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 한국사/한국사 인물

김산(金山), 아리랑

Jobs9 2021. 5. 2.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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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혁명행동 부주필, 북경시위원회 조직부장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본명 장지락(張志樂), 별명은 장명(張明)·이철암(李鐵岩)·한비종·유종화. 평안북도 용천 출신.

 

장로교 계통의 학교에 다니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는 등 강한 민족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입학을 준비할 때 일본 노동자와 재일조선인의 열악한 처지를 목격하면서 마르크스주의와 무정부주의에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1920년경 만주로 건너가 6개월간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학을 배우고 상해(上海)로 간 뒤,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獨立新聞)』의 교정원 및 인쇄공으로 일하였다. 이때부터 많은 독립운동가를 만나고 손문(孫文)의 글도 접하게 되면서 공산주의를 믿기 시작하였다.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교사로도 재직하였으며, 1925년 7월 국민혁명의 중심지인 광저우[廣州]로 가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6년부터 조선혁명청년연맹의 간부와 기관지 『혁명행동(革命行動)』의 부주필로 활동하는 한편, 중산대학(中山大學)에서 외국어·경제학·철학을 공부하다 북벌의 선봉대인 독립단에 참가하였다. 하이루펑당학교[海陸豊黨學校]에서 국제공산주의운동사·노동운동 등도 가르쳤다.

1929년 중국공산당의 요청으로 북경시위원회 조직부장으로 있으면서 8월의 조선혁명청년연맹 대표대회에 참가하는 등, 적극적으로 만주와 화북 지방 한인들을 중국공산당에 가입시켰다. 김산의 좌경방침이 실천되고 있던 1931년에는 장자커우[張家口] 탄광에서 노동자로 일하기도 하였다.

이즈음 김산은 리린산(李林山)노선을 좌경적이라고 반대하였고, 이로 인해 당에서 배척을받았다. 그러나 이후 중국공산당은 김산의 비판이 정당하였음을 인정하였다. 또한, 1935년 9월 스자좡[石家莊]에서 일본어숙(日本語塾)을 운영하며 철도노동자를 중심으로 당사업을 전개하였다.

이 곳에서 벌인 대중 사업이 성과를 거두어, 북경(北京)에서 1·29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스자좡에서 4,000여 학생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를 지도하였다. 이 시위사건으로 1936년 1월 중국공산당스자좡위원회로 정식 인준을 받기에 이르렀다.

1936년 들어 중국공산당이 ‘내전정지’와 ‘일치항일’을 외치자, 상해에서 조선민족 혁명가의 임무를 집필하였으며, 1936년 7월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하여 이에 호응하였다.

1938년 8월 산간닝[陝甘寧] 소비에트 지구에서 조선혁명가대표로 당선되어 활동하다, 당의 요청으로 옌안[延安]의 항일군정대학(抗日軍政大學)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 때 미국의 언론인 웨일즈(Wales, N.)를 만나 자신의 생애를 구술하였으며, 웨일즈는 이를 토대로 『아리랑의 노래』(1941)를 출판하였다.

1938년 산간닝변구보안처[陝甘寧邊區保安處]에 의해 반역자, 일본 스파이, 트로츠키주의자로 낙인찍혀 비밀리에 처형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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