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 한국사/조선

광해군 업적, 두문자 암기, 대동법, 회퇴변척, 폐모살제, 동의보감

Jobs 9 2024. 1. 3.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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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해군 - 북이 져서 의병장 양은이 대동중 퇴폐

  • 북인 정권장악, 광해군
  • 조식. 서경덕 학풍 계승
  • 의리 절의 숭상, 정인홍 등 다수 의병장 배출
  • 양전사업
  • 은광개발
  • 대동법
  • 중립외교(강홍립의 후금투항)
  • 회퇴변척
  • 폐모살제

동의보감
이수광 “지봉유설”에서 마테오리치 “천주실의”
허균 “홍길동전”

 

광해군의 실리적 중립외교
➜서인의 인조반정(친명배금정책, 1623)
➜이괄의 난(잔당의 조선정벌요구, 1624)
➜정묘호란(형제관계, 1627)
➜금의 강화, 청건국, 군신관계요구
➜척화파의 거절
➜병자호란(1636)
정묘호란은 금과 관계, 병자호란은 청과 관계

 

 

 

기출 문제

 

 Q  다음과 같은 업적을 세운 국왕의 재위시기에 있었던 일로 가장 옳지 않은 것은?

 

- 세자 시절에 분조(分朝)를 이끌며 일본군에 항전
- 임진왜란 때 소실된 궁궐의 중건, 사고의 정비
- 허준의 <동의보감(東醫寶鑑)> 편찬

 

① 압록강 북쪽에 살던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가 부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건국하였다.
② 권력구조가 국왕을 지지하는 특정 당파에 편중되었다.
③ 남인은 형제를 죽이고 어머니를 폐위했다는 등의 명분으로 반정을 주도하였다.
④ 정인홍은 이언적과 이황을 문묘 제사에서 삭제하자고 주장하였다.

 

【해설】 정답 
광해군 - 북이 져서 의병장 양은이 대동중 퇴폐
임진왜란 때 분조를 이끌고 의병을 규합하던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재위: 1608~1623)은 전쟁의 뒷수습을 하고자 노력하였다. 먼저, 토지 대장과 호적을 새로 만들어 국가 재정 수입을 늘렸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산업을 일으켰다. 무엇보다도 농민들의 부담을 줄이고자 공물을 현물 대신 토지의 결수에 따라 쌀, 삼베나 무명, 동전 등으로 납부하는 대동법을 경기도에서 시범적으로 실시하였다(1608). 또, 성곽과 무기를 수리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국방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전란 중에 질병이 널리 퍼져 인명의 손상이 많았던 경험을 되살려, 허준으로 하여금 ‘동의보감'을 편찬하게 하였고, 소실된 궁궐의 중건과 사고(史庫)를 정비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가 부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건국(1616)하며 명과 맞서자,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신중한 중립 외교 정책으로 대처하였다. 그리하여 명의 요청으로 후금을 토벌키 위해 심하(深河)에 강홍립과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적당히 싸우다 항복하는 중립외교를 펼쳤다(1619).  
그러나 광해군과 그를 지지하는 정인홍, 이이첨의 대북 북인 정권은 서인과 남인 및 소북 북인도 배제하며, 왕권의 안정을 이루고자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키는 등 유교 윤리에 어긋나는 정치를 펴 도덕적으로 큰 약점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이를 빌미로 서인이 인조 반정을 일으킴으로써 광해군은 왕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1623).
④ 경상 좌도 유학의 태두 남명 조식의 수제자 정인홍은, 1610년(광해군 2)년 조식이 제외되고 이언적과 이황이 문묘에 종사(從祠)되자 이를 반대하다가 유생들에게 탄핵받아 청금록에서 삭제되는 등 각종 싸움으로 분란을 야기하였다.

 

 


폐모살제(廢母殺弟)
광해군(光海君)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인 것을 이름. 인조반정(仁祖反政)의 명분이 됨.

회퇴변척(晦退辨斥)
*회재 이언적의 ‘회’와 퇴계 이황의 ‘퇴’를 따서 ‘회퇴변척’이라 했는데‘변척’이란 분별하여 배척한다는 뜻
회퇴변척(晦退辨斥) : 1610년(광해군 2) 이황 등 5현의 문묘종사 결정에 정인홍(鄭仁弘)이 상소하여 이언적ㆍ이황 등을 비판한 사건.
남명 조식의 제자였던 정인홍이 5현의 문묘종사 결정에 불만을 품고 상소를 올려 5현 가운데 이언적과 이황을 배척하였는데 이때의 상소를 회퇴변척소라 합니다. 이 상소에서 정인홍은 이언적과 이황을 가리켜 시속을 따르는 부류로 칭하였습니다. 특히 이황을 집중적으로 비난하였는데, 이황을 가리켜 심지어 정자의 제자인 周行己에 비유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주행기는 정자의 문인으로 기생과 관계를 가졌다가 나중에 스승에게 이 사실이 알려져 짐승보다 못하다는 평을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정인홍의 이런 행위는 스승인 조식의 문묘 배향을 위한 포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상소는 전국의 유생들을 격발하여 성균관 유생 이목 등 500여 명이 상소를 이언적과 이황을 변명하고 정인홍의 이름을 청금록(유생의 이름을 적은 명부)에서 삭제해 버렸습니다. 이에 대해 오히려 광해군은 정인홍을 두둔하였고 청금록에서 정인홍의 이름이 삭제됐다는 상소를 받고 그 주동자를 색출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이런 광해군의 조치는 성균관 유생들의 동맹휴학을 불렀고 이항복이 나서서 정인홍의 잘못을 지적하였지만 광해군은 입장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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