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사상, 空 思想
인간을 포함한 일체 만물은 직접적 원인인 인(因)과 간접적 원인은 연(緣), 즉 인연에 의하여 생겨났고, 인연에 의하여 변할 뿐,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불교의 근본 교리
범어로는 Śunya, 팔리어로는 Suñña. 불교 이전부터 널리 사용되어 온 말로서 인도의 수학에서는 영(零)으로 사용되었고, 힌두교에서는 브라만(梵)과 니르바나(涅槃)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현상계의 모든 사물의 이법(理法)을 설명하는 원리로서 불교의 근본사상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반야부(般若部) 계통의 대승불교사상으로 알려진 공사상은 부처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은 진리인 연기(緣起)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현상계를 유전하는 모든 존재는 인연(因緣)의 화합으로 생멸하는 존재이므로 고정 불변하는 자성(自性)이 없다. 이와 같이 일체의 만물은 단지 원인과 결과로서 얽힌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무아(無我)이며, 무아이기 때문에 공(空)인 것이다. 이때의 공은 고락(苦樂)과 유무(有無)의 양극단을 떠난 중도(中道)이며, 이것이 부처가 깨달은 내용이다.
그러나 부파불교에서 법체(法體)는 항유(恒有)한다는 실재론(實在論)을 주창하였기 때문에 초기 대승불교에서는 법의 항유를 부정하면서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이공설(二空說)을 내세운다.
아공은 자아를 실재라고 인정하는 미혹한 집착을 부정하도록 가르치는 것이고, 법공은 나와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에 대하여 항상 있는 것이라고 인정하는 잘못된 집착을 부정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반야경(般若經)』의 공사상이 초기불교에 그 근원을 두고 있지만 본격적으로 철학적 체계화를 시도한 사람은 용수(龍樹, Nāgārjuna)이다. 용수는 『중론(中論)』「관사제품(觀四諦品)」제18게(偈)에서 공사상의 이론적 근거가 연기라고 명확히 제시하였다.
나아가 세속제(世俗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의 관계를 드러낸 이제설(二諦說)을 정립하였다. 즉 세간의 언어 습관인 세속제가 연기와 공을 바탕으로 성립하므로 연기와 공에 대한 이해야말로 승의의 진리(眞諦)를 알고 열반을 얻게 하는 구체적인 지혜임을 나타낸 것이다.
용수는 『중론』을 통해 『반야경』의 공사상을 연기설과 같은 위치에 놓음으로써 이를 이론적으로 해명하고, 대승불교의 역사적 위상을 확립시킴으로써 대승불교의 사상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인도에서는 이 책에 의해 중관학파(中觀學派)가 일어났으며, 유가행파(瑜伽行派)와 더불어 인도 대승불교의 2대 사조를 형성하였다.
유가행파도 『중론』의 공사상을 계승하여 현실세계의 구조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려는 삼계유식설(三界唯識說)과 삼무성설(三無性說)을 주장하였다. 또한 중관학파와 유가행파의 사상이 혼합된 형태로 티베트에 전파되어 총카파(Tsong-ka-pa, 宗喀巴: 1357∼1419) 교학의 기초가 되었다.
중국에는 청목(靑目)이 주석한 『중론』이 번역된 이후 용수의 『십이문론(十二門論)』 및 그의 제자 제바(提婆)의 『백론(百論)』과 합하여 삼론(三論)이라 불려 삼론종이 성립되었다. 그 후 삼론종의 대성자 길장(吉藏)의 『중관론소(中觀論疏)』는 『중론』 연구의 궤범이 되고 있다.
또한 천태종(天台宗)의 지의(智顗)는 앞에서 말한 『중론』「관사제품」제18게에 기초하여 ‘공(空) · 가(假) · 중(中)’의 삼제설(三諦說)을 세워 천태종의 근본교리로 삼았는데, 고구려의 승랑(僧朗) 등은 삼제설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을 이 공관에 입각해서 보면 거짓(假)된 모습을 하고 있는 상대적인 것이며, 그 밑바닥의 진리의 세계에서 볼 때는 한결같은 공의 세계로서 유지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적인 가의 세계에서는 현상이 공함을 파악하고 공의 세계로 몰입한 뒤 다시 나올 때, 거기에는 중도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가 전개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즉, 모든 상대적인 현상을 공하게 비울 때 그곳에 해탈의 세계가 전개된다는 수행론은 공사상을 토대로 하여 전개시킨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의 모든 종파는 공사상을 크게 존숭하고 연구하였다. 신라의 원효(元曉)는 『기신론소(起信論疏)』에서 공이라는 진실을 모든 사람에게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본래 내 몸에 갖추어져 있는 그 진실을 자각하는 자가 부처이기 때문에, 이 공사상에 입각하여 승려 · 속인 · 남자 · 여자 등의 모두가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누구든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상과 그 근본으로서 공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 진실이 본래 어떠한 인간에게도, 심지어는 만물에까지 갖추어져 있다는 사고방식은 대승불교의 발전과 함께 후대에 이르러 실유불성(悉有佛性: 모든 존재는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을 지님)이 되었다고 파악하였다.
공 사상, 空 思想
고전 소설 구운몽(김만중, 1687)이 공 사상을 반영한 소설이다.
공 사상은 불교에서 나타난 교리이지만 원불교에서도 받아들였다. 도교의 일부에서도 채용되며 달리 말하면 우주만물은 항상 시공간의 인연에 따라 변하고 변하는 의미로 볼 수가 있다.
이 공(空)은 만물을 만들어내고 만상을 나타내는 근원격에 해당되며, 만물 가운데의 하나조차 아니며 만상 가운데의 하나도 아니며, 위에 서술한 것처럼 공(空) 그 자체가 인연(因緣)에 의하여 만물이라고 하는 본질의 온갖 것들이 되고, 만물을 필요조건으로 하여 만상이라고 하는 현상의 여려 가지가 되는 것이며, 그렇기에 공(空)은 실상(實相)이기는 하되, 그 자체는 물질도, 현상조차 아니며 제로가 아닌 실재(實在)한다고 할 수 있는 그 '무엇'이며, 그 '무엇'이라고 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밝히는 것이야말로 공(空)의 본성을 나타내는데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우주 삼라만상은 전부 이 공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없고 우주 삼라만상 모든 것이 이 공에 해당되며, 비어 있으나 둘이고 전체이며 곧 삼라만상을 아우른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공 사상은 초기 불교에의 무아(無我)와 무상(無常)과 연기설(緣起說)을 확장 및 재해석하는 것으로써 부처의 기본입장을 보다 명확하게 밝힌 대승불교의 핵심사상이라고 한다. 대승불교에게 있어서 이 공 사상은 사상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철학사상이라고 할 수가 있느 것은, 아주 중요한 위치에 속해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 공 사상은 맨 위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인간을 포함한 일체만물에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존재한다'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고 인연에 대한 해석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일체 만물, 이 세계의 모든 것, 우주 삼라만상, 그리고 이 우주만물은 단지 인연에 따라 일시적으로 생겨났다가 얼마 안가 소멸되어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기에 실체가 없으며, 그렇기에 존재론적으로나 가치론적으로나 모든 고정된 속성을 부정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부정은 단순히 소극적인 허무가 아닌 모든 속성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절대적으로 자유롭게 존재하는 방식을 시사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유(有)라고 하는 개념에 대한비유(非有)로 존재를 부정한 뜻도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존재의 부정'은 문자 그대로 존재 그 자체의 부정이 아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체(自體), 실체, 아(我)가 없다'라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무(無) 또는 허무와는 그 의미가 다른 실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공 사상은 서방에서 나타난 허무주의와는 다르며 모든 것의 덧없음을 뜻하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거나 모든 것이 필요 없음을 나타내는 게 아니라 모든 물질과 관념을 뛰어넘어 해탈함을 나타내는 사상이라고 볼 수 있으며, 비로자나불은 이러한 공(空)의 인격화에 해당된다고 한다.
교토학파의 일원인 하사마스 신이치라고 하는 사람이 지은 저서인 <동양적 무의 성격>에 따르면 공(空)은 "무일물성",허공성 , 즉심성, 자기성, 자재성, 능조성 총 6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데, 맨 먼저 무일물성은 어떠한 집착의 흔적조차 없고 내외의 대상을 전부 끊어버리고 어떠한 것에서도 흔들리는 경지를 말하며, 허공성은 총 10가지 의미를 내포하는데, 이 10가지의 의미들은 '그 어떠한 장애도 받지 않고 모든 것에 널리 퍼져 있고 취하고 버리거나, 귀하고 천하거나, 선이거니 악이거니 관계없이 모든 것을 평등히 받아들이고 타자로부터 한정되지 않으므로 한계가 없이 광대무변하고 외형상으로나 내면상으로는 어떠한 모습이 존재하지 않고 맑고 깨끗하며, 그렇기에 마음이 명경지수에 이르러있고 시작과 끝이 존재치 않고 불생불멸이고 자로 재거나 기하학적으로 측량할 수가 없고, 참이라던가 미 등으로 헤아릴 수가 없고 공이라고 해도 단순한 무(無)가 아닌 유무(有無) 자체를 초월하여 유(有)도 무(無)도 아닌 무적 주체이고 공에 대한 머무르는 것마저도 집착이므로 그러한 공마저 끊어버리는 대자유이고 어떠한 소득도 없는, 다른 것은 물론 자기자신에 대한 소득이 전혀 없으며, 그렇기에 불가득이며 무탐이며 적빈'이라고 한다.
즉심성은 허공 자체에는 생명이 존재치 않으나, 공에는 마음이라는 포근한 생명을 지니며,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생명 혹은 마음이 아니며, 허공과 같은, 그렇지만 생명이 있는 진짜 마음으로 진정한 생명과 자각이 흘러 넘치며, 그것이야말로 무념무심의 마음이자 무각의 각이 공에는 서려있음을 뜻한다고 한다. 자기성은 주체적인 마음으로, 이것은 대상적으로 보이는 마음이 아니며, 나아가 주객으로 나누어진 이후의 이분법적인 자기가 아닌 주객으로써 나누어지기 이전의 주체적 자기를 가리키는 뜻이라고 한다.
자재성은 '공이 주체적인 주체일 뿐만 아니라, 완전한 자재한 주체'를 뜻하는 것인데, 어떠한 대상, 심지어 부처님에게도 속박되지 않는 진실로 자유로운 경계로, 불교에서 말하는진정한 해탈은 이렇나 자재성이 철저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데, 어디에 집착하거나 걸림이 없이 즉각적으로 상황에 응해 자유로이 행동하는 유희삼매의 경지라고 한다. 이를 인격적으로 가리켜 무위진인 내지 무의도인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능조성은, 흔히 말하는 창조성과 같은 것으로, 인간은 도구를 만들어내기 시작하면서 찬란하 인류문명을 형성해내었는데, 그러나 아무리 인간이 인간에게 유용한 물건들을 만들어내었다고 한들, 생명만을 창조할 수 없는 등 엄연히 한계가 존재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신은 모든 생명조차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한 전지전능한 창조자라고 할 수가 있으나, 이것은 실증되지 않은 신화에 지나지 않으며, 단지 그렇게 믿어질 뿐이라고 한다. 흔히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단순한 신앙이 아닌 유심의 실증으로, 이러한 마음은 물과 같아 거기에서 물결이 수시로 일어나고 이윽고 사라지되 물 자체는 불기불멸하는 모습을 보인다. 물을 바탕으로 무수한 물결이 생겨났다 사라지듯, 공으로부터 숫한 사물들이 창조되고 사라진다고 한다. 그렇기에 공은 광대무변하면서도 못 미치는 데가 없으며, 모든 생명의 바탕이자 창조자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공이라고 하는 개념 자체를 인격화한 비로자나불이 '변일제처요 광명변조'라고 불리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이 공은 흔히 말하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 즉 무(無)'로써의 의미가 아닌 깨달음의 세계에서 말하는 모든 가능성(전지전능)을 지니고 있으며, 우주를 운영하는 항상(恒常)한 것인 진여(眞如 = 참나)의 작용(성품)을 이르는 말이며, 그렇기에 진여와 공은 같은 의미가 된다고 한다. 진공(眞空)은 묘유(妙有)라 불리는 것이며, 우주만물에 내재해 있으면서도 초월해있는 힘이라고 한다.
거기에, 이 세계 우주 삼라만상의 본체라고 할 수가 있고 업력(業力)처럼 우주를 창조해낸 원동력과 같다고 한다. 이 공(空) 안에는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종자를 지니고 있으며, 우주의 진리이자 연기 법칙의 근원과도 같다고 한다. 해당 사이트에 따르면은, 이 공(空)이라고 하는 개념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카오스((χαος))를 떠오르게 한다고 한다.
또한, 채사장의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제로 편>이라는 저서에 따르면은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브라흐만, 그리고 도가에서 말하는 도, 그리고 같은 종교에 속하는 개념인 열반처럼 '특정한 존재나 인격적 주체가 아니라 우주 전체, 혹은 우주의 근본원리이자 거대한 법칙으로써의 신격'이라는 유형에 해당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추상화 과정의 끝이자 궁극의 전체를 상징한다고 한다.
반야심경에서는 물질적인 현상과 공(空)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닌 서로 떠날 수가 없는 상관관게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렇기에 흔히 쓰일 정도로 유명한 구절인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로 표현한다고 한다. 사물의 본질이 공으로 파악될 뿐만 아니라, 공은 그 파악되는 사물을 떠나서는 성립될 수가 업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공에 대한 언급은 초기경전에 해당하는 숫타니파타에서부터 등장한다. 또한 《맛지마 니까야》의 "소공경"에서도 공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대승 불교의 공관은 이 초기의 공 사상을 받아들여 발전시킨 것이다.
"모가라자(Mogharaja)여, 항상 마음을 가다듬어 아견을 버리고, 세간을 비었다(sunnata)고 관하라. 이렇게 하면 죽음을 뛰어넘는다. 이와 같이 세간을 관찰하는 자를 죽음의 왕은 보지 못한다."
숫타니파타 5:15
중국에서 포교 목적의 요약본으로 최초로 전래된 경전으로 지목되는 《사십이장경》에서도 공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이는 중국에 처음으로 전래된 불교가 대승 불교였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도는 형상이 없으므로 그것을 알려고 해도 이익이 없으니, 오로지 뜻을 지켜 행하여야 한다. 마치 거울을 닦아 때가 없어지면 밝음이 나타나 곧 스스로 형상을 보게 되듯이, 욕심을 끊고 공(空)을 지키면 곧 도의 진리를 보게 되고 숙명을 알게 된다.”
불교에서 공(空)은 반야심경을 비롯하여 대승 불교 계통에서 특히나 강조된다. 이는 존재가 자성(自性)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뜻하는데, 모든 것은 다른 것들에 의존하여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자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아는 자아가 자성을 가지지 않고 공함을 말한다. 설일체유부 등 일부 상좌부 학파에선 이와 달리 법만은 실제로 존재함, 즉 공하지 않음을 말했다. 그런데 용수의 중관학파는 이에 반대하여 모든 것이 공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설일체유부에서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한 '법(다르마)'들도 전부 다른 것들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공한 것이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공함도 공하다.
이에 대하여는 나가르주나가 니야야학파의 반론에 대해서 직접 공성 개념을 확실히 한 "회쟁론" 본문이 도움 될 것이다. 니야야학파가 흔히 착각될 수 있듯 '모든 것'에 초점을 두고
만일 그대가 "모든 것의 자성은 그 어디든 존재치 않는다."라고 말한다면, 자성을 갖지 않는다는 그대의 바로 그 말은 결코 자성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만일 "모든 것은 자성이 없다."라는 바로 그 말만은 자성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면, "모든 것은 자성이 없다."라는 그대의 주장은 파괴될 것이다.
"회쟁론" 1ㆍ2
위와 같이 러셀의 역설로 불리는 모순을 이용해 공성 개념이 성립지 않음을 보이려 하자 나가르주나는
사물들이 다른 것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것을 공성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다른 것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것은 자성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모든 것에는 자성이 없다'라는 나의 말은 자성을 갖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논의는 파괴되지 않는다.
"회쟁론" 22ㆍ24
위와 같이 친절한 개념 재제시만으로써 논박하고 만다. 즉 '공'이란 모든 현상ㆍ사물이 그 효능이나 존재 면에서 허무하다는 개념이 아니라 다른 것에 의존한다는 개념일 뿐이라는 것이다.
용수의 해석, 곧 대승 불교 일반에서는 이처럼 공성이 연기를 설명하는 개념, 연기성 그 자체가 된다. 여기서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은 곧 집착할 대상 자체가 없음을 말하고 이것이 불교의 근본 사상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