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침에 도를 듣고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이죠.《논어(論語)》<이인편(里仁篇)>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와는 정 반대로《도덕경(道德經)》첫머리에 노자(老子)께서는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즉 ‘도를 도라고 하면 이미 도가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정반대의 되는 이 말씀이 서로 통하는 점이 있다고 생각지 않으시는지요? 도(道)는 언어를 초월한 깨달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시골 초가지붕 처마 밑에 고드름을 고드름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항상 있는 고드름이 아닙니다. 날씨가 추워져 처마 밑에 매달려 있는 동안은 고드름이지만 녹게 되면 물이 되어 강물로 흘러들어 바다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전에는 눈이었고, 구름이었으며 또 바다물의 일부였을 것이죠. 그래서 노자는 도를 말로 할 수 있다면 항상 할 수 있는 도가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닐 런지요?
공자께서는 아침에 도를 듣고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것은 처마 밑에 고드름이 영상의 날씨에 녹아 물이 되는 것 같이 도는 한 때라도 그대로 있지 않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인간의 생로병사와 같은 것이죠. 공자께서는 삶의 실상을 이와 같이 꿰뚫어 보시고 아침에 도를 듣고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그래서 ‘도는 사물의 당연한 이치이니, 만일 그것을 얻어 듣는다면 살아선 이치에 순응하고 죽으면 편안해서 다시 여한이 없을 것이다.’라는 심정을 나타내신 것 아닌지요?
이 ‘조문도면 석사가의’라는 뜻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미 고정해서 이것이 도라고 하면 틀린 것이니까요? ‘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뜻으로 우리는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연암(燕巖) 박지원 선생은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목숨을 거는 일’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연암 박지원 선생의 해석과 같이 조선 초기 화가 최흥효 선생은 글씨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과거시험 도중 자신이 쓴 글씨에 빠져 과거시험 등락과 상관없이 그 시험지를 들고 집에 돌아와 글씨의 대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선 중기 그림의 대가 이징 선생은 그림에 목숨을 걸어서 어린 시절 다락에서 그림을 익히다가 3일 동안 집안 식구들이 찾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조선 중기 가인(歌人) 학산수 선생은 노래에 목숨을 걸어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감동할 만한 명창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생사불입어심(死生不入於心)이라! 대가(大家)가 된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세상의 영욕과 죽고 사는 문제에 전혀 개의치 않고 매진했던 사람이 아닌가요?
진정 목표를 향해 두려움 없이 정진하는 사람만이 위대한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위도일손(爲道日損)’이라 했습니다.
‘배움은 날마다 채우는 것이고,
도를 닦는 것은 날마다 비우는 것이다.’를 상기하면
‘조문도 석사가의’의 뜻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조문도석사가의’ ‘아침에 참된 이치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다.’는 말은 이 외에도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1. 아침에 사랑함의 이치를 들어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2. 아침에 사물의 이치를 얻어들으면 곧 삶이 순하고 죽는 것이 편안하여 여한이 없다.
3. 죽어가는 친구에게 ‘그대는 이미 진리를 깨우쳤으니 이제 죽은들 무슨 안타까움이 있으랴’고 말하는 것이다.
4. 공자가 죽을 나이에 이르러서도 세상의 도가 행해진다는 소리를 듣지 못함을 한해서 한 말이다.
5. 참다운 도를 깨닫는 순간 사람은 불생불멸의 이치를 알게 된다. 불생불멸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은 죽음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생사가 일여(生死一如)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