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과학 Social Sciences/지리 Geography

실크로드, 비단길, 대항해시대 이전 동서 교역 루트, 콘스탄티노플, 장안, 사주지로(絲綢之路), 천산북로, 천산남로, 초원길, 사막길(오아시스로), 바닷길, 마역로, 불타로, 라마로, 메소포타미아로, 호박로, 5대 지선

Jobs9 2024. 9. 4.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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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길 또는 실크로드(Silk road)는 대항해시대 이전 중국 대륙과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의 지중해 세계를 잇던 동서 교역 루트, 또는 이러한 교역 루트를 통해 연결되었던 교역망을 이른다. 이 루트를 통해 동서 간의 문물이 왕래했으며 비단길이 지나가는 곳마다 크고 작은 도시나 마을이 생겼다.  

유사한 고대의 국제 교역로로 중국, 티베트, 인도, 네팔 등을 연결하던 차마고도가 있다.

'비단길', 영어로 '실크로드'라는 어휘의 유래는 독일의 지리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이 중국에서 중앙아시아, 인도로 이어지는 옛 교역로를 연구하던 중 당시의 주요 교역품이 비단이었던 것에서 착안하여 '자이덴슈트라쎄(Seidenstraße)'로 명명하면서 사용되었다. 이 실크로드라는 말은 동서방 간의 교역로 중 스텝지대의 '초원길'과 인도양을 통해 이어지는 '바닷길'을 제외한 사막과 오아시스 일대의 도시들을 거치는 교역 경로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실크로드라는 명칭은 교역로가 확대되면서 다소 부적절해졌지만 유라시아의 원거리 무역과 문명교류의 통로에 대한 상징적이고 관용적인 명칭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중국에서는 사주지로(絲綢之路)라고 부른다.

 

silk road map



넓은 의미의 실크로드는 기원전 10,000년 전후 빙하기가 끝난 후 문명이 발생하고 인류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는데, 이때부터 생겨난 몇 갈래의 교통로로서 지금까지 문명 간 교류의 통로로 기능하는 것을 지칭한다. 반면에 좁은 의미의 실크로드는 기원전 8~9세기부터 만들어져 근대 이전까지 기능한 동서문명 교류의 통로를 지칭한다. 초원길과 오아시스길의 경우 중앙아시아의 도시국가나 유라시아의 유목국가들에게는 부와 국력의 원천이기도 했으며, 사산조 페르시아부터 일 칸국에 이르기까지 서아시아의 국가들에게도 경제적으로 굉장히 중요했다. 그러나 16세기에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대서양 바다를 통한 대양무역이 확대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초원길과 오아시스길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줄어들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이 길이 완전히 "쇠퇴"했다고 볼 수는 없다. 대항해시대의 중요성에 주목하는 서구 중심적 옛 사관에서는 내륙 실크로드가 교역루트로서 몰락했다고 간주하기도 했지만, 이쪽도 전 세계에서 차지하는 퍼센트가 줄어들었을 뿐 16세기 이후에도 이들 유라시아 내륙교역로의 무역랑의 절대량은 계속 증가했으며, 티무르 제국과 제국 붕괴 이후의 코칸트 칸국, 부하라 칸국, 히바 칸국 등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러시아, 페르시아, 인도, 중국을 엮는 삼각무역의 요충지로서 전성기를 지내며 번성하였다. 러시아는 이곳에서의 모피 무역을 비롯한 각종 교역에서 얻은 자본을 통하여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한다. 실크로드 지역이 러시아 제국에게 완전히 정복되는 건 한참 이후의 일이다. 

근대에는 러시아에 의해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비롯해 여러 대륙횡단철도가 부설되었으나 냉전시대 철의 장막으로 공산권 내부의 교통로 역할로 그 입지가 줄어들었다. 소련 치하에서 이 지역은 일률적인 산업화가 진행되고 사회간접자본이 설치되었으며, 그 영향으로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이 같은 경제권으로 묶이게 되었다. 특히 내륙에서의 운송은 철도만 한 것이 없기에 철도 부설은 특히 내륙국이거나 내륙국과 교류하는 국가들에 있어 중요한 경제적 의의를 가진다.

오늘날 중국은 일대일로라는 인프라, 경제, 문화 교류 정책을 추진 중이며, 이는 과거의 실크로드가 남긴 유산을 문화적, 지정학적으로 재활용하는 구상이 포함되어 있다. 이 길을 따라 중국의 아프리카 진출 전략까지 구상되었다. 2014년에는 실크로드: 창안-톈산 회랑 도로망라는 이름으로 실크로드상의 33개의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실크로드 종류


중세의 동서 교역로는 초원길, 사막길(오아시스로), 바닷길의 3대 간선과 마역로, 불타로, 라마로, 메소포타미아로, 호박로라는 5대 지선으로 나뉜다. 다만 이런 복잡한 구분이 생긴 것은 19세기 즈음에 서구 제국주의의 근대적인 팽창 과정에서 실크로드 연구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실크로드의 서양 기점은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로 알려진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오늘날 스웨덴에서 중앙아시아 사만 왕조의 금화나 혹은 중세 초 아프가니스탄에서 제작한 소형 불상 등등이 발견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실제로는 이것보다 그 폭과 규모가 더 방대하였다 볼 수 있다.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는 실크로드의 주요 경유지였다. 중국 측 기점은 장안이 대표적이다. 다만 쓰촨성 청두(성도)에서는 실크로드의 끝자락을 장안에서 서남쪽 방향으로 꺾어서 연장시켜 비단의 산지인 청두까지 이어지도록 그려 놓았다.[10][11] 한반도 역시 고조선시대부터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고려시대 등 고중세시대 전반적으로 초원길과 바닷길을 통해 교역품이 거래되었으며, 당시의 유물들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초원길
초원길 또는 스텝길(Steppe Silk Road)은 비단길 가운데 가장 먼저 발생한 교역로로, 흑해, 아랄해, 카스피해 일대에서 살던 스키타이인들이 개척하였다. 유라시아 북방 스텝 지대를 동서로 횡단하는 길이며 선사 시대부터 이용되었다. 오아시스로가 개척되기 전부터 초기 문명 전파의 주요 통로로 기능했었다. 

몽골 고비 사막 부근에서 흉노가 성장하면서 광활한 초원지대가 단일한 정치 체제로 통합되는 양상을 보이면서 본격적으로 초원길 경영이 이루어졌다. 이 초원길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흉노의 선우에게 통행증을 제시해야 했는데, 통행증이 없다면 이 길을 우회해서 가야 하므로 신체적, 경제적인 한계가 굉장히 많이 따랐다. 그러나 흉노가 경제적, 군사적으로 한나라를 공격하고 이 과정에서 한나라의 비단이 헐값 혹은 공짜로 흉노에 유입된다. 흉노는 이 비단을 그대로 서부 지역에 전달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사막길
사막길 또는 오아시스길(Oasis Silk Road)는 가장 널리 이용되었던 비단길의 중심 루트로서, 좁은 의미의 비단길은 바로 이 사막길을 의미한다. 파미르 고원 서쪽에서는 헬레니즘 제국 시기 그리스계 도시국가들이 인도 간다라 지방까지 교통로를 건설하면서 개척되기 시작했고, 파미르 고원의 동쪽에서는 한나라 때 장건이 월지와의 동맹을 위해 사신으로 파견되면서 교역망이 이어졌다. 

사막길은 중앙아시아를 가로질렀으며 이 길을 통해 로마 세계와 동아시아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교역품은 중국의 비단[12]과 로마의 유리 공예품이었다.[13] 또한 단 한 번뿐이지만 로마 제국의 사신이 한나라까지 오기도 했다. 

 

 

천산북로와 천산남로
중국 측 교역로는 장안에서 돈황을 거쳐 천산 산맥을 지나 파미르 고원을 통과하는 길이었는데, 이것도 천산북로(북비단길, Northern Silk Road)와 천산남로(남비단길, Southern Silk Road)로 나눠진다. 이러한 구분은 타클라마칸 사막과 같은 자연적인 한계가 강한 곳을 최대한 피해가면서 형성되었다. 초반에는 천산 산맥 남쪽을 지나는 길을 천산남로로 칭했는데, 인근 도시국가들이 물 부족과 사막화로 쇠퇴하고 북방 민족이 이곳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천산 산맥 북쪽 교역로를 개척하게 되었는데 이를 천산북로라고 한다.

이 길을 통해 중국의 차, 도자기, 비단을 전하게 된다. 제지 기술도 이 길을 통해 서역으로 전해졌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흔히 탈라스 전투 와중에 붙잡힌 중국인 제지공 덕분에 중동에 제지술이 전파되었다는 이야기가 알려져 있지만 고고학적 발굴 결과에 따르면 탈라스 전투 한참 이전인 서기 3세기 제지술이 이미 중앙아시아에 퍼져 있었다. 압바스 칼리파조 초창기에 재상을 지냈던 중앙아시아 발흐 출신 바르마크 가문이 지혜의 집 등을 후원하면서 대규모 제지공장을 건설한 시점과 탈라스 전투에서 제지 기술자가 붙잡힌 시점이랑 너무 짧다보니, 그 이전 이미 제지술이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가능했고 결국 고고학 발굴 결과 제지술이 탈라스 전투 이전 이미 중앙아시아에 퍼져 있었으며, 오히려 목면을 사용하여 중국의 그것보다 더 개량된 형태였다는 것까지 밝혀졌다.

카슈가르-호탄-뤄창-돈황으로 이어지는 길에 한나라 때의 유적들을 볼 수 있다. 다만 이름처럼 매우 험한 길이다.

 

바닷길
바닷길(Maritime Silk Road)은 기원후 1세기경에 개척되었다. 홍해에서 예멘을 거쳐서 페르시아 만 호르무즈 해협을 거쳐 인도로 가는 루트이다. 인도양으로 향하는 이 길을 통해 본격적으로 원거리 무역이 성행했다. 이로써 당대 로마는 동방의 물건을 해상으로 운송할 수 있었으며 베트남, 중국 남부로 추정되는 지역에까지 교류를 확대했다. 해상 수송은 대량수송의 장점이 있어 도자기와 향료, 차 등이 주로 오갔다. 따라서 비단이 오고간 육지의 비단길에 빗대 이 길은 '향료길', '도자기길'로 불리기도 한다. 고대도시 페트라와도 연관이 있는데 페트라는 북아프리카에서 지중해 연안까지 2500㎞ 향료길을 잇는 관문이기도 했다. 고대 아라비아 무역로의 중심지였던 페트라는 AD 2세기 로마에 함락된 이후 동서무역로의 중심이 비단길로 옮겨가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페르시아 만에서 중국에 이르는 바닷길은 중세 초까지 이른바 파르시로 불리는 페르시아인 조로아스터교도 상인들이 장악하였던 바 있다. 물론 교역상 중에는 조로아스터교도들만 있던 것은 아니고 힌두교도나 무슬림, 그리고 기독교도들도 적지 않은데 오늘날 인도 케랄라 주의 시로말라바르 가톨릭, 시로말랑카라 가톨릭, 말랑카라 시리아 정교회 등등은 당시 로마 제국이나 페르시아에서 남인도 해안 지대로 정착한 기독교인 상인들과 이들에게 전도된 현지 기독교인들의 후손이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실크로드
조선시대 초 제작된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는 중동과 유럽을 포함하여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해안 지대까지 묘사되어 있다. 

바닷길은 단순히 중국과 중동만을 연결하는 것이 아닌 아프리카 동부 해안지방까지 연계되어 있었다. 포르투갈 바스코 다 가마 이후 포르투갈인인들은 스와힐리 해안 지방을 정복한 후 대항해시대 항로에 포함시켰다. 

중·남아프리카의 경우 그레이트 짐바브웨도 킬와 술탄국을 통해서 내륙의 금을 해외로 수출했다. 

서아프리카의 사헬 일대 역시 몰디브와 교류했는데 몰디브에서 쓰였던 앵무조개 껍질이 말리 제국에서도 쓰였다.[14] 또한 사하라 종단 무역으로 서아프리카와 지중해 일대 사이의 무역이 흥하기도 했었으며 잠깐이었지만 중앙아프리카 중서부 카넴-보르누 제국 역시 사하라 종단 무역을 통해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었다. 

 

 

 

 

Silk Road
trade route

 

Silk Road, ancient trade route, linking China with the West, that carried goods and ideas between the two great civilizations of Rome and China. Silk went westward, and wools, gold, and silver went east. China also received Nestorian Christianity and Buddhism (from India) via the Silk Road. 

Originating at Xi’an (Sian), the 4,000-mile (6,400-km) road, actually a caravan tract, followed the Great Wall of China to the northwest, bypassed the Takla Makan Desert, climbed the Pamirs (mountains), crossed Afghanistan, and went on to the Levant; from there the merchandise was shipped across the Mediterranean Sea. Few persons traveled the entire route, and goods were handled in a staggered progression by middlemen.  

Silk RoadTrade caravans on the Silk Road, Central Asia.
Rice terraces in Vietnam. (food; farm; farming; agriculture; rice terrace; crop; grain; paddy; paddies;garden)

With the gradual loss of Roman territory in Asia and the rise of Arabian power in the Levant, the Silk Road became increasingly unsafe and untraveled. In the 13th and 14th centuries the route was revived under the Mongols, and at that time the Venetian Marco Polo used it to travel to Cathay (China). It is now widely thought that the route was one of the main ways that plague bacteria responsible for the Black Death pandemic in Europe in the mid-14th century moved westward from Asia.  


Journey along the Silk Road: History and mythsOverview of the Silk Road.
Part of the Silk Road still exists, in the form of a paved highway connecting Pakistan and the Uygur Autonomous Region of Xinjiang, China. The old road has been the impetus behind a United Nations plan for a trans-Asian highway, and a railway counterpart of the road has been proposed by the UN Economic and Social Commission for Asia and the Pacific (UNESCAP). The road inspired cellist Yo-Yo Ma to found the Silk Road Project in 1999, which explored cultural traditions along its route and beyond as a means for connecting arts worldwide across cultures. 


Lahore, Pakistan: Orange Line Metro TrainThe newly built Orange Line Metro Train, a metro project planned under the China-Pakistan Economic Corridor (CPEC), driving on a track after an official opening in Lahore, Pakistan, on October 26, 2020. 
China-Pakistan Economic Corridor (CPEC), massive bilateral project to improve infrastructure within Pakistan for better trade with China and to further integrate the countries of South Asia. It is part of the larger Belt and Road Initiative (BRI) to improve connectivity, trade, communication, and cooperation between the countries of Eurasia announced by China in 2013. 


The project was launched on April 20, 2015, when Chinese Pres. Xi Jinping and Pakistani Prime Minister Nawaz Sharif signed 51 agreements and memorandums of understanding valued at $46 billion. The goal of the CPEC is both to transform Pakistan’s economy—by modernizing its road, rail, air, and energy transportation systems—and to connect the deep-sea Pakistani ports of Gwadar and Karachi to the Xinjiang Uygur Autonomous Region in China and beyond by overland routes. (Xinjiang borders the countries of Mongolia, Russia, Kazakhstan, Kyrgyzstan, Tajikistan, Afghanistan, Pakistan, and India, and the ancient Silk Road ran through its territory.) This aims to reduce the time and cost of transporting goods and energy such as natural gas to China by circumventing the Strait of Malacca and the South China Sea. The initiative was also set to open several special economic zones (SEZs), modeled on similar zones in China that offer incentives for investment and are intended to spur rapid economic growth. The announcement of joint space and satellite initiatives between Pakistan and China, spurred by the CPEC, followed in 2016. 


By the end of the 2010s, the program had achieved a number of successes for Pakistan, particularly in terms of infrastructure. Hundreds of miles of highways and railways had been completed. Pakistan’s capacity for electric power generation had also increased dramatically; although renewable energy made up only a fraction of the new energy projects, the country’s first solar power plant was inaugurated in May 2015. The Orange Line Metro Train system in Lahore, launched in October 2020 and the first of its kind in the country, was the most lauded urban project to come out of the early CPEC program.


But the CPEC initiatives proved to be a significant burden on Pakistan’s already strained balance of payments. Five years into the program, debt owed to China made up more than one-fourth of Pakistan’s total debt as it struggled to make its external payments. The economic impact of the global COVID-19 pandemic also slowed progress on CPEC projects, exacerbated Pakistan’s economic crisis, and left China hesitant to grant leniency on debt payments. Although the project gave a boost to job creation in Pakistan, promises that it would bolster Pakistan’s industrial sector and increase exports remained largely unrealized into the early 2020s. And even though the CPEC had expanded energy infrastructure, the costs for fossil fuel and upgrading an aging power grid led to continued power shortages and failures throughout the country. Furthermore, some construction, especially in the province of Balochistan, faced setbacks from violence by local militants who were opposed to the CPEC projects in their area. 



Rise and consolidation of imperial Rome


A period of unrest and civil wars in the 1st century bce marked the transition of Rome from a republic to an empire. This period encompassed the career of Julius Caesar, who eventually took full power over Rome as its dictator. After his assassination in 44 bce, the triumvirate of Mark Antony, Lepidus, and Octavian, Caesar’s nephew, ruled. It was not long before Octavian went to war against Antony in northern Africa, and after his victory at Actium (31 bce) he was crowned Rome’s first emperor, Augustus. His reign, from 27 bce to 14 ce, was distinguished by stability and peace. 


statue of the Roman emperor AugustusStatue of the Roman emperor Augustus, 1st century ce.
Augustus established a form of government known as a principate, which combined some elements from the republic with the traditional powers of a monarchy. The Senate still functioned, though Augustus, as princeps, or first citizen, remained in control of the government..

With a mind toward maintaining the structure of power entrusted to his rule, Augustus began thinking early about who should follow him. Death played havoc with his attempts to select his successor. He had no son and his nephew Marcellus, his son-in-law Agrippa, and his grandsons Gaius and Lucius each predeceased him. He eventually chose Tiberius, a scion of the ultra-aristocratic Claudia gens, and in 4 ce adopted him as his son.

The Roman Empire
Tiberius (reigned 14–37) became the first successor in the Julio-Claudian dynasty and ruled as an able administrator but cruel tyrant. His great-nephew Caligula (37–41) reigned as an absolutist, his short reign filled with reckless spending, callous murders, and humiliation of the Senate. Claudius (41–54) centralized state finances in the imperial household, thus making rapid strides in organizing the imperial bureaucracy, but was ruthless toward the senators and equites. Nero (54–68) left administration to capable advisers for a few years but then asserted himself as a vicious despot. He brought the dynasty to its end by being the first emperor to suffer damnatio memoriae: his reign was officially stricken from the record by order of the Senate.  

Following a war of succession, Vespasian became emperor, and the Flavian dynasty was established. His reign (69–79) was noted for his reorganization of the army, making it more loyal and professional; for his expansion of the membership of the Senate, bringing in administrators with a sense of service; for his increase and systematization of taxation; and for his strengthening of the frontiers of the empire (though little new territory was added). The brief but popular reign of his son Titus (79–81) was followed by the autocracy of Domitian (81–96), Vespasian’s other son, who fought the senatorial class and instituted taxes and confiscations for costly buildings, games, and shows. A reign of terror in his final years was ended by his assassination. The Flavian dynasty, like the Julio-Claudian, ended with an emperor whose memory was officially damned. 


Height and decline of imperial Rome
Domitian was succeeded by an elderly senator of some distinction, Marcus Cocceius Nerva (96–98). Among the beloved rulers of Rome that succeeded him were Trajan (reigned 98–117), Hadrian (117–138), Antoninus Pius (138–161), and Marcus Aurelius (161–180). Together these are known as the Five Good Emperors. Their non-hereditary succession oversaw a golden age, which witnessed a considerable amount of expansion and consolidation. But all the changes that occurred during this era, beneficial as they were, brought with them the attendant evils of excessive centralization. The concentration of an empire in the hands of an emperor like Commodus (180–192)—juvenile, incompetent, and decadent—was enough to steer it toward decline.

The following century was plagued by strife and mismanagement. When the commander of the Danube army, Septimius Severus, was swept to power in 193, he effectively made Rome a military monarchy. The “barbarian invasions” weighed heavily on the empire, as did usurpations and political destabilization. The instability fed on itself and was responsible for heavy expenditure of both life and treasure. Disruptions in commerce, harsh taxation, inflation, and extortion from stationed troops all contributed to perpetual economic hardship for decades. 


A period of recovery began with Diocletian (284–305), whose broad reforms renewed the integrity and cohesion of the imperial administration. His most notable adjustment was the reorganization of the empire into a tetrarchy, wherein power was divided among himself, Maximian (who became Augustus, or emperor, in 286), Constantius (who became Caesar, or hereditary prince, in 293), and Galerius (who also became Caesar in 293). The arrangement proved practical in stabilizing the empire for a time against usurpation, and it also promised the rulers legitimacy and regular succession.

The tetrarchy soon led to confusion, however, and by 308 there were seven pretenders to the title of Augustus. Among them was Constantius’s eldest son, Constantine, who was passed over for formal succession. As a high-ranking military tribune, however, he had a forceful command and was able to eliminate his rivals successively in the West. He became the uncontested emperor of the West in 312 and, upon the defeat of his co-emperor in the East, he became the sole Augustus of the empire in 324. 

Constantine’s reign (312–337) saw significant and lasting changes to the Roman Empire. Christians, who had been tolerated at best—but often tortured or killed—found new favor after the Edict of Milan (313) assured toleration for all religions. From about 320 the Roman state no longer persecuted Christians but rather showered Christian institutions with patronage. In 324 Constantine relocated the imperial capital to Byzantium (which was renamed Constantinople), a move whose strategic and economic benefits helped reinvigorate the state for some time. But Constantine failed to save the empire from decline. The last of his line, Theodosius I (379–395), was the last emperor to rule over a unified Roman Empire. The Western Empire, suffering from repeated invasions and the flight of the peasants into the cities, had grown weak compared with the East, where spices and other exports virtually guaranteed wealth and stability. When Theodosius died, in 395, Rome split into Eastern and Western empires. 


The West was severely shaken in 410, when the city of Rome was sacked by the Visigoths, a wandering nation of Germanic peoples from the northeast. The fall of Rome was completed in 476, when the German chieftain Odoacer deposed the last Roman emperor of the West, Romulus Augustulus. The East, always richer and stronger, continued as the Byzantine Empire through the European Middle Ages. 

Legacy of Rome


During the later republic and most of the empire, Rome was the dominant power in the entire Mediterranean basin, most of western Europe, and large areas of northern Africa. The Romans possessed a powerful army and were gifted in the applied arts of law, government, city planning, and statecraft, but they also acknowledged and adopted contributions of other ancient peoples—most notably, those of the Greeks, much of whose culture was thereby preserved. 



ColosseumInterior of the Colosseum in Rome.

Pont du Gard, Nîmes, FrancePont du Gard, an ancient Roman aqueduct near Nîmes, France.
The Roman Empire was distinguished not only for its outstanding army—the foundation upon which the whole empire rested—but also for its accomplishments in intellectual endeavors. Roman law, for example, was a considered and complex body of precedents and comments, which were all finally codified in the 6th century (see Justinian, Code of). Rome’s roads were without match in the ancient world, designed for comparatively fast transportation and adapted to a wide variety of functions: commerce, agriculture, mail delivery, pedestrian traffic, and military movements. Roman city planners achieved unprecedented standards of hygiene with their plumbing, sewage disposal, dams, and aqueducts. Roman architecture, though often imitative of Greek styles, was boldly planned and lavishly executed. Triumphal arches commemorated important state occasions, and the famous Roman baths were built to stir the senses as well as to cleanse the body. 
 
Finally, Latin, the language of the Romans, became the medium for a significant body of original works in Western civilization. Cicero’s speeches, the histories of Livy and Tacitus, Terence’s drama, and above all the poetry of Virgil are all part of the legacy of R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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