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과학 Natural Science/물리 Physics

아인슈타인, 오펜하이머, 닐스 보어, 엔리코 페르미, 존 폰 노이만, 리처드 필립스 파인만, 해롤드 애그뉴, 맨해튼 계획(Manhattan Project, 맨해튼 프로젝트), 레슬리 그로브스, 과학은 반역이다

Jobs 9 2023. 7. 29.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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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 계획(Manhattan Project, 맨해튼 프로젝트)은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미국이 주도하고, 영국, 캐나다가 참여한 핵무기 개발 계획이다. 계획은 극비로 진행되었으며, 미국은 세계 최초로 핵분열 반응을 이용한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다. 계획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미국 과학자 아카데미의 제안으로 시작하여 당대 미국의 저명한 물리학자인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닐스 보어, 엔리코 페르미, 존 폰 노이만, 리처드 필립스 파인만, 해롤드 애그뉴 등이 차출되었다.

단순한 과학 실험이 아닌, 미국 전쟁부(현 국방부)가 실전에 사용할 대량살상무기를 제작하는 군사 작전이었다. 맨해튼 계획의 총책임자는 미 육군 소장 레슬리 그로브스. 프로젝트 시작 시점에 대령에서 준장으로 승진했고 이후 프로젝트 중에 소장을 달았다. 이 때문에 많은 문헌에는 그로브스 소장으로 등장한다.

 


프로젝트 이름은 뉴욕의 맨해튼에서 따 왔으나, 실제로는 미국 전역에서 나뉘어 진행되었으며 목록에 맨해튼 자체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이름의 유래에는 2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미군 공병부가 맨해튼 거리에 있었다는 것, 더불어 맨해튼 기술국에서 따왔다는 설이 있다. 연구진들이 맨해튼에 있는 컬럼비아 대학 과학관에서 연구를 했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엔리코 페르미가 주도한 원자로 실험은 대학의 라켓볼 코트에서 이루어졌다. 규모가 크기도 했지만 위장하기 좋았다고. 

맨해튼 프로젝트는 모든 것이 기밀이었으며 약 30군데의 시설에서 연구를 진행했는데, 미국, 캐나다, 영국 대학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중추적인 곳들을 꼽으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곳들이 있다.

오크리지 - 테네시 주에 위치해 있는 도시로, 맨해튼 계획의 본부였다. 우라늄 농축시설이 있었고, 현재는 오크리지 국립 연구소 (ORNL)가 자리해 있다. 현재 이곳에 있는 ORNL은 로스 앨러모스와 더불어 도시의 중대한 밥줄이다. 
리치랜드 핸포드 - 워싱턴 주에 위치. 현재 근방에 퍼시픽 노스웨스트 국립 연구소 (PNNL)이 있다. 최초의 핵연료 재처리 시설. 현재는 폐로 중.
로스 앨러모스 - 핵무기 설계 및 연구시설로 뉴멕시코 주에 있다. 현재 로스 앨러모스 국립 연구소 (LANL)가 후신으로서 핵 연구를 진행한다. 좀 유명하다 싶은 과학자들이 꽤 많이 몰려서 대중에 많이 알려졌다. 대표적으론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엔리코 페르미, 리처드 파인만 같은 사람들. 리처드 파인만의 경우엔 이론팀에서 근무했다.
버클리 - 핵개발을 실질화 하기 위한 이론적 장소. 1939년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이자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UC Berkeley, 버클리대학교)에서 물리학 교수로 재직한 어니스트 로렌스 주도하에 맨해튼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그곳에서 로렌스는 "입자 가속기" , "핵에너지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나이" 라고 불리었다. 로렌스가 개발한 입자 가속기인 사이클로트론은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 및 핵분열에 필요한 새로운 입자 발견에 사용되었다. 덧붙여 UC버클리에서 플루토늄, 버클륨, 로렌슘, 캘리포늄 등, 원소 주기율표의 92번째인 우라늄부터 106번째인 시보귬까지 발견되었다.

 

캐나다
캐나다 또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맡은 지역들이 있었다.
트레일 - 브리티시 컬럼비아주의 미국 국경 근처 소도시, 텍 에너지사가 위치해 있다. 이곳에선 원자로 건설에 필수적인 중수를 생산했다.
찰크 리버 연구소(Chalk River Laboratories) - 캐나다의 과학자들이 모여서 연구를 진행한 곳. 몬트리올 연구소에서 할 수 없는 실험들을 하는 곳이었다. 전후 미국 다음으로 Zero Energy Experimental Pile 이란 중수로를 개발했으며, 이 중수로가 발전된게 월성의 CANDU. 한때 의료용 동위원소를 생산했다.
엘도라도 광산 (Port Radium)- 노스웨스트 준주에 위치한 광산이다. 이곳에서 라듐, 우라늄, 은을 채취해 계획에 사용했다. 즉 실험에 쓰인 광물들의 산지. 1982년 모든 시설을 폐쇄하고 그 근방에 사는 사투족에게 170만톤에 달하는 방사성 물질을 처리할것을 캐나다 정부는 약속했다.

 

 

과정
1939년 헝가리 출신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Szilárd Leó, 1898~1964)가 주장하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쓴 편지에 의해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처음엔 자그마한 연구 프로젝트에서 시작한 맨해튼 프로젝트는 13만 명 규모까지 성장했고, 프로젝트에 쏟아부은 비용은 당시 돈으로 20억 달러, 2023년 기준으로 따지면 330억 달러, 즉 대한민국 원으로 환산하면 약 39조 9,600억 원으로 2023년 한국 총 국방 예산(약 57조 원)의 70% 정도의 거액이 들어간 거대 공학 프로젝트이다. 특히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장인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시작으로 닐스 보어, 엔리코 페르미, 존 폰 노이만, 리처드 필립스 파인만 등 전 세계에서 긁어모은 당대 최고의 두뇌들을 모두 여기에 동원했다. 비록 아인슈타인 본인은 이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루즈벨트 대통령을 설득하는 편지(실라르드가 쓴 내용)에 서명해 자신의 권위를 빌려주는 방식으로 공헌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우라늄의 유통을 중단하면서, 미국은 독일이 핵무기의 개발을 시작하였다고 판단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이 작전을 허가했고, 루스벨트 사망 후 대통령이 된 해리 S. 트루먼은 이 프로젝트를 알자마자 최대한 빨리 핵폭탄 개발을 완료할 것을 촉구했으며 '나치 독일로부터 미국과 유럽을 지키기 위해'라는 목적으로 예산이 무한정 지원되는 거대한 프로젝트가 이루어졌다.  

엄청난 힘을 가진 핵분열을 인간이 마음대로 다루는 것은 이론상으로만 가능하고 실제로는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일류 학자들 수천 명이 수년간 함께 연구한 결과, 그 가능성은 점점 실체화되었다.결국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주 앨라모고도의 폭격연습장에서 인류 최초의 핵폭탄 실험이 성공리에 종료되었는데, 이 역사상 최초의 핵실험의 이름은 트리니티였으며, 사용된 폭탄의 이름은 가젯(gadget)이었다.

맨해튼 계획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군사작전이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의 총 책임자는 알려진 것처럼 오펜하이머가 아니라 레슬리 그로브스(Leslie R. Groves Jr.) 미 육군 소장이었다. 오펜하이머는 총 책임자가 아니라 로스 앨러모스의 연구소 소장 신분이었다. 물론 핵폭탄 자체를 개발하는 이론-기술 분야 전반에 대해선 오펜하이머가 사실상 총책임자가 맞지만 프로젝트 전체의 총괄 지휘, 즉 인력 확충이나 예산 반영, 부지 및 원료의 계약 부분 등은 그로브스가 맡았다. 그리고 그로브스 역시 군 생활 전에는 한 때 MIT에서도 공부했을 정도로 이공계 분야의 지식이 충분했기 때문에 과학자들을 지휘하고 이들과 조율하는 게 가능했다. 

그로브스는 미 육군 공병단 소속으로, 대령 시절 미국 전쟁부의 새로운 청사인 펜타곤을 6개월이라는 가공할 속도로 완벽하게 건설해냄으로써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 공로로 준장에 진급하고, "펜타곤 잘 만드는 솜씨를 보니 원자폭탄도 잘 만들겠군?"이라는 상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 책임을 맡았다. 저 기대가 무슨 개드립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저 부분이 작용했다. 그로브스가 펜타곤 건설 과정에서 보여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엄청난 추진력과 실제 성과 때문에 그를 임명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관료주의의 벽을 깨고 기라성 같은 수많은 과학자들을 이끌면서 맨해튼 계획을 완벽한 성공으로 이끌었다.

일본 제국의 항복
2차 대전 당시 압도적인 연합군의 전력과 그로 인한 연이은 패배, 경제 및 플랜트의 붕괴로 인해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1%도 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제국은 1억 총옥쇄, 반자이 어택, 카미카제 등 헛된 발악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려 2번이나 실시된 원자폭탄 투하를 통해 힘의 차이를 뼈져리게 느낀 일본제국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일본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으나, 30만 명 안팎이라는 적은 규모의 피해만 입고 자신들의 제도를 보존한 채 전쟁을 종료하게 되었다. 괜히 오기부리다가 나라 하나 잿더미가 될 뻔하다가, 큰 손해는 면한 셈이다. 

한 국가에서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가 가장 큰 경우는 지상군이 국토를 들쑤시고 다니며 싸우는 것으로, 말 그대로 국토가 전장이 되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러한 지경까지 가진 않았고 폭탄 투하와 공습만 당했기에 사망한 민간인은 전체의 6~8%도 되지 않았으 6.25 전쟁에서는 국토에서 직접 보병들이 싸우며 전장이 한반도에서 일어났기에 사망한 민간인만 10~20%에 달하는 것도 그 이유이다. 2차대전 때 독일인과 러시아인, 중국인이 많이 죽은 이유도 그들 국토가 전장이 되어서였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평화주의자였고, 맨해튼 계획과 몰락 작전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한 상태에서 원자폭탄 투하의 소식을 들었기에 핵개발에 실질적으로 관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맨해튼 계획에 대해 상당히 자조적으로 평가했다. 

이렇게 핵개발에 참여한 맨해튼 계획의 연구진 중에는 아인슈타인처럼 죄책감에 시달린 사람들도 있으나, 존 폰 노이만, 한스 베테, 엔리코 페르미, 리처드 파인만 등은 원폭투하에 대해 더 많은 인명 피해를 막기 위해 한 일이라고 평가하였다. 핵무기로 인한 조기 항복이 없는 상태, 핵무기의 존재 자체가 아예 없는 상태였다면 원폭 투하나 항복 없이 일본 본토를 공격하는 몰락 작전이 실행되었을 것이고, 자연히 전쟁이 길어져 일본이 항복하기까지 전쟁범죄와 학살을 계속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몰락작전이 시행되면 핵무기가 없더라도 일본인도 더 많은 수가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독일인과 달리 본토를 기습침공한 일본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독일의 드레스덴 폭격에서는 반인륜적인 행위라며 여론의 맹비난을 받았지만 도쿄 대공습이나 맨해튼 같은 일본을 향한 공격에서는 전국민이 잘했다며 환호했다. 

 

공포 위의 평화
가장 강력한 전쟁 무기인 핵무기가 등장한 이후, 역설적으로 강대국끼리의 전면전은 거의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다. 핵무기가 존재하는 한 적국을 공격하게 되면 자신도 멸망하게 되는, 전쟁을 시작하면 누구도 이득을 볼 수 없는 상호확증파괴가 대두되었다. 그렇게 인류는 인류 스스로를 멸망시킬 수 있는 힘을 갖게 됐지만 그 힘의 공포로 인해 세계 대전과 같은 거대한 전쟁이 종식되고 계산된 평화가 도래했다.

 


이 프로젝트가 끝난 후 미국 에너지부(당시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에서는 이 시설들 중 3곳을 국립 연구소로 지정하였으며, 현재는 핵무기만 연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관은 에너지부이다.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대표적인 국립 연구소로는 아르곤 국립 연구소, 오크리지 국립 연구소, 로스 앨러모스 국립 연구소 등이 있다.

지도에 나와 있는 캐나다 초크 리버(Chalk River) 연구소에서도 맨해튼 계획에 대한 연구가 벌어졌는데, 이런 연구로 인하여 캐나다는 1945년 11월에 세계 2번째로 원자로를 보유한 국가가 되었으며, 여기서의 삽질인 ZEEP(Zero Energy Experimental Pile)이 발전하게 된 것이 CANDU이다. 캐나다가 중수로를 삽질한 것도 맨해튼 계획 당시 중수를 생산하던 공장이 캐나다에 있어서였다.


우라늄을 분리하는 원심분리기 건설에 전선용으로 대량의 구리가 필요했는데, 전시 상황이라 구리 수급이 쉽지 않았다. 현대에는 이런 방식을 쓰지 않으나 당시 기술력상 추출 방식이 복잡했기 때문에 생긴 일. 미 정부는 구리를 구할 수 없자, 대범하게도 Y-12 프로젝트를 출범시켜 미 연방 재무부 창고에 보관 중이던 1만 3천 톤의 은을 가공하여 대신 사용했다. 물론 개발이 끝나고 나서는 시설을 꼼꼼하게 다 뜯어내고 은을 모두 찾아내어 회수했는데 1% 미만의 손실밖에(?!) 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 Y-12 프로젝트에 맨해튼 계획 예산의 절반이 들어갔다.
이 은을 조달할 당시 재무부와 프로젝트 팀 사이에서 있었던 대화가 유명하다.
재무부: 은이 얼마 정도 필요합니까?
맨해튼 프로젝트 팀: 대충 1만 톤 정도요?
재무부: .....우리는 은을 트로이 온스로 셉니다.

 

미국은 맨해튼 계획 완수 이후 '앞으로 장기간 미국이 유일한 핵보유국이다'라는 전제 위에 모든 전후 처리를 결정하였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동유럽과 아시아에서 소련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인 것도 어차피 결정적인 순간에는 미국의 핵무기 때문에 소련이 물러설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하고 대인배의 풍모를 보인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그런데 4년 만에 소련이 핵개발에 성공하면서 이러한 전제가 깨지게 되었다.  


소련도 핵무기의 가능성을 알고 있었기에 2차대전 동안 이론 연구는 계속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핵분열에 대한 과학자들의 논문과 기사가 사라진 것을 이상하게 여긴 소련 과학자가 미국이 핵분열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기도 했다. 결국 맨해튼 계획에 간첩을 투입하여 미국의 연구개발 자료를 빼돌렸다. 자신들의 이론 연구와 엄청난 돈과 인력을 퍼부어서 실험한 미국 쪽 자료를 바탕으로 단시간 안에 핵무기를 만들었다. 1949년 8월, 첫 원폭실험을 성공리에 마쳤다. 이쪽도 미국의 맨해튼 계획과 비슷하게 거의 60만 정도의 인력들을 쏟아부어서 성공시킨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미국 과학자들은 대부분 소련 따위가 어떻게 핵무기를 만드냐고 생각했지만 뒷통수를 제대로 맞았다. 특히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보고를 받고도 그 사실을 믿지 않았고 퇴임 이후에도 "난 소련이 핵무기를 가지지 않았다고 믿는다."고 발언하기까지 했다. 2차대전 말 미국은 낙후한 과학기술과 폐허가 된 국토의 재건 때문에 소련의 핵무기 개발은 최소 20년 이상 걸린다고 예측하였다. 미국은 이후에도 소련의 과학기술 개발을 깔보았고 이로 인해 나중에 뒤통수를 한 번 더 맞게 된다.

 

 

관련 어록
Now we are all sons of bitches.
이제 우린 다 개새끼들이야.
케네스 베인브리지. 첫 원폭 실험 후 자괴감에 휩싸이며 한 말.
if I had foreseen Hiroshima and Nagasaki, I would have torn up my formula in 1905.
내가 만약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일을 예견했었다면, 1905년에 쓴 공식을 찢었을 것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We knew the world would not be the same. Few people laughed, few people cried, most people were silent. I remembered the line from the Hindu scripture, the Bhagavad-Gita. Vishnu is trying to persuade the Prince that he should do his duty and to impress him takes on his multi-armed form and says, "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 I suppose we all thought that, one way or another."
"우리는 세상이 예전과 다르게 나아갈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몇몇은 웃었고, 몇몇은 울었지만, 대다수는 침묵에 잠겼다. 난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비슈뉴는 왕자가 그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설득하며, 그에게 감명을 주기 위해 여러 팔이 달린 형태를 취하고는 말했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파괴의 신이 되었도다."[원문][27] 아마 우리 모두 어떤 식으로든 그것과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를 인용하며. 녹화 영상

 

 

 

 

과학은 반역이다’(The scientist as rebel)

 

현대 지식인 사회에 별처럼 떠 있는 수많은 천재 과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보통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아무리 열심히 쉽게 설명하려고 해도 시대를 앞서가는 과학의 세계와 보통 사람의 상식 사이에는 간격이 너무 크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과학은 반역이다’는 제목부터 먹고 들어간다. 과학의 어떤 면이 반역인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과학은 기존의 지식에 반역을 해야 새로운 것이 나온다는 뜻인가? 과학자는 반항정신이 있어야 좋다는 것인가? 

‘과학은 반역이다’(The scientist as rebel)는 책은 이런 모든 질문을 조금씩 포함하고 있다. 이 책은 오래 동안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교수로 지낸 프리먼 다이슨(Freeman Dyson 1923~ )이 2006년에 쓴 책을 과학도서 출판사인 ‘반니’가 올해 번역 출간했다.

‘과학은 반역이다’는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과학과 관련된 각종 주제들이 잘 버무려 있다. 미국 핵무기 개발의 중요한 역할을 했던 오펜하이머가 과학자인 동시에 얼마나 노련한 행정가이며 시인인가를 마치 이웃집 아저씨 이야기처럼 설명한다.  ⓒ 도서출판 반니
‘과학은 반역이다’는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과학과 관련된 각종 주제들이 잘 버무려 있다. 미국 핵무기 개발의 중요한 역할을 했던 오펜하이머가 과학자인 동시에 얼마나 노련한 행정가이며 시인인가를 마치 이웃집 아저씨 이야기처럼 설명한다. ⓒ 도서출판 반니

현대과학을 수놓은 많은 과학자들을 직접 만나거나, 아니면 최고 수준의 과학계 내부 인사들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갖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용어부터 사람을 질리게 만드는 이상한 개념이나, 혹은 책을 덮게 만드는 복잡한 수식 같은 것은 아예 없다. 

핵무기를 둘러싼 물리학자들의 한심한, 동시에 비극적인 태도가 인류에게 어떤 재앙을 불러왔는지를 설명한 ‘과학자가 가져야 할 국제평화의 책임’은 소름이 끼치게 한다. 핵분열을 처음 발견한 물리학자들이 세계평화를 위해서 핵무기를 개발해서는 안된다는 합의를 이뤘더라면 공포의 핵무기는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실감나게 표현했다. 

저자는 1939년 초가 핵무기 개발이 시도 되지 않도록 제어할 절호의 기회였다고 주장한다. 유럽과 미국에서 물리학자 사이에 역사상 최초로 핵분열이 공개석상에서 설명되고, 원자폭탄이 불러올 가공스러운 결과가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몇 개월 뒤 핵분열 연쇄반응의 가능성을 실험으로 입증한 국가들이 나타나고 이런 내용이 출판됐다. 

다이슨 박사는 이같은 여론을 주도할 인물로 닐스 보어(1885~1962)와 알버트 아인슈타인(1879~1955)을 꼽았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뒤 독일에서 히틀러가 권력을 잡으면서 물리학자 사이에 공포감은 더 커졌다. 이미 1938년에 독일에서 핵분열이 발견되었고, 독일 정부가 비밀리에 우라늄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결국 서방세계 물리학자들은 히틀러가 틀림없이 핵무기를 개발해서 전 세계를 핵무기 공포로 몰아갈 것으로 생각했다.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한 일류의 독일 과학자들이 이 비밀 프로젝트에 연관됐다고 의심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책은 이렇게 소개한다.

‘히틀러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만연했는지 핵무기 제작의 가능성을 반박하는 물리학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공포는 과학자들에게 핵무기를 설계해야 한다는 떳떳한 명분을 주었다. 1941년에 과학자들은 핵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공장과 연구소를 건설하자고 영국과 미국 정부를 설득했다. (중략)  과학자들이 핵무기에 대항해 공동의 윤리적 입장을 취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런 입장을 취할 수 있었던 마지막 순간은 1939년이었다.’ 

다이슨 박사에 따르면 히틀러는 핵무기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일본 군사 지도자도 마찬가지였으며, 스탈린은 미국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비밀리에 파악하기 전에는 핵무기에 관심이 없었다. 루스벨트와 처칠이 핵무기에 관심을 가진 것도 과학자문위원들이 부추겼기 때문이라고 그 책임을 과학자들에게 돌렸다. 

1944년 독일에 핵폭탄이 없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밝혀졌을 때, 미국 로스 앨러모스에서 핵무기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 중 연구에서 손을 뗀 사람은 단 한 명 조지프 로트블랫이었다. 

그런데 과연 조국이 다른 물리학자들 사이에 세계평화를 위한 윤리적인 연대가 가능할까? 다이슨은 가능하다고 말한다.

1939년의 교훈을 배운 탓일까 36년 뒤 DNA재조합 기술이 별안간 발견됐을 때 생물학자들은 곧바로 아실로마에 모여 이 위험한 신기술의 이용을 제한하고 규제하는데 합의했다. 이 합의를 공식화하는데는 맥신 싱어를 비롯해서 몇 안 되는 과학자들의 용기로 충분했다고 다이슨은 주장했다. 

‘과학은 반역이다’는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과학과 관련된 각종 주제들이 잘 버무려 있다. 미국 핵무기 개발의 중요한 역할을 했던 오펜하이머가 과학자인 동시에 얼마나 노련한 행정가이며 시인인가를 마치 이웃집 아저씨 이야기처럼 설명한다. 그리고 그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했던 리처드 파인만(1918~1988)에 대한 찬사도 가득하다.

그러면서도 세계적인 과학자들이 말년에 이상한 욕심에 빠져 실수했던 일들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꾸짖었다.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은 근본적인 문제들을 한 번에 해결하려는 꿈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결국 말년에는 단 한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

과학자들이 ‘종교는 누구나 한 번쯤 앓고 지나가는 소아질병이다’라고 여기는 추세에 대해서도 과학적인 반론을 내놓는다. 할머니가 기도치료사였던 다이슨은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상보적(complementary)라고 설명한다. 닐스 보어가 물리학에 도입한 이 개념은 어떤 특성을 묘사한 두 가지 설명이 모두 타당하지만, 동시에 관찰되지 않는 성질을 말한다. 

대표적인 것이 빛이다. 빛은 어떤 실험에서는 끊임없는 파장으로 관찰되지만, 다른 실험에서는 입자들의 무리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의 실험에서 파장성과 입자성이 동시에 관찰될 수는 없다. 

다이슨은 ‘정신적인 현상의 세계가 존재하나 너무 유동적이고 쉬이 사라지기 때문에 육중한 과학의 도구로는 포착되지 않는 것이라는 쪽에 마음이 기운다’고 표현했다. 

 

 

 

The Manhattan Project would not have been possible without the efforts and skills of hundreds of scientists and engineers who either directly contributed to the Manhattan Project or broadly contributed to nuclear research. Several scientists and engineers that worked on the project had unique stories that led them to their work on such a groundbreaking wartime effort. Their revolutionary scientific breakthroughs occurred in a relatively short amount of time under the immense pressure of World War II. Ultimately their efforts ushered the world into the atomic age. Learn more about a few of these remarkable scientists and engineers below.

  • The Life of J. Robert Oppenheimer: The Manhattan Project Years (1941 to 1946)

     

    The second article in a series of three explores J. Robert Oppenheimer's role during the Manhattan Project. Oppenheimer was appointed Director of the top-secret Los Alamos Laboratory during the Manhattan Project. It was here that he and hundreds of staff toiled in secret, their work culminating in the Trinity Test, the world's first atomic weapon detonation.


    The Life of J. Robert Oppenheimer: Life Before the Manhattan Project

     

    First in a series of three, this article highlights the pre-Manhattan Project Era life of Robert Oppenheimer, from his birthplace in New York to his time in New Mexico as a young man, followed by his college years, and into teaching at CalTech and Berkeley in California. On the cusp of Communism and political left-wing leanings, Oppenheimer finds himself, and the career he developed for many years, in the arena of atomic weapons and the start of World II.


    Manhattan Project Scientists: J. Ernest Wilkins, Jr.

     

    J. Ernest Wilkins, Jr. was the youngest student ever admitted to the University of Chicago. After earning his PhD at just 19 years of age, Wilkins began working alongside Enrico Fermi, Eugene Wigner, and Arthur Compton during the Manhattan Project. Read more about his life and work at the link.

  • Women of the Manhattan Project: Liane Russell

     

    Liane Russell was a geneticist who worked primarily at ORNL and Y-12 in Oak Ridge, Tennessee. Her research led to new recommendations regarding x-rays on pregnant women, among other breakthroughs. Later in life, Russell became an advocate for environmental conservation. Read more about her life and work at the link. 

  • Manhattan Project Leaders: Franklin Thompson Matthias

     

    Franklin Matthias was a civil engineer at Hanford during the Manhattan Project. His responsibilities included selecting Hanford as a plutonium production facility and supervising its construction. Follow the link to learn more.

  • Manhattan Project Scientists: Samuel Proctor Massie

     

    Dr. Samuel Proctor Massie worked at Ames Laboratory during the Manhattan Project and later became the first African American professor at the US Naval Academy in Annapolis, MD. Learn more about Dr. Massie’s life, work, and recognition at the link.

  • Manhattan Project Scientists: Louis Alexander Slotin

     

    Louis Slotin was a Manhattan Project physicist who witnessed both CP-1 and X-10 reach criticality. In May 1946, Slotin received a lethal dose of radiation during a criticality experiment at Los Alamos, dying nine days later. Read more about his life and death at the link.


    Manhattan Project Scientists: Enrico Fermi

     

    Enrico Fermi, under the direction of Arthur Compton, developed the Chicago Pile (CP-1), the world's first nuclear reactor. Due partly to this success, Fermi was recruited by J. Robert Oppenheimer to be an associate director of the secret laboratory at Los Alamos. Learn more about Fermi at the link.


    Manhattan Project Scientists: Edwin Mattison McMillan

     

    Edwin McMillan successfully produced the first transuranium element, neptunium, winning a Nobel Prize for his efforts in 1951. During the Manhattan Project, McMillan researched implosion methods at Los Alamos. Read more about his work at the link.


    Manhattan Project Scientists: Edward Teller

     

    Edward Teller is often referred to as the father of the hydrogen bomb. Prior to the hydrogen bomb’s creation in 1951, Teller worked for the Manhattan Project at Los Alamos and was influential in urging President Roosevelt to create the project. Read more about Teller’s life and work at the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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