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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브리치 세계사 요약(예일대 특별판)

Jobs 9 2024. 1. 21.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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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사

오스트리아 빈의 자연사 박물관에는 디플로도쿠스라는 동물의 뼈가 전시되어있다.
언제? 어떻게? 이 두 가지 물음은 결국 ‘역사에 대한 물음이다. 물론 여기서 역사란 어떤 개별적 사건의 발생이나 경과가 아닌 인간 전체의 역사, 즉 세계사를 뜻한다.

 

2.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가들
원시인은 왜 동물들을 동굴 벽에 그린 것일까? 원시인들은 동물 그림을 그리면 실제로 그 동물들이 나타난다고 믿었던 것이다. 원시인들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꼭 이 동물들을 잡아야 했다. 말을 하거나 곡식으로 만든 음식을 먹거나 도구를 사용하거나 불을 쬘 때면 이따금 이 원시인들을 기억해보자. 그리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가였던 이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져보자.

3. 나일강의 나라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이집트인은 나일강을 신처럼 숭배해왔다. 이집트인들은 왕의 지배를 받았는데 최초의 왕이 바로 메네스였다. 이집트의 왕들은 ’파라오‘라 불렸다. 메네스의 후손으로 기원전 2500년경 이집트를 다스렸던 쿠푸왕은 모든 백성을 시켜 자신의 무덤을 짓게 했다. 바로 유명한 쿠푸왕의 피라미드다. 사자의 몸과 사람의 머리를 가진 스핑크스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섬긴 막강한 신이었다. 이집트인의 종교에 따르면 죽은 사람의 영혼은 몸을 떠나지만 나중에 다시 몸을 필요로 하게 된다. 따라서 죽은 사람의 몸이 썩어 버리면 영혼도 존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는 것이 이집트인들의 믿음이었다. 이집트인들은 죽은 사람의 몸을 보관할 수 있는 절묘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죽은 사람의 몸에 연고와 식물 즙을 바르고 기다란 천을 둘둘 마는 것으로 ’미라‘라고 한다. 이집트인들은 많은 책을 갖고 있었다. 5000년 전 한 이집트인이 파피루스에 적어놓은 경구 하나 : 지혜로운 말은 녹색의 보석보다 구하기 어렵지만 맷돌을 돌리는 가난한 하녀에게서도 들을 수 있다. 3,500년 동안 이집트인들은 죽은 사람을 미라로 만들었으며 상형문자로 글을 썼고 똑같은 신들을 모셨다.

4. 월 화 수 목 금 토 일
누가 일주일이란 단위를 만들고 각각의 요일에 이름을 붙인 것일까.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이 흐르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중요한 민족은 수메르인과 바빌로니아인 그리고 아시리아인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파피루스로 책을 만들지 않고 부드러운 점토판에 글(설형문자)을 쓰고 가마에 구워 단단하게 하였다.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지배한 바빌로니아의 왕들 중 한 사람은 거대한 비문을 남겼는데 이 비문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법전으로 ’함무라비 법전‘이라 불린다. 바빌로니아인이나 아시리아인은 태양과 달 그리고 여러 별들을 신으로 모셨다. 이들은 별들에 막강한 힘이 있으며 그 위치가 인간의 운명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을 ’점성술‘이라 한다. 이들은 몇 개의 신성한 행성들에 하루씩을 헌정했다. 신성한 별들은 태양과 달을 포함해 모두 일곱 개였기 때문에 7일을 한 묶음으로 하는 일주일이 생겨났다.

5. 신은 오직 하나뿐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사이에 있는 드넓은 목초지에서 가축을 키우고 포도와 곡식을 재배하는 유목민들이 살았다. 이 민족은 자신들을 특별하게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하나의 신만을 모셨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이 세상에서 유일한 신이라고까지 믿게 되었다. 이들은 유일신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 바로 자신들이며 이 유일신이야말로 자신들의 신이라 믿으면서 긍지를 느꼈다. 바로 유대 민족이다. 이들은 오랜 세월 잔혹한 전쟁을 치러서 마침내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작은 왕국을 건설했다. 기원전 1250년경의 일로 추정된다. 유대교 사원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인 내부에는 아무런 우상도 없다. 사원 안에는 십계명을 기록한 석판만이 놓여 있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인에게 정복되어 멸망하고 말았다. 유대인은 바빌로니아 왕국이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인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포로 생활을 했다. 그 뒤 고향으로 돌아온 그들은 다른 민족들을 우상 숭배자들이라 여기며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다른 민족들은 자신들이 유일신에게 선택받은 민족이라 일컬으면서 낮이고 밤이고 성서와 찬송가에만 매달리고 또 어째서 유일신께서 자신들에게 그토록 큰 고통을 주는지 고민하는 이 민족을 배척하게 되었다.

 

6. 알파벳의 탄생

 

이 기호를 고안해 낸 사람들은 상인이었다. 바로 페니키아인이다. 페니키아인은 먼 이국땅에 나가 있어도 고향을 가깝게 느낄 수 있었다. 자신들이 발명한 놀랄 만큼 간편한 문자로 말이다. 이 문자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알파벳이다.

 

7. 영웅들의 무기

 

옛 그리스 시인들은 독특한 운율의 노래를 지어 고대 영웅의 고통과 투쟁을 이야기했다. 호메로스가 쓴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와 오디세우스의 이야기처럼. 독일의 고고학자 슐리만은 이 서사시의 흔적을 찾아 도시를 파헤쳤다. 도리아인이나 아오니아인, 에올리아인으로 불린 이들 그리스 부족은 용감했다. 그리스인은 페니키아인으로부터 문자로 글을 쓰는 놀라운 기술을 전수받았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인류의 위대한 유산을 써서 남겼다.

 

8. 거인과의 싸움

 

기원전 550년에서 500년쯤에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산악 지역에는 거친 산악 민족이 살고 있었다. 페르시아인이었다. 지혜롭고 용맹한 키루스 왕이 이민족의 지배를 받던 자신의 민족을 구한 뒤 이집트 정벌에 나섰다. 왕은 이집트로 가는 도중 죽었지만 그의 아들인 캄비세스는 3000년 동안 지속되었던 이집트를 멸망시켰다. 다리우스 대왕은 그리스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다리우스는 아테네를 파괴하고 그리스 본토를 정복하기 위해 대규모 함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다리우스는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죽고 그 후계자인 크세르크세스 왕이 100만 명의 군대를 통솔하여 그리스로 향했다. 하지만 아테네인들은 두 번씩이나 이들을 물리쳤고 이후 페르시아인들은 그리스를 넘보지 못했다. 그리스인에게는 남다른 면이 있었다.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시험하며 결코 만족하거나 안주할 줄 모르는 그들이 성격이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9. 스파르타와 아테네

 

페르시아를 물리친 그리스는 작은 반도이다. 남부에는 도리아인이 모여 살았고 북부에는 이오니아인과 에올리아인이 주로 거주했다. 그리스반도에는 도시가 저마다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 스파르타인은 기원전 1100년경 그리스반도로 이주해온 도리아인이다. 이들은 토착민을 정복해서 노예로 삼았고 자신들보다 훨씬 더 수가 많은 노예들을 두려워해서 강인해지기 위해 혹독한 교육방식을 선택했다. 아테네인들은 안락한 삶보다 의미 있는 삶을 추구했다. 이들은 기원전 594년 솔론의 헌법을 도입했는데 바로 민주주의였다. 이들을 결합시키는 것은 공통의 종교와 스포츠다. 이들은 제우스 신의 성역을 올림피아라 부르고 4년마다 모든 그리스인들이 이 경기장에 모여 솜씨를 겨뤘다. 첫 번째 올림피아 경기는 기원전 776년에 개최되었다. 그리스의 예술가들은 아주 단순하고도 아름다운 방식으로 세상의 사물을 재현해냈다. 올림피아 경기 우승자들의 입상이 그런 예다. 아크로폴리스는 오늘날까지도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손꼽힌다.

 

10. 깨달은 사람의 나라

 

기원전 2500년경에 인도의 인더스강 유역에는 거대한 도시가 발달해있었다. 이 도시의 이름은 모헨조다로다. 인도게르만어를 사용하는 인도인은 인도로 밀고 내려와 토착민을 복속시켰다. 이들은 토착민과 엄격히 거리를 유지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는 ’카스트 제도‘다. 기원전 500년경에 고타마 왕자가 왕궁을 나와 6년 동안 은둔하면서 참회의 생활을 했다. 고타마는 어느 날 밤 숲 속 빈터의 보리수나무 아래 앉아 있을 때 깨달음을 얻었다. 고타마는 깨달은 사람, 즉 부처가 되었고 고타마를 따르던 이들이 하나의 교단을 세웠는데 이 것이 바로 불교다.



11. 거대한 민족의 위대한 스승

 

인도에서 부처가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하려 하던 무렵에 중국에서도 한 위인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자 가르침을 펼쳤다. 그는 평민 출신이었고 관리이며 학자였다. 그의 목표는 사람들이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데 있었다. 공자는 수천 년간 지켜진 예절이나 관습에는 심오한 뜻이 담겨 있다 믿었으며 사람들에게 그것들을 잘 지켜 가라고 가르쳤다. 예절이나 관습을 잘 지키면 모든 일이 더 나아지리라는 것,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일이 절로 풀리리라는 것이 공자의 생각이었다. 공자는 가족과 형제 간의 우애, 부모에 대한 공경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기에 이를 ’인간됨의 근본‘이라 불렀다. 거의 같은 시기에 노자라는 사람도 살았다. 노자의 사상은 아주 난해하고 신비롭다. 노자는 인간이 해야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뿐이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것. 마음을 지극히 평온한 상태에 있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나무 한 그루나 꽃 한 송이처럼 아무 의지나 의욕도 없는 상태에 이르면 하늘을 움직이고 봄을 불러오는 도가 작용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은 이해도 어렵고 실천하기는 더욱 어렵다. 그래서 중국의 위대한 스승은 노자가 아닌 공자가 되었다.

 

12.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모험가

 

기원전 431년부터 스파르타인과 아테네인은 혹독한 전쟁을 벌였다. 이것이 바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이 와중에 그리스 북부 산악지대에 사는 마케도니아인이 끼어들었다. 필리포스왕이 이끄는 마케도니아군은 그리스군과 싸워 이겼고 그리스는 기원전 338년 종말을 고했다. 필리포스왕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를 합친 대군을 이끌고 페르시아 정벌에 나서고 싶어 했다. 그러나 전쟁 준비를 하던 중에 암살당하고 그이 아들인 알렉산드로스가 새로운 왕이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용맹하고 명예욕이 강한 전사였으며 당시의 지식을 모두 터득한 인물이었다. 그의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니키아는 물론 이집트를 정복했다. 전체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가 되었으며 나일강에서 지금의 시베리아까지 그의 명령이 미치지 않은 곳은 없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의 안렉산드리아와 같은 도시를 더 많이 건설하고 싶었다. 그러나 기원전 323년 그의 나이 서른둘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13. 새로운 전사들이 싸움

 

그리스 서쪽에 있는 반도에는 거칠며 호전적인 농경 민족들이 살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로마인이다. 로마인의 전설에 따르면 아이네아스라는 사람이 트로이에서 이탈리아로 도망쳐 왔다. 그의 후손 중에는 로물루스와 레무스라는 쌍둥이가 있었는데 형제는 숲에 버려져서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으며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했다. 로마의 7대 왕이자 마지막 왕인 타르퀴니우스는 폭정을 일삼았으며 귀족에 의해 살해되었다. 로마에서 왕정이 폐지된 후로는 도시 귀족들에게만 관리를 선출한 권리가 있었다. 로마의 최고 관리는 ’집정관‘이라 불렸다. 집정관은 두 명이었으며 임기는 단 1년이었다. 로마인은 마음먹으며 끝내 실현시키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땅과 법이었다. 북아프리카에 있는 페니키아의 식민 도시 중의 하나인 카르타고는 그 일대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대한 도시였다. 로마는 카르타고와 싸워 이긴 후 시칠리아를 넘겨받았다. 에스파냐에는 카르타고의 군대가 있었는데 그 사령관의 아들은 한니발이라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한니발은 자신의 조국을 억누르려는 로마인을 미워했다. 그는 코끼리 떼를 이끌고 이탈리아 땅으로 들어가 로마인들과 싸워 승리했다. 기원전 216년 로마군은 칸나이에서 일어난 전투에서 참혹한 패배를 경험했는데 전사자만 4만 명이었다. 한니발은 14년 만에 이탈리아를 떠나 아프리카로 돌아갔다.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 군대와 싸운 한니발은 패배했다. 로마는 기원전 202년 카르타고를 물리쳤다. 한니발은 도주에 성공했지만 로마인의 포로가 되지 않으려 독을 먹고 자살했다. 로마인은 그리스와 북부 이탈리아도 정복했다. 로마인은 카르타고를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으로 만들었다. 로마는 서양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가 되었다.

 

 

14. 역사를 싫어한 황제

 

진시황제는 기원전 213년 실용적이지 못한 책은 모두 태워버릴 것을 명령했다. 진시황제는 중국을 통일했을 뿐 아니라 모든 제도를 새롭게 정비한 인물이었다. 진시황제는 그 자신이 모든 것의 시초이길 원했다.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은 까닭은 자국의 백성들을 야만족에게서 보호하기 위해서다. 진시황제가 죽자 한나라가 시작되었다. 한 왕조는 진시황제가 도입한 제도들 중 좋은 것은 존속시켰고, 그 결과 중국은 더욱 강건한 통일 국가로 유지될 수 있었다. 결국 자신이 원하지 않는 책들을 세상에서 없애려 했던 진시황제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려 하는 사람은 옛것을 철저히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15. 서양의 지배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정복한 지역들을 단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하여 모든 주민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정복한 나라를 로마의 속주가 되게 했고 그들 위에 군림했다. 토착민은 엄청난 조세를 지불하고 곡식도 자주 로마로 보내야했다. 로마인은 정복한 곳마다 도로와 수도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로마인 자신들을 위해서였다. 로마인은 축제를 좋아했지만 자신들이 직접 무엇을 하지는 않았다. 모든 것은 포로들에게 맡겼다. 포로들은 원형 경기장에 끌려나와 격투와 검투를 벌이거나 맹수와 싸웠고 전투도 치러야했다. 기원전 113년, 북쪽의 호전적인 민족이 이탈리아로 침입하자 마리우스가 이들을 쫓아버렸다. 술라 역시 아프리카에서 싸워 이기고 돌아왔다. 이 두 사람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술라는 기원전 79년까지 로마 제국을 지배했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인의 사랑을 받는 사령관이었다. 카이사르는 프랑스를 정벌해 속주로 삼았다. 이집토 역시 로마 제국에 통합시켰다. 카이사르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과 거의 같은 새로운 달력을 도입했다. 카이사르이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자 사람들은 그를 살해하기로 결심했다. 기원전 44년 브루투스와 사람들에 의해 카이사르는 죽었다. 카이사르이 양자인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1년 로마 제국의 첫 번째 황제가 되었다.

 

16. 기쁜 소식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31년부터 서기 14년까지 로마 제국을 통치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때가 바로 이 시기이다. 예수는 사람은 누구나 신의 아들딸이고, 아버지인 신의 사랑은 무한하다. 신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지만 신은 이 죄인들을 가엾게 여긴다. 신이 우리를 대하는 방식대로 우리도 다른 사람을 대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예수는 유대인의 왕이 되려 한다는 혐의로 고발당했으며 반란자로 몰려 십자가에 못 박혔다. 당시 십자가형은 가장 치욕스러운 형벌이었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은 아주 새로운 것이 세상에 나타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신의 은총에 관한 이 기쁘고 좋은 소식은 곧 로마 제국 전체로 퍼져나갔다. 예수가 죽은 뒤 30년쯤 후 서기 60년경에 로마는 잔혹한 황제 네로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네로는 자신의 생모와 아내, 스승을 살해했을 뿐 아니라 많은 친척과 친구들을 죽였다. 그는 겁이 많았기 때문에 늘 누군가 자신을 죽이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살았다. 그런데 로마에 큰 화제가 일어났다. 당시 로마는 인구가 100만명 이상인 거대 도시였다. 네로는 궁전의 발코니에서 칠현금 소리에 맞춰 직접 작곡한 노래를 불렀다. 이 소문이 들리자 평민들은 분노에 치를 떨었다. 네로는 속죄양을 찾았으니 바로 크리스트교도들이었다. 네로는 이들을 발견하는대로 붙잡아 잔인하게 죽였다. 순교자들은 훗날 최초의 성자들로 추앙받는다. 로마의 크리스트교도들은 대낮에 모일 수 없어서 성 바깥의 지하공동묘지 카타콤에서 비밀집회를 가졌다. 유대인은 온갖 비웃음과 멸시에도 불구하고 이교도들 사이에서 기도 학교를 열고 오랜 전통을 지키며 성서를 읽고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기다렸다.

 

17 로마 제국과 변경에서의 생활

 

도나우강과 라인강 너머 북방에 살던 게르만족은 로마인의 골칫거리였다. 게르만족은 자신들이 터전에 가만히 머물지 않고 자꾸만 국경을 넘어와 새로운 사냥터와 경작지를 찾아다녔다. 황제는 제국을 수호하기 위해 국경지역에 군단을 지속적으로 주둔시겼다. 변경 요새의 생활은 로마의 화려하고 편리한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곳에도 로마와 같이 경기장과 공중목욕탕, 별장이 세워졌다. 로마 황제들은 로마의 궁전보다 국경의 주둔지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트라야누스이 부대는 오늘날의 헝가리와 루마니아까지 진격했으며 이곳 역시 로마의 속주로 만들어 제국 방어를 강화시켰다. 서기 161년부터 180년까지 통치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철학자였다. 그가 전쟁터에서 쓴 일기는 주로 자제심과 인내, 고통과 슬픔을 견디는 법, 침착한 영웅적 태도 등에 관해 성찰한 내용으로 오늘날까지 읽히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서기 313년에 크리스트교 박해를 금지했다. 서기395년부터 로마 제국은 두 개로 나뉘어졌다.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로마 제국과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로마 제국으로 분할된 것이다. 크리스트교는 서기 380년부터 두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크리스트교도들은 이제 지하 묘지 대신 호화로운 교회에서 모임을 가졌으며 십자가는 로마 군단의 전투 휘장으로 사용 되었다.

 

18 천둥 번개가 치던 시대

 

아시아 초원에 살던 기마 부족인 훈족은 서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이들은 지금까지 보았던 어느 부족들보다도 민첩하고 교활하고 잔인해 게르만 민족조차 이들을 피했다. 게르만족 중 일부가 라인강을 건너와 로마 군단과 싸워 이겼다. 이 시대를 ’게르만족 대이동의 시대‘라 부른다. 동게르만의 여러 부족을 아우르는 반달족은 이탈리야를 거치고 시칠리아를 넘어 아프리카까지 전진했다. 로마의 군인들은 황제가 별 쓸모없다고 여겨 폐위시켰다. 로마의 마지막 황제 이름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였고 서기 476년의 일이다. 이때부터 중세가 시작된다.

 

19 별이 빛나는 밤

 

중세는 암흑의 시대라고 한다. 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나자 이들의 훌륭한 문화도 대부분 파괴되고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이것만이 중세의 전부는 아니다. 당대의 어두운 밤하늘에도 새로운 신앙의 별이 빛나고 있었다. 바로 수도사들이다. 이들은 선하게 살면 유일신의 구원과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많은 수도사들이 참회를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며 명상에 빠졌다. 이탈리아의 베네딕트라는 수도사는 사람이란 스스로 선해지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선한 일도 행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기도하고 일하라‘가 그의 신조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뜻과 함께 하는 수도사들을 모아 ’베네딕트 수도회‘를 만들었다. 이 수도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선 세 가지를 서약해야 했다. 첫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 것이며, 둘째로 결혼하지 말 것이고 셋째로는 수도원장에게 무조건 복종할 것이다. 당시의 수도원은 교양과 예절이 존재하고 그리스와 로마의 정신세계가 살아 숨 쉬는 유일무이한 장소였다.

 

20 알라 외에 신은 없고 무함마드는 신의 예언자다

 

서기 600년경만해도 아랍인은 말을 타고 사막을 떠돌다 천막에서 잠을 자고 서로 싸움질을 일삼았다. 고대 바빌로니아인처럼 별을 숭배했고 무엇보다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하는 카바라는 돌을 경배했다. 이 돌은 메카라는 오아시스의 한 성전에 안치되어 있었는데 그 성전의 이름도 카바였다. 메카에는 무함마드라는 염소지기가 살았다. 그는 부유한 여자와 결혼해서 행복한 생활을 꾸려나갔다. 어느 날 여행을 하던 무함마드가 갑자기 환영을 보았다. 대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읽으라!‘라고 외친 것이다. 이때 무함마드는 글을 읽을 줄 몰랐다. 삼 년 뒤 대천사 가브리엘이 다시 나타났다. ’일어나서 경고하라, 그리고 네 주를 찬미하라‘ 이때부터 무함마드는 자신을 예언자로, 인간에게 신의 뜻을 전하는 대변자로 느꼈다. 그는 유일하고 전능하신 신이 자신을 사도로 선택했다 말하면서 메카에서 신의 가르침을 설파했다. 카바를 지키는 메카의 사제들은 무함마드를 위험한 인물로 여겼다. 감독관들은 무함마드를 대역죄로 처벌하기로 결정했다. 무함마드는 이들을 피해 사막 도시로 도피했다. 이때가 서기 622년 7월 16이이고 이 도주를 아랍어로 ’헤지라‘라 부르며 무함마드의 신봉자들은 .이때를 기점으로 연도를 계산한다. 무함마드는 아랍어로 ’알라‘라 불리는 신 이외에는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 우리는 신의 뜻에 복종할 도리밖에 없다. ’복종‘은 아랍어로 ’이슬람‘인데 무함마드는 자신의 교리를 이슬람이라 불렀다. 알라와 예언자를 위해 용감히 싸우는 사람은 천국에 갈 것이지만 불신자나 비겁한 자는 지옥에 갈 것이라고 그는 가르쳤다. 무함마드는 그의 설교나 계시 등에서 천국을 아름답게 묘사했는데, 그러한 글 전부를 ’코란‘d라 묶어 부른다. 이슬람교도들은 지금도 하루에 다섯 번 메카를 향해 기도하고 술은 마시지 말며 언제나 용감하라는 무함마드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한다. 무함마드는 서기 632년에 세상을 떠났다.




21 지혜로운 정복자

 

당시에 훌륭한 통치자란 한 가정의 아버지처럼 백성을 보살피고 모든 결정을 스스로 도맡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칼롤루스 대제(742~814)가 바로 그런 통치자였다. 당시 프랑크 왕국은 오늘날 독일 서부와 프랑스 동부를 포괄하는 나라였다. 카롤루스 대제는 768년 왕위에 오르자 먼저 프랑스 전역을 정복하고는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그는 랑고바르드족의 왕을 몰아내고 이탈리아 지배권을 로마 교황에게 넘겨주었다. 대제는 평생 자신을 교황의 수호자로 생각했다. 대제는 정복만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 통치도 잘했고 백성도 돌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대제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문제는 독일 민족의 통일이었다. 게르만 부족의 언어를 가리키는 ’도이치‘가 이때 처음 생겨났다. 대제는 자신이 독일인의 왕일뿐 아니라 프랑크 왕국의 지배자로서 모든 크리스트교의 보호자라 생각했다. 서기 800년 성탄절 전야에 로마 대교회인 성 베드로 교회에서 교황이 대제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주었다. 이제 대제는 신성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된 것이었다. 게르만족이 크리스트교의 영도 세력이 되는 것, 바로 이것이 대제의 계획이자 목표였으며 오랜 숙원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이 실현에 근접한 것은 카롤루스 치하에서뿐이었다. 서기 814년 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제국은 한동안 카롤루스의 손자 세 명에 의해 통치되다가 곧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로 분열되었고 두 번 다시 통일되지 않았다. 카롤루스 대제가 이룩한 신성 로마 제국은 그다음 세기에 이르러서는 유명무실한 것이 되었다.

 

22 크리스트교 세계의 지배권을 둘러싼 싸움

 

카롤루스 대제가 죽고 나서 100년쯤 지났을 때 서양은 참담한 상황에 빠져있었다. 동방의 기마 부족이 또다시 침입해 왔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초원 지대에서 유럽까지는 편한 길이 놓여 있어 약탈을 하러 가기에 좋았던 반면, 중국은 진시황제가 쌓은 만리장성에 둘러싸여 있었을 뿐 아니라 당시에 이미 훌륭한 질서 체계를 갖춘 강력한 국가로 성장해 있었다. 이번에 침입한 부족은 마자르족으로 순식간에 오늘날의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점령했고 독일로 침입해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다. 마자르족은 헝가리에 눌러앉았으며 지금의 헝가리인들이 바로 이들의 후손이다. 마자르족을 물리친 오토 대제는 이탈리아도 독일의 영토로 선언하고는 랑고바르드족의 한 영주에게 봉토를 주었다. 교황은 오토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으며 962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관을 씌워주었다. 독일왕들은 다시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크리스트교 세계의 보호자가 되었다. 모든 사제들의 수장은 교황이었고 모든 봉토의 주인은 황제였다. 이들은 늘 권력다툼의 불씨를 안고 있었는데 이 싸움을 ’성직 임명권 투쟁‘이라 부른다. 1073녀 로마 교황은 그레고리우스 7세였다. 독일의 왕은 하인리히 4세였다. 교황은 자신이 최고 성직자일 뿐 아니라 신에 의해 모든 크리스트교도의 지배자로 임명되었다고 믿었다. 독일 황제는 자신이 옛 로마 황제들과 카롤루스 대제의 후계자이며 전체 크리스트교 세계의 보호자이자 최고 명령권자라고 생각했다. 교황은 하인리히 4세를 파문시켜 적개심을 표현했다. 하인리히 4세는 교황과 협상을 벌여 파문을 철회시키기 위해 호위대도 없이 홀로 이탈리아로 떠났다. 교황은 이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란 동시에 무척이나 기뻐했다. 이것으로 교황의 친구들은 교황의 대단한 성공으로 간주했고, 왕의 옹호자들은 이를 주군의 커다란 이득으로 여겼다. 하인리히 4세는 훗날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위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주교들은 교회가 임명했고 교황이 크리스트교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

 

 

23. 기사다운 기사

 

’기사‘란 말은 원래 ’말 타는 사람‘을 뜻했으며 기사란 훌륭한 군마를 타고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왕에게 봉토를 하사받은 귀족들은 모두 기사였고 그들의 집사 또한 기사였다. 기사 제도는 하인리히 4세의 시대, 그러니까 서기 1000년경에 시작되어 수백 년 동안 독일과 프랑스 등에서 지속 발전되었다. 기사는 단순히 말을 타고 싸우는 전사가 이니었다. 기사는 자신의 힘을 통해 신에게 봉사해야 했다. 기사는 여자나 가난한 자, 과부 혹은 고아처럼 힘없는 사람을 보호해야 했다. 기사는 정의를 위해서만 칼을 뽑아야 했으며 어떤 일에서든 신에게 봉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아야 했다. 또한 기사는 주군인 영주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했으며 기사는 난폭해서도 안 되었지만 비겁해서도 안 되었다. 훌륭한 기사라면 행동거지에 절도와 품위가 있어야 하고 보통의 전사들과는 달리 욕설이나 저주를 내뱉어서도 안 되었으며 체스나 문학 같은 분야에도 조예가 깊어야 했다. 기사들은 신과 크리스트교를 위해 싸우는 것을 주요한 사명이라 여겼다.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의 무덤은 팔레스타인 전역이 그렇듯 이교도인 아랍인의 손에 있었다. 크리스트교의 강력한 지배자로 부상한 교황이 성지 해방을 위해 나서라고 기사들에게 호소했다. 기사들은 프랑스 영주 고드프루아 드 부용의 지휘 아래 1096년 팔레스타인에 도착했다. 모든 기사와 병사들은 빨간 천으로 만든 십자가를 양어깨에 붙였기 때문에 이들은 십자군이라 불렸다. 숱한 어려움을 겪으며 예루살렘에 도착한 십자군은 아랍인과 싸워 이긴 뒤 이슬람교도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그런 다음 참회를 하고는 성서를 외며 맨발로 그리스도의 무덤을 순례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있었던 십자군 원정은 크리스트교도들이 아랍인의 문화를 접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아랍인의 세계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경험한 모든 것이 독일과 프랑스로 전파되었다.

 

24 기사 시대의 황제

 

호엔슈타우펜 가문 출신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붉은 수염을 멋지게 길렀기 때문에 ’붉은 수염 왕 프리드리히‘란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독일 황제였지만 이탈리아에 자주 머물렀고 훌륭한 업적도 그곳에서 이루었다. 이탈리아에는 독일왕에게 로마 황제의 관을 수여할 권한을 가진 교황이 살았을 뿐만 아니라 황제에게 필요한 돈도 있었다. 기사 시대에 독일에는 도시가 거의 형성되지 않아서 돈이 필요 없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는 이미 로마 제국 시대부터 돈을 사용했다. 이탈리아에는 베네치아, 제노바, 피렌체, 밀라노 같은 대도시가 많았고 상인도 많았다. 프리드리히 1세는 독일인으로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기 때문에 이탈리아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시민들은 자유롭게 살기를 원했다. 이탈리아로 온 프리드리히 1세는 법학자를 불렀고 자신이 로마 황제의 후계자임을 공표 받았다. 그러나 시민들은 독일 황제를 무시했기 때문에 허울뿐인 명성만 얻었을 뿐 실질적 효과는 끝내 거두지 못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전형적인 기사였기에 십자군 전쟁에도 참전했다. 1189년 3차 원정 때였다. 영국왕 리처드 1세와 프랑스왕 필립2세도 참전했는데 이들이 해로를 이용한 반면 프리드리히1세는 육로를 택했다가 소아시아의 어느 강에서 익사하고 말았다. 그의 손자인 프리드리히 2세는 시칠리아에서 성장했다. 프리드리히 2세의 후견인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였다. 교황은 전체 크리스트교 세계의 실질적 수장이었다. 그의 권력은 영국에까지 미쳐 영국왕 존이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자 존왕을 파문시키고 영국 사제들의 예배 집전도 금지 시켰다. 분노한 영국 귀족들이 왕의 권한을 빼앗자 존왕은 두 번 다시 귀족들의 뜻을 거스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문건을 남겼는데 이것이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이며영국에서는 현재도 지켜지고 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모든 봉건 영주들을 지배하는 강력한 지배자가 되었다. 다시 교황과 황제가 충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인토켄티우스의 후임자인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프리드리히 2세가 무조건 십자군 원정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다.프리드리히 2세는 칼리프 및 술탄과 협약을 맺고 크리스트교 순례자들이 안심하고 그리스도의 무덤까지 순례하게 만들었다. 교황은 이런 행동을 한 프리드리히 2세를 파문시켰고, 프리드리히는 황제의 관을 직접 자기 머리에 얹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황제는 1250년 외롭게 세상을 떠났고 위대한 기사 가문 호엔슈타우펜 왕가도, 기사 시대도 끝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시칠리아에 머물면서 교황과 반목하고 있는 동안 서양 세계는 다른 아시아 기마 민족의 침입을 받았다. 몽골족은 징기스칸의 영도 아래 먼저 중국을 정복하고 무자비한 약탈을 자행햇다. 그런 다음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유럽으로 향했다. 서양 세계가 사상 최대의 위기에 직면한 순간 이들의 지배자가 시베리아에서 죽었고 몽골 전사들은 방향을 돌렸다.

 

25 도시와 시민

 

수공업자들은 ’길드‘라 불리는 자신들끼리의 조합에 소속되어 있었다. 길드는 나름의 규칙과 자기들끼리의 시합, 알록달록한 깃발 그리고 기본적인 원칙을 갖고 있었다. 길드의 회원은 서로 도와야 했고 손님 앞에서 다른 회원을 흉봐서는 안 되었으며 손님에게 질 나쁜 물건을 제공해서도 안 되었다. 또한 도제나 직공을 잘 대우해야 했으며 자신의 직업과 도시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야 했다. 시민과 수공업자들은 도시에 교회를 세울 경우 자신들의 재산과 노동력 등을 정말로 아끼지 않았다. 새로 짓는 교회나 대성당이 이웃 도시의 자랑거리들보다 더 크고 더 아름다우며 더 화려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무척이나 중요한 문제였다. 유대인은 고대의 민족들 중 유럽에 남은 유일한 민족이다. 유대인은 많은 제약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유일하게 허용되는 것이 상업이었다. 유대인들은 많은 돈을 벌었으며 기사나 시민들도 이들의 돈을 빌려 쓰게 되면서 유대인은 더욱 미움을 샀다. 이런 유대인보다 더 혹독한 대우를 받은 이들은 성서를 깊이 연구하여 특정 교리에 회의를 품기 시작한 사람들로 이단자로 불렸다. 이단자들은 공개적으로 화형을 당했다. 프랑스왕은 1300년대로 접어들기 직전부터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지배자가 되었다. 영국은 1066년 프랑스에서 건너간 노르만 왕가에 정복되어 그 지배를 받고 있었다. 노르만 왕가는 굳이 따지자면 프랑스인이었다. 이런 이유로 프랑스왕들은 영국에 대한 통치권을 요구했다. 이런 때 프랑스에서 왕위를 물려받을 왕자가 태어나지 않자 영국왕들이 자신들도 왕위를 계승할 자격이 있다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337년에 전쟁이 일어나 100년도 넘게 계속되었다. 바로 백년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영국이 꾸준히 승리를 거두면서 프랑스에서 점령지를 넓혀 나갔다. 프랑스인들은 영국인의 지배를 원하지 않았다. 이때 17세의 양치기 소녀 잔 다르크는 자신이 신의 부름을 받았다고 믿으며 완전 무장을 한 채 프랑스군을 이끌었고 마침내 영국군을 격퇴시켰다. 영국인들은 잔 다르크를 잡은 뒤 마녀로 몰아 사형선고를 내렸다. 1431녀 잔 다르크는 화형에 처해졌다. 당시 사람들이 그녀를 마녀로 생각한 것은 시골뜨기 소녀가 단 2년 만에 100년 동안의 패배를 종식시키고 프랑스와 왕을 구해냈기 때문이다.

 

26 새로운 시대

 

1420년경 피렌체 시민들은 자신들이 중세의 사람들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이들은 자유롭고 자주적이며 스스럼없는 무엇, 한마디로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보았고 이 과정에서 발견하게 된 것이 고대이다. 고대인들의 유능함에 감탄했고 고대인들은 그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특히 학문의 영역에서 그랬다. 이들은 라틴어를 배우기 위해 노력했고 아테네인들이 남긴 저작을 즐겨 읽었다. 자유도시 피렌체가 아테네나 로마 같은 도시가 된 것 같았다. 당시 이탈리아인들은 ’재생‘이나 ’부활‘을 뜻하는 ’리나시멘토‘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는데 오늘날에는 ’르네상스‘라는 용어가 더 많이 사용된다. 피렌체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고대의 정신을 소생시키고자 했다. 이들은 다시 기둥을 사용해서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피렌체에 살았던 한 화가의 이름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였다. 농가의 하녀에게서 태어난 그는 1452년부터 1519년까지 살았다. 그는 병원에서 시체까지 구해다가 해부하고 연구했고 식물과 동물도 정확히 관찰했다. 그는 비행기의 가능성을 정밀하고 상세하게 연구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는 당대인들이 책에 써 놓은 지식에 크게 기대지 않고 자연의 모든 현상을 실험에 의해 해명하려 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의 기록 중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레오나르드 다빈치가 살던 시대에 피렌체에는 부와 권력을 한 손에 쥔 가문이 있었는데 양모 무역과 금융업을 주도하던 메디치 가문이었다. 메디치 가문은 1400년에서 1500년 사이에 직간접적으로 피렌체의 역사를 주도해나갔다. 특히 로렌초 데 메디치는 예술가와 학자들을 육성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메디치 가문의 부유한 성직자들이 교황으로 선출되고부터는 이탈리아 전역의 위대한 예술가들이 로마로 몰려와 최고의 걸작들을 양산했다. 그리고 1453년 이후에는 책들이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독일인 구텐베르크는 나무판에 글자를 새기는 대신 글자 하나하나를 나무토막으로 깎아 만드는 방법을 택했다. 당시 세상을 한층 더 크게 변화시킨 발명품은 화약이었다. 중국인이 발명한 화약은 중국에서는 폭죽이나 불꽃놀이에 사용되었다. 화약은 1300년 이후 유럽에서 성을 무너뜨리거나 사람을 살상하는 대포로 사용되었다.

 

27 새로운 세계

 

오래전부터 중국인들은 사막을 횡단할 때면 나침반을 사용했는데, 이 마법의 도구는 아랍인의 손을 거쳐 유럽인에게 전해졌다. 1200년경의 일이었다. 가난하지만 모험심이 강하고 야심도 큰 제노바 출신의 이탈리인이 살았는데 그의 이름은 콜럼버스였다. 그는 서쪽으로 계속 항해하면 동양에 닿게 될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그곳에 가기만 하면 황금과 상아 진귀한 향신료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콜럼버스는 에스파냐로 갔다. 에스파냐 사람들은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콜럼버스가 인도에 도착할 계획을 품고 서쪽 바다를 항해하기 위해 에스파냐를 출발한 날은 1492년 8월 3일이었다. 마침내 같은 해 10월 11일 밤 2시에 배 한 척에서 포를 쏘았다. 콜럼버스는 인도에 닿은 것이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 근처의 어느 섬에 도착한 것이다. 콜럼버스의 착각 덕분에 아메리카 원주민은 인디언이라 불렸고 콜럼버스가 상륙한 섬들은 서인도 제도라 불린다. 모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기 우연히 아메리카를 발견한 1492년은 근대의 시점으로 간주된다. 콜럼버스와 선원들을 태운 에스파냐 선박들이 발견한 것은 온순하고 가난하며 소박한 원주민이 사는 섬뿐이었다. 이 모험가들이 원하는 것은 원주민들이 착용하고 있는 황금 장신구를 어디서 얻었는가 하는 것뿐이었다. 에르난 코르테스는 1519년 에스파냐 병사 150명과 기병 열세 명, 대포 서너 문을 끌로 해안에서 출발했다. 원주민들은 백인 침입자들이 신이 아니라면 적어도 강력한 마술사일 것이라 생각했다. 코르테스는 온갖 난관을 겪으면서도 계속 전진했고 마침내 자신에게 사신과 선물을 보내왔던 강력한 왕의 제국으로 들어섰다. 왕의 이름은 몬테수마였고 그 나라와 수도의 이름은 똑같이 멕시코였다. 코르테스는 이곳의 군주를 계략을 써서 포로로 잡았다. 백성들 중 누군가 돌을 던졌고 몬테수마는 그 돌에 맞아 죽었다. 코르테스는 찬란한 도시 멕시코를 파괴하고 불태워 버렸다. 에스파냐 사람들은 멕시코뿐 아니라 아메리카의 다른 많은 지역에서도 오랜 역사를 지닌 문화 민족들을 끔찍한 방식으로 말살시켰다. 그러는 동안 포르투갈 사람들이 인도로 가는 올바른 항로를 발견했다. 포르투갈 사람들 또한 고대 인도인들의 지혜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이들이 원하는 것 역시 황금뿐이었다.

 

28 새로운 신앙

 

1500년 이후에는 교황이 로마에 머물렀으며 사제직보다 사치와 권력에 더 관심을 두었다. 교황들은 성 베드로 성당이 만족스러울 만큼 화려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빼어난 교회를 새로 짓고 싶어 했다. 교황의 환심을 사려는 많은 사제와 수도사들이 교회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 방법으로 모금을 시작했다. 신자들에게 죄를 면해 줄 테니 돈을 내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를 면죄부라 불렀다. 당시 독일의 비텐베르크에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속한 마르틴 루터라는 수도사가 살았다. 루터는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직권을 남용하는 것에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95개 조 반박문을 실은 벽보를 교회 정문에 붙여서 면죄부 매매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루터의 글은 인쇄되어 독일 전역으로 팔려나가 널리 읽혔다. 많은 사람들이 루터의 견해에 동조했다. 루터와 신봉자들은 교회와의 완전한 결별을 선언했다. 초기 크리스트교의 경건함을 부흥시키자는 루터의 ’종교개혁‘에는 영주들도 많이 동참했다. 1519년 유럽에서는 합스부르크가의 카를 5세가 독일 황제가 되었다. 1527년 로마는 카를 황제의 용병들에게 점령되어 약탈 당했고 이탈리아의 풍요로움도 파괴되었다. 제국 의회는 루터를 이단자로 규정하고 파문한다는 법령을 공표했다. 루터는 법률의 보호 바깥에 놓인 것이다. 작센 공 프리드리히는 루터의 보호자로서 아무도 모르게 그를 붙잡아 바르트부르크성으로 데려왔다. 자발적인 구금 생활을 하는 동안 루터는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루터는 모든 독일인이 성서를 읽기를 원했지만 당시에는 표준적인 독일어가 없었다. 루터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이해할 수 있는 독일어를 창안했다. 이 독일어는 4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별다른 변화를 겪지 않고 표준어로 사용된다. 교황권에 중대한 손실을 미친 또 다른 사건이 영국을 통치하던 헨리 8세에 의해 일어났다. 그는 아내와 이혼하고 왕비의 시녀인 앤 불린과 재혼하려 했다. 교황이 이를 허용하지 않자 헨리 8세는 영국을 로마 교회와 분리시키고 독자적인 교회를 설립했다. 루터의 추종자들은 계속해서 영국왕의 박해를 받았지만 어쨌든 영국은 로마 교회와 영원히 분리된 것이다.

 

29 교회 사이의 투쟁

 

독일의 젊은 귀족인 로욜라는 위기에 처한 교회를 위한 투사가 되고 싶었다. 그와 친구들은 수년의 훈련 끝에 자신의 생각을 제어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자 ’예수의 군대‘를 뜻하는 ’예수회‘라는 수도회를 창설했다. 예수회는 실제의 군대 못지 않게 신중하고 강력한 집단으로 루터의 비판을 야기한 교회의 폐단을 제거하는 일부터 착수했다. 가톨릭교회에서 이탈하는 대신 교회 자체를 혁신하는 길을 통해 초기 크리스트교도의 경건함을 회복시키고, 그리하여 종교 개혁에 효과적으로 맞서려 한 이런 노력을 ’반종교개혁‘이라 부른다. 종교 전쟁이 벌어지던 시기의 사람들은 모두 진지하고 엄격했다. 사람을 평가할 때는 얼마나 신앙심이 깊으며 교회에 봉사할 자세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귀족들도 더이상 화려하고 풍성한 옷을 입지 않았다. 당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영주 사이의 싸움은 독일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프로테스탄트를 위그노라 부른 프랑스에서는 여왕이 위그노파 귀족들을 왕궁에 초대한 뒤 모두 살해했다.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는 모든 가톨릭 영주 중에서 가장 진지하고 엄격하며 가차 없던 인물이었다.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그릇된 신앙과 싸우는 것이었다. 펠리페왕은 예전의 독일 황제들처럼 자신을 교회의 수호자이자 투사라고 생각했다. 북부의 부유한 도시에는 프로테스탄트 시민들이 많이 살았다. 펠리페왕은 이들에게 개종을 강요했지만 받이들여지지 않았다. 펠리페왕의 전권 대사 알바 공은 네덜란드 시민들과 귀족들을 냉혹하게 처형했다. 잔인한 처사에 분노한 네덜란드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1579년 네덜란드의 프로테스탄트 도시들이 에스파냐에서 독립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당시 영국의 지배자는 헨리 8세의 딸 엘리자베스였다.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가톨릭교도의 공세에서 영국을 지키는 일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펠리페왕과 싸우던 네덜란드의 프로테스탄트 시민들을 도왔다. 분노한 펠리페 왕이 가톨릭 교권을 지키기 위해 엄청난 함대를 몰고 영국으로 침범했지만 패하고 말았다. 영국인과 네덜란드인은 그들의 영해에서 에스파냐 함선을 쫓아냈을 뿐만이 아니라 인도와 아메리카의 부유한 항구에서도 에스파냐 사람들을 완전히 몰아내 버렸다. 머지않아 북아메리카와 인도에서는 영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새로운 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30 참혹한 시대

 

독일의 황제들은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들이었기에 제국 내에서 가톨릭 교회의 지배력이 회복될 수 있기를 원했다. 1618년 불만을 품은 프로테스탄트들이 세 명의 황제 대표단을 창문 밖으로 내던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대표단은 거름 구덩이에 빠져 크게 다치지도 않았지만 이 일은 삼십 년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당시의 싸움은 전쟁이라기보다 각지에서 몰려든 사나운 용병들이 벌이는 끔찍한 학살에 가까웠다. 스웨덴에 이어 프랑스도 이 전쟁에 뛰어들었다. 당시 프랑스인들은 지략이 비상한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의 지휘 아래 유럽 최강의 세력가인 독일 황제와 에스파냐인들을 굴복시키고 프랑스를 유럽 최강의 국가로 만들 기회를 엿보았다. 30년 동안 참혹한 고통을 겪고 나서야 각국 사신들이 만났고 지루하고도 혼란스러운 협상을 벌인 끝에 1648년 강화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의 골자는 모든 것을 삼십 년 전쟁 이전의 상태로 되돌린다는 것이었다. 프랑스가 라인강변의 독일 성채들과 도시들을 얻어내 이 전쟁의 유일한 승자가 되었다. 악마와 마녀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했던 때는 삼십 년 전쟁이 끝난 직후의 참담한 시절이었다. 독일 각지에서 수백, 아니 수천 명이 화형을 당했다. 자연의 영역에 엄청난 마력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분명하게 알아낸 사람은 이탈리아인 갈릴레오 갈릴레이였다. 갈릴레이는 아무 설명 없이 적어놓은 한 문장 때문에 고발당했다. 그 문장이란 태양은 움직이지 않으며 지구와 다른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이었다. 당시 사람들에게 태양이 언제나 정지해 있다는 학설은 성서에 위배되기 때문에 이단일 수밖에 없었다. 갈릴레이는 이단자로 화형당하거나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자신의 학설을 부정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섰다. 결국 지동설을 주장한 자신은 비천한 죄인이라는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갈릴레이는 그보다 앞서 살았던 많은 선구자들과 달리 화형만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서에 서명을 하고 난 후에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오늘날 우리가 계산 공식을 사용해서 자연을 원하는 대로 통제할 수 있고 비행기나 로켓, 라디오 등의 다양한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은 갈릴레이 같은 사람들 덕분이다. 이들은 참된 용기를 발휘한 사람들이다.




31. 불행한 왕과 행복한 왕

 

영국은 유럽의 강국 중에서 삼십 년 전쟁에 관여하지 않은 유일한 나라였다. 2015년 영국의 존왕은 자신의 후계자들은 귀족들과 사전에 합의하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마그나 카르타에서 엄숙히 맹세했다. 찰스 1세는 이를 지키려 하지 않았다. 청교도들의 우두머리는 올리버 크롬웰이라는 가난한 귀족으로 찰스 1세를 붙잡아 군사 법정에 세웠다. 찰스 1세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권력을 남용한 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1649년에 참수되었다. 크롬웰은 이름뿐이 아닌 실제의 수호자였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시작한 모든 일을 계승하는 것, 즉 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나 인도의 무역소, 유능한 함대와 대규모 해상 무역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영국은 계속해서 번영을 이루었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마그나 카르타의 약속을 파기한 왕은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은 기사와 귀족들에게서 국정에 개입할 만한 가능성을 모두 앗아 버렸다. 그는 유럽의 지배권을 프랑스로 가져왔다. 리슐리외가 세상을 뜰 무렵 유럽의 패권은 프랑스가 쥐게 되었다. 추기경이 죽은 직후인 1643년 루이 14세가 다섯 살의 나이로 프랑스 왕위에 올랐다. 그는 장기 집권의 세계 기록을 세운 인물로, 이 기록은 오늘날까지 깨지지 않았다. 그의 재위 기간은 1715년까지 무려 72년이나 된다. 루이 14세는 리슐리외와 마자랭이 장악했던 모든 권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는 화려한 궁전들을 짓는 데 엄청난 열정을 기울였다. 특히 파리 근교에 세운 베르사유 궁전은 도시 하나에 맞먹는 규모였다. 이 궁전에서 가장 장관을 이루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정원이다. 왕궁에서 금은 식기에 최고급 음식을 담아 먹는 동안 농부들은 말 그대로 쓰레기와 잡초로 연명했다. 가장 돈이 많이 드는 것은 루이 14세가 자꾸만 일으키는 전쟁이었다. 그가 전쟁을 일으키는 목적은 그저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이웃 나라에서 뭔가 빼앗으려는데 있었다. 그는 자신이 유럽 전체의 주인이라 생각했다. 모든 강대한 군주들이 루이 14세르 모방했다. 루이 14세는 이들보다 한 수 높았다. 허영과 우아함과 사치와 위엄과 무자비함과 경쾌함과 근면함을 묘하게도 함께 지니고 있던 루이 14세였다.

 

32. 동유럽의 변화

 

루이 14세가 파리와 베르사유를 오가며 프랑스를 다스리는 동안 독일에는 오스만 제국의 투르크족이 침입해 왔다. 투르크족은 200년도 훨씬 전인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이후 광대한 이슬람 제국을 건설했다. 투르크족의 왕은 술탄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훌륭하게 무장한 병사들은 대재상 카라 무스파타의 지휘 아래 오스트리아를 향해 진군했다. 헝가리에 주둔한 황제군은 이들이 침공을 저지할 수 없었다. 후퇴를 거듭한 황제군은 빈을 제외한 지역을 모두 내주었다. 오스트리아, 독일, 폴란드에서 황제의 원군이 도착했다. 격렬한 전투 끝에 오스만 제국군은 막사도 챙기지 못한 채 달아나 버렸다. 헝가리는 이제 오스트리아의 차지가 되었다. 오스트리아에도 화려한 궁전과 수도원들이 세워졌다. 이 건축물들의 화려한 새 양식은 바로크 양식이라 불렸다. 1580년경 러시아를 다스리던 왕은 ’무시무시한 이반‘이라 불렸다. 이바놔 비교하면 네로는 온화한 편이었다. 러시아인은 서로 싸우고 죽이느라 서방 세계와 거의 접촉이 없었다. 1689년, 새로운 군주가 러시아의 왕위에 올랐다. 그는 표트르 대제라 불린 인물이다.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를 서방 세계처럼 만들겠다는 포부를 품었다. 그래서 다른 나라들이 어떻게 이런 것들을 성취했는지 알아보려고 여행을 떠났다. 그는 주저 없이 네덜란드 조선소로 들어가 도제로 일했고 정말로 선박 제조 기술을 배웠다. 이제 러시아에 없는 것은 항구 도시뿐이었다. 표트르 대제는 농부들을 동원해서 늪지의 물을 빼고 말뚝을 박게 했다. 8만 명의 농부가 혹사당한 끝에 마침내 항구 도시가 탄생했다. 대제는 이 도시를 상트페테르부르크라고 이름 지었다. 1697녀부터 스웨덴을 다스려 온 칼 12세는 허황도니 일만 저지르고 다녔으며 무모할 만큼 대답한 성격이었다. 그는 수적으로 다섯 배나 우세한 표트르 대제의 군대와 맞서 승리를 거두었다. 폴란드를 정복했으며 러시아로 쳐들어갔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었다. 스웨덴군이 추위와 피로에 지쳐 아사 직전에 이르렀을 때 러시아군이 나타나 이들을 완패시켰다. 칼 12세는 스웨덴으로 귀국하자마자 다시 전쟁을 일으켜서 영국과 독일, 노르웨이, 덴마크를 적으로 만들었다. 칼 12세는 1718년 노르웨이의 어느 요새를 공격하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표트르 대제는 유럽과 오스만 제국뿐 아니라 페르시아와 아시아로 세력을 뻗어 나갔다.

 

 

33. 계몽의 시대

 

1700년 이후 유럽에서는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므로 공공연하게 모욕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상이 확산되었다. 이런 사상을 ’계몽주의‘라 한다. 계몽주의 탄생 이후 200년 동안 사람들은 지난 2000년 동안보다 훨씬 더 많은 자연의 비밀을 탐구하고 알아냈다. 특히 계몽주의의 세 가지 주요 신조인 관용과 이성, 인도주의는 인간의 삶에서 지대한 의의를 갖는다. 이런 변화가 받아들여진 것은 과감히 계몽주의를 주장했던 시민이나 저술가들 덕분이다. 당시 유럽에서 계몽주의를 위해 선두에서 싸웠던 몇몇 군주들 중의 한 사람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었다. 1740년부터 프로이센을 통치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자신이 국가의 주인이 아니라 국가 제일의 공복이라 생각했고 또 그런 말을 자주했다. 오스트리아의 지배자는 1740년 이후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였다. 그녀는 신앙심이 깊은 훌륭한 어머니로 자녀도 열여섯 명이나 둔 여자였다. 프리드리히 대왕을 본보기로 삼았고 그의 개혁 정책을 오스트리아에도 도입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유럽 각국의 황실에 사절을 보내 친선을 맺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자신의 딸 마리 앙투아네트를 프랑스 황태자에게 시집보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죽은 후 뒤를 이은 요제프 2세는 더 열렬히 계몽주의를 위해 힘썼다. 그는 사형 제도와 농노제마저 폐지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계몽주의가 득세했던 바로 그 시대에 아메리카에서는 영국 국왕의 신하로서 조세를 바치는 것을 거부했다. 독립전쟁의 지도자는 벤저민 프랭클린이란 인물로 피뢰침을 발명한 평범한 시민이었다. 주민들은 그와 조지 워싱턴의 지휘 아래 연방을 결성했고, 오랜 싸움 끝에 영국군을 몰아냈다. 이들은 새로운 사상의 원칙에 따라 살고자 했기에 1776년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신성한 인권을 신생 국가의 기본법으로 천명했다.

 

 

 

34.프랑스 혁명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는 계몽주의를 올바른 것이라 여기고 그에 따라 통치하려 애썼다. 하지만 프랑스의 왕들은 자ㅣ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왕궁의 귀족들은 온갖 우아한 치장을 다 하고 분과 향수를 뿌리고 레이스로 장식한 비단옷을 살랑거리며 지냈다. 이처럼 화려하고 우아하며 지극히 세련된 궁정 생활 한가운데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들어왔다. 프랑스의 황태자비가 되었을 때 그녀는 겨우 열네 살인 어린 소녀였다. 왕실은 국고를 탕진했고 더이상 사치스러운 생활을 유지할 돈이 남지 않았다. 그러자 1789년 루이 16세는 귀족과 성직자와 시민 계급의 대표자들을 불러 의회를 소집했다. 왕실의 재정 위기를 타개할 방도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왕은 삼부회에서 나온 결론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삼부회를 해산시키고자 했다. 왕의 군대가 삼부회를 해산시켰다는 소식을 들은 파리 시민들은 분노했다. 시민들은 함께 뭉쳐 절대 왕권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으로 쳐들어갔다. 그동안 삼부회에서는 유례없는 일이 결의되었다. 계몽주의 원칙을 완전하게 관철시키기로 한 것이다. 모든 인간이 이성적 존재로서 평등하며 법 앞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국민이 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밝히려 한 것이다. 시민들은 자신들이 직접 통치를 맡아야 한다고 이해했다. 베르사유 궁전으로 몰려간 시민들은 국왕 내외와 아이들은 물론 모든 종을 잡아서 파리로 끌고 갔다. 루이 16세는 가족들을 이끌고 외국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이것이 발각된 왕은 가족과 함께 더욱 엄중한 감시를 받았다. 삼부회 대신 결성된 국민 의회는 아주 많은 개혁안을 결의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아는 왕을 보호하기 위해 소규모의 부대를 프랑스로 보냈다. 성난 국민들은 외국에 간섭에 저항했고 귀족들을 감금하고 살해했다. 이런 시기에 단두대가 발명되었다. 루이 16세는 혁명 재판소에서 반역죄로 사형을 언도 받고 참수되었다. 얼마 후 마리 앙투아네트도 참수되었다. 당통은 열정적인 연설로 이름을 떨친 민중의 지도자였다. 로베스피에르는 고지식하고 검소하며 냉정한 성격의 변호사였다. 당통은 매일같이 사람들의 머리를 자르는 일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이제는 자비와 연민을 베풀자고 주장했다. 로베스피에르는 당통의 목도 잘랐다. 하지만 며칠 뒤에는 로베스피에르도 목이 달아났다. 이제 프랑스는 법 앞의 평등이 실현되었고 교회와 귀족의 재산은 농노의 굴레에서 해방된 농부들에게 분배되었다. 1795년 혁명 재판소는 폐지되고 다섯 명의 대표가 이끄는 총재 정부가 새로운 원칙에 따라 나라를 다스렸다.

 

 

 

35. 마지막 정복자

 

 

이탈리아에 산세가 험하고 햇볕이 잘 드는 가난한 섬인 코르시카가 있다. 그곳에 아내와 자식 여덟 명을 거느린 변호사가 살았다. 1769년 그의 둘째 아들인 나폴레옹이 태어났을 때 제노바인들이 이 섬을 프랑스에 팔아버렸다. 나폴레옹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장교가 되기로 하고 열 살의 나이에 프랑스의 군사 학교로 진학했다. 그는 열일곱 살 때 프랑스군의 소위로 임관되었다. 키가 아주 작았던 그는 꼬마 대장이란 별명을 얻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코르시카는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했다. 혁명 정부는 반항적인 지방 도시를 진압하기 위해 툴롱으로 군대를 파견했는데 이 안에 나폴레옹이 있었다. 이때 세운 공으로 나폴레옹은 장군이 되었다. 하지만 자코뱅파와 친분이 있었다는 이유로 군대에서 쫓겨났다. 그 후 젊은 귀족들이 일으킨 반란에 참여해 성공했고 덕분에 다시 장군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의 부대는 이탈리아로 파견되었는데 아주 짧은 시간에 이탈리아 북부를 정복했다. 1798년 이집트군과 싸워 이들도 물리쳤다. 통령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은 화려한 프랑스 왕궁에서 국정을 돌봤고 쫓겨난 귀족들도 다시 불러들였다. 나폴레옹은 벼사들이 우상이었고 모든 프랑스인이 그를 숭배했다. 프랑스 국민은 그를 종신 통령으로 임명했다. 1804년 나폴레옹은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영국과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웨덴은 동맹을 맺어 나폴레옹에 대항했다. 나폴레옹은 과감히 맞섰고 1805년 모라비아 지방의 아우스터리츠에서 동맹군을 완패시켰다. 그는 거의 전 유럽의 지배자가 되었다. 긍 제국은 카롤루스 대제의 제국보다 훨씬 더 넓었다. 나폴레옹을 무너뜨린 것은 그 자신의 지나친 명예욕이었다. 러시아는 영국과 무역을 하지 말라는 나폴레옹의 명을 어겼으므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나폴레옹의 대군은 1812년 러시아를 향해 진군했다. 이들이 모스크바로 입성했을 때 도시는 텅 비어있었다. 뿐만 아니라 모스크바 근교가 모두 불타버렸다. 결국 나폴레옹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1813년 독일의 라이크치히 근처에서 나폴레옹 군대와 유럽 동맹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나폴레옹이 패배하자 프랑스인들은 그를 폐위시켜 엘바섬으로 보내 버렸다. 단두대에서 처형된 루이 16세의 동생이 루이 18세로 즉위했다. 루이왕은 사치스럽고 몰지각한 궁정 생활을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몰래 엘바섬을 빠져나와 프랑스에 도착했다. 며칠 만에 다시 황제에 오른 나폴레옹은 민중의 환호성을 들으며 파리에 입성했고 루이 18세는 도망쳤다. 영국의 웰링턴 공작을 총사령관으로 한 동맹군과 프랑스군은 워털루 근처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나폴레옹은 최후의 패배를 맛보고 황제 자리에서 쫓겨났고 프랑스를 떠나야 했다. 영국인들은 그를 포로로 취급했고 멀리 태평양 한가운데 떠 있는 황량한 외딴 섬 세인트헬레나에 유배시켰다. 여기서 그는 6년 동안 무력하고 외로운 생활을 했다.

 

 

 

36. 인간과 기계

 

 

계몽의 시대에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던 것은 갈릴레이의 이념, 즉 자연을 이성적이고 수리적으로 고찰하려는 이념이었다. 자연법칙을 계산하고 제어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사람들은 자연의 여러 힘을 인간을 위해 활용하게끔 제어했다. 증기 기관과 기선, 기관차, 전신 등은 우리의 삶을 크게 바꿔 놓은 기계들이다. 제대로 된 증기 가관은 1769년 영국의 노동자 와트가 특허를 얻었다. 최초의 기관차는 1814년 영국인 스티븐슨에 의해 제작되었다. 전신의 발명이 이뤄진 때는 1837년으로, 당시 미국의 화가 모스가 친구들에게 짧은 전보를 보냈다. 세상을 더욱 크게 변화시킨 것은 인간의 노동력을 대신한 기계들이다. 기계를 사용하면 공장주는 100명의 직조공들에게 마련해주기 위해 들여야 할 모든 것을 절약할 수 있었다. 임금을 가장 적게 주는 악덕 공장주들이 가장 싼 값으로 상품을 팔았기 때문에 가장 큰 성공을 거뒀다. 그래서 다른 공장주들 역시 양심의 가책이나 동정심을 느끼면서도 노동자들을 착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장이나 기계처럼 다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할 힘을 갖게 하는 물건은 개인이 아닌 공동의 소유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사회주의‘라고 한다. 이들 사회주의자 가운데 특히 유명한 사람은 독일 학자 카를 마르크스였다. 그는 모든 노동자가 일치단결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렇게 할 경우 공장주는 더 싼 임금을 주고 고용할 사람을 절대 찾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에겐 두 계급이 존재할 뿐이라고 말했다. 재산이 있는 부르주아 계급과 재산이 없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그것이다. 유산자는 가능한 한 적은 비용을 들여 가능한 한 많이 생산하려 한다. 노동자는 자본가나 공장주에게서 가능한 한 이윤을 많이 배당해 줄 것을 요구한다. 두 계급의 싸움을 끝내기 위해선 다수의 무산 계급이 소수의 유산 계급에게서 재산을 빼앗고 이를 모든 사람의 소유로 만드는 것이라 주장했다. 1848년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에게 격문을 발표했는데 바로 ’공산당 선언‘이라 불리는 것이다. 기계를 소유해서 부를 획득한 부르주아 계급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려 했다. 유능한 사람에게는 능력을 펼쳐 보일 자유를 허용해야 하지 법적 규제나 간섭으로 방해해서는 안 되며 그래야 세상이 점점 더 훌륭하게 발전할 것이라고 이들은 말했다. 1848년 파리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다시금 혁명이 일어났다. 시민들은 그들이 공장과 기계로 무엇을 하든 간에 더 이상 아무도 간섭할 수 없도록 모든 국가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 마침내 구시대가 막을 내렸다.

 

 

 

37. 바다 너머의 세계

 

중국은 교양을 갖춘 수백만 명의 사람이 사는 나라였기에 유럽인에 대해 우월감을 느꼈다. 이 점은 중국 황제가 1793년 영국왕에게 보낸 한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하지만 황제는 먼 섬나라 사람들의 야만성을 과소평가했다. 몇십 년 후 영국인은 기선을 몰고 찾아와 횡포를 부렸다. 그들은 중국인들이 아편을 아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아편을 태우면 아주 잠깐 동안 황홀한 꿈에 잠길 수 있지만 결국 끔찍한 병에 걸린다. 중국은 1839년 단호하게 아편을 금지했지만 영국인들은 대포까지 싣고 와 중국의 많은 궁전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일본의 권력은 귀족과 무사 계급에 집중되어 있었다. 200년 이상 이방인에게 문호를 닫았던 일본에 백인 사절단이 들어왔다. 그들은 미개인에 불과한 일본인들의 낡은 예절은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마침 그때 일본에서는 하급 귀족이 일으킨 혁명이 성공했고, 꼭두각시로 불렸던 천황이 정말로 무제한의 권력을 쥐게 되었다. 천황은 나라를 지켜내기 위해 단번에 문호를 개방했다. 천황은 독일을 모범으로 삼아 보편적 의무 교육제를 도입하여 전 국민의 정신 무장을 도모했다. 유럽인은 일본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팔고 무엇이든 열심히 보여주었다. 몇십 년도 되지 않아 일본인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모든 기술으 유럽인에게서 배워 버렸다. 미국 동부 연안에 항구 도시를 형성한 영국의 무역소들은 1776년 독립을 선언하고 자유로운 연방 국가를 건설했다. 황량한 서부는 황금과 모험을 쫓는 사람들로 들끓었다. 남부의 주들은 플랜테이션 농업(자본을 지닌 농장주가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 특정 농산물을 대향으로 생산하는 농업방식)에 의지해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이 꼭 필요했다. 북부의 시민들은 노예를 부리는 것은 인권 원칙에 입각해 건설된 미합중국으로서는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여겼다. 1820년 특정 분계선 이남에서는 노예제도를 유지하고 이북 지역은 노예제를 금한다는 타협안이 채택되었다. 1861년 링컨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남부의 주들은 연방 탈퇴를 선언했고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독자적 연방을 수립했다. 끔찍한 내전이 시작되었고 결국 북부가 승리해 링컨이 해방 노예들의 환호를 받으며 남부 연방의 수도로 입성했다. 그로부터 11일 후 링컨은 연극을 관람하던 중 어느 남부 사람에 의해 살해되었다.

 

 

 

38. 유럽의 새로운 두 제국

 

1848년 시민 혁명이 일어난 직후부터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의 후손 하나가 공화국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며 얼마 후 나폴레옹 3세로 즉위했다. 러시아의 황제 차르는 백성들이 호감을 얻지 못했다. 유럽으로 유학한 러시아 국민들은 아주 현대적인 사고 방식을 배우고 돌아왔으나 제국의 관료들은 여전히 중세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아 온 많은 크리스트교 민족들은 서서히 독립을 쟁취했다. 유럽에 마지막으로 남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제국의 것으로 남았다. 피에몬테(산기슭) 왕국의 재상인 카보우르는 야심이 큰 나폴레옹 3세를 설득해서 이탈리아의 자유와 통일을 실현하는 일에 개입하게 만들었다. 이탈리아는 카보우르의 노력과 용맹한 투사 가리발디의 투쟁 덕분에 통일을 실현할 수 있었다. 단 한 곳은 제외되었는데 바로 교황에게 속한 로마였다. 비스마르크는 분열된 독일 연방을 해체하고 단일한 대제국을 건설하는 것이 소망이었다. 1870년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의 빌헬름 왕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과 가족의 신변을 지키고 싶거든 무력적 욕망을 버려야 하며 이를 서면으로 약속하라고 했다. 비스마르크는 왕에게 나폴레옹 3세에게 선전 포고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군은 파리를 향해 진군해 나폴레옹 3세를 포로로 잡았다. 빌헬름은 프로이센왕에서 독일 황제가 되었다. 독일군에게 포위당한 동안 파리에서는 노동자들이 주도한 유혈 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인들은 실정의 책임을 물어 나폴레옹 3세를 퇴위시키고 공화국을 건설했다. 비스마르크 후작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빌헬름 2세가 즉위하자 해임되었다.

 

 

 

39. 열강들의 세계 분할

 

 

생산된 제품이 팔리지 않고 쌓이기만 한다면 공장은 문들 닫을 수밖에 없다. 공장이 문들 닫으면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더 이상 아무 물건도 살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공장에 쌓이는 물건은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이런 상태를 경제 공황이라 한다. 어느 나라든 경제 공황을 피하려면 생산되는 물건을 가능한 한 모두 팔 수 있어야 한다. 요컨대 유럽인들에게는 식민지를 갖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게 되었다. 식민지를 많이 가질수록 공장은 더 필요했고, 늘어난 공장이 잘 가동되어 많은 상품이 생산될수록 다시금 더 많은 식민지가 필요해졌다. 하지만 세계는 이미 분할이 끝난 상태였다. 새로운 식민지를 마련하거나 이미 갖고 있는 것을 더 강대한 이웃 나라에 빼앗기지 않으려면 싸움을 벌이거나 최소한 싸움도 불사하겠다고 위협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전쟁이 일어났다. 1914년 오스트리아의 황태자가 새로 차지한 보스니아를 여행하다가 그 수도인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인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전쟁에 러시아와 독일이 참전했다. 영국과 러시아 이탈리아도 참전했다. 1918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자신은 정의로운 평화를 원하며 어느 민족이나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공표하자 많은 부대가 전쟁을 포기했다. 독일은 모든 식민지를 빼앗겼고 막대한 배상금을 전승국에 지불해야 했다. 이 전쟁으로 약 1100만 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세계 곳곳이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40. 나 자신이 체험한 세계사의 한 부분- 회고

 

앞 장은 1914년에 시작되어 1918년까지 벌어졌던 참혹한 제1차 세계 대전에 관한 얘기로 끝을 맺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내 나이는 불과 아홉 살이었다. 이 마지막 장에서는 내가 직접 경험한 일들을 약간이나마 들려주고 싶다. 히틀러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군인이었으며 선전술에 의해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정치 기술이라고 생각했다. 히틀러는 모든 불행의 책임을 덮어씌울 속죄양을 만드는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사람들을 선동할 방법은 없다는 점을 잘 알았기에 유대인을 속죄양으로 삼았다. 나치 추종자들이 유일한 범죄는 히틀러에 대한 배신이었고 유일한 미덕은 무조건적인 복종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에서는 관용이라는 것이 점차 자취를 감췄다. 이들 나라의 정치가들은 이른바 ’세계 분할‘에서 자국이 불이익을 입었다고 국민들에게 이야기했으며 자국은 원래부터 다른 민족을 지배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독일에서는 심각한 경제 공황으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자 가장 간단한 해결책은 전쟁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프랑스나 영국, 미국 같은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은 평화에 너무 기댄 나머지 이제는 유약해져서 방어 능력도 제대로 못 갖췄다는 것이 독일인들이 판단이었다. 1939년 9월 1일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했다. 히틀러는 선전과 선동이 가진 힘을 믿었다. 처음 2년 동안은 독일 측이 성공을 거두었고 히틀러의 믿음이 증명되는 것만 같았다. 1941년 12월 일본군이 선전 포고도 없이 미군 함대를 공격해서 섬멸 직전까지 몰고 가자 히틀러도 미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전쟁에서 독일군이 얼마나 끔찍한 범죄를 자행했는지는 당시의 우리도 독일 국민도 몰랐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마지막 몇 년 동안 독일군은 유럽의 모든 점령지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수백만의 유대인을 잡아냈으며 이들 대부분을 동유럽으로 이송해 살해했다. 미국 군수 산업의 거의 무한한 역량은 영국과 소련에 유리한 정세를 조성했으며 전쟁에 종지부를 찍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연합군은 1944년 여름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해서 독일로 쳐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러시아도 약화된 독일군을 밀어내면서 1945년 4월 마침내 베를린에 입성했고 히틀러는 자살했다. 일본이 여전히 버티며 가까운 시일 내로 전쟁이 끝날 것 같지 않자 미국은 원자 폭탄을 투입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1945년 8월 상상할 수 없는 대재앙을 입고 막대한 희생자를 냈으며 결국 일본은 항복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로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1945년 이후로 제3차 세계 대전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또 하나의 세계 대전은 세계사의 종말을 뜻할 것임을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은 인간을 몰락 직전까지 몰고 간 원흉이지만 전쟁의 참화를 빠르게 회복시킨 것 역시 과학과 기술 덕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더 나은 음식을 먹고 훨씬 더 건강하며 대체로 수명도 긴 편이다. 일찍부터 사람들은 ’황금시대‘를 꿈꾸어 왔다. 오늘날 이런 황금시대가 거의 실현되었다 할 수 있는데도 아무도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많은 곳에서 희생자가 발생하면 도움을 주려는 움직임이 있다. 이런 것이야말로 우리가 더 나은 미래를 희망해도 좋다는 하나의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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