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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원왕(故國原王), 고구려 제16대(재위:331~371) 왕

Jobs 9 2021. 5. 1.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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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고구려 제16대(재위:331~371) 왕.

국원왕(國原王) 또는 국강상왕(國岡上王)이라고도 하며, 한때 ‘소열제(昭烈帝)’라 칭하기도 하였다. 이름은 사유(斯由) 혹은 유(劉)·쇠(釗)이다. 아버지는 미천왕(美川王), 어머니는 주씨부인(周氏夫人)이다. 314년(미천왕 15) 정월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331년 2월미천왕이 승하하자 즉위하였다.

고구려는 미천왕대에 이어 요동지역 확보를 위해 선비족(鮮卑族)의 일파인 모용부(慕容部)의 국가 전연(前燕)과 심각한 대립 관계에 놓여 있었다.

336년동진(東晉)에 외교사절을 파견한다든지, 338년 전연 공격에 실패한 후조(後趙)와의 연결을 꾀하는 등 외교전에서의 우위 확보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336년모용황(慕容皝)의 즉위에 반대해 일어난 ‘모용인(慕容仁)의 난’(333∼336)에 가담했던 곽충(郭充)과 동수(冬壽)가 도망쳐 오자 이들을 받아들였다. 338년 후조의 전연 공격시 후조에 내통했던 봉추(封抽) 및 송황(宋晃) 등이 역시 투항해 오자 이들을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한편 335년 제3현도군 지역을 차지하고 그 곳에 신성(新城)주 01)을 축조했는가 하면, 342년 국도인 국내성(國內城)을 증축하여 전연과의 대결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후조 및 요서 지방의 선비족 일파인 우문부(宇文部)를 격파하고, 342년 기습 공격을 감행해 온 모용황의 침략을 받았다. 결국 고구려의 국도는 함락·파괴되고 선왕의 시신 및 왕모 주씨는 인질로 잡혀가는 한편, 왕 자신은 단웅곡(斷熊谷)으로 피신하는 등 일대 국난을 당하였다. 이 때 전연은 중원으로 진출하기 전에 먼저 배후의 위험요소인 고구려를 공격한 것이다.

그러나 비록 큰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전연 역시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사로잡지 못했고, 북도(北道)로 들어간 전연군을 궤멸시킨 고구려의 주력부대가 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빠르고 안전하게 철수해야만 했다. 이에 미천왕의 시신 및 왕모와 왕비, 기타 5만여 구의 인질을 잡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인질은 이후 전연이 중원으로 진출하는 데 있어 고구려라는 배후를 안정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 되기도 했다.

이 패배 후 고구려는 343년 국도를 평양 동황성(東黃城)으로 옮기는 한편, 전연에 사절을 파견해 스스로 신하를 칭하기도 했다. 그 결과 미천왕의 시신은 돌려받았지만 여전히 왕모는 전연에 억류된 상태였다. 이는 양국 사이에 대립이 지속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대립은 345년모용각(慕容恪)이 남소성(南蘇城)을 점령한 뒤 346년 부여를 공격하고, 다시 원부여 지역으로 진공하다가 고구려에 의해 저지를 당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349년 고구려로 투항해 왔던 송황을 다시 전연으로 돌려보내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왕모 주씨는 억류된 상태였다. 전연은 352년 후조를 멸망시키고 화북일대를 장악한 뒤 황제국을 표방하였다. 이후 전연은 강남의 동진, 관중의 전진(前秦)과 대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고구려와 계속 대립할 수 없었고, 고구려 역시 황제국인 전연의 재침공시 생존권을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현실적인 상황에서 양국은 상호 인정하는 형태로 조공·책봉 관계를 맺게 된다. 즉, 고구려는 355년 전연으로부터 ‘낙랑공고구려왕(樂浪公高句麗王)’에 봉해짐과 동시에 ‘영주제군사 정동대장군 영주자사(營州諸軍事征東大將軍營州刺史)’라는 관직을 받았으며, 이와 함께 13년간 억류되어 있던 왕모 주씨도 송환되었다. 그 뒤 전연이 중원 장악에 주력함에 따라 370년 전연이 멸망할 때까지 고구려와 전연과의 관계는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370년 전진이 전연을 격파하고 고구려와 경역을 접하게 됨에 따라 고구려는망명해 온 전연의 권신 모용평(慕容評)을 전진으로 압송하는 등, 전진과의 우호 관계의 수립에 노력하였다.

한편, 왕은 한반도 중부지역으로의 진출을 꾀해 대방군(帶方郡) 지역으로 북진하고 있던 백제와 격돌하게 되었다. 이것은 전연과의 전투 이후 대외 진출의 방향을 남쪽으로 선회한 것이었다. 왕은 369년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침공했으나, 치양(雉壤)주 02) 전투에서 백제 태자 근구수(近仇首)가 이끄는 군사에 패배하였다. 371년 10월 고구려 깊숙이 진격해 온 백제 근초고왕군을 맞아 평양성에서 싸우다가 유시(流矢)에 맞아 전사해 고국원(故國原)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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