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홈페이지의 '강제동원' 코너에 따르면, 노예노동자로 끌려간 한국인은 753만 4429명이다. 위안부는 최소 2만에서 최대 40만이다. 강제징병 피해자는 일본 정부의 공식 통계만으로도 최하 20만 929명이다.
일본 정부는 위안부 규모와 관련해 40만 명은커녕 20만 명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와 달리, 강제징병 피해자가 20만 명을 넘는다는 점은 일본 정부도 부인하지 못한다. 강제징병 역시 한국인들의 한과 상처가 많은 부분이다.
강제징용 역사는 한반도 전체의 고통이었다
1939~45년 350만명 이상 피해 추정
초기는 형식적 모집이었으나 실제는 강제
열악한 노동환경에 목숨 잃은 경우 부지기수
일본 패전 뒤 조선인 노동자들은 방치
충청남도 서천에 살던 이천구씨는 17살 때인 1942년 일본 후쿠오카현 야하타제철소에 끌려갔다. 어느 날 면사무소 호적계 직원과 순사(경찰)가 찾아왔다. “면서기가 ‘너 이제 징용에 징발됐다’고 말하더라고. 뭐, 도망가면 부모들이 고통을 당하니까. 별수 없거든. 그 당시에는.” 그는 어쩔 수 없이 끌려갔다. 암모니아 비료를 생산하는 곳에서 일했는데, 식사는 밥 약간과 미소시루(일본식 된장국) 반 공기, 단무지 2쪽, 콩조림 1~2개가 전부였다. 배고픔을 참을 수 없던 그는 1943년 제철소를 탈출해 와카마쓰에 있던 철물 공장 이마무라 제작소에서 잡부로 일했다. 일본이 패전한 뒤인 1945년 9월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시모노세키로 갔지만 배표를 구할 수 없었다. 시모노세키에는 수많은 조선인이 몰려들었고, 하루에도 몇십 명이 전염병 등으로 죽어나갔다. 그는 주검 치우는 일을 하면 배표를 빨리 준다는 말에 열흘간 주검 치우는 일을 하고 배에 오를 수 있었다.
이씨의 체험은 2006년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강제동원 진상규명위)가 발간한 구술 기록집 <똑딱선 타고 오다가 바다 귀신 될 뻔했네>에 나오는 얘기다.
대법원이 30일 손해배상 판결을 내놓은 강제징용 피해 기간은 보통 1939년부터 1945년까지로 본다.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킨 이듬해인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해 강제징용의 토대를 마련했다. 초기에는 겉으로나마 ‘모집’ 형태를 취했으나, 실제로는 각종 강제와 강압적 방법을 사용했다. 유제철씨는 2005년 강제동원 진상규명위 조사 때 처음에는 징용을 피해서 도망 다녔다고 했다. 하지만 면장이 아들을 찾아내라며 아버지를 구타하는 바람에 규슈 제련소로 끌려갔다. 일본 기업이 조선총독부 허가를 받은 뒤 경찰이나 면장 같은 조선 내 유력자의 도움을 받아 농촌 지역의 힘없는 사람들을 회유하거나 강압적으로 끌고 가는 방식이 곧잘 사용됐다. 총독부가 몇 명을 뽑아서 어떤 기업에 인계하라고 할당하면 지역 말단 행정기관이 직접 할당량을 채우는 방식도 사용됐다.
1944년 9월부터는 처음부터 대상을 특정해 징용 영장을 발부하는 방식인 강제 노무징용 방식도 사용됐다. 강제징용된 조선인 숫자는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일본과 만주 등 조선 밖으로 동원된 사람 150만명, 조선 내 작업장에 동원된 사람은 약 200만명으로 추정된다. 해방 당시 조선의 인구가 2500만명가량이었으니 강제징용 피해는 조선 전체에 걸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강제징용된 이들이 혹독한 노동환경에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사고로 사망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1942년 야마구치현 조세이탄광 수몰사고로 조선인 136명이 떼죽음당했다. 노동환경이 가혹했던 조세이탄광은 조선인 강제동원을 많이 하기로 유명했던 곳이다. 고 박경식씨가 쓴 책인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1965년)에는 아키타현 오사리자와 광산에서 숨진 조선인 4명의 사인이 나온다. 2명은 배가 고파서 아무 풀이나 뜯어먹다가 독미나리 중독으로 숨졌고, 한 사람은 혀를 깨물었으며, 2명은 두개골 골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