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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여(均如),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부흥사, 영통사, 화엄종

Jobs 9 2021. 5. 6.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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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전기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수현방궤기(搜玄方軌記)』, 『공목장기(孔目章記)』 등을 저술한 승려.

 

본관은 황주(黃州). 성은 변씨(邊氏). 균여는 이름이다. 아버지는 환성(煥性)이며, 어머니는 점명(占命)이다.

 

황해도 황주 북쪽 형악(荊岳) 남쪽 기슭에 있는 둔대엽촌(遁臺葉村)의 집에서 출생하였다. 어머니가 하늘에서 누런 봉 한 쌍이 내려와 품속에 드는 꿈을 꾸고 6년 뒤, 나이 60에 임신해 7개월 만에 균여를 낳았다.

균여는 강보에 싸여 있을 적부터 아버지가 말로 전수하는 『화엄경(華嚴經)』의 원만게(圓滿偈)를 하나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15세에 사촌 형 선균(善均)을 따라 부흥사(復興寺)의 식현(識賢)을 뵙고 출가하였으나 식현의 자질이 뛰어나지 못함을 알고, 영통사(靈通寺)의 의순공(義順公)에게 가서 배우며 수도 생활을 하였다.

균여가 어머니를 만나러 집에 돌아온 날, 세살 위의 누이 수명(秀明)에게 보현(普賢)·관음(觀音) 두 지식(知識)의 법문(法門)과 신중(神衆)·천수(千手)의 두 경문을 한 자도 빠짐없이 강설하였다.

또한 일찍이 법을 강하기 전날 대덕(大德) 전업(全業)에게 경의 서문을 기술하게 한 후 전업이 열 장 가량을 기술해 강당에 나아가 주니, 균여가 향로를 받들고 걸으면서 한 번 보고는 마치 전에 익힌 것처럼 유창하게 강연하였다.

신라 말 해인사에는 후백제 견훤(甄萱)의 복전(福田)이 된 관혜(觀惠)와 고려 태조의 복전이 된 희랑(希朗)의 두 화엄사종(華嚴司宗)이 있었는데, 그 법문을 각각 남악(南岳)과 북악(北岳)이라 불렀다. 균여는 북악의 법통을 계승, 남악까지 통합하였다.

당시 남북 양종(兩宗)은 서로 자파의 교법을 주장해 대립과 내부적 모순이 극심했기 때문에, 이를 개탄한 균여는 수좌(首座) 인유(仁裕)와 함께 명산과 절을 찾아다니며 독자적인 종풍(宗風)을 선양하고 널리 교법을 폈다.

선공(先公)이 초(鈔)한 화엄교(華嚴敎) 삼십여의기(三十餘義記) 등의 교석(敎釋)에 잘못된 점이 많아 균여가 그 번잡한 것을 삭제하고 요점을 취하며 해석이 미흡한 것은 의미가 잘 통하도록 그 뜻을 상세히 궁구하였다.

여러 불경과 보살론(菩薩論)에서 인용해 잘못을 바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일대(一代)의 성교(聖敎)주 01)의 뜻을 다 참작해 입의정종(立義定宗)주 02)을 확립하였다.

국가가 왕륜사(王輪寺)에서 승시(僧試)주 03)를 보게 할 때에도 균여의 설을 정통으로 하고 나머지는 방계(傍系)주 04)로 삼았다.

균여는 화엄 교리의 거장이었을 뿐 아니라 신이(神異)한 자취를 남긴 고승이었다. 균여는 964년(광종 15)에 광종이 그를 위해 송악산 아래에 창건한 귀법사의 주지로서, 왕명에 따라 향화(香火)를 받들며 민중을 교화하고 불법을 널리 펴다가 973년(광종 24) 6월에 입적, 팔덕산(八德山)에서 장례를 지냈다.

균여의 제자는 3,000인에 이르렀으며 그 중에도 담림(曇琳)과 조(肇)는 일대의 고승으로 수좌에 올랐다. 균여가 죽은 뒤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 김정준(金廷俊)이 균여가 거처하던 곳을 수리해 감로원(甘露院)이라 하고, 급사중(給事中) 고정(高挺)이 여기에서 기문(記文)을 썼다고 한다.

이러한 균여의 약전(略傳)은 그의 입적 후 백여 년이 지난 1075년(문종 29)에 진사 혁련정(赫連挺)이 찬술한 『균여전』[원명은 대화엄수좌원통량중대사균여전(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均如傳)]의 기록에 의거한 것이다. 애초에 전중성(殿中省)의 내급사(內給事)인 강유현(康惟顯)이 균여의 행적을 쓴 것이 있었는데, 문장은 힘이 있고 아름다우나 사적이 빠지고 많은 부분이 소략되었다.

1074년(문종 28) 4월에 신중경(神衆經) 주주(注主)인 창운(昶雲)이 균여에 대한 실록의 구고(舊藁) 1권을 혁련정에게 주면서 전기를 쓰도록 부탁하니, 이듬해 봄에 균여의 행장을 10부문, 즉 강탄영험분(降誕靈驗分)·출가청익분(出家請益分)·자매제현분(姉妹齊賢分)·입의정종분(立義定宗分)·해석제장분(解釋諸章分)·감통신이분(感通神異分)·가행화세분(歌行化世分)·역가현덕분(譯歌現德分)·감응항마분(感應降魔分)·변역생사분(變易生死分)으로 나누어 집필해 완성한 것이 곧 『균여전(均如傳)』이다.

저서

균여는 우리나라 화엄종에서 그 초전자(初傳者) 의상(義湘)에 이어 고려 때에 교풍을 바로잡고 교세를 떨친 화엄학의 고봉으로서, 80권의 경을 개강(開講)하고 향찰을 구사해 종의(宗義)를 풀이하는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향가를 지음으로써 국문학사상 큰 업적을 남겼다.

그는 제가문서(諸家文書)에도 해박했으며, 특히 불교 이외의 학문인 외학(外學)에 있어서도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다. 『균여전』에 “스승의 외학은 사뇌가(詞腦歌)에 익숙했다.”라고 한 것은, 특히 사뇌가에 있어서 「보현십종원왕가(普賢十種願往歌)」를 지을 만큼 퍽 원숙한 일가를 이루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의 저술로는 『수현방궤기(搜玄方軌記)』 10권, 『공목장기(孔目章記)』 8권, 『오십요문답기(五十要問答記)』 4권, 『탐현기석(探玄記釋)』 28권, 『교분기석(敎分記釋)』 7권, 『지귀장기(旨歸章記)』 2권, 『삼보장기(三寶章記)』 2권, 『법계도기(法界圖記)』 2권, 『십구장기(十句章記)』 1권,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抄記)』 1권 등이 있다.

『교분기석』·『지귀장기』·『삼보장기』·『십구장기』는 해인사 고려대장경 보판(補板)에 각각 『석화엄교분기원통초(釋華嚴敎分記圓通鈔)』 10권, 『석화엄지귀장원통초(釋華嚴旨歸章圓通鈔)』 상·하, 『화엄경삼보장원통기(華嚴經三寶章圓通記)』 상·하, 『십구장원통기(十句章圓通記)』 상·하 2권으로 되어 있다. 같은 보판 내에는 의상의 저술을 주석한 『법계도기』 2권이 들어 있다. 또, 최남선(崔南善)의 균여전 해제에 의하면 『법성게초(法性偈抄)』 3권이 현전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균여는 포교상의 방편으로 방언, 즉 향찰로써 불경의 석기(釋記)를 저술하였다. 오늘날 방언본(方言本)은 전하지 않고 있으나 해인사의 장경판본(藏經板本)은 방언본이 저술된 지 수백 년 뒤인 14세기에 와서 뒷사람들이 방언을 깎고[削方言] 한문으로만 새긴 것으로 현전하고 있다.

균여의 화엄사상

균여의 화엄사상은 ‘성상융회(性相融會)’를 특징으로 한다. 성상융회사상은 공(空)을 뜻하는 성(性)과 색(色)을 뜻하는 상(相)을 원만하게 융합시키는 이론으로서, 화엄사상 속에 법상종의 사상을 융합해 교종내의 대립을 해소시키기 위해 주창한 통합 사상이다. 균여가 원통대사(圓通大師)로 불리었고, 그의 저술에 ‘원통’이라는 명칭이 붙여진 것도 이 때문이다.

균여의 화엄사상은 의상 이래 신라 불교의 원교적(圓敎的)인 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서 강한 융회적(融會的) 성격을 띠고 있다. 그리고 그는 전통적인 화엄법계관을 횡진법계(橫盡法界)와 수진법계(豎盡法界)로 나누었다.

횡진법계에서는 전체를 구성하는 하나하나의 개체를 파악하기보다는 그 일부분인 원칙적인 ‘하나[一]’를 파악하고, 이것으로 미루어 전체를 이해하려고 한다. 수진법계에서는 전체를 구성하는 하나하나의 의미를 살펴서 그것을 파악하려고 한다.

균여는 이 두 법계를 융회해 ‘주측(周側)’을 주장하였다. 주측은 횡진법계를 기초로 하여 수진법계까지 융합함으로써, 원칙적인 하나 속에 전체를 통합하고 그것을 혼연된 일체로 파악하려고 한 것이다.

그의 화엄사상 속에는 순수 교리적인 측면보다는 토착적 신앙을 내세우는 신이한 측면이 강조되었다. 이는 서민적이고 세속적이었던 균여의 사상 경향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실제 균여의 「보현십원가」 속에도 ‘성속무애(聖俗無碍)’의 사상이 나타나 있다. 그것은 성과 속은 물론 동방과 서방, 남녀나 귀천까지 융합하려는 강력한 통합 사상으로서, 성상융회사상에 기초하여 주창한 것이다.

균여는 법장(法藏)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성상융회사상을 성립시켰지만, 법장과는 상반되는 의상의 화엄사상의 맥을 잇고 있다. 연기건립적(緣起建立的)인 법장의 사상과는 달리, 균여의 사상은 성기취입적(性起趣入的)이어서 전개후합(前開後合)의 성격을 지녔고, 섭말귀본(攝末歸本)의 입장을 취한다.

이러한 균여의 사상은 징관(澄觀)의 사상과 비슷하다. 그러나 징관은 법장의 사사무애(事事無碍) 사상을 중시한 데 비해 균여는 이리무애(理理無碍)를 주장한다. 균여의 화엄사상은 고려 중기의 의천(義天)에 의해 심하게 배척당했다. 의천은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을 저술하면서 의식적으로 균여의 저술을 제외했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는 그것을 읽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려무신란 이후 조계종이 크게 일어나면서 균여의 화엄사상이 다시 주목되어, 당시 조판된 고려대장경 속에 균여의 저술이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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