 없는 민병대 출신들이었고 고위장군들은 전부 귀족이라 도망가거나 사형당한 상태였다. 

이 와중에 나폴레옹이 몸담고 있던 프랑스 제1공화국 또한 내부의 분열이 심화되고 있었다. 온건파인 지롱드파와 과격파인 자코뱅파의 대립이 그것이었다. 1793년 5월 31일, 자코뱅파가 지롱드파를 쓸어버리게 된다.

그러자, 이에 반발하여 지롱드파가 많았던 리옹, 아비뇽, 님, 마르세유에서 반란이 터지고 만다.

이러한 혼란속에서 이번에는 툴롱에서 왕당파가 혁명파들을 쫓아내고는 영국군과 스페인군을 받아들인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이 바로 툴롱 포위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마침 그 직전인 1793년 6월, 나폴레옹과 그의 가족들은 코르시카의 실력자 파스콸레 파올리와의 의견 대립으로 코르시카를 탈출한 상태였다.

 

 

1793년 툴롱의 왕당파 반란 진압: 장군 승진

 

1793년 5월부터 지롱드파 의원이 체포된 이후로 각지에서 왕당파의 반란이 일어났다. 당시 프랑스 해군의 주요 기지이자 항구도시인 툴롱에서도 이 상황에 휩쓸려 영국 해군을 등에 업은 왕당파가 반란을 일으켰다. 코르시카를 탈출한 나폴레옹은 여기서 포병을 집중적으로 운용하는 전법으로 상륙한 영국군을 몰아내고 반란군을 진압했다.

나폴레옹이 지휘관이 된데는 기존의 장군, 제독들이 왕당파로 몰려 망명하거나 처형당해 많은 고급 장교 보직이 공석이 된 것도 한몫 하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나폴레옹이 대표적 정치군인이었다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자그마치 당시 자코뱅당의 총수였던 로베스피에르와 연이 닿아 있었다! 강철 낙하산 앙시앵 레짐과 거리를 두는 이 스탠스는 엄청난 변화를 가지고 온다.

 

 

포위전 참여

 

'툴롱 포위전' 이전의 나폴레옹은 장군은 커녕 부대 참모도 아니었고, 보케르라는 작은 도시에서 보급대를 이끄는 하급 지휘관이었을 뿐이었다.

이때, 나폴레옹은 '보케르에서의 저녁식사(Le Souper de Beaucaire)'라는 짧은 정치 팜플렛을 작성했다. '왕당파와 공화파가 서로 사상논쟁을 하다가 결국 공화파가 논쟁에서 이긴다'라는 내용의 이 팜플렛을 나폴레옹이 만든 이유가 혁명에 대한 지지 때문인지, 출세 목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양쪽 다였을 것이다. 하급장교 시절부터 나폴레옹이 혁명 지지자였던 것은 분명한 사실인 동시에, 프랑스를 지지하다 코르시카에서 쫒겨난 나폴레옹에게, 이제 혁명은 출세를 위해선 불가분의 것이 되었다. 하지만 결국 이 팜플렛은 나폴레옹이 공화정을 종식시키고 황제가 된 다음에 전력을 다해서 없애려고 노력한 당대 최고의 금지 문건이 된다.

어쨌든 이 팜플렛을 보고 감탄한 인물이 등장했으니 오귀스탱 드 로베스피에르(1763~1794), 즉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의 동생이다. 이 오귀스탱 드 로베스피에르가 나폴레옹의 정치적 후견인이 되어준다. 한편 이 때 마르세유와 툴롱 지역의 파견의원은 코르시카 출신으로 나폴레옹과도 이전부터 안면이 있었던 앙투안 크리스토프 살리세티(Antoine Christophe Saliceti)였다. 당시 로베스피에르 파벌, 즉 산악당 소속이었던 살리세티는 마침 툴롱 포위전에 참전한 포병대 지휘관이 부상당하자 그 자리에 나폴레옹을 천거해서 낙하산으로 꽂아준다.

 

 

포위전 승리와 장군 진급

 

툴롱 포위전에서의 나폴레옹은 비록 총사령관이 아닌 포병지휘관으로 아직 영관급에 불과했지만, 엄청난 열의를 가지고 보급와 훈련 등 포위군의 총체적인 개선에 나섰다. 전술적 재능 역시 본격적인 첫 전투인 이 때 이미 발휘되어, 해안가에 분산된 반혁명 연합군 방어선의 약점을 간파하고, 포병대를 해안에 전진배치해 연합군 함대를 봉쇄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포위전을 총지휘한 혁명군 사령관들은 군사적 자질이 아니라 정치적 충성도에 의해 임명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나폴레옹의 활약을 궁극적인 승리로 이끌어 낼 능력이 없었다. 첫번째 사령관인 카르토는 화가였으며 연합군 요새에 대해 무모한 보병 돌격을 감행하다 실패했고, 결국 오귀스탱 로베스피에르라는 든든한 연줄을 가진 나폴레옹이 그를 비난하는 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하자 소환되었다.

교체된 사령관은 도페 장군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잠깐이나마 군대 경험은 있었지만 그건 10대 시절의 일이었고, 그의 직업은 내과 의사였다. 그는 최음제나 일종의 기 치료법 같은 걸 주로 시술했고, 심지어 피 공포증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던 걸 볼 때 돌팔이 의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역시나 '정치적으로 안전'한 인물이기 때문에 임명되었으나, 역시나 군사적 재능은 전무했고, 임명된 지 며칠도 지나지 않아 '질병을 이유로' 사임했다.

마지막으로 임명된 뒤고미에 장군은 직업군인이었으며, 나폴레옹의 능력과 그가 제시한 작전을 인정하고, 파리의 혁명정부에 추천서를 보내주었으므로, 나폴레옹은 툴롱 포위전을 사실상 지휘하게 된다. 사실 이전 지휘관들이 무능했던 것은 나폴레옹에게는 천운이었는데, 이로 인해 그의 능력이 상대적으로 돋보였고, 그의 계급보다 더 많은 실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그의 공적을 인정받아 불과 몇 달의 기간중에도 지속적으로 승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나폴레옹의 전략이 맞아들어가서 그가 배치한 포대의 포격을 버티지 못한 연합군은 결국 혁명군의 포대를 파괴하려 무모한 공격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오히려 역공을 가한 혁명군에게 툴롱을 점령당하게 된다. 영국 해군은 대부분 도망가는 데 성공했으나, 영국 육군과 스페인, 이탈리아군은 대부분 항복하여 포로로 잡히게 된다. 이후 혁명군이 미처 도망가지 못한 왕당파를 학살하였는데, 나폴레옹은 이에 참여하지 않았다.

한편 포위전 승리의 공로로 나폴레옹은 장군으로 진급할 수 있었다. 이후 오귀스탱 로베스피에르는 파리 수비 사령관을 제안했으나, 나폴레옹은 이를 거절하고 '이탈리아 방면 포병 사령관'을 맡았다.

 

 

1794년 테르미도르 반동

 

그런데 여기서 정치적 대격변이 벌어지는데, 테르미도르 반동이 일어나서 '국민공회(Convention nationale)'가 몰락한 것이다. 오귀스탱 드 로베스피에르는 형인 막시밀리앙, 동료인 생쥐스트 같은 이들과 단두대로 갔고, 나폴레옹은 자기가 자코뱅이 아니라고 변명해야 하는 처지로 몰렸다.

이때 한발 더 빠르게 움직였던 '살리세티'는 나폴레옹을 '자코뱅 주의' 혐의로 감옥에 집어넣었다. 나폴레옹의 부하들은 나폴레옹에게 탈옥을 권유했으나, 나폴레옹은 좀 더 기다리는 쪽을 선택했다. 그리고 투옥된지 2주 만에 살리세티에 의해서 풀려난다. 

하지만 목숨만 건진 상황이었고, 이탈리아 방면군으로 돌아갔지만 단지 부대참모로 왕따를 당하는 처지였다.

자코뱅 문제는 이후에도 꾸준히 남아서 코르시카 원정군 참여 요청을 해봤으나 거절당했고, 방데 전쟁 진압에 참여하라는 정부의 요청은 나폴레옹이 거절하면서 나폴레옹은 직위해제당한다.

이전 서술에선 방데 지역을 뿌리 깊은 왕당파 지역이라 서술했지만 실제론 혁명 당시에 동참한 세력중 하나였다. 하지만 혁명 이후 해결되지 않는 경제 문제 정치적 혼란 등의 문제가 겹쳐 기존의 성직자 귀족에 어느 정도 회유되어 대항혁명 일종의 혁명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혁명의 방식에 대항하는 소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덕분에 방데 전쟁은 학살이라는 의견이 많이 나왔지만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여전히 학살로써는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

 

 

바라스와의 인연

 

이 상황에서도 나폴레옹은 인맥을 만드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툴롱 포위전 이후 왕당파를 학살했던 대표적인 장군 중 하나이자 테르미도르 반동을 주도하여 실권을 잡은 권력자 바라스였다.

알려진 대로 바라스는 훗날 나폴레옹의 아내가 되는 조제핀의 내연남이었다.

이 시기에 나폴레옹은 형 조제프의 처제인 데지레 클라리(Desiree Clary)와 약혼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바라스와의 관계를 위해, 혹은 진정으로 조제핀을 사랑해서였는지는 모르지만, 조제핀과 결혼하게 되면서 클라리와 파혼하게 된다.

클라리는 이후,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와 결혼해서 스웨덴 왕비가 된다.

3.5. 1795년 방데미에르 13일의 왕당파 반란 진압

이런 나폴레옹을 복권시킨 것이 바로 방데미에르 13일 사건이다.

1795년 9월 아르투아 백작이 영국 육군과 해병대, 망명 귀족의 병력을 포함하여 약 3,000여 명을 이끌고 프랑스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친가톨릭-반혁명 왕당파들이 파리로 몰려들었고, 왕당파 시위대는 3만까지 그 숫자가 불어나게 된다.

이에 당시 중앙정부는 방데 전쟁 진압에 효과적으로 대처했다고 평가를 한 장 프랑수아 드 므누(Jean-François, baron de Menou, 1750~1810)를 진압사령관으로 임명했으나, 당시 파리의 병력은 5천이었고 므뉴는 이 상황이 어렵다고 본 것인지 원래 왕당파 성향이었는지, 타협안을 제시하고 미적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정부는 다시 므누를 파면 및 구속하고, 새로운 사령관을 임명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바라스였다. 나폴레옹은 바라스에 의해서 현장지휘관이 되었고, 므누에게 얻은 정보에 착안, 한 기병 장교를 시켜서 파리 외곽에 배치되어 있던 대포를 파리로 끌고 오게 된다. 이 기병 장교가 바로 '조아킴 뮈라'이다. 그리고 이렇게 끌고 온 40문의 대포를 튈르리 궁 인근 교차로에 배치해서 파리 시내에서 '포월(포도의 달, 방데미에르)'에 '포도탄'을 쏴대는 강경 진압을 시작했다. 이후 왕당파 시위대는 300여명의 사상자를 남긴 채 해산했고, 나폴레옹은 육군 중장 진급과 동시에 포도탄 장군이라는 멸칭을 얻게 된다.

왕당파의 시위는 단순한 폭력시위 정도가 아니었다. 차라리 쿠데타에 가까웠다. 왕당파 반군의 병력과 기세가 워낙 드세서 대포라도 쏘지 않는 이상 진압은커녕 혁명정부가 전복될 상황이었다. 나폴레옹은 혁명 초기의 카오스 속에서 있었던 굵직한 사건의 흐름을 통해 민중 봉기의 과격성과 이에 대한 강경 진압의 효과성을 알고 있었고 이를 십분 활용했다. 물론 성공해서 그는 다시 출세길을 걷게 되었다. 나폴레옹이 아니었다면 정통성과 안정성이 극히 취약했던 파리의 혁명정부(당시엔 총재정부)가 이때 전복되었을거라는 평가가 중평이다.

 

 

통령

 

이탈리아 원정: 성공

 

이 전공을 바탕으로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이 되어 1796년 이탈리아 원정에서 피에몬테군과 오스트리아군을 쳐부수고, 케라스코 조약으로 사르데냐 왕국의 사보이아와 니차를 빼앗았으며, 1797년에는 캄포포르미오 조약으로 프랑스는 오늘날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에 해당하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 이탈리아반도 북부 롬바르디아를 차지했다.

 

 

이집트 원정: 실패

 

나폴레옹은 인도에 식민지를 가진 영국을 견제하고자 이집트 원정을 원했고, 혁명정부도 나폴레옹의 인기가 높아지자 견제하려는 속셈으로 이를 수락한다. 사실 나폴레옹은 1797년 8월부터 영국을 항복시키려면 이집트를 점령해야 한다고 정부에 건의했으나, 1798년 3월 중순부터 본격적인 이집트 원정을 준비했고, 4월 14일 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이집트 원정은 1798년 5월 19일에 시작되었다. 350척의 함선과 5만 4,000명의 장병을 싣고 투롱 항을 떠난 것이 5월 19일이었으며, 나폴레옹은 이 원정의 목적이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 아일랜드를 점령하는 데 있다는 허위정보를 퍼뜨려, 영국의 넬슨 제독 함대로 하여금 지브롤터 해협을 지키게 했다.

그 사이에 나폴레옹은 몰타 섬을 점령한 후 이집트로 향했고, 6월 31일에는 알렉산드리아 항에 상륙하기 시작하여 카이로로 출발하였다. 7월 2일에는 당시 이집트를 장악하고 있던 맘루크 군대와 큰 접전을 벌였는데, 이 접전에서 나폴레옹은 휘하 장병들에게 이 피라미드 위에서 4,000년의 역사가 귀관들을 내려보고 있다고 격려했다. 다소 엉뚱해 보이는 나폴레옹의 연설같지만, 프랑스 원정군의 사기를 높이기에는 충분했고, 쉽사리 맘루크의 군대를 격파하며 이튼 날 카이로까지 승승장구하며 입성했다. 그러나 와중에, 프랑스 해군이 호레이쇼 넬슨의 영국 해군에게 박살나 퇴로가 끊기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오스만 제국이 이집트 재탈환을 위해 선전포고를 하게 되어, 요격을 겸해 내친 김에 시리아 원정까지 감행했으나 아크레 공방전에서 제자르 파샤의 수비에 막혀 결실없이 물러났다.

이 시점에서 이미, 새로운 알렉산드로스의 대제국을 재현하겠다는 나폴레옹의 원대한 목표는 사실상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는 나폴레옹의 목표가 지나치게 과대망상적이어서 그렇지, 프랑스 입장에선 이집트에서 영국을 몰아내 골치아프게 하겠다는 목표는 충분히 달성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적국인 영국이 나폴레옹에게 접근해 프랑스가 다시 오스트리아의 위협을 받게 되었고, 본토가 나폴레옹의 귀환을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정도였다. 결국 이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프랑스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물론 영국은 나폴레옹을 일단 이집트에서 치우는 것을 원했지, 그가 무사히 프랑스에 돌아가는 것을 바라진 않았으므로, 귀환길은 매우 위험했다. 나폴레옹은 클레베르에게 후임을 맡기고는 비밀리에 소수의 측근과 학자들만을 데리고 쾌속선을 통해 프랑스로 돌아오는데 성공했다. 한편 나폴레옹을 잃은 이집트 원정군은 몇달간 저항하다 결국 영국에 항복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오스만 제국은 물론이고 흑해에서 지중해로 남하하려는 러시아 제국에도 크게 자극을 주었으며, 이는 영국, 러시아, 오스만 투르크 세 나라의 반불 동맹을 맺게 되는 계기가 됐다. 러시아는 남부 이탈리아와 나폴리 왕국과 동맹을 맺고, 영국은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었다. 이리하여 1799년 봄부터 프랑스는 이집트 원정의 역효과로 제2차 반불 동맹 국가들과 전면적인 교전 상태에 들어가게 된 셈이다.

 

 

1799년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돌격을 알리는 북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무장 군인이 의사당을 점령했다. 총검이 500인회 의원들을 쫓아냈다. 저녁 7시경 원로원은 앞서 500인회가 결의한 나폴레옹의 추방을 취소하는 조건으로 보나파르트, 시에예스, 뒤코스의 3인으로 구성되는 임시 통령정부의 조직을 공포했다. 총재정부는 폐지되었고 새 통령들에게 행정권이 위임되었다. 루시앵은 30~40명의 500인회 의원들을 긁어 모아놓고, 원로원의 결정을 승인한 후 62명의 자코뱅파 의원을 제명하고, 12월 22일까지 6주간의 휴회를 결의했다. 밤 2시, 세 통령이 의회에서 공화국에 대한 충성을 선서했다.

이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라고 한다. 지난 1792년에, 혁명정부가 전쟁을 시작하면 혁명은 결국 군인 독재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리라던 로베스피에르의 말이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10년간의 혁명은 이제 한 군사 모험가의 지배로 그 막을 내렸다.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1789~1871》 p.207

 

귀국 직후 시에예스와 손잡고 1799년 11월 9일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뒤엎고 3명의 통령에 의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였다. 물론 나폴레옹이 제1통령을 맡았다.

 

 

 

종신통령 취임

당시 프랑스에는(산악파와 대비되는) 평원파(지롱드)라고 불리는 온건 부르주아들이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1년마다 정권이 바뀔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혼란을 종식시켜줄 영웅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나폴레옹 중심의 새 정부는 바로 인기를 얻었고, 곧이어 종신통령에 취임했다.

 

 

나폴레옹 법전 편찬

국민 교육 제도의 확립, 훈장 제도의 도입, 프랑스은행 설립 등이 이 시절의 업적으로 꼽히지만, 본인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은 나폴레옹 법전의 편찬이었다.

 

자유주의

또한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과 함께 자유주의가 널리 확산되면서 현재의 독일이나 스페인 등 프랑스에 점령당했던 지역을 중심으로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을 받은 급진세력이 급격히 성장하였다.

하지만, 이들 급진세력은 프랑스 혁명의 공화주의와 자유주의 이념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과는 별개로 자국을 짓밟은 침략·학살·약탈자였던 프랑스(와 나폴레옹)을 지극히 증오하였으며, 이는 내셔널리즘 이념이 나타나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 당시의 급진세력으로부터 나타난 공화주의, 자유주의, 내셔널리즘 이념은 19세기 유럽의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국민 국가(nation state)의 탄생을 불러온 원인이 되었다.

 

 

 

 

황제 즉위

 

오스트리아 격파

그 후 마렝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는 등 여러 차례의 승리를 거두고, 이러한 승리를 바탕으로 루네빌 조약과 아미앵 조약을 통해 일시적인 평화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의 인기는 크게 높아졌지만, 한편으로 나폴레옹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세속군주의 일원이 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1804년 황제 선포

 

그리하여 1804년,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고 교황에게 대관 받아 나폴레옹 1세에 등극한다. 자유, 평등, 연대를 가치로 내건, 소위 근대 공화정의 출발을 알렸다는 프랑스 혁명의 결과로는 좀 허무하지만, 지금과는 달리 유럽사의 흐름에서 보았을 때 황제의 존재와 공화정이 반드시 모순되는 것은 아니었다. '유럽 최초의 황제'로 불리는 로마의 아우구스투스가 기존의 로마 공화정을 겉으로는 부정하지 않고 로마 시민과 원로원과의 협치를 표면에 내세웠던 것처럼 나폴레옹은 명목상 프랑스 혁명의 공화주의를 부정하지 않았으므로 프랑스라는 나라를 사적으로 소유한다는 의미인 프랑스 황제 (Empereur de France)가 아니라 프랑스 국민의 지지로 황제가 되었다는 의미인 프랑스인의 황제 (Empereur des Français)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나폴레옹과 그를 지지하는 지식인들은 로마 공화정이 로마 제정으로 바뀐 것을 근거로 삼아서 제정의 성립을 합리화했다. 

안정적인 정권의 성립을 바라던 프랑스 국민들은 나폴레옹의 즉위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1804년에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에 관한 국민투표가 있었는데 찬성이 3,521,675표, 반대가 2,579표였다.

 

 

대관식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하며 거친 대관식에서 보인 행보도 많은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카롤루스 대제 이래로 교황이 주재하는 대관식을 통해 황제가 되려는 군주들은 로마로 건너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이 관을 머리에 씌워줬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자기가 로마에 가서 대관식을 거행한 게 아닌, 교황 비오 7세를 직접 파리까지 데려와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진행했을 뿐 아니라, 교황이 황제에게 부여해주는 관을 받지 않고, 자신이 직접 관을 집어 머리에 썼다. 위의 오른쪽에 있는 자크루이 다비드의 '황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 왕관을 쓰는 조제핀 드 보아르네의 그림'이 그 장면이다.

이 사건은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 이래 왕권신수설의 완전한 몰락, 즉 더이상 신의 권위로 정치를 행사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신성 로마 제국마저 붕괴시켜 왕권신수설을 완전히 종식시켰다. 

자크루이 다비드의 '황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 왕관을 쓰는 조제핀 드 보아르네의 그림

 

 

결과

나폴레옹은 자신의 황제 즉위를 프랑스 혁명과 모순되지 않는 것이라고 적극 홍보했지만, 그의 황제 즉위는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지지하던 이들에게 큰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 만민의 평등을 꿈꾸며 일어난 혁명이 곧 한 독재자의 황제 즉위를 위한 쿠데타가 된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때 느낀 충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베토벤이 그에게 헌정하려 했던 교향곡에 관한 일화이고,

두 번째는 점령지의 민족주의 자극이다.

나폴레옹은 황제로 즉위하여 혁명을 끝내고 기존의 지배질서에 스스로를 편입하려고 했지만 유럽의 정통 왕실들에게는 그저 찬탈로 보였다. 결국 나폴레옹은 계속 유럽 구체제 국가와 전쟁을 하게 된다.

 

 

베토벤, 헌정 교향곡 표지를 찢다

 

베토벤은 3번 교향곡을 나폴레옹을 위해 작곡했다. 그는 나폴레옹을 "가난한 사람들의 영웅"이라 칭했고, "나는 나폴레옹과 같이 독재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출판업자에게 보낸 초본에서, 그 첫 페이지에는 이런 말이 덧붙여져 있었다.

"이 교향곡을 정말로 보나파르트에게 헌정합니다."

그 당시만 해도 음악가들은 궁정에 소속된 하인이었다. 하지만 베토벤은 스스로를 하인으로 인정하기 싫어했다. 그는 자기가 작곡한 곡을 팔며 자유롭게 살고 싶어했다. 그는 이러한 모든 불합리를 나폴레옹이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황제로 즉위했다. 그리고 베토벤은 보나파르트라고 써 있는 표지를 확 찢어버렸다. 표지에 덧붙여진 말은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영웅 교향곡은 위대한 사람의 추억을 축복하고자 쓰였습니다."

후일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의 웰링턴 공작에게 패배하자, 황제 나폴레옹을 증오하던 베토벤은 웰링턴을 찬양하는 "웰링턴의 승리"라는 곡을 만들었다.

 

 

점령지

 

프랑스 황제로 즉위하면서 동시에 이탈리아 왕국의 왕이 되는데, 이탈리아는 외젠 드 보아르네를 부왕으로 임명하여 맡긴다.

당시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은 오늘날의 프랑스, 스페인, 동북부를 제외한 이탈리아 전역, 크로아티아(일리리아), 아이티 등을 다스렸다.

 

 

 

 

최고 전성기

 

영국과의 해군경쟁

 

세계 최강의 영국 해군에 맞서 프랑스도 급히 해군력을 강화했다. 그 일환으로 스페인 해군을 끌어들이기는 했지만 당시 스페인군은 육군이고 해군이고 인원수만 채우고 있을 뿐 참담하기 그지없는 상태였다. 따라서 영국 해군에 비해 수적으로도 질적으로도, 무엇보다도 경험 면에서 비교할 수 없었다.

물론 프랑스 해군은 유럽 2위로 해양국가 영국에 맞설 만한 해군이 있었고, 특히 미국 독립전쟁 당시에는 각고의 노력과 개혁 끝에 여러 차례 영국이 큰 낭패를 보도록 했다. 문제는 혁명이 터지면서 왕정 시절의 장교단이 사라졌다는 데 있었다.

혁명 초기에는 육군도 개판이었지만 육군은 어떻게든 인원수 채우고 주변 국가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유능한 인물들이 경험을 쌓고 하여 절대왕정시대의 유산과의 조합으로 나폴레옹의 대군단이 될 수 있었지만, 해군은 경험 있는 뱃사람이 많아야 하고, 제대로 된 함선도 다수 건조하고 유지해야 하며, 정교한 보급체계까지 있어야 하니 육군처럼 임기응변으로 능력이 상승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도 1805년까지는 강력한 해군의 모습이 약간이나마 남아있어서 영국에서 '프랑스가 상륙하면 어떻게 하나'라고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사실 나폴레옹은 아미앵 조약의 폐기가 선언된 직후부터 영국 본토 상륙작전을 계획하여, 불로뉴에 15만 명의 병력과 군선1,200척, 대포 400문을 집결시켰으며, 해군제독 빌뇌브에게 상륙작전을 명령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오스트리아가 유럽 대륙에서 군사행동을 개시하며 무마됐다. 결국 1805년 10월 발생한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빌뇌브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가 영국의 넬슨 제독을 만나 전멸하면서 결국 나폴레옹으로 하여금 영국 상륙 작전을 포기하게 만든다.

 

 

유럽 최고의 황제

 

해군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그야말로 최전성기를 향해 달려갔다. 1805년 10월 오스트리아의 빈을 함락시킨 나폴레옹은 그 해 12월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과 격돌한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그야말로 압승을 거두게 된 것이다. 이 전쟁은 무엇보다도 신성 로마 황제와 동로마 황제의 후예를 자처했던 러시아 황제를 모두 누른 전투로 의미가 깊다. 결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모두 동시에 대프랑스 동맹에서 이탈하게 되면서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은 섬나라 영국과 나폴레옹을 대륙에서 홀로 맞붙어야 하는 프로이센만 남게 되었다.

한편 나폴레옹은 독일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위하여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를 주장하며 라인 동맹을 구성하게 되었고,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는 1806년 8월 사실상 반 강제적으로 신성 로마 황제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이에 사실상 유일하게 반발했던 프로이센이 1806년 10월 나폴레옹을 상대로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를 벌이나 참패를 당하며 사실상 나라가 멸망 직전에 몰리게 된다.

여러모로 나폴레옹은 유럽 최고의 황제로 군림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잠재되어 있던 각종 문제가 결국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다가가는 지름길을 만들어내게 된다.

 

 

대륙 봉쇄령, 이베리아 반도 전쟁

 

 

1806년 대륙 봉쇄령

 

나폴레옹 몰락의 시작.

 

여전히 강했던 섬나라 영국을 고립시키고자 나폴레옹은 1806년 베를린에서 대륙 봉쇄령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영국은 압도적인 해군력과 식민지와의 무역으로 대유럽 무역중지로 인한 피해를 상쇄할 수 있었다. 오히려 러시아 제국과 스위스(헬베티아 공화국)가 대륙 봉쇄령으로 인해 가장 많은 타격을 받았다. 사실상 대륙 봉쇄령 이후로 조금씩 나폴레옹 시대가 몰락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영국도 경제 피해를 좀 입기는 했으나, 정작 프랑스의 해군력 자체가 영국 해군에 비해 매우 전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되려 프랑스가 경제 봉쇄를 당한 꼴이 되다시피 하고 말았다. 그리고 영국에는 신생국가 아메리카라는 새로운 거대한 시장이 있어서, 영국이 캐나다와 미국 등과 교역을 하면 그 나름대로 큰 이익을 챙길 수 있는 판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영국이 실리를 챙겨가는 그림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대륙봉쇄령은 프랑스 산업을 짧은 시일 안에 크게 성장시켰으나, 1810년 후반에 이르면 그 악영향이 프랑스의 호황에도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는데, 영국식민지에서 수입해 오던 커피, 코코아, 향료 값이 5배 내지 12배, 원면과 인디고 염료 값이 5배 내지 10배 폭등했다. 폭등한 차액은 영국 상인과 밀무역업자의 이익으로 돌아갔고, 원료값의 폭등으로 프랑스 공업이 침체되기에 이르렀다.

거기다가 나폴레옹 시기 지속된 전쟁으로 일반 민중의 구매력이 감소하여 프랑스 공업제품의 시장이 축소되었고, 공업의 침체는 상업과 금융에 영향을 미쳤으며, 불황은 프랑스 이외의 독일과 네덜란드 등 대륙봉쇄 아래에 있는 여러 국가들에도 번져갔다. 특히나 이 대륙봉쇄령으로 가장 큰 손해를 본 나라는 러시아와 러시아의 지주계급이었다. 영국의 경우 러시아의 밀, 목재, 대마, 수지의 가장 큰 시장이었기 때문이며, 나폴레옹 대륙봉쇄령으로 러시아는 산업 뿐만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여간 어려움을 겪었던 것. 즉, 이런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러시아에게 대륙봉쇄를 더 철저히 실행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 황제는 1810년 12월 31일 칙령을 발포하여, 포도주 및 브랜디의 수입관세를 높여 프랑스의 주요한 수출입품을 배척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와 러시아의 군사적 충돌은 시간문제였고, 이것은 결국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으로 이어졌다.

 

 

스페인 점령

 

대륙봉쇄령을 강화하기 위해 포르투갈을 점령하고 스페인 왕위를 빼앗아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에게 넘겼고, 당시 나폴레옹의 군대는 스페인을 휘젓고 다니면서 스페인 민중의 반감을 샀다.

프랑스 혁명 당시 반서약파 가톨릭 신부들을 탄압하면서 반교회적 정서가 팽배했던 전직 혁명가, 자코뱅들이 많았고, 이들에게 있어서 뿌리 깊은 신비주의적 문화와 신앙관이 진하게 녹아있던 스페인의 종교 관련 사적, 문화재는 비이성적이고도 야만적인 것으로 비추어져 심각한 훼손, 약탈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이베리아 문화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뚜렷한 스페인 가톨릭 문화 만의 독특함은 '피칠갑한 예수상'과 '통한의 표정으로 눈물 흘리는 성모상'일 만큼 스페인 가톨릭 문화는 '인간적 감정을 격렬하게 강조하는 성향'이 있고, 당시 전직 자코뱅 출신 프랑스군에게 이런 모습은 '미신과 후진성의 표상'으로 비추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이러한 행동은 스페인 민중의 반발을 일으켰다.

 

 

1807~1814년 영국의 이베리아 반도 파병: 나폴레옹 측 30만의 병력 상실

 

여기에 주목한 영국이 혁명전쟁 이후 처음으로 지상군을 유럽 대륙의 이베리아 반도로 파병하면서 이베리아 반도 전쟁이 시작된다. 프랑스군은 게릴라군과의 싸움에 끝없이 시달리게 된다. 나폴레옹은 최대한 빨리 스페인에서의 전쟁을 마무리지으려 했지만 독일과 이탈리아의 평원에서 나폴레옹의 군대가 지금까지 이겨왔던 방식은 험난한 산지로 가득한 스페인에서는 오히려 걸림돌이 될 뿐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스페인·포르투갈과의 반도 전쟁에서 나폴레옹은 약 최소 18만 명에서 최대 30만 명의 병력을 잃는다.

 

 

1812년 러시아 원정

 

이런 상황에서 영국과의 무역에 경제가 좌지우지되던 러시아가 대륙 봉쇄령을 무시하고 계속 통상에 나서자, 이에 대한 응징 차원에서 1812년 당시로선 유례 없는 61만 대군을 일으켜 러시아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 스페인 전역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를 침공함으로써, 동시에 두 개의 전선을 만들어 메우기 힘든 틈이 생겨버린 것이었다.

1812년 5월 9일 나폴레옹은 생클루 궁을 출발하여, 15일에 독일의 드레스덴에 이르러 오스트리아 황제, 프로이센 왕, 라인 연방의 통치자들과 회합하여 그들의 충성을 다짐받았다. 러시아 황제는 프랑스군이 프로이센에서 철수하기만하면 협상에 응할 용의가 있다는 최후통첩을 나폴레옹에게 보냈다. 이 통첩에 대한 나폴레옹의 응답은 비스툴라 강까지의 진격 명령이었다. 그는 드레스덴에서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까지 진출하여 5월 31일에는 자신의 대군에게 리투아니아로 진격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의 대군은 6월 23일 러시아의 국경 네만 강에 이르렀으며, 그런 뒤 코브노에서 강을 건너 러시아로 침입했다. 이렇게 해서 러시아군은 초기에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후퇴만 거듭하는 것으로 보였다.

나폴레옹의 대군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60만을 넘어섰는데, 그중 20만이 후비군으로 독일에 남고 실질적으로 진격한 병력은 40만 명이었다. 대군의 중핵을 구성한 프랑스군은 20만 명이 채 안됐고, 나머지는 전부 나폴레옹 정권 지배하의 다른 나라의 군인들이었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및 라인 연방의 독일인, 스페인인, 이탈리아인, 네덜란드인, 크로아티아인, 폴란드인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프랑스사 연구자인 노명식 교수의 경우 이에 대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런 전람회는 없었다고 표현할 정도다.

 

 

청야전술

 

나폴레옹의 대군이 러시아를 공격할 당시 24만명이었던 러시아 국경수비군은 프랑스군에 맞서 방어했지만,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후퇴해야 했다. 프랑스군은 그 여세를 몰아 1812년 8월에는 스몰렌스크까지 점령했다. 문제는 그 스몰렌스크라는 지역이 수도 모스크바로 가는 길목이었다는 점이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는 전열을 재정비하고 쿠투조프를 새 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반격을 준비했다. 8월 말 쿠투조프 사령관은 모스크바의 근교인 보로디노에서 전투를 벌여 비록 어느 한쪽이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프랑스군 5만 명을 섬멸하기도 했었다. 쿠투조프 사령관과 알렉산드르 1세는 마침내 모스크바를 비우고 후퇴하는 작전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이전까지 프랑스에 맞서 수없이 전투를 치렀던 러시아 제국군 사령관 미하일 쿠투조프 장군은 청야전술을 펼쳐서, 러시아 국토 내부로 프랑스군을 깊숙이 끌어들이며 꾸준히 반격을 가해 차츰 프랑스군의 희생자를 늘렸다.

다만, 이 후퇴작전을 총지휘한 것은 쿠투조프가 아니라 스코틀랜드계 조상을 둔 발트태생 바클라이 드톨리였고, 쿠투조프는 보로디노 전투 전부터 러시아군을 지휘했다. 청야전술은 의도된 것이 아니라는게 현재 중론이고 초기 경질된 '바클라이 드톨리'의 공이 컸지만, 외국계라 쿠투조프만 민족영웅이 된 것. 알렉산드르 1세, 미하일 쿠투조프, 러시아 원정 참조.

 

 

10월 18일, 퇴각

 

1812년 9월 초 나폴레옹은 남은 11만의 군대를 이끌고 텅 빈 모스크바를 점령했다. 9월 16일에 모스크바에 입성한 나폴레옹은 하늘을 찌르는 것과 같은 불타는 도심을 보게 된다. 사실 모스크바 시는 그 전날부터 붙기 시작한 불길이 꺼지지 않은 상태였고, 나폴레옹의 한 부관은 이에 대해, 우리는 불의 대지 위, 불의 하늘 아래, 불의 두 벽 사이를 걸었다고 기록했다. 이 불은 4일 동안 지속됐고, 모스크바는 잿더미가 됐다. 이 잿더미의 모스크바에서 나폴레옹은 러시아 황제에게 평화 교섭을 제의했으나 러시아 황제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거기다 러시아의 추위는 나폴레옹이 예상했던 것 보다 일찍 다가왔다. 모스크바에 주둔 중인 프랑스군은 먹을 것도 잠 잘 곳도 없었다. 군대에는 겨울 옷이 없었으며, 추위와 허기에 지친 군인들이 먹을 것을 찾아 모스크바 교외에 나타나면 잠복하고 있던 러시아군이 이들을 습격했다.

나폴레옹은 이후 한 달 동안이나 모스크바에서 차르가 항복해오길 멍하니 기다리고 있다가 결국 10월 18일에서야 퇴각을 시작했고, 이 후퇴는 역사상 가장 처참하고 가장 유명한 퇴각이 되었다. 이후 식량도 없고 보급품도 떨어진 상태로 11월의 추위 속에서 게릴라와 싸우며 수많은 병력을 잃고 말았다. 거디가 엎친데 덮친격으로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에 들어간 저녁 화재가 일어나 도시 전체가 6일 동안이나 큰불에 휩싸였고, 그 바람에 모스크바 대부분의 폐허로 변해버렸다.

동시에 이 절대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쿠투조프의 러시아군의 반격작전이 본격적으로 개시되고, 이후 베레지나 강을 건너면서 수천 명이 익사하는 등 실패를 거듭하며 퇴각한 뒤에 12월에는 파리에서 모스크바 입성 당시 10만 명이었던 나폴레옹의 군대는 스몰렌스크에 도착했을 때 병력이 절반으로 줄었다.

결국 40만이 전투&비전투 손실로 희생되고 10만여가 포로로 잡히면서 대육군은 이름만 남게 된다. 노명식이 쓴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1789~1871>에 따르면, 총 병력 60만 중 25만이 전사하고 10만 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15만 명이 부상 또는 실종되었다고 한다. 러시아 원정은 이렇게 대실패로 끝났다.

 

 

나폴레옹의 몰락

 

대불동맹 재결성: 트라헨베르크 작전

 

이렇게 나폴레옹의 부대가 격파당한 틈을 타 프랑스를 공격하려는 대불동맹이 다시 결성되었다.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 스웨덴 등이 동맹을 맺었고 마리 루이즈와의 결혼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까지 동맹에 가입한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 동맹에 맞서 나폴레옹은 고작 몇 달 만에 새로운 군대 양성을 시도했고, 일부 병력은 나폴레옹의 의도대로 성장했다.

이를 통해 초반까지는 버틸 수 있었지만 점차 전쟁은 피차의 소모전으로 흘러가며 나폴레옹의 입지를 좁혔다. 더군다나 대불동맹군은 워낙 강한 나폴레옹 본인과의 교전을 피하고 다른 장군들을 각개격파하며 프랑스군의 총 전력을 약화시켜 나갔다.(트라헨베르크 작전)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 패배

 

1813년 8월 반불 동맹군과 나폴레옹군은 마지막 결전 준비를 마쳤고, 현재 독일의 도시 드레스덴에서 맞섰으며, 드레스덴에서의 전투는 어느쪽에도 승리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승패를 가르는 결전은 1813년 10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발생했다. 나폴레옹은 4일간의 격전에서 6만 5,000명의 병력을 잃었고,전투 개시 2일째인 18일 나폴레옹 휘하의 작센 부대가 동맹군 쪽으로 전향하면서 전세가 순식간에 나폴레옹에게 불리한 쪽으로 흘렀다. 결국 나폴레옹은 전면 후퇴를 명했고, 라인 강 쪽으로 후퇴하던 나폴레옹군은 하나우에서 또 다시 바이에른군의 요격을 받아 큰 손실을 받았다. 라이프치히 전투의 패배를 기점으로 프랑스 제국은 1814년 1월쯤에는 이미 라인강을 넘어 프랑스 파리까지 밀리고 있었다. 물론 나폴레옹 본인은 여전해서 갓 징집한 15만 명 남짓의 병력으로 동맹군의 38만 병력과 맞서며 3만명의 기동대로 러시아 제국군 5,000명 병력을 덮쳐서 전멸시키고 이후 2만명 남짓 병력으로 블뤼허가 이끄는 12만명의 프로이센군을 3차례에 걸쳐 일시적으로 격파해 퇴각시키지만, 사방팔방에서 밀려드는 동맹군을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1814년 4월, 퇴위 이후 투항

 

2달이 지나고, 프랑스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의 부대의 승리 기념 퍼레이드가 파리에서 열릴 정도로 굴욕을 당하게 된다. 나폴레옹은 아직 싸울 생각이었으나 거기에 동의할 사람이 없었고 결국 1814년 4월 퇴위를 선언한 나폴레옹은 대불 동맹국에게 투항한다.

동맹국은 나폴레옹의 유배지로 코르시카를 프랑스에서 분리 독립시켜 나폴레옹을 코르시카의 영주로 보내버리려 하였으나 나폴레옹이 코르시카를 불침무적의 요새로 만들어 재차 프랑스를 정복하거나 통일 이탈리아의 왕이 되어 다시 동맹국에 도전할 것이라는 우려로 포기한다.

 

엘바 섬 유배

 

당시 동맹국은 나폴레옹에 대한 극심한 공포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동맹국은 나폴레옹의 추방지로 샤르데냐, 미국, 세인트 헬레나, 심지어 호주 쪽까지 고려하였으며 결국 지중해 이탈리아 반도 근처의 엘바 섬(고향 코르시카와 가깝다)을 유배지로 선택한다.

이후 프랑스 혁명 때 처형당한 루이 16세의 1살 아래 동생인 프로방스 백작이 루이 18세로 왕좌에 앉게 되는데 프랑스를 이전으로 되돌려 놓으려 한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평판이 매우 안 좋은 왕이었다.

거기다 혁명으로 쫓겨났던 왕당파들이 귀국해서는 보상을 챙기려드는 통에 프랑스는 어수선했고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왕당파는 나폴레옹에게 약속했던 연금을 지불하지 않고 오히려 암살자를 고용해 끊임없이 그를 암살하려 했고 영국은 이를 조장하거나 방관했다. 게다가 그가 다스리던 엘바 섬은 고향 코르시카와는 다르게 황제 나폴레옹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어 모욕적인 언사를 일삼는 것은 물론 나폴레옹이 내리는 명령도 다 거부하거나 반항하기 일쑤였다.

 

엘바 섬 탈출과 백일천하

 

그 와중에 차츰 유럽 제국들의 밥그릇 싸움이 심각해지자, 영국은 유리한 패를 가지기 위해 나폴레옹이 탈출하는 것을 방조한다. 그 틈을 타 나폴레옹은 탈출에 성공한다. 

 

1815년 워털루 전투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등이 돌아온 나폴레옹을 물리치기 위해 다시 연합군을 보냈다. 나폴레옹군은 상당히 선전했지만, 러시아 원정 이후로 잃어버린 것이 너무 컸기에 결국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간발의 차이로 패배했다. (농담이 아니고) 정말 연합군이 간신히 이겼다. 나폴레옹이 그렇게 삽질을 많이 했음에도 말이다.

간단히 적어보면, 전투개시 직전 쏟아져 시간지연을 야기한 폭우, 당일 너무나 건강이 좋지 않았던 나폴레옹, 영국 동맹군으로 참전해 전장 각종 요지를 끈질기게 방어해 시간을 끌어준 네덜란드군, 참모장 술트의 무능함, 영국군이 총퇴각하는 것으로 오인해 기병 단독돌격(결과적으론 영국군 방진에 돌격)을 감행해 막대한 손실을 초래한 네 원수, 3만의 병력으로 엉뚱한 곳을 헤메고 다녀 영국군 조차 배신했다고 착각하게 한 그루시 원수. 하지만 이 모든 점에도 불구하고 그루시의 3만 기병대가 프로이센보다 먼저 도착했다면 승리는 프랑스에 돌아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재퇴위

그렇게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며 나폴레옹의 백일천하는 끝이 났다. 프랑스는 각종 정치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프랑스 의회는 나폴레옹에게 퇴위를 강력하게 권유하였고, 나폴레옹은 워털루 전투 패전 나흘 수 퇴위할 수 밖에 없었다.

퇴위 후 나폴레옹은 조제핀이 말년에 기거했던 말메종에 잠시 머물렀다. 그러나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파리 외곽으로 접근해 오자 서둘러 피할 수 밖에 없었다. 미국으로 가려 했으나 해상을 봉쇄한 영국의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다. 이에 영국에 명예롭게 항복하기 위해 영국전함 벨레로폰 호를 타고 영국 플리머스 항에 정박하지만 영국은 그의 영국상륙자체는 허가했으나 계속 그를 항구에 묶어 놓았고, 결국 세인트헬레나 유배라는 조치를 취한다.

 

 

세인트헬레나 섬 유배

 

아프리카 대륙에서도 아주 멀리 떨어진 조그만한 섬 세인트헬레나로 유배지가 결정되었다는 통보에 나폴레옹 본인도 탄식을 금치 못했고, "그런 격오지에 가서 뭘 하겠냐'라며 낙담했다. 그런데 이 말이 "그런 곳 갈 바에 차라리 죽을란다"로 와전되어 영국 측에서 난리가 났다. 영국군은 나폴레옹의 측근들에게 황제가 자살하면 '당신들에게 책임을 물어 교수형에 처할 것' 이라는 경고를 했으며, 그들은 나폴레옹을 설득해야만 했다. 측근들은 시간이 흘러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프랑스로 돌아올수도 있을 거라고 황제에게 간청하였고, 결국 나폴레옹은 "나의 운명을 완성하겠다."라고 말하며 1815년 8월 7일, 순순히 아메리카급 전열함 노섬벌랜드에 올라 아프리카 적도 근처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기약없는 두 번째 유배길을 떠난다. 100일이 넘던 항해기간 동안 나폴레옹은 별다른 불만을 표시하지 않고 조용히 지냈다. 그는 거의 독서를 하거나, 항해에 관련된 기술적, 과학적 지식들을 물어보거나, 자신들이 거쳐가는 지리에 대한 정보를 탐독했다. 저녁에는 측근들과 카드놀이를 하거나 체스를 두었다. 함장도 최대한 나폴레옹을 배려해주었고 영국 해군 장병들도 황제와 그 일행에게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자 황제는 답례로 모든 승조원들에게 금화를 나눠주려고도 했다.

 

 

1815년 세인트헬레나 섬에서의 말년

 

주거지: 브리아스 → 롱우드

1815년 10월 15일, 나폴레옹의 일행은 세인트헬레나 섬에 도착한다. 이 섬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남대서양 한 가운데 위치한 절해고도다. 세인트헬레나집게벌레 같은 특이한 생물이 살 정도로 험악한 곳이었고, 평소에도 사람이 편안하게 살기엔 문제가 많은 곳이었다. 섬의 가장 고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섬의 예전 총독이 기거했던 총독 관저였던 롱우드 하우스는 당시 매우 낡았고 말이 관저였지 민가 수준으로 협소했으므로 이를 수리하고 새단장하는 동안 시가지와 가까운 저지대의 브리아스에 머물다가 이후 롱우드로 옮긴다. 이시기에 나폴레옹은 회고록 구술과 산책등으로 시간을 떼웠다. 그가 지내게 된 롱우드 지역에는 '발콤'이라는 성을 가진 가족이 살았는데, 나폴레옹은 그 집의 딸 2명과 친해져 심심할 때마다 찾아가서 이야기를 하거나, 카드놀이를 하는등 자주 만났다. 그 밖에도 발콤의 집에서 일하는 노예에게도 관심을 가졌으며, 그의 일생에 대해 듣고선 매우 분노하며 제독과 상의하여 그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이들은 나폴레옹을 '친절한 신사분(gentleman)'으로만 알고 있었지, 그가 황제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영국에서 세인트헬레나의 총독으로 파견된 동갑인 '허드슨 로'(1769년 7월 28일 ~ 1844년 1월 10일/Sir Hudson Lowe)가 나폴레옹을 학대했다. 본국 영국에서도 욕만 죽어라 듣던 그는 영국군 내에서도 휘하 부하들한테 가혹행위를 벌여 평이 나빴고, 개차반같은 성격 때문에 부임지마다 주변 사람들과 충돌을 일으켰다. 게다가 무능하기 짝이 없어서 한직만을 전전한 인간이었고, 총독이 되기 전에도 장교에서 조기 퇴직 대상이었다. 영국 내에서도 이 인간에 대한 평은 전혀 좋지 못해서 신사가 아니라고 부정당하기도 했다. 이 세인트헬레나는 지금도 망망대해 한가운데 외딴 시골 섬인데 하물며 200여년 전 당시에는 여길 가는 곳도 엄청난 시간이 걸리는 더더욱 외딴 곳이었으므로 이런 곳의 총독이라는 직위도 말이 좋아 총독이지, 자세히 보면 이것도 한직에 지나지 않는다. 허드슨 로 본인도 이런 머나먼 섬 구석 총독이란 허울좋은 이름으로 보낸 것도 한직 축출이란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이 좌천이나 다를 바 없는 조치에 대해 그야말로 분노하였다. 그래서 세인트헬레나에서도 그 버릇 못 고치고, 밑사람들을 박대했다.

쓸데없이 자존심이 쎈 허드슨 로는 초반부터 자신에게 굽히지 않는 나폴레옹을 굉장히 미워하여 나폴레옹이 거주하던 롱우드 하우스 주변에 감시병을 배치해 가택연금 했으며 병사들로 하여금 황제라는 칭호 대신 장군이라고 부르게 시키는 등 모욕적인 조치를 취했고 그도 나폴레옹을 이런 식으로 욕했다. 또한 처우 면에서는 주치의를 강제로 영국으로 보내버리고 장작 공급을 제한하기도 하였다.

이러다보니 나폴레옹이 장작이 부족해 가구를 대신 태우기도 했다는 소문에 유럽 각지 여론은 허드슨 로에 대한 비난으로 들끓었고, 영국 내에서도 비판 여론이 일었을 정도였다.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을 상대한 웰링턴 공작도 이런 소문을 듣고 허드슨 로를 "질투심과 시기심에 가득 찬 한심한 인간! 우리 영국을 망신시키는 짓이나 하고 있다."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통 적장을 포로로 잡게 된다면 그 적장을 유배를 보내든 사형(또는 참수)을 시키든 그에 걸맞은 예우를 갖추는 것이 보통이나, 허드슨 로의 행위는 이와 반대되는 행위나 다름 없었다. 따라서 영국 언론들조차도 "적이라고 해도 그만큼 능력있고 유럽을 공포로 떨게 한 사람을 이렇게 푸대접하는 것은 오히려 영국 망신시키는 것이다. 로 총독도 유배지가 아닌 전쟁터에서 나폴레옹을 만났더라면 져서 죽었을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오히려 로를 욕하였다.

그래도, 나폴레옹은 그에 대하여 최소한 총독으로 여기고 더 깊게 증오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폴레옹을 모시던 하인이 이런 박대에 분노하여 나폴레옹에게 내 목숨 바쳐서라도 허드슨 로 그놈을 내 손으로 죽이겠습니다라고 마음먹고 실행 준비를 하다가 나폴레옹에게 들켰는데 그는 크게 분노하여 그 하인을 혼냈을 정도로 나폴레옹은 물리력을 사용하거나 탈출을 하는 등의 행위를 거부했다고 한다.

아무튼 이렇게 허드슨 로에게 박대당하는 유배 생활과 지병으로 인해 나폴레옹은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고 결국 나폴레옹은 1821년 5월 5일에 5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사후 부검을 통해 사인이 위암임이 발표되고 데스 마스크가 제작되었으며 그의 시신은 세인트헬레나 섬에 묻힌다.

허드슨 로는 나폴레옹이 죽고 나서 나폴레옹 주치의이자 (실상은 첩자이기도 하던) 오미어러의 고발로 파면당한다. 신하들이 들고 일어나 "저런 곳에서도 일을 저 모양으로 하니 더 이상 쓸모 없사옵니다! 따라서 아예 벼슬자리를 박탈해야 하옵니다"라고 하였으나, 그나마 조지 4세의 배려로 한직인 Ceylan 지역의 부대장 자리를 전전했다. 결국 허드슨 로는 경 작위는 받고 74세까지 장수하며 평온하게 적당히 살다가 갔다. 하지만 허드슨 로가 역임했던 직책중에 소장 계급과 세인트헬레나 총독이 그나마 가장 높은 벼슬이었고 실질적으로는 강등이나 좌천과 다를바 없었기에 마냥 좋다고 할 수 없다. 이후 허드슨 로가 전진하던 벼슬들은 모두 기지 부대장이라든지 중간관리자로서 한직이었고 상관 눈치를 봐야했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영국 왕 조지 4세나 뒤를 이은 윌리엄 4세도 로에 대하여 "아부는 잘하는데 됨됨이가 영 아니다"라고 깠을 정도였다. 이렇게 인망이 없으니 죽었을 때 장례식에서도 조문객은 식솔들과 극소수 친척들만이 참석했을 정도다. 이는 로가 죽기 4년 전에 나폴레옹의 유해가 성대한 인파의 환영을 받으면서, 파리 앵발리드에 복귀한 것과 대비된다.

사실 허드슨 로의 박대는 당시의 관념으로도 이해되지 않은 것이었는데, 아무리 전쟁 중엔 철천지 원수 같은 적장이라 해도 포로로 잡힌 이상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는 것이 보통이고, 설사 적장을 직접 처형한다 하여도 그에 맞는 예우를 해주고 장례 또한 그에 걸맞은 예우로서 해주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적장이라 해도 포로로 잡히거나 패장이 된 이상 쓸데없이 모욕을 가해봤자 아군측에도 이득이 될 것이 없고 그 적장의 잔존 세력이나 소속 국가에서 증오심만 부추기고 쓸데없이 자극만 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최후까지의 측근

 

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의 시종들이 나폴레옹의 총애를 두고 다퉈 나폴레옹이 '너희가 내 마누라냐?' 하고 투덜거렸다는 이야기도 있는 걸 보면, 총독의 부당한 조치도 나폴레옹의 매력을 완전히 꺾지는 못한 모양이다.

나폴레옹은 유배지까지 따라온 몇 안 되는 충복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엘바 섬에서처럼 나름 '미니 궁정'을 만들어 격식을 차리며 마지막 남은 영광의 조각만은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했다.

당시 영국이 나폴레옹 측근 수행원의 숫자에 제한을 두는 바람에 결국 측근 중에서 라스 카즈, 구르고, 몽톨롱, 베르트랑 이 4명만 수행하게 된다. 물론 라스 카즈의 아들, 몽톨롱 부인, 베르트랑 부인, 그 외 '세인트헬레나 궁정'을 담당할 마르샹 등의 하인들은 예외. 구르고는 독신이라 혼자였다.

유배생활을 함께한 사람들은 각자 사정에 따라 중간에 섬을 떠나기도 하고 새로 들어오기도 했으며 처음부터 나폴레옹의 임종까지 줄곧 함께 한 경우도 있었다. 주요 인물에 대해 간단히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라스 카즈(1766~1842), 1816년 12월까지

 

가장 유명했던 인물로 훗날 '세인트헬레나의 회상'을 집필해 일약 대성공을 거두었다. 나폴레옹 서사시의 대미를 전설의 영역으로 승화시킨 장본인이다. 이 책의 성공 이전에도 그는 '역사지리부도'라는 학술서로 큰 성공을 거둔 잘나가는 인물이었다.

귀족 출신이며 왕당파였던 그는 후에 나폴레옹에 합류해 백작 작위를 받고 국가 참사원 멤버가 되는 등 경력을 이어가다가 백일천하 이후 어린 아들과 함께 세인트헬레나 동행을 자원했다. 학식과 교양이 매우 풍부하고 영어에 뛰어났으며 언변이 뛰어났던 그는 유배생활 초기의 나폴레옹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동시에 말동무이자 통역관이었으며 충실한 회고록 기술자이기도 했다.

해군 출신이라서 항해 관련해서도 빠삭했기 때문에 세인트 헬레나로 가는 영국 배에서 나폴레옹의 통역을 담당하게 된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롱우드 기거 이전 브리아스에 머물 시기부터 이미 그는 나폴레옹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가장 친밀한 측근이었고 이는 '구르고', '몽톨롱', '베르트랑' 등과는 차원이 다른 대우였다. 이로 인해 섬을 떠나는 날까지 계속해서 그들의 심한 질시와 견제를 받는다. 이러한 친밀함을 바탕으로 그는 황제의 당시 내면까지 잘 파악할 수 있는 상세하고도 훌륭한 기술을 남길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1816년 12월, 허드슨 로 총독에 의해 그의 세인트헬레나 생활은 끝이 난다. 비밀리에 유럽과 연락하려 했다는 죄목이었는데, 사실 쫓겨나기 직전에 총독이 그의 롱우드 복귀를 허락했음에도 자의로 섬을 떠나는 쪽을 선택했기에 훗날 그의 의도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즉, 상기했듯이 '역사지리부도'로 이미 대성공을 거둔 그가 나폴레옹의 유배생활이라는 '크게 한 몫 잡을 수 있는 주제'에 대해 저술가의 본능적 후각을 발휘하여 일부러 동행을 자처했다는 것이다. 순수한 충성심에서 나온 동행이 아닌 이기적 목적의 동행이라는 것. 이 점은 그를 질시했던 '구르고'나 '몽톨롱' 역시 지적했던 점이다. 이와는 반대로, 그쯤에서 유럽으로 빨리 돌아가 나폴레옹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유럽에 알림으로써 동정여론을 일으키고 나폴레옹을 도울 수 있을 거라 판단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가 섬을 떠남으로써 나폴레옹은 그의 수준에 맞을 뿐더러 그를 잘 이해하던 최고의 말동무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의 섬 생활이 더욱 고달파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영어를 못하는 나폴레옹에게 개인 영어 강습을 해주기도 했다. 노섬벌랜드호에 있을 때부터 했었는데 한동안 중단되었다가 롱우드 시절 다시 재개했다. 뛰어난 두뇌를 가졌던 나폴레옹의 영어실력이 매우 빠른 속도로 늘어나자 나름 놀라워한다. 하지만 결국 섬을 떠나게 되면서 강제중단.

그는 평소에도 시력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세인트헬레나 생활 동안 변덕스럽고 습하기 짝이 없는 기후와 열악한 생활환경 속에서 계속해서 악화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훗날 시력을 상실하고 말았는데, 1840년 나폴레옹의 유해가 돌아와 장엄한 장례식과 함께 앵발리드로 향했을 때 안타깝게도 이 역사적인 순간을 눈으로는 확인하지 못했다. 대신 현장에 참석해 귀로 들었다고...

 

 

구르고(1783~1852), 1818년까지

나폴레옹처럼 포병 출신으로 백일천하 당시 나폴레옹의 부관이다.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심으로는 자신이 최고라고 나름 자부하던 그는 본디 유배 동행자로서 나폴레옹이 염두에 두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구르고가 생떼를 쓰는 바람에 결국 그를 합류시키게 되었는데, 만약 구르고가 합류하지 않았다면 충복 사바리 장군[이 대신 합류했을 것이고 나폴레옹의 유배생활은 덜 고달파졌을 것이다.

나폴레옹의 총애를 받던 라스 카즈를 몽톨롱과 함께 극도로 시기하였는데, 충성스럽긴 하지만 자신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며 총애경쟁을 벌이는 구르고 때문에 나폴레옹은 피곤해한다. 한 여자를 두고 여러 남자가 싸우는 듯한 꼬락서니를 보다 못한 나폴레옹은 툭하면 구르고와 티격태격 충돌하며 점점 그에게 싸늘해졌는데, 몽톨롱과의 친분마저 파탄난 구르고가 몽톨롱에게 결투를 신청한 사건이 벌어지자 나폴레옹의 관심에서 더욱 더 멀어진다.

당시 기록(구르고의 일기)에 나오는 티격태격하는 대화들을 종합해 보자면 대략 이렇다.

나폴레옹: 구르고, 오늘은 인상이 또 왜 그래?

구르고: 폐하. 전 제가 더 이상 폐하의 총애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절망하고 있습니다.

나폴레옹: 그렇지 않아. 몽톨롱 부부와 잘 지내는 게 좋을 거야. 넌 항상 내 성질을 건드리고 있어. 여기 따라온 이상 날 기쁘게 하라고.

구르고: 그럴 순 없습니다. 그는 절 모욕했습니다. 폐하께서 저보다 몽톨롱을 더 가까이 하시는 걸 참을 수 없습니다.

나폴레옹: 내가 누굴 가까이 하든 네가 뭔 상관이야? 나라는 바위와 충돌해 봐야 넌 깨질 뿐이야. 넌 날 모욕하고 내 인생을 더 괴롭게 하고 있어. 몽톨롱이 너보다 더 나아!

구르고: 폐하께서 절 이토록 천대하시다니 너무나 슬픕니다.

나폴레옹: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구르고: 이런 모욕을 당하느니 제가 여길 떠날 수 있게 해 주십쇼.

뒤끝이 심하지 않았던 나폴레옹은 구르고와 다툴 때마다 이후 나름 좋은 말을 해 주는 등 그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으나 결국 구르고는 섬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1818년 2월, 나폴레옹과 작별한 그는 한동안 섬 저지대에 머물게 되는데 그 이유는 베르트랑에게 빌려준 돈을 받기 위해서였다. 3월이 되자 베르트랑은 돈을 지불했고 구르고는 섬을 떠난다.

섬을 떠난 이후의 라스 카즈가 회상록 출판 등으로 나폴레옹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게 된 반면, 구르고는 그러지 못했다. 세인트헬레나 체류 당시 그는 가족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곳의 생활을 굉장히 미화해 놓았다. 가족이 자신을 걱정할까 우려해 한 일이었지만 이것이 나폴레옹에게 굉장히 불리하게 작용한다. 나폴레옹에 대한 처분이 가혹하다는 일부 비판에 직면했던 영국은 구르고의 이 편지를 이용해 정당화에 성공하고 나폴레옹의 유배조건을 더욱 옥죄게 되는데, 총독 허드슨 로가 본국의 의향을 충실히 이행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결국 나폴레옹의 뒤통수를 친 셈이다.

라스 카즈가 떠난 후 나폴레옹이 구술하는 회고록 기술을 도맡아 했었다. 비록 나폴레옹과 티격태격 했고 라스 카즈의 언변과 학식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나름 나폴레옹의 말상대가 되어 주기도 하는 등 그래도 그의 역할이 적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구르고마저 섬을 떠나자 나폴레옹의 말동무가 될만한 사람은 사실상 없게 되었고 나폴레옹은 더욱 더 고독해진다. 이후 1819년 7월에 몽톨롱의 부인마저 섬을 떠나자 이제 희망은커녕 온통 절망과 고독, 먹구름 그리고 앙톰마르쉬 밖에 없는 유배생활 후반기가 펼쳐지며 그때부터 건강이 빠르게 악화된다.

 

 

 

 

몽톨롱(1783~1853), 1821년까지

 

나폴레옹 비소 독살설의 주인공이다. 이를 두고는 그의 부인 알빈을 나폴레옹이 정부로 삼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실제로 알빈은 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과 매우 가까운 존재였으며 그녀가 1819년에 섬을 떠났을 때 나폴레옹은 매우 슬퍼했다.

알빈이 1816년에 낳은 딸을 나폴레옹의 사생아로 보는 견해도 있을 정도. 몽톨롱은 이러한 관계를 알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즉 독살설의 주인공으로 지목된 것에는 그럴 듯한 배경이 있는 셈이다. 또한 과거에 군대 공금을 횡령한 전력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몽톨롱이 나폴레옹이 죽은 후 받게 될 유산을 노리고 동행을 자처했다고 보기도 한다. 실제로 나폴레옹 사후 가장 많은 유산을 챙긴 건 몽톨롱이었다. 여러모로 의구심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물이다.

괴팍한 성격의 구르고와는 달리 나폴레옹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그의 임종 때까지 그를 충실히 보필했다. 덕분에 유산으로 한 몫 챙긴다.

 

 

베르트랑(1773.3.22 ~ 1844.1.31), 1821년까지

1797년 나폴레옹의 1차 이탈리아 원정 당시 나폴레옹과 처음 만났고 이후 이집트 원정에도 동행했으며 아우스터리츠 전투, 예나 전투, 에슬링 전투, 뤼첸-바우첸 전투, 라이프치히 전투 등에 참가해 많은 활약을 한다.

황실 궁정대원수였던 뒤로크 장군이 1813년에 사망하고, 후임자 콜랭쿠르 장군이 얼마 안 가 외무장관이 되자, 세 번째이자 마지막 궁정대원수가 된다. 나폴레옹이 엘바 섬으로 유배될 때 나폴레옹을 따라갔다.

이후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되자 부인과 아이들을 다 동반하고 가족 전체가 유배길에 동행하게 된다. 나폴레옹의 지근거리에 머물렀던 '라스 카즈'나 '구르고' 등과는 달리 롱우드에 살지 않고 떨어진 시가지 쪽에서 지내면서 주로 특정요일이나 정해진 때에만 나폴레옹을 만나게 되는데 부인과 아이들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롱우드 하우스에서 가까운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가 세인트헬레나로 떠난 이후에 열린 궐석재판(1816년 5월)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프랑스로 돌아온 이후인 1821년 10월에 복권되었다.

병세가 악화된 나폴레옹의 마지막 시기와 임종까지의 순간에 대해서 상세히 기록한 인물. '군대, 선두'라고 알려져 있는 나폴레옹의 마지막 말도 베르트랑이 기록한 것이다.

훗날인 1840년 10월, 나폴레옹 유해 송환단의 일원으로 세인트헬레나에 돌아와 유해를 수습했으며, 1840년 12월에 열린 나폴레옹의 장례식 주관에도 참여하였다.

사망 3년 후인 1847년 5월 5일, 나폴레옹 사망 26주년을 맞아 시신이 앵발리드의 나폴레옹 곁으로 이장되는 '영광'을 누린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대하소설 몽테크리스토 백작 도입부에서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잠깐 언급된다. 당시 나폴레옹을 따라 엘바 섬에 있던 베르트랑은 선장의 명령으로 전령임무를 맡은 주인공 '에드몽 당테스'에게 정황상 황제 복귀 음모가 담긴 것으로 보이는 편지를 맡긴다. 그런데 하필 편지 수령인이 에드몽을 취조한 검사 빌포르의 아버지이자 골수 공화파 '누아르티에 백작'이였고, 검사 빌포르는 자신의 출세길이 막힐까 두려워 증거를 인멸하고 입막음을 위해 주인공을 절해고도의 감옥에 집어넣는다.

 

오미어러(1786~1836), 1818년까지

 

세인트헬레나 시절 나폴레옹의 첫번째 주치의.

1815년 당시 영국 해군 군의관이었고, HMS 벨레로폰 함에서 근무하던 중 (영국으로 가기 위해) 배에 승선한 나폴레옹을 만나게 된다. 이후 영국 정부의 허가를 얻어 세인트헬레나로 동행한다.

나폴레옹 일행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데, 한편으로 그들에 대한 상세한 보고를 영국 정부에 올리는 첩자역할도 담당한다.

이후 영국 정부와 허드슨 로 총독이 나폴레옹을 점점 가혹하게 다루는 것에 대해 반대하며 총독과 큰 불화를 겪는다. 결국 옹졸한 총독의 고자질에 의해 본국 정부로부터 해임당하고 1818년 8월에 섬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이후 오미어러는 영국 정부와 허드슨 로를 비판하다가 해군에서도 잘리고 소인배 허드슨 로에 의해 소송까지 당했으나 재판부가 로의 고소를 무시하는 바람에 위기에서 벗어난다. 오히려 나중에 오미어러는 허드슨 로를 두고 나폴레옹을 학대한 파렴치한이라며 그의 악행을 폭로하며 비난했다. 결국 로는 이 여파로 세인트헬레나 총독에서조차 잘리고 한직기지 부대장이나 전진하면서 오히려 세인트헬레나의 총독자리가 가장 황금기라고 할 정도(적어도 이 섬에서 총독이 가장 높은 위치이니)로 늘그막까지 여기저기 한직을 오고가면서 살다 갔다. 오미어러가 나폴레옹을 박대한 복수를 허드슨 로에게 제대로 해준 셈이다.

 

 

 

프란체스코 안토마르치(1789~1838)

황제 나폴레옹 덕분에 온갖 수단을 동원해 큰 재산들을 모았건만, 은혜도 모르고 인색하기 그지없었던 '나폴레옹의 가족들'이 고용해서 보낸 (싸구려) 의사. 나폴레옹이 살아 있을 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으나 정작 죽은 뒤에 그의 열악한 유배생활과 영국 관리들의 갑질을 밝혀내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나폴레옹과 동향인 코르시카 사람으로, 1819년 9월 20일에 새로 추가되는 다른 일행들[ 과 함께 섬에 도착한다. 이후 나폴레옹의 임종까지 사실상 주치의 역할을 맡게 되는데, 이 사람은 원래 산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가 아니라 죽은 사람을 연구하는 해부학자였다.

그래서 치료는 어설펐으며 심지어 의사로서 자리를 지키지 않을 때도 많았던 그를 나폴레옹은 매우 경멸했다. 나폴레옹은 몽톨롱이 보여준 것과 같은 전적인 충실함을 요구했으나, 안토마르치는 그러기는커녕 나폴레옹을 간단히 진찰한 후 세인트헬레나 섬의 수도인 제임스타운으로 가서 대부분 그곳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특히 툭하면 베르트랑의 집으로 가서 베르트랑 부인과 놀아났는데, 이것이 나폴레옹의 분노를 더욱 증폭시켰다.

"내 어머니가 삼천 내지 육천 파운드만 썼다면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괜찮은 의사를 보낼 수 있었을 텐데..."

"안토마르치는 무식하고 믿을 수가 없다. 이곳에서 들은 말을 다른 곳에다 퍼트리고 돌아다니는데, 그건 의사로서의 의무를 지키지 않는 것이다. 말을 퍼트려도 왜곡해서 퍼트리지. 그는 당신(베르트랑)의 부인에게 마음이 있다."

-베르트랑의 일기, 1821년 1월 29일

황제께서 저녁식사를 하다 토하셨다. 황제께선 아홉시에 안토마르치를 내보냈다가 열 시에 다시 불렀으나 방에 없어서 그를 찾으러 우리 집(베르트랑의 집)으로 사람을 보냈다. 안토마르치가 황제에게 가자 황제는 그를 거부했다. 새벽 두 시에 황제는 의사를 불러 두 시간 동안 심하게 화를 내셨다. "대원수(베르트랑)는 의사를 자기 부인의 침실시종으로 쓰고 있군. 안토마르치는 불량스럽고 약삭빠르기만 하고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놈이다. 그 놈은 시종의 좆같은 놈이다."

-베르트랑의 일기, 1821년 1월 20일

얼마 후인 1821년 1월 31일, 빡친 나폴레옹은 안토마르치에게 거취를 결정할 것을 요구했고, 안토마르치는 그 요구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더 유능한 새로운 주치의가 올 때까지는 남아있기로 한다. (물론 새 주치의가 오기 전에 나폴레옹은 사망한다.)

이후 병세 악화로 죽음을 직감한 나폴레옹이 유언에 대한 구상에 들어가게 되는데, 원래는 안토마르치에게 20만프랑(현재기준 약 80만 미국달러)을 남겨줄 생각이었지만 거듭되는 그의 태만에 분노한 나폴레옹은 안토마르치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내가 죽으면) 목 매달고 죽을 줄을 살 수 있도록 안토마르치에게 20프랑을 남겼다.

-베르트랑의 일기, 1821년 4월 9일

나폴레옹이 죽자 영국 해군 군의관 아르노트와 함께 그의 시신을 해부했으며 데스마스크도 제작한다. 이 과정에서 안토마르치는 데드마스크의 주형을 빼돌린 후 이를 팔아먹었다고 한다. 이를 사들인 회사는 데드마스크를 말 그대로 찍어냈고, 이로인해 나폴레옹의 공식 데드마스크는 4점에 불과하지만, 유통되는 데드마스크가 너무나 많아서 골동품 혹은, 역사적 유물로써의 가치는 바닥으로 떨어진 상태. "20프랑은 필요없습니다. 전 폐하의 얼굴을 팔아치울 생각이거든요."

아이러니한 것은 나폴레옹 생전엔 도움이 안 되었던 그가 사후에는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전공이었던 부검에서 나폴레옹의 사인이 위암이라는 결론을 내리기는 했지만, 간이 심각하게 부어 정상적인 사람의 간보다 눈에 띄게 컸다란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이 보고서가 발표되지 못할 걸 안 안토마르치는 사망자의 장기에서 조직 표본을 두 점 채취하여 보관해 두었다.

이 표본은 여러 경로를 거쳐 런던의 한 의학박물관으로 입수되었고 1913년 그곳에서 현미경으로 분석한 결과 나폴레옹의 사인은 아메바 감염에 의한 간염. 즉 극도로 열악했던 수감환경 탓이란 것을 밝혀냈다. 의도는 모르겠지만 어찌됐건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에게 도움이 되긴 된 셈이다. 안타깝게도 이 조직 표본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런던이 독일 공군의 폭격을 받았을 때 영원히 소실되었다.

한편 안토마르치는 나폴레옹의 사망 후, 프랑스를 거쳐 폴란드에서 살다가 신대륙으로 건너가서 결국 쿠바에서 정착했으며, 1838년 황열병으로 사망했다.

 

 

 

1821년, 죽음과 독살설

 

나폴레옹은 그렇게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6년간의 유배 생활을 보내다가 위암으로 인해서 1821년 5월 5일 오후 5시 49분에 향년 5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나폴레옹이 마지막으로 한 말은

France, armée, tête d'armée, Joséphine.

(프랑스, 군대, 선봉, 조제핀)

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의 임종을 지켰던 베르트랑 장군의 기록에 따르면 '군대의 선두(선봉)'이라고 들리는 말이었다고 한다. 5월 5일 새벽에 남긴 말이었는데 '프랑스'나 '조제핀'이라는 말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 부분(프랑스, 조제핀)은 정확한 출처가 필요하다.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했듯이 세인트 헬레나에서도 탈출을 시도할 가능성을 두려워한 영국이 비소로 독살했다는 주장이 있다. 남아있는 나폴레옹의 머리카락을 분석해 보면 비소 함유량이 상당히 많다는 이유로 독살설을 지지하는 설도 있고, 여러 가지 이유로 반박하는 설도 만만치 않다. 단적으로 관이나 내장재 등 죽은 다음에도 비소가 축적될 이유는 많다는 이야기다. 가령 건물 내/외벽에 바르는 안료였던 Cupric Green으로 인해 비소 중독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실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극적인 삶을 살다 생전의 권세에 비해 초라하게 삶을 마감한 인물이기에 암살설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이외에도 사망 원인에 대해 신장 질환을 비롯한 여러 주장이 있다.

 

나폴레옹의 데스마스크

 

 

1840년, 나폴레옹 1세 유골의 귀환(Retour des cendres)

 

나폴레옹의 유해는 사후 19년만인 1840년, 자신의 생전에 건설되기 시작한 파리의 에투알 개선문을 통과하여 앵발리드(Les Invalides)로 옮겨져 이곳 군사예배당의 지하묘지에 안장되었다. 

프랑스인들이 복고 부르봉 왕가를 몰아내고 루이필리프를 옹립한 부르봉-오를레옹 왕가 (7월 왕정)에서, 나폴레옹의 이장이 결정된다. 이유는 7월 왕정이 부르봉 왕가와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고, 시민들을 달래고 통합하고, 위대한 프랑스의 영광 재현이라는 정책목표 등 매우 다양했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목표 달성에 실패한다. 이 대형 이벤트는 나폴레옹의 마지막 몇 년을 다룬 영불합작영화 <Monsieur N>(2003)에서 묘사하기도 했다.

보나파르트파가 가진 폭발력 등을 이유로 내심 나폴레옹을 불편하게 여겼던 왕정은 나폴레옹의 관과 이를 보기 원하는 민중들을 기피했다. (영화 <Monsieur N>과 달리) 탑처럼 커다란 운구마차에는 맨 위에 관이 있었지만 정작 실제 관은 마차 가운데 부분에 격납했고, 파리를 제외한 도시는 모두 피했다. 앵발리드의 예식에는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 제한되었다. 그나마도 왕정쪽 정치인들은 굉장히 산만하고 무성의한 분위기였다고.

이에 반해 민중은 프랑스 제국 근위대 생존자들이 옛 군복을 꺼내입어 황제를 맞았고 구경꾼도 40만이나 밀집하였다. 그들은 제1제정에 대한 향수를 자극받았으며, 자신들의 감정을 무시하고 '조국의 순교자 황제'에게 무례히 구는 왕정에 분노했다. 왕실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꾸민 이벤트는 역으로 왕정과 민중의 단절을 드러내는 신호탄이 된다. 이는 7월 왕정의 권위를 상처 입히고 나폴레옹 신화를 강화한다. 그리고 이 신호탄은 2월 혁명이후 나폴레옹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가 70%의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되는데도 일조했다.








나폴레옹 평가

 

역사 vs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알렉스 젠들러

히틀러와 나폴레옹이 자주 비교되긴 하지만, 그러한 비교는 허상에 불과하다. 히틀러는 12년간 권력을 행사한 뒤 군대를 제외한 분야에서는 독일에 해골과 쓰레기만 산더미처럼 남겼다. 반면 나폴레옹은 단 한 번도 전투에 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프랑스에 남긴 행정체제와 시민개혁만으로도 여전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들의 하나로 평가될 것이다.

 

앨리스터 혼 (영국의 역사학자)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은 19세기의 아돌프 히틀러에 불과하다...대중의 일반의지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을 한 개인이 대표할 수 있다는 믿음의 최상위에 올려놓은 것이 황제(L'Empereur)냐, 영도자(Der Fuehrer)냐의 차이 정도일 뿐이다...그에 비한다면 최후까지 프랑스 공화국의 집정관으로 공화주의의 테두리 하에서 행동했고, 황궁은커녕 일개 하숙집에서 숙식했던 로베스피에르가 황제 폐하만큼이나 야박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That Sweet Enemy: Britain and France: The History of a Love-Hate Relationship, Robert Tombs, Isabelle Tombs 공저

 

아돌프 히틀러와 동급의 악한으로 보는 관점들도 있는 반면에 천재적인 전쟁 수행 능력을 빼고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 하나로 뽑는 관점이 나올 정도로 나폴레옹을 바라보는 시각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며 이는 그만큼 그가 인류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인물임을 드러낸다. 이러한 복잡한 평가는 그가 근대의 인물이라는 특수성에서 기인하는데 호쾌하게 군대 끌고 적군을 신나게 쳐부수면 영웅으로 떠받들었던 고대, 중세와 달리 근대부터는 훨씬 복합적으로 역사적 인물들을 평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내부의 평가

 

현대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나폴레옹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정치 성향을 대강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이다.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은 주로 우익 성향이다. 이들의 관점에서 나폴레옹은 두말할 것 없이 프랑스 역사상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던 개인으로, 전 유럽을 휩쓸며 프랑스의 군사력, 문화, 사상의 선진성의 정점을 부족함없이 드러낸 인물이다.

반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은 주로 좌익 성향이다. 프랑스 내에서 나폴레옹에 대한 가장 큰 비판은 그가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공화국의 전통을 첫 단추부터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것에 집중된다. 나폴레옹 1세 사후 보나파르트주의 등 왕당파의 득세, 그리고 이로 인한 제2공화국 수립 이후로도 끊이지 않던 혼란, 나폴레옹 3세라는 웃픈 인물의 등장으로 가까스로 봉인되었다가 다시 나락으로 가버린 프랑스 정치사의 원죄를 나폴레옹 1세에게 묻는 것이다. 이들은 비슷한 시기에 건국된 미국이 훨씬 건강하고 신념 있는 정치 지도자들에 의해 공화국의 전통을 발전시켜나간 것을 비교하며 프랑스의 근대정치사를 너무나도 뼈아프게 여긴다.

현대 프랑스 정치에서 혹시라도 나폴레옹이 등장하면 십중팔구 드골과 엮여서 등장하기 마련이다. 프랑스 우익 세력은 현 제5공화국의 강력한 대통령제를 옹호하는 편인데, 이는 직접적으로는 드골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지만, 역사적 인물을 주워섬길 때 나폴레옹(심지어 루이 14세까지)이 등장하는 식이다. 대강 "프랑스는 역시 중앙집권화돼야 잘 나가!"하는 논조. 같은 이유로 대통령제에 부정적인 의견을 가진 사람은 드골을 비판하다가 나폴레옹까지 걸고 넘어지는 식으로 나간다.

현대 프랑스에서는 국가의 영웅이라는 찬사와 나라를 전쟁으로 이끈 전쟁광이라는 비판이 공존하고 있는 논란의 대상이다.

 

 

 

 

 

영웅 또는 전쟁광

 

허나 좋게 보든 나쁘게 보든 봉건주의의 잔재를 완전히 종식시킴과 동시에 프랑스 혁명 이후 극도로 불안정했던 프랑스의 정국을 안정시키고 근대 유럽의 시작을 알리며 시대의 흐름을 넘어 미래를 내다본 인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법치주의를 내세우며 만든 《나폴레옹 법전》으로 현재도 《대륙법》체계의 원형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전까지 프랑스 법률 체계는 고대 로마로부터 잔존한 《로마법》의 잔재를 기초로 지역과 상황에 따라서는 《교회법》이나 지방의 《관습법》이 통용되고, 거기에다가 왕이 공표하는 칙령이 뒤섞인 아주 복잡한 구조였다. 단지 복잡하기만 한 게 아니라 너무나 방대하고 지방이나 상황에 따라서 다르기도 해서 상당히 혼란스러웠는데, 이걸 전부 다 《나폴레옹 법전》 한방으로 완전히 갈아엎어 버렸다. 또한 이 《나폴레옹 법전》의 편찬으로 절대왕정의 요람이던 유럽에 시민 평등 사상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나폴레옹 법전》은 현재 바빌로니아 함무라비 대왕의 《함무라비 법전》,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 편찬된 《로마법대전》과 더불어 세계 3대 법전으로 불리고 있으며 나폴레옹 본인도 "나의 진정한 영광은 마흔 번에 걸친 전쟁의 승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 민법전을 말살할 수 없는 데 있다."며 한때 전 유럽을 군사적으로 제패한 것 보다《나폴레옹 법전》편찬을 더욱 자랑스러워 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법의 구성과 기본 논리는 모두 《나폴레옹 법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가문이나 혈연이 아닌 능력 위주로 운영되는 관료제를 확립하고 이러한 인재를 키워내기 위한 근대적 엘리트 육성 교육 제도인 그랑제콜 제도를 도입하였으며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나폴레옹 지적법(Napoleon's Cadastre)을 제정하여 토지 측량 및 관리 체제를 확립함으로써 근현대적인 지적 측량 및 부동산 등기 체제의 효시를 세웠다. 또한 현대 정치 체제의 근간인 정교분리 역시 나폴레옹 시대에 비로소 완전히 확립된 것이다.

군사 면에서도 기동력을 중시하고 국민군의 전투력을 애국심의 고취로 끌어올리는 등 19세기 전쟁의 개념과 체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이것이 지금도 전쟁의 신으로 추앙받는 이유다. 즉, 단순히 잘 싸우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전쟁의 개념과 방식 자체를 바꿔 버린 인물이라는 것.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대륙 봉쇄령으로 물가를 최고점으로 끌어올리는 등의 결과로 당시 최강국으로 성장했던 영국을 얼어붙게 하기도 했다. 참고로 당시 영국의 경제력은 동원 가능한 재원 기준 나폴레옹 프랑스의 거의 10배에 가까웠다. 쇼미더머니를 치고 끝까지 나폴레옹을 잡으려고 든 영국의 경제력이 사기였다.

그의 몰락을 기회삼아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등 유럽의 구(舊) 세력들은 유럽을 프랑스를 혁명 이전의 구(舊) 체제로 돌려놓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나폴레옹 몰락으로부터 한 세기 만에 19세기 중후반 유럽은 각종 혁명이 발발하며 나폴레옹의 비전은 대부분 실현되고 유럽 대부분 국가의 왕정, 제정 체제는 붕괴했다. 또한 나폴레옹이 도입한 법률과 제도 역시 워낙 각 국가들의 사정에 잘 맞게 짜여져 있던 까닭에 나폴레옹의 흔적을 지우고 싶어 안달이던 그의 정적들조차 나폴레옹이 남긴 유산을 크게 바꾸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폴레옹이 근대 유럽사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나폴레옹의 역사적 위치는 영국의 역사학자 토머스 칼라일에게 영향을 주어 영웅이 역사를 만들고 이끌어간다는 영웅사관을 창시할 정도였다. 즉, 한 사람의 어마어마한 존재감 때문에 역사를 보는 관점마저 영향을 받았다.

나폴레옹은 백일천하 동안 불리한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자유주의자들과 동맹하여 "자유 제국"을 약속했다. 짧은 지배기간 때문에 사실상 이 약속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실제로 그 약속을 지킬 의지가 있었는지도 의문이지만... 실제로 나폴레옹은 몰락 이후 "내가 그런 헌법 만든다고 시간이나 낭비했다니! 어차피 다시 유럽의 지배자가 되면 전부 없애버릴 의회였는데!"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 약속 때문에 그는 "자유주의 황제"라는 하나의 환상을 추가했다. 특히 부르봉 왕조 복고 왕정의 무력함과 혁명의 성과를 부정하려는 퇴행성은 나폴레옹에 대한 향수를 강하게 불러일으켰고 결국 군국주의와 내셔널리즘, 자유주의, 혁명과 일인 독재가 결합한 "보나파르티즘"이라는 프랑스 특유의 기묘한 정치사상을 만들게 된다. 그의 조카 나폴레옹 3세가 보나파르티즘을 통해 권력을 획득했고, 나폴레옹 3세까지 몰락한 뒤에도 그 영향력은 지속되었다. 국가 내 계급과 출신 배경에 따른 봉건적 사회적 차별 관계를 시민 개병제를 통해 평등하게 만들고 이러한 자유주의적 사회적 비전을 강력한 1인 군사 독재자의 권위를 통해 이룩하자는 얼핏 보면 진보적이면서도 그 방법은 지극히 권위주의적인 정치적 풍조는 19세기, 20세기 들어 유럽, 나아가 세계사 전반에서 강력한 영향을 발휘해왔다. 20세기 전간기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를 비롯한 중동부 유럽의 군사정권, 내셔널리즘과 평등 사상이 기묘하게 결합된 파시즘, 박정희나 장제스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소위 스트롱맨 군사 독재자들, 극우적 내셔널리즘과 과격한 평등주의를 설파하며 하층 대중의 지지를 끌어모으는 21세기의 우파 포퓰리스트에 이르기까지, 보나파르티즘의 영향을 받은 사상들은 근대 세계사 속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풍조로서 굳어졌음을 볼 수 있다. 사실상 현대의 독재자의 기준을 만든 인물이라고 볼 수 있으며 독재자들에게 있어 나폴레옹은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다.

혼란스러웠던 프랑스 초기의 공화정이나 무기력하고 퇴행적인 부르봉 왕조의 복고 왕정과 비교해 보면 나폴레옹 시대는 문제도 많았지만 분명 영광과 번영이 있었던 시대였다. 그러나 그 번영은 무수한 전쟁을 통해 주위 나라들에게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받아내며 일구어낸 것인 만큼 무작정 칭송하기는 곤란하다. 나폴레옹이 법전의 완성을 위시하여 여러 선구자적 정책들을 도입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당시 사회의 난맥상은 단기간에 해결하긴 어려운 것들이었다. 결국 정부 재정의 문제나 당대 사회의 혼란들을 해결한 것은 그런 선구자적 정책이나 제도 개혁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의 승리였다. 그 승리가 계속되었을 때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였지만 지속적인 전쟁은 착실히 국력의 소모를 불러왔고 전쟁에서 패배했을 때 그는 너무나 쉽게 몰락했다.

참고로 똑같은 구국 영웅이라는 점에서 잔 다르크와 비교되기도 한다. 실제로 잔 다르크와 나폴레옹을 제도권 언론에서 비교한 자료도 많다. 차이점이 있다면 나폴레옹은 유럽 전역+북아프리카 까지 여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행정체계 등 군사 외적으로도 엄청난 영향력이 있어 잔 다르크보다 큰 족적을 남겼으나 대신 나폴레옹이 현재 프랑스 내에서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반면 잔 다르크는 아직도 프랑스 국민들에게 국민영웅으로 칭송받고 있으며 그녀의 반지가 반환되었을 때 축하 행사를 매우 크게 열었고 오를레앙에서는 그녀를 기리기 위한 축제가 몇백년 째 매년 열리는 등 후한 대접을 받는 것과 대비된다.

 

 

군사적 능력

 

전쟁의 신 그 자체(der Kriegsgott selbst).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말년의 아서 웰즐리에게 한 기자가 찾아와 이렇게 물었다. "공작님은 나폴레옹을 워털루에서 이겼는데, 공작님의 군사적 재능이 나폴레옹보다 훨씬 낫지 않나요?" 웰즐리는 정색을 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현재에도, 과거에도, 언제라도, 최고의 전략가는 나폴레옹일 뿐이오."("In this age, in past ages, in any age, Napoleon.")

 

나폴레옹의 전술적 능력은 동시대인들의 수준을 몇 수나 앞서 나갈 정도로 뛰어났고 다른 나라들은 그의 용병술을 분석하고 모방하기 바빴다. 특히 군사적 재능만 놓고 보면 동서고금을 통틀어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인물이며 그를 잡기 위해 프랑스를 제외한 전 유럽의 강국들이 7차례에 걸친 동맹을 해야만 했다. 애초에 유럽은 지리적, 역사적 배경 및 민족 구성 등 다양한 요인들 때문에 하나의 절대 강자가 헤게모니를 장악하기가 매우 매우 어려운 대륙이다. 그런 점에서 로마 제국 멸망 이후 오늘날까지 유럽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패권을, 그것도 사실상 혼자 힘으로 구축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의 군사적 능력이 뛰어나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포병장교는 수학적 계산능력과 탄도학 지식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똑똑하고 머리 회전이 빠른 인재들이 많았고 당시 프랑스 포병대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특히 그 엘리트적인 성격이 강한 편이었다. 그랑제콜 중에서 최상위에 속하는 에콜 폴리테크니크부터가 원래는 프랑스군 포병장교 양성기관이었다. 이 때문에 상당수의 포병 장교들이 혁명이 발생하자 외국으로 망명했지만 나폴레옹은 드물게도 프랑스 혁명에 적극적으로 투신한 케이스였다.

게다가 군사 유년학교와 사관학교를 거치며 제대로 훈련받은 엘리트 장교임에도 불구하고 병사들과 고락을 함께하기를 주저함이 없었기에 병사들 사이에서의 인망은 대단했다. 나폴레옹은 선천적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고, 평생 아무리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휘하 병사들을 장악하는 데에는 거의 어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이는 엘바 섬을 탈출했을 때 그를 체포하러 간 군대가 오히려 나폴레옹의 연설을 듣자마자 힘차게 황제 폐하 만세를 외치며 그의 휘하로 흡수된 사건에서 아주 잘 드러난다. 아무리 작전 입안이나 전술 수행능력이 뛰어나도 인간적인 카리스마가 없으면 지휘관으로 활약하기는 힘든데, 나폴레옹처럼 두 가지 재능을 다 갖추고 있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포병장교 출신이지만 나폴레옹의 전술은 포병 / 기병 / 보병의 환상적인 조화와 협동을 이용한 것이 그 진수였다. 포병이 먼저 공격하고 기병이 치고 빠지며 유린하고 최종 타격으로 보병이 결정타를 날리는 전술을 선호했고, 이를 위해 병과 간의 칼로 잰 것 같은 타이밍 맞추기를 매우 중요시했다. 나폴레옹이 익힌 이러한 군사 기술과 제병 합동 전법의 재능은 다른 나라에 비해 선진적이고 효율적이었다. 거기다 병사들의 사기 또한 높았던 혁명기 프랑스의 병참 제도 하에서 카리스마를 갖춘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대육군은 당시 유럽에서 당해낼 장군이 어디에도 없었고 이는 나폴레옹의 적들도 인정했다.

전술도 전술이지만 나폴레옹의 천재성을 진정으로 돋보이게 하는 건 전략 및 작전술에서의 능력이다. 현대적 의미의 작전술이라는 개념 자체를 정립한 것은 소련의 알렉산드르 스베친이지만 최초로 인지하여 작전술을 인식할 수 있게 만든 배경을 만든 것이 바로 나폴레옹이다. 작전술이란 전략지침에서 제시된 군사전략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는 방향으로 일련의 작전을 계획하고 실시하며 전술적 수단들을 결합 또는 연계시키는 활동으로 쉽게 설명해서 전략을 달성하기 위하여 전술들을 결합하여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다. 손자병법의 이상적인 조건인 이겨놓고 싸운다를 누구보다도 잘 실천한 사람이다. 즉 광범위한 정보를 수집하고 이 정보를 통해 적군의 이동 경로 및 작전 진행을 사전에 예측하고 부대를 빠른 속도로 이동시켜 유리한, 원하는 장소에서 적보다 많은 병력으로 적을 상대하는 것에 무서울 만큼 집착했고 또 잘해낸 것이 나폴레옹이 거둔 수많은 승리를 가능하게 했다.

사실 나폴레옹 이전에도 당연히 병법에서 굳이 아군이 적군보다 적은 수인데 싸워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적을 분리시켜서 아군보다 적은 단위로 만들고 각개격파하는 걸 이상적인 상황으로 상정하긴 했다. 이를테면 사르후 전투 때 천명제가 명나라의 10만 원정군이 4길로 나뉘어서 진격해오는 걸 보고 4만에 불과한 후금 군대가 바로 각개격파한 것처럼, 기회를 날카롭게 포착하고 과감하게 움직일 줄 아는 지휘관들은 이런 전술을 애용했다. 다만 나폴레옹은 단순히 적군이 알아서 분리되었을 때 바로 기회를 잡는 수준을 넘어서서 연락책, 기만책, 병참술 등 온갖 가능한 방법을 총동원해서 적군을 순식간에 자기 의도대로 분리시키고 틈을 만들어냈다. 게다가 나폴레옹의 부대는 적군 유인을 위해 흩어졌다가도 적군이 그 작전에 넘어가 서로를 지원하기 힘들 정도로 충분히 분리되었다고 판단되는 순간에는 즉시 분리했던 부대를 결집해서 결전을 벌여 각개격파하는 기술을 매우 잘 선사했다.

나폴레옹이 한 말로 알려진 "폐하께서는 항상 소수의 병력으로도 다수의 병력을 이기셨습니다."라고 부하가 감탄하자 "아니다. 나는 (내가 싸우는 곳에서는) 늘 다수의 병력으로 소수를 이겼다."라는 말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사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대프랑스 동맹군에 비해 해당 전역에 동원한 전체 병력 자체가 처음부터 수적 우위를 차지한 적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대로 적군을 분산시키고 아군은 집중시키는 그의 능력으로 인해 직접적인 교전 상황에서만큼은 오히려 프랑스군이 수적 우위를 차지하게 만들었다. 나폴레옹 스스로도 "대군(大軍)에는 병법이 필요없다."라고 할 정도로 교전 상황에서의 수적 우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나폴레옹의 병참술은 단순히 뛰어난 수준을 넘어서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꾼 혁명에 가까울 정도였다. 물론 철도가 나오기 전까지는 외국으로 출정간 군대의 모든 보급을 자국에서부터의 보급만으로 지원해줄 순 없었기에 주둔한 외국 현지에서 사실상 약탈에 가까운 강제 징발에 대한 의존은 여전히 상당할 수 밖에 없었지만, 당시의 기술력과 행정력을 총동원해 보급소, 분배소를 설치하는 제도를 새롭게 정비하고 보급품과 수송 수단에 대한 생산 체계와 신기술도 중점적으로 지원해서 현지 징발에 대한 의존도를 최소화했다. 나폴레옹은 군대가 외국 원정을 나가서도 보급 열세 상황에 놓이지 않기 위해 가능한 모든 역량을 구사했고, 이는 수십년 후에 철도가 보급되면서 군대가 국가에서 주는 보급만으로 운용될 수 있는 시대를 여는 발판을 제공했다.

유럽 역사상 손꼽히는 난세였던 만큼 명장도 많았으며 당대에 전술적인 면에서 나폴레옹과 붙어볼 인물이 아주 없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략과 작전술에서는 그를 따라갈 만한 인물은 사실상 없었다. 심지어 그가 완전히 몰락하고 건강마저 잃었던 백일천하 때조차, 전략 및 작전술 단계에서는 아주 훌륭한 모습을 보였다. 웰링턴마저 나폴레옹에게 완전히 낚여 허겁지겁 병력을 집결했을 정도.

다만 나폴레옹은 전술-작전술 단계까지는 불세출의 천재가 맞지만, 더 크게 봐야하는 대전략 차원에서는 실책을 제법 저질렀다. 나폴레옹은 대륙 봉쇄령 이후 벌어진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 웰링턴의 영국군과 게릴라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러시아 원정을 감행하여 양면전쟁을 하는 무리수를 두었다. 이게 치명적인 실책인 것이, 나폴레옹은 이후 라이프치히 전투까지 모든 전투에서 이베리아 전선 유지를 위한 병력을 항상 계산하며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러시아 원정에서는 미하일 쿠투조프의 청야전술에 제대로 말려 그렇게 본인이 중시하던 보급이 망해서 끝내 실패해 버렸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나폴레옹은 큰 전략적 실책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또한 워털루 전투의 패배 요인은, 이전까지 이루어졌던 병과간의 상호작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게 인기 있는 분석이다. 당시 나폴레옹은 지병인 치질이 악화되어 하루 종일 엎드려 있어서 잠도 자지 못하여 정상적인 지휘가 불가능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에 란, 뮈라, 마세나, 베시에르, 베르티에, 모르티에, 다부 등 나폴레옹을 보좌했던 오랜 측근들이 전부 빠졌다. 워털루 전투 시점에서 란, 베시에르, 베르티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뮈라는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그의 몰락에 기여한 전력 때문에 합류를 거절당했다. 마세나는 나폴레옹에 합류하길 거부했고 모르티에는 신경통으로 쓰러졌으며 다부는 마르몽에게 배신당한 기억이 뼈아프게 남은 탓인지 전쟁장관직을 맡겨 파리에 남겨두었다. 이런 여러 악재로 인해 기병과 포병이 따로 놀게 되어, 기병은 사지로 돌격하고 포병은 같은 편의 기병에게 포격을 가하는 촌극이 연출되었다. 기병대를 맡은 미셸 네는 포병과의 협력 없이 혼자 돌격해서 기병을 격파하고 에마뉘엘 그루시도 나폴레옹이 원한 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싸우는 등 난장판이었다.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의 참모장이었던 술트는 참모로서의 재능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프로이센군을 추격, 섬멸하는 임무를 맡은 그루시는 처음부터 원수감이 아니었다. 사실 그루시만 정상적으로 움직였어도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이 압승을 거두었을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전장에서 여러 해프닝이 있었지만 나폴레옹이 짜놓은 판대로 돌아가고 있었고 웰즐리조차도 이거 우리가 당했다라며 멘탈을 잃기 직전이었다.

기병을 지휘한 네는 용맹하고 성실한 장군이었지만 기병의 천재였던 뮈라와 달리 기병 운용능력이 평범했다. 뮈라는 지성은 보잘것 없었지만 언제, 어디로 기병대를 돌격시켜야 할지를 정확하게 판단하는 탁월한 감각을 갖고 있어 기병 지휘에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반면 네는 일선에서 부대를 이끄는 능력은 뛰어났지만, 전략적인 판단능력은 결여되어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게다가 워털루 당시의 네는 이중 배신을 한 입장상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든 상태였다. 아무리 나폴레옹이 제대로 활약을 못했다지만, 워털루 전투에서 뮈라가 나폴레옹의 기병을 다뤘다면 오히려 프랑스가 이겼을 거라는 의견이 큰 힘을 얻고 있다. 사실 워털루 전투에서도 끝내 주요 요충지를 함락시켜 아서 웰즐리가 후퇴를 고려하고, 나폴레옹은 샴페인을 터뜨릴 준비를 하는 상황까지 갔으나 그루시는 오지 않았고, 반대로 블뤼허 장군의 증원이 있었던 영국군에게 패했다.

나폴레옹은 이런 군사적 업적을 쌓기 위해 건강을 희생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폴레옹의 토막잠 전설에서도 알 수 있지만, 군무로건 공부로건 소싯적부터 워낙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다 쏟아부으며 과로하는 스타일이었으며 성장 환경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경과민 증세도 있었다. 또 병사들과 고락을 함께하며 절대적 신임을 받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당시 병영 생활이라는 것이 원체 개판이었던지라 열병, 위궤양과 탈장, 치질 등의 여러 가지 병을 앓아 사관학교 과정을 거쳐 소위로 임관했던 소년 장교 시절부터 내내 아프지 않을 때가 없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가 위암으로 사망한 것을 생각하면 체질적으로 위가 안 좋았던 모양이다.

한편, 해군 및 해전 쪽에 대해서는 완전히 문외한이었다. 해군 장교들에게 육군식 명령 체계를 강요하는 등, 해군 쪽 인사들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다. 당시 그가 내렸던, 해군의 특성을 완전히 무시한 명령을 보면 나폴레옹이 얼마나 해전에 무지했는지 알 수 있다. 당시 범선은 바람과 해류를 이용하여 움직이는 것으로, 육지에서처럼 "며칠 몇시까지 어디로 이동한다"같은 식의 명령은 바람이 따르지 않으면 실현이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게다가 당시 통신기술의 한계로 항해하는 쪽과 명령을 내린 쪽이 이런 함대의 현재 상황과 갱신된 명령을 서로 전달할 수 없었다. 허나 나폴레옹은 이를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기에 육지에서처럼 "언제 어디까지 어느 함대가 이동한다" 같은 불가능한 명령을 수시로 내렸고, 문제가 생기면 제독 탓을 하기 바빴다. 이는 프랑스의 해전 참패라는 결과를 낳는다.

이 시기 제조된 군함의 품질은 프랑스가 영국보다 우세한 경우가 많았으며 대포 등 양국의 무기 품질도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영국 해군이 프랑스 해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월등했던 점이 딱 하나 있었는데, 바로 수병 및 장교들의 숙련도였다. 오로지 이 하나 때문에, 영국 해군이 군함 숫자나 전력이 열세인 해전이 수없이 많았으나 이를 이겨내고 승리를 밥 먹듯이 거둔 것이다.

현대의 다른 동력원이 있는 배를 다루는 것도 기술적 난이도가 높지만, 바람과 해류로만 이동하는 범선이라는 물건은 다루기가 극히 까다로웠다. 범선이 단순히 180도 선회를 하는 동작도 배의 각 부분을 담당하는 수병들이 바람과 해류에 맞추어 정확한 타이밍에 기계장치처럼 움직여야 했다. 영국 선원들은 이런 정교한 중노동의 반복을 통해 배의 조작에 숙달되었으나, 프랑스 수병들은 영국의 해상 봉쇄 때문에 재해권을 빼앗겨 군함이 항구에서 출항할 수 없었으므로 숙련도를 쌓는 것이 불가능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에는 전 세계 어떤 국가도 예외없이 지상에 함대가 정박한 동안은 선원들을 해고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지상의 군함은 돈 먹는 애물단지일 뿐이라는 이 논리는 더욱 더 프랑스 해군의 질적 향상을 어렵게 하였다.

또한 제독들의 경우 그 질이 영국에 비해 크게 떨어졌는데, 프랑스 육군은 숙련된 장교진들 중 상당수가 프랑스 혁명에 동참해서 육군의 질이 유지된 것과 달리 프랑스 해군의 숙련된 장교들은 대부분이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외국으로 망명해버렸고, 신규 교육을 담당할 교관 자원조차 붕괴되어 버렸기 때문에 해군 장교진의 수준을 복구하는데에는 함대 재건 이상으로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 해군은 함대의 규모가 영국과 얼추 비슷하게 회복했음에도 실제 해전에서는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정리하자면, 이 모든 사정을 알지 못하거나 알아도 관심이 없던 나폴레옹은, 자기 자신이 해군에 문외한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휘하 해군 제독들에게 억지로 작전을 강요하여 프랑스의 해군을 말아먹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어린 시절의 나폴레옹은 사실 해군이 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새로운 과학 기술을 통해 만든 '신무기'에는 큰 집착을 보이지 않았다.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소리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 등장한 그 '신무기'들 중에는 몽상가들의 장난감 수준이 아니라 이후 전쟁의 개념을 크게 뒤바꾼 장비들도 있었음에도 그러했다. 한 예로 미국인 발명가인 로버트 풀턴이 기초적인 수준의 증기선, 잠수함을 소개하며 이것으로 영국 해군을 물리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나폴레옹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결국 받아들이지 않았다. 1782년 개발되어 정찰용 등으로 군에서 시험용으로 사용하던 비행 기구에 대해서도 단순한 유흥거리 정도로 여겼다고 한다.

다만 보존이 용이하고 휴대가 간편한 전투식량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져서 최초로 병조림을 도입하기도 하였고, 훗날 통조림으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를 통해보면 보급 부문은 모르겠으되 자신의 특기인 전투분야와 그에 사용되는 장비에 대해서 보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 이는 결점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신무기가 제대로 된 야전운용 적합성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 검증과 개선이 필요하다. 실제로 나폴레옹이 받아들이지 않은 무기들은 정석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이후 50년(일부는 100년)에 이르는 시간이 걸렸다.

수많은 전쟁을 치러야 했고 자신의 군사적 능력을 통해 유럽의 패권을 유지하던 나폴레옹으로서는 언제 상용화될지도 모르는 신무기보다는, 다른 데다 자원을 투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할 법 했다. 한정된 예산으로 최적의 편성을 하기 위해서는 무기의 성능 뿐만이 아니라 신뢰성과 병참이라는 측면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신무기는 실전이나 충분한 시험 운용으로 검증되기 전에는 신뢰하기 어렵고 대량 생산이 확정되어 단가가 낮아지기 전까지는 병참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더군다나 신무기에 대한 훈련도까지 합치면 비용이 장난이 아니게 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전술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쓸모가 없었다. 중국의 양무운동이 좋은 예인데 아무리 신병기를 만들고 가져왔다고 한들 무기는 아무리 개발을 해도 훈련이 필요하다. 그런데 신병기 생산에 훈련까지 합치면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들기에 차라리 어느 정도 위력이 있고 전쟁을 속전속결로 끝낼 수 있는 구식취급 받는 무기가 오히려 더 쓸모가 있을 수 있다. 증기선은 외륜이 피격되기 쉬운데다 일단 외륜이 피격되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으므로 스크류 추진장치가 발명될 때까지 주력으로 쓰이지 못했다. 로버트 풀턴은 나폴레옹에게 차이고 이번엔 영국으로 갔는데, 거기서도 제대로 된 실용성이 없단 이유로 물 먹고 신기술에 목말라 헤매던 미국에 가서야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룰 수 있었다. 프랑스가 1850년 마침내 증기 전열함을 도입하여 일시적으로 영국에 쇼크를 주긴 했지만, 영국인들은 금세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증기선을 양산해냄으로써 결과적으로 프랑스와 영국의 해군 전력비는 더 벌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잠수함은 전략적으로 유의미한 병기가 되려면 증기선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열기구 역시 여러 가지 약점 때문에 당시 기술 수준으로는 실전에서 정찰용으로 쓰기도 어려웠다. (어딘가의 얼리 어답터랑은 확실히 다르지) 링크

게다가 나폴레옹이 개인적으로 관심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도 어폐가 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는 다른 장교들도 전부 그런 신무기 같은 것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새로 발명된 신무기가 몇 년만에 바로 전장의 흐름을 뒤바꾸어 놓는건 산업혁명 이후인 19세기 후반부터나 현실화되기 시작한 일이고, 그 이전엔 기술의 발전 속도가 그다지 빠르지 않았다. 당장 예를 들면 나폴레옹이 막 임관하던 신참 장교 시절에서부터 그가 퇴역하는 워털루 전투까지 20여년 전장에서 구르는 동안 전쟁의 양상을 바꿔놓은 신병기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았고, 기존 병기들에 아주 약간의 성능 개량만이 있었다. 게다가 신무기의 개발 속도가 상당히 빨라진 이후로도 신무기의 가치에 대해 일선의 장교들이 무시하는 경향은 굉장히 빈번했다. 이를테면 1차대전 시기 장군들은 대부분 항공기를 그다지 고평가하지 않았다. 당시까진 항공기를 이용한 직접적인 전술 타격의 효과는 미비했으며 야포에 비해 훨씬 보조적인 역할에 그쳤기 때문. 항공 폭격이 전술적으로 두각을 드러낸 건 제1차 세계 대전으로부터 최소 20~30여년 후의 일이며, 당장 전투를 해야 하는 장교들은 해당 시점에서 눈에 보이는 효과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근미래에 굉장히 강력해질 거라는 가능성을 파악한 장교들도 몇 명 없었고, 그런 가능성을 파악했다한들 당장 내일의 전투와 이번 전쟁의 결과엔 아무 영향을 줄 수 없었다. 신무기가 언제든지 전장을 뒤집을 수 있으니 항상 긴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개념이 장교들에게 보편적으로 안착된 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이다.

나폴레옹의 군사적 역량과 별개로, 나폴레옹 본인은 역사상 7대 명장을 꼽으며 그 인물들을 높이 평가했다. 시대순으로 마케도니아 제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고대 카르타고의 한니발 바르카, 고대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 프랑스 왕국의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사부아 공자 외젠,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대왕이다.

 

 

 

꼬마 부사관(Le Petit Caporal)

 

나폴레옹의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에 대해서는 말이 많지만, 웰링턴 군대에서도 "보니가 프랑스 놈들과 함께 있으면 4만 명의 군대와 맞먹는다."고 논평했을 정도였다니 당대에는 인정받았던 이야기이다. 심지어 나폴레옹 이후 빈 체제를 정립한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조차 "황제와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매혹당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로르 쥐노의 증언에 따르면 목소리가 상당히 근사해서 연설할 때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고 한다. 확실히 다른 사람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만큼은 정말 엄청났던 것 같다. 또한 황제가 되기 전에 보여준 정치적 행동들을 보면 자기 PR에도 역시 천재였다. 실제 아래와 같은 훈훈한 일화는 소문이 널리 퍼지도록 하고 나폴레옹 사생활 문서에 써있듯 말단 병사에게 주먹을 날려 코피를 터지게 하거나 시종들을 구타하는 행동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나폴레옹이 사람 다루는 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들이 있다.

 

한 포병장교가 4년 동안 똑같은 계급을 달고 있는 것에 불만이 생겼는데, 나폴레옹이 군대 점검을 위해 한 요새를 찾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나폴레옹에게 승진을 청원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나폴레옹이 시찰을 위해 요새에 도착하였는데… 장교는 새삼스레 쑥스러워져서 나폴레옹에게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결국 나폴레옹이 떠날 시간이 되었다. 그제야 장교는 허겁지겁 달려가 떠나려는 나폴레옹을 불러세웠다.

장교: 폐...폐하, 폐하!

나폴레옹: 왜 그러는가?

장교: 저는 14년 동안 복무했으나 4년 동안 대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내년에 있을 진급평가 때 명단에만 올려주시면...

나폴레옹: 알겠네, 소령.

그리고 나폴레옹은 다시 갈 길을 갔다.

참고로 이 일화는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회고록을 작성하며 직접 언급한 내용이다.

추가적으로 대위의 요청을 들은 나폴레옹이 갑자기 멈춰서더니, 수행원으로 데려온 소령의 계급장을 떼서 손수 달아주면서 "소령."이라고 더 짧게 말해주는 더더욱 폭풍간지스러운 이야기도 있다.

단순히 진급만 시켜서 계급 인플레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다른 일화에선 장교의 계급이 소위로, 복무 기간이 5년으로 바뀌고, 나폴레옹은 장기간 진급 못한 장교에게 "나도 7년 동안 소위였는데 이 자리까지 올랐다. 너무 불평하지 마라."하며 타이르는 식으로 180도 바뀐 내용도 있다.

공훈을 세우거나 성과를 낸 부하에게는 아낌없이 칭찬을 하였으나, 잘못을 한 자에게는 무자비하게 갈굼을 시전하였다. 이는 사람이 많은 장소나 손님이 와 있는 자리에서 더욱 심했는데, 나폴레옹은 다른 이들에게 일종의 경고를 주기 위해 일부러 그런 장소를 택하는 것을 즐겼다. 하지만 다음날이 되면 그 질책했던 부하를 다시 불러서, 전날 자신이 그런 의도를 설명하며 친근하게 달랬다.

한 번은 숙영하는 야전 부대를 순시하던 중 졸고 있는 초병을 보았는데 깨우는 대신 자기가 잠깐 그 자리를 맡아 보초를 섰다. 잠시 후 초병이 깨어났지만 그를 질책하는 대신 조용히 자리를 돌려주고 돌아갔다.

초병의 중요성은 총사령관이라도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자리라는 것을 몸소 보여준 셈이다. 더불어 지친 병사를 대신해 임무를 수행했다는 이미지로 장병들에게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조지 워싱턴도 비슷한 일화를 가지고 있다.

오스트리아 전쟁 당시, 영국을 침공하기 위해 배치된 군을 시찰하면서 병사 및 하급 장교들을 일일이 만나며 신상명세를 확인해 주고 고충을 들어주기도 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만나다니 오랜만이네. 자네는 지난 이집트 원정 때 피라미드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운 용사가 아닌가? 그런데도 훈장을 받지 못하다니 내 잘못이네. 당장 훈장을 수여해 주겠네!" 하는 식. 이 덕분에 장병들의 사기 및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도는 크게 올랐다.

물론 나폴레옹이 처음부터 이런 내용들을 기억했을 리는 없고 사전에 장병들을 뒷조사했다. 그렇다고 해도 평소 장병들의 나폴레옹에 대한 인망이 높지 않았다면 나폴레옹의 이런 행사가 진정성을 얻긴 힘들었을 것이다. 원래부터도 군대의 신임이 대단했기 때문에 이러한 이벤트도 효과가 있을 수 있었던 것

장 란 원수와는 너, 나 할 정도로 말을 낮춘 사이였는데, 직설적인 편이었던 란 원수는 황제에게 화가 날 때마다 "내가 저런 매춘부에게 애처로운 열정을 품었으니 죽어도 싸지!"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그래도 나폴레옹은 슬쩍 자리를 피한 뒤, 그 다음 날이면 언제 싸웠냐는 듯 사근거렸다고 한다. 심지어 나폴레옹은 '병사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엉덩이에 입이라도 맞추겠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조아킴 뮈라 원수와도 너, 나 할 정도로 말을 낮춘 사이였다. 조아킴 뮈라는 185cm에 달할 정도로 키가 컸으며 힘은 엄청 장사라 나폴레옹이 맨 처음 출세하게 된 계기가 된 왕당파, 즉 부르봉파의 반란을 진압할 때 혼자 대포를 짊어지고 뛰었을 정도로 괴력을 갖고 있었다. 뮈라는 나폴레옹 측근 중에서도 눈에 띄게 용맹하여, 각종 전투에서 작전을 성공시킨 공로는 물론 나폴레옹의 목숨을 구한 적도 많았다.

그 때문에 나폴레옹은 자신의 여동생 카롤린을 뮈라의 아내로 내주었다. 무엇보다 뮈라가 왕 하고 싶다니까 나폴레옹은 바로 나폴리에서 왕 노릇 잘 하고 있던 자신의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돌연히 스페인으로 옮겨버리고 뮈라를 나폴리의 왕으로 봉해줬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측근 서열에서 뮈라를 자신의 형보다도 우위에 뒀다. 이 정도면 말 다했다.

정작 나폴레옹이 뮈라를 좋아해서 뮈라에게 시집보낸 그 여동생 카롤린은 뮈라에게 자신의 오빠를 배신하고 오스트리아로 붙으라고 꼬드겼다. 나폴레옹 자신은 뛰어난 군인이자 군주였으나, 그 집안은 이토록 콩가루였던 것이다.

1806년 아우어슈테트 전투가 끝난 직후 승장인 루이니콜라 다부 원수가 보고를 위해 나폴레옹을 찾아왔다. 승리를 치하하는 나폴레옹에게 다부는, 자신의 피는 나폴레옹의 것이라고 강조했다. "어떤 경우에라도 기꺼이 폐하를 위해 제 피를 흘리겠습니다. 폐하께서 저를 인정해주시고 따뜻함을 베풀어주시는 그것으로 저는 족합니다." 후에 다부는 이날의 공로로 아우어슈테트 공작이 되었다.

베두아예르 남작이 아들 이야기를 하면서 나폴레옹을 즐겁게 한 일화가 있다.

나폴레옹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출신이자 자신의 휘하 원수 중 하나였던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를 대할 때 프랑스군 원수가 아닌 폴란드의 왕으로 대우해 줬다. 비록 포니아토프스키가 나라를 빼앗기고 독립 운동을 하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포니아토프스키에게 폴란드를 되찾아주겠다고 했으며, 포니아토프스키를 항상 폴란드 왕이라고 불렀으며, 프랑스군 내부에서 자신과 똑같은 의전절차로 예우해 줬다. 이에 감동한 포니아토프스키는 나폴레옹을 위해서라면 죽을 힘을 다했고, 결국 나폴레옹을 위해서 죽었다.

라스 카즈의 회고록에는, 세인트헬레나 유배 시절 나폴레옹을 수행한 시종들이 나폴레옹의 총애를 다투는 바람에 나폴레옹이 대놓고 "내가 자네들 아내도 아니고, 자네들과 내가 잠을 잘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투덜거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르노블로 진군하던 나폴레옹의 병력이 길가에 제5보병연대가 포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지역 주민들은 "신경쓰지 마세요. 쏘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으나 측근들은 좀 걱정된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우리가 속았는지도 모르겠군. 뭐 상관없지, 전진!"이라는 말과 함께 맨 앞으로 나아가 제5보병연대를 정면으로 바라본 뒤 이렇게 말했다.

"제 5 보병연대여! 짐을 알아보겠는가?"

"예, 폐하."

"짐이 자네들의 꼬마 부사관(별명)이다. 자네들 중 짐을 쏘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여기 짐의 가슴이 있다!"

이에 병사들이 "황제 폐하 만세!"를 외치며 백색 휘장을 떼어내고 황제의 손을 만지기 위해 달려나갔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이제 혼자 남겨진 그들의 지휘관을 향해 나아갔다.

지휘관 레자르는 나폴레옹의 앞에 항복의 표시로 칼을 던졌다.

"무슈 레자르, 짐은 자네를 잘 아네. 자네를 대령으로 만든 것이 누구인가?"

"바로 폐하입니다."

"그러면 그 전에 자네를 중령으로 만든 것은 또 누구인가?"

"그 역시 폐하입니다."

"그러함에도 자네는 짐과 싸우기를 원했는가?"

"저는 그저 명령을 받았을 뿐입니다."

이에 나폴레옹은 레자르의 칼을 돌려주고 항복한 제 5연대를 규합해 그르노블로 전진을 재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독일·폴란드 원정 중 폴란드에서 보급에 징발까지 제대로 안 돼서 병사들이 굶주리고 있었다. 그런데 병사 중 하나가 용감하게도, 대열 옆을 지나가던 나폴레옹을 향해 폴란드어로 "Papa, kleba!(아빠, 빵 주세요!)"하고 외치자 나폴레옹도 폴란드어로 "Nie ma!(없어!)"하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병사들은 빵 터져서 불만이 좀 수그러들었다.

이 일화는 나폴레옹의 시종인 콩스탕의 회고록에서 나온다.

나폴레옹이 병사들이 끓인 수프로 함께 식사를 하려는데 머리카락이 나오자 슬쩍 치우고 다 먹은 후 한접시 더 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두번째 접시에서도 머리카락이 나왔다고... 이 역시 콩스탕의 기록이다. 이 밖에도 나폴레옹은 종종 병사들과 함께 식사를 한 일이 있었다. 당시 장교들은 병사들과 겸상을 하는 것은 물론이요, 심지어 뭔가를 먹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금기시되어 있었다. 즉 나폴레옹이 스스럼 없이 병사들의 식사 자리에 어울리며 그들의 음식을 함께 먹은 건 굉장히 파격적인 행위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고 미국으로 망명하려다 영국 해군에게 걸려서 전열함 벨레로폰에 탑승하여 잠시 이곳저곳을 떠돌게 되었다. 배의 선원들은 '코르시카의 괴물'로 불리던 그를 보고 처음에는 경멸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이윽고 황제의 아우라에 감화되어 그가 갑판에 나올 때마다 진심으로 존경을 표하며 인사를 했다. 나폴레옹은 해병대원들을 직접 사열해보기도 하고, 영국식 집총자세와 프랑스식 집총자세의 차이점을 설명하기 위해 머스켓을 들고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황제가 병사들과 격식 없이 어울리는 것을 본 영국인들은 "저 분은 항상 저러시냐?"며 매우 놀라워했다.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가기 직전 영국의 플리머스 항구에 잠시 머물게 됐다. 그런데 황제가 플리머스에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그를 보려고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측근들은 영국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라도 할까봐 걱정했지만, 대중들은 갑판에 등장한 황제를 향해 모자를 벗으며 인사를 하고, 환호를 하며 경의를 표하였다.

아우스터리츠 전투 바로 전날 밤, 나폴레옹은 밤에 자는 병사들이 깰까봐 횃불 하나 없이 시찰을 돌고 있었다. 그런데 황제가 자신들의 텐트 옆을 지나가는 것을 본 일부 병사들이 짚으로 횃불을 만들어 나폴레옹을 보러 나왔다. 이렇게 병영이 어수선해지자 다른 부대원들도 횃불을 들고 황제의 모습을 보러 나오는 통에 나폴레옹의 주변은 수많은 병사에게 둘러싸였다. 그때 누군가가 '오늘이 황제 폐하께서 즉위하신지 1주년 되는 날이다!' 라고 소리쳤고 이윽고 병사들은 '황제 폐하 만세!' 를 외쳐댔다. 이 광경은 건너편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 진영에서도 보였다고 기록되었다. 나폴레옹도 훗날 이 일화를 '내 일생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감격스러워 했다.

사랑하는 아내여, 우린 뙤약볕 아래 골프주앙에 상륙했소. 굉장해. 황제 폐하가 가는 어디든 사람들이 달려나와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오.

황제 폐하를 저지하기 위해 파견된 부대들도 그를 보자 감동에 못 이겨 우리와 합류했네. 황제 폐하를 따라 전투에 임할 것이오. 황제 폐하 만세! 프랑스여, 영원하리라.

- 나폴레옹을 따라 엘바 섬까지 갔던 44세의 근위대원 피에르 랑텔름이 그의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워털루 전투에서 전사했다.

친근감의 표시로 상대방의 귀를 비틀어 꼬집는 행동을 했다. 사적으로 친한 사람이나 전투에서 공을 세운 부하들에게만 해주던 거라서, 이걸 당한(?) 사람들은 그 자체를 영광으로 인식했다.

여러 일화에서 나폴레옹은 부사관으로 불린다. 당시 사관학교에서 생도라는 별도의 계급이 아니라 실무 병사, 부사관의 계급을 부여 받아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과거 그의 사관학교 일화와 더불어 1차 이탈리아 원정 당시 로디전투에서 직접 소규모의 부대를 이끌고 승리를 쟁취한 실사례, 평소 그의 행보가 맞물려 병사들이 긍정적인 의미로 별명을 붙여준 것이다.

 

 

 

외교력

 

나폴레옹의 몰락은 결국 전 유럽을 적대하게 만든 것이 원인이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의 외교 능력에 대해 혹평하기도 하지만, 역사적 맥락을 따지자면 나폴레옹이 전 유럽을 적대한 것은 나폴레옹 개인의 성향에서 불거진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프랑스 자체가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이래로 절대주의 왕정 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전 유럽의 구(舊) 체제와 사생결단을 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1제국도 어디까지나 프랑스 혁명을 통해 탄생한 프랑스 공화국을 계승한 국가였고, 전쟁을 통해서라도 절대왕정을 분쇄하고자 했던 프랑스 제1공화국의 이념과 외교 구도를 계승했기에 주변 국가들도 그렇게 인식해서 관계가 좋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폴레옹의 전략은 근본적으로 1.)프랑스 혁명을 통해 탄생한 공화국과 그 공화국을 승계한 자신의 프랑스 제국이 기존 유럽 질서와 화해하는 것. 2.)유럽 질서를 프랑스의 주도하에 재편하는 것이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가장 강력한 적이었던 영국과도 통령 취임 직후 계속 화해를 시도했고, 실제로 아미앵 조약을 통해 화해를 이루어내었다. 그런데 화해 조약이 아직 유효하던 중에서도 영국은 구(舊) 부르봉 왕족들을 계속 후원하고 나폴레옹에 대한 중상모략을 계속했으며, 나폴레옹에게 접근하는 러시아 제국의 궁정 혁명을 지원 또는 방조하여 러시아의 반(反) 프랑스 정책을 고착화시킨다. 이후의 일이지만, 프로이센과의 관계에서도 나폴레옹은 가급적 전쟁을 피하려 했고, 가장 큰 실책으로 꼽히는 러시아 원정조차도 러시아 제국과의 화평을 계속 시도한 끝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일차적인 문제는 영국의 대륙 정책에 있었다. 해상대국으로서 당대 최강을 자부하던 영국으로서는 덩치는 크지만 후진적이고 아직 경제력으로 상대가 되지 않는 러시아, 약소국으로 추락한 스페인, 자기들이 보기에는 지역 강국들의 군집체에 불과한 오스트리아, 무섭게 치고 올라오고 있지만 아직은 체급이 안되는 프로이센이나 다 망해가는 오스만 제국은 경계할 대상이 되지 않았지만, 3천만에 육박하는 인구를 보유하고 있으며 당대 유럽 문명을 선도하는 입장에 있던, 게다가 기존 질서에 도전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까지 확보한 프랑스라는 강적이 유럽 대륙의 질서를 주도하는 것을 무슨 일이 있어도 허용할 수 없었다. 프랑스가 유럽 대륙 전체의 헤게모니를 확보하고 가공할 인적 자원을 활용하여 영국과 맞서게 된다면, 영국으로서는 국가의 존망이 걸린 문제였던 것. 실제로 불완전한 상태에서 행해진 대륙 봉쇄령에 의해서도 영국이 겪은 고생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이러했으니, 안 그래도 강력한 적수인 프랑스에 나폴레옹 같은 무서운 녀석까지 나타난 상황을 영국으로서는 좌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영국은 자신들이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유럽 대륙을 고만고만한 강국들이 병립하면서 균형을 유지하는 구도로 유지해야 했는데 그 균형을 깨뜨릴 유일한 잠재력을 지닌 프랑스, 그리고 그 프랑스를 이끌어 다른 유럽 국가들을 압도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지닌 지도자라면, 나폴레옹이 아닌 다른 누구라도 타도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즉 나폴레옹이 아닌 누가 지도자가 됐더라도 (그리고 어떤 외교적 노력을 기했더라도) 영국은 프랑스를 몰락시키려 들었을 것이다. 영국은 이후에도 러시아가 강성해져 전방위로 남하 팽창을 시도하자 그걸 막기 위해 크림전쟁, 아프간전쟁, 러일전쟁 지원 등으로 막아내는데 국력을 모조리 투사하는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기도 하고, 독일이 유럽내 최강 육군을 만들고 해외 식민지까지 노리자 오랜 앙숙이었던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독일을 견제하기까지 하는 등 항상 유럽 대륙의 최강국을 견제한다는 외교적 노선을 유지했다.

또한 유럽의 다른 제국들에게도 프랑스 제국에 의한 유럽 질서 재편은 절대적으로 막아야 할 사태였다. 프랑스 혁명은 시민세력에 의한 구(舊) 질서의 붕괴라는 당대 기준에서는 묵시록적인 사태의 실현이었고, 그런 프랑스 제국을 인정한다는 것은 자국 내에 있던 시민 세력들에게도 왕조 타도의 명분을 쥐어주는 행위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기에 이탈리아와 나폴리, 네덜란드, 베스트팔렌, 스웨덴, 나아가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보나파르트 일족이나 그 인척들을 왕으로 앉히기 시작한 나폴레옹의 방식도 반감을 샀다. 물론 그건 원래 타오를 불에 기름 끼얹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전쟁의 원인은 유럽이 나폴레옹을 일방적으로 공격한게 아니라, 나폴레옹이 오히려 전쟁을 원해 도발한 것도 있다. 혁명전쟁 중후반부에는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과 타협하고 휴전을 원한 유럽국가들이었지만, 프랑스의 무분별한 확장 및 약속 불이행, 혹은 용납할 수 없는 요구로 인해 발발한 전쟁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이러한 복잡한 국제 사정을 잘 인지했고 이를 충분히 고려한 결정을 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전 유럽을 상대로 계속해서 이겨버리자 교만해져서 자신과 프랑스 제국의 역량을 과신하게 된다. 무엇보다 프랑스 혁명을 거치며 정립된 프랑스군 특유의 현지 보급 및 프랑스 제국의 경기 회복을 위한 가혹한 배상금과 무자비한 약탈 정책이 문제였다. 그리고 이 정책의 가장 큰 피해자가 바로 훗날 프랑스의 원수가 되는 프로이센이었다. 프로이센은 나폴레옹의 약탈로 1,000억원대의 손해를 입었는데 2조 가량을 합법적, 공식적으로 뜯겼고 결국 프랑스의 속국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나폴레옹을 구체제를 타파하고 자유를 전파하는 영웅으로 환영하던 주변 나라들의 시민 세력들이나 학생들이 결국 나폴레옹에게 등을 돌리게 된 가장 큰 원인이다.

여기에 군주로서 그렇게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던 자신의 형, 동생과 친척들을 여러 나라의 왕으로 앉히는 무리수를 감수했던 것도 한몫 했다. 이런 짓을 시도하다가 당초 프랑스 제국에 우호적이었던 스페인도 결국 적으로 만들어버렸고, 러시아 원정은 그런 나폴레옹 체제의 모순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나 다름없다. 낙하산으로 왕 자리에 앉힌 친인척들이 능력이 뛰어나고 선정을 펼쳤으면 유럽 대륙이 하나의 프랑스 체제로 단결해 기능하면서 나폴레옹의 시대도 연장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애초부터 나폴레옹이 제대로 지원도 안 하고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린 조제프 보나파르트나 네덜란드 시민들에게도 호평받았던 루이 보나파르트 정도를 제외하면 하나같이 능력 없고 부패한 인물들 투성이어서 해당 국가의 사람들이 나폴레옹과 프랑스 제국에 대한 적개심을 품게 한다. 스웨덴 국왕으로 임명한 베르나도트 원수가 칼 14세 요한이 되어 오히려 등에 비수를 꽂은 것은 덤이다.

통령 취임 이전부터 이집트 원정 등으로 나폴레옹 개인의 군사적 야망이 지나친 수준이었다고 주위에 인식되었던 것도 문제. 원래 이집트 원정의 목적은 인도에 압력을 가해 인도를 비롯한 중근동 토후들의 반영 정서를 자극해서 영국을 뒤흔드는 것 정도였는데, 프로파간다로 알렉산더 대왕을 비롯한 고대 정복자들의 이름을 끌어다 쓰는 바람에 실제 이상으로 부풀려진 측면이 크다고 볼 수 있다.

8. 정권관리 능력

일찍이 루이 16세가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에게 처단당한 것을 나폴레옹은 알고 있었고 이는 국민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줬기 때문이라고 나폴레옹은 생각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징병제를 도입해서 루이 16세를 때려잡는데 가담했던 민중들을 싸그리 군대에 때려박아 놓았고 계속되는 전투로 국민들이 불만을 가질 틈 자체를 아예 없애버렸다.

나폴레옹은 전투에서 이기든 지든 간에 백성들을 계속 전쟁터로 몰아넣음으로서 불만을 가질 틈을 아예 없애버려서 시민혁명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국가구조로 만들어 놓았다. 이게 비슷한 방법으로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려 했던 니콜라이 2세와 공통점이기도 하지만 차이점이기도 했는데 통치능력과 군사적 재능 양쪽 모두 천재 수준인 나폴레옹은 이 수법이 먹혔지만 군사적 재능도 젬병이고 통치능력도 꽝인 니콜라이 2세는 이게 전혀 먹히지 않아 러시아 혁명을 얻어맞고 퇴위 후 총살당했다.

 

 

 

 

해외의 평가

 

나폴레옹에 관한 해외 각국의 평가는 갈린다. 그 외에도 이집트 및 유럽 각지에서 문화재 약탈자라는 악명도 얻고 있으며 때문에 모나리자를 약탈했다는 오명을 쓰기도 했다. 정작 모나리자는 프랑스 르네상스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한 문화군주인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아들인 다빈치가 프랑스에서 말년을 보내다 눈을 감으면서 자신의 말년을 편안하게 후원해 준 국왕에게 감사하는 의미로 바친 것이다.

 

 

 

스페인, 포르투갈

 

이웃나라인 스페인, 포르투갈 등 이베리아반도에서의 평가는 거의 악마 수준이다. 한국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받는 평과 비슷하다. 이베리아 반도 전쟁으로 자국에 지옥을 초래했기 때문. 나폴레옹과 격전을 치른 나라들은 많지만 반도 전쟁의 경우는 공방 양자 모두에게 매우 잔혹한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정규전 보다는 게릴라전 양상으로 진행되다 보니 보복과 보복이 끊이질 않았다. 게릴라라는 명칭부터가 이 전쟁에서 비롯되었다. 가령 스페인군에 점령당한 야전병원을 프랑스군이 나중에 다시 탈환한 적이 있는데 환자와 의무병들이 배가 갈린 채 발견되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이베리아 반도 전쟁 문서 참고.

현대에 와서야 이베리아 반도 전쟁 당시 군사 피규어도 팔리고 프랑스군 리인액트먼트도 하는 등 표면적으로야 유럽 전반의 자유주의적 풍토에 희석되었다고 하지만 마드리드 시내의 프라도 박물관 옆에 있는 역대 스페인 군주가 대관식을 치르는 교회인 성 예로니모 성당부터 나폴레옹 전쟁 시기 탄약창으로 쓰이다 박살난 걸 재건축했을 만큼 이베리아 반도 전쟁 당시 스페인이 입은 피해는 스페인 역사에 진하게 녹아 있다. 상술한 프라도 박물관에서 프란시스코 고야의 그림을 보며 성장하고, 나폴레옹 전쟁때 한번 털리거나 박살난 사적만큼은 진짜 갈리시아에서 카탈루냐까지 그 지역색 강하고 서로 단합 못 하는 걸로 유명한 스페인인들을 묶어주는 집단적 기억인데 악감정이 없을 리가 없다. 나폴레옹의 침략 당시 대불항전은 당시 스페인의 자유주의자, 보수파, 세속주의자, 가톨릭 교회, 카스티야인, 카탈루냐인 모두 합세하여 싸웠던 유산이고 베니토 페레스 갈도스 같은 스페인의 문호뿐만 아니라 프랑스인 빅토르 위고마저도 경의를 표할 만큼 치열했던 사라고사 공방전 같은 사건은 스페인 근대사의 집단적 기억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스페인 본토에서는 아예 이베리아 이베리아 반도 전쟁을 스페인 독립 전쟁(Guerra de independencia)라고 부를 만큼 중요한 사건이고 현대까지도 은연중에 모습을 드러내는 뿌리 깊은 반불 감정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아프리카라고 깐 적이 있다. 정확히는 "피레네 산맥 아래에 있는 나라들은 유럽이 아닌 아프리카다." 이 말에 스페인은 폭발했다. 참고로 그 당시 말하는 아프리카는 우리가 아는 그 아프리카가 아닌 북아프리카, 아랍을 말한다. 즉 이 두 나라는 유럽이 아니라 아랍이라고 깐 것. 이건 단순히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을 후진국이라 깐 것을 훨씬 넘어서는 모욕이다. 스페인은 이슬람에게 정복당한 적이 있으며, 그 후 700년에 걸친 성전 레콩키스타로 아랍인을 쫓아냈고 이것이 곧 스페인 국가 정체성의 시작점이고 스페인인들의 자부심인데 그 감정을 건드렸던 것이다.

 

 

이집트

 

1798년 이집트 알 이즈하르 마스지드에서 무장반란 진압 도중 4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살되었기에 이집트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학살자 및 침략자다. 이런 사태가 난 이유는 나폴레옹은 이집트에서 무리한 징발을 요구하고 심지어 마스지드에 세금까지 매겼기 때문이다. 결국 현지 아랍인들의 저항과 적군에 대한 협력으로 이집트 주둔 프랑스군은 보급에서도 곤란을 겪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오스만 제국의 술탄을 대신하여 역적 맘루크를 토벌하러 왔다고 선전했고 여차하면 자신과 부하들이 무슬림으로 개종할 수도 있다며 립서비스를 하며 이슬람 율법학자들을 비롯한 현지 지도층을 포섭하려 했지만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고 영국의 해상 봉쇄로 고생을 했고 팔레스타인 원정에서 영국 해군의 방해와 중포의 부재로 결국 오스만의 견고한 요새를 뚫지 못하고 점령한 팔레스타인 지역을 돌려주고 이집트로 돌아온 다음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는 수만 명의 오스만군을 바다로 처넣어 지위를 굳건히 했다. 하지만 한술 더 떠 페스트까지 발생한데다가 프랑스 내부에서의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자신의 부재로 약화되는 것을 감지한 나폴레옹은 부사령관에게 이집트를 맡기고 겨우 2척이라는 적은 수의 함선을 타고 몰래 프랑스로 돌아갔다. 남은 프랑스군은 1년 반이 넘게 견뎠으나 계속되는 오스만군과 이집트 저항군, 영국군의 공격과 질병, 보급 문제로 결국 1801년 전면 항복했다. 덕분에 로제타석을 비롯한 문화재가 영국 손에 들어갔으므로 어딜 봐도 이집트 입장에서 좋게 볼 구석이 없다.

1989년 4월 21일, 28일, 5월 4일까지 3부작으로 KBS-1에서 밤 10시에 더빙 방영한 <나폴레옹과 조세핀>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이 드라마에선 심지어 오스만 포로들이나 민간인들에게 프랑스군이 총을 겨누며 스스로 바다로 들어가게 하여 빠져 죽게 하는 장면도 나온다. 여기서 한 이집트인 떡대 사내가 프랑스군 두엇을 잡고 같이 물귀신이 되자고 투신해 같이 동귀어진하기도 한다.

 

 

아이티

 

아이티에서의 평가는 좋지 않다. 나폴레옹의 매제 르클레르가 죽은 후 지휘권을 이어받은 로샹보 장군이 아이티 혁명을 잔혹하게 진압했기 때문이다. 다만 나폴레옹이 아이티의 흑인들을 다 죽이려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폴레옹이 원하는 것은 아이티의 노예제를 복구하는 것이었지 인종청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카리브계 작가 클로드 리브가 주장한, 가스선을 이용해서 흑인노예들을 대량학살했다는 설 또한 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물론 프랑스군에게 많은 이들이 학살당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풍토병으로 많은 군인들이 죽어나갔고 아이티인들은 악마같이 재앙을 내리던 전염병이 이번에는 침략자를 죽여주네~라고 기뻐했다.

 

 

영국, 러시아

 

러시아나 영국에서는 그런 엄청난 적을 이긴 우리는 더욱 위대하다는 논리의 설파를 위해 치켜 세워주면서도 악으로 묘사하고 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임진왜란을 다루는 사극이나 영화에서 띄워주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특히 영국에서 아기들 자장가에서 "망태 할아버지" 급으로 묘사하고 당시 러시아 성직자들은 나폴레옹을 적그리스도의 화신으로 표현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하지만 영국의 당대의 지식인들은 나폴레옹을 높이 평가했다. 나폴레옹이 사망한 직후 《아이반호》를 지은 스코틀랜드의 국민 작가 월터 스콧이 지은 《나폴레옹전》에서는 나폴레옹이 국가를 안정화하고 자국에 진보적 개혁 조치들을 취한 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후 나온 토마스 칼라일 같은 경우는 아예 나폴레옹을 들어 영웅사관을 정립했을 정도다. 또 《제인 에어》로 너무나 유명한 영국의 전설적인 여성 작가인 샬럿 브론테도 '웰링턴 공작'을 매우 존경하는 것과는 별개로 '나폴레옹'도 매우 존경해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에서 비극적으로 죽은 것을 애도하는 에세이를 쓰기도 할 정도로 열렬한 나폴레옹의 팬으로 그녀가 벨기에에 있는 브뤼셀의 여학교에서 자신의 동생이자 《폭풍의 언덕》의 작가로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는 에밀리 브론테와 같이 유학했을 시절 학교의 교장이었던 '콘스탄틴 에제'는 그녀가 나폴레옹을 매우 존경하는 것을 알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나폴레옹의 유품을 그녀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와 맞서 싸운 영국 장군들이 알아서 띄워주는 지경이다.

코난 도일이 쓴 《여섯 개의 나폴레옹 석고상》에서도 극중 영국인들도 나폴레옹을 존경하여 석고상을 가지고 있다는 게 묘사되는 게 허구 속 이야기가 아니었다.

 

 

레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보면 나폴레옹이 침략한 러시아에서도 나폴레옹 애호가들이 상당히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12년 서곡이나 나폴레옹 케이크처럼 나폴레옹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음악이나 요리도 있지만 나폴레옹의 이름을 딴 보드카가 고급 보드카로 소문나 불티나게 팔리는 등 인기가 아직까지도 식지 않았다. 프랑스 문화가 러시아에서 인기가 많은 것도 한몫한다.

 

 

덴마크

프랑스의 동맹국이었던 덴마크에선 애증의 대상이다. 물론 영국의 잘못도 있는 걸 감안해도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덴마크도 의도하지 않은 전쟁에 휘말렸고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패전국 신세가 됐기 때문이다. 다만 덴마크 일반인들 중에는 나폴레옹에게 강한 매력을 느끼고 흠모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아버지가 그 일례이다.

 

 

 

폴란드

 

폴란드에서는 구세주 수준의 평가를 받고 있다. 사실 프랑스인 입장에서는 혁명의 의의를 없앴다던가 하는 비판 의견이 있으나 폴란드 입장에서는 알 바 아니기도 하고 나폴레옹이 자신들의 조국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오스트리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과 러시아 제국을 줘패고 바르샤바 공국까지 세워줬기 때문이다. 비록 바르샤바 공국은 10년도 지속되지 못한 괴뢰국에 불과했지만, 폴란드인들에게 독립의 희망을 가지게 해줬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프랑스 제국에 적극 협력했고 제일 충성했다. 나폴레옹은 폴란드를 말 잘 듣고 부려먹기 좋은 빵셔틀 수준으로 여겼을지도 모르지만 나폴레옹이 폴란드를 토사구팽할 생각을 하기도 전에 나폴레옹이 먼저 몰락해서 알려지지 않았고 나폴레옹은 자신의 폴란드 장군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를 자신과 같은 동등한 위치의 폴란드 군주로 대해주었기 때문에 빵셔틀로만 생각했는지도 불명이다. 위 항목에 일화 같이 나폴레옹은 폴란드 말도 한두마디 할줄 알아서 보급문제로 폴란드 군인들의 사기가 떨어졌을 때 간단한 농담으로 불만을 잠재우기도 했다. 어쨌든 폴란드는 다른 나라들이 전부 나폴레옹에게 등을 돌리는 와중에도 끝까지 프랑스 편에 서서 싸웠다. 이렇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폴란드인들의 인식은 매우 좋다. 심지어 폴란드 국가인 폴란드는 아직 죽지 않았다의 가사에도 보나파르트가 우리에게 승리의 방법을 보여주었다라는 구절이 있을 정도다.

따라서 현재도 폴란드인 앞에서 폴란드를 깔 의도가 없어도 나폴레옹이 폴란드를 이용만 했다고 비하하는 것은 큰 실례가 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하지만 그래도 이용하지 않은 건 아니라서 폴란드인들을 아이티 혁명 당시 진압군으로 끌고가서 학살을 시켰던 것도 있다. 이 학살에 되려 폴란드인들이 경악하고 마음이 흔들렸으며 수백여명이 한꺼번에 탈영했을 정도였다. 폴란드인들도 아이티인들을 보고 자신들과 같은 신세란 걸 알았기에 흔들렸던 것. 때문에 아이티 혁명 수뇌부들도 폴란드어로 이런 선전문구를 뿌렸다. 거기에 프랑스군과 차별대우에 열대지방에서 풍토병으로 폴란드인 다수가 죽어감에도 몇 년이고 파병을 해 대니 폴란드인들로서 반발이 거셌고, 탈영하여 아이티인들과 손잡고 프랑스군과 싸우던 폴란드 징집병들도 상당수였다. 이들은 나폴레옹 몰락 이후에 폴란드로 돌아가는 이들도 있었으나 그냥 아이티에 남은 이들도 적지 않아서 지금도 이들 후손이 사는 폴란드계 혼혈 마을이 있다.

 

 

미국

 

미국에서는 주로 자유주의를 전파한 지도자 혹은 유럽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은 독재자로 인식된다. 하지만 대체로 미국에서의 평가는 호의적인 편이다. 미국 본토에 전쟁 등 직접적인 타격을 주지 않았을 뿐더러 무엇보다도 제3대 미국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재임 기간 동안 프랑스가 전쟁이나 이렇다 할 추가 요건도 없이 그 당시 단돈 1500만 달러(7300만 프랑)으로 현 미국의 4분의 1 면적의 국토를 차지하는 루이지애나 포함 중부지역을 미국이 매입하면서 광활한 영토를 얻었다는 것에 있다. 또 반(反)불파인 전임 대통령인 존 애덤스와 달리 토머스 제퍼슨은 친(親)불파이기도 해서 프랑스와 말이 잘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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