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의 제국
일본어: 愛のコリーダ
프랑스어: L'Empire des Sens
영어: In the Realm of the Senses
1976년 오시마 나기사(大島渚) 감독이 연출한 일본/프랑스 합작 영화이다. 1930년대에 일어났던 아베 사다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성도착자 커플의 비극을 그린 작품이다. 그해 프랑스 칸 영화제의 "감독 주간"에 초청되었으며, 영국 영화 협회(BFI)의 서더랜드 트로피(Sutherland Trophy)와 일본 호치 영화상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대단히 유미주의적인 작품으로, 표현 수위가 역대 최고급을 달리며 예술인지 외설인지 그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간다. 음모 노출은 예사이고 실제 정사씬이 그대로 나오고 성기를 절단하는 장면까지 나오기 때문에 더욱 논란이 컸다. 도덕성·대중성을 따지지 않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러한 탐미적인 자세는 성 문화에 보수적이던 당시 일본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다.
여자 주인공 아베 사다 역의 마츠다 에이코(松田暎子, 1952)는 논란에 시달려야 했으며 1979년까지 영화를 몇 편 찍고 미디어에서 사라졌다가 1982년 프랑스에서 <Cinq et la peau>란 작품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1983년에 찍은 사진이 구글에 돌아다니긴 하는데, 아무튼 칩거 수준으로 대중들에게서 숨었다가 2011년 뇌종양으로 사망했다.
남자 주인공 배우인 후지 타츠야(藤竜也,1941)도 극중 실제 정사로 논란의 중심이 돼 2년동안 근신했다. 게다가 그는 유부남이었다. 그래도 1978년에 복귀해 그 후로는 계속 활동 중이다.
이 작품은 단순 치정극은 아니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은 한국이나 재일교포를 다룬 영화를 만들었을 정도로 좌익 성향이고, 일본은 1930년대 파시즘을 거치고 45년 패전한 후에도 구 세력이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상태였다. 전후 고도 성장 속에 1960년대 전공투나 학생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사회 변혁에 실패한 일본 지식인들의 무력감은 여러 방향으로 나타났고, 이 작품도 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속 남성의 성기가 일제 군국주의를 상징한다고 생각하면 쉽다. 이후 오시마는 성애에 관한 탐미적인 작품들을 계속 만들었다. 또한 1970년대는 전세계적으로 68혁명과 히피 문화의 영향으로 오히려 21세기인 현재보다 수위가 높은 파격적인 영화가 만들어지던 시절이고 정치적으로 극좌와 극우 세력의 대결이 격렬하던 시기라 본 영화처럼 성과 정치를 결합시킨 영화들이 다수 만들어졌다.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감독의 살로 소돔의 120일도 1970년대 영화이다.
한국에서는 당연히 일본 영화이니 정식 수입이 되지 않다가, 일본 문화 개방이 시작된 이후 2000년 4월 1일에서야 정식 극장 개봉을 했다. 다만 16분을 잘라내고 모자이크 투성이 버전이었다고 한다. 서울 관객 14만을 기록했다. 당시 씨네21에서 이 영화를 다룬 바 있는데, 기자가 '1990년대 대학가 상영관에서 이 영화를 봤던 여대생들이 기겁하고 나가버렸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2015년 3월 26일에 재개봉했으나 서울 관객 653명만을 동원했다.
2019년 CGV CAV 기획전에서 무삭제판으로 상영했다.
2021년 전장의 크리스마스와 함께 4K로 복원되어 일본에서 재개봉했고, 엔케이컨텐츠는 이 버전으로 영등위 심의를 신청했지만 제한상영가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는지 일단 신청을 취소했다.
베드신 촬영 당시 현장에는 스탭 없이 두 배우와 감독 3명만으로 촬영했다고 한다.
당시 무명이던 최양일이 조감독으로 참여했다.
Ai No Corrida라는 일본어 제목에서 채용된 제목의 디스코곡이 있다. 이 곡은 Chaz Jankel의 원곡을 퀸시 존스가 리메이크 하면서 널리 알려져 있다.
2012년 영화 감각의 제국 파이널이 있는데, 아베 사다 사건을 대충 써서 만든 그냥 에로물이다. 국내에서도 달랑 서울 관객 10명을 기록했는데 1개 상영관에서 1회 상영하고 IPTV 유료 방영 홍보 겸 개봉했던 거였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역대 최고의 영화 10편 중 하나로 뽑았다.
무대 배경이 1936년 일본인데, 남자 주인공 하반신에 삼각 수영복 태닝 자국이 선명한 것이 옥에 티.
후지 타츠야(일본어: 藤竜也, 1941년 8월 27일 ~ )는 일본의 배우이다.
1941년 8월 27일 중국 베이징시에서 태어났다. 신장은 173cm. 1962년에 배우 데뷔. 그의 대표작은 《감각의 제국》 과 《8인의 수상한 신사들》이다.
출연 작품
드라마
대하드라마 (NHK)
《카츠 카이슈》 (1974년 드라마)
《호조 도키무네 (드라마)》 (2001년 드라마)
《가부키모노 케이지》 (2015년 NHK) :마에다 도시마스
영화
《감각의 제국》 (1976년)
《역도산》 (2004년) - 칸노 타케오 역
《자쿠로자카의 복수》 (2014년)
《8인의 수상한 신사들》 (2015년)
《바람나무는 거문고처럼》 (2018년)
감각의 제국, 선정성 논란, 군사주의 비판 영화
일본의 성찰적 지식인, 감독 오시마 나기사
오시마 나기사는 영화팬들 사이에서도 비교적 마이너한 편에 속한 감독이다. 그는 살아생전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아 숱한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담은 영화를 만들었다. 말하자면 좌익이고,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자국의 군국주의를 비판하는 '성찰적 지식인'인 셈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감독의 작품을 보아야 할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그의 메시지이고, 둘째는 그 메시지가 표현되는 방식이다.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는 우리가 아는 다른 거장 감독에 비하면 조금은 밋밋하다. 화면 구조나 연출이 화려하지도 않고 이야기의 소재에도 별 특이점은 없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그의 영화는 극을 이끌어 나가는 것에만 충실하다는 것도 된다. 오시마 나기사는 자국의 입장에서 매우 민감한 사회문제를 구태여 둘러싸려 들지 않는다. 그에게는 오로지 직진만이 있다. 은유와 환유를 통해 관객에게 거부감을 덜어주려는 시도는 없다.
그렇지만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가 사실적인 것은 아니다. 리얼리즘 영화라고 보기에는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이다. 분명 현실의 문제이지만 공감이 가지 않는 연출로 포장한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연극무대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그것은 오시마 나기사 개인의 신념일 것이다.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가 정말로 일어나고 있다. 감독은 마치 다른 세상에서 벌어졌을 법한 일을 이곳-현실 위로 데려온다. 그것은 일종의 직시다.
그의 영화가 다른 세상을 그리고 있다는 말은 정말로 연극에 가깝다. 국가가 국민을 속여 거짓을 진실처럼 포장할 때 그는 그것을 한 편의 연극으로 풍자했다. 그 연극은 극이 끝나고 나면 분리되어 있던 두 공간이 합쳐져 관객이 배우에게 악수를 청할 수 있다. 그렇지만 배우는 사건을 연기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경험했었다. 즉, 우리는 영화를 단지 영화 속 이야기일 뿐이라 치부하지만, 그는 항상 스크린에 진실이 있다고 말해왔다. 그의 영화는 거짓된 경험이 아니라 정말로 현실이었던 것이다.
감독의 대표작 세 가지 중에서 가장 논란이 일은 작품, <감각의 제국>
오시마 나기사는 세 가지 대표작이 있다. <교사형>(1968), <감각의 제국>(1976), <전장의 크리스마스>(1983) 이다. 당신이 영화에 관심이 없더라도 이 작품들은 충분히 재미있고 흥미롭다. 시간 내서 관람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만약 당신이 인터넷을 자주 하는 편이라면 <전장의 크리스마스>에서 류이치 사카모토가 작곡한 'Merry Christmas Mr. Lawrence'를 들어 보았을 것이다. <교사형>은 연극적인 연출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시작할 때 사형제도 찬반 비율을 보여주고 끝날 때는 당신(관객)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가장 잘 아는 것은 <감각의 제국>이다. 보통 사람들이 예술이란 무엇인지 궁금해하곤 하는데, 그럼에도 이 작품만큼은 예술이 아니라고 확실히 단정 짓는 사람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은 외설(猥褻)로 구설(口舌)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포르노와 이 작품의 차이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영화는 많다. 라스 폰 트리에의 <님포매니악>(2014)이나 <살로 소돔의 120일>(1975), 박찬욱의 <아가씨>(2016) 정도가 있다. 그러나 확실한 건 이 영화보다는 수위가 덜하다는 것이다. 성행위의 묘사가 자극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살로 소돔…>은 섹스보단 가학성, <님포매니악>은 섹스보단 핍진성, <아가씨>는 섹스보단 성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반대로 <감각의 제국>은 영화의 90퍼센트가 성행위이며, 끝내 여자가 남성기를 잘라내는 것으로 끝나버린다. 즉, 영화의 초점은 오로지 육욕(肉慾)이다.
성교 장면이 대역과 합성이 아니라 배우 본인이었다는 점도 평가에 일조한다. 그런 이유로 뭇 남성들이 이 영화를 좋아했던 것도 사실이나, 그로 인해 영화 자체의 평가절하가 이루어지고 있다. 영화를 오독(誤讀) 하는 것이 영화 자체의 수준이 낮다고 폄하하는 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 전문가들이 이 영화를 '군사주의에 대한 비판'이라 부르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이 글은 그 이유를 설명하려 한다.
<감각의 제국>과 군사주의에 대한 비판
감독의 다른 작품인 <교사형>처럼 이 작품도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영화의 전체적인 시나리오는 이렇다. 요리점에서 일하는 게이샤(창녀) '사다'는 그곳 주인 '이시다 기치조'와 눈이 맞는다. 물론 둘 다 남편과 아내가 있는 상황, 그러나 두 사람은 개의치 않고 성교를 일삼다가 기치조의 아내에게 들키고 만다. 기치조는 쫓겨나는 사다와 함께하기 위해 아내를 속이고 집을 나온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은 점점 육체에 대한 집착으로 변해버린다. 그렇게 목을 조르는 가학적인 섹스(사디즘)까지 시도하다 끝내 기치조가 질식사한다. 사다가 죽은 기치조의 시신에서 성기를 잘라내는 것으로 영화가 끝이 난다.
내용만 보면 무슨 이런 영화가 있나 싶다. 그러나 이 영화가 '군사주의 비판'과 '포르노에 가까운'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관람한 우리는, 그것을 통해 이 영화를 바라보게 된다.
<감각의 제국>에서 감각은 성욕이고 제국은 (구) 일본제국을 뜻하는 것이다. 영화의 배경이 된 '아베 사다' 사건은 1936년에 있었고, 그것은 2차 세계대전 시기이다. 그렇다면 작품의 제목은 일차적으로 '성욕에 의해 지배당하는 국가'가 된다. 여기서 '성욕'이란 본능인데, 작품에서 묘사되는 성욕은 원초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것이니 명백하게 부정성을 띠고 있다. 즉 제목의 이차적인 뜻은 '자기 파괴적인 본능만 남은 일본 군국주의'이다.
중요한 것은 원래부터 성욕에 지배당한 상태는 아니라는 점이다. '사다'는 원래부터 성욕이 많은 여자로 묘사되지만 극단적이지는 않았다. 단지 본능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러한 본능은 생존의 욕구와 성의 욕구로 분할되어 나타난다. 작품 초반의 여러 사건으로 사다가 전에도 게이샤 일을 했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일례로, 다른 종업원과 싸우는 장면에서 "한번 창녀는 영원한 창녀다."라는 말은 그녀의 과거를 보여줌과 동시에, 능력 없는 남편을 대신해 돈을 버는 그녀를 보여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원한'이라는 단어인데, 우리는 이 작품에서 깊은 성욕을 안은 그녀를 본다. 그리고 어떤 부랑자와 '사다'가 마주치는 장면을 통해 전부터 성욕이 많았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아래쪽이 흥건하다는 것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결국 이 작품에서 성욕이란 원초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영원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것은 남자의 사망과 성기 절단이라는 파국을 맞음으로써 결국 '영원한 파괴'로 변질된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그 장면 후에 사다와 기치조가 마주친다. 그는 요리점의 주인으로, 식욕(요리)과 재물(가게), 성욕(아내)을 끝없이 탐하는 인물이다. 두 사람은 눈이 맞아 쉴 새 없이 성교를 즐긴다. 말하자면 두 사람은 서로 소유하고 싶어 하며, 그 소유의 대상은 인물이 아니라 성욕이다. 실제로 영화의 9할이 섹스 장면이기도 하지만, 그나마 1할의 일상적인 장면에서는 카메라의 뒷부분이 절단된다. 무언가 더 있을 것 같은 잘려나간 장면의 여운에서 우리는 아쉬움을 느낀다. 그런데 그 아쉬움이 절정 이전에 그만둔 섹스처럼 느껴진다. 바로 그것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두 사람은 '사다'와 '기치조'가 아니라 그들의 성기를 욕망한다. 이것을 다른 욕구로 치환하면 다음과 같다. 그들은 밥이 아니라 '밥을 먹는 것'을 욕망한다. 그들은 돈이 아니라 '돈을 버는 것'을 욕망한다. 말하자면 목적지가 아니라 목적에 관심이 있다. 말하자면 욕구가 아니라 욕망이기에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다.
자끄 라깡(Jacques Lacan, 1901~1981)은 남근을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 것'이라 말했다. 이것이 라깡이 말하는 '남근 선망'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두 남녀는 각자의 '남근 선망'이 있다. 그것이 바로 성욕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척 은유적인 것으로 읽어야만 한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곧이곧대로 본다면 단순히 섹스중독에 대한 경고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 '사다'를 일본으로 대입하고, 남주인공 '기치조'를 서양으로 대입해보자. 물질적으로나 성적으로나 불만족의 상태에 있던 사다가, 그 모든 것을 가진 기치조를 만나게 된다. 사다에게 기치조란 '자신에게 없는 것이 있고, 동시에 목적이 일치하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전쟁 전 일본은 '서양보다 국력이 약했지만 영토 확장에 대한 욕망'이 같았다. 그래서 일본은 서양 제국처럼 되기 위해 충족되지 않을 욕망을 세계에 뻗치게 된다.
즉 이 영화는 일본 군국주의의 발단-전개-결말을 보여주고 있다. 작품의 마지막에 사다가 기치조의 남근을 제거해 움켜쥐는 것은 말 그대로 '남근 선망'을 시각화한 것이다. 그녀는 끝내 충족되지 않을 욕구를 손에 넣었으나 법의 심판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다. 물론 죽음에 이르는 장면은 영화 내부가 아니라, 영화 외부의 실화에서 찾을 수 있다. 말하자면 관객들에게 있어서는 '사다의 죽음'만이 실재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관객들에게 있어서는 '일본의 패전'만이 실재한다. 그러나 전후 세대로 갈수록 일본은 국가적으로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에 급급했고, 따라서 당시의 관객들은 전쟁의 발단-전개를 잘 모르고 있었다. 혹은 말로만 전해 들어 그다지 와 닿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영화는 그런 관객들에게 성욕이라는 원초적인 욕망성을 빌려 옛 일본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일본의 팽창욕은 서양의 그것, 기치조의 그것과 결합해 탄생한다. 서양이 되고 싶은 심리가 아니라 '그들처럼 강인해지고 싶은' 잘못된 마음을 낳았다. 아마 그들의 팽창욕은 전 대륙을 통일하기 전까지 계속되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해 오직 죽음만이 그들을 멈추게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연쇄 살인마의 심리 같은 것이다. 살인이라는 행위가 아니라, 살인을 통해 얻는 희열감이 그들을 지배했던 것이다.
동물적인 감각이 사다와 기치조의 육신을 휘감는다. 그런데 그들은 인간에서 동물이 될수록 죽어간다. 그러한 죽음의 신호는 영화 전반에 걸쳐 언급된다. 사다는 기치조에게 해골이 되어도 자신을 사랑할 것이냐고 묻는다. 두 사람은 섹스에만 몰두해 방 청소를 하지 않고, 온몸에서 썩은 냄새가 진동하게 된다. 작품에서 혹자는 사다에게 썩은 쥐 냄새가 난다며 언질을 준다. 사다는 기치조의 육체에 집착하며 식칼로 협박하며, 목을 조르면 더욱 쾌감이 크다며 '가학적 성행위'를 강요한다. 그리고 기치조는 정말로 죽어버린다.
일본 제국은 결코 서양이 될 수가 없다.라고 이 작품은 말한다. 성교에는 성교할 상대가 있어야 하는데 그 상대가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되고 싶은 이상향이 죽은 이상, 이제 사다는 이도 저도 아니다. 그녀가 취하는 건 자신에게 쾌감을 주던, 기치조가 아니라 기치조의 성기다.
라깡을 제외하고도 남성기는 폭력과 확장의 은유다. 남성기는 삽입의 이미지가 있고, 그건 강제성이 있든 없든 간에 변화를 이끌어 낸다. 필연적으로 상처를 동반하는 주사바늘 정도로 이해하면 쉽다.
작품에서 사다와 기치조가 최초로 섹스하는 장면은 기치조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이니 강간에 가깝다. 그런데 사다는 (아마도) 색정증이 있어서 오히려 기뻐하는 듯한 눈치다. 이것은 일본이 서양에 개항하게 된 계기를 떠올려 보면 무척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서양으로부터 강제로 서구성을 삽입 당해야만 했던 일본은 오히려 피해자이기보단 자발적이었던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렇게 작품의 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변한 사다가 아니라 '가해자'인 사다만 남는다.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는 자신들이 서구 열강으로부터 먼저 피해를 받았다며 호소하는 의견이 있다. 이 부분에 대한 비판도 오시마 나기사가 노린 것 중에 하나다. '일본은 그저 충족되지 않는 섹스에 미친 살인마'라고 말하는 것이다.
일례로, 작품 초반에 나오는 '부랑인'은 과거에 창녀였던 사다와 성교를 했었다. 사다는 그런 부랑인을 통해 '지금의' 욕구를 채우려 하지만, 부랑인은 발기가 되지 않는다. 작품 후반에도 기치조가 남자 하인에게 사다와 성교하지 않겠냐고 권유하지만, 늙은 하인은 발기가 되지 않는다고 답변한다.
그런데 기치조는 사다가 '늙은 여자 하인'과 성교해보라고 권유하자 정말로 해버린다. 그것은 주종관계이기에 일종의 강간에 해당한다. 하지만 사다가 그러했던 것처럼 여자 하인은 싫은 내색을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그 장면에서 다시금 '한번 창녀는 영원한 창녀'라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늙은 남자'는 성교를 할 수 없고 '늙은 여자'는 성교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곧 가해는 힘이 센 한창때에만 가능하나, 피해는 언제나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해는 시기가 한정되어 있으나 피해는 '영원한' 것이다. 일본의 과거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보면 힘으로 대변되는 남성성은 필히 쇠퇴하나, 유연함으로 대변되는 여성성은 필히 유지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감독이 원하는 국가는 부드러움의 가치다.
이 작품이 그토록 자극적인 것은 폭력을 섹스로 치환한 것이기에 그러하다. 어쩌면 <직쏘 시리즈>나 그와 비슷한 폭력 영화를 보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우리에게, 같은 강도의 섹스 영화는 왜 비판받아야 하는지 묻는 것 같기도 하다. 평자에 따라 이 영화는 섹스와 죽음의 결합으로 보이기도 하고, 혹은 육체의 관능미를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글을 보는 우리는 (아마도) 감독의 의도대로 이 영화를 보았으면 한다. 이것은 사랑과 전쟁이다.
1. 재밌게도 이 시기는 일본 경제가 급격하게 성장하던 중이었다. 영화가 개봉하고 15년 정도가 지나자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을 맞이하고 만다. 이러한 군사적-경제적 패퇴의 일치는 이 영화가 일본의 팽창에 대한 경고적인 성격을 띤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롭다.
2. 박찬욱은 <아가씨>에서 이 작품에 대한 오마쥬를 보내고 있다. 그가 영화광이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거의 확실하다. 이하는 스포일러이므로 생략.
3. 오시마 나기사가 예술 영화를 만들지만 전반적으로 영화가 친절한 편이어서 일반 관객도 관람에 어려움은 없다. 일례로, <감각의 제국>의 중간에는 불필요한 장면이 하나 삽입되어 있다. 밖으로 나와 어딘가로 향하는 기치조의 왼쪽으로 일본 군대가 오열을 맞추어 지나간다. 그 장면은 이 영화를 포르노그라피로 오독하는 관객에게 보내는 설명이자, 그 장면 이후로 급격하게 파멸해가는 두 주인공의 모습을 은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4. '무조건' 무삭제판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무삭제판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높은 선정성 탓에 이미 개봉 전부터 여기저기가 잘려나가 원본이 없다. 한국에서는 거기서 23분이 삭제된 채로 일반 개봉(86분)했고, '원본 아닌 원본(109분)'을 일부 영화제에서만 관람할 수 있었다. 현재는 DVD(크라이테리온 컬렉션, 102분)로 구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