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로마의 주교
Papa
Pope
현직
프란치스코 (Franciscus)
즉위
2013년 3월 13일 (+4386일, 12년)
교황(敎皇, Papa)은 가톨릭 교회의 수장이자 로마의 주교이며, 바티칸 시국의 국가원수이다.
명칭
라틴어로 Papa 혹은 Summus Pontifex라 한다.[
교황을 부를 때는 성하(聖下, His/Your Holiness)라고 예칭한다.
라틴어에는 아버지를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으로 'Pater'가 있는데 이는 '생물학적 아버지'를 의미하며, Papa는 '법적 책임자'로서의 아버지를 뜻한다. 따라서 어원으로만 보면 '교부(敎父)'로 표기하는 게 맞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는 교황의 동의어로 '교화황(敎化皇)', '법왕(法王)', '법황(法皇)', '로마 법왕(Roma 法王)' 등이 등록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처음에는 '백성을 하느님에게 이끌어 감화시키는 자'라는 의미에서 '교화황(敎化皇)'이라 했고, 또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친 모든 교리를 세상에서 주관하는 자라는 의미에서 '주교자(主敎者)'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교화황을 줄인 교황과 교종을 혼용했으나, 차츰 교황이라는 말이 널리 퍼지면서 완전히 정착되었다. 1992년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춘계총회에서 용어위원회 논의를 거쳐 교황이 공식 용어로 최종 확정됐다. 북한에서는 로마 법왕이라고 한다.
근래 들어 교황이라는 호칭이 황제나 군주를 연상시킨다며 지나치게 권위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2013년 3월 21일 명동성당에서 프란치스코 교황 즉위 경축 미사를 집전한 강우일 베드로 주교(당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는 강론에서 교황 대신 '교종(敎宗)'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름을 택한 분의 복음적 영혼과 삶을 드러내는데 임금과 황제를 표현하는 '교황'이라는 어휘가 어울리지 않게 느껴졌다"는 것이 이유. 강 주교는 이미 1990년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전례위원장 시절부터 교황의 호칭을 '교종'으로 교체하는 것을 검토한 적이 있었다. 강 주교는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시에도 다시 한번 교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현재 공식적으로 한국 천주교에서는 '교황'이라는 기존의 용어를 구태여 '교종'으로 바꿔야 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교황이라는 용어가 다소 군주적인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이 점은 '교종'도 마찬가지이며, 오히려 한자의 연원을 따지면 황(皇) 자의 기원이 되는 중국 전설상의 삼황오제는 직위를 혈통에 따라 세습하지 않고 덕망이 있는 타인에게 물려주는 방식을 취했으므로 '교종'보다 '교황'이 선출직인 교황직에 더 어울리는 글자라는 것이다. 교회의 제도를 반드시 민주제로 인식하여야 할 필요는 없다. 학술적으로도 교황직은 군주정(monarchy)의 일종으로 보고 있으며, 교황직이 교회의 한 봉사직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나, 교회 제도의 가시적인 형태를 보아 '교황'이라는 용어가 걸맞다고도 볼 수 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도 황제선거에서 선제후들이 선출한 선출 황제였지만 아무도 그 황제 칭호를 가리켜 뭐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역시 온당하지만은 않다. 이 주장은 무엇보다 가톨릭 내부에서도 교황을 왕이나 황제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걸 간과한 것이다. 학술적으로 교황직이 군주정monarchy인 건 맞지만, 애당초 영어 monarchy 및 동일 어근의 서양 언어들은 한자 皇이나 王에 대응하는 의미가 아니다. 1인이mono 앞섬-archy을 의미하는 것일 뿐이다. 이 '1인의 앞섬'monarchy이 정치학적으론 한자어 '군주'와 외연이 비슷하지만 뉘앙스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교황'은 엄연히 한국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공식 용어이니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라틴어 Papa의 가족적인 어감과 가톨릭 교도권의 교황직 이해를 더 정확히 반영하기 위해 더 나은 번역어를 찾는 건 분명 올바른 방향이다.
또한 한국 문화에서 교황이라는 번역어가 맞는지에 대한 논쟁인데, 한국에서는 황제가 중국 전설의 삼황오제, 본래적 의미를 두고 쓰이지는 않는다. 현대 한국인의 시선에서 황제는 왕보다 격이 높은 존재, 곧 천자로 해석될 여지가 크다. 공식 입장대로 선출직 황제에 대해 논하려면 유럽 역사와 중국사에 대한 전 국민적 이해가 필요한데, 현실적으로 한국인 다수가 동서양의 선출직 황제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가톨릭의 공식 입장은 어디까지나 중국 번역이나 유럽에서의 교황 별칭을 논할 때 쓰임이 적절하다. 어디까지나 papa의 불인정이 아닌,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번역어에 대한 논쟁이기 때문이다.
'교종(敎宗)'은 중국, 대만 등 중화권에서 교황을 일컫는 말이며, 일본에선 교황(教皇)과 '로마 법왕(ローマ法王)'이 혼용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부터 2010년대까지 일본 정부의 대내외 공식 문서와 NHK, 요미우리 신문 등 일본 주요 언론들에서 '로마 법왕'이라고 칭했으며, 일본 가톨릭에서는 1981년 2월 요한 바오로 2세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부터 교황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일본에서 교황을 '법왕'이라고 하는 건 번역 과정에서 원래 불교 화엄경 한역(漢譯)에서 Dharma-raja에 대한 상대어로 사용한 단어를 석가모니를 비롯한 부처, 나아가 교계의 지도자를 일컫는 말로 쓰던 용례를 인용해 와서 갖다 붙인 것이기 때문. 당연히 일본 가톨릭은 불교 냄새가 짙은 이 단어를 안 좋아하기 때문에, 일본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는 한국과 같이 '가르치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교황이라는 단어를 선호하였으나, 교세가 작아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가톨릭 교회와 세속 세계에 의해 2가지 호칭이 혼용되어 쓰이다가, 2019년 11월 프란치스코 교황의 일본 방문을 계기로 일본 정부와 NHK는 공식 명칭으로 '로마 교황'(ローマ教皇)을 사용하게 되었다.
'폰티펙스 막시무스'라는 호칭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는 로마 황제가 겸하던 대제사장의 호칭이다. 379년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이 명칭을 포기하자 로마 주교가 이어받아 사용했다고 한다.
Papa
'교황'으로 번역되는 라틴어 Papa(파파)(영어: Pope)는 고전 그리스어에서는 원래 아버지를 부르는 애칭으로 쓰이는 단어지만, 라틴어에서 이를 차용하면서 존칭으로 바뀌게 되었다(평어는 pater). 그러다가 그리스어를 사용하던 동방 교회 쪽과 라틴어를 쓰던 서방 교회 쪽 모두 사제와 주교, 총대주교를 Popa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현재도 그리스, 러시아, 세르비아의 정교회에서는 성직자들을 Pope라고 호칭한다.
반면 서방 교회에서는 이 사용이 점차 의미가 좁혀지면서 3세기 초 무렵 고위 성직자를 일컫는 존칭으로 Papa를 사용하다가 5세기 무렵부터는 주로 로마의 주교를 일컬을 때 사용하고, 8세기부터는 오로지 로마의 주교에 대한 호칭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Papa라는 말을 공식적으로 쓰게 된 건 10세기로, 그 전까지는 '로마의 주교'라는 직함을 공식적인 명칭으로 사용했다. 단, 아버지를 의미하는 다른 라틴어 단어인 Pater 하고는 조금 의미가 다른데, Pater는 생물학적 아버지, Papa는 법적 책임자로서의 아버지이다. 아무튼 Papa는 두루 주교를 부르는 말로 썼으나 점차 교황을 가리키는 말로 유보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영향력
카노사의 굴욕은 중세 시대 교황의 파워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지만, 이 사건 전이나 후로는 교황의 권력이 그토록 강하지는 못했다. 카노사의 굴욕 몇년 후 교황이 황제에게 폐위당했다는 후사는 잘 언급되지 않는다. 사실 중세 시대를 보면 교황이 세속 군주와 끊임없이 경쟁을 하긴 했지만 대부분 굴욕의 역사였다. 애당초 교황령은 전성기 크기조차 프랑스 왕국이나 신성 로마 제국과 비교하면 새발의 피 수준이었으니, 세속적인 권력만 따지면 아무리 교황이 날고 기어도 왕이나 황제를 이기는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교황이 왕이나 황제를 견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봉건제로 대표되는 중세 사회의 기묘한 권력구조가 낳은 결과였을 뿐이었다.
11~13세기 정도를 제외하면 교황의 권력은 그렇게 강하지는 않았다. 11세기까지 교황은 황제의 하수인으로 인식되었고, 11세기 중반부터 교황의 권력이 급격히 강해졌지만, 교황이 일으킨 십자군 전쟁의 실패가 이어지고, 13세기 대공위 시대 때 독일 제후들이 담합하여 교황을 왕따시키며 그 뒤로 교황의 영향력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얼마 후 아비뇽 유수가 일어나며 더 이상 교황은 역사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15세기말 교황의 빵셔틀은 독일뿐이었다. 1517년 루터의 종교 개혁이 발생하며 가톨릭에서 독립한 개신교 국가에서는 교황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가톨릭 세계 안에서도 광활한 신대륙 남미를 식민지로 삼으며 머리가 커진 스페인이 더 이상 교황의 말을 듣지 않게 되었다. 1527년 황제 카를 5세(카를로스 1세)가 로마를 정복하여 교황을 굴복시킨 후 스페인은 교황의 영향력을 배제하며 자국의 종교 재판장이 스페인 가톨릭의 최고 권위자로 군림했다. 그렇게 교황은 현대사까지 세계사에 언급되는 경우가 거의 없어졌다. 결국 절대왕정의 등장으로 세속 권력을 견제할 귀족들이 싸그리 몰락한 후엔 사실상 교황은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다.
오히려 현대 사회에서 교황의 권위는 예전보다 훨씬 커졌다. 종교 개혁으로 큰 타격을 입은 가톨릭은 새로운 수요처를 뚫기 위해 후진국에 선교사 파견에 공을 들였는데, 증기선의 발달로 대륙 간 선박 이동이 원활해진 19세기 남미 이민자가 급증하며 급격하게 성장했고, 이와 함께 가톨릭의 영향력도 커졌기 때문이다. 원래 남미의 가톨릭은 유럽의 교황과 그렇게 유대감이 강하지는 않았고, 상당수 지역은 가톨릭과 사실상 별개로 거의 독자적으로 성장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20세기 통신과 교통의 발달로 남미인들은 그동안 얼굴도 모르던 교황을 직접 텔레비전으로 보게 되었고, 웅장함과 화려함의 극치를 보이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의 교황은 마을 성당의 주교나 사제들과는 차원이 다른 신성함 그 자체로 다가왔다.(이 점은 한국의 가톨릭 교도들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20세기에 유럽, 북미 등에서 가톨릭의 종교적 영향력이 크게 감소했지만, 남미에서 가톨릭의 영향력은 여전히 크고 그 중심에 교황이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 14억 명이라는 세계 최대 종교인 가톨릭의 수장인 교황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독립 국가인 바티칸의 국가 원수 자격으로 타 국가 원수와 동일한 예우를 받으며, 세계 외교가에서도 입김이 세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세계 각국의 중요한 이슈에 대해 교황이 말 한마디 언급하면 각국 언론에 실릴 정도다. 현재에도 교황은 전 세계의 종교, 정치, 외교, 문화에 있어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친다.
우리나라에서도 교황이 방한하면 다른 국가원수들의 방한 때와 같은 의전과 예우를 제공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서울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군 예식령에 규정된 바에 따라 국가 정상에게 행해지는 예포 21발이 사용되었으며(장관급은 17발, 총리급은 19발이 사용됨), 이는 교황의 권위가 한 나라의 수장과 같은 수준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교황이 타 국가를 방문하거나 국제적인 행사 등에 참석할 시에는 일반적으로 세속 국가 정상들보다 의전 서열이 더 높고 우선적으로 예우를 받는데, 교황이 일반적으로 고령이기도 하고 종교 지도자로서 대우해 주는 경향 때문이다.
포브스에서 선정한 세계 권력자 순위에서는 교황을 6위로 책정하였다.# 이는 세계 주요 강대국 지도자인 미국 대통령, 중국 주석, 러시아 총리, 독일 총리 다음가는 수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지닌 전제 군주인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보다 높은 것이다.
가톨릭에서의 위치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당신 교회의 보이는 초석으로 삼으셨으며, 그에게 교회의 열쇠를 맡기셨다. 베드로의 후계자인 로마 교회의 주교는 “주교단의 으뜸이고 그리스도의 대리이며, 이 세상 보편교회의 목자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936항
가톨릭은 교황의 권력이 존재함으로써 중앙 집권적인 교회 체계가 완성될 수 있었으며, 교황이라는 존재는 가톨릭 교회에서 사도들과 성인들 다음으로 존경할 만한 대상이자 상징과도 같다. 교황은 특히 우두머리로서 가톨릭 교회를 이끈다. 역사적으로 일부 교황들은 이런 존경심을 권력으로 악용하여 부패한 적도 많다. 이에 실망한 신자들이 대거 종교 개혁을 일으켜 만들어진 개신교로 전향한 때도 있었으나,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한 쇄신과 반성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한 개혁 등, 교황들의 주도 아래 지속적으로 가톨릭 교회의 쇄신과 개혁 운동이 진행되고 있고, 개신교와도 그리스도인 일치 운동으로 화합과 대화를 이으려 한다.
교의적인 관점과는 별개로 교회 정치적 관점에서 보자면, 교황직은 로마 지역 교회가 세계의 지역 교회들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과 동시에 로마 지역 교회에 대하여 세계의 지역 교회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로마 주교가 세계 가톨릭 교회의 추기경들을 서임하고 그 세계 교회의 추기경들이 로마 주교를 선출하면서, 로마의 교회와 세계의 지역 교회들이 서로에게 강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이 드러나는 예가 현대 교황들의 출신지인데, 폴란드인인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출된 1978년부터 47년째 이탈리아의 수석 주교가 이탈리아인이 아니다. 또한 선출에 세계 교회의 추기경들이 관여하면서 교황이 세계 가톨릭 교회에 대해 가지는 대표성을 실질적으로 보완해준다. 본래 교황은 로마 주교의 또 다른 이름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오히려 전 세계 가톨릭 공동체를 대표하는 추기경단에 의하여 선출된 인물이 교황이자 로마 주교가 되는 것이다. 그만큼 오늘날의 교황직은 이탈리아의 전유물이 아닌 국제화된 직위임을 잘 나타내는 면모이다.
교황 수위권
교황 무류지권
교황의 말은 언제나 옳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 때 발표된 '교황 무류지권(無謬之權)'을 잘못 이해한 것으로 '교회' 자체에 대한 복잡한 신학적 논쟁의 산물이다. 교회 자체에 대한 이해와 정의를 담보로 하기 때문에 지금도 가톨릭 내부에서나 외부에서나 중요한 신학적 논쟁 사항이다.
교황이 무류지권을 선언하기에는 다음과 같은 과정이 필요하다.
교황이 한 사람의 신학자로서가 아닌 세계 가톨릭 교회의 최고 목자이자 영적인 스승으로서 선언한다. 교황 개인의 신학적 견해가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교황 개인은 다르게 생각할지라도 많은 신학자들이나 보편적 신앙심에 근거하여 자신의 견해에 반하는 결정을 해야 할 수도 있다.
신앙이나 도덕의 문제에만 국한하며 그에 따라 지켜야 할 교리를 차례대로 절차를 밟아 진행한다.
그 발언이 교회의 가르침에 모순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의 가르침이란 성경을 포함하여 가톨릭 교회에서 가르치던 사도적이며 역사적인 전통. 즉 교황이 별다른 근거 없이 마음대로 교리를 뒤엎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이 가르침은 무류적이다 또는 반드시 믿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크게 상관없거나 고성소처럼 신학적으로 아직 증명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교황이 마음대로 무류지권을 주장할 수 없다.
미리 충실한 조사, 연구, 협의, 기도를 자주 거쳐 충분히 모두가 이해하여 변경의 여지가 없도록 완성한다.
성령이 부여한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공식적으로 선언한다. 이때 선언문은 '본인은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결정을 내려 선언한다' 는 표현으로 시작한다.
또한 무류성의 마지막 조건은 반드시 교황의 선언이 전 세계 모든 가톨릭 교회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즉, 교황이 공식적인 순서를 밟아 모든 가톨릭 교회를 향해 선포한 것이 아니라면 그 선언은 무류성이 있다고 볼 수 없다. 즉 교황의 결정이 전부 무류하다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윤리에 관한 결정이 무류하다는 것이며 그나마도 위에 적은 것과 같은 절차를 거쳐야만 무류성이 인정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역으로 '교황 무류성이 행사되지 않은 다른 가톨릭의 교리는 종교적으로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물론 이런 견해에 의하면 그리스도교의 핵심 사상인 유일신 사상이나 삼위일체, 단죄와 구원에 관한 교리들조차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에 이런 식의 극단적인 견해를 취하는 사람은 드물다. 가톨릭 교리의 가장 큰 권한은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있으며 그에 대한 유권적 해석의 최종 권한('절대 권한'이 아님)이 교황에게 있는 것일 뿐이다.
현재 대체적으로 교회학자들이 모두 동의하는 교황 무류성이 발동된 교리는 아래의 3가지뿐이다. 가톨릭에서 전통적으로 인정해 왔던 교리를 재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중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칼케돈파 교회에서는 이견 없이 믿는 교리이지만, 성모 무염 시태 교리나 성모 승천 교리는 특히 교파에 따라 교리가 크게 다르다. 위와 같이 교리가 다른 이유는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오랫동안 교회에서 '성전(聖傳)'으로 전승되어 온 교리이기 때문에 그렇다. 특히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강조하는 개신교는 가톨릭 교회의 전승을 대부분 인정하지 않는데, 이에 관하여 가톨릭 교회에서 전승되어 온 교리를 교황의 무류권에 근거하여 공식화했다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449년 교황 레오 1세가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정통 그리스도론 신학을 담은 '토메(Tome)'를 보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만을 강조하는 단성론을 반대하면서,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人性)을 모두 지닌다"고 선언했다. 레오의 토메는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공식 신조로 채택되었다.
성모 무염 시태 교리(Immaculata Conceptio): 성모 마리아가 원죄 없이 태어났다고 하는 교리. 옛부터 공공연히 전해 내려오다 루르드에서 발현한 성모 마리아가 성녀 베르나데트 수비루에게 '나는 원죄 없는 잉태이다'라고 선언하였으며, 세월이 흘러 1854년 교황 비오 9세가 공식화했다.
성모 승천 교리(Assumptio Beatae Mariae Virginis): 성모 마리아 사후 그 육체와 영혼이 함께 승천했다는 교리. 다만 예수처럼 자의로 승천(Ascensio Domini)한 게 아니라 구약 성경 인물인 에녹이나 엘리야처럼 '들어 올려졌다'는 의미로 '몽소승천(蒙召昇天)'이라고 한다. 1950년 교황 비오 12세가 무류지권을 발동해 발표했다. 정교회에서는 교리로 받아들려지지는 않는다.
교황의 무류지권은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이미 오랫동안 논쟁이 되었던 문제에 대해 이쪽이 더 타당하니 이렇게 정하고 더 이상 논하지 말 것을 교황이 도장을 찍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만 이렇게 정해진 사안에 대해서 반대하고 일어나면 그 순간 로마 가톨릭 교회와는 분리되어 나간 것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강력한 권한인 것은 사실이다. 즉, 교리적 차원이 아니라 교회라는 조직을 운영하는 차원에서 이야기한다면 강력한 종교적 통일성을 지향하는 가톨릭 교회의 특성상 어떤 문제(예컨대 교리)를 두고 논란이 분분할 경우 교황이 자신의 권한을 발휘하여 '이쪽이 더 타당하니 이것을 우리(가톨릭 교회)의 원칙으로 정한다.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말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아주 강력한 권한인 만큼 사전에 충분한 논의를 거쳐 모든 절차를 적절하게 거쳐 공식적으로 명확히 발휘되어야만 유효하고 또 그 적용 범위 역시 정해져 있다는 것.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2013년에 퇴위하자 "교황 무류성의 권위가 모호해지지 않느냐"는 의문이 제기된 바 있다. 이에 바티칸은 "교회법상 교황의 무류성은 베네딕토 16세의 후임 교황이 지니게 되며, 사임한 교황은 더는 도그마를 선포할 권한이 없다"고 설명했다. 이제까지 교황이 선종한 후 차기 교황이 결정될 때까지의 기간과 마찬가지로, 새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는 어떠한 주교도 무결성을 보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선출
교황이 되는 법. 가장 일반적인 방법으로 가톨릭 신자인 남성이 신부→ 주교 → 추기경 코스를 거쳐 교황이 되는 과정이 담겨 있다.
새 교황은 전임 교황의 사망(또는 사임)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후 15일~20일 이내에 선출된다. 교황의 선출은 세속 선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될 뿐 아니라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세계 곳곳에 널리 알려진다. 라틴어로 '닫힌 공간'이라는 뜻의 콘클라베라 불리는 교황 선거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스티나 경당에서 이루어지며 국적이나 출신 등에 관계없이 80살 이하 전 세계의 모든 추기경들이 투표에 참석한다. 외부와의 소통이 일제히 단절된 채 추기경들은 매일 2번의 비(非)공개 투표를 하며, 그 결과는 전통적으로 짚이나 종이를 태워 알리게 되어 있다. 짚은 검은 연기(선출 불발)를 내고 종이는 하얀 연기(새 교황 당선)를 내는데, 연기는 시스티나 경당 내부의 작은 굴뚝을 통해 경당 정면 오른편에 있는 박공 앞의 한 지점으로 뿜어져 나온다.
교황으로 선출되면 새 이름을 정하게 되는데, 보통 존경해 온 전임 교황과 내면적 관계를 연결 짓거나 그의 사목 방향을 지지하는 취지를 담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가문에서 배출된 선임 교황 이름을 이어 쓰기도 하며, 교황으로 선출된 그날이 축일이거나 존경하는 성인의 이름을 따서 짓는 경우도 있다. 교황명 개칭 관습에는 "베드로좌에 오른 새 교황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 지상 최고의 다리를 놓는 새 사람이 됐다"는 뜻이 함축돼 있다. 아울러 로마 주교의 수위권이 강화되고 교황 직무가 강조되면서 다른 교구장 주교와 차별을 두려는 취지도 담겨 있다.
이렇듯 교황의 교체는 대부분 전임 교황의 사망으로 이루어지는데, 교황이 선종했을 때 그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선 수석 추기경이 교황의 본명을 3번 부르며 은망치로 이마를 3번 두드리는 방법을 취하고 있으나 실제로 이 방법이 사용된 적은 없고 의사의 과학적 소견을 받아서 하며 선종이 확인되면 수석 추기경이 교황의 오른손에서 어부의 반지를 떼내 은망치로 표면에 2개의 깊은 십자 흠집을 내어 기능을 정지시키는 의식을 치른다. 베네딕토 16세는 퇴위하기로 한 날인 2013년 2월 28일 20시에 스위스 근위대가 철수하고 반지를 처리했다.
교황이 새로 재임할 때 같이 새로운 추기경들을 임명하곤 한다. 이 추기경 목록엔 '비공개' 처리된 사람이 최소 1명씩 있다. 추기경 문서의 인 펙토레 추기경 참고. 어디서 사는 비밀 추기경인지 공산당에 의해 가톨릭이 통제되는 중국 혹은 구소련 지역이자 정교회가 뿌리 깊은 러시아 지역 추기경이라는 설이 있지만 언제나 떡밥만 무성하다. '예전에 비해 말도 안 될 빈도로 언론에 노출될 정도로' 규모 확대일로에다 아예 조직 스스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엑소시즘 파트 담당자라는 소문도 있다.
선입견과는 달리, 교황이 될 자격은 원칙상으론 가톨릭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은 남성 누구에게나 있다. 사전에 입후보 인사를 미리 선출하지도 않으며, 그 전에 추기경일 필요조차 없다. 콘클라베가 열릴 때 언론에서 선정하는 '유력 후보'는 그때까지의 경력이나 직위, 활동 면에서 교황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인사들을 임의로 선정한 것일 뿐이다. 그래서 아예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인사가 교황으로 깜짝 등장 하는 일도 있다. 실제 역사에서는 아예 일개 수사가 교황청에 빨리 새 교황을 뽑으라고 독촉하는 편지를 보냈다가, 그걸 본 추기경들이 이런 인물이야말로 교황이 되어야 한다고 표를 던져서 즉위한 사례까지 있다.
다만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된 사람이 주교일 경우, 선출된 사람이 이를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교황이다. 설령 어떠한 사정으로 즉위식을 거행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교황으로서 정통성에 지장이 생기지 않는다. 만약 선출된 사람이 주교가 아니라면, 그가 결정을 받아들인 뒤 주교로 서품되어야 한다. 주교품을 받은 뒤에야 비로소 교황이 되며, 만약 주교로 서품되지 않으면 교황이 되지 못한다. 이는 교황이 원칙적으로 '로마의 주교'이기 때문이다.
사도좌 공석
교황이 사망하거나 생전 퇴위하여 라테라노 대성당의 주교좌가 공석이 된 기간 동안 성좌는 추기경단의 관리 감독 아래 놓이게 된다. 이를 라틴어로 "Sede vacante(사도좌 공석)"라고 한다.
이 기간 동안 교황청과 가톨릭 교회의 모든 행정은 추기경단이 맡지만 매우 제한적으로, 로마 교황청의 모든 부서장들은 직무 수행을 중단한다. 다만 교황청의 재정을 관장하는 궁무처장의 업무는 지속된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교황청 대사들은 외교 업무를 지속하며, 로마 교구 대리주교와 바티칸 시국 대리주교 역시 사목 활동을 계속한다. 또한 이 기간동안 바티칸 우체국에선 사도좌 공석 기념 우표를 발행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일시적으로 교황청의 문장이 삼중관에서 위의 움브라쿨룸(Umbraculum)으로 대체되며, 이는 교황이 부재와 추기경 시종이 교황청의 세속적 업무를 관장함을 상징한다.
또한 사도좌가 공석이 된 기간을 공위기(Interregnum)라고 하며, 콘클라베 개최까지 최소 15일에서 최대 20일까지 주어진다. 이는 추기경단이 바티칸에 모이기 위한 시간으로, 20일이 넘어가면 도착하지 못한 추기경이 있어도 반드시 콘클라베가 개최된다. 만일 교황이 선종하여 사도좌가 공석이 되었다면 이 기간동안 선종한 교황의 장례미사가 거행된다.
국적
대부분의 교황이 이탈리아계 아니면 프랑스계였으나 폴란드 출신의 요한 바오로 2세 때부터 새로운 역사가 열렸다. 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당시에는 냉전 시대였고 폴란드는 공산주의 국가였다. 한편 베네딕토 16세는 독일 출신, 프란치스코는 아르헨티나 출신이다.
왜 '출신'을 강조하느냐 하면 교황은 바티칸 시국의 통치자이므로 당연히 국적이 바티칸이고, '보편 교회의 수장이 특정 국가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바티칸 이외의 국적을 포기하기 때문이다. 다만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국인 아르헨티나는 법적으로 국적을 포기할 수 없는 탓에, 프란치스코만 이례적으로 이중 국적이다.
초창기 교황들의 이름은 의외로 대부분 로마식이 아니라 그리스식인데, 그럼에도 그들 대부분이 그리스인이라는 설명은 거의 개연성이 없어 보인다. 실제로 교황 연대표는 "초창기 교황들 중 7명은 로마를 비롯하여 이탈리아 출신이고, 베드로 한 사람만 유대인이다"라고 기술한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가 시몬을 케파라는 이름으로 바꿔주고, 이를 그리스식으로 베드로라고 읽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자신들의 이름도 그리스식 이름으로 바꿨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추측이 사실이라면 그리스식으로 개명하는 이런 관행은 제13대 교황 엘레우테리오에 이르러서도 끝나지 않았고, 심지어 중세에도 그리스식 교황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베드로의 시대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그리스식 이름을 택하는 관행의 중요성은 더욱 줄어들었다. 이는 그리스 정교회권과의 관계가 점점 소원해졌기 때문이다.
교황이 공식 석상에서 발언할 때에는 본인을 단수로 '나'라고 칭하지 않고 우리라고 칭했다. 유럽에서 군주급 인물이 자신을 가리키는 1인칭 대명사를 복수로 칭한 전통에서 유래하는데, 이를 장엄 복수형이라 하여 Majestic plural 또는 Royal we라고 하며, 창세기에서 하느님이 '우리의 모습을 따라 인간을 만들자!'라고 한다거나 히브리어에서는 신을 단수형인 엘이 아닌 엘로힘으로 표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동양에서는 그냥 짐(朕)으로 번역하고, 프랑스에서는 왕이 Je가 아닌 Nous로 자칭하며 스페인에는 이런 관습이 없다. 비슷한 전통이 있는 이슬람의 쿠란에서도 신은 자신을 '우리'라고 칭한다. 가톨릭에서 이 전통을 깬 사람은 바로 요한 바오로 1세. 자신을 그냥 '나'라고 칭하여 주변인을 놀라게 했다.
거처
4세기부터 교황들은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인근에 있는 라테라노 궁전에서 기거했지만 아비뇽 유수가 종식된 후에는 바티칸의 사도 궁전에 거처해 왔다. 로마 시내의 퀴리날레 언덕에도 교황 소유의 궁전이 있었지만 이탈리아 통일 전쟁 때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몰수했고 현재는 이탈리아 대통령 관저로 바뀌었다. 한편 로마 교구의 주교좌, 즉 교황좌는 성 베드로 대성당이 아니라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에 있다. 아비뇽 유수가 일어나기 전까지 교황들이 라테라노 궁전을 1천 년 가까이 관저로 삼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추기경 때부터 거주하던 산타 마르타 게스트하우스에서 계속 살고 있기 때문에 그의 임기 동안은 관저로 쓰이지 않게 되었다.
복식
교황의 상징색은 흰색. 그래서 교황은 항상 흰색의 수단을 착용한다. 교황이 흰색 수단을 입는 이유는 흰색이 고대로부터 신을 상징하는 고귀한 색이고 대사제만 입을 수 있었던 특성에서 연유한다. 따라서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인 최고의 목자라는 점에서 흰색 수단을 입는다. 이 흰색 수단은 현임 교황에서 전임 교황(Pope Emeritus)으로 퇴위한 후에도 유지할 수 있어서 베네딕토 16세는 사망 전까지 공식 석상에서 항상 흰색 수단을 입고 등장했다.
하루 일과
국외 순방이나 외빈 접견과 같은 특별한 사정이 아닌 이상 아래와 동일하다고 한다. 취침 중에 급한 사정이 발생하면 일어나서 처리한다고 하며 삼종 기도, 각종 기도 시간, 묵상 등의 시간을 제외하면 일에 치여서 휴일이 없다고 한다. 때문에 그 어느 나라 지도자들보다도 업무가 많고 과로하는 경우가 많다.
아래는 현임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일과이다. 근거
오전 4시: 기상
오전 5시 ~ 오전 7시: 삼종 기도(6시) 등 각종 기도를 하며 매일 아침 집전하는 미사의 강론 준비
오전 7시 ~ 오후 1시: 오전 식사, 점심 포함 미사 및 삼종 기도(12시), 업무 진행
오후 2시 ~ 오후 3시: 휴식 시간
오후 3시 ~ 오후 7시: 업무 진행 및 삼종 기도(6시)
오후 7시 ~ 오후 10시: 묵주 기도, 묵상, 서류 검토, 처리 안 된 업무 처리
오후 10시 ~ 오전 4시: 취침
교통수단
이탈리아의 철도 사업자인 '트레니탈리아'는 3~4량의 교황 전용 객차를 보유하고 있고 이탈리아의 국영 여객 항공 회사였던 '알리탈리아(ALitalia)'는 여객기를 전세하는 방식으로 제공하며 이탈리아 공군은 H-3D 31-2번기를 Elicottero Del Papa(교황의 헬기)라고 부르며 운영 중이다. 아마도 이탈리아 공군이 H-3 시킹 시리즈를 AW101 시리즈로 통일 운영할 시에는 아무래도 교황 전용 헬기 역시 바뀔 것으로 추정된다.
육로를 이용한 대외 활동을 할 때는 전용 차량에 타고 이동한다. 흔히 영화 같은 데서 교황이 나올 때 특이한 자동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이것. 이 교황 전용 차량은 파파모빌(Papamobile)로 불리고 있으며 방탄 소재로 되어 있다. 파파모빌의 차량 번호는 SCV 1. 다만 프란치스코 교황 즉위 후에는 일반적인 무개차로 개조된 SUV나 소형차를 타고 있다. 기존 차량들은 보관 중이라는 모양.
국내에서 <둘이 합쳐 아이큐 100>으로 개봉된 <Le Comiche>라는 이탈리아산 논스톱 코미디 영화에도 교황이 타고 다니는 파파모빌이 등장하는데, 난데없이 난입한 두 주인공 때문에 사막 랠리 경주에 휘말려서 엉뚱하게 랠리 우승을 하기도 한다.
교황에게는 미국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 포스 원과 같은 전용기가 없다. 가톨릭 교회의 영적 지도자이자 세속적으로는 로마 안에 있는 도시 국가 바티칸 시국의 국가원수이기도 한 교황에게 전용기가 없다는 것은 다소 뜻밖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교황청은 그동안 교황의 외국 방문 때마다 민간 항공기를 빌려 사용해 왔다.
교황은 관례로 로마에서 출국할 때는 이탈리아 국적기인 ITA 항공의 항공기를 임차하고, 외국 방문 뒤 돌아올 때는 방문국의 국적기를 탑승한다. 가령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당시에는 알리탈리아의 A330 전세기로 대한민국에 왔고, 로마로 귀국할 때는 대한항공의 보잉 777을 이용했다.
교황이 타는 항공기는 에어 포스 원과 같은 국가정상의 전용기가 아니라 민간 여객기이다 보니 방어용 무기 등이 전혀 장착돼 있지 않고 전세기에 지휘 통제 센터도 없다. 교황이 탔다는 걸 알리는 건 동체 어딘가에 조그만하게 붙은 교황의 문장뿐이다. 게다가 교황의 좌석도 일등석이 아니라 이보다 등급이 한 단계 낮은 비즈니스다. 알리탈리아 항공 여객기에는 일등석이 없이 비즈니스석과 이코노미석만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교황이 누리는 특권이라면 비즈니스석 첫 줄에 혼자 앉는 것뿐이다. 그 항공편이 출발지로 복귀할 때는 보통 일반 승객들을 태우고 돌아오는데, 특별편이 부여된다.
영미권 언론들은 교황이 타는 비행기를 '셰퍼드 원(Shepherd One)'이라고 부르는데, 성경 구절의 '착한 목자'라는 뜻의 셰퍼드와 미국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 포스 원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통계
2025년 기준으로 역사상 264명의 교황과 39명의 대립교황이 있었다.
역사상 가장 많이 선택된 교황 이름은 요한으로, 요한 1세부터 요한 23세까지 총 21명이다. 그 다음이 그레고리오(16명), 베네딕토(대립교황 1명 제외 15명), 클레멘스(15명), 레오(13명), 인노첸시오(13명), 비오(12명), 스테파노(9명) 차례다.
기록이 부실한 전근대를 제외하고 근현대에 즉위한 교황은 통상 나이가 지긋하다. 기록이 비교적 확실한 1700년부터만 따져서 최고령 사망 1~3위는 67살에 선출되어 25년 뒤인 93살에 선종한 레오 13세(재위 1878~1903), 87살에 선종한 클레멘스 12세(재위 1730~1740), 86살에 선종한 클레멘스 10세(재위 1670~1676)이다. 이 1700년 이후 재임했던 교황 평균 연령이 선출 당시 65살이고 사망 때는 78살이다. 재위기간은 평균 13년이다.
1700년 이래 최고령 즉위는 클레멘스 10세로 만 79세 10개월이었다. 그 뒤로 알렉산데르 8세가 79세 6개월, 바오로 4세가 78세 11개월, 클레멘스 12세가 78세 3개월이었다.
역대 교황 중 최장기 재위 교황은 베드로로 꼽힌다. 베드로의 재위기간은 정확하진 않지만 일반적으로 교회 설립부터 그가 순교했을 때(기원후 64년 또는 67년)까지 대략 34~37년을 재위기간으로 꼽고 있다. 베드로를 제외하고 가장 오랫동안 교황직을 수행한 교황은 비오 9세(1846~1878년 재위)로 31년 8개월을, 그 뒤를 요한 바오로 2세(1978~2005년 재위)가 이어 26년 6개월, 레오 13세가 25년 5개월을 재임했다.
기록이 확실한 교황들 중 가장 짧게 재임한 교황은 우르바노 7세로 12일간 재위했다. 그 다음으로 보니파시오 6세가 16일, 첼레스티노 4세가 17일, 테오도로 2세가 20일, 시신니오가 21일간 재위했다.
78명의 교황이 시성되었으며 대립교황 중에서도 2명(히폴리토, 펠릭스 2세)이 시성되었다. 교황 중 시복된 사람은 8명이다.
출신 나라별로는 이탈리아 태생이 210명(그 중 로마 태생은 77명), 프랑스 태생이 16명, 그리스 태생이 12명, 독일·시리아 태생이 각 6명, 스페인·아프리카 태생이 각 3명, 크로아티아 태생이 2명, 영국·포르투갈·네덜란드·폴란드·아르헨티나·이스라엘 태생이 각 1명이다. 다만 '출신 나라별' 분류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다수 있다. 오늘날 나라 개념과는 다른 도시국가 시대가 있었고, 초세기와 중세기, 근현대를 거치며 나라 명칭과 국경이 달라진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특이한 직분 출신으로는 수도자 출신이 22명, 탁발 수도자 출신이 16명, 평신도 출신이 2명, 은수자 출신이 1명이었다. 특히 평신도 출신은 하루동안 모든 품을 받고 교황직에 올랐다.
제3회까지 포함하여 수도회 출신별로는 베네딕토회 출신 23명, 프란치스코회 출신 17명, 도미니코회 출신 7명, 아우구스티노회 출신 6명, 시토회 출신 2명, 테아티노회와 예수회 출신이 각 1명이다.
31명이 순교했고, 5명이 사임, 5명이 투옥, 4명이 살해, 1명이 암살, 1명이 면직, 1명이 군중에게 집단폭행을 당해 사망했다. 전쟁터에서 입은 부상으로 사망한 사람이 1명, 1명은 무너진 지붕에 깔려 죽기도 하였다. 사후 부관참시당한 사람도 1명이 있다.
역대 교황 중 '대교황' 칭호를 받은 이는 레오 1세와 그레고리오 1세 2명뿐이다.
정교회
정교회와 가톨릭의 동서 대분열은 신학적, 문화적, 정치적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라 매우 복잡하다. 정치적인 문제로는 교황의 수위권 논쟁을 들 수 있다. 동로마 제국의 교회에서도 베드로의 후예인 교황, 정교회의 관점으로는 로마 주교가 주교들 중에 으뜸임은 인정하나, 그 으뜸이라는 표현은 명예적인 것으로 교황이 다른 교구를 실질적으로 지배할 권리는 없다고 보았다.
개신교
개신교는 가톨릭이 행한 베드로의 초대 교황 추존에 대하여, 예수 사후 베드로의 행적은 거의 알려진 바 없으며 대부분의 복음 전파는 사도 바오로가 주축으로 행했다는 점과, 베드로가 로마에서 죽었다는 근거가 희박하다는 이유로 교황이라는 개념을 부정한다.(참고글 "로마교황권에 대한 정리)
또한 이들은 '반석'은 베드로의 '고백과 신앙'이지, 베드로의 '인격'이 아니라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가톨릭 측의 입장인 '베드로의 인격에 내려진 권위'를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논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 중세철학적으로는 '사람'이 아닌 '믿음'이 축복 등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떡밥이 되기도.
또한 베드로의 인격에 내려진 권위이든 믿음에 내려진 권위이든 간에, 그 권위를 타인이 승계(세습)할 수 있는지, 이른바 사도전승의 여부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도 개신교 측의 주요 논거 중 하나이다. 따라서 개신교에서는 교회의 우두머리는 만왕의 왕이자 대제사장 예수 이외에는 없으며, 교황은 교회의 우두머리가 될 수 없다고 본다. 다만 가톨릭의 논리는 '교황은 베드로의 권위를 통한 예수의 지상 대행자'라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교황의 권위의 근거는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다분하며 예민한 주제이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미국이나 영국, 서유럽 등의 주류 개신교 국가에서도 교황을 적그리스도라 하는 경우가 많다. 애초에 교황이 적그리스도라는 주장 자체는 마르틴 루터나 장 칼뱅, 울리히 츠빙글리는 물론이고 후대의 존 웨슬리(감리회 창시자)도 했던 주장이니 한국 개신교의 특징이 아니라 나름 전통(?) 있는 발언이며 변형되지 않은 장로회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장에도 명백히 언급하고 있다. 다만 몇몇 음모론이나 종말론에 심하게 현혹, 심취되어 집착하는 몇몇 극단적 세대주의에 빠진 개신교 이단에서는 교황을 적그리스도(anti-christ)라고 하고 신빙성 떨어지는 음모론 영상과 자료를 올린다. 이런 건 가려낼 필요가 있다.
개신교 근본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개신교 교회일치론, 민중신학 등 진보적 성향의 개신교나 신학자들도 해방신학 성향 가톨릭의 전체주의식 조직 구조가 가지는 보수성과 권위(주의)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다. 원래 개신교와 가톨릭은 사제의 존재와 의미에 관련해서 여러모로 다를 수 있으며, 그 권위적 질서의 정점에 있는 것이 바로 교황이라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개신교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 중 하나인 '만인사제론'과 '개교회주의'의 특성간 개교회 간, 신자들 간 수평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고, 교황이라는 자리는 이 두 정체성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구조이기 때문에 원론적으로 받아들이기 매우 어렵다. 그렇다 보니 그냥 편하게 이웃 교회로 간주하기도 하는 듯.
교황이 급여를 받는지에 대해선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일단 검소한 삶을 지향하는 현임 교황 프란치스코는 급여를 받지 않지만, 전임자들과 관련해선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대체로 받지 않을거라는 의견이 많은데 프란치스코의 말처럼 교황은 의식주를 기본적으로 제공받고 개인적으로 필요한 것도 요청만 하면 제공받을 수 있거니와 교황청의 재정을 비교적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신분이기에 급여를 굳이 받진 않을거라는게 그 이유다. 다만 관계자들의 발언으로 보아 아예 안받는건 아닌 모양이다. 그나마 베네딕토 16세는 퇴임 후 연금 명목으로 월 2500유로(한화 약 310만원) 가량 받았다고 전해진다.
교황이 다른 나라를 방문하면 그 나라의 대통령이나 총리가 직접 영접하며 그 나라의 경호처에 해당하는 기관이 호위를 한다.
알현 시 외교 예절
다른 군주국의 군주를 알현할 때와 마찬가지로 교황을 알현할 때 역시 엄격한 예법과 절차를 준수해야 한다. 무릎을 꿇고 어부의 반지에 입을 맞추는 것이 원칙. 그러나 오늘날에는 (특히 세속 국가의 지도자들은) 이렇게까지 격식을 갖추지는 않는다.
남성은 검정 연미복을 입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검은 정장에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은 색의 넥타이라면 충분히 예를 갖춘 것으로 간주한다.
여자는 복장 예절로 검은색 긴 소매 옷과 검은색 머릿수건을 착용해야 하나, 교황의 수단과 같은 흰색 옷을 입을 수 있는 특권을 받은 여자들이 있다. 가톨릭 군주국 가운데서도 교황청에 의해 '최고의 가톨릭 군주(Rex Catholicissimus)'로 인정받은 국가의 여왕 또는 왕비만 이런 특권을 받는다. 대통령, 총리 같은 공화정 국가의 영부인이나 비가톨릭 왕가의 여왕·왕비는 이 특권을 부여받을 수 없다.
현재는 스페인 보르본 왕가, 벨기에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 룩셈부르크 나사우바일부르크 대공가, 모나코 그리말디 공가, 이탈리아 왕국의 옛 통치 왕가인 사보이아 가문 등 5개 왕가만이 보유하고 있는 특권이다.
2016년 기준으로는 스페인의 레티시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 왕비와 소피아 왕대비, 벨기에의 마틸다 왕비와 파올라 왕대비, 룩셈부르크의 마리아 테레사 대공비, 이탈리아 마리나 공비, 모나코의 샤를린 위트스톡 공비 등 7명이 이 특권을 받았다.
황제와 교황이 다툰 원인도, 기독교가 널리 전파된 원동력도 ‘돈’이다
인류 움직이는 3가지 질서 = 권력·종교·화폐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 공인한 이유도 ‘세금’
종교개혁과 로마 약탈→ 교황 권위·권력 추락
돈·권력 위해 가톨릭 버린 독실한 신자 헨리 8세
중세는 서로마가 멸망한 476년부터 동로마제국이 멸망한 1453년까지 1000년간의 기간을 말한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1492년 이전까지를 중세로 보기도 한다. 서로마제국이 몰락하고 화폐 질서가 무너지자 유럽은 물물교환 시대로 돌아갔다. 일반 백성은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스스로 군사력을 가진 영주에게 의탁하는 봉건제도가 성행했다. 봉건제와 함께 성(城)과 장원을 근거로 한 자급자족 형태의 장원 경제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탈리아 반도 외부에서는 게르만족이 남하하면서 크고 작은 게르만 왕국이 생겨났다.
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
중세시대 가장 큰 권력은 세속군주와 교황, 대주교, 성직자 등 종교 세력이었다. 유발 하라리가 말한 인류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세 가지 보편적 질서인 권력, 종교, 화폐 가운데 화폐 질서가 무너지면서 권력(패권)과 종교, 두 질서가 서로 경합한 것이다. 그렇다고 시장의 질서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중세 후기 십자군전쟁으로 상업과 무역이 일어나면서 화폐 질서와 상인, 은행가 같은 시장 세력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들은 독자 세력으로 뭉치지 못하고 종교 세력과 세속군주의 권력에 의지했다. 이들이 부상한 것은 근세 이후였다.
중세의 특징은 종교 세력에 있다. 종교가 정신세계의 권위는 물론 세속적 권력도 행사했다. 통치 범위가 작게는 교회령이었지만, 전성기 교황은 실질적으로 기독교 국가 전체를 지배했다. 12세기 말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이라고 말하면서 교황이 세속 권력까지 차지했음을 선포했다. 그래서 중세를 신이 지배하는 시대라고 부른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는 중세 유럽에 아직 절대 권력을 가진 근대국가가 자리 잡지 못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중세시대 국가는 지금의 국가와 사뭇 달랐다. 여러 형태의 영토가 뒤섞인, 아직 명확히 확립되지 않은 그런 상태의 국가였다. 절대왕권이 확립되지 않아서 국가라는 정체가 분명하지 않았다. 각각의 통치자들은 특정한 지역에 대한 특정한 권리를 보유했다. 국왕이 왕국의 통치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영주·주교 등의 통치자도 왕국 안에서 크고 작은 권리, 즉 과세, 관세, 독점 판매권, 재판권 등의 권리를 갖고 있었다. 영주, 지역 귀족, 대주교, 자치도시, 그리고 왕들 모두가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했다. 세금 징세권, 사업 수입, 재판 관할권 등 돈에 관련된 것들이 다툼의 핵심이었다. 이런 수많은 권력을 제압하고 절대군주 국가가 등장한 것은 15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그래서 중세 후반의 전쟁은 고대 전쟁과는 성격이 달랐다. 토지 이외에 금은(金銀) 등 다른 중요한 자산이 등장했고, 점차 국민 의식도 형성돼 영토를 차지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었다. ‘영토 확장’이라는 고대 전쟁의 의미는 퇴색하고, 전쟁의 목적도 다양화됐다.
돈과 권력 위한 전쟁
십자군전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일어났고, 백년전쟁은 왕위계승이나 산업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일어났다. 이처럼 전쟁에는 뭔가 그럴듯한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면을 들여다보면 모두 ‘돈과 권력을 위한 전쟁’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중세 패권 체제 때문에 어부지리를 얻은 것이 교황이었다. 서로 치고받고 싸울 때 세속 권력은 교황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는 방식으로 권위를 인정받으려 했다. 종교 세계에 머물러 있던 교황을 세속으로 끌어낸 것은 어쩌면 세속군주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이유에서 출발한 교황과 세속군주의 우호 관계가 영원할 순 없었다.
중세를 이해하려면 교황과 세속군주의 권력투쟁에 대해 알아야 한다. 교황은 어떤 과정을 통해 교회의 대표자에서 중세 최고의 권력자가 됐을까. 로마 교회 초대 교황은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베드로였다. 베드로는 로마에 와서 교세를 확장했지만,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다. 그는 순교하면서도 그가 순교한 바티칸에 로마 교황청이 세워지고 자신이 초대 교황이 될 것이라고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그 후 250년이 지난 313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했다. 당시 기독교의 교리는 분명하지 않았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는 사람도 있었고, 선지자로 보는 사람도 있었다. 로마제국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인 신으로 보는 아타나시우스파를 정통으로 인정하면서 혼란을 종식했다. 그래서 ‘정통’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가톨릭’이 기독교를 지칭하는 용어가 된 것이다.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그 수장인 교황도 널리 알려졌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은 사실 세금 때문이었다. 당시 로마제국은 재정 상황이 열악해 곤란에 처해 있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십일조를 내는 전통이 있어서 기독교와 국가를 연결하면 기독교인의 세금 납부로 재정이 개선되리라 생각한 것이다. 이후 380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테살로니카 칙령을 선포해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삼았다. 그로부터 100년도 지나지 않아 서로마제국이 멸망하자, 교황은 서유럽의 유일한 권위가 됐다. 로마를 구심점으로 기독교는 계속 서쪽으로 전파됐다.
한편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은 서로마가 멸망하자 유럽의 유일한 황제국이 됐다.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해 주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무역이 성행했고, 이에 따라 경제는 번성했고 제국은 부강해졌다. 동로마의 정교회(正敎會)는 로마 교회를 무시하기 일쑤였고 정교회 밑으로 들어오라 압박하기도 했다.
군사적으로는 게르만 왕국의 하나인 랑고바르드(롬바르드) 왕국이 교황청을 위협했다. 랑고바르드는 ‘긴 수염들’이란 뜻을 가진 게르만어다. 로마 교회는 살아남기 위해 군사력을 가진 세속군주와 손을 잡아야 했다. 마침 그 당시 서유럽의 강국이 된 프랑크 왕국은 넓은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통치 이념과 더 큰 권위가 필요했다. 로마의 국교였던 기독교는 그들과 딱 맞는 통치이념이었다. 교황과 왕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고, 이렇게 그들은 손을 잡았다.
신성로마제국의 시작
그러면 프랑크의 왕과 교황의 연합(유착)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뤄졌을까. 5세기 이후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전후해 유럽 땅에는 서고트, 동고트 왕국, 랑고바르드 왕국 등 게르만 왕국들이 세워지고 멸망하기를 반복했다. 그중 가장 유력한 왕국은 프랑크왕국이었다. 프랑크족은 라인강 유역에 본거지를 두고 갈리아 지방에 정착했다. 5세기 말 멜로빙 왕조를 세운 클로비스가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번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점차 왕권이 약해지면서 8세기에 오면 재상인 카롤루스 마르텔이 프랑크왕국의 실권을 장악한다. 프랑크왕국이 유럽의 강대국이 된 것은 이슬람제국의 굴기(屈起) 때문이었다.
이슬람교는 610년 무함마드에 의해 창시됐고, 이후 무아위야 1세가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해 우마이야 왕조(661~750)를 세웠다. 이슬람제국은 영토를 확대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다 여의치 않자 북아프리카를 돌아 서쪽에서 동로마제국을 칠 계획을 세웠다. 732년 피레네산맥을 넘어 서유럽을 침략했다. 이때 이들의 공격을 막아낸 것이 프랑크왕국이다. 프랑크왕국의 재상 카롤루스 마르텔은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이슬람 세력을 격파함으로써 서유럽을 이슬람교로부터 지켜낸다.
이 전투 이후 카롤루스 마르텔의 권력은 더 강해졌다. 마르텔의 아들 피핀은 허수아비 왕을 몰아내고 싶었다. 그래서 교황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과 멜로빙 왕 중 누가 왕이 되는 것이 옳은지 물었다. 이에 교황 스테파노 2세는 피핀의 손을 들어준다. 교황으로부터 명분을 얻은 피핀은 751년 멜로빙 왕조를 무너뜨리고 카롤루스 왕조를 연다. 756년 피핀은 이에 대한 답례로 이탈리아로 진격해 랑고바르드 왕국을 몰아내고 중부 이탈리아의 땅을 교황에게 헌납한다. ‘피핀의 기증(증여)’이라고 하는 이 사건으로 로마 교황령이 시작된다.
아버지 피핀에 이어 왕위에 오른 카롤루스 대제(재위 768~814)는 프랑크왕국의 전성기를 이끈다. 카롤루스 대제는 주위의 세속군주로부터 고초를 겪던 로마 교황을 위해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입성해 교황 레오 3세의 입지를 굳건하게 해준다. 800년에 교황 레오 3세는 성탄절 미사에 참석한 카롤루스에게 ‘로마제국의 황제’라 부르며 그를 추대했다. 이렇듯 9세기 즈음부터 교황은 황제와 결탁해 세속 권력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카롤루스 대제가 죽은 후 프랑크왕국은 서프랑크왕국(프랑스), 동프랑크왕국(독일), 중프랑크(이탈리아)로 분열된다. 동프랑크왕국은 오토 1세 때 유럽에 쳐들어온 아시아계 마자르인을 격퇴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962년 오토 1세는 교황 요한 12세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는 대관식을 치렀고, 서로마제국을 부활시킬 임무를 부여받는다. 황제의 관을 교황으로부터 받는다는 것은 교황이 황제 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정치적 행위였다. 700년 이상 존속한 신성로마제국은 이렇게 시작한다.
교황과 황제 반목의 상징 ‘카노사의 굴욕’
이렇게 끈끈하던 교황과 왕(황제)의 관계는 11세기 들어 슬슬 금이 가기 시작한다. 동로마제국이 강할 때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거의 혈맹관계 같았다. 그러나 세상에 두 개의 태양이 존재할 수 없었다. 동방의 이슬람 세력인 셀주크제국이 동로마제국을 쳐들어오면서 동로마제국이 급속도로 약해지자 상황은 달라졌다. 적이 사라지자 교황과 황제가 손을 계속 잡아야 할 이유도 사라졌다.
교황과 황제의 반목이 불거져 터진 사건이 1077년 ‘카노사의 굴욕’이었다. 형식적으로는 주교 임명권, 즉 서임권 때문이었다. 피핀의 교황령을 헌납한 대가로 받은 것이 서임권이었다. 1075년 교황 그레고리 7세는 황제의 주교 서임을 금지했다. 이는 황제의 권위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는 회의를 소집해 교황의 폐위를 결의했다. 교황도 황제 하인리히 4세의 파문과 폐위를 선언하며 대립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독일의 주교와 공작들은 교황 편에 섰다. 황제 입지가 불안해지자 카노사성에 체류하고 있는 교황을 방문해 3일을 기다린 끝에 파문을 면했다. 교황의 우위를 확실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19세기 비스마르크 재상은 로마의 교황과 대립하자 의회에서 “우리는 카노사로 가지 않는다”라고 말하면서 교황청과 화해하지 않음을 표현했을 정도로 카노사의 굴욕은 교황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후 교황의 권력은 황제에 견줄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다. 하지만 교황의 권력을 최고로 만들어준 사건은 십자군전쟁이었다. 1071년 만지케르트(Manzikert) 전투에서 동로마제국의 황제 로마누스 4세가 셀주크튀르크군에 포로로 잡히면서 셀주크제국의 왕 알프 아르슬란(Alp Arslan)의 신발에 입을 맞추는 치욕을 당한다. 이후 이슬람의 위협을 견디지 못한 동로마제국은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교황에게는 더없는 기회였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1095년 클레르몽 종교회에서 “신께서 원하신다”라며 기독교 국가들의 참전을 호소한다. 십자군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교황이 전쟁을 일으킨 진짜 이유는 자신과 세속군주의 경쟁 구도 속에서 세속군주들을 누를 만한 위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십자군은 셀주크제국을 격퇴해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동방에 왕국을 세운다. 십자군의 지도자인 교황의 권위는 더욱 높아지고 황제들을 압도했다.
14세기에 들어서자 교황의 권력은 다시 세속군주의 도전을 받게 된다. 결정적 사건이 1309년에 터진 ‘아비뇽의 유수’다. 70년 동안 로마 교황청이 남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이전해 7대에 걸쳐 교황이 프랑스 왕의 지배하에 들어간 것이다. 14세기 초 프랑스 카페 왕조의 필리프 4세는 국가의 통일 체계를 갖추고 왕권을 강화했다. 필리프 4세는 플랑드르 영토를 두고 영국과 싸웠고 군비를 조달하기 위해 돈이 많은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려 했다. 1302년 이에 대항해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필리프 4세에게 교회에 대한 과세를 금지한다고 통보한다. 그러자 필리프 4세는 프랑스 국민이 교회에 헌납하던 십일조를 정지했다. 1303년 이에 화가 난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필리프 4세를 파문했고, 이에 필리프 4세의 측근인 기욤 드 노가레는 교황의 반대파인 콜론나 가문과 합세해 교황이 휴양하던 아나니로 쳐들어가 교황을 사로잡는다. 로마 시민들의 도움으로 교황은 위기를 넘겼지만 당시 충격으로 한 달 뒤 숨졌다.
프랑스는 로마 교황청을 압박해 1305년 프랑스인 클레멘스 5세가 교황에 선출되도록 했다. 이후 1309년 클레멘스 5세는 필리프 4세의 압박에 못 이겨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이전했고, 이때부터 68년 동안 교황은 아비뇽에 거주했다. 프랑스 아비뇽 교황청의 7대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가 로마로 돌아간 이후에도 프랑스는 따로 프랑스인 교황을 내세웠다. 이후 40년 동안 교황과 교황청이 둘이었고, 이 사태는 1417년이 돼서야 수습된다.
교황, 금융가와 손잡다
이렇게 교황과 세속군주의 반목과 갈등이 심해지면서 교황은 돈 많은 상인, 금융가와 손을 잡았다. 교황은 추기경 가운데 선거로 뽑았기 때문에 교황이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선거자금이 필요했다. 15세기에 들어서면서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들은 타락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 인물이 교황 알렉산데르 6세(재위 1492~1503)였다. 그는 뇌물을 써서 교황에 올랐고, 교황이 된 후에도 여성 편력은 물론 교황청의 알몸 파티 같은 기행을 벌였다. 정말 타락과 탐욕의 끝판왕이었다. TV 프로그램 ‘벌거벗은 세계사’도 그를 역사상 가장 탐욕스러운 교황으로 소개하고 있다. 사생아인 그의 자식들도 유명하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그의 장남 체사레 보르자를 가장 바람직한 군주상으로 소개했고, 그의 딸 루크레치아 보르자는 팜파탈의 전형으로 수많은 예술작품과 문학작품에 등장하고 있다.
교황과 결탁해 성공한 대표적 상인 가문이 메디치 가문이었다. 그들은 교황 선거에 돈을 댔고, 이를 통해 교황청의 재무 업무를 맡으면서 많은 부와 권력을 쌓아갔다. 특히 ‘위대한 로렌초’라 불린 로렌초 메디치(1449~1492)는 르네상스의 후원자 역할을 하면서 메디치가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이후 메디치 가문은 직접 교황을 배출하기도 했다. 로렌초의 차남 조반니는 1513년 교황에 올라 레오 10세가 됐고, 그의 조카인 줄리오는 1523년 교황에 올라 클레멘스 7세가 됐다.
16세기 교황의 권위와 권력이 추락하는 두 가지 큰 사건이 일어난다. 하나가 1517년 촉발된 종교개혁이고 두 번째가 1527년 이탈리아 전쟁, 흔히 로마약탈이라고 하는 사건이다. 재미있는 것은 두 사건 모두 메디치 출신의 두 교황에 의해 촉발됐다는 점이다.
종교개혁은 1517년 수도사 마르틴 루터가 마인츠의 알브레히트 대주교에게 분노에 찬 편지와 95개의 논제를 보내면서 시작된다. 성경에는 면벌부의 근거가 없으며, 교황은 죄를 용서할 권한이 없고, 오직 성경만이 신앙의 근거라는 내용이었다.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왜 면벌부를 사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설파한 것일까. 역시나 돈 때문이었다. 그는 푸거 가문에 돈을 빌려 매관매직을 일삼던 교황 레오 10세에게 뇌물을 줬고, 이로 인해 그가 마인츠의 대주교가 된 것이다. 그가 빌린 돈을 갚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면벌부 판매였다. 수익 일부를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교황으로부터 면벌부를 팔 수 있는 권한을 획득한 것이다. 면벌부 사업만큼 눈감고 헤엄치기식 장사는 없었다. 결론적으로 종교개혁이라는 뇌관에 불을 붙인 인물은 교황 레오 10세와 알브레히트 대주교였다.
종교개혁 도화선 된 루터의 반박문
사실 면벌부가 모두 나쁜 것은 아니었다. 면벌부 판매 수익은 가난 구제로부터 전쟁에 이르는 많은 사업에 쓰였다. 스페인에서 면벌부 수입으로 국토 회복 전쟁을 치렀고 신대륙 원정도 나섰다. 문제는 15세기 인쇄기의 발명으로 면벌부가 대량생산되면서 면벌부 수입은 교회의 주 수입원이 되면서였다. 교회가 면벌부를 남발해 그 돈으로 교황청과 성당도 짓고 성직자들이 개인 치부까지 했다. 교회세를 내는 상황에서 면벌부까지 사야 했던 백성들의 불만은 점점 커져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뿌려진 루터의 반박문은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됐다.
개신교가 유럽 전체에 그렇게 빨리 퍼진 것은 개신교에는 의무적인 교회세가 없다는 것도 한몫했다. 교회세에 시달리던 많은 사람이 개신교로 개종했다. 1521년 가톨릭교회는 루터를 파문했으나 그의 생각에 동조하는 제후와 성직자들은 개신교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유럽 사회가 구교와 신교로 분열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527년 교황의 권위가 완전히 땅에 떨어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로마약탈 사건이다. 카를 5세의 신성로마제국이 강력해지자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코냑 동맹을 주도하면서 신성로마제국을 견제하려 했다.
카를 5세는 교황이라고 봐주지 않았다. 로마를 침략해 로마 교황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교황은 카를 5세에게 싹싹 빌어 목숨은 부지했다. 가톨릭의 수호자라 불리는 카를 5세가 가톨릭의 적인 신교도를 용병으로 고용해 가톨릭의 수장인 교황을 공격했으니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돈의 관점으로 보면 납득이 간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는 종교나 사상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보면 클레멘스 7세는 왜 헨리 8세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간다. 카를 5세로부터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교황이 카를 5세의 이모인 캐서린을 이혼당하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교회를 둘러싼 많은 사건이 사실은 돈과 권력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교회세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교회세가 뭐길래 교황과 세속군주가 이렇게 싸웠을까. 로마는 기독교를 공인하고 성서를 통합하면서 교회 체제를 선호했다. 돈을 거두기 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세도 처음에는 세금이 아니었다. 교회세의 대표적인 것이 번 수입의 10분의 1을 세금으로 내는 십일조였다. 구약성경에는 고대 유대인들이 수확물의 10분의 1을 교회에 바쳤다고 기록돼 있다.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도 수확물의 10분의 1을 사제에게 공납했다. 유대인에게 중요한 의무였던 십일조는 가톨릭교회에도 계승됐다.
처음에는 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십일조를 냈다. 하지만 기독교가 유럽 전체로 전파되면서 585년 프랑크왕국의 공의회에서 십일조를 가톨릭 교인의 의무로 명문화했다. 이에 더해 카롤루스 대제는 779년 모든 국민은 십일조로 내야 한다고 천명한다. 십일조가 세금이 된 것이다. 십일조로 인해 가톨릭교회에는 돈이 넘쳤고 이를 통해 세력을 확장했다. 점차 교회의 설립이 ‘비즈니스’가 됐다. 교회세의 4분의 3은 지역 교회에 귀속됐기 때문이다. 이러자 지역의 유력자들이 교회를 세우기 시작했다. 교회세를 두고 교회 간의 다툼도 일어났다. 귀족들은 교회를 사유화해 십일조의 징수권을 가졌고, 심지어 이를 사고팔았다.
기독교 전파의 원동력, 교회세
이런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교회세가 아이러니하게 기독교 전파의 원동력이 됐다. 새로운 교회가 만들어지면 그곳에서 교회세를 징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교회가 없는 미개척지에 교회가 세워졌다. 하지만 이런 교회세 제도는 신대륙 주민들에게는 큰 재앙이었다. 근세가 시작되면서 대항해라는 국가적 사업은 기독교 포교라는 명분 속에서 행해졌다. 대항해가 성공하자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신세계와 동방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직접적으로는 향신료를 확보하고 금을 찾기 위한 것이었지만, 또 하나의 이유는 신대륙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다.
급기야 1494년 로마 교황의 승인 아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신대륙을 절반씩 나눠 가지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한다. 서경 46도 36분을 경계로 전 세계를 둘로 나눠 동쪽은 포르투갈, 서쪽은 스페인의 땅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양국이 책임지고 미개한 나라들에 기독교를 전파하라는 것이었다. 16세기 유럽에 개신교가 늘어나면서 교회세가 줄자 해외 포교는 교회 비즈니스에서 점점 중요해졌다. 스페인은 식민지에 ‘엔코미엔다 제도’를 도입했다. 이것은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현지인을 기독교로 개종하는 역할을 맡기고 대신 현지인에게 자유롭게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한을 준 것이다. 쉽게 말해 현지인들을 약탈하고 착취할 수 있는 허가증이었다. 이 때문에 아메리카로 간 스페인인들은 기독교 포교라는 명분 아래 약탈과 살육을 일삼았다. 교황의 말에 따랐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신대륙에서 나오는 금과 은은 모두 약탈했고, 광산 개발에는 노예나 다름없는 현지인들이 동원됐다. 이후 200년 동안 아메리카 원주민의 90%가 전염병에 걸리거나 과도한 노동에 시달려 죽었다.
중세 기독교 국가들은 교회세 때문에 재정적으로 어려웠다. 사람들이 교회에 교회세를 내니 국가에 세금을 낼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교황의 힘이 막강했기 때문에 군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지만 점차 교황의 힘이 약해지자 군주들은 교회세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의 대표적 사례가 앞서 얘기한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와 교황의 다툼이었다.
영국의 헨리 8세(재위 1509~1547)가 가톨릭교회와 결별하고 성공회를 세운 것도 사실은 교회세 때문이었다. 그는 헨리 7세의 둘째 아들로 그의 형 아서의 요절로 왕세자가 되면서 형수인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했다. 그는 왕이 된 후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과 혼인하려고 했으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에 헨리 8세는 가톨릭교회와 결별을 선언하고 1534년 수장령(首長令)을 내려 잉글랜드 교회를 가톨릭교회로부터 분리한다. 이 사건은 이혼이 표면상의 이유였지만 실제로는 돈 때문이었다. 절대 권력을 원하던 헨리 8세는 대륙에서 종교개혁의 불씨가 타오르자 교회세를 자신이 차지할 궁리를 한다. 교황이 이혼을 허락하지 않자 가톨릭교회와 수도원을 해산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한 것이다.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신앙의 옹호자’라는 칭호를 받았을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헨리 8세는 돈과 권력을 위해 가톨릭을 헌신짝 버리듯 버렸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가 전 유럽에 퍼지면서 구교와 개신교의 갈등이 격화됐다. 급기야 16세기에서 17세기에 걸쳐 유럽 전체를 휩쓴 종교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의 체결로 교황청과 신성로마제국 중심의 가톨릭 천하가 무너지고 가톨릭교회는 결국 개신교를 인정한다. 루터교, 칼뱅교 등 다양한 개신교가 가톨릭과 함께 기독교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렇다고 바로 종교 갈등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그 뒤로도 크고 작은 종교전쟁이 일어났다. 18세기에 들어서서야 종교전쟁이 어느 정도 종결됐다. 이제 세상은 바뀌었다. 산업혁명과 함께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