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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bs 9 2025. 4. 6.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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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호

 

姜相鎬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진주. 호는 백촌(栢村). 정3품 통정대부의 벼슬을 한 강재순(姜在淳)의 4남 1녀 중 장남이다.

 

[생애]

 

1887년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넉넉한 경제적인 여건을 배경으로 신학문을 접한 후 일찍부터 사회운동에 눈을 돌렸다. 1919년 3·1만세운동 때는 진주에서 이강우(李康雨)·김재화(金在華)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로 결의하고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작성하여 배포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뤘다.

 

[학력]

 

1910년 공립진주보통학교(현 진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12년 진주공립농업학교(현 경상국립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일본인이 세운 경남진흥 측량학교에 잠시 몸을 담고 측량법을 배웠다.

 

[경력]

 

현 봉래초등학교 전신인 봉양보통학교를 설립해 신분차별 없이 학생들을 뽑아 가르쳤다. 공립진주보통학교와 진주공립실업학교 초대사친회장을 지냈으며, 동아일보 초대 진주지국장을 역임했다. 

 

[활동사항]

 

1923년 4월 25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신현수(申鉉壽)·천석구(千錫九) 등 양반 출신 사회운동가들, 경제력을 가진 백정 이학찬(李學贊) 등과 어울려서 백정의 인권운동을 위해 형평사(衡平社)를 설립했다. 형평사는 계급을 타파하고 백정에 대한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고 상호 친목도모를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창립 1년 만에 열린 1924년 2월의 형평사 전조선 임시총회에서 형평사 중앙본부를 진주에 그대로 두자고 주장하는 진주파의 지도자로서 형평운동을 사회주의 노선에 입각한 계급해방운동으로 발전시키려는 서울파와 갈등을 벌였다. 그 후 형평사의 통합에 대한 사회여론의 압력으로 서울형평사와 진주형평사는 중앙총본부라는 이름으로 재통합하였는데, 그때 강상호는 은퇴를 선언하였다.

 

[상훈과 추모]

 

강상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장례는 형평장(衡平葬)이란 이름으로 9일 동안 치러졌다. 정부는 강상호의 3.1운동 공훈을 기려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강상호

 

1887년 6월 3일 경상남도 진주군(晉州郡) 정촌면(井村面) 가좌리(加佐里, 현 진주시 가좌동)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정3품 통정대부 벼슬을 한 천석꾼 강재순(姜在淳)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호는 백촌(栢村)이다.

 

1910년 진주공립보통학교(晉州公立普通學校)를 마치고, 1912년 3월 진주공립농업학교(晉州公立農業學校)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경남진흥측량학교에서 측량법을 배우기도 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 소식을 듣고 동지들과 비밀리에 모여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거사 일은 읍내 장날인 18일로 결정하였다. 먼저 동지들과 함께 동포의 분기를 재촉하는 취지를 담아 「교유문(敎喩文)」이라는 제목의 격문을 제작하였다. 이들은 1919년 3월 18일 각자 역할을 분담하여 공원에서 정준교(鄭準敎)와 함께 만세 운동을 개시하기로 하였다. 이 일로 체포되어 1919년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출옥 이후에는 공립진주보통학교, 진주공립실업학교의 초대 사친회장, 초대 동아일보사 진주지국장을 역임하는 등 진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1923년 4월 24일 백정 출신과 지역 사회운동가 약 70명과 함께 진주청년회관에서 백정에 대해 경멸하는 명칭과 차별 대우 폐지, 교육 장려를 목적으로 형평사(衡平社) 발기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형평사 초대 사장에 선출되었으며, 이후 신분 해방 운동인 형평운동에 헌신하였다. 1957년 12월 29일 사망하였는데 장례는 형평장(衡平葬)으로 9일 동안 치러졌다. 묘는 고향인 진주시 가좌동에 있다. 1971년 7월 1일 삼일운동 52주년을 기념해 진주 시민들이 세운 삼일독립운동 기념비에 이름이 새겨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시대를 앞섰지만 제대로 평가 받지 못했던 강상호 선생

 

 

조선 말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넉넉한 경제적인 여건을 배경으로 신학문을 접한 뒤 일찍부터 사회운동에 눈을 돌렸던 그다.

 

그는 1919년 3‧1만세운동 때 진주에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29명 중 한 사람으로, 대구교도소에서 1년 6개월의 징역을 살았다.

 

천석꾼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백정의 신분해방(형평운동)에 앞장섰고, 그가 세상을 떠나자 장례식 때 상여 뒤로는 만장(輓章)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백촌 강상호(1887~1957) 선생 이야기다. 독립지사이자 시대를 앞선 사회운동가였지만,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그의 삶을 다시 살려 쓴 책 <형평운동의 선도자 백촌 강상호>(진주문고 '펄북스' 펴냄)가 나왔다.

 

조규태 경상대 명예교수가 쓴 책이다. 조규태 교수는 강상호 선생에 대해 "한국 근대사의 중심에 있었으나 단 한 번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인물"이라고 했다.

 

신식 학문을 익히고 젊은 시절부터 애국계몽운동을 시작했던 그는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스물한 살에, '국채보상운동 경남회'를 결성하고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부친(강재순)이 세운 민족 사학 사립 봉양학교(현 봉래초등학교)를 이어받아 20대 후반이었던 1915년부터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백촌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진주 지역 젊은이들을 규합해 독립을 외치다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 남짓 복역한 후 가출옥했다.

 

이어 복역 후에도 그는 독립에 대한 염원으로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며 경남도청 이전 반대운동, 진주사회운동가 간친회 사건으로 수차례 체포되고 석방되었다.

 

백촌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백정의 신분을 철폐하고 차별을 없애기 위해 1923년 형평사를 조직하고 형평운동에 매진한 것이다.

 

조규태 교수는 "양반, 상놈의 법적인 차별은 사라졌으나 일제강점기에도 조선시대의 신분제는 살아있었고, 특히 최하층 계급이었던 백정에 대한 멸시와 억압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고 했다.

 

양반 집안 청년들의 폭력에 백정 청년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사건을 만나 강상호는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 본래의 양심"이라 소리 높여 외치고 백정들의 인권과 존엄을 위해 온갖 비난도 아랑곳하지 않고 형평사를 설립해 차별 철폐에 온 힘을 쏟았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내내 지역에서 기개를 잃지 않고 독립과 평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으나, 사료 부족과 좌익으로 오해받고 불우하고 궁핍하게 삶을 마감한 탓에 지금껏 단 한 번도 제대로 평가와 조명을 받지 못한 강상호의 삶을 제대로 다시 살려냈다.

 

"1923년 4월 25일, 우리나라 근대사 최초의 인권운동 일어난 날"

 

형평사의 창립 취지를 밝힌 주지(主旨)에는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 본래의 양심이라. 그러므로 우리들은 계급을 타파하며,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여 우리도 참사람이 되기를 기약함이 본사를 만든 취지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형평사 창립일인 1923년 4월 25일은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최초의 인권운동이 일어난 날로 기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였던 당시까지 여전히 차별받고 무시당했던 백정들의 인권과 존엄을 위해 형평사를 조직한 사람은 바로 독립지사 백촌 강상호였다"며 "형평사를 세우고 형평운동에 매진하기 전까지 그는 사회운동가이자 독립지사로 일제의 탄압을 견디며 활동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1984년 갑오개혁으로 제도적인 신분차별은 없어졌으나 관습은 여전해 일제강점기에도 백정은 호적조차 가지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며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백정들은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나라 잃은 설움을 떨쳐버리지도 못하고 옥살이가 끝나자마자 신분제의 폐단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강상호 선생은 신현수, 장지필 등 진주 지역의 인재들과 함께 '저울(衡)처럼 평등(平)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단체(社)인 '형평사'를 조직했다.

 

양반 지주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형평운동에 매진하는 그를 보고 주변 사람들은 '새 백정'이라고 비난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고 조 교수는 소개했다.

 

형평사가 세워진 지 4개월 만에 경남뿐만 아니라 경북, 충남, 충북 등 지사가 설립되고 '도부', '백정'등으로 호적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없애달라는 '호적 정정 요구'가 받아들여지는 등 실질적인 백정 차별 철폐 운동의 성과를 내었다.

 

'형평사'는 1935년 '대동사'로 이름을 바꾸고 친일 이익단체로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조 교수는 "192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형평사는 백정 해방, 신분 차별 철폐를 위한 본 목적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중심으로 횔동하는 단체로 변질되어 갔다"고 했다.

 

이어 "자연스레 강상호도 핵심 역할을 맡지 못하고 결국 1936년 이후 형평운동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되었다. 이후 강상호는 더는 사회활동에 나서지 않고 생업을 잇기 위해 농부로 살아갔다"고 덧붙였다.

 

<형평운동의 선도자 백촌 강상호>는 지금까지 제대로 기록하고 조명 받지 못한 그의 일생을 오랜 조사 작업을 통해 꼼꼼하게 완성시킨 책이다.

 

조 교수는 "도저히 깨질 것 같지 않는 신분제에 맞서 싸운 깨어 있는 선도자이자 독립을 염원했던 지사였던 백촌 강상호는 그냥 잊혀선 안 될 표상이다"고 했다.

 

장례식을 소개한 조 교수는 "수많은 진주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장례식이 진행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온 구 형평사원들은 하나같이 모두 삼베로 만든 두건을 쓰고 줄을 지어 운집하였는데 수를 헤어릴 수 없이 많았다"고 했다.

 

고인의 무덤은 새벼리에 있다. 조 교수는 "장례 행렬은 진주 남강교에서 새벼리까지 끝없이 이어졌다"며 "장례 행렬이 새벼리 입구에 거의 다다를 즈음 마침 지프차를 타고 새벼리를 지나가던 어느 육군 장성은 이 광경을 보고 지프차에서 내려 정중이 예를 갖추기도 했다"고 했다.

 

백촌의 묘소에는 한 동안 묘지명과 안내판이 없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독지가가 성금을 내 1999년 추모비가 세워졌고, 도로 옆에는 안내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김장하 남성문화재단 이사장은 추천사에서 "형평운동을 주도한 단체의 이름을 저울(衡)처럼 평등(平)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단체(社)라는 형평사로 정한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형평운동은 모든 인간들의 사회적 평등을 추구한 평등 운동이다. 이 고귀한 운동의 중심인물이 백촌 강상호 선생이다"고 했다.

 

김 이사장은 "백촌 강상호 선생은 백정 출신도 아니었다. 양반 지주의 아들로서 기득권을 버리고 인권운동에 앞장서서 새(新)백정이라는 욕설과 돌팔매질을 당하는 험한 길을 숙명처럼 받아들이셨다"고 했다.

 

조규태 교수는 경상대 교수회장, 국어사학회 회장, 배달말학회 회장을 지냈고, <번역하고 풀이한 훈민정음>, <국어교육 지역화의 실천방안> 등의 책을 펴냈으며, 진주문화연구소 이사,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로 있다. 

 

 

 

 

 

 

형평운동

 

衡平運動

 

 

경상남도 진주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백정(白丁)들의 신분해방운동.

 

[개설]

 

형평운동은 1923년 4월 진주에서 조직된 형평사(衡平社)의 활동을 일컫는다. ‘저울[衡]처럼 평등한[平] 사회를 지향하는 단체[社]’란 뜻을 가진 형평사의 주목적은 가장 차별받던 천민 백정들의 신분해방이었다. 이때 백정들 가운데는 일반인을 능가하는 자산가가 많았고, 교육을 통해 지적 수준이 높아지면서 신분의 불평등을 타파하려는 시대적 각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특히 봉건적 성향이 농후한 영남지방에서 신분의 불평등을 타파하려는 형평운동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일차적인 목적이 ‘백정’이란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 철폐와 인권 존중, 평등 대우를 주창하는 것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 평등’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일깨우는 활동이었다는 점에서 형평운동은 우리 역사상 평등사회를 이룩하려는 대표적인 인권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진주지역의 형평운동]

 

형평운동은 1923년 4월 24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거행된 형평사의 결성에서 시작되어 1935년 4월 24일 제13차 형평사 전국대회 때 단체의 이름을 대동사(大同社)로 바꿀 때까지 지속되었다. 형평사는 일제강점기 동안에 가장 오래 지속적으로 활동한 사회운동단체라는 점에서 그리고 진주는 형평운동의 발원지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형평운동의 역사적 배경]

 

1920년 당시 진주의 인구는 2만 4천여 명이었고, 그 중에서 약 350명 정도의 백정들이 진주에 살고 있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봉건적 신분제도는 철폐되었으나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여전히 지속되었고, 일제강점기 하에서도 이러한 상황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백정들에 대한 극단적인 차별의 예들을 몇 가지 들어보면, 1907년 진주지역 교회에서 일반교인들이 백정들과 동석 예배를 거부한 사건이나, 백정의 자제들이 학교에 입학하더라도 상민 자제들과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는 봉건적 신분제 하에서 같은 천민 신분이었던 기생들조차 백정들 모임에 참석하기를 거부할 정도였다.

 

이 같은 백정들에 대한 차별 외에 형평운동이 발생한 배경에는 진주지역의 역사적·사회적 조건과 백정사회의 경제적 기반이 있었다. 1920년대 초 진주에는 각 부문에서 직업적 운동가들이 주도한 민중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특히 진주청년회 중심의 청년운동, 진주노동공제회[진주노공]가 이끌었던 노동·농민운동, 각 종교단체와 연계되어 전개되었던 여성운동 등이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시 진주는 경상남도의 도청 소재지로서 비교적 일찍 서구문물과 접하게 됨에 따라 근대적인 공·사립 교육기관들이 설립되어 있었다. 이러한 교육기관들이 각 부문운동의 대중적 확산과 직업운동가들을 배출하는 데 기여하였던 것이다. 또한 진주는 역사적으로 1862년에 일어난 진주민중항쟁이 진주의 정치·문화적 기반의 기초가 되었고, 갑오농민전쟁 때에도 진주는 농민군의 활동이 비교적 활발했던 지역이었다.

 

이러한 사회적·역사적 조건과 함께 진주지역에서 형평운동을 결정적으로 가능하게 만들었던 요인은 백정사회에 축적된 경제적 기반이었다. 전통적으로 백정들은 일반인들이 꺼려하던 도살업, 고기판매업, 유기제조업 등 특수한 직종에서 일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는 일반인들로부터 심한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상당한 정도의 경제력을 쌓아가고 있었다. 19세기 말부터는 도살업이나 고기판매업이 재물을 모으는 중요한 수단으로 바뀌어갈 정도였다. 1920년대 초 상설시장으로 자리를 잡아가던 진주공설시장에서 가게를 갖고 있던 백정 상인들이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형평사를 만드는데 적극 참여하여 실무 임원진을 구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형평운동의 전개양상]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역동적 과정을 겪어온 진주지역에서 사회운동가들과 백정사회의 부유한 지도자들은 1923년 4월 24일 진주청년회관에서 형평사 설립을 위한 발기대회를 열고 그 이튿날 창립총회를 열었다. 총회에서는 앞으로 형평운동을 이끌어갈 임원을 선출하였다. 중앙집행위원으로 강상호(姜相鎬)·신현수(申鉉壽)·천석구(千錫九)·장지필(張志弼)·이학찬(李學贊) 등을 선출하였다. 간사로는 하석금, 박호득을, 이사로는 하윤조, 이봉기, 이두지, 하경숙, 최명오, 유소만, 유억만을, 재무에는 정찬조를, 그리고 서기에는 장지문을 각각 선출하였다. 중앙집행위원 중에서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등은 비 백정으로서 진주지역의 사회운동을 이끌었던 지식인 출신의 직업적 운동가들이었고, 나머지 장지필, 이학찬 등은 백정의 후예로서, 장지필은 지식인 출신이었으며, 이학찬은 진주공설시장에서 고기판매업을 통해 상당한 경제력을 갖고 백정사회를 지도하던 인물이었다.

 

형평사는 진주에 본사를, 각 도에 지사, 각 군과 유명 마을에는 분사(分社)를 두는 전국 조직체계를 갖추었는데, 당시 형평사측에서는 전국 백정 출신의 인구를 추정하여 회원수가 대략 40만 정도로 추계하였다. 형평운동을 감시하던 당시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자료에 따르면, 형평사 창립 1년만에 12개 지사와 67개 분사가 생겼고, 1928년에는 단위 조직체가 162개, 활동가 수가 9688명에 이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형평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형평운동에 대한 반대 움직임도 나타났으며, 형평사의 조직 확대에 따라 운동단체 내부에서도 분열·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진주의 기생조합이 형평사의 창립축하식 여흥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하였으며, 1923년 5월 24일에는 진주지역의 24개 동리 농청(農廳) 대표자들의 모임에서 소고기 불매운동을 결의하였다. 내부적으로도 창립 1년 뒤부터 본부를 진주에 두자는 진주파와 서울로 옮기자는 서울파의 파벌싸움이 벌어지게 되었다. 장지필을 지도자로 하는 서울파는 1924년 4월 서울에서 형평사 혁신동맹 총본부를 발족시켜 독자적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방의 백정들 사이에서 형평운동 통일에 대한 목소리가 커짐에 따라 그해 8월 “형평사 중앙총본부”라는 이름으로 일단 통합된다. 이때의 통합은 장지필, 강상호의 공식 사퇴와 함께 사회주의 세력이 주도권을 잡는 계기가 되었으며, 내부적으로도 조직이 체계화되어 갔다.

 

또한 1926년의 고려혁명당 사건으로 장지필, 서광호 등 수명이 검거됨으로써 형평사는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단체가 아니라, 민족해방운동 내지 사상단체로서 그 성격이 명확히 전환되어 갔다. 1928년부터는 형평사 내부에 백정의 신분해방운동에 중점을 두는 온건파와 계급투쟁의 측면을 중시하여 다른 사회운동과의 연대를 주장하는 급진파의 출현을 가져왔다. 이후 형평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크게 위축되었고, 1935년에 형평사를 대동사(大同社)로 이름을 바꾸면서 인권운동의 본래 성격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의의와 평가]

 

형평사가 대동사로 이름을 바꾼 뒤 사실상 형평운동은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누리고 평등한 대우를 받아가며 살아가야 한다는 형평운동의 이념은 여전히 필요한 상황이다. 형평사가 창립된 진주에서는 1990년대에 들어서 그러한 형평운동의 정신을 존중하고 기리는 활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형평운동의 학술적 성과를 논의하는 국제학술회의가 열리고, 형평운동을 기리는 기념탑을 건립하며 그 정신을 계승하는 문화 활동과 인권운동이 일어났다. 이처럼 진주에서는 인간 존엄성 실현과 인권 존중을 실천하는 사회를 만들려고 한 형평운동의 정신을 귀중한 자산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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