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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왕(景德王), 통일신라 제35대(재위:742~765) 왕

Jobs 9 2021. 5. 1.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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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35대(재위:742~765) 왕.

 

재위 742∼765.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헌영(憲英). 제33대 성덕왕의 셋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소덕왕후(炤德王后)이다. 효성왕의 동모제(同母弟)이다.

효성왕이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왕비는 이찬(伊飡) 김순정(金順貞)의 딸이다. 743년(경덕왕 2) 다시 서불한(舒弗邯) 김의충(金義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경덕왕 때에는 신라 중대 왕실의 전제왕권이 새로운 귀족세력의 부상으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경덕왕은 왕권의 재강화를 위한 일련의 관제정비와 개혁조치를 취하였다. 개혁정치의 주역은 경덕왕과 신라 중대에서 행정책임자였던 집사부의 중시였다.

744년 이찬 유정(惟正)이 중시에 임명된 이래, 대정(大正)·조량(朝良)·김기(金耆)·염상(廉相)·김옹(金邕)·김양상(金良相) 등 7인이 중시를 역임하였다. 특히, 747년 중시의 명칭을 ‘시중(侍中)’으로 변경하고, 국학에 제업박사(諸業博士)와 조교를 두어 유학 교육을 진흥시켰다.

748년에는 정찰(貞察) 1인을 두어 백관을 규찰하게 함으로써, 왕을 정점으로 하는 전제왕권 체제를 유지하려 하였다. 이 밖에도 749년에는 천문박사 1인과 누각박사(漏刻博士) 6인을, 758년에는 율령박사 2인을 두었다.

이것은 모두 위민 의식에 바탕을 둔 이상적인 유교정치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기술적인 분야에 대한 제도적인 배려였다. 경덕왕의 개혁적 제도정비는 귀족세력을 제어하면서 전제왕권 체제를 강화하려는 일종의 한화정책(漢化政策)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화정책 추진은 745년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에 임명된 김사인(金思仁)에 의해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는 756년 상소를 통해, 근년의 빈번한 천재지이를 들어 현실정치의 모순에 관해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시중에 대해서 정치적 책임을 물었다.

이 때의 비판 내용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다. 아마도 경덕왕에 의해 추진되던 한화적 개혁정치가 비판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김사인의 비판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757년 병을 이유로 상대등에서 물러났다. 대신 왕의 측근인 이찬 신충(信忠)이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755년 시중으로 임명되어 김사인의 비판을 받았던 김기가 오히려 757년부터는 적극적인 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즉, 757년에는 지방 9개주의 명칭을 비롯한 군현의 명칭을, 759년에는 중앙관부의 관직명을 모두 중국식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덕왕과 집사부 중심의 한화적 개혁정치는 중대의 전제왕권 체제를 재강화해 연장시키려는 정치적 노력이었으나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혜공왕 때에 이르러서는 모두 옛 명칭으로 환원됨으로써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이것은 혜공왕 때에 귀족세력의 정치적 비중이 전제왕권보다 높아지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전제왕권을 유지하려는 경덕왕의 노력은 전제왕권을 정착시킨 성덕왕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거대한 성덕대왕신종을 조성하기 시작한 데에서도 잘 나타난다.

경덕왕은 당나라와의 관계에서는, 재위 동안 전통적인 방법인 조공과 하정(賀正)의 사신을 11회나 파견함으로써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한편, 일본과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즉위하던 해와 753년에 일본의 사신이 이르렀으나 오만하고 무례하므로 왕이 접견하지 않고 돌려보냈다고 전한다.

757년 내외관리의 월봉을 혁파하고 다시 녹읍을 부활시켰다. 이것은 새로이 성장하는 귀족세력의 경제적인 욕구가 지금까지 세조(歲租)만 받던 월봉을 혁파하게 하고, 녹읍의 부활을 제도화시킨 것이라 하겠다.

경덕왕 말기에 정치적으로 성장한 귀족세력은 763년에 경덕왕의 측근세력이었던 상대등 신충과 시중 김옹을 면직시켰다. 왕당파인 이들의 면직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기록상에 나타나지 않으나, 전제왕권에 대한 귀족세력의 반발의 결과로 보인다.

이러한 추측은 김옹이 물러난 뒤 약 4개월의 공백기를 거쳐, 764년 만종(萬宗)과 양상이 각각 상대등과 시중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여기서, 양상은 나중에 상대등으로서 혜공왕을 시해하고 신라 하대의 첫 왕인 선덕왕으로 즉위하는 인물로서, 경덕왕 때에 이미 귀족세력을 대표하고 전제왕권에 도전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경덕왕 말년의 정치는 재강화에 실패한 전제왕권과 귀족세력의 정치적 타협 위에서 존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지사(牟祗寺) 서쪽 언덕에 장사 지냈다고 하는데, 왕릉은 경주시 내남면 부지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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