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리(功利), 공리(公利), 공리(utility), 공리(public interest)
번역어의 기술적 문제?
몇몇 국내 학자들과 번역가들은 Utilitarianism을 공리주의(功利主義)가 아니라 공리주의(公利主義)라고 번역한다. 물론 분명히 차이 나는 두 한자 중 하나를 고른 것이므로 의도적으로 그러는 것이다.
그 이유로 제시되는 것은 공리주의의 취지와 정신, 즉 모든 사람들을 오직 하나로만 계산하고 둘 이상으로 계산하지 않는, 그리하여 모든 이들의 이익을 두루 보살피고자 하는 이론의 정신을 번역어에서 드러내고자 한다는 의도이다.
그러나 공리주의를 어느 한자로 표기하는가는, 이런 의도가 주된 근거로 제시한, 어떤 용어를 사용한 이론의 취지와 정신을 얼마나 잘 드러내는가의 질문에 한정된 번역어의 기술적(technical) 문제를 넘어선다.
일관성과 개념 체계상의 문제
먼저 '공리주의(公利主義)'라는 번역어는 일관성이 없고 개념 체계상으로도 문제를 일으킨다.
첫째로, Utilitarianism을 공리주의(公利主義)라고 번역한다면, utility는 공리(公利)라고 번역을 해야, 번역어에 일관성이 있다. 그러나 utility에 대해서는 명백히도 공리(功利) 내지 효용(效用)이 맞는 번역어이다.
공리(功利)는 행복을 궁극적인 기준으로 삼아 식별한 이익을 의미하고, 공리주의에서 utility는 바로 그 뜻이기 때문이다.
단 한 사람이 느끼는 순쾌락, 순욕구의 충족값도 효용, 즉 utility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한 쾌락이나 욕구의 충족이 어떤 연유에서 나왔건 공리주의에서는 상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타인의 고통을 보고 느끼는 쾌락도 여전히 효용이다. 크 쾌락도 효용으로 인정된 다음, 타인이 느낄 고통이라는 비효용을 빼는(또는 타인의 마이너스 효용을 합산하는) 집계의 계산과정이 남아 있을 뿐이다. 타인의 고통을 보고 느끼는 쾌락도 효용의 세계에서 정당한 시민권을 가지고, 각 하나로 다루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반사회적 효용을 집계할 효용의 범위에서 시원스레 제거해버린 하사니Harsanyi와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주류의 공리주의가 효용을 합산하기도 전에,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교설이나, 또는 벤덤이 말한 '죽마 위의 허튼소리' 같은 자연권을 기준으로 삼아 어느 효용에는 시민권을 주고 어느 효용에는 시민권을 주지 않는 입장을 채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리주의가 규범을 도출하는 논리적 순서에 비추어 보면 그렇게 하는 것(즉 효용을 그 옳고 그름에 의해서 차별하지 않는 것)이 이론적 정합성이 있다. 만일 공리주의라는 이론에 선재하고 우선하는 옳고 그름의 이론에 의해 효용을 차별하여 집계할 때 가중치를 두거나 아니면 심지어 집계할 범위에서 제외한다면, 공리주의는 그 선재하는 이론의 결론을 그럴법하게 치장하는 한낱 산술적 수사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용기는 좋고 비겁은 나쁘다는 미덕 이론을 채택한 후 용기를 발휘할 때 느끼는 만족감은 큰 가중치를 두고 비겁에 빠져 얻는 이득에는 마이너스의 계수를 결부한다면, 당연히 결과는 그런 미덕 이론에 부합하는 결론이 대체로 나올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 공리주의라는 이론은 아무런 역할을 하는 바 없고, 미덕 이론을 훨씬 투박하고 기계적인 형식으로 담아내는 표현 방식에 불과하게 된다. 그렇다면 효용에 공공성이라는 뜻은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공리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이론적 빌딩 블록인 효용(效用) 내지 공리(功利)를 가리키는 말이 utility이고, 거기에 공공의 것이라는 말이 전혀 없다면, 그 빌딩 블록인 utility의 최대화를 추구하는 이론인 Utilitarianism은 功利에 rianism에 해당하는 주의를 붙인 효용주의 내지는 공리주의(功利主義)라고 해야 일관성이 있다. 실제로, 공리주의(公利主義) 번역어를 채택하는 논자도, utility는 공리(功利) 내지 효용(效用)으로 번역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Utilitarianism을 공리주의(公利主義)로 번역한다면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 소치이다.
둘째, 토머스 스캔론이 사용하는 것과 같은 철학적 공리주의(philosophical utilitarianism)과 같은 개념도 있다. 철학적 공리주의란 오로지 사람들의 복지 내지 후생에 관한 사실만이 도덕적으로 중요한 사정이라고 보는 이념이다. 이러한 이념은 집계의 방식에 관한 것은 아니고, 도덕적으로 유관한 유일한 근본적인 사실에 관한 것이다. 만일 어떤 행위를 하건 하지 않건 사람들의 만족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가? 그렇다면 그 행위는 도덕적으로 무관한 행위이다. 그런데 이것은 단 한 사람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세상에서 그 사람에게 적용되는 도덕적으로 유관한 사실은 그 사람에게 담기는 효용의 크기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심층적인 차원의 이념을 공리주의(公利主義)라는 번역어는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그것은 다분히 정치도덕적인 층위에 지향되어 있어서 원래 공리(功利)가 인간의 모든 실천적 층위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망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념체계상의 정합성을 위해서도, 功利主義로 번역함이 옳다.
3. 중요한 규범적 논지의 선취 문제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그것이 대단히 중요한 규범적 논지를 논증 없이 선취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 번역어는 Utilitariansim에서 추구하는 것이 공리(公利)라는 점을 아예 인정하고 들어간다. 그러나 과연 최대 행복이 공익(public interest), 즉 공공복리(public welfare)인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공리주의의 내용 정의와는 별도로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논쟁에 대단히 중요한 것이 걸려 있다. 만일 최대 행복이 당연히 공익이라면, 공익을 위해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게 한 헌법 제37조 제2항은, 최대 행복을 달성하기 위하여 개인의 기본권을 제한해도 된다는 목적론적 공식을 천명한 것이다. 반면에 최대 행복이 당연히 공익이 될 수 없다면 헌법 제37조 제2항은 기본권은 오로지 기본권의 전체계를 유지, 복구, 강화한다는 특성을 만족시키는, 그래서 공통의 보장형식을 가지며 평등하고 자유로운 지위에서 합당한 승인을 거부할 수 없는 원리들의 왜곡없는 구현에 해당하는 한정된 사유들에 의해서만 제한할 수 있다는, 의무론적 정식으로 읽히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게 된다.
구 전기통신법 제47조 제1항 전기통신기본법(1996.12.30. 법률 제5219호로 개정된 것)은 제47조에서 “(벌칙)① 공익을 해할 목적으로 전기통신설비에 의하여 공연히 허위의 통신을 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는데, 헌법재판소 2010.12.28. 2008헌바157 등 결정은 위 조문의“공익을 해할 목적” 부분과 관련하여 명확성의 원칙에 위반된다고 판시한 바 있다..
이 사건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소수의견(반대의견)이 상대적으로 공익에 대하여 적극적인 정의를 시도함으로써 위 조문이 명확성 원칙을 만족시킨다는 점을 보이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 소수의견에 따르면 “공익”은 “개인의 이익과 구별되는‘ 공공의 이익’”으로서 “대한민국에서 공동으로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국민 전체 내지 대다수 국민과 그들의 구성체인 국가사회의 이익”을 의미하고, 따라서 “특정한 사회집단이나 그 구성원의 관심과 이익에 관한 것”은 “공익”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공익관은 두 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첫째, ‘전체 내지 대다수’라는용어로 부주의하게 ‘전체’와 ‘대다수’를 등가적으로 다루었다. 헌법상 논쟁이 제기되는 국가 권력의 행사 또는 불행사가 하나같이 '전체'가 만장일치로 정당한 목적이라고, 즉 자신에게도 공통으로 이익이 되는 것일리는 만무하다. 어떤 것은 그 목적 정당성 자체가 의심된다. 이를테면 90%의 압도적인 다수가 믿는 종교가 있다고 하자. 이 종교를 약간 우대함으로써 압도적 다수에게는 자신의 종교가 승인되고 장려되고 있다는 커다란 만족을 주고, 소수에게는 언제든 다수 종교로 개종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어 장기적으로 국가가 압력을 가하는 방향으로 개종이 이루어질 것이어서 소수의 배제받는다는 느낌은 빠르게 줄어들 수 있으므로, 소수의 마이너스 효용을 감안하더라도 만족감의 총합은 플러스가 될 것이라고 가정해보자. 이러한 가정 하에서는 종교의 부드러운 차별적 우대는 그 자체가 공익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자유롭고 동등하게 종교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소수의 지위를 무시하는 것이어서, '전체'를 위한 것은 아니다. 이를 전체로 본다면, '대다수'에 속하지 않는 '소수'는 구성원이 아니라는 전제를 도입해야 한다. 그런데 소수는 구성원이므로 소수는 구성원이 아니라는 전제는 거짓이다. 따라서 전체와 대다수를 동일시하는 공익관은 거짓인 전제를 토대로 한 공익관이다.
둘째, 위 소수의견(반대의견)은 ‘구성체인 국가사회의 이익’을 병렬적으로 열거하여 구성원의 이익과 절연된 어떤 별도의 이익이있다는 점을 암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공리주의의 문제는 아니므로 상세히 거론하지 않기로 한다.
위 헌법재판소 결정을 예로 든 것은, 공리주의에서 말하는 공리의 총합 최대화를 공익으로 볼 것인가 아닌가에 중대한 헌법쟁점이 걸려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소수의견은 공리(utility)가 곧 공익(public interest)라고 보았다. 소수의견은 실제로 전기통신기본법이 합헌이라는 결론을 위 공익관에 기초하여 도출하였다. 이는 다분히 의무론적인 공익관을 전제로 설시한 법정의견의 태도와 대조된다.
그렇다면 공리주의에서 말하는 효용의 총합 최대화 내지 그와 유사한 것이 정말로 공공복리, 즉 공익인지 여부는 중차대한 헌법적 쟁점에 해당하는 실질적인 문제이고, 이 실질적인 문제는 그 중대성과 까다로움에 걸맞는 논증 없이 함부로 선취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형사소송법에서 '피고인'이라는 단어를 모두 '가해자' 내지는 '범죄자'로 바꾸는 법개정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한낱 용어 사용의 문제는 아니다. 피고인은 공소사실에 기재된 범죄를 저지른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검사에 의해 공소가 제기되어 그 공소사실 기재의 범죄 유무죄의 재판을 받게 된 자를 의미한다. 반면에 가해자나 범죄자는 그런 범죄적 해악을 입히고 범죄를 저지른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법개정을 유도하는 용어 사용은 모두 실질적인 쟁점을 선취하는 부수효과를 가져온다.
공리주의를 公利主義로 번역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부수효과, 즉 헌법논증이나 정치도덕적 논증이 이루어져야 할 곳에서 그 논증을 생략하고는 근거 없이 결론을 선취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공리주의가 일인칭 사유를 모델로 한다는 점에서 이는 특히 이상한 일이다. 공익이라는 것은 자유롭고 평등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공중의 구성원으로서 공통되게 보유하는 이익이다. 따라서 어떤 정책이 공익에 부합한다 함은, 공중의 모든 개별 구성원 각각에게 이익을 보장해주는 보편적 보장형식을 지닌 정책원리에 의해 뒷받침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한 정책 원리는 정치도덕적 논증대화에서 수행적 모순 없이 정당한 것으로 승인될 자격을 갖출 것이다. 그런데 공리주의에서 효용의 최대화를 달성하는 정책이 그러한 자격을 늘 갖춘다는 것은 보증되지 않는다. 이는 공리주의에서 사람은 어떤 것을 승인할 이인칭 지위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단지 효용이 자리하는 위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 각자에게 10만큼 담긴 효용(A)과 한 사람에게 31 다른 한 사람에게 -10만큼 담긴 효용(B)은 그 집계량에서 후자가 더 크다.
집계량이 크다는 이유로 (B)가 공익이라는 이론의 실질적인 규범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헌법논증대화와 정치도덕적 논증대화를 하는 것은, 공소가 제기되었다면 범죄자라는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유무죄 입증에 관한 논증대화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반면에 이를 구분하여 가중치를 부여하여 다룸으로써 (A)가 공익 면에서 더 우월하다고 보는 공리주의는, (한계효용체감의 법칙과 같이 공리주의 내재한 것 이외의) 공리주의 이론 외부의 어떤 분배에 관한 규범적 전제를 들여와야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공리주의 이론 외부의 어떤 공익관을 들여오는 것이므로, 다시금 그 외부의 공익관을 실질적으로 논증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러한 점들은 감안한다면, 공리(utility)가 공리(public interest)라는 함의를 갖는 번역 용어를 써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