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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동 고3 존속살인 사건, 전국 1등, 서울대 법대 강요, 모친 흉기 살해, 출소 후 두 아이 아빠

Jobs9 2024. 10. 5.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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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동 고3 존속살인 사건



발생일
2011년 3월 13일
서울특별시 광진구 구의동
살인, 존속살인
원인
피해자의 아동 학대
사망
1명
처벌
징역 단기 3년/장기 3년 6개월



2011년 서울특별시 광진구 구의동에서 발생한 존속살해 사건. 고등학교 3학년인 아들이 자신의 모친을 흉기로 찔러 살해한 사건이다. 

범인 지모 군의 어머니는 중학교 3학년 때 어머니(지 군의 외할머니)를 여의고 편부가정에서 자랐다. 평소 그녀의 아버지(지 군의 외할아버지)는 남동생(지 군의 외삼촌)만을 편애하고 그녀는 무시하고 구박했다고 한다. 공부를 잘하는데도 아버지가 딸을 차별하면서 학교에도 보내주지 않았고, 결국 아버지의 도움 없이 뒤늦게 야간고등학교를 힘들게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가서 남편을 만났다. 

이렇게 벼랑 끝에 몰린 괴로운 가정환경에서 성장한 탓인지 지 군의 어머니는 신혼 초부터 이상 행동을 보여 왔다. 남편에게 자살하겠다고 말하기도 하며 "나는 소중하기 때문에 찬물에 손을 넣을 수 없다. 당신이 밥을 차리고 빨래를 해라", "보통 차를 사면 남들이 무시하기 때문에 고급 차를 사야 한다"라고 강요했다. 지 군의 아버지(당시 52세)는 이런 아내가 부담스러워서 집 밖을 겉돌다가 결국 가출하고 말았으며 이로 인해 이혼 소송까지 가게 되었다. 별거 직후부터 지 군의 부모는 친인척들과 왕래가 없었다고 한다.

이후 지 군의 어머니는 아들의 성적에 극단적으로 집착하게 되었다.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후 끊어졌던 연이 다시 이어지며 그의 아버지, 고모, 이모, 아동 학대를 알고있던 지 군의 친구들, 어머니의 유일했던 친구 1명까지도 지 군의 어머니는 성격에 문제가 많았다며 선처를 요구하였다. 범인 지 군(범행 당시 18세, 고등학교 3학년)은 초3 때 16시간 동안 공부하기도 했고 초등학교 6학년 때는 TOEIC 875점을 달성했다고 한다. 중학교 때는 전국 석차가 4500등에 들 정도로 성적이 우수했다고 한다. 

지 군의 어머니는 평소 "서울대 법대에 가라. 너 잘 되라고 하는 소리다", "전국 1등을 해야 한다"라고 강요하였다. 중학교 1학년 때 전교 2등을 했을 때는, "니가 1등이 아닌데? 1등에게 졌는데?"라고 혼을 내면서 매를 들었다. 그리고 다음 시험에서 전교 1등을 해왔더니 "전국에 중학교가 몇 개인데? 5천개가 넘어. 5000등으로 만족할 거야?"라면서 잔소리를 하고 매를 들었다고 한다. 심지어 성적이 떨어지거나 공부를 하지 않으면 저녁 식사를 주지 않았으며 야구방망이나 홍두깨로 지군에게 비명이 새여나갈까봐 수건을 물리고 피묻으면 빨래하기 귀찮다는 이유로 하나로 퉁친 체벌용 바지까지 입혀가며 체벌을 가하기도 했다. 한번 체벌을 시작하면 체벌용 바지가 피로 물들때까지 때렸다고 한다.  

정작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는 법학전문대학원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 제8조에 따라 2008년 로스쿨로 전환하여 학부생 모집을 중단했다. 조금이라도 자녀의 진로에 관심이 있는 부모라면 2011년에 대입시험을 보는 자녀에게 서울대 법대 진학을 운운할 수 없다. 결국 아들의 성적과 시험 점수에만 관심이 있고, 적성에 맞는 진로상담을 해 주거나 공부를 하면서 어려운 점에 대한 고충을 들어 주는 등 아들에게 공부를 잘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도와주는 것에는 전혀 관심도 없었다는 말이 된다. 

사건이 발생하기 1년 전인 2010년에는 컴퓨터에서 음란 동영상이 발견됐다는 이유로 교실에서 수업을 듣고 있던 아들을 찾아가 뺨을 때리기도 했으며, 심지어 살해되기 전 날에도 10시간이나 엎드려 뻗치기를 시키고 잠도 못 자게 하면서 골프채, 야구방망이로 폭행을 가했다고 아들은 증언했다. 이는 지 군의 온몸이 멍으로 가득했다는 친구들의 증언으로도 뒷받침되었으며, 검진 결과 엉덩이 살이 일부는 괴사되었고 짝짝이였던 데다 종아리는 변색되어 있었고 한쪽 귀에서는 난청 및 이명 증상까지 보였다고 한다. 뺨을 때리다가 고막이 파열된 것으로 추정된다. 심지어 사건 5개월 전에 아들이 견디다 못해 자살 시도까지 하였으나 어머니에게 들켜 심하게 맞았다. 

지 군은 추후 조사에서 어머니가 너무 완벽주의라 정이 가지 않았고 고등학교 때부터는 어머니로 느껴지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극도의 절약을 하면서도 본인을 위해 좋은 반찬을 해주는 등 그 부분에 있어서는 존경스러웠다고 말했다. 

지 군과 목욕탕을 같이 다녀온 친구가 증언하길, 온몸에 피멍이 가득해서 놀라 물어보니 어머니에게 성적을 이유로 좀 맞았다고 했다고 한다. 평소 성격이 밝았던 지 군이였기에 그전까지 주변인들도 학대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지 군 본인도 선생님에게 알리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선생님께 그 사실을 알리면 당연히 어머니 귀에 들어갈 것이고, 그러면 어머니에게 맞아 죽을 것 같은 공포감에 말을 못했다고 한다. 그저 떨어진 성적을 어머니에게 말하지 말아달라고 선생님에게 부탁한 것이 전부였다. 지 군은 극히 일부 친한 친구들에게만 학대 사실을 말했다고 하는데, 왜 아이를 때리냐는 아버지의 물음에 어머니는 애는 매로 다스려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7살 때부터 훈육을 빌미로 이어진 학대는 그렇게 사건당일까지 이어졌고 어머니 사망직전까지 이어진 매질에 검거 당시까지도 온몸에 멍이 완전히 빠지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전문가는 아들은 긴 시간 학대에 저항기능을 상실했다고 판단하였다. 

지군의 아버지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아들이 7살 때 한여름에 긴팔, 긴바지를 입었기에 걷어보니 온몸에 퍼렇게 멍이 들었더라. 아내가 나에 대한 증오를 아들에게 표출한 것 같다"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 그 외에 고모도 "조카가 '엄마한테는 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 같은데, 그런 와중에 3일을 굶기고 3일 잠을 안 재우니 '엄마가 없어야 내가 산다'고 순간적으로 비정상적인 생각을 한 것 같다"며 "엄마가 이혼 소송을 하면서 심리적 불안감이 더해져 아들에 대한 집착이 심해졌던 것 같다. 조카에게 엄마는 거역할 수 없는 존재였다"며 "교육열이 강한 줄만 알았지, 그렇게 극단적으로 애를 학대할 줄 몰랐다"고 말했다. 

 

존속살해
지 군이 어느덧 고3이 되자 체벌은 더더욱 심해졌고 밥까지 굶기고 잠을 재우지 않는 학대까지 추가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그 와중에도 3일 굶는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3일 잠을 못 자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한다. 당시 변호사에게 그날 잠만 자게 했어도 엄마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잠을 못 자니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한다. 중학교 동창에 따르면 지군은 이미 그 시절부터 성적이 떨어지면 며칠동안 학교에 못 나올정도로 맞고 밥을 굶기는 일은 종종 가해지는 벌이었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회상했다. 왜 학교에 나오지 못했냐는 당시 동창에 물음에 대한 지군의 대답이었다. 또 매일 새벽 2시까지 어머니 감시 아래에서 거실에서 공부하고 졸면 골프채로 매를 맞았다. 오전 6시에는 학교에 가기 위해 기상했지만 밤새도록 매를 맞고 학교에 가는 날이 더 많았다. 엉덩이에 나는 피를 지혈하기 위해 수건을 속옷에 덧대고 학교에 가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3월 14일이 '학부모 방문의 날'이란 것이 있어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지 군은 학부모 회의나 상담을 하면서 전국 4000등을 한 것을 62등으로 고쳐 놓은 것이 들키면 어머니가 자신을 때려 죽일 것이라 생각 했다고 한다. 결국 이 악몽같은 생활은 어머니와 자신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나겠구나 라고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또 범행 3일 전부터 굶기고 잠을 재우지 않았으며 범행 전날 밤도 오후 11시부터 오전 8시까지 골프채로 200대를 맞았다고 한다. 체벌이 끝나고 3시간 후 사건이 벌어졌다. 범인 지 군은 당일 2011년 3월 13일 일요일 오전 11시쯤에 "죽고 싶지 않다. 살고 싶다" 라는 공포감에 범행을 결심했다.

부엌에서 흉기를 가져온 지 군은 안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어머니의 왼쪽 눈을 찔렀으나, 어머니가 저항하자 목을 졸랐다. 어머니가 강하게 저항하며 한동안 몸싸움이 치열하다 둘 모두 지쳐 나란히 누워 짧은 대화를 나누는데

어머니는 "XX야, 이러면 너 정상적으로 못 살아"라는 말을 했으나 지군은 "엄마는 몰라, 엄마는 내일이면 나를 죽일 거야. 이대로 가면 엄마가 나를 죽일 것 같아서 그래. 엄마는 나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아. 미안해."라고 울며 말하면서 다시 흉기를 집어 들고 어머니(당시 51세)의 목을 2번 찔러서 그 자리에서 숨지게 했다.  

뉴스 기사마다 살해 방식 묘사에 차이점이 있다. 왼쪽 눈을 찔렀다는 것은 그 잔인성 때문인지 기입되지 않은 기사가 많으며 목을 칼로 찔러서 살해했다는 것은 기사마다 내용이 동일하다. 얼굴, 특히 피해자의 눈을 칼 같은 흉기로 공격한다는 것은 범죄 심리학적으로 피해자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심, 원한을 보여주는 특성 중 하나이기도 하다. 실제로 피해자의 얼굴 부분에 여러 번 공격당한 흔적이 있다면 원한에 의한 범행을 우선적으로 수사할 정도이다.  

 

시신 유기
지군은 범행 후에 어머니의 시신을 그대로 안방에 방치했다. 여름이 되어 구더기가 일고 냄새가 나자 공업용 본드로 안방의 문 틈새를 완전히 봉인하고 밀폐하여 냄새가 새어 나오지 않도록 해버렸다. 지 군은 어머니의 시신을 안방에 놔두면서도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하였기 때문에 누구도 범행을 눈치채지 못했고, 이웃들에게는 '어머니가 가출했다'고 둘러대고 있었다. 
 
하지만 살해 후부터 집에서 자면 악몽을 꾸는 것이 두려워 학교에서 자는 등 학업에 급격히 소홀한 모습을 보여 여자친구가 걱정하기도 했다고. 특히 집안은 살해 후부터 전혀 치우지 않아 현장 사진을 보면 쓰레기장이나 다름없는 수준으로 불규칙적인 생활이 이어졌다고 한다.체포되고 법무병원에서 검사한 지군의 아이큐는 131점 이 아이큐는 일반 사람들이 하는 아이큐 검사로는 150점이 나올 정도의 수준이라고 한다 이정도로 머리가 좋았던 지 군 이였지만 사건이후 고통의 근원이었던 공부를 주저없이 포기하면서 고3 때 영어 48점, 수학 28점, 한국지리 18점 등으로 성적이 낮아졌다. 

추후 진술에서 지 군은 어머니를 살해한 이후 삶의 의욕을 잃어 막장처럼 살았던 것이며, 시체유기, 혹은 처리같은 일은 생각도 하기 싫었다고 말했다. 꽤 긴 8개월 동안 지 군은 시체를 숨겼는데, 활달한 성격의 지 군은 교우관계가 원만해 범행 후에도 친구들을 불러와 집에서 함께 라면을 끓여먹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범행 후 어머니가 계속 꿈에 나와서 죄책감과 고통에 시달리기도 했다고. 지 군은 그대로 평범하게 지내면서 수능까지 보았다. 수능을 본 이유는 고모의 증언에 의하면 "수능을 며칠 앞두고, 학교에서 '수험표를 안 받아 갔다'며 전화가 왔다고 한다. 아버지가 다그치니 어쩔 수 없이 시험을 치러 간 것"이라고 한다. 

 

 

드러난 범행

한편, 지 군의 아버지는 별거 이후 월 100만 원 가량의 생활비를 보내오고 있었다. 2011년 6월 무렵 지군에게 전화를 걸어 어머니의 행방을 물었지만, 지 군은 다른 이웃이나 어머니를 알고있는 지인에게 알렸듯이 '가출했다'라고 둘러대서 상황을 모면했고, '해외여행을 갔다'라고 둘러대기도 했다. 

하지만 11월 초 이혼 소송을 진행하던 아버지가 어머니의 출입국 기록을 떼어 보면서, 2004년 이후 해외에 나간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수상하게 여기게 되었다. 

평소 왕래가 없던 아버지는 5개월이 지난 11월 22일에 집을 찾아왔다가 이상한 악취를 맡았고, 안방 문은 본드로 막혀 있자, 이를 수상하게 여긴 아버지는 119구조대와 경찰에 연락하여 문을 열고 들어갔다. 결국 현장에서 어머니의 사체를 발견했다. 이때 지 군은 현관에서 웅크리고 앉아서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고 반 넋을 잃은채 울고 있었다.아버지에게 "아빠, 무슨 일이 있어도 나 안 버릴 거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저 이 상황에 놀라서 아들에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못했다고 회고한다. 

지 군은 23일에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서울광진경찰서는 지 군에게 구속 영장을 신청하여 24일 구속되었다. 

경찰조사 과정에서 형사가 먼저 묻지도 않은것까지 자세하게 진술하였다 아들은 울면서 "어머니가 매일꿈에 나와 죽고 싶었지만 결국 그러지도 못했고 또 경찰에 잡히는것도 솔직히 무서웠다. 차라리 이렇게 들키니 속이 후련하다."고 했다고 한다. 

 

 

현장 검증
25일 오후에는 40분 가량 현장 검증을 하였다. 지군은 태연하게 범행을 재연하였으며 현장에서 위조했다는 성적표와 혈흔이 묻은 바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판결
재판에서 징역 단기 3년, 장기 3년 6개월이라는 부정기형이 선고됐고 이 과정에서 재판관이 '어머니로서 피해자를 동정한다.'는 발언을 했다. 다만 이는 재판을 하는 판사로서의 처신에는 부적절했다는 논란이 있었다. 이 또한 원래는 집행유예를 검토하기도 했다는데 2012년 여름이 끝나갈 때 쯤 피고인과 검찰이 쌍방항소를 했으나 9월 6일 기각됐다. 검사 측도 15년형을 다시 구형했으나 마찬가지로 기각되어 판결이 확정되었다.

존속살해인 본 사건의 경우 일반 살인과는 달리 최저형량이 7년인데도 불구하고 해당 사건에서는 3년형이 선고되어 박기서 이후 널리 알려진 살인에 최저형량 미만을 선고한 사례이다.  

 

후일담
2011년 구속 기소된 때부터 형량 기간이 합산되기에 지군은 2014년 11월 24일이 지나서 만기 출소한 후 한 여자를 만났고 모든걸 털어놓고 여자친구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2명 낳았다. 상식적으로, 살인범과 결혼을 한다는 것부터 본인에게 있어서 당연히 기피될 일인데다 사회적으로 전혀 안 좋게 보일 법한데도 여자친구가 지 군과 결혼한 것을 보면 지 군의 상황을 잘 이해해 준 듯 하다. 

만약 범행 직후 바로 경찰에 자수했다면 집행유예를 받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이랬다면 정말로 '극단적인 심리 상태로 인한 심신미약으로 벌어진 우발적 살인'이라는 주장이 먹힐 수 있기 때문이다. 

 

 

지 군의 심리상태

 

지 군이 감옥에서 자신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 본인이 괴로운 심정을 토로하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심리적으로도 얼마나 불안정한 상태였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아동심리학에서는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에 대한 양면성을 강조한다. 명주실처럼 질긴 것처럼 보여도 거미줄만큼 끊어지기 쉬운 양면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모와 자녀 간의 '감정의 교감'이 더 이상 이뤄지지가 않고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강압이나 위압적인 상태가 지속되면 부모는 자녀를 자녀로 생각하지 않게 되고 자녀는 부모를 부모로 생각하지 않게 된다. 평소에 효자 혹은 자녀를 소중히 여기는 부모처럼 보여도 어느 한 쪽이 불의의 사고로 가족 관계에 종말을 맞이하게 되면 정말 깔끔하게 잊거나 끊는다. 타인 이상의 감정이입을 하지 않으며 관계를 단절하는 어떤 사건이 생기면 거부하지 않는다. 

위와 같은 상황은 감정 절단의 비교적 소극적인 상황을 말하는 것이고, 극단적으로 치닫게 되면 이 살인 사건과 같이 처참한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한겨레 기자의 사건 재구성 기록을 보면 범인은 7살 때 온몸에 피멍이 들어도 아프지 않냐고 묻는 아빠한테 "괜찮아"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보통의 7살배기 어린이들은 대부분 회초리로 종아리 한 대만 맞아도, 아파서 엉엉 운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불안정한 상황일 수 밖에 없었던 처지임은 분명하다.  

아버지가 방송에 나와서 한 이야기에 따르면 징역 3년 6개월 판결에 "어떻게 자신에게 이렇게 큰 은혜가 있겠느냐"는 심정으로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 군의 당시 담임교사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만약에 심신미약 상태가 아니었고, 이성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저질렀고 그랬다고 한다면 그렇게 거기(집 안)에 시신을 방치해 두고 거기서 8개월 동안 같이 살 수 있었을까요? 벌은 받아야죠. 안 받을 수 있는 사안은 아니잖아요. (8개월 동안) 저는 받을 거 다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어땠겠습니까. 그러니까 말하자면, ○○(지 군)는 가족 내에서 인격적인 대우를 받아 본 적이 없는 거예요." 

 

 


원인

좋게 말하면 안타깝고 나쁘게 말하면 무섭게도 한국은 현재에도 부모에 대한 증오 혹은 자녀에 대한 증오를 토로하는 가정에 대한 전문적인 상담이나 관찰 시스템 같은 시스템이 단순하고 미흡하거나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행정력 혹은 예산 부족이나 관련된 사회 인프라가 약한 지방의 경우는 더더욱 심하다. 무엇보다 한국은 오랜 관습인 유교 사회답게 '효'를 중시 혹은 당연시하는 풍토가 옛부터 표면적이나마 지속되어 왔기 때문에 '가족의 붕괴'에 대한 사회적인 보완 장치가 이에 영향을 받아 단순하고 처량할 정도로 미비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는 가족의 형태가 자녀가 부모에게 헌신하는 관계에만 지나치게 의존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막상 이 연결고리가 끊어져 붕괴하는 상황이 오면 마땅한 해결책이 거의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사회에서 어떠한 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는 것은 사회 구성원들이 더 이상 그것이 사라졌을 때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가족관계 유지가 각 구성원의 복리와 배치될 때 이를 조정해 주거나 지원해 주는 (특히, 가족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 주는) 법률조항이 거의 없다. 

'부모를 죽이고 싶다' 혹은 '자식을 죽이고 싶다'라는 극단적인 감정의 발로를 사회적으로 용납하지 않는 상황인데 이런 감정이 돌출되었을 때 적극적으로 기밀성이 유지되는 상담과 개입을 하는 게 이와 같은 패륜 살인의 예방에 중요하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도록 변했다는 것이 문제다. 

공개적으로 돌출될 경우 기사거리에 목마른 인터넷 언론 매체가 '패륜XX 결국은...'처럼 자극적인 제목을 써서 마녀사냥의 먹이감이 되거나 신상공개가 되기도 하면서 대중의 뭇매를 맞는다. 피해를 계속 받는 답조차 없는 상황에 사회에 고충을 토로해야 함에도 그 억울함을 어디에 호소하지도 못하게 되어 버리니 누적된 마음의 상처를 치료받지도 못하는 건 물론 적절한 조치나 도움은 커녕 방치 상태로 푹푹 썩어가면서 극단으로 치닫다가 결국엔 이와 같이 아무렇지도 않게 해결되어 비극적이고 처참한 결과를 맞이한다.

이은석 사건과 이 사건을 비슷하게 보는 사람도 있다. 물론 이은석 쪽이 피해 강도는 훨씬 심각했고 처벌도 (상대적으로) 강력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은석의 재판이 열렸던 시기가 2010년대보다 유교적 관념이 다소 강했던 2000년대 초반이었기에 재판이 같은 시기에 열렸다면 역시 관대한 수준의 같은 판결이 나왔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더욱 더 소름끼치면서도 때로는 안타까운 현실은 이러한 사건이 벌어진 후에도 여전히 아동 학대 처벌 강화에 관해서 "그럼, 애들이 다른 사람들을 버릇없게 대하는 태도는 도대체 누가 고치냐?"는 식의 구태적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사회 부적응자, 학교폭력 가해자, 중범죄자들의 상당수가 유년기 시절 심각한 아동 학대를 겪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결코 올바른 주장이 될 수 없다. 강도 높은 체벌은 아이를 올바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범죄자로 만드는 행위이며, 이건 (특히 군대 관련 사건에서 자주 발생하는) 집단괴롭힘을 통해서 사회규율에 억지로 길들이겠다는 식의 발상과 본질적으로 다름없다. 부모가 아이에게 좋은 성적을 내라면서 두들겨 패도 된다는 소리가 아니다. 

애초에 다른 유연한 동기부여 방법과 납득과 설득을 통한 합의적 방법론들을 놔두고 폭력과 강압으로 애들을 쉽고 편하게 휘어잡고 억지로 통제하려는 전근대적 마인드가 만능임을 주장한다면 지금 시대에는 구제불능급이라고 본다. 정상적인 소통과 대화, 공감의 채널마저 파괴하는 짓이며 그게 얼마나 어리석고 잘못된 결과를 낳는지는 과거 일본군에서 발생한 사건들과 부작용들만 찾아봐도 무수히 나온다. 더욱 심각한 건 상당수의 한국 부모들의 성격이 대체로 단순해서 긍정적 의미의 벌(penalty)과 체벌(corporal punishment) 그리고 학대(abuse)의 구분선이 매우 모호할 정도로 교육 개념에 지나치게 무지하다는 것이다.  

이 사건을 보고 어떻게 8개월 동안 시신을 방치한 것도 모자라서 아무렇지도 않게 생활할 수가 있는 걸까 정말 사이코패스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전문가들은 아동학대 피해 증후군을 겪는 이들에게서 보이는 현상이라고 한다. 이 설명은 쉽게 따지면 해리성 장애와 무기력증이라 할 수 있다. 가정폭력의 가해자였던 어머니를 우발적으로 살해하고, 피해자는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범죄를 회피 혹은 부정함으로써 어떻게든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 발버둥을 침과 동시에 어차피 일어난 일이라며 그냥 자포자기한 것이다. 

만약 피해자가 정말로 사이코패스나 보통 범죄자였다면 재빨리 시신을 치우고 증거를 인멸하며 거짓 알리바이를 꾸미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식으로 태연하게 일상을 살았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피해자는 아버지가 찾아와 방문을 열고 어머니의 시체를 목격할 때까지 자포자기 심정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반쯤 넋을 놓고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은 채 생활했다. 자신의 죄를 억지로 외면함과 동시에 자신은 이미 끝장난 사람이라는 심정으로 산 것. 그러다 보니 언론들과 전문가들, 인권단체들도 가정폭력에 지나치게 무관심한 정부와 사회를 비난하며 국가가 나서서 제대로 된 대책을 세울 것을 요구했다. 

 

 

 

 

 







지난 2011년 3월 고3 수험생이던 강준수(가명·당시 18)는 안방에서 자고 있던 어머니를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 이후 그는 어머니의 시신을 안방에 방치한 채 8개월을 지냈다. 존속살인의 배경에 1등만을 강요하던 어머니의 학대가 있다는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알려지면서 사건은 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17일 처음 방송된 tvN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는 '전교 1등 아들의 모친 살해 사건'의 당사자인 강씨가 출연했다.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그는 처음으로 마음을 털어놓아았다. 방송에는 아들의 범행을 처음 발견한 아버지도 출연해 인터뷰했다.

존속살해의 최소 형량은 7년이지만 강준수는 징역 3년을 받고 출소했다. 범행 13년 만에 심경을 고백한 그는 "우선 비난하는 분들이 있으실 거라는 생각이 확실히 있다. '잘 전달될 수 있을까'라는 염려가 조금 있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강준수는 어머니로부터 지속적이고 가혹한 체벌에 시달렸다고 했다. 그는 유년 시절에 대해 "공부와 관련해서 기억나는 것 첫 번째는 초등학교 4학년, 쉬는 날 기준으로 11시간 정도 공부했다. 재미있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했다. 공부하는 건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고 했다.

성장과 함께 성적에 대한 압박이 커지면서 체벌이 시작됐다.

강준수는 "중1 때 첫 시험에서 전교 2등을 했다. 기쁜 마음으로 소식을 전했는데 혼나면서 맞았다. 전교 2등으로 만족했다고, 올라갈 생각을 해야지 하시더라. 약간 억울했지만 다음 시험에서 1등 해서 기쁘게 갔는데 '전국 중학교가 5000개인데 넌 5000등으로 만족할 거냐'고 또 혼났다"고 토로했다.

사건 당시 현장의 모습(위)과 범행 재현 모습.



그러면서 "웬만큼 어렸을 때 종아리를 회초리로 맞았다. 맞는 매가 변했다. 초4 때는 알루미늄 노가 찌그러지도록 맞았고, 5~6학년 때는 대걸레 봉으로 맞았다. 중학교 때는 나무로 된 야구 배트로 맞았다. 아버지가 집에 오면 (체벌이) 멈춰서 '언제 들어오시나' 하면서 기다렸다"고 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됐다고 밝힌 부친 강씨는 "애가 목욕할 때 본 적이 있었다. 회초리 자국이 있어서 되게 많이 아내와 싸웠다. 근데 아이 엄마의 성향이 나보다 강하다 보니까 거기서 내가 그냥 졌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알면서도 싸워봐야 내가 지니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사건 당시 강씨 부모는 별거한 지 5년째였다.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리자 어머니의 공부 집착이 강해졌다. 강씨는 공부에 흥미를 잃었고 외고 입시에도 떨어졌다. 그 이후 7번 아이언 골프채로 맞았다.

체벌용 바지까지 생겨났다. 강준수는 "준비하라고 하면 바지를 갈아입었다. 맞을 때 입는 바지가 있었다. 엉덩이 부분이 피로 절여졌는데, 피 나면 빨아야 하는 게 감당이 안 돼서 빨지도 않고 계속 그걸 입고 맞았다"며 "기대고 자고, 엎드려서 자다 걸리면 혼났다. 시간을 재서 40분에 한 번씩 정산하듯이 맞았다"고 회상했다. 

반항도, 가출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자포자기한 준수는 성적표를 위조하기 시작했다. 사건 발생 2개월 전, 아빠는 정식으로 이혼 통보를 했다. 엄마는 부쩍 신경이 날카로워졌고 사건 발생 3일 전, 밥과 잠이 금지되는 체벌이 추가됐다.

사건 당시 강준수는 진술을 통해 "하루 이틀 지나니 밥 못 먹는 것은 별로 힘들지 않고 별 느낌이 없었다. 그러나 잠을 못 자는 것은 힘들었다. 내가 짐승이 되는 느낌, 눈에서 빛이 나는 느낌"이라며 "누가 건드리면 주먹이 나갈 듯 짜증 나고 다른 데는 별 감각이 없는데 머리와 눈에 감각이 몰렸다"고 했다.

사건 당일, 밤새 9시간 동안 골프채로 몇 백대를 맞은 준수는 고통을 참고 의자에 앉았다. 그는 "그때 탁상 달력이 눈에 들어왔는데 가슴이 철렁했다. (달력에 적힌) 학부모 입시 상담 날을 보고 모든 게 다 끝나겠다고 생각했다. 엄마한테 맞아 죽겠구나 생각했다. 먼저 너무 무서웠고 그다음으로 죽기 싫다고 생각했다"면서 그렇게 엄마를 살해했다고 밝혔다. 

강준수는 "(어머니를 살해하고) 사람 같지 않게 살았다. 어머니를 옮긴다거나 숨긴다는 생각은 안 했다. 처음에는 (안방) 문도 안 닫았는데 시간이 지나 냄새가 나서 문을 닫고 거실 불을 켜고 살았다. 악몽인지 환청인지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죄책감이 컸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최고의 사랑을 주신 거다. 인생을 갈아 넣어서 저를 키워주셨다. 저는 어머니께서 점점 더 힘들어하실 때, 점점 더 저한테 푸시했을 때, 이제야 해석되는 건 어머니께서 점점 더 불안하고 두려워지셨다는 거다. 어머니께 내가 아니어도 어머니는 대단하고, 귀한 사람이고,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위로해 드리지 못한 게 후회된다. 만약에 돌아갈 수 있다면, 어머니께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다"고 눈물을 쏟았다. 

당시 재판에서 2심 재판의 변호사는 "어머니의 폭행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이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징역 3년은 존속살해에 대해 감형 등을 적용해 법이 내릴 수 있는 최소한의 형량이다. 

강씨는 출소 후 자신의 사정을 한 사람에게 털어놓았고, 그 사람과 가정을 이뤄 두 아이의 아빠가 됐다. 강씨는 방송을 통해 "언젠가는 아이들에게도 모든 것을 털어놓아야 할 때가 올 텐데 그날 어떻게 이야기를 털어놓아야 할까 그 준비를 하면서 살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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