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시아]는 연못에서 시작한다. 이 영화의 첫번째 샷은 위태롭다. 한 소녀가 연못 경계에 있는 나무에 누워 있다가,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일어서서 저택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소녀는 마치 물에 빠질것처럼 누워있다. 왜 하필 물가에서 영화를 시작할까. 아마도 이 영화 감독이 샘 페킨파여서 그럴지도 모른다. 헤모글로빈과 슬로모션에 취한 성질머리 더러운 마초. 그 마초는 물의 죽음과 땅의 생명 그 사이에 잉태를 할 수 있는 여자를 배치하면서 영화의 주제를 제시한다. 죽음과 삶, 그리고 매장의 경계를 여인이 가로지를 것이다. 그리고 슬로 모션은 죽음을 끊임없이 지연시키며 기록할 것이다.
곧이어 소녀가 위태롭게 누워있었던 이유가 등장한다. "알프레도 가르시아의 머리를 가져와라." 멕시코 갱 제페의 선언으로 [가르시아]는 비틀리고 우울한 여정을 시작한다. 제페에게 가르시아의 머리를 가져와야 하는 이유는, 허락없는 임신이다. 제페의 딸 테레사는 한량인 알프레도 가르시아와 통정을 했고, 그 결과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폭압적인 가부장은 이걸 용서치 않고 자신의 유사 아들들인 갱들을 이용해 알프레도 가르시아를 처벌하려고 한다. 이 처벌을 대리하는 자인 사펜즐리와 퀼이 여성이 배제된 게이 커플이라는 점은 (암시적이지만 그들은 여자를 싫어하고 파트너의 시체를 향해 눈물짓는 모습을 보인다.), 제페 일당이 극단적인 가부장과 남성성에 취해 있다는걸 보여준다.
사펜즐리와 퀼은 곧 가르시아의 친구였던 베니를 찾아낸다. 보통 이런 줄거리의 느와르/범죄 영화라면 베니를 좀 더 장르적으로 세공된 과거와 성격을 지닌 캐릭터로 묘사할 것이다. 하지만 페킨파와 고든 도슨이 쓴 시나리오에서 주인공 베니는 제페 일당의 위압적인 남성상과는 한발짝 떨어져있다. 한때 미군이었지만, 퇴직해 바 주인으로 살고 있는 베니는 위축되어 있다. 가끔 거칠게 굴지만 차라리 상처받은 채 그늘로 숨어든 짐승에 가깝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거친 과거의 일부였던 가르시아의 행적도 잘 알지 못하고 여성인 엘리타를 경유해서 알게 된다. 베니는 골칫거리에 관여하고 싶지 않고, 애인인 엘리타와 평온한 삶을 원한다. 하지만 금전적 이득은 그를 파국의 여정으로 향하게 만든다.
[가르시아]의 구조는 서부극 그것도 [와일드 번치]나 [관계의 종말] 같은 1970년대 페킨파가 즐겨 만들었던 폭력적인 서부극과 닮아있다. 그 중에서도 이 영화는 [관계의 종말]에 가깝다. 피에 절어 살았던 마초는 지쳤지만 생존을 위해 어쩔수 없이 옛 친구를 팔아야 하는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그리고 그 여정의 끝은 종말이다. 다만 페킨파는 이 여정을 평범한 서부극으로 만들지 않고, '카르텔 서부극'이라고 부를만한 현대 서부극의 영역에서 만들고 있다. 페킨파의 현대 영화들에서 이런 노선을 취한 영화는 그리 많지 않다는걸 생각해보면 흥미롭다. 결과는 기묘하다. 이 영화는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버린 사람에 홀려 파멸해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애도의 완수기도 하다.
가르시아의 머리는 그 점에서 영화가 추구하는 애도의 완수를 그로테스크하지만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직접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진 않지만, 알프레도 가르시아의 머리는 잘려진채 자루에 담겨 여러 사람을 오간다. 페킨파는 머리의 행방을 통해 인물 간의 갈등과 액션을 만들어내고, 나아가 영화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정작 가르시아의 죽음 자체는 아무런 의미 없는 사고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페킨파의 터치는 좀 심술궃은데 있다. 편안하게 매장되었다고 생각했건만, 제페의 복수심과 금전적 이득 때문에 가르시아의 머리는 주인의 몸을 떠나 무수한 사람들을 거쳐가야만 한다. 주인인 알프레도 가르시아는 이 미래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걸 바로잡으려고 하는 사람은 가르시아의 친구였던 베니 뿐이다. 효수된 머리와 브로맨스라. 페킨파의 악취미 중에서도 최고 악취미라 할 수 있겠다.
이 어처구니없지만 황망한 애도의 여정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폭력적인 사건들은 영화의 여정을 더욱 불편하고 우울한 감정에 푹 젖게 만든다. 이 영화에서 가장 불편한 장면을 꼽으라면 (페킨파가 선호했던 배우 중 하나인)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 바이커로 등장해 베니를 무력화하고 엘리타를 강간하려는 시퀀스가 있다. 일단 이 시퀀스가 그동안 숨어있었던 베니의 남성성과 폭력성을 끌어낸다는건 명백하다. 페킨파는 이 사건을 지금까지 야성을 잃고 안전하고 무력하게 살아온 베니가 가르시아의 목을 자르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당신은 그런 악한이 못되잖아요") 결국 베니는 그 응답에 답해 바이커들을 쏴 죽여버린다. 여기까지는 으레 있는 페킨파의 악취미려니 넘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뒤 흥미로운 연출이 있다. 불쾌한 강간 미수가 바이커의 죽음으로 끝나고 페킨파가 보여주는 시퀀스는 또다른 무기력과 연약한 고백이다. 사건을 수습하고 호텔 화장실 바닥에 앉아 울고 있는 엘리타에게 베니는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때 페킨파는 문을 열어놓고 욕실 바닥에 앉아있는 엘리타와 그 앞에 앉은 베니를 보여준다. 이 쇼트의 엘리타의 배치는 곰곰히 생각해보면 도입부 연못의 경계에 서 있던 테레사랑 닮아있다. 욕실이 물과 떼놓을수 없는 장소라는걸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여자는 물과 땅 경계선상에서 위태롭고, 남자는 그런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페킨파가 생각하는 순정 마초는 경계선상의 위태로운 여자를 감싸준다, 라는 제스처로 완성된다. 그리고 이 제스처는 결말과 연결된다.
흥미로운 부분은 [가르시아]에서 가장 현명한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은 여자다. 엘리타는 처음부터 죽음을 모독하려는 시도를 거부하지만, 남자의 회유에 어쩔수 없이 여정을 떠나게 된다. 돌이켜 보면 강간 미수 시퀀스에서 가장 현명하면서도 단호히 대처한 자 역시 여성 엘리타다. 그리고 가르시아의 목을 자를 기회가 왔을때도 엘리타는 전 애인의 안식을 모독하는것에 망설인다. 베니는 윽박지르면서도, 엘리타를 행복하게 하고 싶다고 사랑을 되뇌이지만 돌아온 것은 또다른 매장이다. 영화의 후반부는 지금까지의 여정을 되돌아가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베니는 먼지투성이가 되어가며 제페의 갱단원들을 쏴죽여 머리를 찾아오며, 사펜즐리와 퀼도 죽인다. 사랑했던 여자가 가지고 있는 바구니엔 옛 친구의 머리가 담기고, 머리를 건네주겠다는 제페의 부하들도 쏴죽인다. 베니는 제페의 저택에 반드시 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베니가 제페의 저택에 도착했을때, 제페는 새로 태어난 손자의 세례식을 치루고 있다. 무수한 사람들을 죽어갔지만 제페는 아무렇지 않게 탄생을 성수로 축복한다. 제페에게 베니는 묻는다. 16명의 사람이 죽일만큼 이 머리는 가치가 있었냐고. 하지만 제페는 그 머리를 돼지 먹이로 주라고 말한다. 머리의 가치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베니는 분노한다. 그 분노는 투박하지만 섬세한 사랑을 짓이기고 위선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폭력적인 가부장에 대한 분노기도 하다. [가르시아]의 기묘함은 시종일관 마초적인 태도로 밀고가다가 갑자기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여성과 연대하는 부분에서 극에 달한다. 자신이 자초한 무의미한 죽음 끝에 마초는 모든 것을 파괴해버리는 남성성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여성을 지키고 진정한 악과 동귀어진한다.
사실 결말에 드러나는 '멋진 척'은 다른 페킨파 영화와 비교해봐도 상당히 강한 축에 속한다. 게다가 이 결말을 마냥 페미니즘으로 이어진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베니의 대사엔 테레사를 위로보다는 가르시아를 향한 브로맨스가 강하게 드러난다. 한마디로 베니는 연대라고 하기엔 자기완결적인 멋에 지나치게 취해 있다. 이 자기완결적 멋이 제페랑 무슨 차이가 있냐고 반론 할수도 있을 것이다. 비슷하게 폭압적인 가부장에게 박해받는 여자를 돕는 카우보이들이 나오는 전작 [라이드 더 하이 컨트리]랑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명백하다. [가르시아]는 창작자에게 전권을 부여하는게 반드시 훌륭한 작품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좋은 예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판적으로 바라보더라도 이 결말이 후련한 카타르시스와 애잔한 감정을 남기는건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베니가 자기완결적인 미학에 빠져있더라도 방황하던 가르시아의 머리는 마침내 안식을 찾았고, 살아남은 테레사와 아이는 끔찍한 가부장에게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페킨파는 진정으로 무고했던 테레사와 아이야말로, 이 무의미한 폭력과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라 본다. 여성을 혐오하고 아이를 혐오한다고 악명높았던 페킨파답지 않다고 할까.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우울하고 기이한 방식으로 제의화된다. 페킨파는 어찌보면 카르텔 서부극을 빌어 고전 비극을 쓰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샘 페킨파, Sam Peckinpah
대표작 <주니어 보너> <게터웨이> <관계의 종말> <가르시아> <킬러> <철십자 훈장> <콘보이> <오스타맨>
샘 페킨파의 본명은 데이비드 새뮤얼 페킨파. 별명은 ‘피흘리는 샘’ ‘폭력의 피카소’. 페킨파는 오우삼, 월터 힐,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스승이며 현대영화에 처음으로 폭력을 주요 화두로 끌어들였다. 그의 대표작이자 수정주의 서부극의 원조격인 <와일드 번치 The Wild Bunch>(1969)는 개봉 당시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선과 악의 개념이 없는 무법자 총잡이들이 무지막지한 총싸움을 벌일 때마다 화면에는 선혈이 낭자하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슬로 모션으로 화면이 천천히 움직인다. 이 폭력미학으로 페킨파는 어둡고 아름답고 격렬한 미국 서부개척시대의 비가를 읊조렸다.
페킨파는 25년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다. 49년 USC대학에서 연극으로 학위를 받고 돈 시겔 감독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그는 50년대에 인기있었던 <건 스모크> <라이플맨> <웨스트너> 등 텔레비전 시리즈의 연출을 맡으면서 조금씩 이름을 알렸다. 대망의 첫 극영화 데뷔작은 61년 작품 <데들리 컴패니언 The Deadly Companions>(1961). 아들의 관을 들고 한 미망인이 길을 떠나는데 세명의 훌륭한 총잡이들이 아파치의 습격으로부터 미망인을 보호하려고 호위하면서 함께 여행한다는 얘기로, 페킨파는 착한 쪽이 이기는 관습적인 서부영화보다는 복잡한 현대에 비해 더 단순했던 서부시대의 정신을 그리워하는 자기식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페킨파의 출발은 그리 좋지 못했다. 두번째 작품 <오후의 총잡이 Ride the High Country>(1962)는 옛날부터 친구였던 두 나이든 총잡이가 사악한 총잡이들에 맞서 한 젊은 여성을 보호한다는 내용이다. 동이 터오는 20세기 말에 용기, 충성, 의무감 같은 서부시대의 전통적 가치들이 점점 사라져가는 순간을 페킨파는 나이든 총잡이들을 등장시켜 묘사했지만 스튜디오는 이 영화가 비대중적이라고 보고 탐탁지 않게 여겼다. 아파치에 맞서는 군대를 소재로 한 <던디 소령 Major Dundee>(1965)은 인종 편견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폭력을 행사하는 군인들의 이야기로 인물의 심리를 깊이있게 묘사했지만 촬영 후 페킨파는 편집권을 빼앗겼다.
그러나 페킨파는 곧 재기했고 페킨파 영화 중 가장 높은 매표수익을 올린 <와일드 번치>는 당시까지 나온 수정주의 서부영화 중 최고 수준이었다. 배경은 1914년 멕시코 혁명기, 파이크 비숍이 이끄는 무법자 집단은 서부지역에서 은행강도로 악명을 떨치다가 반혁명군 일당과 엮이게 된다. 페킨파는 이 영화 한편으로 서부영화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자동차와 기관총이 있는 시대에 총잡이들은 충성심, 명예, 단결, 영웅주의와 같은 낡고 닳아빠진 윤리를 위해 장렬하게 싸운다. ‘변화된 시대에 변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벌이는 최후의 항거처럼 보였다. 베트남전쟁의 우화를 빙 둘러서 표현한 <와일드 번치>로 자기 스타일을 완성했다. 장면마다 여섯대의 카메라를 설치하고 정상 속도, 느린 속도, 빠른 속도로 다양하게 촬영한 이 영화는 총잡이들의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질 때마다 총잡이들이 죽어가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느린 동작으로 화면을 잡아 서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 영화의 최종 프린트는 2시간31분이다. 화면수는 3642개였는데 이는 보통 영화의 6배가 넘는다.
그리고 페킨파의 짧은 전성기가 열렸다. <케이블 호그의 발라드 The Ballad of Cable Hogue>(1970)는 초기 서부개척시대에 대한 페킨파의 절절한 엘레지이며 페킨파가 다시 폭력장르로 복귀한 <어둠의 표적 Straw Dog>(1971)은 영국의 한 지방에 온 미국의 과학자가 그곳 건달들의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섬뜩한 영화다. 스티브 매퀸이 주연한 <주니어 보너 Junior Bonner>(1972)는 역시 호쾌한 남성윤리를 그리워하는 페킨파의 개인적 성향을 반영한 작품이고 <게터웨이 The Getaway>(1972)는 비전형적인 액션영화였다. 페킨파가 다시 도전한 서부영화 <관계의 종말 Pat Garret and Billy the Kid>(1973)은 마초시대의 종언에 바치는 서정적 만사였고 <가르시아 Bring Me the Head of Alfredo Garcia> (1974)는 B급영화의 정수라 부를 만한 개성있는 가작이었으나 <킬러 The Killer Elite> (1975) <철십자 훈장 Cross of Iron>(1977)은 좀 처졌다. 말년의 작품들에서 보여준 페킨파 특유의 고속 촬영 기법은 매너리즘의 흔적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어떤 소재를 다루든 페킨파는 남자들 집단의 공포와 미덕을 표현하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페킨파는 남자다움을 과시하는 속물이 아니라 자기식대로 타락한 세상을 난폭하게 통과했던 것이다. 마음 내부의 갈등을 견디는 페킨파 영화의 주인공들은 그 고독을 폭력이라는 과격한 수단으로 풀어내고 페킨파는 도덕이 무너지는 장엄한 광경을 느긋하게 시적으로 관조한다. 페킨파는 평생 그 단순하지 않은 삶의 도덕을 폭력미학으로 살펴보는 데 다 바쳤다.
"If they move", commands stern-eyed William Holden, "kill 'em". So begins The Wild Bunch (1969), Sam Peckinpah's bloody, high-body-count eulogy to the mythologized Old West. "Pouring new wine into the bottle of the Western, Peckinpah explodes the bottle", observed critic Pauline Kael. That exploding bottle also christened the director with the nickname that would forever define his films and reputation: "Bloody Sam".
David Samuel Peckinpah was born and grew up in Fresno, California, when it was still a sleepy town. Young Sam was a loner. The child's greatest influence was grandfather Denver Church, a judge, congressman and one of the best shots in the Sierra Nevadas. Sam served in the US Marine Corps during World War II but - to his disappointment - did not see combat. Upon returning to the US he enrolled in Fresno State College, graduating in 1948 with a B.A. in Drama. He married Marie Selland in Las Vegas in 1947 and they moved to Los Angeles, where he enrolled in the graduate Theater Department of the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the next year. He eventually took his Masters in 1952.
After drifting through several jobs -- including a stint as a floor-sweeper on The Liberace Show (1952) -- Sam got a job as Dialogue Director on Riot in Cell Block 11 (1954) for director Don Siegel. He worked for Siegel on several films, including 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 (1956), in which Sam played Charlie Buckholtz, the town meter reader. Peckinpah eventually became a scriptwriter for such TV programs as Gunsmoke (1955) and The Rifleman (1958) (which he created as an episode of Dick Powell's Zane Grey Theater (1956) titled "The Sharpshooter' in 1958). In 1961, as his marriage to Selland was coming to an end, he directed his first feature film, a western titled The Deadly Companions (1961) starring \Brian Keith and Maureen O'Hara. However, it was with his second feature, Ride the High Country (1962), that Peckinpah really began to establish his reputation. Featuring Joel McCrea and Randolph Scott (in his final screen performance), its story about two aging gunfighters anticipated several of the themes Peckinpah would explore in future films, including the controversial "The Wild Bunch". Following "Ride the High Country" he was hired by producer Jerry Bresler to direct Major Dundee (1965), a cavalry-vs.-Indians western starring Charlton Heston. It turned out to be a film that brought to light Peckinpah's volatile reputation. During hot, on-location work in Mexico, his abrasive manner, exacerbated by booze and marijuana, provoked usually even-keeled Heston to threaten to run him through with a cavalry saber. However, when the studio later considered replacing Peckinpah, it was Heston who came to Sam's defense, going so far as to offer to return his salary to help offset any overages. Ironically, the studio accepted and Heston wound up doing the film for free.
Post-production conflicts led to Sam engaging in a bitter and ultimately losing battle with Bresler and Columbia Pictures over the final cut and, as a result, the disjointed effort fizzled at the box office. It was during this period that Peckinpah met and married his second wife, Mexican actress Begoña Palacios. However, the reputation he earned because of the conflicts on "Major Dundee" contributed to Peckinpah being replaced as director on his next film, the Steve McQueen film The Cincinnati Kid (1965), by Norman Jewison.
His second marriage now failing, Peckinpah did not get another feature project for two years. However, he did direct a powerful adaptation of Katherine Anne Porter's 'Noon Wine" for ABC Stage 67: Noon Wine (1966)). This, in turn, helped relaunch his feature career. He was hired by Warner Bros. to direct the film for which he is, justifiably, best remembered. The success of "The Wild Bunch" rejuvenated his career and propelled him through highs and lows in the 1970s. Between 1970-1978 he directed The Ballad of Cable Hogue (1970), Straw Dogs (1971), Junior Bonner (1972), The Getaway (1972), Pat Garrett & Billy the Kid (1973), Bring Me the Head of Alfredo Garcia (1974), The Killer Elite (1975), Cross of Iron (1977) and Convoy (1978). Throughout this period controversy followed him. He provoked more rancor over his use of violence in "Straw Dogs", introduced Ali MacGraw to Steve McQueen in "The Getaway", fought with MGM's chief James T. Aubrey over his vision for "Pat Garrett & Billy the Kid" that included the casting of Bob Dylan in an unscripted role as a character called "Alias." His last solid effort was the WW II anti-war epic "Cross of Iron", about a German unit fighting on the Russian front, with Maximilian Schell and James Coburn, bringing the picture in successfully despite severe financial problems.
Peckinpah lived life to its fullest. He drank hard and abused drugs, producers and collaborators. At the end of his life he was considering a number of projects including the Stephen King-scripted "The Shotgunners". He was returning from Mexico in December 1984 when he died from heart failure in a hospital in Inglewood, California, at age 59. At a standing-room-only gathering that held at the Directors Guild the following month, Coburn remembered the director as a man "who pushed me over the abyss and then jumped in after me. He took me on some great adventures". To which Robert Culp added that what is surprising is not that Sam only made fourteen pictures, but that given the way he went about it, he managed to make any at 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