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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대외 관계, 북진 정책과 친송 정책, 거란의 침입과 격퇴, 여진정벌과 동북9성

Jobs 9 2023. 12. 11.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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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대외 관계의 변천

 

북진 정책과 친송 정책

1. 국제 정세의 변동

   (1) 중국 : 5대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 10국의 분열 시대

       ① 후백제 : 거란, 오월, 일본과 연결

       ② 고려

          ㉠ 태조 : 후량, 후당, 후진과 연결, 후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나주(금성)를 점령

          ㉡ 혜종 : 후진과 연결

          ㉢ 정종 : 후한

          ㉣ 광종 : 후주, 송

   (2) 거란의 성장 : 916년 거란의 건국 → 918년 고려 건국 → 926년에 발해를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웠다 → 936년 거란은 후진의 건국을 후원하고 연운 16주를 획득하였다 → 946년 국호를 요로 고쳤다 → 986년 압록강 유역의 정안국을 멸망시켰다.

   (3) 송의 건국(960, 고려 광종)과 통일(979, 고려 경종) : 연운 16주 회복을 위한 북벌을 시도 → 송과 거란의 충돌 → 993년 거란의 고려 1차 침입 → 1004년 송과 요의 강화조약(전연의 맹약) → 1010년 거란의 2차 침입

 

2. 고려의 대송관계

   (1) 친송 정책 : 송은 고려에 대한 외교가 정치적 ∙ 군사적 목적에 있었는데, 고려의 대송외교는 경제적 문화적 목적에 있었다. 따라서 송의 국자감에 유학생을 파견한다거나, 의술이나 약재를 수입한다거나, 불경 ∙ 경서 ∙ 사서 등의 서적 구입에 고려는 열심이었다.

   (2) 군사적 개입을 피하는 중립의 태도를 견지하였다 : 송과 금의 분쟁인 인종 6년(1128)에 제기된 가도문제(假道問題, 정강의 변 때 납치된 휘종, 흠종의 구출문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송은 거란을 치려고 고려에 군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고려는 형식적으로 군대를 출동시키는 시늉만 하면서 송과 관계를 유지하였다.

        * 고려의 문화발달은 송나라에도 알려져 고려사신을 조공사로 부르지 않고 송과 대등한 국신사로 격상시켜 극진히 우대하였다. 송에서도 글 잘하는 인물을 골라 고려에 사신을 보냈다. 송에 건너간 박인량, 김관의의 시문이 송나라 학자들의 찬탄을 받아 소화집이라는 이름으로 송인이 간행해 주었다.

   (3) 송인의 고려 소개 : 손목의 계림유사,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 - 계림유사는 1103년(숙종8년)에 서장관으로서 사신을 수행하여 고려에 온 북송의 손목이 편찬한 일종의 견문록이며 역어집으로 당시 고려조의 조제, 토풍, 구선, 각석 등과 함께 고려어 약 360어휘를 채록하여 3권으로 분류, 편찬한 책이다.

 

 

거란의 침입과 격퇴

1. 원 인 : 거란과 송의 대립 속에서 고려의 북진정책과 친송정책

 

2. 거란군의 퇴치

   (1) 1차 침입(성종12년, 993)

       ① 소손녕의 침입 : 할지론 대두 - 서희의 반대

       ② 서희의 담판 : 친송 관계를 끊고 거란과 적대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강화 - 흥화진(의주), 용주(용천), 통주(선주), 철주(철산), 귀주(귀성), 곽주(곽산) 등의 강동 6주 획득하여 압록강 하류까지 영토 확장 → 전연의 맹약(1004)으로 거란과 송의 강화조약이 성립되었으나 고려가 송과의 외교관계를 유지하자, 거란은 고려에 강동 6주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고려는 이를 거절하였다.

   (2) 2차 침입(현종1년, 1010) : 강조의 정변 구실 → 거란 성종의 40만 대군 침입 → 강조가 통주에서 패배 → 현종은 나주로 피난 → 현종의 입조 조건으로 거란 퇴군 → 양규의 귀주 승리와 전사

   (3) 3차 침입(현종9년, 1018) : 현종의 입조와 강동 6주 반환을 요구 - 소배압의 10만군이 침입하였으나, 강감찬의 귀주 대첩

 

3. 결 과

   (1) 고려의 힘으로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 유지

   (2) 강화 성립 : 강동 6주를 고려의 영토로 인정하고 거란과 수교, 송과 단교 약속 - 그러나 송과 경제 문화 관계는 지속하였으며 정치적 관계는 문종 때 회복되었다.

   (3) 거란장 발생

       * 거란과 전쟁을 전후하여 포로로 잡혔거나 투항해 온 거란인은 수만 명에 이르며, 이들은 집단적으로 부락을 형성하여 노래와 춤, 그리고 잡희로 생활을 하였다. 이들이 기생과 재인(광대)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4) 개경에 나성을 축조 : 강감찬 건의와 왕가도의 감독 하에 현종 20년(1029)에 완성

   (5) 천리장성 : 덕종2년(1033)~정종10년(1044) 완성 - 확장된 영토를 지키면서 거란과 여진에 대비하기 위하여 유소의 감독 하에 압록강 어귀에서 영흥 도련포까지

   (6) 감목양마법(군마의 확보), 구분전, 면군급고법(노부모 모신 장정의 면군), 주창수렴법

   (7) 문화시책 : 7대 실록, 초조대장경판

 

 

여진정벌과 동북9성

1. 여진의 침입

   : 12세기 초 만주 하얼빈 지방에서 일어난 완옌부 여진의 영가, 오아속 등이 여진족들을 통합하면서 남하 - 숙종 때 정주에서 충돌, 고려의 패전

 

2. 윤관의 여진 정벌

   (1) 숙종 : 별무반 (기병인 신기군, 보병인 신보군, 승병인 항마군) 편성

   (2) 예종

       ① 여진정벌과 사민을 실시 : 1107년에 윤관(원수), 오연총(부원수)으로 하는 17만의 고려군이 여진을 정벌하고, 그 땅에 함주를 중심으로 9성을 쌓고 사민정책을 실시하였다.

       ② 9성의 위치 : 길주설, 두만강 공험진설

       ③ 9성 환부의 배경

          ㉠ 여진의 환부 애원과 거처를 잃은 여진족의 끊임없는 침략으로 인한 방비의 곤란

          ㉡ 서북쪽 거란에 대한 경계의 필요성

          ㉢ 윤관의 공에 대한 시기와 고려사회의 보수성

 

3. 9성 환부의 결과

   (1) 금의 성장 배경 : 고려에 외교적 압력을 가함 - 정권안정 유지와 평화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이자겸의 사대외교와 김부의(김부식의 동생)의 사대론(새롭게 등장한 금에 대한 사대를 주장하여 현실을 인정하고 합리화하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2) 북진정책 사실상 중단 : 귀족사회의 내부 분열 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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