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고구려 제19대(재위: 391~413) 왕.
재위 391∼412. 이 재위연대는 「광개토왕릉비」에 근거한 것이며, 『삼국사기』에는 재위기간이 22년임은 같지만 재위연대는 392∼413년으로 실려 있다. 재위기간 동안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으므로 재위시에는 영락대왕이라 일컬어졌다.
사후의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본명은 담덕(談德)인데, 중국측 기록에는 안(安)으로 전한다. 고국양왕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체격이 크고 뜻이 고상했으며, 386년(고국양왕 3)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부왕의 사후 즉위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비록 그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삼국사기』와 「광개토왕릉비」이 어느 정도 다르게 기술하고 있지만, 시호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권을 크게 확장시켰다.
먼저 예성강을 경계로 그 동안 일진일퇴를 거듭해 온 백제에 대해 즉위 초부터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392년 4만 병력을 거느리고 석현성(石峴城)을 비롯한 10개성을 빼앗았는가하면, 이어 난공불락의 요새임을 자랑하던 관미성(關彌城)주 01)을 불과 20여 일 만에 함락시켰다.
또, 빼앗긴 땅의 탈환을 위해 침공해 온 백제군을 394년에는 수곡성(水谷城)에서, 395년에는 패수(浿水)에서 각각 격퇴하고 백제와의 접경지대에 7성을 쌓아 방비를 강화하는 한편, 396년에는 한강 너머에까지 진격하여 58성 700촌락을 공파했다.
뿐만 아니라 백제의 아신왕으로부터 많은 전리품과 함께 영원히 노객(奴客)이 되겠다는 맹세를 받고 왕의 동생과 대신들을 인질로 잡아오는 대전과를 올렸다.
백제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세력 만회를 위해 왜(倭)를 내세워 399년에는 고구려와 연결되어 있는 신라를 공격했고 404년에는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는 대방고지(帶方故地)를 침공해 왔다. 이에 대해 고구려는 병력 5만을 파견하여 왜구를 신라에서 몰아내고 가야지역까지 추격했으며, 대방고지에 침입한 왜구도 궤멸시켰다.
나아가 407년에는 백제를 공격하여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고 6성을 쳐부수어 백제를 응징했다(광개토왕릉비에는 407년 작전의 대상을 기록한 부분이 마멸되어 있어 이를 후연(後燕)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백제로 보는 것이 옳을 것으로 보인다.).
또, 신라에 대해서는 친선관계를 맺고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여 신라로 하여금 복속의 담보물로 인질을 보내게 했으며, 400년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원함으로써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러한 남방으로의 세력확장과 함께 서방으로의 진출을 꾀하기도 했다.
당시 고구려의 서쪽에는 모용씨(慕容氏)의 후연국(後燕國)이 있었다. 후연과는 396년 모용보(慕容寶)가 후연왕으로 즉위하여 대왕을 ‘평주목요동대방이국왕(平州牧遼東帶方二國王)’에 책봉하는가하면 400년에는 후연에 사절을 파견하는 등 한동안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400년 후연왕 모용성(慕容盛)이 소자하(蘇子河) 유역에 위치한 고구려의 남소성(南蘇城)과 신성(新城)을 침공해 옴으로써 양국관계는 파탄에 이른다.
이에 왕은 후연에 대한 보복전을 감행하여 402년에는 요하를 건너 멀리 평주(平州)의 중심지인 숙군성(宿軍城)을 공격, 평주자사(平州刺史) 모용귀(慕容歸)를 도망치게 했고, 404년에도 후연을 공격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이러한 과정에서 요동성(遼東城)을 비롯한 요하(遼河) 이동 지역을 차지했으며, 후연왕 모용희(慕容熙)에 의한 405년의 요동성 침입과 406년의 목저성(木抵城) 침입을 격퇴함으로써 요하 이동 지역에 대한 장악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
대왕이 중국의 산동성에 중심을 둔 남연(南燕)의 왕 모용초(慕容超)에게 천리마 등을 보내며 접근을 꾀한 것도 후연을 견제하기 위한 외교정책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서방으로의 진출은 408년 후연을 멸망시키고 등장한 북연(北燕)과 우호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일단락된다.
이 밖에도 392년에는 북으로 거란(契丹)을 정벌하여 남녀 500인을 사로잡고 거란에게 빼앗긴 고구려인 1만 인을 데리고 돌아왔으며, 395년에는 거란의 일부로 추측되는 비려(碑麗)를 친정하여 염수(鹽水) 방면의 부락 600∼700영(營)을 격파하고 많은 가축을 노획하여 개선했다.
398년에는 소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식신(息愼), 즉 숙신(肅愼)을 정벌하여 조공관계를 맺었고, 410년에는 동부여(東夫餘)주 02)를 친정하여 굴복시킴으로써 북쪽과 동쪽으로 영역 내지 세력권을 확장하였다.
이렇듯 정력적인 정복 사업을 펼친 결과, 재위기간 중 64성과 1,400촌락을 공파했으며,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팽창시켜 서로는 요하, 북으로는 개원(開原)에서 영안(寧安), 동으로는 혼춘(琿春), 남으로는 임진강 유역에 이르게 했다.
대왕은 이처럼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내정의 정비에도 노력하여 장사(長史)·사마(司馬)·참군(參軍) 등의 중앙 관직을 신설했는가하면, 역대 왕릉의 보호를 위해 수묘인(守墓人) 제도를 재정비했다.
또 393년에는 평양에 9사(寺)를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하는 한편, 다음의 장수왕 때 단행되는 평양 천도의 발판을 마련했다. 「광개토왕릉비」에 광개토왕 때에는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했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고 표현한 것도 이러한 내정 정비의 결과라고 하겠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413년 39세라는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414년 능(陵)에 옮겨 묻고 생전의 훈적을 기록한 능비(陵碑)를 건립하였다. 능과 능비는 지금도 중국 길림성 집안현(集安縣)에 남아 있는데, 능에 대해서는 장군총(將軍塚)설과 태왕릉(太王陵)설이 갈라져 있다. 또한 능비의 이른바 신묘년 기사는 한국·중국·일본 3국 학계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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