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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종교, 철학, 현대 물리학과 신비주의

Jobs9 2022. 3. 26.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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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물리학과 신비주의

 

현대 과학의 변화

현대 과학문명의 출발인 근대 기계적 세계관의 형성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은 17세기 전후로 활약한 베이컨(1561-1626), 데카르트(1596-1650), 뉴턴(1642-1727)이다. 베이컨은 과학적 방법과 기술을 통하여 자연을 인간에 유용하게 만들어 보고자 했다. 그는 자연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실험에서 진리<실용적 지식>를 찾기 위해 귀납법을 사용했는데, 귀납법은 특수한 사례들을 관찰하여 보편적인 법칙들을 발견하는 과학적 방법론이다. 이처럼 자연에 대한 관찰이 새로운 지식의 원천이라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그를 경험론자라 부른다. "Cogito ergo sum"이라는 말로 유명한 데카르트는 베이컨과 거의 같은 시기에 베이컨과 방법을 달리하면서 기계적 세계관의 틀을 짜기 시작했다. 그는 기본적인 원리들을 바탕으로 수학적 연역법을 사용하여 아무리 복잡한 상황이라도 그것이 단순한 부분들의 조합임을 알았다. 따라서 그를 합리론자라 부른다. 그는 동물과 인간을 하나의 기계로 비유했으며, 우주를 거대한 자동 장치라 생각했다.

뉴턴은 실험적 귀납법과 수학적 연역법을 조합하여 자연을 완전히 수식화함으로써 코페르니쿠스와 케풀러, 베이컨, 갈릴레오, 데카르트의 업적을 집대성했다. 그의 물리 세계는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 그리고 그 속에서 움직이는 물리적 입자로 구성된다. 그에 의하면 "절대 공간은 자체의 본성에 있어서 외부의 어떤 것과도 관계없이 언제나 동일하며 정지의 상태로 있다. 절대적이고 진정한 수학적 시간은 저절로 그 자신의 본성에 의하여 외부의 어떤 것과도 관계없이 일정하게 흘러간다." 그는 이와 같은 절대적 시공 속에 물질적 입자들을 質點으로 취급하여 수식화하였다. 뉴튼의 운동 법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어떤 물체가 힘을 받지 않으면 정지해 있는 것은 계속 정지해 있고 직선으로 움직이는 것은 계속 같은 속도로 직선 운동을 한다. 둘째, 단지 힘만이 이 물체의 운동 속도와 방향을 바꿀 수 있다. 만약 이때 일정한 힘이 가해진다면 시간당 속도의 변화량, 즉 가속고가 일정하며 힘은 질량과 가속도의 곱으로 나타난다. 셋째, 어떠한 작용에도 그 작용과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인 반작용이 따른다.

이와 같은 힘은 거대한 것이어서 지난 3백 년 동안 과학과 사회 그리고 문명을 통째로 바꿔 놓았다. 우주는 하나의 정교하고 거대한 기계이며, 인간은 자기의 이상을 최대한 발휘해서 우주와 비슷한, 정밀하고 정확한 기계를 만드는 데 힘써 왔다. 그러나 뉴턴의 자연 법칙(기계적 결정론)에는 인간을 결정적으로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우주가 창조되는 순간에 우주에서 일어날 미래의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은 인간도 하나의 기계로 취급하게 된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뉴턴 철학은 자연의 기본 속성의 발견에 따라 절대적 지위에서 하나의 이론으로 전락했다. ① 뉴턴의 운동 법칙은 그 적용을 위해서 대상과 주위 환경에 대한 일정한 정보가 필요한데, 대상과 환경의 모든 영향을 고려한다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가능하나 현실적으로는 전혀 불가능하다. ② 뉴턴의 역학은 두 개의 대상에서는 어느정도 성립하나 셋 이상의 대상에서는 적용 불가능하다(푸앵카레). 따라서 환원주의는 환상이며 아무리 안정하게 보이는 계라 할지라도 혼돈의 잠재성이 있다. ③ 열역학 제2법칙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엔트로피의 증가를 말하는데, 이와 같은 시간의 화살은 뉴턴 역삭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④ 전기와 자기의 현상은 다른 종류의 힘(전자기력)을 포함하고 있으며(패러데이), 맥스웰은 뉴튼 물리학에 없는 '파동성을 갖는 장'이라는 개념으로 전자기역학을 시작했다. ⑤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은 뉴튼 역학의 근본적인 전제들마저 흔들었다. 절대적 시간 공간이 상대론에서는 그 계의 운동 상태에 따라 관찰자에게 다르게 측정되므로 시간과 공간마저 상대적인 요소가 된다. 뿐만 아니라 뉴튼 역학에서의 물질적 입자의 고유 성질인 질량이 상대적인 물리량으로 전락하여 운동 상태에 따라 증가될 수도 있고 심지어는 질량체 자체가 시공간의 일그러짐으로 표시된다. 상대론에서는 대상과 관찰자의 상대적 운동에 따라서 그 대상의 기본적 물리 요소들이 다르게 관측되며, 심지어 중력 물질 에너지는 시공 연속체가 지어 놓은 환상이 된다. ⑥ 원자 이하의 세계를 다루는 양자론에서는 관찰자가 물리계에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측정 대상과 대활를 나누고 있다. 관찰자의 물음에 따라 대상도 그에 적절한 대답을 하기 때문에 절대적 객관성이 사라진다. 또한 양자역학에 의하면 미래를 완벽히 예측하는 데 충분할 정도로 현재의 정보를 얻어내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렇게 절대적인 이론이 자연의 본질에 의해 상대적인 이론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

베르너 하이젠베르그(Werner Heisenberg; 1901-1976)

<<부분과 전체 Physics and Beyond>>(1971) : 김용준 역, 지식산업사, 1982.

<<한계를 넘어서 Across the Frontiers>>(1974)

<<물리학자의 자연관 The Physicist's Conception of Nature>>(1955)

"하이젠베르그의 주장의 핵심은 물리학은 오직 '엄밀하게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타당한 관계'를 서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물리학을 넘어서서 물리학에 대한 철학적 사색을 할 경우, 그는 현대 물리학에 쉽게 수용될 수 있는 세계관은 데모크리투스보다는 플라톤의 세계관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는 파울리, 보어와 함께 철학(실증주의)이 물리학 흉내를 내려는 시도를 개탄하고 있다." <Ken Wilber ed., Quantum Questions, New Science Library, 1984; 박병철 공국진 역,『현대물리학과 신비주의』, 고려원미디어, 1990, p.44.>

0. 행렬양자역학(matrix quantum mechanics)과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Heisenberg uncertainty principle)

입자의 정체를 밝히는 중요한 물리량 중 위치와 운동량이 있다. 하이젠베르그는 어떠한 실험 장치를 마련하더라도 평균값에 대한 위치의 불확정성과 운동량의 불확정성의 곱이 프랑크 상수보다 같거나 크다는 것을 알아냈다. 즉 입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할수록 운동량의 측정은 부정확해지고, 역으로 운동량을 정확하게 측정할수록 위치의 측정은 부정확해진다. 입자의 에너지의 불확정성과 시간의 불확정성도 같은 관계가 있다. 이것이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위치와 운동량의 측정에 있어 적당히 타협하는 것뿐이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을 떠난 원칙적인 차원에서마저도 자연의 정확한 측정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치와 운동량, 에너지와 시간의 각각의 두 요소들은 측정의 확실성에 있어서 서로 배타적이다. 전자의 위치를 측정하려면 짧은 전자기파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으로써 전자를 측정하면 짧은 파장은 에너지를 많이 갖고 있기 때문에 운동량을 많이 변화시킨다. 반대로 전자의 운동량을 변화시키지 않고 정확하게 측정하려면 이에 사용되는 전자기파는 에너지가 작아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파장이 지나치게 길어져 전자의 위치를 정확히 측정할 수 없게 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위치,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

이러한 불확정성 원리의 결과는 비결정성을 암시한다. 거시 세계에서 보면, 불확정성의 최소치인 플랑크 상수(h)는 4.161×10-33joule sec로서 테니스 공의 크기와 운동량을 곱한 값의 1034분의 1밖에 안 되므로 미시 세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고도의 정확성을 가진다. 그러므로 거시 세계는 고전 역학에 따라 결정론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자와 같은 미시 세계에서는 양자적 불확정성의 영향이 매우 크므로 전자의 형태는 비결정론적이다. 어느 시각에 운동하는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불확정한 상태로 측정되고, 따라서 미래의 형태 역시 처음의 불확정한 것에 영향을 받아 통계적이고 확률적으로 기술될 수밖에 없다. 양자론에서는 고전 역학의 두 조건, 즉 초기 상태(위치와 운동량)와 운동 법칙 중 초기 상태조차도 불확실하여 완전히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과의 우주 법칙 대신 미시 세계에서는 확룰 법칙이 적용된다.

위치와 운동량 중 어느 것을 더 정확히 측정할 것인가는 순전히 실험자의 선택 문제이다. 이 선택을 통해서 대상과 상호 작용을 함으로써 우리는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제 관찰자를 떠난 객관적인 실체가 부정되고 객관과 주관의 구분이 사라져 버렸다. 여기에서 빛의 입자성과 파동성에 관련된 선택과 비슷한 문제에 도달한다. 빛이 파동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쌍슬릿 실험을 하면 되고, 빛이 입자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광전 효과 실험을 하면 된다. 선택은 우리 마음이다.

또한 보어는 이 문제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는 '상보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파동 입자의 이중성을 설명했다. 파동과 입자는 빛의 배타적이면서 상호 보완적인 측면들이다. 어느 것도 동시에 파동이면서 입자일 수 없기 때문에 그 둘은 서로 배타적이다. 하지만 어느 한쪽만을 가지고 빛을 이해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둘 다 빛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 그러므로 입자와 파동은 우리가 빛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상보적이다. "대립적인 것은 상보적이다."

이제 빛의 파동성과 입자성을 빛 자체가 아니라 빛과 인간과의 상호 작용의 성질로 전이시키면, 빛은 아무런 성질도 갖고 있지 않게 된다. 따라서 빛은 빛과 상호 작용하는 관찰자가 없으면 존재 의미가 없어진다. 마찬가지로 인간 또한 상호 작용하는 다른 존재가 없으면 존재 의미가 없게 된다. 이처럼 어떤 성질들을 대상에서 상호 작용으로 전이시키면, 세계는 상호 작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1. 진리는 깊숙한 곳에 살고 있다 <『현대물리학과 신비주의』, pp.45-53.>

<하이젠베르그, 김용준 역, 『부분과 전체』, 지식산업사, 1982, pp.272-288.>

보어와 파울리와의 대화 : 20년 전(아마도 1927년의 '코펜하겐 해석'인 듯하다)에 내린 양자 역학의 해석이 지금 이 시점(1952년)에서 볼 때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는 문제와 함께, 그 해석이 그 이후로 거의 모든 물리학자의 지적 상투 수단이 되었다는 이야기들.

실증주의자들은 양자 역학<상보성, 확률의 간섭, 불확정성의 관계, 주체와 객체의 분리 등>이 원자 현상을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그저 前과학적 사고로 돌아가는 것 정도로 받아들여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았다<파>. 그들은 철학의 기반이나 정당성을 현대 과학의 흐름에 두려고 하며 고대 철학의 개념들이 과학적 엄밀성을 빠뜨리고 있기 때문에 전통적 철학자들이 제기하고 논의한 많은 문제들을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앵자론의 이해를 막고 있는 것이다<보>. 그들은 문제 그 자체보다는 그 문제가 과학적 성격을 갖고 있는지에 유별나게 신경을 쓰기 때문에, 필립 프랭크에게 형이상학은 '산만한 사고'였으며 무용한 것이었다<하>. "가득찬 마음은 홀로 깨끗하며, 진리는 깊은 곳에 살고 있다"<실러의 시, 공자의 금언>에서 '가득찬 마음'은 경험과 개념의 풍부함을 의미하는데, 양자론의 형식적 법칙과 관찰된 현상 사이의 불가해한 관계를 이해하려고 할 때에 그 개념이 갖고 있는 모든 측면을 자세히 고찰하여 표면상의 모순점을 분명히 드러냄으로써 우리의 사고 과정에 변화를 일으켜야 하지 않을까?<보> meta(∼을 넘어서)라는 말은 보다 깊은 물음, 즉 해당 영역의 근저에 깔려 있는 문제를 취급한다는 뜻이며, 물리학도 그러한 질문을 할 수 있다. 전문가란 자신의 분야에서 일어날 수 있는 중대한 실수를 알고 있으며, 또 그것을 피하는 방법 역시 알고 있는 사람이며, 우리는 '진리가 숨어 있는 심연'을 단순히 제외해서는 안된다<보>.

<파울리와의 대화>

보다 엄밀한 언어적 표현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 과거 철학자들의 생각과 의문에 대하여 마음을 닫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또한 옛 종교에서는 의미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像들로 비유의 언어가 사용되었지만 그 핵심에서는 가치의 문제(존재의 중요한 측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예측 가능성으로부터 출발하는 진리개념은 인간의 언어로부터 유래되지만 자연계에서는 기껏해야 은유로밖에는 이해되지 않는다. 현대물리학의 보편적인 법칙들은 대칭성이라는 성격으로 보증되고 있는데, 이 대칭성이야말로 자연을 창조하고 있는 계획의 기본요소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계획'이나 '창조'라는 인간의 말도 은유로밖에는 통용될 수 없다. 그러나 그 언어를 사용하여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인간외적인 개념들을 인간의 언어가 만들어낼 수 없다. '의식'이란 말은 인간의 경험에만 기초하고 있는 것이므로, 인간 영역에만 그 사용이 제한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럴 때에도 실증주의자들처럼 침묵으로 무시할 수 없다. 어느것도 완전히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으며, 불분명한 것을 제거해 버린다면 동어반복만이 남기 때문이다.

다양한 像을 가지고 있는 옛 종교들의 중심적인 위치에 있는 가치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려고 노력하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관한 문제이다. 이 물음은 인간에 의하여 인간에게 제시된 문제이며, 각 종교와 세계관 속에서 매우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그 속에는 세계적인 중심질서에 대한 인간의 관계가 함축되어 있으며, 나는 이 전체적인 연관성을 양자역학을 이해하고 나서 더 잘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일상 언어로써 이 질성의 성과를 기술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비유에 의지하거나 역설과 외견상의 모순을 감수해야만 하는 상보적 고찰방식을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인격신을 믿나'라는 물음을 '당신이 타인의 영혼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듯이, 전혀 의심할 수 없는 사물이나 어떤 사건의 중심질서에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나'라고 바꾼다면 예라고 대답할 수 있다. 여기에서 '영혼'이란 중심적 질서, 즉 존재의 내적 핵심을 의미한다. 그것은 외부 세계로 표출되면 수많은 다양성을 보이게 되기 때문에 우리의 이해를 초월한다. 실증주의는 실용주의와 그에 속해 있는 윤리적인 태도로부터 발생한 것인데, 실용주의는 큰 것을 개선코자 할 때 자기 신변의 일부터 개개인의 책임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는 점에서 옛 종교들을 능가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실증주의는 전체와 개체성에 대한 연관성을 무시한다. 실용주의의 근원인 칼비니즘[기독교]의 상과 비유들이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을 때에도 여전히 기독교에 기반을 두고 있는 가치척도가 재등장하는 것처럼, 중심적 질서는 여전히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여하튼 과학에 있어서 실용주의자와 실증주의자들의 요청, 즉 개체적인 것에 대한 세심한 정확성과 언어에서의 극단적인 명확성에는 동의하지만, 실증주의자들이 터부시하는 광범위한 연관성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나아갈 방향을 잃고말 것이다.

2. 과학적 진리와 종교적 진리 <『현대물리학과 신비주의』, pp.54-60.>

갈릴레오의 종교 재판 이래로, 과학적 진리와 종교적 세계관은 서로 양립할 수 없다고 되풀이하여 주장되었다. 하이젠베르그는 과학적 진리가 자신의 영역에 확실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확신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종교적 사색들을 버려야만 할 인간 의식의 구시대적 잔재라고 단정하지는 않았다.

근대 경험과학의 실재성이 중세적인 계시 종교의 진리를 보완해 주었다고 하는 평가는 단지 반만이 옳으며, 거기에는 새로운 사고 방식의 힘을 이해하게 해주는 결정적인 특징이 결여되어 있다. 근대 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플라톤으로 되돌아가는 전환점과 연관되어 있다. 근대과학은 직접 경험은 단순화[자연법칙의 단순성]하고 이상화[수학법칙의 적합성]시켰다. 이러한 법칙을 케플러는 '신의 의지의 표현'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새로운 사고 방식은 종교로부터 멀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만을 강조함으로써 전체의 서로 연관된 통일성[질서를 부여하는 신의 측면]을 상실했다. 과학 기술은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지만, 과학과 기술의 영역을 넘어서는 목적은 전인적, 전존재적 성격을 갖고 있느냐에 의하여 결정된다.

인간은 사회와의 관계에서만 심적, 정신적 능력을 계발시킬 수 있다. 인간은 공동체 안에서 상호 연관성을 파악하고, 그 공동체의 정신적 패턴[자기 자신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은 가치의 문제, 공동체의 윤리, 문화적인 삶을 지배하여 개개인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러한 정신적 패턴을 그 공동체의 종교라고 부른다. 여기서 '종교'는 많은 문화와 서로 다른 시대의 종교가 포함되어 있으며, 통상적인 '신'의 개념조차 없었던 시대나 지역의 종교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각 공동체에 존재하는 편협한 사고(엄밀하게 경험 가능한 것만을 주장하고 있는 사고 형태, 실증주의)가 윤리적 행동의 기준만을 제시하는 것과는 달리, 순수한 종교(정신적 영역, 즉 사물의 중심적 정신적 질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는 행동의 기준만이 아니라 지도 이념까지 말한다. 이 이념은 경험 세계의 관찰을 통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감춰져 있는 구조(플라톤의 이데아, 神, 靈)에서 나온 것이다.

종교의 이미지와 초상에 있어서 현상의 배후를 추적하게 해주며, 윤리와 가치의 척도를 제공해 주며, 세계의 상호 관계를 이해하게 해주는 종교적 언어는 詩적인 언어로서 주관과 객관의 측면으로 세계를 분열하지 않는다. 따라서 검증된 과학적 결과의 정확성은 종교의 추론적 사고로 인하여 의심할 수 없으며, 반대로 종교적 사고의 핵심에서 일어난 윤리적 요구를 과학의 합리 일변도 논리에 의해 무시해서도 안 된다. 과학의 응용에서 연구자의 책임 문제는 윤리적 원칙이나 방편적인 편의주의적 사고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체의 연결체[종교적 언어로 표현된, 인간의 기본적 태도에 관한 윤리적 원리의 근원]를 고려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

과학의 진보에 의하여 종교적 언어로 말해 왔던 삶의 많은 부분들이 무시되었다. 현대의 불행은 물질적 조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술적 편의주의에 의한 정신적 패턴의 결여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직접적인 행동[성실함과 솔직함]을 통하여 삶의 물질적 조건[과학적 진리]과 정신적 조건[종교적 진리] 사이의 자연스런 조화를 회복하여, 공동체의 정신적 패턴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가치들[인간의 공동체 생활의 기초인 윤리]을 일상 생활에 소생시켜야 한다.

3. 플라톤과 데모크리투스에 대한 논의 <『현대물리학과 신비주의』, pp.61-72.>

2500년 전 레우시푸스와 데모크리투스는 물질의 구조에 관하여 사색했고, 소크라테스는 표현 양식의 기본적 문제를 논했으며, 플라톤은 현상의 배후에 있는 진실한 근원적 형태인 '이데아'를 가르쳤다. 그러한 문제들은 새로운 발견으로 고대의 사고 방식이 변화할 때마다 거듭하여 논의되었다. 물질 구조에 관한 철학적 개념은 인간 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근대 과학 발전에 대한 철학적 분석으로 우리가 직면한 기본적 문제에 들어 있는 독선적이며 상반된 의견들을 새로운 상황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현대의 과학지식, 특히 원자 물리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데모크리투스보다는 플라톤이 물질 구조에 관한 진리에 더 근접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고대 철학에서의 물질 개념

그리스 철학의 여명기에 '하나'와 '다수'라는 딜레마가 있었다. 즉, 우리는 감각게 나타나는 현상의 끊임없이 변화되는 다양성을 알고 있으며, 또한 그 현상 속에서 궁극적으로 어떤 하나의 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원자는 유일한 실재이며, 영원하며, 파괴할 수 없는 존재이며, 다른 모든 사물을 만드는 존재 기반이다. 그러나 공간 내에서 원자의 성질, 위치, 운동을 고려한다면 원자는 이미 '존재'라는 본래의 개념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 되어 버린다. '원자의 위치와 운동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현대 과학자들도 역시 필연성이나 원인과 결과를 주장하면서 모종의 인과적 또는 결정론적 사고를 하고 있다. 원자 가설의 의도는 '다수'에서 '하나'로 가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즉, 물질적 원인이 되는 근본 원리를 체계화하여 모든 현상을 이해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원자를 물질적 원인으로 간주할 수 있긴 하지만, 원자의 위치와 운동을 결정하는 보편적 법칙이야말로 진정한 근본 원리가 될 것이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자연 법칙을 논할 때 물체의 시간에 따른 진행 과정보다 기하학적 대칭성이나 정적인 형태[혹성의 원형 궤도나 정다면체]를 주로 생각하였다. 플라톤은 원자를 물질의 최소단위이지만, 엄격하게 물질적 존재라기보다는 기하학적 형태, 즉 물질의 물리적 행위를 특징짓는 물질구조의 근원을 이루는 '이데아'였다. <예를 들어 정육면체는 원소 '地'의 가장 작은 입자이며, 동시에 지구의 안정성을 상징하고, 정사면체는 원소 '火'의 가장 작은 입자이고, 정이십면체는 원소 '水'의 유동성을 의미한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이 정다면체들은 그 표면을 구성하는 삼각형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삼각형을 상호 교환함으로써 서로 다른 것으로 바뀔 수 있었다.

플라톤의 이상주의적 철학의 중심 개념에서 현상의 기반을 이루는 근본 구조는 데모크리투스의 원자와 같은 물질적 대상이라기보다는 그 물질적 대상을 결정하는 형상(이데아)이다. '이데아'는 물질보다 더 근원적이며, 세계의 '일체성'과 '통일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수학적 형상이다. 근대 수학적 자연과학의 결정적 여명기에 있어서 수학적 이해 방식[엄밀하게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는 언어, 증명이 가능하도록 형식화가 될 수 있는 언어]은 유일하게 진실한 이해 방식으로 받아들여졌다.

◇ 옛 문제에 대한 현대 과학의 대답

유물론적 원자 이론의 본질적인 문제는 '과연 물질의 기본 입자는 통상의 물질적 존재인가?'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쓰고 있는 직관적 개념들을 기본 입자의 세계에 명확하게 적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통상의 물체를 묘사하기 위하여 우리가 사용한 개념들[위치, 속도, 색, 크기 등]을 기본 입자에 적용하면 그것은 애매모호하고 불명료한 것이 된다.

이 점에 있어서 현대 물리학은 확실히 플라톤을 지지한다. 최소 입자는 실제로 통상적인 감각 세계에 있는 물질적 물체라기보다는 구조, 형상, 또는 플라톤이 말하고 있는 이데아이다. 데모크리투스와 플라톤은 물질의 최소 단위에서 일체성, 즉 세계의 진행 과정을 지배하는 통일 원리를 발견하려 하였다. 플라톤은 오직 수학적 형상으로써만 이 운리가 표현되고 이해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현대 물리학에서는 물질의 통일 이론의 수학적 형식화가 가능해졌으며, 그 통일 원리는 기본적 대칭성[특수 상대성 이론의 'Lorentz group'과 기본입장의 전기 전하의 'isospin group']과 상대성 이론의 인과율을 포함한다. 플라톤이 생각한 대칭성은 올바른 것은 아니지만, 궁극적으로 자연의 핵심부인 물질의 최소 단위에 수학적 대칭성이 있다고 믿은 것은 옳았다.

◇ 현대에 있었던 사상 진화의 결과

모든 이해의 궁극적 원천인 '하나'에 관한 탐구는 종교와 과학, 그리고 그 둘 모두의 근원에서 유사한 역할을 했다. 16-17c에는 과학의 한 법칙이 종교의 일반적 견해, 양식, 풍조 등과 모순을 일으켜 과학과 종교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19c에 몇몇 철학자들이 헤겔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해석에 기초하여 전통적 기독교를 과학철학으로 대치하려고 시도하면서 이 논쟁은 극에 이르렀다. 그러나 하이젠베르그는 플라톤의 이상주의에 찬성하고 데모크리투스의 유물론에 반대한다.

표현 수단으로서의 언어의 피할 수 없는 제한성과 부주의한 언어 사용은 많은 오해를 일으킨다. 무언가를 '이해'하고자 할 때 대부분 기존의 표현 수단으로는 면쾌하고 확실하게 사실을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명확함과 기존 개념이 갖고 있는 어쩔 수 없는 부적절함 사이의 대립관계는 현대 과학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원자 물리학에서는 고도로 발전된 수학적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해결 방법이 아니다. 우리는 일상 언어 체계로 현상을 이해할 수 있으므로 결국에는 과학조차 일상 언어에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현상의 배후에 있는 근원적 원리인 '하나'에 대한 사회와의 관계와 과학적 방법 사이의 대립 관계를 부각시켜 준다. '하나'에 대한 사회와의 관계에서는 추상적인 언어보다는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자연의 언어가 필요하고, 과학의 영역에서는 추상적인 수학 언어가 필요하다.

이처럼 서로 다른 두 언어의 현실적 존재는 고질적인 오해의 원천이다. 그러나 "현대 과학은 두 종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언어들은 같은 단어라도 다른 영역에서는 다른 의미를 갖고 있으며, 따라서 서로 다른 진리의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 플라톤도 엄밀한 언어의 가능성과 제한성을 명확히 지적하면서 시의 언어로 전환하였다. 시의 언어는 다양한 심적 영상을 유도하는 원형, 무의식의 심적 패턴, 세계 내부 구조를 반영하고 있는 강한 정서 형태이다. 그러므로 사회의 어떤 조화를 위해서는 심적 영상이 언어야말로 아마 일반적 현상에서 '하나'로 접근하는 유일한 길로 보인다.

4. 과학과 美 <『현대물리학과 신비주의』, pp.73-88.>

美란 무엇인가? 첫째, "미란 부분과 부분, 그리고 전체와의 완벽한 조화이다."[르네상스] 둘째, "미란 물질 현상을 통하여 '하나'의 광채가 드러난 것이다."[Plotinus]

먼저 첫번째 정의를 살펴보자. 수학적으로 부분이란 정수의 성질과 기하 법칙이며, 전체란 정수의 연산과 유클리드 기하학을 포함하는 근원적 공리 체계[공리 체계의 일관성에 의하여 서로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구조]일 것이다. 그리스 자연철학의 현상의 다양성을 설명할 수 있는 기본 원리에 대한 물음이 니체는 세 가지 기본적인 철학적 요구를 말한다. ①철학자는 통일적 기본 원리를 찾아야만 한다. ②그 해답은 오직 이성적[신비적으로가 아닌]으로 얻어야 한다. ③그 해답에는 세계의 물질적 측면이 결정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만물의 통일적 원리로 어떻게 다양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가. "존재만이 유일하게 존재하며 비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직 존재만이 존재하고 있다면, 그 존재를 생성해 주며 변화시켜 주는 무언가는 존재할 수 없게되므로, 존재는 영원 불변하며 시간과 공간에 제한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변화는 단지 환상일 수 밖에 없다."<파르메니데스의 파라독스> 그러나 영원한 생성 변화의 흐름을 인식하면서 데모크리투스는 원자 이론으로써 비존재는 가능성[운동 형태를 가능하게 해주는 턴 빈 공간]으로 존재할 수 있으며, 존재는 재음미되어 '진공 속에 존재하는 원자'로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플라톤은 이에 대하여 '이데아'의 길을 제시했다.

이데아의 길은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음악과 수학에 몰두하여 장력이 같은 정수 배의 두 현은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아름다움은 부분과 전체의 완벽한 조화이다. 부분은 개개의 음이며, 전체는 조화된 소리이다. 그리고 수학적 관계는 각각의 음들을 하나의 전체로 결합시켜 아름답게 만든다. 따라서 만물의 궁극적 기초는 감각적 물질이 아닌 형상의 관념적 원리이다. 이처럼 현상의 다양성은 그 다양성 속에서 수학적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형상의 통일 원리를 인식함으로써 '이해'될 수 있다. 미를 부분과 전체의 완벽한 조화이며 부분들의 관계성을 인식하므로 이해할 수 있다면, 아름다움의 경험은 관계성의 체험이다.

플라톤은 물질적 감각 세계의 불완전함과 수학의 완전한 형태를 대조시켰다. 물질적 사물의 원형인 이상적 형상[이데아]은 실제적이며 마음의 작용을 통하여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데아는 인간의 마음이 만든 것이 아니라 진실한 존재이며, 물질 세계와 인간의 사고는 단지 그것의 모사이다. 인간의 마음이 이데아를 이해하는 것은 예술적 직관에 가까운 잠재 의식적 암시이며, 이해는 이미 영혼에 새겨진 형상의 상기이다. 중심적 이데아인 '미'와 '선'의 이데아에서 신성이 드러나게 되며, 그것을 보자마자 영혼의 날개는 자라기 시작한다.

이처럼 현상의 다양성의 근원에는 수학적으로 표현 가능한 형상의 통일 원리가 존재하므로 그 다양성은 이해될 수 있다는 가정은 현대 정밀과학 속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경험주의자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실험물리학자들에게는 상세한 경험지식이 없기 때문에 현상의 기술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순수한 수학적 사고[미의 길]나 순수한 경험[지식의 길]은 무의미하며, 오직 양자의 대립, 즉 풍부한 사실과 이에 대한 수학적 형상 사이의 상호작용만이 결정적인 진보를 샘솟게 할 수 있다. 갈릴레오의 자유 낙하 실험, 케플러의 행성 궤도 관측 그리고 뉴튼의 역학에서 실험은 수학적 법칙으로 이상화되었으며, 또한 그 과정에서 조화와 관계성을 발견하였다. 뉴튼 역학에서 부분은 개개의 역학적 과정이고, 전체는 모든 과정들이 따르는 형태의 통일 원리[단순한 공리 체계로 확립된 수학적 원리]이다. '다수'가 '하나'와 대비되면서 통일되어 있는 이론들은 단순성과 미를 동시에 갖고 있다. 따라서 진리를 발견함에 있어서 미의 주 둁요성은 모든 시대가 인식하고 강조한 것이었다. '단순함은 진리의 증거이다.' '미는 진리의 광휘이다.'

정밀과학의 역사에서 이러한 관계성에서 나온 진리의 광휘는 상대론과 양자론이다. 이 이론들은 그 이론이 갖고 있는 완전성과 추상적 미에 의하여 확신되었다. 이런 추상구조 중에 수가 갖고 있는 추상적 구조들은 오직 수학의 역사적 과정에서만 드러나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수 학적 구조들은 정수론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다수의 정리와 관계들을 생성시켰다. 건축 양식에 있어서도 반원과 사각형은 기본 형태로서 역사적 과정을 통하여 새롭고 복잡하게 변화되었다. 이런 발전 가능성은 최초의 근본 형태 속에 이미 들어 있었다는 느낌이다.

예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과학에 있어서도 이 발전 과정은 중요한 사회적, 윤리적 측면을 갖고 있다. 근본적 형태에 존재하는 미의 개념을 실험하고 응용하는 과정에서 모종의 필요한 조건들이 제시되어 있었기 때문에 각 개인은 광범위한 목표 성취에 작은 기여들 할 수 있었고, 또한 그 기여의 가치는 객관적으로 평가될 수 있었다. 따라서 현 시대에서 미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기술의 윤리적 의미도 중요하다. <미의 기본 구조와 역사적 개화 과정에서 계속 등장하는 윤리적 가치와 요구>

그러면 이들 구조들의 전조는 무엇이며, 어떻게 거대한 관계성이 갑자기 인식되는가? 그 인식은 추론적[합리적] 사고의 결과가 아니라 직관적이며 완전하다. "영혼은 미를 보자마자 두려움에 싸여 전율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감각을 통하여 영혼에 전달된 것이 아니라, 무의식 깊숙한 곳에 옛부터 잇었던 어떤 것을 불러 일깨웠음을 영혼이 느꼈기 때문이다."<플라톤> "감각에 인식된 것, 즉 외부 세게에 존재하는 사물 속에서 숭고한 조화를 감지하고 인식하는 능력은 영혼 속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것은 동물들에게도 있다. 외부 세계에 감각적으로 현존하는 사물들은 이전부터 우리가 꿈 속에서 인식했던 어떤 것을 상기시켜 주며, 또한 감각에 주어진 수학적 관계는 이전부터 마음 깊숙한 곳에 있었던 지성적 원형(archetype)들을 불러일으킨다. 그 결과 이전까지 모호하게 존재해 왔던 원형들은 영혼 속에서 진정으로 빛나기 시작한다. 조화를 이루고 있는 순수한 이데아나 원형적 양식들은 본래부터 그것을 이해할 능력이 있는 것 안에 현존해 있었다. 그것은 개념적 사유에 의하여 마음에 최초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본능적 직관의 산물인 것이다."<케플러> "근본적으로 이해의 과정은, 이해를 통하여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었을 때 느끼는 기쁨과 함께, 인간의 정신 안에 선천적으로 갖고 있던 내적 심상과 외적 대상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치성이라고 볼 수 있다. 영혼이 선천적인 본능으로 감지하는 근본 심상인 이데아를 케플러는 '원형'이라 불렀다. 이와 거의 유사한 개념은 '관념화의 본능적 패턴'인 융의 '원형'이다. 여기서 명석한 개념들은 강한 정서적 내용의 '상징적' 심상들로 표현된다. 이 상징적 심상 세계에서 명령자와 형태소의 기능을 하는 원형은 실제로 이데아와 감각지각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며, 따라서 그것은 과학 이론의 출현에 반드시 필요한 전제 조건인 것이다. 그러나 이 선험적 지식을 의식적으로 합리적 공식화가 가능한 '구체적 이데아'와 관련시키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하다."<볼프강 파울리> 이러한 원초적 심상의 본질적 특징은 합리적으로도 직관적으로도 설명될 수 없다. 근원적 심상을 유용한 과학이론화하기 위해서는 경험적 검증과 합리적 분석이 확립되어야 한다.

이제는 뉴튼 역학이 더 이상 원자 내부의 역학적 현상을 적절히 묘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원자 물리학의 실험 사실로부터 명확히 인식되었다. 1900년에 플랑크에 의하여 '작용 양자'가 발견된 이래 물리학은 혼란 상태를 거듭해 왔다. 그러나 원자 물리학은 '놀라운 경이'[플라톤, 처음부터 무의식적으로 소유 하고 있던 어떤 것을 영혼이 상기한 것]를 통해 완전한 조화의 상태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무 리하게 일어나도록 강요해서는 안되고, 그것은 그 자신의 길을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나야만 한다. 정밀과학의 이러한 측면을 말하는 이유는 과학이 오직 세심한 관찰과 추론적, 합리적 사고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과학적 작업일뿐이지, 작업 내용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러므로 "미란 부분과 부분, 그리고 전체와의 완벽한 조화이다."라는 정의는 자연과학에서도 실현되었으며, 따라서 자연과학에서도 미는 계시와 명석함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다.

5. 과학은 자신의 한계를 의식하고 있는가? <『현대물리학과 신비주의』 pp.89-94.>

'과학적 진리의 개념'을 논함에 있어서 과학 지식이 일관되었다거나 종결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다양한 과학의 역사에서 과학적 문제들의 목적은 항상 자연 법칙의 거대한 체계를 이해하려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과학은 일관성을 가진다. 그러나 각가가의 제한된 경험 영역 안에서는 과학 지식이 종결되었다. 즉 뉴튼 역학 개념에 의하여 제기된 문제들은 항상 뉴튼 법칙과 그 법칙의 수학적 결과 내에서 유효한 해답을 발견하였다. 측정을 어느 정도 정확하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한, 뉴튼 역학은 완전히 타당한 것이며 미래에도 존속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정확도는 불확정성이나 열통계 이론에 의하여 제한된다. 따라서 종결된 이론은 그 시대에 타당했던 경험 영역의 이상화인 것이다. 새로운 경험 영역[전자기 현상]의 이해를 위해서는 새롭고 포괄적인 이론들이 나왔으나 그것 역시 새로운 경험 영역의 이상화였다. 상대성 이론은 움직이는 물체의 전자기학에서 태어났으며,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가능하게 했다. 양자 이론은 원자 내부의 역학적 과정을 잘 설명하며, 동시에 그것은 사건이 완전히 객체화되어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의 상호 작용을 무시할 수 있는 특수한 경우에는, 뉴튼 역학의 결과와 완전히 일치한다. 그러나 이 두 이론도 그들의 제한된 영역에서만 성립되며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정밀과학에서 말하는 '종결성'은 특정의 경험 영역에만 적용될 수 있는 자기 완결적인 개념과 법칙 체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오직 제한된 의미에서만 개념들과 법칙들은 종결되었다고 생각되며, 과학적 지식은 수학적 언어로 또는 다른 언어로 최종적으로 이론 체계화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을 구속하는 신앙의 근거를 과학적 이해에서 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과학 지식의 체계는 오직 제한된 경험 영역에만 적용할 수 있다. 대부분의 현대 종교들은 자신들은 믿음보다는 과학적 지식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거기에는 내적 모순이 있는 것이며 자기 기만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제한성이 어떤 식으로든 우리 자신에게 영향을 주고 있긴 하지만, 삶 그 자체를 제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을 정신적 존재로 성장시킨 삶의 영역은, 단일의 차원이라기보다는, 과거 수세기 동안 인간에 의하여 점거되어 왔던 복잡다단한 차원들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오랜 기간 그 제한성을 의식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모종의 평형 상태에 도달하게 되며, 거기서 인간의 지식과 창조력은 자발적으로 그 중심적 질서에 다시 도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헤르츠의 말에 의해 인과율이라는 가설적 그림의 유효성을 입중하는 기준은 허용가능한 것[우리의 사고법칙과 일치], 올바른 것[경험과 일치], 적절한 것[대상의 본질을 최대한 포함]이어야 한다. "과학이 점점 발전할수록,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마음 자신이 자연 속에 부여해 왔던 그것을 다시 자연 속에서 획득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에딩턴>

① 초기 근대과학의 특징은 엄격한 제한 관계에 의한 겸손한 의식이었다. ② 그 겸손함은 19세기를 지나면서 상실되었다. 물리학적 지식은 자연 전체에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물리학자들은 철학자가 되기를 바랐다. 또한 진실한 철학자는 과학적임을 요구받았다. ③ 이제 물리학은 근본적 변화, 즉 과학의 본래 특성인 자기 한정성으로 복귀하고 있다. ④ 과학이 갖고 있는 철학적 내용은 과학 자신의 한계성을 인식했을 때에만 보존된다. 또한 개체적 현상의 특징에 대한 새로운 발견은 현상의 본질이 아직 일반화되어 있지 않을 때에만 가능하다. 물리학은 물체, 물질, 에너지 등의 궁극적 본질에 관한 문제만 남겨 놓고 있으며, 이들 개념을 사용하여 현상의 각 특성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해만으로도 진실한 철학적 통찰은 일어날 것이다.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ödinger; 1887-1961)

<나의 세계관 My View of the World>(1964), <정신과 물질 Mind and Matter>(1958),

<자연과 그리스인 Nature and the Greeks>(1947), <과학과 인본주의 Science and

Humanism>(1951), <생명이란 무엇인가 What is Life?>(1947)

슈뢰딩거의 신비적 통찰은 상당히 예리하며, 특히 <신비적 세계관>은 정교한 신비주의 견해를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현대물리학과 신비주의』, p.96.>

0. 파동역학(wave mechanics)

슈뢰딩거는 드 브로이의 '물질파'*에 영향을 받아 전자를 물체가 아니라 일종의 정상파라는 관점에서 이해했다. 이 정상파(기타줄의 진동같이 진행하지 않는 파)는 원자 현상과 마찬가지 방법으로 양자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슈뢰딩거는 전자가 하나밖에 없는 수소 원자의 정상파 무늬를 결정할 수 있는 '파동 방정식'을 만들었다. 이 방정식에 따르면, 각 에너지 준위에는 일정한 숫자의 전자밖에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전자들은 일정한 불연속적인 에너지를 가지며 이 에너지 차가 수소의 빛 스펙트럼을 설명해 준다. 이제 슈뢰딩거의 파동 방정식은 모든 종류의 양자 문제에 적용되고 이 파동 방정식에서 파동 함수를 계산 할 수 있다.

슈뢰딩거 파동의 정체는 막스 보른의 설명에 의해 그 의미가 드러난다. 막스 보른은 파동 진폭의 제곱이 공간상의 그 점에서 전자를 발견할 확률이라는 것을 밝혔다. 파동의 진폭이 큰 공간에서는 전자를 발견할 확률이 크며 파동의 진폭이 작은 곳에서는 전자를 발견할 확률이 작다는 것이다.

이것은 원자, 광자, 전자들의 위치, 운동량 등이 단순히 우연성에 기초한다는 것을 말한다. 최초의 상태가 주어지면 고전 물리학은 시간에 따른 대상의 사건을 예측하지만 양자론은 시간에 따른 파동의 모양 변화를 예측한다. 즉 사건들의 활률 분포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예측한다. 고전 물리학은 사건을 결정하지만, 양자론은 사건들의 확률 분포를 결정한다. 이것으로써 고전적 결정론은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어느 사건의 확률이 가장 큰 상태라고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그 사건이 일어나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의 문제이다. 양자론은 이처럼 결정되지 않은 사건들의 통계적 예측만을 한다. 여기에서 신은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 주사위 놀이를 하는 신이다.

* 1924년 드 브로이는 파장은 운동량에 반비례한다는 단순한 방정식을 세웠다. 이 방정식에 따르면 운동량을 갖는 어떤 물질도 파동의 성질을 가지며 그 파장을 결정할 수 있다. 이 드 브로이 파는 물질의 파동적 성질을 나타내기 때문에 '물질파'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거시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여러 물체들은 그 대상에 비하여 파장이 너무나 작기 때문에 느껴지지 않는다. 전자는 수정 표면 반사 효과, 회절 등의 실험을 통해서 그것의 파동적인 성질이 관찰되었으며, 원자와 분자들 역시 연관된 물질파가 있음이 밝혀졌다.

1. 왜 물리학을 말하지 않는가? <『현대물리학과 신비주의』, pp.97-105.>

나는 비인과성, 파동 역학, 불확정성 관계, 상보성, 팽창 우주, 연속적 창조 등을 설명하는 적합한 단어가 없다는 것이 불만이다. 그러나 "너는 아는 것이나 이야기하지 왜 철학의 영역을 넘보는 거냐?"에 관한 한 기꺼이 나 자신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 순수하게 인간적 관점에서 느낄 수 있는 과학의 중요성에 대한 나의 첫째 반론은, 주체와 객체의 관계와, 그 둘의 차이점에 내포되어 있는 진실한 의미를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노력이 물리학적, 화학적 특정 방법에 의존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는 모든 관측이 주체와 객체 모두에 의존해 있으며 복잡 미묘하게 뒤엉켜 있다는 주장은 새로운 것이다. 이 둘째 주장은 과학 자체만큼 오래 되었다. 피타고라스와 데모크리투스는 우리의 감각, 인식, 관찰 등은 강한 개인적, 주관적 색조를 띠고 있기 때문에, 사물 그 자체의 본질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각자의 방식으로 말한다. 그 후로 '과학'이 등장할 때마다 이 문제는 계속 제기되었다.

그러나 양자 물리학에 대한 부당한 비난을 면하기 위해서는 그 내용에 새로운 것이라 할 만한 것이 있음을 말하려 한다. 대상에 의하여 주체 안에 야기된 직접적인 물리적 인상과 그 인상을 받아들이는 주 체의 상태 사이의 직접적인 물리적, 인과적 영향은 상호적이며, 또한 주체가 객체에게 미치는 불가피하고 조절 불가능한 영향이 존재한다는 것은 새로운 것이다. 물리적 작용은 항상 상호적인 작용이지만, 양자 역학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상호 작용이 아니라 객체들 사이의 상호 작용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측정 장치와 관찰 대상 사이의 불가피한 상호 간섭이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인식론적 본질[주체와 객체의 관계]에 관한 결론들이 도출되었고, (대상을 변형시키고, 관찰 방법을 개선하고, 관찰 결과를 새로운 각도에서 고찰함으로써) 주체와 객체 사이의 신비적 경계가 붕괴되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주체와 객체의 전통적인 구별 방식을 받아들인 철학자들[데모크리투스에서 칸트까지]은 '우리의 감각, 인식, 관찰에는 강한 개인적, 주관적 성향이 있어서 사물 그 자체의 본성을 그대로 전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환경에서 감지된 감각적 인상은 전적으로 감각 중추의 본질적이거나 우발적인 상태에 좌우될 뿐만 아니라, 역으로 우리 주위의 환경 역시 우리에 의하여 그것을 관찰하려고 설치한 장치를 통해 현저하게 변화된다. 결국 주체란 감각과 사고로 된 것이다. 감각과 사고들은 '에너지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 에너지 세계를 조금도 변화시켜 주지 못한다. 무수한 마음과 그들 각각의 세계가 서로 연관되어 존재하고 있지만, 모든 마음과 그 세계는 역시 동일한 원소로 이루어진 것이다. 주체와 객체는 오직 하나이기 때문에 세계는 존재하는 것도 인식된 것도 아니다. 따라서 그 양자 간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최근 자연과학의 결과로 인하여 그 양자 간의 경계가 분괴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 물리학의 불확정성은 자유 의지를 허용하는가?

불확정성 원리는 자연 법칙이 불확정적이므로 남겨 놓은 사건들을 자유 의지가 결정하도록 허용하고 있는가? 이 물음에는 물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둘 다 해답이 없는 것 같다. 양자론의 법칙에서 동일한 상황이 계속하여 일어난다면 그것들은 통계적으로 매우 정확하게 예견 가능해진다. 만약 이 통계가 '어떤 주체'에 의하여 간섭을 받는다면, 그 주체는 양자 역학의 법칙을 파괴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도덕적 상황에서 같은 상황에서 동일인의 반응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불확정성의 틈 사이로 자유 의지가 직접 개입한다는 파스쿠알 조단의 가정은 양자론이 받아들인 자연 법칙과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 그 대가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딜레마가 해결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에른스트 카시어는 조단의 생각을 도덕적인 면에서 반대한다. "자유 의지는 인간의 윤리적 행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현대 물리학에서처럼 시간과 공간 안에서 물질적 사건들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의 지배를 받는다고 가정한다면, 우연적 측면은 인간의 윤리적 행동과 물질 세계와의 상관 관계를 불러일으키므로 인간의 윤리적 행동도 우연한 것이 된다. 그러나 윤리적 행동은 주로 저열한 것에서 고상한 것으로, 악과 욕망에서 진실한 사랑과 성실한 종교적 헌신으로 나아가려는 동기에 의하여 결정된다." 그러므로 자유 의지와 윤리적 행동의 근거를 물리학적 우연성에 두려고 하는 것은 부조리하고, 자유 의지와 결정론 사이의 대립은 거의 없어졌다. "윤리적 자유라는 개념과 그 의미가 예측 가능성과 대립적인 것이었다면, 양자 역학으로 인하여 예측 가능성이 약화된긴 했지만, 아직도 그것은 윤리적 자유를 없애기에는 충분하였을 것이다." 윤리학에 기초를 제공했던 물리학적 우연성이 얼마나 부적절한 것이었는지 인식되었을 때, 비로소 자유 의지와 물리학적 결정론 사이의 연관 가능성이 보이도록 상황이 변화되었다. 결국 양자론은 자유 의지의 문제에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다. "물龽가의 인과 개념이 변화된다 해도 그것은 윤리학에 직접적 영향을 미칠 수는 없을 것이다."

◇ 과학은 그것을 건드릴 수 없다.

과학은 많은 실제적인 정보를 제공해 주며, 많은 경험을 일관성 있는 질서로 환원시켜 주 지만, 실제로 소중한 우리의 가슴 속에서 일어나는 잡다한 모든 것에 관해서는 무섭게 침묵하고 있다. 우리는 과학이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 놓은 물질 세계 밖에 존재한다. 우리가 과학적 세계상에 속해 있다고 믿는 이유는 우리의 육체가 그 세계상 속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몸은 모든 것들과의 유일한 대화의 도구이다. 그 몸은 물질 세계의 변화[운동]를 받게 되는데, 자기 자신을 이 변화의 動者라고 느낀다. 그러나 과학적 세계상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은 강력한 직접적 상호 작용의 결과이다. 인간 육체의 운동조차 '운동 그 자신의 소유'인 것이다. 모든 것은 마치 시계와 같은 것처럼 생각된다. 따라서 우리의 인격은 사라져 버렸고 표면상으로는 필요없는 것이 되었다. 이런 결과의 원인은 외부의 세계상을 구축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의 인격을 제거하는 너무나 단순한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과학적 세계관은 자기 스스로 윤리적 가치와 미저 까치를 제거해 버렸으며, 우리들의 궁극적인 의도나 목적[神] 등을 표현하는 단어들을 소유하지 않게 되었다.

과학은 음악이나 기쁨과 슬픔에 대해 완전한 무지의 상태이다. 또한 거대한 '통일체', '하나', '神'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우리의 인격조차 제거해 버렸는데 어떻게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가장 숭고한 것을 알 수 있겠는가? 무 한한 시간에 비하면 나의 인생은 작은 점에 불과하며, 우리가 측정하고 평가해 왔던 수십억 년의 시간에 비교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이해할 수 없는 심오한 질문이다. 과학은 그것에 관하여 전혀 대답할 줄 모른다.

2. 마음의 단일성 <『현대물리학과 신비주의』, pp.106-113.>

과학적 세계상 그 어디에도 감각, 지각, 사고의 능력을 갖는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세계상 그 자체가 자아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아란 전체와 동일한 것이므로 부분 속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의식적 자아는 다수의 개체로 나타나지만 세계는 오직 하나이다. 각 개인의 의식 영역은 타인의 영역과 부분적으로 겹친다. 이때 모든 이에게 공통된 복합 심상이 바로 '우리 주위의 현실 세계'이다. 그러므로 '다수의 의식적 자아와 그 자아의 심적 경험에서 조립된 하나의 세계'는 수의 파라독스에서 유래된 이율 배반이다. 이 모순에서 벗어나는 길 중에 하나는 라이프니츠의 단자론에 보이는 복합적 세계 개념, 즉 예정조화이다. (모든 단자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며, 그들 사이에는 전혀 교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두는 서로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 하나의 길은 '마음은 하나다'라고 보는 길이다. "마음의 복수성은 표면적인 것이며 실제로는 오직 하나의 마음만이 존재한다."<우파니샤드> 신과의 신비적 합일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러한 태도를 취한다. "정신적 세계는 물질 세계의 배후를 비추는 하나의 빛과 같은 하나의 정신이며, 그 정신은 한 존재가 태어날 때, 창문을 통하여 빛이 빛나는 것처럼 그 존재를 통하여 빛나는 것이다."<아지즈 노사피> 올더스 헉슬리의 <영원의 철학>에 의하면 지구상의 많은 종교와 그들의 체험이 서로 매우 유사하다. 의식은 여러 개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경험되는 것이다. 하나의 마음에는 단일의식 외의 다른 것은 있을 수 없다. "부생명sublives의 복합으로 이루어진 구체화된 육체는, 비록 통합된 것이긴 하지만 누적적인 성질을 보여주 고 있으며, 서로 상호 작용하는 미세한 세포의 작용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마음의 경우에는 이런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단일한 신경 세포는 결코 축소된 두뇌는 아니며, 육체의 세포 구성체들은 마음에 대한 어떤 것도 암시하지 않는다. 물질과 에너지는 미세한 구조로 되어 있으며, 생명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마음은 그렇지 않다."<찰스 셰링턴> 셰링턴이 말한 '하나'란 표면적으로는 많는 세포 생명에 기초해 있는 '하나의 마음'이다. 그것은 여러 종의 副腦[부분마음sub-mind]에 기초한 하나의 마음이다. '마음의 전체 갯수는 꼭 하나다.' 또한 그 것은 불멸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항상 지금, 여기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음에는 오직 현재만이 있으며 현재 속에서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예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상당히 부적절하며, 이런 이야기들은 과학이라기보다는 종교에 가깝다.

"인간의 마음은 우주적 척도에서 보면 최근에 나온 것이다."<셰링턴> 세계는 자신의 생성을 방영하는 의식적, 관찰적 마음을 그 생성 과정의 한 시기에 등장시켰다. 즉 스스로 생명 형태를 유지하고 보존하며, 번식하는 임무를 확실히 수행할 수 있는 특수한 생물학적 기계(뇌)를 결국에는 우연히 등장시킨 것이다. 그렇지만 이 세계는 어떤 마음이나 인식으로도 도달할 수 없는 수백만 년 전, 그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 '의식적 마음에 반영된 세계의 생성'이라는 표현은 단지 비유에 불과하다. 세계는 오직 한번 주어질 뿐이고, 반영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시간과 공간에 펼쳐져 있는 세계는 단지 우리의 심상[경험을 통해 버클리가 알고 있었던 존재의 심상]일 뿐이다. 따라서 마음은 그림 전체를 만든 작자이지만, 만들어진 작품 속에서는 전체적 효과를 필연적으로 손상시키고 있는 사소한 장식물에 불과한 것처럼 이중적이다.

세계상을 만든 우리의 마음을 그 세계상에서 배제해야만 우리는 세계에 대한 이해 가능한 조망을 얻을 수 있으며, 따라서 마음은 세계상 어디에도 설 장소가 없게 되었다. 세계상(마음)을 세계상 자체 속에 억지로 집어넣으려 한다면 결국에는 필연적으로 불합리를 가져올 것이며, 이것은 전형적인 모순의 하나이다. 동일한 이유로 물리학적 세계상에는 인식의 주체를 구성하는 모든 감각적 요소가 결핍되어 있다. 또한 과학의 세계에는 의식적으로 사고하고 인지하고 느끼는 주체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갖는 모든 것[윤리적 미적 가치, 세계 전체의 의미와 목적]이 결핍되었거나 배제되었다. 과학적 세계 모형에 집어넣은 모든 것은 어쩔 수 없이 과학적 주장의 형태를 취하게 될 것이며, 이러한 이유로 그것은 적합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과학 연구가 세계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문제에 침묵을 지켜야 한다. 쇼는 분명히 진행되고 있지만 그 쇼는 오직 그것을 생각하는 마음에게만 어떤 의미를 갖게 될 뿐이다. 또한 인격신을 과학적 세계 모형의 일부로서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시간과 공간 속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한 신의 체험이라는 것은 직접적 감각 의식과 같이 실제적인 것이며, 자신의 인격과 같이 진실한 것이다.

3. 신은 바로 '나'이다 <『현대물리학과 신비주의』, pp.114-118.>

생명체의 활동과 자아의식적 행위들은 <물리화학의 통계적 설명에 의하면> 기계적으로라기보다는 통계적으로 결정된다. 그러나 양자적 불확정성이 생물학적으로는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예외적으로는 감수분열, 자연적 돌연변이, X-선으로 야기되는 돌연변이 같은 순수하게 우연적인 특질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들이 있다.> 생물학자들은 자기 자신을 하나의 기계장치라고 하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주장은 직관적 내성에 의하여 그 존재가 확실시되고 있는 자유 의지와 모순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직접 체험 그 자체는 이질적이며 다양한 것으므로 논리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면 다음의 전제에서 어떤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겠는가? ① 나의 육체는 자연 법칙에 따르는 순수한 기계 장치의 기능을 한다. ② 논쟁의 여지가 없는 직접 체험에 의하면, 나는 숙명적이며 매우 중요한 이 기계 장치를, 그 효과를 예견하면서 조종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그 행동에 완전한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여기에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나'<'나'를 느끼거나 말하고 있는 의식적 마음>라는 존재가 자연 법칙에 따라서 '원자의 운동'을 조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는 전능의 신이다.'<기독교적 문화 속에서 이것은 신성모독이지만> 이런 추론이, 신과 불멸을 일거에 증명하는, 생물학자의 가장 엄밀한 추론인가?

이러한 통찰은 우파니샤드에서 ATMAN = BRAHMAN<개별적 자아는 보편적이며 영우 蓥한 자아와 동등하다>로 표련되었고, 베단타 학파의 철학저들은 먼저 머리로 이 가르침을 배운고 이 지고한 가르침에 자신의 마음을 합치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여러 나라 신비가들은 개별적으로 완전한 조화를 이루었으며, 자신들의 체험을 '나는 신이 되었다'라고 묘사하였다. 또한 서양의 쇼펜하우어와 몇몇 사람들도 서로의 눈을 바라보듯이 자신들의 사고와 기쁨이 하나임을 명확히 깨달았다는 점에서 신비주의자들과 매우 유사하다.

의식은 복수의 현태로 체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단일한 형태로 체험되는 것이다. <꿈 속에서 우리는 여러 인물의 연기를 하지만, 다은 이의 말과 행동을 조절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다.> 의식은 자신이 물질 영역에 제한되어 있는 육체에 밀접하게 결합되어 의존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마음의 복수가설은 매우 시사적이다. 결국 의식은 하나이며 그 다수성은 불투명한 것이라고 하는 직접적 체험을 단순히 유지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만이 존재하며, 다수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환영(마야)에 의하여 생긴 '하나'의 여러 측면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들 각각은 다른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자기 자신만의 체험과 기억의 총체를 이루는 분명한 인상들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나'라고 한다. '나는 과연 무엇인가? '나'란 단일한 자료<경험과 기억>들을 그 위에다 집적하는 기반적 존재이다. 마치 과거의 '나'를 기억하는 것처럼 '나'는 나의 가슴 속에 있으며, 매우 생생하게 존재한다. 거기에는 애통해할 만한 개인적 존재의 상실은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런 것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4. 신비적 세계관 <『현대물리학과 신비주의』, pp.119-122.>

철학에서 관찰과 사고를 찾는 인간이 시간적 공간적으로 다양성을 갖고 있다는 어려움은 우리의 지성의 범위 내에서 합리적 사고에 의해 논리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언어로써 그 해답을 표현하는 것은 대단히 쉬운 일이다. 즉 '우리가 지각한 복수성은 단지 표면적인 것이며 진실한 것은 아니다.'<결정체의 비유 - 회화적 비유> 현대 지성인들이 집착하고 있는 논리적 사고를 통해 현상의 본질을 파악하기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논리적 사고는 그 자체가 현상의 일부이며 현상 속에 완전히 포함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논리적 사고를 통하여 다麊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논리적 사고를 행할 수 없는 영역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논리적 사고를 포함하기보다는 그 영역의 핵심 문제에 집중시키면서 그 영역을 다루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는 세계상을 마무리짓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여기에서 현대인들의 세계관의 헛점은 무엇인가? 처음에 그 세계관을 낳았던 구체적인 상황을 묘사해 보면, 그 결과로써 처음에 묘사했던 특정 상황은 그것과 동등한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으며, 그 다른 것이란 단순히 개념으로서만 허용되는 것이 아니고, 경험을 필요로 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처음의 그는 누구인가? 당신 자신은 아니었나? 당신의 자아 또 '다은 사람은 무엇인가? 객관적 견지에서 동일한 것이 있을 때, 그 차이-당신과 다른 사람의 차이-를 판단하게 해주는 것은 무엇에 의거한 판단인가?> 당신이 자기라고 부르는 지식, 느낌, 기호 등이 통합되어 있는 '존재'가 어떤 순간에 무에서 뛰쳐나와 존재로 형성된다는 것을 불가능하다. 그 통합적 존재는 근본적으로 영원 불변하며, 모든 사람에게 수적으로 '하나'만 있을 뿐이다. <또한 그것은 모든 감각적 존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당신과 그 외의 모든 의식적 존재는 전체 속에 있는 전체이다. 따라서 당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은 전 존재의 부분일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전체인 것이다<Leo Lionni, Pezzettino>. 오직 전제만이 부분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숨에 조망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너이다 Tat tvaam asi", "나는 동쪽에 있으며 서쪽에 있고, 낮으며 높고, 나는 세계 전체이다." 이제 대지와 하나임을 확신하는 당신은 대지처럼 확고히 안정되며 불사의 존재가 된다. 틀림없이 대지는 당신을 내일로 끌어당길 것이며, 당신에게 한번 더 새로운 노력과 고통을 안겨 줄 것이다. 영원하며 항상 존재하는 것은 오직 이 순간뿐이다. 현재만이 오직 끝이 없이 영원한 것이다.



우주와 과학 종교 철학

최근 몇 세기 동안 과학은 인류의 모든 꿈과 이상을 이루어 줄 수 있는 유일한, 그리고 확실한 수단인 것 같았다. 아니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보고 있다. 그래서 이 시대를 '과학 신앙의 시대'라 부르고 싶다. 그러나 물질과 사리에 이용된 과학은 자연의 위상과 환경까지도 타락시켜 놓았다. 인류가 만든 찬란한 과학기술의 뒤편에는 지구의 환경 오염과 생태계 파괴 문제, 각종 자원의 고갈과 에너지의 위기, 인구 폭발과 식량난, 핵전쟁의 공포와 세계적 기상 이변이라는 검은 그림자가 지구촌 문명을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에서 인류와 자연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지금까지의 과학은 진정으로 자연을 몰랐기 때문에 자연을 정복하려 했지만, 인류와 자연을 구원하려는 자는 진정으로 자연을 알고 자연의 흐름 속에서 자연을 구원하고 인류를 구원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모든 역사가 가야할 길은 무엇인가? 길은 변하지 않는 진리의 표상이다. 그래서 道는 만사 만물의 흘러가는 법칙이요, 德은 그 도를 펴는 우주의 따사로움이고 그 도를 따르는 방법이다. 그러면 그 道德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그것은 지나간 역사와 올 역사의 시 공간에서, 지구 자연과 우주의 역사가 흘러가는 길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우주가 흘러가는 길, 우주 속의 모든 소우 주들이 흘러가는 길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부여받은 시간적 공간적 역할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주가 흘러가는 길을 과학 종교 철학에서 찾을 수 있다.

과학은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공리에서 출발하여 자연을 서술한다. 올바로 서술된 자연 연상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하도록 강요할 수 있고 이해하지 못하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잘못으로 돌릴 수도 있다. 종교는 종교 체험을 바탕으로 '내 마음이 네 마음이다'라는 데서 출발한다. 자기 마음의 변화를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 변화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는 없고 다만 인간끼리의 믿음에 의지하여 서로의 마음 세계를 통하려 할 뿐이다. 따라서 과학은 자연 현상을 의심하는 데서 시작하여 다른 사람이 다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 서술 즉 지식에서 끝나고, 종교는 믿음에서 출발하여 깨달음 즉 지혜에서 맺는다. 과학이 절름발이가 되지 않고 종교가 장님이 되지 않기 위해서 과학의 머리와 종교의 마음이 만나 이룬 새로운 종합이 철학이다. 철학은 협소한 논리를 넘어설 수도 있고 어느 정도의 보편적 서술도 가능하다.

본래 과학 종교 철학은 하나였다. 인간들이 각자 자신의 관심사를 탐구하기 위해 잠시 가지쳐 나오게 했을 뿐 근본은 하나다. 그리고 지금 과학 종교 철학은 다시 만나려 하고 있다. 혹자는 이 만남을 두려워한다. 과학은 계속 변해 왔기 때문에 종교와 또 헤어지리라는 것이다. 과학이 우주를 시계로 보았을 때 이미 종교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으면 거대한 새로운 주기의 시대가 종합을 원하고 있다. 이 만남이 우연한 만남이 아니라 본래 하나였기에 다시 만나는 것이다.

과학 종교 철학이 만남을 이루는 그 장소는 어디인가? 그곳은 宇宙이다. 無의 바다에 한 줄기 물결이 일자 또 다른 물결이 뒤따르고 그 물결 뒤로 또 다른 물결들이 이어져 수많은 물결들이 뒤엉켜 이 우주를 만들었다. 우주는 스스로 그러함이요, 스스로 그렇게 변화해 감이다. 우주는 自然이라는 말이 가장 어울린다. 자연은 잡으려고 발버둥 치면 더 멀어지고, 마음을 비우고 질문을 버리면 이미 가슴 속에 고이 와 깃들어 있다 자연은 없는 듯이 있고, 밑바닥 없는 기초 위에 존재하고, 한계가 있지만 그 한계는 끝없이 열려 있어 순간순간 새롭게 열어 나가고 있다.

인간의 의지와 무관한 절대적 진리로 인정받는 뉴턴 역학은 원자 이하의 세계를 다루는 양자역학에서 무력해 진다. 양자역학에서는 관측이 없으면 아무것도 말할 수 없고 관측자 없는 대상은 있을 수 없다. 즉 빛의 파동적 형태와 입자적 형태는 빛의 본성이 아니다. 빛과 관찰자간의 대화의 성질이요, 상호작용의 성질이다. 따라서 양자역학에서는 상호 작용하는 관찰자가 없으면 빛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고, 상호작용하는 빛과 같은 존재가 없으면 관찰자인 인간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관찰자, 빛 등의 사물이 아니라 상호 작용일 뿐이다.

또한 불확정성 원리는 소립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모두 다 우리가 원하는 만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고 한다. 즉 소립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하려면 운동량을 변화시키게 되어 운동량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고, 소립자의 운동량을 정확하게 측정하려면 위치의 불확정성을 증가시키게 되어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 하지만 어느 것을 정확하게 측정하느냐 하는 문제는 측정하는 사람이 임의로 선택할 수 있다.

인간은 둘 중의 어느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현상을 변화시키게 되어 사건에 개입하게 된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인간의 무능력이나 실험 장치의 한계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기본 속성이다. 자연을 규정지으려는 인간에게 자연은 한계선을 그어 놓은 듯하다. 파동이나 입자 혹은 위치나 운동량을 선택하여 관찰하기 이전까지는 우리는 대상에 대하여 뭐라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양자역학에서는 사건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확률을 예측한다. 여기에서 문제는 관찰자와 확률<파동 함수>과 전자의 상관 관계이다.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1927년; 양자적 실채는 원칙적으로 통계적이며, 관찰자의 선택에 따라 그 대상의 성질이 달라진다>은 객관적 독립적 실재에 대하여 과학적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으로 인정하고 경험을 잘 반영하고 있는 양자역학의 현재 상태에 만족한다. 과학은 경험을 조직화 수식화하는 데에 목적이 있으며 실재에 대한 모델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지식이 지식의 한계를 알게 되었다. 또한 양자역학에서는 관찰자와 대상은 상호 작용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가 되어 주는 것이다. 관찰자는 대상의 사건에 개입하기 때문에 대상을 관찰함으로써 대상을 움직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대상 속에서 볼 수 있다. 관찰자는 대상을 거울 삼아 자신을 관찰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가 지혜와 만나는 자리이다. 객관적 물리 세계를 탐구하는 과학이 궁극의 경지에서는 자신을 탐구해 들어가는 지혜와 만나게 된 것이다.

양자역학은 손을 맞잡고 춤을 추며 파트너인 연인의 모습을 살피는 것과 같다. 관찰자는 연인과 손을 맞잡고 있기 때문에 자유롭게 움직이며 연인의 모습을 관찰할 수 없다. 더구나 둘이 춤을 추고 있어 관찰자가 몸을 움직이면 연인도 같이 몸을 움직인다. 즉, 물리 현상에서는 관찰자와 대상을 연결하는 끈이 공간 사이에 실제로 있지는 않다.

그러므로 과학에서 실재와 관찰자, 즉 주객의 문제는 철학의 몫이다. 관찰자는 관찰하는 대상의 신비를 완전히 알 수는 없다. 이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존엄성 선언이다. 그 대상을 완전히 알 수 없으므로 완전히 지배할 수 없고 그 대상의 존엄성을 인정해 주어야 하듯, 나 또한 모든 다른 존재에 대해서 존엄하다. 우주의 보이지 않는 심연 속에 모든 사물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관찰자가 관찰하는 대상의 신비를 모두 알 수 없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 대상과 이미 하나로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의 영역이다.

살아 춤추는 연인으로서 우주는 우주 마음의 표현체이다. 우주는 내가 의미가 되어 주고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연인이다. 나를 바라봄으로써 내 속에 있는 연인을 볼 수 있고, 연인을 바라봄으로써 연인 속에 있는 나를 볼 수 있다. 나를 아는 만큼 연인을 알 수 있고, 연인을 아는 만큼 나를 알 수 있다. 연인과 나는 같이 존엄하다. 우리는 동반자이다. 우주는 나의 연인. 

이 우주는 상호작용에 의해 드러나는 事物이라는 연인이다. 사물은 事件과 物件이다. 물건은 공간적 정적 多樣體요, 사건은 시간상의 동적 變化象이다. 존재의 모든 영역이 물건들의 사건들이다. 물건은 사건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또한 사건은 물체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물건은 대상이고 사건은 이 대상들의 상호 작용이기 때문이다. 사건은 통합된 전체를 이루고 역동적이어서 양이요, 물건은 분석된 요소를 이루고 정적이어서 음이다. 물건과 사건의 그물맥인 우주는 시작으로 보면 시시각각 새로운 시작 창조 개벽을 하고, 진행으로 보면 영원한 진행이요 진화며, 완정으로 보면 지금 이 순간이 그대로의 성공이요 완성이다. 

또한 시간의 사건과 공간의 물건은 理의 精神과 氣의 物質로 말해질 수 있다. 모든 공간은 똑같은 공간이 아니고 질적으로 다르다. 즉 공간마다 일정한 경향성들을 갖고 있는데, 그것을 '氣'라 부른다. 따라서 공간은 기에 부합된다. 시간은 일정한 리듬과 특성을 갖고 있어 이치를 이룬다. 시간의 질적인 차이가 '理'이다, 또한 물건도 일정한 모양, 색, 무게 등의 성질을 갖고 있으므로 물질이 된다. 물건 자체가 특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물질이다. 사건은 무작위적으로 아무렇게나 일어나지 않는다. 꼭 그때 그 장소에서 그것이 그런 사건을 일으킨다. 그것이 정신이다. 따라서 물질은 물건들의 화려함이고, 정신은 사건들을 거느려 혼란하지 않게 한다.

카프라는 다음과 같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말한다. '부분에서 전체로의 전환, '구조'로부터 '과정'으로의 전환, 과학에 대한 인식의 전환, 지식-'건축물'로부터'그물망'으로의 전환, 진리로부터 유사 진리로의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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