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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恭愍王), 고려후기 제31대(재위: 1351~1374) 왕, 노국대장공주, 강릉대군, 강릉부원대군, 배원정책, 권문세족

Jobs 9 2021. 5. 2.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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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기 제31대(재위: 1351~1374) 왕.

재위 1351년∼1374년. 이름은 왕전(王顓). 초명은 왕기(王祺). 몽고식 이름은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 호는 이재(怡齋)·익당(益堂). 아버지인 충숙왕(忠肅王)과 어머니인 명덕태후(明德太后) 홍씨(洪氏)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비(妃)는 원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이며, 그 밖에 혜비 이씨(惠妃李氏)·익비 한씨(益妃韓氏)·정비 안씨(定妃安氏)·신비 염씨(愼妃廉氏)가 있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일찍이 강릉대군(江陵大君)에 봉해졌고 1341년 원나라에 가서 숙위(宿衛)했으며 1344년(충목왕 즉위년)에는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으로 봉해졌다. 1349년 원나라에서 노국대장공주를 비로 맞이하였다. 1351년 원나라가 외척의 전횡과 국정문란의 책임을 물어 충정왕(忠定王)을 폐위시키자, 공주와 함께 귀국해 왕위에 올랐다.

공민왕은 14세기 후반, 원명교체(元明交替)라는 대륙정세를 이용해 많은 개혁을 추진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적극적인 배원정책(排元政策)을 펴 몽고의 잔재를 일소하고 실지(失地)의 회복을 위해 북진정책을 실시하였다. 대내적으로는 고려왕실을 약화시킨 친원권문세족(親元權門勢族)을 제거하고 국가기강을 재정립하기 위해 일곱 차례에 걸친 관제개혁을 실시하였다.

1352년에는 변발(辮髮)·호복(胡服) 등의 몽고풍속을 폐지하였다. 1356년 몽고의 연호(年號)·관제(官制)를 폐지해 문종(文宗) 때의 제도를 복구하는 한편, 내정을 간섭하던 원나라의 정동행중서성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를 폐지하고 원나라의 황실과 인척관계를 맺고 권세를 부리던 기철 일파(奇轍一派)를 숙청하였다. 또한 100년간이나 존속해 온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폐지하여 원나라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하였다.

1368년 명나라가 건국되자, 이인임(李仁任)을 보내어 명나라와 합동으로 요동(遼東)에 남아 있던 원나라의 잔여세력을 공략하였다. 2년 뒤 이성계(李成桂)로 하여금 동녕부(東寧府)를 치게 하여 오로산성(五老山城)을 점령하고 국위를 떨쳤다. 내정에 있어서는 1352년 폐단이 많았던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해 귀족들이 겸병한 토지를 원래의 소유자에게 환원시키는 한편,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해방시켰다.

그러나 홍건적과 왜구의 잦은 침입, 1363년 찬성사김용(金鏞)의 반란, 1364년 덕흥군(德興君) 옹립하려고 했던 부원파(附元派)최유(崔濡)의 반란 등으로 국력이 소모되기도 하였다. 더구나 1365년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실의에 빠져 국사를 모두 신돈(辛旽)에게 맡기고 불사(佛事)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나 신돈은 실정을 거듭하고 왕을 해치려 하였으므로 그를 수원으로 귀양 보낸 뒤 사사(賜死)하였다.

1372년 명문자제들로 구성된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였고, 1373년 반야(般若)와의 사이에서 나은 모니노(牟尼奴)에게 우(禑)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으로 봉하였다. 그런데 자제위 소속 홍륜(洪倫)이 익비를 범해 임신시키자 그것을 은폐할 목적으로 홍륜과 밀고자인 환관 최만생(崔萬生) 등을 죽이려고 시도하였지만 도리어 그들에게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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