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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몽고와의 전쟁

Jobs9 2023. 12. 11.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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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몽고의 접촉

 

1. 13세기 초 동북아시아의 정세

   (1) 몽고 : 징기스칸 1206년 몽고제국 건설 - 금에 압력

   (2) 거란 : 금에 약화에 자극 - 요하 상류에 대요수국 건설

   (3) 금의 장수 포선만노 : 두만강 유역 - 동진국

 

2. 거란의 침입과 강동(평양의 동쪽)의 역

   (1) 1차 침입 : 제천방면에서 김취려가 격퇴

   (2) 2차 침입(1219년 강동의 역) : 고려, 몽고, 동진국이 연합 격퇴 - 결과는 거란인의 집단 거주지인 거란장의 발생과 여 ∙ 몽 협약 체결(이에 따른 무리한 조공문제가 발생하였다)

 

 

몽고와의 전쟁

 

1. 배경 : 넓게는 몽고의 세계정복전의 일환으로 좁게는 동아시아에 대한 지배권 확보책의 하나로 이루어졌다 - 발단 은 고종 12년 고려에 온 몽고 사신 저고여가 과도한 공물을 수탈하여 돌아가던 중 압록강 너머에서 피살된 사건

 

2. 몽고의 고려 침입 : 몽고는 30여 년 동안 전후 6차례에 걸쳐 고려에 침입하였다.

   (1) 1차 침입(고종 18년, 1231) : 몽고의 살례탑 - 박서의 귀주성 전투 승리, 마산(경기도 파주)의 초적, 충주성의 지광수 노비군 잡류군의 승전 - 개경 포위와 강화성립 - 몽고 다루가치 설치와 72인 모두 피살 - 최우는 항전을 결의하고 강화도로 천도하였다.

   (2) 2차 침입(1232년 8월) : 강화도 정부의 환도와 그 선행조치로서 국왕과 최우의 몽고 입조 혹은 축륙 문제를 요구하였다 - 11월~12월 경기도 광주산성에서 민병의 승리와 12월 처인성에서 처인부곡민과 승려 김윤후의 활약에 의해 살례탑(김윤후의 화살에 의해서)이 죽음으로써 경기 이남 지역을 내려가지 못하고 회군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이 때 부인사의 대정경의 소실사건은 몽고의 선발부대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다.

   (3) 3차 침입(1235~1239) : 5년 동안의 장기간 침입 - 이는 수년 전 고려로부터 당한 패배를 보복하며 아울러 고려를 완전히 제압할 목적으로 대대적인 군사적 공세를 가한 것이었다 - 경기도 안성 죽주산성에서 민병의 승리 - 팔만대장경 각판이 시작되었다. 이는 몽고의 침략으로 인한 참담한 본토의 상황과 향후의 사태에 대한 깊은 우려 작업 추진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 황룡사탑 소실

   (4) 4차 침입(1247~1248) : 아모간 침입 - 원 황제 정종의 죽음을 계기로 고려에서 철수

   (5) 5차 침입(1253~1254) : 야굴 침입 - 충주성에서 김윤후(처인성 승첩이후 승려생활을 천산하고 무반으로서 관도에 올랐다)가 지휘하는 민병과 관노의 승전

   (6) 6차 침입(1254~1259) : 6년에 걸친 차라대 침입 - 최대의 전화로, 고종 41년(1254) 한 해 동안 몽고군에게 포로 된 자가 20만 6천명, 살육된 자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 한다 - 충주성 부근의 다인철소민의 승리 - 조휘, 탁청 등의 반부 사건을 계기로 동계의 화주 이북 15주가 이탈하여 1258년 쌍성총관부가 성립되는 등 동북면 방어체제가 와해, 최씨 정권의 붕괴 배경 속에서 고종 46년 4월 고려 태자 몽고를 향해 출발

 

3. 고려의 항전

   (1) 지배층은 가혹한 수취와 호화생활을 영위 : 강화천도 38년간 최우를 비롯한 집권층의 생활모습은 개경 시절과 다를 바 없었다. 최우는 궁궐과 버금가는 자신의 저택을 짓기 위해 대규모 공사를 벌였으며, 여기에 드는 비용으로 인해 농민들을 수탈하고 각종 공사에 동원하였다.

   (2) 대몽항전에 고려가 취한 일관된 전략은 입보책이었다 : 행정계통과 조직을 통하여 추진된 입보책은 섬이나 산성에 백성을 입보시킴으로써 기병 위주의 몽고군에게 어려움을 줄 수 있어 이 전략은 효과적이었다. 입보민의 지휘와 감독을 일선에서, 지휘는 대체로 지방수령이었고 지방민들이 크게 흩어짐이 없이 모여서 생존을 유지할 수 있었다.

   (3) 대몽항쟁의 특징

       ① 항전의 주체는 민중 : 하층의 농민과 노비, 즉 일반 백성이 항몽 전선의 주력을 이루면서 적극적으로 싸웠다 - 충주성의 방어전에서 양반들은 도망쳤지만, 노비 ∙ 잡류들이 끝까지 분전하여 몽고군을 격퇴시킨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고려가 몽고의 침입에 끈질기게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일반 민중들이 용감하게 대항하였기 때문이다.

       ② 최씨 정권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현상 유지에 급급하였다 : 최씨 정권은 정권유지에 부정적 영향을 줄지도 모르는 어떠한 변화도 용납하지 않으려 하면서 고식적인 항전의 형태를 지속시켜 나갔다.

       ③ 대몽항쟁을 통하여 민족의식이 고취되었다 : 일연의 삼국유사 및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는 민족의 귀일점을 찾아 연대의식이 강조되고, 문화적 자존의식을 표출시킴으로써 야만족에 대한 우월감이 강조되는 기운이 두드러졌다. 그리고 이규보의 대장경판군신기고문 가운데에도 강한 민족적 자존심이 나타나 있다.

 

4. 몽고 침입의 결과 : 장기간 전쟁으로 황룡사 9층 목탑, 부인사 대장경 등 수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아울러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민심은 이반되어 무신정권 붕괴의 요인이 되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몽고와 강화를 맺으려는 온건파가 득세하여 최씨 정권은 무너지고 전쟁은 끝이 났다. 몽고가 고려와 강화를 맺고 고려의 주권과 고유한 풍속을 인정한 것은 고려를 직속령으로 완전 정복하려던 계획을 포기한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고려의 끈질긴 항전의 결과였다.

 

5. 삼별초의 항전

   (1) 전개 : 승화후 온을 추대 -> 진도(용장성터, 배중손) -> 제주도 애월 항파두리성(항몽순의비, 김통정)의 거점을 이동하면서 경상도, 전라도의 해안지방을 장악하였다 - 삼별초의 4년간이나 장기적인 항쟁이 가능하였던 것은 몽고군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리적 이점과 몽고에 굴복하는 것에 반대하는 일반 민중들의 적극적인 지원 그리고 이 지역은 원래 무인정권의 경제기반이었기 때문이다.

     * 삼별초의 고려첩장 - 삼별초군이 1271년 진도에 있을 때 일본에 협조를 요청하는 외교문서를 보냈던 사실은 근래 일본에서 고려첩장의 고문서가 발견됨으로써 밝혀졌다

   (2) 개경 정부에 대한 반란(무신정권 몰락에 대한 반발), 고려 무인의 항몽 자주정신

 

 

자주성의 시련

1. 여 ∙ 원 연합군의 일본 정벌 : 고려가 몽고에 굴복한 후 최초로 받은 시련은 일본 정벌에 동원된 일이다. 원은 고려로부터 선박, 식량, 무기를 비롯한 전쟁물자와 함께 군대와 선원등 인적 자원도 징발하였다. 오랜 전란에 시달린 고려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었다

     - 일본 가마쿠라 바쿠후의 저항과 태풍, 고려의 미온적 태도 때문에 실패

   (1) 1차 정벌(충렬왕 즉위년 1274) : 1271년 합포(마산)에 군량의 확보를 위한 명목으로 둔전을 설치하고 그 경영을 위해 둔전경략사 설치 - 고려의 김방경과 원의 혼도

  (2) 2차 정벌(충렬왕 7년 1281) : 1280년(충렬왕 6년)에 정동행성(정식 명칭은 정동행중서성)을 설치, 정동(征東)이란 일본 정벌을 뜻하는 것이고 행중서성(行中書省)은 지방 파견관을 뜻하였는데 그저 정동행성으로 약칭되었다 - 고려의 김방경, 원의 혼도, 강남군의 법문호

       * 고려에는 원의 관청이 설치되어 내정을 간섭하였다. 원은 처음에 일본 정벌을 위하여 고려에 정동행성을 설치하더니, 일본 정벌을 단념한 후에도 이를 존속시켜 고려 통치의 관부로 삼았다. 그러나 실제로 정동행성의 장관인 좌상(승상)은 자동적으로 고려왕이 겸하였고 그 밑의 관원도 고려왕이 임명한 고려인으로 채워져 정동행성은 명의상, 형식상의 존재에 불과하였고, 다만 원과 고려 사이의 의례적인 행사를 맡았을 따름이었다.

        * 원은 일본 원정을 준비하기 위하여 설치했던 정동행성을 계속 유지하여 연락 기구로 삼고, 군사적으로는 만호부를 설치하여 고려의 군사조직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2. 영토의 상실 : 동령부는 충렬왕 16년 반환 - 탐라총관부는 충렬왕 27년 반환 - 쌍성총관부는 공민왕 때 유인우가 무력 탈환하였다.

   (1) 쌍성총관부(영흥, 철령이북, 1258~1356) : 고종 45년 조휘, 탁청 배신, 원 직할통치

   (2) 동령부(서경, 자비령이북, 1270~1290) : 원종 11년 최탄 배신, 원 직할통치

   (3) 탐라총관부(제주도, 1273~1301) : 원종 14년, 일본 정벌 준비를 위해 목마장 설치

 

3. 관제의 변화(충렬왕)

   (1) 2성 -> 첨의부 -> 도평의사사(1293년 첨의부로 개정)

   (2) 6부 -> 4사 -> 6조(충선왕)

   (3) 이부 ∙ 예부 -> 전리사

   (4) 호부 -> 판도사

   (5) 병부 -> 군부사

   (6) 형부 -> 전법사

   (7) 공부 -> 폐지

   (8) 중추원 -> 밀직사 -> 광정원(충선왕), 

   (9) 어사대 -> 감찰사

   (10) 국자감 -> 국학 -> 성균관

 

4. 호칭의 격

   (1) 조 ∙ 종 -> 왕, 충성을 뜻하는 충

   (2) 선지(宣旨) -> 왕지(王旨)

   (3) 짐(朕) -> 고(孤)

   (4) 폐하(陛下) -> 전하(殿下)

   (5) 태자(太子) -> 세자(世子)

   (6) 문하시중 -> 첨의중찬

   (7) 상서(6부 장관) -> 판서

   (8) 시랑(6부 차관) -> 총랑

 

4. 원의 내정간섭 : 제후국으로의 강등, 혼인정책과 분열정책, 입성론과 노비개혁론

   (1) 정동행성(충렬왕~공민왕) : 원과 고려사이의 연락 기구, 의례적 행사를 맡았다.

       ① 이문소(理問所) : 정동행성의 속관으로 고려와 원 관계와 관련되는 범죄를 단속하는 일을 했으나 차츰 부원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구로 변질되어 고려인의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② 순마소(뒤에 순군만호부 → 의금부) : 경찰과 근위의 일을 맡아보게 하고 멋대로 고려인을 체포 ∙ 구금 ∙ 처벌케 하였다.

       ③ 만호부 : 군사적으로 만호부를 설치하여 고려의 군사조직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2) 원의 고려에 대한 내정정책과 분열정책

       ① 입성책동(立省策動) : 원의 내지에 설치된 여러 행성과 마찬가지로 체제를 개편하여 한 국가로서 고려를 말살시키려 한 책동으로 충선왕 4년(1312), 충숙왕 10년(1323)에 있었다.

       ② 원에 의한 국왕의 교체 : 원의 황실 및 재상들의 영향력이 고려 왕위 계승에 강하게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 그 연장선상에서 입성문제까지 제기되게 되었던 것이다.

       ③ 왕족의 혈족혼을 비난하고, 원의 법속까지 따르도록 하였다.

       ④ 부원세력 육성 : 외교에 따른 통역관 층, 조병(助兵)에 따른 군관 층, 공물요구에 따른 응방관료 층, 왕실의 혼인에 따른 겁령구 층(怯怜口層, 원의 공주 시중을 드는 사속인) 등

       ⑤ 노비제도 개혁

          ㉠ 배경 : 고려 지배층의 경제적 기반과 사회 신분 수조를 재편성하여 궁극적으로 원의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하여 고려를 원의 본토와 동일하게 하기 위한 조치로 보고 있다.

         ㉡ 내용 : 일천즉천(一賤則賤)을 일양즉양법(一良則良法)으로 시행하려 하였다.

         ㉢ 결과 : 노비개혁은 상당한 수준으로 진전되었지만, 고려 정부 존립을 흔드는 것이었기 때문에 고려 정부와 노비 송주의 반발을 받아 실패하고 말았다.

       ⑥ 심양왕 제도(최초는 충렬왕과 충선왕의 두 설) : 고려왕의 견제 및 분열정책 그리고 심양과 요양에 유망해 온 고려민의 농업노동력의 이용과 통제의 편의를 위해서 - 원에 진출해 있던 고려인 세력이 고려왕과 심양왕으로 갈라지면서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게 되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입성문제까지 제기되기도 하였다. 즉 충선왕의 조카 고(심양왕)와 충숙왕 및 충혜왕 사이에 고려 왕위계승분쟁이 일어나는 등 분열정책이 어느 정도 성공하여 고려의 내부 분열을 일으키는 원흉이 되었다.

   (3) 부마국 : 무신집권자들에 의해 추락된 왕권을 회복시키기 위해 원종은 원의 후원을 받고자, 여 ∙ 원 왕실 간의 혼인을 요청하였고, 원 세조의 대 고려 회유정책에 의해 수락되었다. 원은 이를 통해 고려왕실의 감시, 국왕의 자주적 성향 견제 그리고 내정 간섭을 효과적으로 도모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고려 왕위 여탈이 그들의 마음대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4) 독로화 : 고려 세자의 인질제도

 

5. 정치적 영향 : 자주성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원의 압력과 친원파의 역할로 인해 고려의 정치는 크게 왜곡되었다. 왕권 이 원에 의지하여 유지됨은 물론 통치 질서가 무너져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6. 경제적, 인적 착취

   (1) 경제 : 일반 조세 외에 원에 대한 금, 은, 포, 곡물, 자기, 나전칠기, 인삼 등의 공물까지 부담하여 농민의 2중 부담이 발생하였고, 사냥에 필요한 해동청(매)을 요구하여 응방(鷹坊)이라는 관청이 설치되어 갖가지 민폐를 일으켜 큰 원성을 불러 일으켰다.

   (2) 인적 : 처녀, 과부, 환관 요구 - 결혼도감, 과부처녀추고별감이 설치되었고, 백성에게 큰 고통을 주었으며, 이후 조혼 풍속이 생겼다.

 

7. 원 간섭기 고려의 천명사상 : 고려 왕조는 고려 후기에도 천명을 받은 왕건이 창건한 왕조임을 자명한 전제로 이해하여 천자국으로서의 의례를 시행하였다. 원의 간섭과 요구가 심했음에도 천자만이 행한다는 제천의례 혁파론은 제기되지 않았다. 충렬, 충선, 충숙, 공민왕대에 이르기까지 종묘사직과 아울러 원구제 시행이 빈번했다.

 

8. 문물의 교류

   (1) 언어 교류 : 왕실이나 상류층에서는 몽고식 이름을 갖고 몽고어를 사용하였다(관직, 인명, 일상용어 - 치, 수라)

   (2) 풍속의 교류

       ① 몽고풍(고려에서 유행) : 체두변발, 족두리, 연지, 곤지, 장도

       ② 고려양(몽고에서 유행) : 아청(고려의 의복), 고려병(떡), 생채(보쌈)

   (3) 문화의 전래

       ① 종교 : 라마불교, 도교, 강남불교 등이 수용

       ② 농업 : 원의 농서 농상집요를 이암이 소개하였으며, 이앙법이 소개되었다. 목면의 전래(문익점의 전래와 그의 장인 정천익은 재배에 성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씨아와 물레를 만들었다)

       ③ 원을 통한 이슬람 과학 : 천문, 역법, 수학, 건축, 의학, 기상, 지리학 등 - 고려  말의 과학발전과 농업발전에 기여하였다.

       ④ 성리학, 조맹부체(송설체), 탑(경천사지 10층 석탑), 수시력, 화약(최무선이 원의 상인 이원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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