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 국어/현대문학

결혼, 이강백, 단막극, 풍자극, 실험극

Jobs 9 2022. 5. 17. 00:54
반응형

결 혼

이강백

● 줄거리
빈털터리 사기꾼이 갑자기 결혼이 하고 싶어졌다. 결혼에 대해 간절히 소망하자 드디어 꿈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저택과 하인과 부자로 보일 만한 여러 소품들을 빌리는 데에 성공을 하게 된다. 다만 빌린 물건들은 모두 제한 시간이 있어서 그 시간이 되면 다시 돌려주어야 한다. 
먼저 여성 잡지에 실린 <사교란>에서 여자를 골라 맞선을 보기로 하였다. 맞선을 보기로 한 여자를 기다리는 사이에 이미 '책'은 빼앗기게 되고, 드디어 여자를 만났다. 여자를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빌렸던 물건들을 하나씩 하나씩 되돌려 주어야 했고, 빼앗는 역할은 하인이 맡게 된다. 라이터, 구두, 넥타이, 소지품, 구두, 결국에는 저택까지 빼앗기게 된다.
빌린 물건들을 되돌려주는 동안에 여자는 하인의 무례함을 탓하기도 하고, 남자의 겸손함과 진심에 빠져들 게 된다. 남자가 빈털터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결국에는 남자의 청혼을 받아들이게 된다. 

 

● 감상 및 이해
◆ 이강백의 초기 작품인 <결혼(1974)>은 카페 떼아뜨르에서 '자유극장'에 의해 초연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남자'는 자신을 가능한 한 부유학 화려하게 치장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벌여놓은 후, 결혼 상대가 될 '여자'를 초대한다. 그러나 그 빌린 물건들은 제한된 짧은 시간 안에 돌려주어야 하므로 '여자'와 만나는 동안 '남자'는 점점 빈털터리가 되어간다. 결과적으로 '남자'는 사기꾼의 실체를 드러내지만, '여자'는 그런 '남자'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 하인의 존재와 역할 → 하인은 대사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존재를 지문에 씌어진 행동을 통해서만 인식이 가능하다. 하인은 남자가 빌린 물건의 시간이 지나면 무뚝둑하고 기계적인 태도로 그 물건을 빼앗아 버린다. 극에서 계속적으로 등장하는 중심 개념인 시간의 역할을 하인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대한 방증으로 하인은 쟁반만큼이나 큰 회중시계를 들고 있다. 그리고 남자가 빌린 물건을 빼앗는 것에 대해 항의할 때는 시계를 보여주며 남자를 수긍시킨다. 즉, 물건과 시간을 관리하는 것이 바로 하인의 역할이다. 
◆ 소품의 기능과 효과 → 작가 노트에 명시되어 있듯이 이 작품에 쓰이는 소품은 관객들의 것이다. 다분히 감정적이고 심리적인 것이지만, 연극에서 자신이 사용하는 소유물이 남자의 몸에 있을 때, 여기서 관객은 남자와의 동일시에 한층 더 빠져들 수 있다. 중요한 의미는 등장 인물에 착용된 효과이기보다는 일정한 시간이 지나서 하인에게 빼앗기는 순간이다. 자신의 눈에 익은 물건이 빌린 시간이 지나서 하인에게 매몰차게 빼앗길 때의 상황은 원주인인 관객에게 극의 의미를 더욱 적극적으로 사고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물건을 빼앗기는 느낌은 하인뿐만 아니라 남자에게서도 관객은 극중에서 받게 된다. 
◆ 관객을 상대로 한 극적 행위 → 우리나라의 전통극인 마당극의 특징적인 요소가 '관객을 상대로 한 극적 행위이다. 남자는 초조하거나 극속의 상황이 답답할 때, 무대 밖의 관객에게 하소연하거나 동의를 구한다. 남자는 태연히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깨고 관객석에 난입한다. 그것도 모자라 여성 관객에게 말을 걸고 어여쁘다고 농을 걸기까지 한다. 이는 극의 유머러스한 분위기나 극의 흥을 더해주는 기능으로 보아도 마당극의 행위와 유사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잘 만들어지지 않으면 쉽게 지루해질 수 있는 희극의 긴장을 높이고, 관객의 극에 대한 집중력을 높이는 행위이다. 또한 관객들의 소유물을 이용한 소품과 마찬가지로 극이 자신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느 정도 자각하게 만드는 역할도 두루 하고 있다. 
◆ 남자와 여자의 관계 → 여자는 자신을 '덤'이라 하고, 남자는 자신이 모든 것을 잠시 '빌린 것'이라고 말한다. 이 둘은 세상에 '덤'으로 혹은 잠시 '빌린 것'으로 나온 것이다. 이 극에 나온 남자와 여자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남자와 여자의 우의인 것이다. 결국 작가가 남자와 여자의 존재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들은 모두 잠시 '덤'을 나와 있는 것이니,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빌린 것에 너무 의미를 두지 말고 잘 아꼈다가 시간이 되면 꼭 돌려주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존재는 '덤'이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은 '빌린 것'이라면 우리는 무엇에 의미를 두고 살아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이강백이 극의 끝에서 표현되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통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 여자가 남자의 청혼을 수락하는 이유와 주제의식 → 작품의 마지막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남자가 사기꾼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어머니에게 오른손을 들어 한 맹세까지 저 버리고) 여자는 남자의 청혼을 수락한다. 그것은 '덤'과 '빌린 것'들로만 이루어진 인생에서는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을 돌려주어야 하기에, 이러한 인생을 더욱 값지게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참되고 영원한 '사랑(결혼)'이라는 깨달음을 여자는 얻은 것 같다. 결국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온통 빌린 것과 덤으로만 이루어진 우리네 인생을 더욱 값지고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는 사랑(결혼)을 하라는 것이다. 

 

● 정리하기
- 성격 및 갈래 → 단막극, 풍자극, 실험극
- 인물
* 남자 → 이야기책 속의 주인공이자 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가난한 사기꾼으로 처음에는 결혼을 하기 위해 부자처럼 보이게 하는 물건을 빌리지만, 그것들을 다 빼앗긴 후 소유의 본질과 헌신적 사랑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결혼을 위해 여자를 설득한다.
* 여자 → 처음에는 결혼의 조건으로 물질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남자의 설득으로 진정한 사랑에 대해 눈을 뜨고 결혼을 받아들이다.
* 하인 → 한 마디의 대사도 하지 않으면서 남자에게 시간의 경과를 알리고, 빌린 시간이 끝난 물건들을 하나씩 회수한다. 그 과정에서, 물건을 뺏기지 않으려 하는 남자와 희극적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고, 관객들로부터 소도구를 빌려오는 역할도 한다.
- 주제 → 소유의 본질과 진정한 사랑(결혼)의 의미
- 특성
1) 우의적인 기법을 사용하여, 소품 하나까지도 세밀하게 상징화함.
           (빌린 집 : '인생'의 우의,   하인 : '시간'의 우의)
2) 소품의 기능과 효과
    → 소품은 관객의 물건으로, 관객으로 하여금 극적 의미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고하게 함.
3) 관객을 상대로 한 극적 행위
    → 전통극인 마당극의 특성으로, 극의 긴장도를 높이고 관객의 집중도를 높이는 행위
4) 인물의 상징성
     * 남자, 여자 → 현세를 살아가는 모든 여자와 남자를 상징
     * 하인 → 우리의 인생에 주어진 '시간'의 상징
                   물건과 시간을 관리하는 존재
                   대사 없이 행동을 통해서만 인식하게 하는 존재
5) 무대장치나 조명, 특수효과가 거의 필요없으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 장소에 모인 사람들이다.

● 참고자료
◆ '결혼'에 나타난 실험적 기법과 그 효과

항목 내용 및 효과
무대장치 일반적인 희곡과 달리 이 작품은 특별한 무대 장치 없이 소극장이나 응접실 등에서 행해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와 같은 무대 장치를 통해서 관객이 극중 인물에 대해 친밀감을 느낄 수 있게 되며, 관객의 극중 참여를 유도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상징적 소재와 인물의 행위 시간을 상징하는 회중시계를 소재로 활용하고 시간의 경과에 따라 하인이 물건을 회수하는 등 상징적 장치를 사용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인간의 삶을 둘러싼 모든 것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려 주어야 한다는 주제 의식을 전달하게 되는데, '빌리다'라는 어휘의 반복 사용을 통해 이러한 주제 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배우의 대사 주인공이 어떤 이야기책을 읽는 데서 대사가 시작되는데, 그 책의 내용과 극중 사건이 일치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관객에게 극중 상황을 자연스럽게 알려 주는 효과를 얻게 된다. 또한, 등장 인물이 관객에게 질문을 하는 등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기도 한다.
관객의 역할 관객의 물건을 연극의 소품으로 활용하기도 하고, 사건 전개 과정에서 관객을 증인으로 내세우기도 한다. 이는 관객이 연극에 동참하여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효과뿐 아니라 극중 인물의 가치관과 정서를 드러내며 극적인 리듬을 조절하게 된다. 그리고 관객은 소유의 절대성이 약화되는 경험을 하는 등 작품의 주제를 보다 실감 있게 느끼게 된다.




◆ '결혼'에서 '시간'의 기능
'결혼'은 시간에 관한 희곡으로 볼 수 있다. 시계로 측정되는 물리적 시간이 극을 끌어가는 기본 축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극에 나타난 시간 경험 자체가 극 구조에 중요한 역할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혼'에서 극중에 설정된 시간은 실제 극이 상연되는 시간의 길이와 일치한다. '결혼'은 남자 주인공이 저택을 빌린 '45분간'의 시간 동안 진행된다. 그리고 45분이 다 하고 남자 주인공이 쫓겨나는 순간 끝을 맺게 된다. '결혼'에 사용되는 대부분의 소품은 결말을 향해 긴장을 가속화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의 흐름을 무대에서 사라지는 물건들의 움직임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가시화한다. 즉, 이 극에서 소품은 단순히 소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극의 주제 의식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의미로서 작용하고 있다. 이 극에서 '시간'이라는 단어는 남자 주인공에 의해서만 23번 사용된다. 이는 물리적 시간이 남자 주인공에게 억압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자는 시간에 대해 초조해 하고, 강박 관념을 느끼며 마치 시간의 대리자 역할을 하고 있는 하인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 한다. 


◆ '결혼'의 주제의식
'결혼'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엇인가를 빌렸다가 되돌려 준다는 데 가장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젊음, 생명, 자연 현상들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빌리고 또 되돌려 주어야 할 것들로 형상화해 놓았다. 그 밖에도 이 작품에서 '시간 속에서 빌림 · 되돌려 줌'의 모습을 띠고 나타난 것으로 애정, 특히 남녀 간의 사랑을 들 수 있다. 아마도 작가가 이 작품 속에서 가장 공들여 형상화하고자 했던 '시간 속에서의 빌림 · 되돌려 줌'의 모습은 바로 이것이었을 것이다. 작품의 표제가 보여 주고 있듯이 이 작품은 남녀 간의 사랑과 결합 양식에 일차적인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참된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숙고하게 만드는, 어찌 보면 미처 덜 다듬어진, 그러면서도 인간의 삶의 모습을 아름답게 형상화한 희극이라 평할 수 있겠다.  

 

◇ 대본읽기

등장 인물

 

남자

여자

하인

 

작가 노우트

이 작품은 응접실 또는 아담한 소극장 같은 곳(관객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기에 용이한 무대), 그런 실내에서 공연하기 알맞도록 썼다. 음악으로 비교한다면 실내악 같은 것이다.

무대를 따로 만들 필요도 있지 않고 별다른 조명이나 효과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 장소에 모인 사람들이다. 이 연극의 등장인물, 하인은 그들로부터 잠시 모자라든가, 구두, 넥타이 등을 빌려야 한다.(관객을 작품의 일부로 끌어들이는 실험적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소극장이라는 무대의 특성과 작품의 주제의식과 연관이 있다.) 이 빌린 물건들을 단순히 소도구로 응용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이 작품을 검토하면 알겠으나, 이 잠시 빌렸다가 되돌려 준다는 것엔 보다 깊은 의미가 있고 이 연극에 있어 중대한 역할을 차지하게 된다.(빌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함.)

하인, 그는 빌린 물건들로 한 남자를 치장한다. 구색이 맞지 않고 엉뚱한 다른 물건들로 남자는 좀 우스꽝스럽기는 하지만(여러 관객에게 빌려서 치장하였기 때문에) 그럭저럭 부자처럼 보이게 된다.

남자, 그는 의자에 앉아 얼굴을 다 가리는 커다란 이야기 책을 읽기 시작한다.

하인은 그 남자의 곁에 부동자세로 선다. 그의 손엔 거의 쟁반만큼이나 커다란 회중시계가 들려져 있는 데 실제로 하인은 가끔 그것을 쟁반으로 사용하기도 한다.(과장된 크기로 회중시계를 강조하고 있다. 회중시계는 이 작품에서 중요시하고 있는 시간을 상징하는 소도구이다. 또한 시간에 맞추어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을 상징하기도 한다) 몹시 꼼꼼하게 시간을 재는 그의 모습은 꼭 그럴 필요는 없겠으나 무뚝뚝하고 건장하다.(사무적이고 기계적인 모습)

 

남  자 : (이야기책을 낭독한다.) 옛날에, 옛날에, 한 사기꾼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젊고 잘 생겼으나 땡전 한 잎 없는 빈털터리였습니다.(책 속의 사기꾼은 극 중의 남자와 동일시되는 인물이다. 책을 읽는 방식을 통해 극중 상황을 설명하는 효과를 얻고 있다.) 어느 날 그는 외로워졌으므로 결혼하고 싶어졌습니다.(사건의 발단) 누구나 젊음의 한 시기엔 외로워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누구나 결혼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사기꾼에겐 엄청난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 고민은 이렇습니다. 이 세상(물질만능주의 시대를 의미함)의 어떤 처녀가, 자기 같은 빈털터리 남자와 결혼해 줄 리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몹시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런 기분은 좋지 않습니다. 저절로 한숨이 나오구, 정신에도, 몸에도 해롭습니다. 빨리 심호흡을 해서 그런 기분은 몰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젊은 사기꾼도 심호흡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섰습니다.(새로운 상황이 벌어질 것임을 암시)

 

한탄하지 말자!

근심 걱정도 말고!

곤란하면 운명에 맡겨 버리자!

지금의 한 때 푸짐히 즐기되

지나간 옛날은 생각지 말자.

슬프게 보여도 무슨 일이나

그대의 행복이 되거늘

모든 건 신(神)의 뜻

신의 뜻을 따라 해보자!

 

그는 온종일 돌아다녔습니다. 정원이 달린 집과 훌륭한 옷과 그리고 그 밖에 부자로 보일 수 있는 여러 가지 물건들을 빌리러 다닌 것입니다.

 

젊은이의 아름다움에 행운이 있어라!

신(神)께서 정하신 바에 행운 있어라!('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시의 한 부분)

 

마침내 그 젊은 사기꾼의 소망은 이루어졌습니다. 정원이 딸린 최고급 저택을 빌릴 수 있었으며, 모자와 넥타이, 호사스런 의복, 그리고 이 건장한 하인(남자를 부자로 보이게 하는 것들 - 부를 결혼의 조건으로 여김)까지 빌렸던 것입니다. 단, 조건이 있었습니다. 빌린 물건마다엔 사용할 수 있는 시간적 제약이 붙었습니다. 이 저택은 사십오 분 동안만 그가 주인이며 다음엔 되돌려 줘야 합니다. 넥타이는 이십팔 분, 모자는 십구 분 오십 초, 그 밖에 다른 물건에도 제각기 정해진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젊은 사기꾼은 매우 만족했습니다.(결혼의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그래서 즉시 여성 잡지를 뒤져 사교란에 주소를 낸 여자에게 전보를 쳤습니다. 여자로부터 즉각 답신이 왔습니다.(책 속의 내용이자 극중 사건에 해당한다. 사건 전개를 빠르게 하는 효과와 함께, 즉각 답신을 보내는 여자를 통해 물질 만능주의에 빠진 현대인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맞선을 볼 의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은 이쪽이 바라는 바이기도 했습니다.

(혼잣말처럼) 왜 아직 안 온담?(극중 현실에 대한 반응. 책 속 사건과 중첩)

(다시 책을 낭독한다.) 오겠다 약속한 시간이 벌써 지났습니다. (하인, 시계를 본 채 손가락 다섯 개를 펼친다.) 딱 오 분 지났습니다. 그는 초조해졌습니다. 책을 읽어 마음을 달래 보려 하였으나 초조해지기만 했습니다.(빌린 물건을 되돌려주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기 때문에)

 

하인, 아무 말 없이 을 빼앗아 버린다. 감정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기계적인 동작입니다. 이 극의 마지막까지 하인의 동작은 그러하다. 남자가 항의하려 하자 하인은 무뚝뚝하게 자기의 회중 시계를 내밀어 보일 뿐이다. 그리고는 남자가 미처 수긍하기도 전에 돌아서더니 빼앗은 물건을 가지고 나간다. 잠시 후, 하인은 돌아와서 남자 곁에 서서 부동자세를 취한다.

 

남  자 : 여봐, 자네는 인정 사정도 없긴가?

하  인 : (묵묵부답)

남  자 : 그래? 아 참, 자넨 말을 않는다며? 자네 주인께서도 그러시더군. '빌려는 드리지요. 하지만 아무 것도 묻지는 마십시요. 이 하인은 절대 대답하지 않습니다.' 난 그걸 잊을 뻔 했네. 그러나 저러나 웬 일이야? (하인의 회중시계를 들여다 본다.) 이제 십 분째 지나가구 있어. 황금 같은 내 인생이 이 꼴로 그냥 허무하게 지나가다니 안타깝지 뭔가?

 

남자,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낭패한 표정으로 관객석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왔다갔다 한다.

남자, 한 여성 관객에게 말을 건다. 언뜻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 듯 미소를 짓고 있다.

 

남  자 : 하긴 …… 그럴지도 몰라요. 여자란 그렇다면서요? 이쁘게 보이려구, 일부러 약속 시간보다 오 분쯤은 늦는다죠? 하지만 이건 너무 심합니다. 굉장히 미인인가? 그러니까 두 곱이나 시간을 낭비하는 것 아니겠어요? 만약 온다는 그 여자가 당신처럼 어여쁘시다면야 이야긴 퍽 달라지죠. 십 분 아니라 난 이십 분도 기다릴 수 있다 이겁니다.

 

남자, 다시 자기 의자에 돌아와 앉는다. 초조해서 옷을 매만지고 모자를 썼다 벗었다 한다. 결국 그는 모자를 벗어 탁상 위에 놓고 벌떡 일어선다. 힐끔 하인의 시계를 본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킨다. 그는 남자 관객에게 다가간다.

 

남  자 : 이거 초조해서 원, 담배 한 대 주시겠어요? 거저 달라는 건 아닙니다. 다만 빌려달라는 거죠. 네, 고맙습니다. 아, 「은하수」군요. (다른 남자 관객에게) 「청자」를 가지구 계신가요? 그러시다면 한 대 빌립시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납작하게 눌러진 빈 담배갑을 꺼내 남자 관객들로부터 받은 담배를 차곡차곡 집어 넣는다.) 누구, 「샘」없으세요. 「샘」?  요즘 나온 담배론 「샘」이 괜찮더군요. 물론 「한산도」도 좋긴 좋죠. 어느 분「파고다」있으시면 그것도 한 개피 빌립시다. 꼭 담배를 콜렉션하는 것 같습니다만 초조할 때 이러는 게 내 버릇이라서요. (담배에 불을 붙인다.) 라이터, 이거 최고품이죠. 쓸데없이 금으로 만들구, 진주를 붙였습니다. (하인에게) 이거 정해진 시간이 얼마지? (하인, 오른손의 손가락 하나, 왼손의 손가락 네 개를 펴 본다.) 알았네, 알았어. 십 분 정도가 지났으니까, 앞으로 사 분 후엔…… 그러나 아직은 완전히 내 겁니다. 내 라이터다, 이거지요. 금으로 만든 것, 진주가 박힌 최고품, 난 부자라는 게 분명합니다. 이 호사스런 물건이 그걸 증명하거든요. 그건 그렇고, 담배는 고맙습니다. 다아 이럴 땐 상부상조해야죠. 안 그래요? 그런 의미로 한 대만 더 빌려가도 좋겠지요?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남  자 : 들었지?

하  인 : (묵묵무답)

남  자 : 여봐, 누가 문 두드리잖나?"

하  인 : (쳐다보려고도 않는다.)

남  자 : 어서 문 좀 열어 드리게.

하  인 : (침묵)

남  자 : 할 수 없군. 내가 여는 도리밖엔.

 

남자, 문을 연다.

여자, 들어온다.

 

남  자 : 하인은 저쪽입니다. 난 주인이구요.

 

여자, 하인 쪽으로 달려가 인사를 한다.

 

남  자 : 주인은 이쪽이에요, 이쪽.

 

여자, 당황해서 남자 쪽으로 되돌아온다. 미술품을 감상하듯이 남자는 여자를 주시하며 그 둘레를 두어 바퀴 돈다.

 

남  자 : 그러실 줄은 미리 짐작했었습니다.

여  자 : …… 짐작하시다니요?

남  자 : 네. 아름다우시리라, 그걸 말입니다. 다 아는 수가 있죠. 기다리는 시간을 많이 낭비할수록 오시는님은 아름답다. 그렇지요, 시간이란 그런 점에서 매우 정확한 측량 도구입니다. 물론 결과가 나쁠 때는 아무 쓸모없는 도구이긴 합니다만. 저어, 담배 피워도 괜찮겠지요?

 

남자,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꺼내 든다. 슬그머니 자랑하고 싶은 기분이 든다. 그는 라이터를 공기 놀이 하듯 허공에 던졌다가 받곤 한다.

 

남  자 : 라이터, 최고품입니다. 금제, 그리고 진주가 박힌.

하  인 : (허공에 올라간 라이터를 툭 채어간다.)

남  자 : 이리 줘.

하  인 : (자기의 시계를 가리킨다.)

남  자 : 그렇게 됐나? 벌써 사 분마저 지났어? 시간 하나 빨리 간다. (여자에게) 어디두셨습니까?

여  자 : 네?

남  자 : 내 라이터

여  자 : 라이터?

남  자 : 아, 아니구, 날개 말입니다.

여  자 : 날개 …….

남  자 : 네, 날개. 물론 집에 두고 나오셨겠지요. 요즈음의 천사들이란 겸손하셔서 그 우아한 날개를 살짝 집에 두고 나오는 걸 유행으로 삼고 있다더군요. 당신도 역시 그러시겠지요!

 

여자가 무어라고 하기 전에 재빨리 말을 잇는다.

 

남  자 : 당신은 날개만 없다 뿐이지 천사시다 이겁니다. 더욱 나아가서는 소유권 문제인데 나의 천사시다, 내 것이다, 이런 겁니다.

여  자 : 벌써 그런 결론이 나왔어요?

남  자 : (단호하게) 네. 방금 들으셨듯이.

여  자 : 너무 빨라요.

남  자 : 왜요? 내 결론이 혹시 마음에 안 드시기라도?

여  자 : 아뇨. 하지만요, 우린 아직 인시도 않은 걸요. 처음 뵙겠어요.

남  자 : (더 재빠르게) 더 처음 뵙겠습니다.

여  자 : 안녕하세요?

남  자 : 더 안녕하십니까?

여  자 : 제 이름은…….

남  자 : 아, 우리 소갠 나중에 하십시다. 요즈음의 인간 관계는 결론이 시작이 되구 서로의 인물 소개는 맨 끝으로 돌리는 걸 새로운 관습으로 삼고 있으니까요.

여  자 : 그런 관습도 새로 생겼군요.

남  자 : 네. 그건 별로 자랑거리 없는 남자가 첫 눈에 반할 만한 여자를 만났을 때 응용하는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그 남자가 별 신통찮은 자길 소개할 경우 상대편 여자는 몹시 실망하게 됩니다. 그럼 두 사람의 관계는 뭐가 되겠습니까? 그 즉시 끝장입니다. 우리는 이런 유감스런 사태를 피하자는 겁니다. 우리 둘 사이를 풍부하게 한 다음 그때 가서 하십시다. 좋겠지요, 그게?

여  자 : (엉겁결에) 네, 좋아요.

 

두 남녀는 의자에 앉는다. 동시에 남자가 청혼을 한다.

 

남  자 : 결혼하십시다.

여  자 : 결혼? 누가 누구하구요?

남  자 : 그야 내가 당신하구지요.

여  자 : 만난 지 몇 분 됐다구 그러시죠?

남  자 : 시간을 따진다면야 나도 할 말이 많죠. 내가 얼마나 오래 기다린지 아십니까? 짐작이 안 가시면 여기 계신 분들께 물어 보십시오. 내 인생의 황금 같은 시간을 그 삼분지 일이나 덧없이 보내고서야…….

 

하인, 느닷없이 덤벼들어서 남자의 구두를 벗겨 간다. 여자는 몹시 당황한다. 남자는 만류하지만 하인은 자기 행동의 정당성을 과시하려는 듯 시계를 가리킨다. 남자는 구두를 빼앗기고 하인은 벗겨낸 구두를 가져간다.

 

남  자 : 내 하인의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오.

여  자 : 뭐죠?

남  자 : 구두가 내 발에서 떠나갔습니다. 시간이 지났기 때문입니다.

여  자 : 전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남  자 : 어찌 아시겠습니까? 인생이 그런 거라곤…….

여  자 : 인생이 그런 거라뇨?

남  자 : 아, 아니요. 제발 알려고는 마십시오. 여자는 그걸 모르기 때문에 남자를 사랑하게 되고, 남자는 그걸 알기 때문에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 겁니다.

여  자 : (현기증이 나서) 뭐가 뭔지…….

남  자 : 부디 모르십시오.

여  자 : 물 한 잔 주시겠어요?

남  자 : 그러십시다. (하인에게) 자네 물 한 잔만 주게.

하  인 : (부동 자세)

남  자 : 그럼 물 한 잔만 빌려 주게.

 

하인, 물 한 잔을 가져온다.

 

남  자 : 그냥 달라고 할 땐 꼼짝도 않더니 빌려달라고 하니까 가져 오는군. (여자에게) 드십시오.

여  자 : 고마워요.

남  자 : 뭘요, 빌린 건데요.

 

여자, 물을 마신다.

 

남  자 : 정신 좀 드십니까?

여  자 : 여전해요.

남  자 : (미소를 짓고) 익숙해지며는 좀 나을 겁니다.

여  자 : 저는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당신이 이렇게 부자리라곤 꿈도 못 꿨죠. 전보에 알려 주신 대로 찾아왔더니 …… 이건 너무 어마어마한 저낵이잖겠어요? 문 앞에서 저는요, 한참이나 망설였어요.

남  자 : 어려워 마시고 그냥 들어오실 걸.

여  자 : 아뇨. 황홀해서 망설였던 거에요.

남  자 : (미소를 짓고) 아, 그랬어요?

여  자 : 네. 당신의 전보를 받았을 때요, 저의 어머닌 말씀하셨답니다. 얘야, 어서 가봐라. 가 봐서 빈털터리 같거든 아예 되돌아 오구 부자거든 꼭 붙들어야 한다.

남  자 : 그래, 당신은 뭐라 했습니까?

여  자 : 알았어요, 어머니. 오른 손을 들구서 그렇게 대답했죠.

남  자 : 내 원 참! 오른 손을 들다, 그러니까 맹세를 하셨군요?

여  자 : 그렇죠!

남  자 : 그 잔에 물 좀 남았습니까?

여  자 : 아뇨. 다 마셨는 데요.

남  자 : 유감입니다. 내 몫을 남기시지 않구서.

 

하인, 또 다시 남자에게 달려들어서 넥타이를 풀어낸다. 남자는 빼앗기지 않으려 힘껏 저항하지만 하인의 억센 힘을 당해내지 못한다. 결국은 빼앗기고 하인은 기계적인 동작으로 넥타이를 가지고 나간다. 여자는 두 남자의 다툼에 놀란다.

 

여  자 : 왜들 그러시죠?

남  자 : (씩씩거리면서 웃고 있다.) 이번엔 넥타이가 내 목에서 떠나갔습니다.

여  자 :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네에?

남  자 : 뭐, 놀랄 게 못 됩니다. 그저 시간이 지난 것 뿐이니까요. 안심하십쇼. 만약 내 목이 떠나가고 넥타이만 남았다면 …… (계면쩍은 듯 바라보고 있는 여자의 관심을 돌리려고) 그건 그렇구요, 당신 어머니 퍽 재미난 분이시군요. 나는 깊은 관심을 갖게 됐어요. 당신의 어머니에 대해서, 그 맹세를 시켰다는 어머니, 어떤 분인지 더 듣구 싶습니다. 어떠신가요? 어머니 성품이 너그러우시다든가 …… 왜 그렇게 쳐다만 보십니까?

여  자 : 넥타이를 …….

남  자 : 그것엔 관심없습니다.

여  자 : 왜 빼앗기셨죠? (옆에 와 부동자세로 서 있는 하인을 흘겨보며) 그것두 난폭하게.

남  자 : 그렇지요. 난폭하게 주인을 덮치는 그런 하인에겐 난 전혀 관심없어요. 오히려 당신 어머니의 성품이 너그러우신지…….

여  자 : 하지만요, 저는 ……. (입을 다물어 버린다.)

남  자 : 알았어요. 문제는 빼앗긴 물건인가 본데, 그야 되돌려받기 어렵지는 않습니다. (하인에게 큰 소리로) 여봐, 가져 와! (묵묵부답한 하인. 까치발을 딛고 일어나서 그의 귀에 속삭인다.) 여봐! 그 가져간 것 오 분만 더 빌려주게.

하  인 : (대답이 없다.)

남  자 : 딱 오 분만 더. 사정해도 안 되겠나, 응?

하  인 : (반응이 없다.)

남  자 : 좋아, 좋다구.

여  자 : 뭐래요, 하인이?

남  자 : 네, 날더러 잘 해보라구 그럽니다.

 

남자, 관객석을 투덕투덕 걸어다니다가 넥타이를 맨 남성 관객 앞에 앉는다.

 

남  자 : 물론 그래요, (속상하다는 듯 담배를 피워 물고, 상대방에게도 권하며) 저 인정 사정도 없는 하인이 날더러 잘 해보라구 그런 말 한마디 하진 않았지요. 하지만 말입니다. 나도 그래요, 기 죽을 필요야 없는 겁니다. 그렇잖아요? 도대체 지가 뭐라구 겨우 심부름이나 하는 주제에 …… 속 좀 상합니다만, 그야 뭐 그런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니까 말해보나마나겠구…… 저어, 당신 넥타이 참 좋습니다. 정말 좋아요. 아름다운 색깔, 기막히게 머진 무늬, 딱 오 분만 빌립시다. 정확하게 오 분만. 더 이상은 어기지 않겠습니다. 빌려 주시렵니까? (남성관객으로부터 넥타이를 빌려 착용하며) 고맙습니다. 빌린 동안에는 소중히 다룰 겁니다. 사실 이건 내 것이 아니라 당신 것인데…… 혹시 모르긴 하지요, 당신도 누구에게서 빌려온 건지는. 아무튼 잘 사용하고 돌려 드리겠어요. 자아, 그럼 당신은 시간을 재고, 난 이만.

 

남자, 급한 걸음으로 여자에게 돌아간다.

 

여  자 : 네, 당신은 멋진 분이셔요.

남  자 : (웃으며) 뭘요.

여  자 : 아니, 정말 그래요.

남  자 : (넥타이를 빌려 준 남성 관객을 향하여) 이 영광을 당신에게 돌려드립니다. (여자에게) 그건 그렇구요, 우리 하다 만 이야기, 그것 좀 계속해 봅시다.

여  자 : 어디까지 이야길 했었죠, 우리?

남  자 : 당신의 어머니에 대해서, 아직은 거기까지입니다.

여  자 : (작게 한숨을 쉬고) 그럼 저 자신에 대한 건 아직 멀었군요.

남  자 : 그렇죠. 나도 직접 당신의 이야길 듣고 싶습니다만, 어머니 다음 딸, 이런 순서니까 계속 진행해 봅시다. 의무적으로 묻겠습니다. 당신 어머니의 성품은 어떻습니까? 난폭하십니까? 상냥하십니까?

여  자 : 글쎄요…….

남  자 : 의무적으로 대답하십시오.

여  자 : (잠시, 생각하더니) 난폭에다 상냥을 겸하신 분이에요.

남  자 : (자기 이마에 손을 얹는다.)

여  자 : 왜 그러시죠?

남  자 : 뭐, 별건 아닙니다. 벽에 부딪혔다고나 할까요. 뭔가 어려워서요. 하긴 당신을 얻는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겠지요. 첫눈에 반한 사람들도 결혼에 이르기까진 험난한 과정을 겪는다고들 합니다만. 그런데 우리는, 겨우 처음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것 같거든요. 아직 이야기도 당신의 어머니에게서 머물구 있구…….

여  자 : 용기를 내셔야 해요.

남  자 : 네, 어디 힘 좀 내보겠습니다.

여  자 : 갑자기 이런 말을 하면 놀라시겠지만요…….

남  자 : 말해봐요, 뭐든지.

여  자 : 저는 이 세상에 태어났어요.

남  자 : 놀랬습니다, 갑자기.

여  자 : 네, 태어난다는 건 언제나 갑자기죠. 그래서요, 저는 태어날 때 제 기분이 어떠했는지 그걸 모르겠어요. 아무튼 그냥 그렇게 이 세상에 나온 거죠. 그리구, 어렸을 때 제 별명이 뭔지 아시겠어요? 덤이에요, 덤.

남  자 : 덤?

여  자 : 네. 왜 조금 더 주는 것 있잖아요. 그거래요, 제가. 아버진 사랑을 주구, 그리고 또 덤으로 저를 어머니에게 주었죠. 그러니까 덤 아니겠어요? 덤, 이 말 속엔 뭔가 그리운 게 있어요. 덤, 덤, 덤…… 아버진 덤이 태어나자 달아나셨대요. 말하잠 뺑소닐 치신 거죠. 나중에 알고 보니 사기꾼이었구 어머니에게 보여 줬던 그 많은 재산은 모두 다 잠시 빌렸던 거래요.

남  자 : 덤, 덤, 덤.

여  자 : 하지만요, 저는 아버질 미워 안 해요. 그 분에겐 뭔가 덤이라는 옛 이름처럼 그리운 데가 있어요. 덤, 혹시 그 분도 그렇게 이 세상에 태어나신 건 아닐지…… 안 그래요?

남  자 : 덤, 덤, 덤…….

여  자 : 어머니에겐 안됐지만요, 덤이라는 그 점이 저에겐 좋아요. 왠지 홀가분하더군요. 이런 말을 하면 어머닌 화를 내시곤 한답니다. 하긴 그렇죠. 고생 많으셨어요. 홀로 덤을 나아 키운다는 건…… 그만둘까요, 제 이야기?

남  자 : 덤, 더해주세요.

여  자 : 그래서 어머니는요, 단단히 벼르시는 거예요. 이 덤을 키워서는 결코 사기꾼에게 주지 않겠다구요. 전 어머니 말을 이해해요.

남  자 : 나두 알만합니다.

여  자 : 고마워요.

남  자 : 뭘요, 고맙기는요.

여  자 : 사실 이런 덤 이야긴 처음인 걸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답니다. 그냥 가슴 속에 덮어 두었었죠. 그러고 보면 당신은 참 친절하신 분이에요.

남  자 : 덤.

여  자 : 네?

남  자 : 아, 아뇨. 그저 불러 본 겁니다.

여  자 : 그 목소린 그저 불러 본 건 아닌데요?

남  자 : 저어, 아닙니다.

 

남자는 일어나 넥타이를 풀어 그것을 빌렸던 남성관객에게 가서 되돌려 준다. 그의 눈은 물기에 젖어 있다.

 

남  자 : 빌린 건 돌려드립니다. 시간은 정확하게 지켰습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슬퍼진 건 무슨 까닭일까요? (관객석을 거닐며 그는 자기에게 들려 주듯 중얼거린다.) 덤, 덤, 덤, 난 당신을 사랑해. 덤, 덤, 난 당신을 사랑해. 덤, 덤, 난 당신을 사랑해…….

 

여자, 남자에게 다가온다.

 

여  자 : 뭘하구 계세요?

남  자 : 덤…… 저어, 내 재산이 얼마쯤 될까, 그걸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여  자 : 왜 하필이면 이럴 때 그런 걸 생각하셔요?

남  자 : 부자의 인색한 버릇입니다. 그런데 난 재산이 너무 많아서 차라리 생각지도 말자, 그렇게 마음 먹었습니다. 이젠 됐습니까?

 

여자, 남자의 어깨에 기댄다. 사이.

하인, 위압적으로 한걸음씩 남자에게 다가온다.

두려워지는 남자, 그 꼴으 ㄹ여자에겐 보이고 싶지 않다.

 

남  자 : 눈을 감아요.

여  자 : 감고 있는 걸요, 이미.

남  자 : 난 지금 행복합니다.

여  자 : 저두 행복해요.

 

하인, 남자에게 덤벼든다. 호주머니를 뒤져서 소지품을 몽땅 떨어간다.

 

남  자 : 이번엔 자질구레한 여러 가지 것들이 떠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난 자꾸만 행복합니다.

여  자 : (눈을 감은 채 미소를 짓고 있다.)

남  자 : 그렇습니다, 덤. 여러 가지 것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이 떠나갔습니다. 뭐, 놀랄 건 못되지요. 그저 시간이 지난 것뿐이니까요. 어떤 나무는요, 가을이 되자 수천 개의 이파리들을 몽땅 되돌려 주고도 아무 소리 없습니다. 덤, 나는 고양이 한 마리를 길러 봤었습니다. 고양이는 차츰 늙어지고, 그래서 시간이 다 지나가자 그 생명을 돌려 주고도 태연했습니다. 덤, 덤, 덤…… 난 뭔가 진실한 걸 안 것 같습니다. 덤, 덤. 그래요. 난 이제 자랑거리 하나가 생겼습니다. 그런 진실을 알았다는 것, 나에게는 그게 유일한 자랑이 될 겁니다.

여  자 : 너무 겸손하신 자랑이에요.

남  자 : 뭘요. 그런데 덤, 당신에겐 뭐 자랑거리가 없으십니까?

여  자 : 있구말구요, 보시겠어요?

남  자 : 봅시다, 어디.

 

여자, 남자와 함께 의자로 돌아간다. 의자 위에 놓여 있던 핸드백을 열고 그 속에서 얼굴만을 커다랗게 찍은 사진 석 장을 꺼낸다.

하인, 시계를 보더니 탁상 위에 놓였던 남자의 모자를 냉큼 집어 간다.

 

남  자 : 이번엔 모자가 의자에서 떠나갔습니다. 여간 다행이군요. 모자는 작습니다. 의자는 크구요. 만약 의자가 모자에게서 떠나갔더라면 얼마나 큰 손실이겠습니까?

여  자 : 이걸 좀 보세요.

남  자 : 뭔데요, 그게?

여  자 :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제 사진이에요. 저희 집 가문의 여인들은 대대로 미인이라는 걸 증명하는 거죠.

 

남자, 사진들을 바라본다.

하인, 모자를 가져 가다가 멈춰선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움직여서 사진을 들여다 본다.

남자, 하인을 밀어낸다.

 

남  자 : 뭘 봐? (여자에게) 당신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여  자 : 제일 젊으니까 그렇죠.

 

남자, 사진 중에서 여자 본인의 것을 대고 여자의 얼굴에 대고 한참동안 바라본다.

 

남  자 : 그러니까 이게 지금의 당신이군요?

여  자 : 네.

남  자 : 몇 살인가요, 실례지만?

여  자 : 스물 둘이에요.

남  자 : 스물 두울. 꽃다운 처녀시군요.

 

남자, 다음엔 어머니의 사진을 얼굴에 대어 준다.

 

남  자 : 시간이 좀 지났습니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여  자 : 조금 늙지 어떻게 돼요?

남  자 : 이젠 이 얼굴이 당신입니다. 몇 살이십니까?

여  자 : (조금 쉰 목소리로) 마흔 다섯이에요.

남  자 : 마흔 다섯. 중년 부인이시군요.

 

남자, 할머니의 사진을 여자의 얼굴에 대어준다.

 

남  자 : 시간이 더욱 지났습니다. 이젠 이 얼굴이 당신입니다. 몇 살이시죠?

여  자 : (푹 쉰 목소리로) 일흔 살이 넘었어요.

남  자 : 일흔 살이 넘으셨다, 늙으셨군요.

 

남자, 얼굴에 대었던 사진들을 탁상 위에 내려 놓는다.

 

남  자 : 재미난 놀이를 해봤지요?

여  자 : 네, 재미 있었어요.

남  자 : 짐작하셨겠지만, 이 놀이의 재미는 시간이 지나간다는 데 있습니다.

여  자 : (사진들을 가리키며) 그래두요, 이렇게 고웁잖아요? 늙어서도 어여뻐야 정말 미인이래요.

남  자 : 그렇지요. 잘 말씀했습니다. 정말 재미라는 거는요, 시간을 초월하는 데 있습니다. 시간, 흥, 지나가라지요. 우리는 그저 재미있음 그만입니다. 아, 덤! 당신은 어여쁘고, 거기에다 또 참된 재미가 뭔지 그걸 아십니다! 덤, 난 완전히 당신에게 매혹되었습니다. 아, 지금 나는 내 정신이 아닙니다.

여  자 : 저도 그래요!

남  자 : 난 너무 황홀합니다.

여  자 : 그렇다니까요, 저두!

남  자 : 바로 이겁니다! 인생이란 이런 거예요! 그런데 덤, 만약 이 순간에 (곁에서 시간을 재고 있는 하인을 가리키며) 이 억센 하인이 내 옷을 벗겨 간다면 …….

여  자 : 왜 벗겨 가요?

남  자 : 만약입니다, 만약에…….

여  자 : 그래도 옷을 벗겨 가선 안 돼요.

남  자 : 그러니까 만약입니다. 만약에, 내 옷을 벗겨 간다면 당신은 어찌 하시겠습니까? 지금 가지고 있는 그 참된 재미를, 그 행복을, 그 황홀을 따악 깨셔야 하겠습니까?

여  자 : (어리둥절해 하며) …… 글쎄요.

남  자 : 참된 건 영원하다지요?

여  자 : …… 글쎄요.

남  자 : 어디 그럼 시험해 봅시다.

 

남자는 이미 저고리를 하인에게 빼앗기고 있다. 당황한 여자는 「……글쎄요.」만 연발하고 있다.

 

남  자 : 얼마나 다행입니까? 아직 바지가 남았습니다.

여  자 : 바지가 …….

남  자 : 네, 비록 맨발에다 윗 저고리는 안 입었습니다만 당신을 사랑하기에 전혀 부끄럽지 않은 모습입니다. 정식으로 청혼하겠습니다.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여  자 : 왜 난폭한 하인을 그냥 두시죠? 당장 해고하세요.

남  자 : 하인은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여  자 : 그냥 두시니까 자꾸 빼앗기잖아요.

남  자 : 빼앗기는 건 아닙니다. 내가 되돌려 주는 겁니다.

여  자 : 당신은 너무 착하셔요.

남  자 : 글쎄요, 내가 착한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내 태도 하나만은 분명히 좋다구 봅니다. 이렇게 하나 둘씩 되돌려 주면서도 당신에 대한 사랑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아니, 줄기는커녕 오히려 불어나고 있습니다. 아, 나의 천사님, 아니 덤이여! 구두와 넥타이와 모자와 자질구레한 소지품과 그리고 옷에 대해서 내 사랑은 분산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지 아십니까? 오로지 당신 하나에로만 모아지고 있는 겁니다! 내 청혼을 받아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하인, 돌아와서 두 남녀에게 우뚝 선다.

 

여  자 : 어마, 또 왔어요!

남  자 : 염려마십시오. 나도 이젠 그의 의무를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여  자 : 그의 의무? 의무가 뭐죠?

남  자 : 내가 빌린 물건들을 이 하인은 주인에게 가져다 주는 겁니다.

 

하인, 남자에게 봉투를 하나 내민다.

남자는 봉투에서 쪽지를 꺼내 읽더니 아무 말없이 여자에게 건네준다.

 

여  자 : 나가라!」나가라가 뭐예요?

남  자 : 네. 주인으로부터 온 경고문입니다. 시간이 다 지났으니 나가라는 거지요.

여  자 : 나가라…… 그럼 당신 것이 아니었어요?

남  자 : 내 것이라곤 없습니다.

여  자 : (충격을 받는다)

남  자 : 모두 빌린 것들 뿐이었지요. 저기 두둥실 떠있는 달님도, 저 은빛의 구름도, 이 하늬바람도, 그리고 어쩌면 여기 있는 나마저도, 또 당신마저도…… (미소를 짓고) 잠시 빌린 겁니다.(주인공인 남자의 입을 통해, 자연 현상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모든 것은 잠시 빌린 것이라는 작가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남자가 자기 소유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인간을 주어진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 시간의 지배를 받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가진 물건은 물론 자신의 삶까지 버리고 떠나야 하는 존재로 보고 있는 것이다.)

여  자 : 잠시 빌렸다구요?

남  자 : 네, 그렇습니다.

 

하인, 엄청나게 큰 구두 한 짝(남자를 쫓아내기 위한 소품)을 가져오더니 주저앉아 자기 발에 신는다. 그 구둣발로 차낼 듯한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된다.(긴장감이 조성되고 있는 부분이다. 하인은 제한된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남자에게 빌려준 것들을 하나씩 회수하고, 마침내 남자를 저택에서 쫓아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남  자 : 결혼해 주십시오. 당신을 빌린 동안에(당신과 함께 사는 동안에) 오직 사랑만을 하겠습니다.

여  자 : …… 아, 어쩌면 좋아?

 

하인, 구두를 거의 다 신는다.(긴장감이 점차 고조됨.)

 

여  자 : 맹세는요, 맹세는 어떻게 하죠? 어머니께 오른 손을 든…….

남  자 : 글쎄 그건 ……. (탁상 위의 사진을 쓸어 모아 여자에게 주면서) 이것을 보여드립시다. 시간이 가고 남자에게 남는 건 사랑이라면 여자에게 남는 건 무엇이겠습니까? 그건 사진 석 장입니다. 젊을 때 한 장, 그 다음에 한 장, 늙구 나서 한 장. 당신 어머니도 이해할 겁니다.

여  자 : 이해 못 하실 걸요, 어머닌. (천천히 슬프고 낙담해서 사진들을 핸드백 속에 담는다.) 오늘 즐거웠어요. 정말이에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여자, 작별인사를 하고 문전까지 걸어 나간다.

 

남  자 : 잠깐만요, 덤…….(여자의 별명이자 소유에 대한 작가의 관점을 암시함.)

여  자 : (멈칫 선다. 그러나 얼굴은 남자를 외면한다.)(남자를 신뢰하지만 결혼에 대해서는 갈등 중인 심리상태임)

남  자 : 가시는 겁니까, 나를 두고서?

여  자 : (침묵)

남  자 : 덤으로 내 말을 조금 더 들어봐요.

여  자 : (악의적인 느낌이 없이)(행복한 결말을 암시) 당신은 사기꾼이에요.

남  자 : 그래요, 난 사기꾼입니다. 이 세상 것을 잠시 빌렸었죠. 그리고 시간이 되니까 하나 둘씩 되돌려 주어야 했습니다.(소유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사고) 이제 난 본색이 드러나구 이렇게 빈털터리입니다. 그러나 덤,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봐요. 누구 하나 자신 있게 이건 내 것이다, 말할 수 있는가를. 아무도 없을 겁니다. 없다니까요. 모두들 덤으로 빌렸지요. 눈동자, 코, 입술, 그 어느 것 하나 자기 것이 아니구 잠시 빌려 가진 거예요. (누구든 관객석의 사람을 붙들고 그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가리키며)(관객을 극중에 끌어들이고 있다. 이와 같은 기법은 여자로 하여금 소유의 본질을 깨닫게 하려는 의도 외에 관객에게 주제의식을 구체적으로 전달하는 효과도 얻게 된다.) 이게 당신 겁니까? 정해진 시간이 얼마지요? 잘 아꼈다가 그 시간이 되면 꼭 돌려 주십시오. 덤, 이젠 알겠어요?

 

여자, 얼굴을 외면한 채 걸어 나간다.

하인, 서서히 그 무거운 구둣발을 이끌고 남자에게 다가온다.(긴장감의 최고조) 남자는 뒷걸음질을 친다. 그는 마지막으로 절규하듯이 여자에게 말한다.

 

남  자 : 덤, 난 가진 것 하나 없습니다. 모두 빌렸던 겁니다. 그런데 덤,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이 가진 건 뭡니까? 무엇이 정말 당신 겁니까? (넥타이를 빌렸었던 남성 관객에게) 내 말을 들어 보시오. 그럼 당신은 나를 이해할 거요. 내가 당신에게서 넥타이를 빌렸을 때, 그때 내가 당신 물건을 어떻게 다뤘었소? 마구 험하게 했었소? 어딜 망가뜨렸소? 아니요, 그렇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빌렸던 것이니까 소중하게 아꼈다간 되돌려 드렸지요. 덤, 당신은 내 말을 들었어요? 여기 증인이 있습니다. 이 증인 앞에서 약속하지만, 내가 이 세상에서 덤 당신을 빌리는 동안에, 아끼고, 사랑하고, 그랬다가 언젠가 시간이 되면 공손하게 되돌려 줄테요. 덤! 내 인생에서 당신은 나의 소중한 덤입니다.(여자가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게 하는 결정적인 대사이다. 모든 것을 주인에게 되돌려 주고 빈털터리가 된 남자는 관객을 증인으로 내세워 여자에게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고 있다. 역시 관객의 극중 참여를 유도하고 있는 부분이다.) 덤! 덤! 덤!

 

남자, 하인의 구둣발에 걷어 채인다. 여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다급하게 되돌아와서 남자를 부축해 일으키고 포옹한다.(남자의 말에 설득당한 여자의 모습으로, 결혼을 결심함)

 

여  자 : 그만해요!

남  자 : 이제야 날 사랑합니까?

여  자 : 그래요! 당신 아니구 또 누굴 사랑하겠어요!

남  자 : 어서 결혼하러 갑시다, 구둣발에 채이기 전에!

여  자 : 이래서요, 어머니도 말짱한 사기꾼과 결혼했었다던데…….(여자의 아버지가 남자처럼 빌린 재산으로 어머니를 현혹하여 결혼하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여자가 물질에 집착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되고 있다.)

남  자 : 자아, 빨리 갑시다!

여  자 : 네, 어서 가요!

 

 

잡스9급 PDF 교재

스마트폰 공무원 교재

✽ 책 구매 없이 PDF 제공 가능
✽ adipoman@gmail.com 문의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