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한 생각을 살피고 살펴서 텅텅 빈자리에 오묘함이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마음을 닦는 것은 무심히 보는 것을 늘 챙기는 것이다.
지금 내 말을 듣고 있는 지금 마음이 무슨 마음인가? 이 한 생각을 들어라.
이것을 놓치지 마라.
저 사물을 보지 말고 저 사물을 보고 있는 게 누군가?
이걸 챙기라는 말이다.
1. 금강경 내용 중
세상의 모든 상은 다 헛되고, 거짓이니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게 되리라.
인연 화합으로 이루어진 모든 것들은 꿈이요 환상이요 물거품이요 그림자요 이슬 같고 번개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 마하살은 이와 같이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9류의 모든 중생들, 다시 말해 알에서 태어난 것, 습기에서 태어난 것, 변화하여 생긴 것, 모양이 있는 것, 모양이 없는 것, 생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이런 모든 중생들을 번뇌가 없는 완전한 열반에 들게 하여 제도하겠다는 마음을 내야 하느니라.
그러나 이와 같이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중생들을 제도할 지라도 실로 제도한 중생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보살이 중생들을 제도했다는 생각을 낸다면 나라는 상, 남이라는 상, 중생이라는 상, 수명에 대한 상에 집착한 것이기에 참된 보살이라 할 수 없느니라.
-금강경에서 발췌
2. 금강경에서 말하는 마음공부란 이런 것이다.
“마음이 머무는 곳이 없이 자비의 마음을 쓰는것. “
모든 형상이 허상이라는 것을 보는 것이 여래를 보는 것이니라.
끝없이 일어나는 현상들은 곧 환영이다.
이 세상 사람들의 가슴 안의 사연이 없는 사람이 없다. 그것들 모두 개인이 만들어 내는 현상, 국가가 만들어 내는 현상. 이것을 몽경이라고 한다. 끝없이 현상이 일어난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꿈이라 원래 있는 것이 아니다. 없던데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있다가 없어지고, 없던데서 있는, 언젠가는 모두 사라지는 현상들이다.
눈앞에 일어나서 없어지는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 일어났다가 결국 사라진다.
그래서 그것을 허망할 망자를 써서 망경이라고 한다. 허망할 망, 경계 경.
이 세상에 진리란 것은 모든 현상은 변하고 흘러간다는 것이다. 이 현상을 보는 자, 망경을 보는 자를 망식이라고 한다. 허망할 망, 의식 식. 태어날 때부터 아는 것은 없다. 커가면서, 엄마다, 아빠다 하고 알게 된다. 당연히 모르는 이것이 본래의 모습이다. 밖에서부터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안다는 것이 본래 아무것도 없었다…
도의 세계에 들어갈 때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해야 도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허망한 경계를 보고 허망한 마음으로 본다.
밖에서 들어와서 주인 노릇 하는 것이 망식의 특징이다. 인생의 답을 구할 때 자기 생각으로 답을 구하기 때문에 답을 구할 수 없다. 바라는 마음이 충족이 안되면 괴로움으로 바뀐다.
우리는 망경 속에 망식으로 살고 있다. 수많은 괴로움, 허망한 의식을 만들어 낸다.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망경, 안으로 들어오면 망식이 된다. 내 가슴 안의 망식이 잘못 보게 만든다.
부처님 눈에 <우리는 허망한 현상에 허망한 생각 속에 살고 있는 것으로 비칠 것이다.>
전도된 집착이 생긴다.
허공의 꽃을 쫓아서 무명 세계를 불러일으킨다.
도를 공부하는 사람은 바깥세상을 쫓아다니지 마라.
세상이 꿈인 줄 알고, 현상에 마음을 홀리지 마라. 물은 물일 뿐이다. 몸뚱이도 그냥 물질일 뿐이다. 생로병사의 현상은 막을 수가 없다.
인연은 현상이다. 세상은 모두 인연이다. 모두 인연뿐이다. “이 세상은 전부 다 인연 상이다.” 스스로 고통을 만들어 내고, 이 인연 속에서 아프게 하고 있다. 하늘이 아니라, 스스로 인연의 상을 모르고…
나를 잘 보고, 인연을 잘 관찰하여 거기에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반야의 경계에 들어가는 길이다.
대승불교의 가르침은 이 고통이 사라진 곳, 무아의 마음을 한없이 베푸십시오라고 한다. 이것이 곧 자비이다. 한없이 펼치고, 베푸는 자비. 그것이 대승불교라고 할 수 있다.
망경, 망식을 깨어나면 진공묘유의 자리를 보게 된다.
참된 것은 비어 있는데 비어 있는 속에 묘함이 있다. 그것이 곧 반야이다.
공적영지. 텅텅 비어 있는데 비어있고 교요한데 신령스러운 앎이 있다.
흔들리지 않는 내면, 제법 부동.
무아를 통달하면 안심이 되는 것이다.
실체가 없다는 것을 통달하면 톨달무어 법칙으로 무생심이 된다.
없을 무. 살릴 생. 마음 심. 구제해 줘야겠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보살이다.
인연이 없는데서 인연을 일으켜서 마음을 내는 것이 무명 심이다. 무명심은 여태까지 배운 데서 마음을 일으키는데 이것을 어떻게 지혜심으로 전환을 시킬 수 있는가?
그것이 도를 닦는 것이다.
오묘한 것은 무명심을 일으키는 마음자리와 지혜심을 일으키는 자리는 같은 자리라는 것이다.
부처님 마음에서 불심 안에서 한마음이 바뀌면 중생, 한마음이 바뀌면 불심이 된다.
한마음으로 결국 돌아간다. 일심, 본심, 근본 마음.
오직 한 생각을 살피고 살펴서 텅텅 빈자리에 오묘함이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마음을 닦는 것은 무심히 보는 것을 늘 챙기는 것이다.
지금 내 말을 듣고 있는 지금 마음이 무슨 마음인가? 이 한 생각을 들어라.
이것을 놓치지 마라.
저 사물을 보지 말고 저 사물을 보고 있는 게 누군가?
이걸 챙기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