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 한국사/근대

근우회, 신간회

Jobs 9 2023. 4. 24.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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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가) 단체로 옳은 것은?

 

(가) 발기취지(發起趣旨)
인간 사회는 많은 불합리를 산출한 동시에 그 해결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여성 문제는 그 중의 하나이다. …… 과거의 조선 여성운동은 분산되어 있었다. 그것에는 통일된 조직이 없었고 통일된 지도 정신도 없었고 통일된 항쟁이 없었다. …… 우리는 우선 조선 자매 전체의 역량을 공고히 단결하여 운동을 전반적으로 전개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동아일보』, 1927. 5. 11. -

 

① 근우회
② 신간회
③ 신민회
④ 정우회

 

【해설】 정답 ①
제시문의 (가)는 신간회의 자매단체로 조직되어 신간회와 함께 여성 차별 반대 운동 등을 전개한 근우회(김활란 등, 1927.5.)
② 신간회(1927.2.)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연합한 일제 강점기 최대 규모의 단체이다.
③ 신민회(1907~1911)는 한일병합(1910, 경술국치) 이전 각계각층의 인사를 망라한 비밀결사이다. 시험에 나오는 이 시기의 대부분의 인물들은 신민회 활동을 하였다.
④ 사회주의 단체인 정우회가 민족주의 세력과 협동을 도모하자는 정우회 선언(1926.11.)을 발표하였고, 이는 신간회 결성의 계기가 되었다.

 

 

● 근우회의 조직과 활동

(1) 근우회 조직의 배경

 槿友會 조직의 배경으로 민족유일당운동을 들 수 있다. 1920년대 사회주의사상의 유입으로 인하여 항일민족운동노선이 좌·우로 분파되어 자주독립국 재건의 역량이 약화되었다. 이에 국내외에서 민족유일당운동이 일어나 점차 세력을 연합하였고, 마침내 1927년 2월에 민족유일당으로서 신간회를 조직하였다. 여성운동계도 민족유일당 운동에 보조할 새로운 운동을 하였다. 분파가 확대되어가던 사회주의 여성단체들은 점차 하나로 통합되었고,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던 유학생 출신 엘리트 여성들이 간친회라는 이름으로 세력을 규합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주목되는 것은 사회주의 여성운동계의 연합이었다.

 사회주의계 여성운동의 분파적 확대는 조선여성동우회의 존재를 약화시켰다. 그런데 1926년 봄 동경에 유학하였던 정칠성·황신덕·이현경 등이 귀국하면서 분파된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통합과 조선여성동우회 활성화라는 새로운 전기를 갖게 되었다.

 기생 출신의 정칠성은 일찍이 남녀평등 실현에 대한 꿈을 갖고 17세 때 이미 여장부가 되고자 승마를 배운 여성이다.575) 3·1운동 뒤 홀연히 화류계를 떠나 사회주의 서적을 탐독, 연구하였고 여성동우회 발기에 참여한 후 일본 동경기예학교에 유학하여 三月會를 조직, 활약하였다. 그는 여기서 사회주의사상의 이론적 기반을 착실하게 쌓고 1926년 봄에 귀국하였다. 황신덕은 평양 숭의여학교 졸업 후 동경 일본여자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사회주의>라는 방대한 양의 논문에서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이론과 그 사상을 제시하였다. 노령 출신 강아그니아도 일본에서 귀국하여 조선여성동우회에 가입, 남편 정필원과 함께 사회주의운동에 힘썼으며 일제에 의한 공산주의자 일제 검거시에 피검, 투옥 생활을 하였다.

 1926년 11월 14일576) 경성여자청년회에서 在京 사회주의 여성운동자간친회를 열고, 사회주의 여성운동 통합의 첫문을 열었다. 당시≪조선일보≫는 “막혔던 장벽을 트고 가렸던 흉금을 헤치고 지금까지 여성운동의 소감을 말하여 종합한 결과 전조선 여성운동자의 통일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될 것을 깊이 느끼고 먼저 경성여자청년회와 경성여자청년동맹을 합동키로 결의하였다”577)고 보도하였다. 이 간친회에서 두 단체의 합동총회 개최를 위한 준비위원으로 조선여성동우회의 이현경·황신덕·강아그니아의 3인, 경성여자청년동맹의 조원숙·심은숙·김정은의 3인 및 경성여자청년회의 박원희·김수준·신기숙의 3인을 선출하였다. 이에 따라 11월 20일에 경성여자청년동맹에서 임시총회를 열고 주세죽을 임시의장으로 선출하여 두 단체의 합동에 대한 승인을 결정하였다.

 합동총회는 12월 5일 오후 1시부터 천도교당에서 개최하고자 했으나 당국의 간섭으로 인해 여성동우회관에서 개최되었다. 회원 50명과 다수 방청인의 참석 아래 박원희를 임시의장으로 선출하여 총회를 집행하였다. 그 결과 두 단체의 간판을 불사르고 새로 중앙여자청년동맹을 발족시켰다. 여기에서 집행위원으로 김수자·신기숙·심은숙·강아그니아·여영숙·박원희·곽형숙·노승준·김성인·김수준·조원숙을 선출하고 다음 사항들을 결의하였다.

① 본회가 한양청년연맹과 경성청년연맹의 통일을 위하여 조선청년동맹에 직접 가맹함을 3개월간 연기하고 두 단체의 동맹을 촉진키로 하여 촉진위원으로 김수준·조원숙·심은숙·박원희·신기숙 5명을 선정함.

② 부인의 교양 목적을 위해 연구반을 시급히 실시함.

③ 명년 1월 중순에 조선여성단체연합 대강연회를 열기로 함.

④ 명년 3월 신학년을 기하여 무산아동학원을 설립키로 하고 그 준비위원은 집행위원에 일임하기로 함.

⑤ 본회 발회식은 12월 21일로 정함.

⑥ 사무소는 당분간 조선여성동우회관을 사용함.

 (≪朝鮮日報≫, 1926년 12월 7일,<양여청의 합동총회>).

 결의사항에 나타나듯 두 단체의 통합은 조선내 사회주의운동의 통일적 확대에 목적을 둔 것으로 생각된다. 중앙여자청년동맹의 강령은, 첫째 “무산계급의 권리 및 여성해방을 위하여 청년여자의 단결과 분투를 기한다”, 둘째 “청년여자의 대중적 교양과 조직적 훈련을 기한다”였다. 즉 이것은 청년여자에 대한 사회주의 의식확대 교육을 위해 대중교양에 힘써 지방 여자청년회를 비롯한 국내 여성운동 세력을 사회주의 여성운동으로 흡수하려고 한 것이었다. 근우회가 조직되기 직전인 1927년 3월 8일에 조선여성동우회와 중앙여자청년동맹 연합으로 국제무산부인데이를 기념하는 대강연회578)를 YMCA 강당에서 7명의 연사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개최하려다가 당국의 금지로 중단된 바 있는데, 그 강연회는 청년여자의 대중적 교양과 조직적 훈련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그 운동을 확대하는데 큰 걸림돌이었다. 그들의 운동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지도층 여성으로부터 대중사회 여성까지를 아우르는 비교적 광범위하며 온건한 의식과 방법으로 여성운동을 전개하는 기독교 여성운동을 비롯한 민족진영 여성운동과의 연합이 불가피한 것이었다.

 


민족유일당 운동

"신간이지1927"

 

● 좌우합작운동

신간회, 민족유일당 운동, 전국연합진선협회, 건국동맹, 조선청년동맹, 조선민흥회, 근우회, 북경촉성회, 상해촉성회

 

● 신간회

좌우합작, 민족유일당. 최대 합법 조직(치안유지법), 이상재, 홍명희 

 

● 신간회 강령  '경단기'

 정치 경제적 각성촉구

 민족 단결

 기회주의자 배격

 

● 신민회 & 신간회  '민비간청'

회 : 밀결사 대성오산

회 : 좌우합작 여형(청년운동,여성운동,형평운동)

 

● 신민회 & 신간회

신민회(1907)~대성학교(평양), 오산학교(정주), 태극서관, 자기회사, 공화주의 정치 주장

신간회(1927~1931)~자진해산, 자치운동에 반대하는 우익세력(좌파)+좌익세력, 광주학생운동 지원

참정권은 주장하지 않았다. 

신간회의 중앙조직은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이 우세, 지회조직은 사회주의 세력이 우세

※입헌군주제~초기개화파➜갑신정변➜갑오개혁➜독립협회➜헌정연구회

 

좌우합작 민족유일당 운동

 

● 민족 유일당 운동(사회주의계+민족주의계) 

   사회주의계와 민족주의계가 민족 유일당 운동할 수 있었던 것은 공통의 목적인 일제로부터의 자유, 독립

 

 배경:
        1. 자치운동론(1923) : 이광수, 최린 (위기 의식으로 작용)

 

        2. 중국의 제1차 국공합작(1924) : 국민당과 공산당 합작되네?? 민족 유일당 할 수 있겠어

        3. 북경촉성회 창립(1926) : 안창호 + 원세훈(북경의 유력자),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 

        4. 6.10 만세운동(1926) : 학생 + 사회주의계 + 민족주의계 = 공감대 형성

        5. 조선 민흥회 조직(1926.7) : 서울 청년회(사회주의계) + 조선물산장려회(민족주의계 자본가)

        6. 정우회 선언(1926.11) : 사회주의계 정우회가 경제투쟁 → 정치 투쟁의로 전환하면서

                                           비타협적 민족주의계와의 제휴를 모색함 

 

● 신간회 창립(1927~1931) 

   - 사회주의계 + 민족주의계의 공통의 적은 자치운동론을 주장하는 자들 

   - 신간회 의의: 신간회는 3.1운동 이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연합 전선을 구축한 최초의 민족 유일당 운동

 

● 신간회의 조직

    - 6·10 만세운동 다음해인 1927년에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공동전선을 펴서 조직

    - 일본은 문화정치 표방과 한국 민족운동의 내막 파악위해 합법적인 기관으로 인정함(치안유지법 25)

    - 신간회의 강령 

       우리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 일본 경찰의 심한 감시가 있었지만, 전국에 많은 지회가 설립되고 회원도 3만에 이름

    - 여성단체인 근우회가 방계단체로 신간회의 활동에 동조

    - 신간회는 광주학생운동 때 조사단을 파견하고 민중대회를 계획함

    - 만주사변이 일어나던 1931년에 사회주의 계열의 주장에 의하여 해산됨

 

● 신간회의 해소

   - 배경 : 광주 학생 항일 운동 때의 민중 대회 사건과 일제의 탄압, 내부의 이념 대립, 계급성을 강조하는 코민테른의 노선 변화

   - 신간회 해소 과정

신간회 새 집행부가 일부 타협적인 합법 운동 강조 → 각 지회의 반발 → 전체 대회에서 해소안 가결 → 신간회 해체(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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