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
조선 인조조 왕세자
昭顯世子
1612년 2월 5일
(음력 광해군 4년 1월 4일)
한성부 회현방 능양군 사저
(現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
책봉
1625년 3월 5일
(음력 인조 3년 1월 27일)
한성부 경덕궁 융정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45)
사망
1645년 5월 21일 (향년 33세)
(음력 인조 23년 4월 26일)
한성부 창경궁 환경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능묘
소현묘(昭顯墓) → 소경원(昭慶園)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
1625년 3월 5일 ~ 1645년 5월 21일
(음력 인조 3년 1월 27일 ~ 인조 23년 4월 26일)
조선 제16대 임금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의 장남. 효종, 인평대군, 용성대군의 친형이며 전주 이씨 소현세자파의 파조이다.
묘소
순회묘로 명명된 순회세자 무덤의 전례에 따라 소현묘로 명명되었다가 1870년(고종 7년)에 순회묘, 의소세손의 의소묘와 함께 원(園)으로 개칭되었다. 무조건 '세자 무덤=원(園)'이 아니고 원이 아닌 묘로 명명했으니 격을 낮췄다고 하면 안 된다. 세자의 무덤을 원으로 일괄 명명함은 대한제국이 점차 일본에게 잠식되어 망하기 직전인 고종 때의 일이다.
그전까진 정조가 비명에 죽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은묘에서 영우원(永祐園), 현륭원(顯隆園)으로 개칭한 사례가 전부로 그 외엔 묘라고 부르다 의경세자, 효장세자, 효명세자처럼 추존되면 릉으로 올리는 식이었다.
사도세자도 그가 조선사에 유일무이한 부왕에게 처분당한 세자라서 큰아버지 진종(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된 정조가 선왕과의 의리를 내세우는 신하들을 무시하고 추존하는 게 불가능해 궁여지책으로 원으로라도 개칭한 것이지 단순한 병사였다면 바로 왕릉으로 격상되었을 것이다.
소현세자의 소경원은 서삼릉 권역에 있다. 그러나 주변 부지가 농협 젖소개량소, 군부대로 둘러싸여 있어 비공개 구역이다. 특히 그 아들인 경선군과 경완군의 무덤은 군부대 권역 내에 있다.
자녀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는 3남 5녀를 두었으며, 소현세자 사후 유산한 넷째 아들까지 포함하면 4남 5녀이다.
경선군 이석철/이백: 제주도 유배 후 돌림병으로 사망. 소현세자의 장남이기 때문에 경안군의 아들과 손자가 사후 양자 제도를 통해 그의 대를 이었다.
경완군 이석린: 역시 제주도 유배 후 돌림병으로 사망.
경안군 이석견/이회: 제주도 - 강화도 - 교동도로 유배지를 옮겨다니다가 결국 방면되었다. 혼인 이후 슬하에 2남을 두었으며, 혼인한 지 6년 뒤인 23세에 요절했다.
경숙군주: 구봉장에게 하가하여 1남을 두었다.
경녕군주: 박태정에게 하가하여 5남 4녀를 두었다.
경순군주: 소현세자의 자녀들 중 가장 장수했으나(55세), 19세에 남편 변광보가 사망하여 후손은 없다.
소현세자와 강빈 사이에서 첫째, 둘째로 태어났지만 어려서 요절한 딸이 2명 있으며, 《승정원일기》에 출생과 장례에 대한 기록이 있다.
소현세자 사후, 1646년 1월에 유복자이자 넷째 아들을 출산했다. 이때 강빈이 별당에 유배된 상태로 해산을 한 탓인지 아이는 사산했으며 출산을 지켜본 관원이나 의원들이 없다시피했기에 강씨 사후 수십년뒤 벌어진 처경 사건의 빌미가 여기서 비롯되었다.
세 아들 중 경안군 이석견(이백)만 후손을 남겼기 때문에 소현세자의 남계 후손은 모두 경안군의 후손이다. 왕이 된 효종의 직계가 갈수록 손이 귀해지다가 끊어져 버린 것과 달리7 소현세자의 4살짜리 막내 아들이 8년에 걸친 섬에서의 귀양살이를 버텨내고, 이후 여러차례 역모에 연루되어 화를 입었음에도 끝까지 대를 이어 살아남아 그 후손들이 오늘날 전주 이씨 소현세자파로 남아있다.
소현세자파가 계속 많은 자식을 두며 악착같이 대를 이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역으로 왕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는 유교적 종법질서가 강화에 영향을 받은 처첩관념의 심화로 인한 간택후궁 수가 줄어들고 유교적 예제, 특히 상례와 제례기간 동안의 재계기간 엄수와 상례와 제례대상자 수의 증가로 인한 재계기간이 크게 증가하는데 이는 곧 금욕 기간의 증가로 이어져 왕과 왕비의 성생활을 제약하고 출산력 감소의 주된 원인으로 작용했다. 다시 말해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으면 왕실이 손이 번창했을 거라는 일부의 추정은 아무 근거없는 희망사항이다.
아들들은 왕위 계승권 문제 때문에 죽거나 짧고 불운한 삶을 살았으나, 남겨진 세 딸은 기록이 전혀 없다. 다만 효종이 청나라에서 공주를 왕비로 시집보내라고 명령했을 때10 청나라로 보내지 않고 서둘러 시집보냈다. 다만 이것만 가지고 효종이 조카딸들만큼은 나름 인간적으로 아꼈다고 단정하긴 어려운 것이, 효종이 소현세자의 딸들을 청나라로 보내지 않은 건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과 반항심의 발로로도 해석 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도 효종이 조카딸들을 군주로 추증해 왕족 대접을 해준 것도 아니다. 공주나 군주가 되어야 나라에서 녹봉이 지급되고, 시가에서도 종친녀로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을 수 있다. 효종은 자신의 딸들 같은 경우엔 창경궁 내 사위와 함께 살 처소를 지어줄 만큼 예뻐하고 아꼈다.
반면 어린 나이에 뿔뿔이 흩어져 시집간 소현세자와 강빈의 딸들은 효종이 죽기 두어 달 전에야 비로소 군주 칭호를 받았고, 부모와 형제들이 죽은지 10여 년이 흐른 뒤에야 소현세자의 딸들은 본래 신분을 회복하면서 시댁에서도 나름 대접받고 살게 되었다. 그러니까 효종 9년까지만 해도 소현세자 집안은 죄인 집안이었던 셈인데 그럼 이석견에게도 냉랭하게 대하다가 죽기 직전에야 봐줬냐면 그건 또 아니고, 인조에 비해서는 온건한 처분을 내려서 즉위 후 이듬해에 유배지를 제주에서 강화로 옮겨주었고13 효종 5년에는 이석견의 유배를 풀어주었다. 즉 효종은 인조에 비해서 보면 소현세자 집안에 온정적이었다.14 다만 한번에 복권시킨 게 아니라 차근차근 과정을 밟다보니 이석견의 복권은 좀 늦게 이루어졌고, 이에 덩달아 소현세자의 딸들 역시도 늦게 복권된 것이다.
여담으로 1676년(숙종 2년)에 처경(處瓊)이라는 승려가 소현세자의 유복자를 사칭해 소동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처경은 평해군의 향리 손도(孫燾)의 아들로 승려가 된 후 1671년(현종 12) 무렵부터 신승(神僧)으로 자처하면서 경기도 지방을 떠돌아다녔다. 그는 수려한 용모와 화려한 언변과 작은 옥부처상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면서 생불(生佛)로 불렸으며 따르는 추종자가 많았고 그중에는 궁중 나인이나 양반 세도가들도 있었다. 경성부에 사는 사대부 집안의 여종 묘향(妙香)이 자신이 소현세자의 유복자를 닮았다는 말을 듣고 같이 작당하여 가짜 문서를 만들어 자신이 강빈이 낳은 소현세자의 (죽었다고 알려진) 유복자로 사칭하며 남인의 거두이자 영의정인 허적(許積)에게 접근해 사기극을 벌이려 했지만 발각되어 묘향과 함께 처형되었다.
평가
소현세자가 조선인 포로 쇄환이나 각종 외교적 현안에서 조선의 입장을 대변하며, 조선의 세자로서 부끄럽지 않고 현명하게 처신한 것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더 나아가 볼모 생활 중 보인 변화를 통해 계몽군주의 씨앗을 가지게 되었을 수도 있다. 성리학적 가치에 회의를 느꼈고, 아담 샬과 교류하며 가톨릭에 호의를 가졌으며 호기심을 보였다. 오늘날에도 이런 평가는 대중들에게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최근에는 기존의 소현세자 이미지에 대한 반론이 생기고 있으며, 《심양일기》나 《동궁일기》, 《승정원일기》를 파고 드는 사람들은 소현세자의 이런 기존 이미지들이 과장이나 허구라고 여기는 수정주의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이에 따르면 소현세자는 조선과 청나라 간의 입장을 조율하는 본인에게 버거운 임무를 수행한 나머지 스트레스를 못 이겨 지병을 달고 사는 허약 체질의 환자였으며, 세자로서의 할 일은 했지만, 딱히 기존 질서에 대해 반감을 드러낸 적도 없는 존재였다. 인조는 이 아들이 결국 골골거리다 죽자, 건강하고 장성한 봉림대군을 계승자로 확정짓기 위해 소현세자 가족을 숙청했지만, 결코 인조가 맏아들을 사랑하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제반 사료
최근 방대한 기록들이 새로이 연구되면서 대중적인 이미지가 좋은 소현세자에 대한 수정주의적 해석도 많이 제출된 바 있다. 실제로 소현세자의 일기는 여러 세자들의 일기 중 가장 먼저 번역된 것이기도 하며, 《심양일기》나 《동궁일기》, 《승정원일기》를 통해 기존의 《조선왕조실록》이나, 아담 샬의 《회고록》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정보들이 대거 밝혀진 것이 사실이다.
《심양일기》, 《동궁일기》, 《승정원일기》가 사료로서 낸 성과는 크게 두 가지로, 첫째는 소현세자의 죽음이 기존의 인식대로의 독살이 아닌 병사의 가능성이 강하게 제기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병자호란 이전 소현세자와 강빈 사이에 아이가 원손 하나가 아니고 셋이었다는 점이다. 특히 《승정원일기》나 《심양일기》에 나오는 소현세자 진료 기록은 여러 논문들에서 적극 인용되었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은 《승정원일기》를 토대로, 당시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기록들을 발췌해, 《심양일기》나 《동궁일기》, 《승정원일기》만 읽어서는 알 수 없는, 당대 사람들만이 아는 팩트나 분위기, 맥락을 첨가해 정리한, 어떤 의미에선 더 본질에 가까울 수도 있는 사료이다.20 실제로 1차 사료인 《승정원일기》엔 간략히 나온 사건이 《조선왕조실록》에선 맥락을 설명하기 위해 《승정원일기》에 없었던 일까지 덧붙여 훨씬 자세히 소개되는 경우도 있다.
만약 《동궁일기》나 《심양일기》가 정말 소현세자의 개인 저서이고, 《조선왕조실록》에서 다루지 않는 다양하고 시시콜콜한 주제에 관해 솔직히 이야기한다면, 충분히 소현세자의 철학이나 내면, 실체를 파악하는 데 있어 《조선왕조실록》보다 우선해도 좋을 만한 공신력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료들 역시 《조선왕조실록》과 마찬가지로 사관이나 시강원 스승들의 눈으로 씌여진 것이며, 분량만 많지 주제는 비슷하다.21 게다가 《조선왕조실록》처럼 앞뒤 맥락을 부연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도 별로 없다. 마치 그날의 의무처럼, 날씨, 왕의 위치, 공식 행사등 정해진 주제에 대해 간략한 메모들만 나열해 놓기 때문에, 수백년 후 현대인이 자의적인 해석으로 맥락을 창조하다 보면 오히려 본질이 산으로 갈 위험도 있다.
예컨대 《동궁일기》나 《심양일기》만 읽다 보면, 소현세자는 평생 강빈과 감정적인 교류가 거의 없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사관들이 그런 건 기록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소현세자와 강빈이 1년에 손 꼽을 정도로만 말을 섞다가, 어쩌다 잠만 한번 자면 바로 아이가 떡 생겨버리는 이미지도 가능하다. 더군다나 《심양일기》는 소현세자의 눈병이나 감기에 대한 기록은 남겨도, 자녀 출생은 일절 기록하지 않는 바람에 《심양일기》만 보면 대체 군주와 왕손들이 어디서 왔나 싶을 정도다. 하지만 두 사람의 좋은 금슬은 《조선왕조실록》에 남겨진 일련의 기록과, 그들이 자식을 만든 숫자와 타이밍에서 유추된다.22
이처럼 《심양일기》나 《동궁일기》가 소현세자의 전부라고 여기다 보면, 아담 샬의 회고 같은, 소현세자의 개인 생각이 드러난 희귀한 자료는 어떻게든 허구로 몰아붙이거나 평가절하할 수밖에 없다. 《심양일기》만 보면 소현세자는 가톨릭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소현세자가 가톨릭을 처음 접했으리라 추정하는 북경에서의 70여 일 간, 《심양일기》는 쓰이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왕조실록》에서 나온 소현세자의 인성이나 성향에 대한 총평을 비롯해 당대 사람들이 바라본 소현세자의 총체적인 인상 역시, 당연히 사료들을 해석하는 참고자료가 되어야 할 것이다.
'기존 사료는 틀렸고, 새로운 사료가 진실이다'라는, 뭔가 극적 반전을 갈망하는 흑백논리로 접근하는 것 보단, 양자를 모두 사료로 인정하고 상호 보조하며 보는 것이 소현세자의 실체에 더 정확히 다가서는 길로 보인다.
유교 질서에 대한 태도
《조선왕조실록》에 나온 졸기를 보면, 소현세자는 머리는 좋지만 낯을 가리는 성격이었다.23 특히 조선 사회의 주류층인 성리학자들과 거리를 뒀던 듯, 코드가 맞는 사람하고만 어울린다는 식으로 비판받았다. 그런데 실록에 따르면, 소현세자와 코드가 맞는 이들은 무인들 및 노비들이었다.
소현세자가 사관들에게 말을 아끼고 거리를 두는 성향은 볼모 생활 때만 나타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동궁일기》를 보면, 어린 소현세자는 성리학 교재를 반복 암기시키며 강압적으로 다그치는 스승들을 버거워했으며,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동공 대지진이 일어나거나 구토를 하는 정서 불안을 보이기도 했다.24 물론 소현세자는 스승들의 가르침을 어떻게든 따르며 훌륭한 국본(왕세자)으로 거듭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소현세자가 강압적인 스승들 앞에서 자신의 모든 생각을 편하게 털어놓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심양일기》에서 그나마 엿볼 수 있는, 사관들 앞에서 밝힌 소현세자의 심리는, 여인도 사냥터에 말 타고 참여하는 청나라의 문화를 보고 느낀 쇼크, 그리고 몰락해가는 명나라에 대한 애환, 조선인 포로들의 애환 등이다. 최근에 나온 소현세자에 대한 창작물엔 이런 점들이 적극 반영된다.
천주교에 대한 관심
아담 샬과 황비묵의 회고
소현세자가 가톨릭을 접했다는 기록은 예수회 소속 아담 샬 신부의 회고와, 북경 천주당 남당의 신부였던 황비묵의 회고에서 나온다. 두 사람은 아담샬이 소현세자와 친교(親交)를 나누고 그가 천주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고 회고한다.
아담 샬 신부는 1619년 마카오에 상륙해 1623년 북경에 입성하였다. 1627~1630년까지 서안에 파견되었던 것을 제외하면 1666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 북경에만 머물렀다. 그는 1622년부터 1658년까지 자신과 중국 가톨릭에 관련한 사건들을 적은 라틴어 회고록 〈Historica Relatio〉를 남겼다.
북경 남당의 신부였던 황비묵의 회고에 따르면, 1644년(인조 22년) 9월, 소현세자와 아담 샬이 처음 만났다. 소현세자는 만나는 사람과 갈 수 있는 사람을 제약받아, 실권자 도르곤의 허가를 받아야 했을 가능성이 높은 인질의 신분임에도, 아담 샬 신부와 꽤 여러번 교류했으며, 주로 역법을 배운다는 핑계로 학자들을 대동하고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소현세자가 직접 성당을 찾기도 하고, 때론 아담 샬이 세자가 거처하는 곳(심양관)을 자주 방문해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자는 아담 샬을 통해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지동설이나 지구 구형론을 접하게 되고 수하의 사람을 보내 아담 샬로부터 서양 천문학과 역법을 전수받도록 하였다.
또, 황비묵의 목격담에 따르면, 소현세자와 아담 샬, 두 사람 사이에는 깊이 뜻을 같이 하는 바가 있었다고 한다. 아담 샬은 천주교가 바른 길임을 연달아 이야기하고, 세자도 자못 듣기를 좋아하여 자세히 묻곤 하였다 한다. 그러다 세자가 조선으로 돌아가게 되자, 아담 샬이 선물로서 그가 지은 천문, 산학, 성교정도 등의 여러 서책과 지구본, 그리고 천주상을 보냈다. 세자는 이를 받고 손수 한문으로 편지를 써서 감사의 뜻을 밝혔다. 그 편지 내용에 감동한 아담 샬은 그것을 라틴어로 직접 번역해 회고록에 첨부했다.
이 아담 샬의 기록속 소현세자 서신을 맨 처음 발견한 것은 일본인 학자 야마구치 마사유키다. 다만 야마구치는 소현세자의 서신 중 일부만 번역했으며, 이후 아담샬의 회고록의 라틴어 원문과, 소현세자의 서신 번역본은 한국 학자들에 의해 심도있게 연구되어 왔다.
아담 샬의 회고로 간접 기록된, 소현세자가 개인적으로 보낸 서신은, 소현세자의 내면이 솔직하게 드러난 매우 희귀한 사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현세자에 관한 기록들이 아무리 방대하다 한들, 그것들은, 국본으로서의 모습을, 성리학적 필터를 거쳐 담은 공문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현세자는 아담샬의 서신에서 이런 말을 한다.
조선에도 이런 종류의 책들(덕성을 함양하라 하는 책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책들은 거짓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들이 수백년에 걸쳐 진실과는 아주 크게 동떨어져 있는 서적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중략)...조선 사람들이 지켜왔던 잘못된 가르침의 숭배 전통으로 말미암아, 천주의 위대함이 공격 당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후략)
동궁일기나 심양일기에서 성리학 사관들이 본 소현세자의 모습이 비록 분량면에서는 압도하나 소현세자의 전부가 아니라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가 아담 샬의 서신 때문이다.
소현세자는 원자로 책봉된 이래, 평생 시강원 스승들에게 둘러싸여 성리학적 덕성 교육을 받았고, 그것에 따라 훌륭한 국본의 모습을 보이려 노력해왔다. 하지만 북경에서 아담 샬과 불과 몇 번의 교류 끝에, 소현세자는 자신이 평생 받았던 가르침이 '거짓으로 가득찬 것'이었다고 단언한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그간 소현세자가, 동궁일기나 심양일기의 화자들이 강조하는 성리학에 줄곧 회의를 느끼고, 심리적으로 경계하거나, 최소한 방황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이는 소현세자가 기회만 닿으면 학문 경연을 중단해 버렸던 모습과도 모순되지 않는다.
또 한 가지, 만약 소현세자가 이런 서신을 양이에게 보냈다는 사실이 조선에 있는 누군가에게 들어가면, 소현세자는 조선의 뿌리이자 근간인 성리학에 도전하고자 하는 마인드를 지닌 국본으로, 숙청 대상이 되고도 남았을 수준이다. 그만큼 아담 샬의 서신에서 읽히는 소현세자의 태도는 급진적이다.
아담 샬 기록의 신빙성
소현세자의 태도가 너무 급진적인 데다, 기존의 동궁일기, 심양일기에서는 암시조차 안 되던 속내이기 때문에, 오히려 아담 샬의 과장적 기록이 아닌가 의심하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아담 샬의 회고록엔 트집이 잡힐 만한 부정확한 부분들이 있다. 일단 아담 샬은 선교사였다. 따라서 자신이 했던 포교의 업적을 과장하면 과장했지, 축소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아담 샬은 용어적 오류들을 별 생각 없이 회고록에 남겨놓았다. 예컨대 아담 샬은 소현세자를 조선의 왕으로 착각했다. 만주인들이 조선 왕국을 점령하고 요동에 포로로 잡아온 '조선 왕'이 역법을 익히려고 조선 역관들을 대동해 찾아왔고 아담 샬 신부 자신은 이를 성심성의껏 도와주며 조선 왕과 우정을 쌓았다는 것이다. 또 분명 라틴어에도 '인질'이라는 용어가 분명 있음에도, 그는 대신 '포로'라는 용어를 쓴다. 또, 소현세자의 서신엔 구원자 하느님(Salvatoris Dei) 상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마테오 리치 신부 이후 중국에 간 선교사들은 'Deus'를 '천주(天主)'라는 용어로 번역해 '신명(神名)'으로 사용했다. 그리스도교를 처음 접하는 세자가 이런 용어를 썼을는지는 의문이다. 또 위에서는 '조선'이라고 첨삭했지만, 아담 샬은 소현세자의 한문 서신에서 단순히 '우리나라'정도로 썼음직한 부분을 '나의 왕국(=즉 나는 왕)'이라고 라틴어로 번역해 놓았다.
무엇보다 아담 샬의 기록이 트집 잡히는 부분은 순치제 관련 내용이 과장된 것이다. 일단 순치제는 아담 샬을 신하로서 총애했다. 아담 샬의 서양 역법(시헌력)이 기존 달력보다 정확하다는 것이 증명된 후부터이다. 순치제는 아담샬의 성당 건축을 허가했으며, 성당의 이름까지 하사하고, 심지어 성당 건축은 물론 미사에도 많은 비용을 보태주었다.
순치제는 성당이 지어지기 이전부터 도교와 불교와 비교해 가며 천주교 교리를 아담 샬로부터 조금씩 공부해 왔고, 성당이 지어진 후, 성당에 있는 예수의 생애화를 보며 훌륭한 성현이라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이런 순치제도 결국 천주교를 종교로 받아들이진 않음이 아담 샬의 회고에서 드러난다. 순치제에게 있어 천주교는 유교, 도교, 불교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수신과 수양지침이었다. 자신이 후원해 돈들여 지어놓은 성당의 성화를 보고 찬탄하는 순치제의 태도는 웅장한 사찰을 건립해 놓고 칭찬하는 군주의 태도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또한 순치제에게 있어 아담 샬의 본질은, 전도사이기보단, 서양 철학과 학문을 전해준 기특한 신하였다. 때문에, 중국에서 서양 학문과 서양 종교를 분리하여 받아들이는 일관된 태도의 원조가 순치제였다는 시각도 있다.
반면 아담 샬이 회고한 소현세자는 아담 샬을 신하가 아닌 친구 혹은 형제에 가깝게 느꼈으며, 천주교를 기존 철학을 대체할 종교, 혹은 더 나은 사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담 샬 회고 속 순치제의 반응은 귀하고 충성스러운 신하를 황제가 공개적으로 칭찬할 때 쓰는 미사여구에 가까웠던 반면, 소현세자가 아담 샬에게 보낸 서신은 마치 내밀한 친구에게 쓴 것처럼 담백하고 허심탄회하다.
이런 합리적인 온도차 때문에라도 아담샬의 회고는 신빙성이 있다는 것이 긍정론자들의 주장이다. 군주들이 치하하기로 작정한 신하에게 평소 어떤 오글송을 늘어놓는지를 감안해 볼 때, 아담 샬은 심지어 순치제 관련 내용조차 그리 과장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또 조선왕조실록이나 동궁일기 등에서 드러나는 소현세자의 인성 총평을 고려해 볼 때, 소현세자의 서신 역시 과장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천주를 그리스도로, 조선을 나의 왕국으로, 성상을 구원자 하느님의 상으로 하는 등, 한문을 라틴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아담 샬 본인에게 익숙한 용어로 되돌리거나, 오해한 부분의 용어적 첨삭을 제외하곤 거의 그대로 인용했단 합리적 추론이 가능하다.
아담샬 회고의 신빙성에 대해 아무리 평가절하한다 한들, 그것을 완전한 허구로 간주해야 할 근거가 없는 한, 소현세자가 조선 최초로 그리스도교를, 그것도 성리학 등 기존 가르침을 추후 대체할 그 무언가로 받아들이려 시도한 '왕위 후계자'였단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아쉬운 것은 조선측 기록에 이 아담 샬 신부의 회고록과 크로스체크가 될 부분이 없다는 점이다. 북경으로 떠나기 2일 전인 8월 18일이 심양일기의 마지막 기록이다. 소현세자는 8월 20일 심양을 출발해 1600리 떨어진 북경으로 향했으며 9월 19일 북경에 도착했다. 소현세자는 11월 11일 귀국 허가를 받아 11월 26일 조선으로 떠났으니 북경에 머무른 기간은 70일 남짓인데, 천주교를 접하고 아담 샬 신부와 교류할 수 있었던 시간이 이 기간이기도 하다. 이는 황비묵의 회고와도 일치한다.
그런데, 세자가 전쟁터에서 막사에 포탄 맞는 장면까지 따라다니며 기록한 기록덕후인 사관들은 심양일기는 남겼으면서 하필이면 <북경일기>는 남기지 않았다. 단순히 기록되지 않았거나, 후대에 우연히, 혹은 의도적으로 훼손되어 소실되었을 가능성을 추정해 볼 뿐이다.
선교사 및 성물 관련
아담 샬의 회고에 등장한 소현세자의 첫 서신에 따르면, 소현세자는 역법과 기타 서학서는 물론 성상과 천주교 서적들을 선물받았다. 다만 첫 번째 서신을 보면 소현세자는 성상이 아직 천주교를 모르는 대다수 조선 사람들에게 잘못 알려져 멸시의 대상, 혹은 잘못된 숭배의 대상이 될까 두려워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돌려주는 게 안전하다고 판단했고 처음엔 실제로 돌려보냈다.
다만 소현세자를 연구한 일본인 학자 야마구치 마사유키(山口正之)는 그에 대해 연구를 충분히 하진 않아, 소현세자가 성상을 그냥 돌려보냈다는 첫번째 서신에서 결론을 내려버리고, 아담 샬이 성상을 지참하기가 불가능하다면 세례성사를 받은 환관을 데려가 주십사 청원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소현세자가 이를 허락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유럽 선교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해 명나라 출신 환관 이방조(李邦詔), 장삼외(張三畏), 유중림(劉仲林), 곡풍등(谷豊登), 두문방(竇文芳)과 궁녀들이 인조 23년(1645년)에 2월 18일 세자를 따라서 한양에 들어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담 샬 회고록을 완역해보면 아담 샬 신부는 성상을 돌려보낸 것을 겸양으로 생각하고, 조선 왕의 환관 중 세례성사를 받은 이에게 교육을 시켜 성상을 다시 돌려보내자 결국 소현세자가 받았다고 한다. 또, 아담 샬 신부의 회고를 완역해보면 선교사를 먼저 청한 쪽은 아담 샬이 아닌 소현세자인데 정 안 되면 환관을 선교사로 활용할 생각을 했다. 아담 샬 신부는 "백방으로 손을 썼지만 윗선의 허락을 받지 못해 하지 못했다" 하였다. 일단 소현세자의 내관 중 갓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된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담 샬의 회고에서 확인되지만, 입문자가 아닌 선교사를 데려오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런 성과를 내었다면 아담 샬이 자신의 회고록에 적지 않았을 리가 없다.
야마구치 마사유키는 선교사를 대행할 명나라 출신 천주교도 환관과 궁녀들이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했다 주장했는데, 이는 추측의 영역에 머문다. 일단 명나라에 봉직하던 환관들 중에 천주교 신자가 있었던 건 맞다.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중국인 환관을 데려온 것도 맞는다.
하지만 명나라 조정에 봉사하던 궁인들은 엄연히 청나라의 포로였으며 인질 신분이었던 세자가 임의로 특정인을 요구해 대동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아담 샬 신부가 임의로 명나라 환관을 조선으로 보내기 역시 어려웠다. 아담 샬 신부는 소현세자가 귀국하기 하루 전에야 청나라 조정에서 관직을 받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만약 명나라 환관을 선교사로서 조선에 투입하는 데 만약 성공했다면, 조선 선교에 관심이 있던34 아담 샬이 그것을 회고록에 언급 안 했을 리가 없다. 아담 샬 신부의 회고록뿐 아니라 동료 선교사들의 서한이나 보고서에도 전혀 확인되지 않고, <인조실록> 같은 조선 측 기록에도 이들이 천주교 신자인지를 확인할 만한 내용이 없다.
즉, 소현세자가 데려온 중국인 환관과 궁녀는, 설령 우연히 천주교 신자가 끼어있었다 한들, 어디까지나 청나라 조정이 임의로 뽑아 보낸 이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1645년(인조 23년) 7월 22일 청나라 사신을 따라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성물의 경우, 아담 샬 신부가 전해주었다는 성상이나 서학서는 현재 실물이 확인되지 않고, 아담 샬 신부의 회고록에서만 구체적으로 언급되며, 조선 측 기록에선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가져온 물품35들을 보고 사람들이 소현세자에게 실망했다는 언급이, 크로스체크로 간주할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기록이다.
아담 샬 신부가 남긴 교류 기록에서 종교 관련 부분들을 빼놓고 보면 소현세자가 가장 관심을 쏟은 문물은 역법인 듯하다. 아담샬을 만날 핑계로 소현세자가 종종 역법을 배울 신하들을 대동했다 회고되기 때문에 이는 앞뒤가 맞는 사실이다.
무당 기록 관련
소현세자가 죽은 뒤에 어떤 요망스러운 무당이 말하기를 “세자가 북경에서 올 때에 금수(錦繡, 수놓은 비단)를 많이 구입해 왔는데, 이 물건이 빌미가 되어 흉화를 당하게 된 것이니, 이것들을 빨리 물에 띄워버리거나 불에 태워서 신(神)에게 사죄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흉화가 또 그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애란이 이 말을 듣고 강빈에게 고하자, 강빈은 그 말을 믿고 그 금수(錦繡)를 모조리 찾아내어 애란에게 주면서 무당의 말과 같이 하도록 하였다. <인조실록>
이 실록 기록을 근거로 소현세자가 천주교인이었다면 강빈이 무당의 말을 따를 이유가 없었다고 해석하는 의견이 있으나 저 실록 기록만 가지고 소현세자가 천주교와 무관했다고 단정하기엔 설득력이 떨어진다. 일단 이것은 소현세자가 죽고 정치적으로 숙청당하던 과정에 있던 강빈이 불안한 상황에서 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실록 자체가 어떻게든 강빈을 사치하고 무당을 맹신하는 어리석은 여인으로 몰아가기 위한 악의적인 내용일 수 있는데, 실록 전체를 보면 애란이 인조에게 국문받은 이유가 좀 애매하다. 무당의 말을 곧이곧대로 강빈에게 전달해서인지, 아니면 무당과 손잡고 강빈이 내다버린 금수(錦繡)에 저주를 걸어 소용 조씨를 아프게 했다는 이유로 국문받은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저 일로 피해를 본 건, 본래 소용 조씨의 사람임에도 강빈을 더 좋아하게 된 바람에 소용 조씨의 눈밖에 난 애란 하나였다. 게다가 소현세자와 강빈은 천주교 교리를 제대로 배우거나 영세를 받은 것도 아닌, 이제 막 신앙에 대해 겉핥기로 배운 사람들이었다. 강빈은 당시 왕실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청나라에 볼모로 가기 전부터 습관적으로 민간 신앙에 잘 의존했으며 실제로 강빈의 언행을 보면 평소에도 소소한 미신을 잘 믿었다. 또다른 가능성은 여기서 말하는 금수가 실제로는 비단 따위가 아니라 성화 등의 천주교 성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천주교 성물을 갖고 있는 것이 또다른 정치적 공격의 빌미가 될 까봐 없애버린 것을 소용 조씨 측에서 어떻게 알아내어 오랑캐 사치품이라고 인조에게 모함했을 가능성도 고려해봐야 한다.
사업 능력
소현세자와 강빈의 황무지 개척 사업은, 조선의 전통 농업 경영 방식이 청나라에서 대박을 낸 케이스이다. 청나라는 1641년(인조 19년) 12월부터, 심양관에 별도의 정착 비용을 지급하는 대신 토지를 주어, 심양관 식구들이 농사로 자급자족하게 했다. 사실 많은 대신들이 여기서 농사를 지으면 두 번 다시 고향에 못 돌아가리라 생각해 반대했지만, 강빈은 황무지 경영에 찬성하고 적극 주도했다.
사실 강빈의 황무지 경영은 사대부 여인들의 경제관리능력 중 하나였다. 당대의 사대부 안주인들은 집안 살림은 물론 인력 고용과 품삯 지불 등 자산 운용과 경영에도 참여했다. 따라서 황무지 경영 능력을 만약 강빈만이 가지고 있었던 탁월한 능력이라고까지 해석한다면 분명 과장이다. 하지만 강빈의 능력을 심하게 과대평가하는 시각도, 애초에 그런 암담한 상황에서 황무지 개척을 시작한 차기 국모의 적절한 결단력을 좋게 보고, 실제로 부가 축적되어간 속도를 보고 놀라는 것이지, 무슨 조선 시대 여자가 농사 스킬이 있느냐고 놀랄 정도로 무지한 게 아니다.
게다가 생산을 관리하는 게 주로 사내들의 영역에 해당하고, 안주인은 곳간 살림 같은 소비의 영역을 관리하는 것으로 나누어지는 게 전형적인 사대부의 패턴이었다면, 강빈은 직접 사내의 영역인 생산 영역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남자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사관 보고서에 손을 대는 바람에, 나중에 인조에게 꼬투리를 잡히게 된다. 또 하나의 특징은 이렇게 황무지를 경영하는 과정에서 조선인 포로들을 구출해 썼다는 점이다. 순전히 백성들을 구출하겠다는 마음으로 시작된 이 활동 역시, 나중에 인조에게 사병이라도 기르는 거 아니냔 의심과 미움의 구실이 된다.
앞의 두 사료에 더해 《조선왕조실록》 기록까지 합치면, 소현세자는 볼모 시절 후기, 유목민처럼 말을 좋아하고 무인들과 노비들과 어울리며 사관들에게 까이는, 허약체질 환자하곤 거리가 멀어보이는 생활을 영위중이다. 게다가 심양관 생활이 후기로 갈수록, 현대의 대박난 사업가 마냥 생활은 여유로워지며, 소현세자와 강빈 사이에서는 금슬이 좋던지 아이들이 더 자주, 많이 태어나게 되었다.
인조와의 관계
사실 조선왕조에서 왕-세자간의 패륜적 갈등, 혹은 숙청에 준하는 현대인들의 흥미를 끌거나 감정 이입을 유발하는 사건들은 비일비재했다. 후계 문제를 둘러싼 선조와 광해군간의 정치적 대립이 그러했고, 영조가 학대 끝에 정신병자 살인마가 된 사도세자를 숙청한 일이 그와 같다. 하지만 최근 나름의 다채로운 해석이 이루어지거나 사건의 진상이 조금씩 알려지고 있는 광해군이나 사도세자의 케이스와 달리 소현세자의 케이스는 인조의 일방적 잔혹함만으로 알려지는 경향이 있는데, 인조는 역사적인 사례를 돌이켜보아도, 개인적인 정권 유지를 위해서도 소현세자에게 심대한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 전후 상황이었다.
고려의 원 간섭기때 원나라의 영향으로 왕과 세자가 서로 파벌을 이루어 대립하던 경우나, 반원정책을 펴는 공민왕을 견제하기 위해 원나라에서 덕흥군을 왕으로 앉히려 한 것과 같이 중국이 왕위를 주장할 권리가 있는 왕족을 내세워 정권을 갈아치우려 한 전례가 있었다. 비 한족 계열 중원 제국에게 국권을 침해당한 조선의 군주 입장에서는 중국의 동향에 정국이 요동치거나 최악의 경우 중국의 황제가 군주를 다른 왕족으로 대신하려 들던 공포스러운 과거사를 상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장자(長子) 및 재일자(再一子)를 인질로 삼고, 제대신(諸大臣)은 아들이 있으면 아들을, 아들이 없으면 동생을 인질로 삼으라. 만일 그대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하면 짐이 인질로 삼은 아들을 세워 왕위를 계승하게 할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인조 15년(1637) 1월 28일 기사
이에 앞서 용골대(龍骨大)가 왔을 적에 석철을 데려다가 기르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들 그가 반드시 보전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이때 이르러 졸한 것이다.
인조 26년(1648) 9월 18일 기사, 소현세자의 아들 이석철의 졸기
그 과정에서 보여준 인조의 상상하기 힘든 수준의 패륜적 잔인성이 문제였다. 이것은 충분히 유교를 국시로 하는 국가의 군주로서 심각한 결격사유로 지적받을 수 있는 부분이었고, 사관들까지도 곳곳에서 증거도 없이 아들의 일가를 몰살하려 드는 인조를 힐난했다. 예컨대 인조가 며느리를 두고 "개새끼 같은 것들을 임금 자식이라고 하니 이게 모욕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며 욕을 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있다. 또 사관은 손자인 이석철의 졸기에서도 "독기가 많은 제주에 어린이를 유배 보내 놓고 불쌍하다며 아비 곁에 묻어주라고 한들 무슨 소용인가" 하며 논평했다. 소현세자와 강빈 사건을 두고 사관이 자신에게 가능한 최대한의 수위로 제 아들 일가에게 차마 내뱉기 어려운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죽이려 드는 인조의 잔혹함을 비난했다고 볼 수 있다. 사관은 강빈이 사사된 날에도 "비망기에는 추측이라고 하교하였는데 제문(祭文)과 교서(敎書)에는 다 곧바로 단정하여 죄안으로 삼으니, 보는 이가 해괴하게 여겼다."라면서 역시 별 근거 없이 역당으로 몰려 죽은 강빈의 사건을 비판적으로 서술했다.
조선의 지배층들은 어디까지나 마키아벨리즘적 왕권 확립보다는 절차적 법질서와 도덕적 흠결 여부를 중시하기에 소현세자의 죽음에 얽힌 수상한 전후 정황과 그 과정에서의 지나친 잔혹성, 강빈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을 부당한 사법살인으로 여겼다. 즉 인조가 청나라의 입김을 받은 소현세자 일가를 처리하려고 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쳐도, 그럼 그 과정에서 최소한의 합리성이라도 갖추어야 했는데 인조는 이를 무시했다. 명분이야 민회빈 강씨가 자신을 독살하고 저주하려 했다는 것이지만, 조선 왕조의 기록을 보면 그 주장이 무색하게 만드는 구절이 가득하다.
가령 독살하려고 했다는 대목도 당시 강빈이 감금 중이었으므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후 김홍욱이 강빈의 사면을 청하는 글에서도 이 사건이 강빈의 잘못이라 했는데 당시 강빈의 사정상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저주 문제도 이는 강빈 사후 1년 뒤의 일로서 강빈을 모시던 이들 중 배신한 신생이 주도한 일인다. 정말로 강빈이 인조를 저주했다면 형벌을 따질 필요가 없는 대역죄인이므로 사후가 아니라 생전에 드러내서 강빈 사사의 명분으로 써먹으면 그만이다. 강빈이 죽은 후에야, 그것도 1년씩이나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사정이 이러니 목숨을 걸고 구명이나 복권, 재조사를 호소한 관료층이 나타나고, 점차 소현세자 일가 동정론이나 구명론이 형성되었다.
또한 양란 이후 급격히 교조화된 조선의 성리학적 사회질서에 답답함을 느끼거나 조선의 멸망에 유교가 책임이 있다고 보는 현대의 대중들의 상상력을 서양 문물과 접촉하고 다양한 경험을 했던 소현세자가 꾸준히 자극하는 바도 동정론에 기여한다. 고귀한 혈통에, 가혹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성공을 이루어냈고, 어떤 도덕적 결함을 보이거나 실책을 저지르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에서 분투했음에도 어디까지나 자신들과 관계 없는 주변의 정황 때문에 참혹한 운명을 맞이한 사람들을 대중이 영웅시하거나 동정함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숙종 대에 손처경이라는 사이비 교주가 소현세자의 유복자라고 사칭하다가 덜미를 잡혀 참수형을 당했다. 사실 손처경도 뜬금없는 짓을 벌인 건 아니고 제자인 묘향으로부터 소현세자의 유복자 소문을 듣고 이에 편승한 것이다. 이 점을 보면 민간에서 소현세자에 대한 동정론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야사에서의 이미지
흥미롭게도, 민담이나 야사에서는 소현세자에 대해 나쁜 이미지가 많다. 또 효종의 사위 정재륜이 지은 《공사견문록》과 조선 후기 야담을 집대성한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은 소현세자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야사들로 가득하다.
하술된 것도 있으나 야사나 민담에서 청나라 황제가 정묘호란과 정유재란에서 붙잡은 왕자들을 풀어주기로 하고 귀국 선물을 고르라 하니 소현세자는 황제가 사용하던 벼루를 요청하였고 당시 봉림대군(효종)은 이전 전쟁에서 붙잡혀 노예상태로 있는 조선인들을 달라라는 요구를 하였다는 일화와 이후 귀국 당일 아버지 인조에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황제로부터 받은 선물을 아버지에게 받쳤는데 이를 들은 인조는 삼전도 굴욕의 울분이 다시 나와 벼루를 소현세자의 머리로 던져 죽었다는 일화가 있을정도다. 물론 이는 역사적으로 허구이나 2000년대까지 이 설이 일부 학자에게 내려올 정도면 야사에서 소현세자의 이미지는 안 좋은 편이라고 볼 수 있다.
세조 때부터 동정론이 돌았던 단종이나 무속에서 뒤주대왕으로 받들어진 사도세자와 달리 소현세자는 민간의 동정을 샀다 볼 만한 흔적이 없으며, 아둔하거나 난폭한 이미지로 묘사되어 거의 실제 역사상의 양녕대군을 방불케 한다. 예를 들어 본다.
1. 인조가 세자빈을 간택하려고 하는데 아름답고 덕이 높은 처자가 일부러 미친 척을 해서 소현세자를 피했다.
2. 심양에선 글공부를 게을리하고 기이한 물건 모으기에만 열심이었다.
3. 심양관을 개수할 때 참여한 기술자 한 명이 세자에게 아첨하자 흡족해하며 관직을 제수하려 해 이시백이 저지했다.
4. 시종하는 위사를 이유 없이 마구 채찍질했다.
이중 1번은 강빈의 가례에 관련된 기술에도 나와 있듯, 야사가 아니고 진실일지도 모른다. 다만 이는 소현세자 본인의 매력이나 인성 문제이기보단, 당시 '인조의 큰아들'이 혼인 상대로서 인기가 없었다는 점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날 왕자 공주와 결혼한다는 이미지와 달리, 조선시대 왕실 간택시 단자를 기꺼이 내고자 하는 사대부는 별로 없었다. 왕실 인척은 도리어 출세에 제약을 받는 경우가 많고, 까딱하면 강빈 집안이 그러했듯, 본인 처신과 무관하게 친정 집안이 파멸하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이다. 하물며 소현세자가 가례를 올릴 무렵, 인조는 여러모로 불안정해 보이는 왕이었다. 본인이 직접 일으킨 반정으로 집권하며 창덕궁 태워먹었지, 이듬해 반정 공신 이괄에게 뒤통수 맞고 창경궁까지 태워먹지, 그 다음다음 해에는 오랑캐가 쳐들어와 본인은 강화도로, 세자는 전주로 피난을 갔다. 이래저래 정통성도 체통도 안정성도 떨어져 보이는 불안한 왕실에 기꺼이 제 딸을 주고자 하는 사대부는 드물었을 것이다.
2번은 흥미롭게도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계몽군주의 씨앗을 가진 소현세자 이미지와도 겹쳐 보인다. 악의적으로 보면 저 모습은 게으르고 물욕이 있는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소현세자가 줄곧 유교 가르침에 회의를 느끼다가 경연을 소홀히 하며 신문물, 혹은 실용적인 부 축적에 관심을 두는 모습이, 못마땅해 하던 이들 눈에 저렇게 보였을 수도 있다.
3번 역시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소현세자 이미지와 겹쳐보인다. 기술자가 아부를 해서 관직을 제수한 걸까? 아니면 기술자를 장인이라고 딱히 천시하지 않아서 관직을 제수하고 싶어한 걸까?
4번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일인데, 최소한 《심양일기》나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소현세자의 모습- 자제력이 뛰어났다거나, 외교 업무를 현명하게 수행한다거나, 온화한 성품으로 가마꾼들의 노고까지 세심하게 신경썼다거나, 남한산성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스스로 인질이 되겠다 자청했다거나, 봉림대군이 효종이 된 후 제 형을 강빈과 세트로 묶어 겁나 까면서도 '형이 성품은 착했지만'이라고 말하는 이미지와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아무튼, 민담이나 야사에서 드러나는 소현세자의 나쁜 이미지는, 청나라 혐오가 고조된 사회에서, 대청 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룬 소현세자의 행보에 대한 당대인들의 몰이해와 반감에 효종·현종·숙종으로 내려오는 삼종혈맥의 왕실 라인에서 문제가 된 정통성까지 더해졌기 때문에 견제를 샀기 때문으로 해석 가능하다. 실제로 《공사견문록》을 지은 사람은 다름아닌 효종의 사위였다. 그는 소현세자가 죽고 그 아들들이 죄인 자식이 된 덕에, 자신은 공주 아내를 얻어 창경궁에 별장까지 얻어 잘 살 수 있었다. 따라서 그로선 소현세자의 평판을 망칠, 즉 왕이 될 깜이 못되었다고 이미지가 망가지길 원하는 충분한 동기가 있었다.
소현세자의 생애
어린 시절
1612년(광해군 4년), 선조의 5남 정원군의 장남인 능양군(훗날 인조)과,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 한씨(훗날 인열왕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청성현부인 한씨는 비록 전주 이씨는 아니었지만, 부모님 양쪽으로 효령대군의 핏줄을 받았고, 남편인 능양군과는 태종을 공통조상으로 두었다. 즉 소현세자와 그의 동생들은 양쪽 부모로부터 전주 이씨 왕족의 피를 받은 로열 패밀리였던 셈이다. 능양군은 본디 지금의 경희궁 터인 아버지 정원군의 집에서 살다가 16세에 한살 위인 한씨와 혼인한 후, 경행방 향교동 사저로 분가해, 2년 뒤 장남 소현세자를 낳았다. 소현세자의 본명 '이왕(李𣳫)'은 공문서등에 사용되었던 이름이고, 실제 그가 사저에서 12세까지 살 때, 어떤 아명으로 불리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소현세자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 정원군은 이복형인 광해군과 원수지간이었다. 소현세자가 6살 되던 해인 1617년(광해군 9년), 그의 할아버지 정원군은 당시 왕 광해군에게 집을 강제로 빼앗겼다. 정원군의 집터에 왕의 기운이 서려있다는 술사에 말에 광해군이 집을 빼앗고 그 자리에 경덕궁(지금의 경희궁)을 건설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두해 전에, 아끼던 막내아들 능창군(소현세자에겐 막내삼촌)을 이복형 광해군 손에 참혹하게 잃었던 정원군은 집까지 뺏긴 뒤 울화병이 생겨 술만 처마시다가 결국 소현세자가 8살 되던 1619년(광해군 11년), 세상을 떴다. 이후 소현세자의 아버지 능양군은 제 아버지와 동생의 복수를 하겠다 천명했으며 실제로 4년 후, 반정에 성공해 인조로 즉위하게 되었다. 소현세자는 비록 할아버지와 함께 살며 그의 설움을 직접 체험하진 않았겠지만, 반정 모의를 하는 아버지를 두고, 밑으로는 일곱살 넘게 터울지는 동생들1을 둔 맏아들로서, 반정이 성공할 때까지 상당한 심리적 압박을 받았을 것이다.
12살이 되던 해인 1623년(광해군 15년), 아버지 능양군은 반정에 성공했다. 아버지가 인조로 즉위함으로서, 소현세자도 하루 아침에 원자가 되었다. 처음엔 창경궁에 머물렀지만,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이 타 버리자, 아버지 인조는 할아버지의 옛집이기도 했던 경덕궁(지금의 경희궁)으로 이어했으며, 원자였던 소현세자는 경덕궁 동궁의 첫 주인이 되었다. 광해군은 소현세자 할아버지 집을 빼앗아갔다가, 그 자리에 엄청 좋은 새 집만 지어준 셈이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625년(인조 3년) 1월 21일, 원자는 경덕궁 융정전(지금의 경희궁)에서 왕세자로 정식 책봉되었다. 그리고 14살에 결혼할 뻔하다가 파토가 난다. 최종 간택에서 소현세자보다 한 살 어린 13살 윤의립의 딸이 간택되었다. 하지만 윤의립의 친척이 한 해 전에 있었던 이괄의 난에 연루되었다고 대신들이 극구 반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상 인조의 지지세력이고 반정공신들이기도 한 서인들이, 남인인 윤의립의 딸을 탐탁잖아 했던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
아무튼 소현세자와의 혼인이 확정되었다가 파혼당한 윤씨 소녀는 낙담해서 자결했다 하는데, 진위는 불분명하다. 자결한 소녀 이야기는, 2년 후, 소현세자가 한살 연상의 강빈과 혼인했을 때, 두 사람 사이에서 1636년(인조 14년), 첫 아들 원손이 태어나기 전까지 9년간 아이가 안 태어난 이유로 일부 창작물에서 상상되어지기도 했다. 소현세자가 자신 때문에 죽은 윤의립의 딸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강빈을 오랫동안 냉대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승정원일기와 동궁일기가 번역되며 소현세자와 강빈은 조선왕조실록에 남은 첫 아들 이석철이 태어나기 전에도, 두 딸을 두는 무난한 어린 부부의 모습이 밝혀졌다. 그 중 첫 딸은 결혼한 지 1년 만인 1628년(인조 6년) 12월3 태어났다. 따라서 실제 기록만으론 소현세자가 초기에 강빈을 냉대했다는 흔적은 찾을 수 없으며, 설령 소현세자가 정말로 창작자들의 상상처럼 윤의립의 딸에게 죄의식을 느꼈다 한들, 길어야 2달 만에 강빈에게 마음을 열었던 것이다.
아무튼 왕세자가 되고, 혼인하려다 파혼한 뒤, 2년이 지난 후, 정묘호란이 발발했다. 이괄의 난으로 북도 방어력이 극히 약화된 상황에서 능한산성(凌漢山城)4까지 후금군에게 빼앗기자 인조는 분조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고 사헌부에서는 도성을 버리지 말고 근왕군을 이끌어 막자고 주장했으나 인조 자신은 "논한 것들이 실질성이 없다(所論, 太半失實矣)"고 답하고는 자신은 강도(江都)로 향하고 세자는 분조5를 이끌고 전주로 내려가게 했다. 인조실록에 따르면, 비가 오던 날 소현세자가 말을 타고 오는 길을 볏짚으로 깐 적이 있는데 소현세자가 볏짚은 군사를 일으킬 때 말에게 먹여야하는데 헤프게 쓰지말라고 명령한 것과 전쟁 중이니 세금을 함부로 걷지 말고, 쇠고기나 우유 등을 진공하지 말라고 한 것을 보면 당시 열 여섯살에 불과했음에도 소현세자는 분조를 훌륭하게 이끈 것으로 기록된다. 실제로 전주 분조를 철수하는 날, 호남 백성들이 송축했다는 기록까지 남아있었을 정도.
전란이 끝난 1627년(인조 5년) 말 강석기의 차녀와 가례를 올리게 된다. 이 시기의 기록물로 <소현동궁일기(昭顯東宮日記)>와 <소현분조일기(昭顯分朝日記)>가 있는데 당시 조선의 군 체계와 왕세자 교육을 담당하는 시강원(侍講院)이 사용한 교재 및 교육 체계 등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시강원 스승들의 눈으로 본 소현세자의 공적 영역의 생활상에 대해 알 수 있다.
정묘호란이 끝난 직후 시강원은 세자 교육을 위해 소현세자에게 엄청난 양의 공부를 시켰는데 1628년(인조 6년)에 있었던 조강례(朝講禮)에서 소현세자가 강학한 책을 30번 읽는다고 하자 좌빈객이었던 김상용이 "100번을 읽어야 그 뜻을 통달한다"고 답했고 1629년 조강례에서는 소현세자가 새로 배운 건 30번, 예전에 배운 건 20번 정도 읽는다고 하자 우부빈객 장유가 "읽는 양을 2배로 늘리라"고 했다. 같은 해 회강례(會講禮)9에서는 김류가 민간의 선비들은 하루에 읽는 횟수가 기본 100회이고 70회 밑으로 내려가지 않으니 그러니 "새로 배운 것은 60번, 전에 배운 것은 40번 읽으라"고 진언했는데 하루에 100번씩 읽는게 당시 세자의 기본 학습이었던 셈이었다.
소현세자는, 다음날 내일은 주강과 석강을 하겠다, 혹은 주강만 하겠다는 식으로 표면적으론 다음날 자기 공부 스케줄을 정할 수 있었다. 당일에 취소할 수도 있었고, 공식 행사가 있으면, 스승들이 먼저 취소시키기도 했다. 각종 행사 뿐 아니라 심지어 죄인들이 형벌을 받는 날도 휴일이어서, 수업을 통째로 쉬는 날은 은근히 많았다. 하지만 앞서 서술되었듯, 한번 나갔던 수업 진도는 그만큼 되풀이 암기하며 복습을 해야 했던 데다, 별다른 이유없이 수업을 빼먹는 일은 눈치 보여서라도 어려웠던 거로 보인다.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오랑캐라고 그렇게 천대하고 멸시하던 여진족의 나라 청나라에게 치욕적으로 패배하면서 동생인 봉림대군과 함께 볼모로 청나라의 심양(묵던)(Mukden, 현재의 랴오닝성 선양시)으로 끌려갔다. 소현세자가 포로로서 심양으로 이동할 때 시강원 인원만 300명 정도가 동행했고 정축하성(삼전도의 굴욕) 이후 인조는 세자가 북으로 억지로 끌려간 탓에 시강원과 동궁의 호위를 맡은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를 대폭 줄였다.
청나라로 간 소현세자는 고관들과 접촉하면서 친분을 쌓으며 인맥을 쌓아나갔고 그를 통해 얻은 고급 정보를 몰래 인조에게 알려줘서 대비하게 하기도 했다. 인질로 있으며 좌절하지 않고 아내 강빈의 권유로 심양 근처에 농장을 만들고 끌려온 조선인들을 노예 시장에서 돈을 주고 구출해내서 농장에서 일하게 하는 등의 성과를 보였다. 여기서 얻은 곡물로 장사를 하니 세자의 거처가 마치 시장과도 같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상당한 재물을 얻어 청나라 관료들과의 교류와 심양관 운영에 쓰였다.
청나라 측에서는 툭하면 세자에게 외교적 현안, 특히 명나라와의 밀교 등에 대한 것을 따져 묻고는 했는데 그 때마다 세자는 마치 외교 훈련이라도 받은 듯이 능숙하게 답변하곤 했다고 한다. 유명한 일화로 청 장수 용골대가 세자를 윽박지르자 "나는 타국에 있지만 일국의 세자인데 어찌 이리 협박하는가? 죽고 사는 건 하늘에 달렸으니 이런 식으로 협박하지 말라."라고 조용히 반론한 적이 있다. 세자인 데다 포로 입장에서 저렇게 점잖게 반박한거지, 쉽게 말하면 "내가 한 나라의 왕자인데 고작 네까짓 장교한테 그 따위 소리를 들을 위치가 아니다. 꼬우면 죽여라" 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횡의 사건 때는 도르곤 등을 찾아 평안감사, 선사포첨사, 의주부윤, 예조참판 등 청나라에 끌려 온 수많은 조선인들이 목이 붙은 채로 무사히 귀국할 수 있게 최선을 다 했다.
아버지 인조와의 갈등
하지만 이러한 소현세자의 행보는 점점 아버지 인조의 견제를 사게 되었다.
인조는 청나라의 침입을 막지 못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한 나라의 군주라는 사람이 오랑캐에게 굴복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망신을 당해 권위가 바닥을 쳤고, 수십만 명의 조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것도 막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조는 청에 대한 반감을 끈덕지게 고수하며, 현실성 없는 복수라도 그것을 기치로 내걸었다. 박씨전 에 반영되었듯 당시 대부분의 조선 사람들이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적개심으로 대동단결한 민심에 편승하는 것이, 패전이라는 엄청난 실책을 저지른 인조 자신의, 조선 내에서의 권위를 부지하는 안전한 길이었다. 실제로도 청나라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삼고 있음을 끊임없이 인조에게 상기시키며 인조를 협박해 오는 마당에, 이런 상황에서 인조가 청에 대해 증오심 외에 다른 감정을 품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다만, 소현세자 역시 환경만 보면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반청 감정을 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청나라로부터 받은 목숨에 대한 위협이나 굴욕적인 대우는 조선 구중궁궐에 남은 인조보다, 청나라로 끌려간 소현세자가 직접 받은 게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았다. 조선에서 끌려온 자신의 신하들(삼학사)이 코 앞에서 참수되는 것도 보았으니까. 인조와 소현세자의 결정적 차이는 이를 계기로 소현세자는 좀 더 상황을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볼 줄 알게 되었단 것이다. 소현세자는 굴욕감에 이만 갈거나, 자포자기하거나, 장렬히 시들어버리는 대신, 당시 한창 국운이 상승 중이고 영웅이 많던 건강한 청나라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했다.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혐오하고 멸시하는 기존의 조선식 사고에서 벗어났기에, 청나라와 조선 양쪽의 팽팽한 갈등을 조율하면서도, 조선인들을 보호하고 실익을 추구하는 훌륭한 외교활동을 수행하는 게 가능했다. 오죽하면 항복한 명나라 문인 범문정이 "조선 왕을 끌어내고 세자를 세웠으면 나았을 것"이라는 말을 했을까.
인조와 소현세자 부자의 불화는 선대의 선조와 광해군 부자의 관계와 유사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 둘다 자신의 중대한 실정으로 권위에 위협을 느끼고, 그 결과 잘 나가는 자신의 아들이자 후계자를 정적으로 간주해 억압하려 한 공통점이 있다. 다만 선조의 경우엔 문제가 더 심각했을 수 있다. 선조에게, 권위에 대한 위협은 현실적이었다. 재야 사림이나 조정 중신들은 공공연하게 선위를 요구했다. 이때 선위를 주장한 이들이 차기 왕으로 지목한 게 세자 광해군이었고, 임진왜란 이후 집권 여당 역시 광해군 충성파가 다수 포함된 강경파 북인이었다. 이런 상황에 폐위될 위기감을 느낀 선조는 왕 노릇을 계속하기 위해 분조를 이끄는 임무를 훌륭히 수행한 아들 광해군을 적으로 간주하게 되었고. 어린 영창대군과 탁소북(濁小北)을 부풀려 키워, 광해군을 몰아내고 견제하려 하다가, 결국 자신의 사후 아홉 살밖에 안된 어린 영창대군이 이복형 광해군 손에 의해 증살 당하는 결과를 야기한다. 아무튼 선조가 받은 위협은 꽤 실질적이고 결정적이었다. 그를 공격한 것은 내부의 정치권력이었고, 이는 달리 말하자면 선조의 내적 지지기반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상태라는 의미였다. 또 선조를 폐위시키고자 하는 이들은 단순 공갈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다시 말해 선조는 먼저 광해군을 공격하고 견제하지 않으면 실제로 자신이 공격당할 것을 합리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반면 인조의 상황은 좀 달랐다. 비록 청나라로부터 왕권 교체 위협을 받을지언정, 인조의 조선 내에서의 지지기반은 탄탄했다. 또한 당시 청나라가 인조를 협박한다 해도, 말 뿐이었지, 실제로 청나라의 행보를 보면, 소현세자를 내세워 인조를 몰아내고 조선의 왕권을 무리해서 교체할 의도까지는 없었다. 청나라의 일차적 목표는 어디까지나 명을 몰아내고 중원의 주인이 되는 것이었다. 소현세자를 조선왕으로 내세우겠다 협박하는 것은, 그 과정에서 여전히 자신들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는 인조가 행여 뒤에서 뒤통수를 치지 않을까 견제하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 청나라는, 국내에서의 지지기반을 잃지 않은 인조를 굳이 건드려, 조선인들의 격한 반발을 불러오는 에너지 낭비를 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청나라가 원하는 조선에 대한 간섭 수준은 명나라가 조선에게 가지고 있던 지위를 대체하는 것이었지, 특별히 그 이상의 간섭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인조에겐 그런 바깥 상황이나 흐름을 정확히 읽을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인조는 청나라가 아들을 앞세워 자신을 몰아내려 한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덤으로, 중전이 될 야망을 품은 소용 조씨가 소현세자에 대해 끊임없이 험담을 하는 과정에서, 소현세자를 정적으로 간주하는 인조의 환상은 점점 더 커지게 되었다. 물론, 만약 청나라가 인조를 끌어내리고 소현세자를 즉위시키려 했다면 청나라의 힘으로 즉위해 청나라에서 집권 정당성을 얻는, 한마디로 청나라 앞잡이 조선 왕이 탄생하는 셈이었다. 이를 고려말 원 간섭기에 투영해 청나라에 대한 종속이 심해질 것이라 예측하며, 그렇게 인조는 소현세자에 대한 견제를 정당화했을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청나라가 조선에 대해 원간섭기식 통치를 하려 했다면, 인조가 소현세자 하나를 제거한다고 막을 수 있을 수준이 아니었고, 봉림대군으로도 얼마든지 대체 가능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인조에겐 그런 것을 판단할 능력도 없었다. 그저 소현세자와 그 자식들만 없으면 자신이 안전할 거라고 믿었다.
이런 인조의 두려움을 부채질하기라도 하듯, 그런 상황에서 소현세자는 볼모생활이 길어질수록 아버지의 통제나 틀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만주에서 볼모생활을 하며 조선의 구중궁궐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새로운 힘과 문화, 새로운 철학들을 접하게 된 소현세자 입장에서는 오히려 변할 수 없는 아버지가 내심 좋게 말해 안타깝고, 나쁘게 말해 답답하게 느껴졌을 것으로 보인다.
소현세자는 왕이 되었을 때 실제로 계몽군주의 행보를 보일지 아닐지를 떠나 적어도 명백한 가능성을 보여줬다. 반면 이것이 과장되었다고 하는 수정주의적인 시각도 있다. 소현세자는 조선을 떠나기 전과 딱히 변한 게 없고, 딱히 뭔가 새로운 사상이나 비전을 대놓고 보여준 적도 없으며, 아담 샬을 통해 기독교와 서구 문물을 접했다는 것도 아담 샬의 거짓말이며, 심지어 소현세자는 청나라를 등에 업고 조선을 몰아낼 심지어 '병약'하기까지 한 꼭두각시였기 때문에 조선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현명하고 냉철한 인조는 부득이하게 아들을 제거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수정주의적 시각은 <조선왕조실록> 같은 기본 사료에 명시된 소현세자의 개성이나 장단점에 대한 평가와도 한참 어긋난다.
말로 청나라가 왕족을 내세우는 원 간섭기식 경영을 하려 했다면, 인조가 소현세자 하나만 숙청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또한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꼭두각시나 앞잡이가 될 거라는 예측은 그저 인조 시점에서 본 변명이자 허상에 불과했다. 솔직히 그 정도로 소현세자가 청나라 입장에서 다루기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애초에 청나라 입장에서야 소현세자를 볼모로 잡아가는 목적이, 청나라 황실의 권위도 높일 겸, 조선 왕실의 권위는 찍어 누르며 인조도 자유자재로 부릴 겸,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이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소현세자는 청나라 황실 내에서도 주눅 들거나 겁먹어 지내며 시키는 대로 청나라를 떠받드는 대신, 잡혀간 조선 백성과 그들의 안위를 챙기며, 청나라 황실의 볼모라는 입지를 도리어 활용해, 조선인 포로들을 사비를 털어 사들여 후일에 조선으로 데려갈 방법을 구비했다. 또한 도르곤이나 용골대 같은 청나라 황실 밑의 장군들이나 군인들에게 꿇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청나라 황실의 볼모로서 왔으니 나는 청나라 황제의 손님'이라는 입장으로 그들에게도 대등하거나 우대를 받는 외교적으로 굉장히 현명한 태세를 잘 보여주었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소현세자는 그걸 드러내지 않을 정도의 현실 감각은 있었다. 덤으로 참으로 든든한 아버지, 즉, 조선을 방어할 힘도 없으면서 가진 거라곤 오랑캐에 대한 혐오심에, 현지 돌아가는 사정도 모르면서, 동궁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각을 일절 드러내지 못하게 억압하는 아버지, 나중에는 자신을 정적으로 간주하는 과대망상에 빠진,19 아버지이기보단 짐덩어리에 가까운 아버지를 등에 업고도, 청나라의 압박과 등쌀에 어떨 땐 숙이고, 어떨 땐 대항하며, 국본(왕세자)으로서 조선의 자존심과 품위를 유지하고 자국민을 힘닿는 한 보호해 냈다. 소현세자가 이런 어려운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낸 것 자체가 과장이고, 유난히 허약 체질이라, 귀국하자마자 학질로 갑자기 돌연사했다는 시각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소현세자 병약자 설은, 승정원일기나 심양일기, 동궁일기 등에 나온 소현세자에 대한 방대한 기록 중, 진료 기록만 물량공세해 맥락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나온 확증 편향에 가깝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물론 소현세자가 사가들 앞에서 지금까지와 다른 조선을 만들겠다고 천명한 바는 없다. 하지만 세자가 아버지를 비판하고 다른 노선을 타겠다고 사가들 앞에서 떠들어대는 것이야말로, 성리학적 질서 하에선 멍청하고 미친 짓이다. 아들로서 하지 말아야 할 불효이고, 국본(왕세자)으로서 절대 말아야 할 반역 행위일 것이다. 게다가, 실록에 나온 사가의 소현세자의 인성 총평을 보면, 소현세자는 영리하지만 내향적인 타입이었다.20 또한 <동궁일기>를 보면, 강압적인 시강원 스승들과는 동궁 시절부터 코드가 안 맞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심양일기>나 <동궁일기>처럼 시강원 스승들이나 사관 앞에서 소현세자가 내뱉은 말만으로 소현세자의 내면을 읽긴 어려우며, 대신 그의 행동이나 무의식적 말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소현세자는 볼모로 청나라로 끌려가던 초기만 해도, 아랫사람들을 신경쓰고 배려하는 천성은 가졌을망정, 전형적인 성리학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서얼 등 신분 차별을 당연시 여기고, 심양에 도착한 후에도 서연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볼모생활 후반, 소현세자는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 경연을 그만두었고, 새로운 문물에 관심을 가지고, 조선에선 천대받는 무인이나 노비들과 더 잘 터놓고 지낸다. 거기에 흥미롭게도 김자점이 훗날 강빈을 죽일 이유를 가져다붙이기 위해, 강빈이 소현세자의 암묵적 동의 하에 사관 보고서를 슬쩍 고쳐 쓰는 일을 했다고 까는 내용이 실록에 언급되어 있다. 이는 당시 소현세자 혹은 세자빈이, 인조 입맛에 안 맞는 돌출언행을 보이고 뒷수습했다는 정황일 수도 있다. 물론 김자점의 말이 사실일지 여부는 미지수지만. 아무튼 봉림대군이 훗날 소현세자를 까면서 '자기주장이 없이 아내에게 끌려다녔다'라고 표현하는 부분이 있는데, 성리학적 남존여비 철학을 따르자면, 남성만이 판단하고 책임질 권리가 있고 여성은 판단하지 않고 남성의 결정에 순종하는 것이 미덕이다. 그런 질서 속에서 봉림대군에게 저런 식의 까일 구실을 제공했다면, 세자빈은 자기 생각이 분명한 편이고, 소현세자는 '바깥일에 간섭하지 말아야 할 아녀자에 불과한' 세자빈의 생각을 귀담아듣고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소현세자는 심지어 성리학적 신분질서를 부정하는 천주교에 호감을 드러냈던 것으로 보인다. 아담 샬의 회고록에 나온 소현세자의 개인 서신은 말 그대로 쐐기를 박는다. 후술하겠지만, 선교사 아담 샬의 회고록에 오류나 과장된 측면이 있음은 사실이다. 심지어 아담 샬은 소현세자를 조선의 왕세자가 아닌 왕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소한 소현세자가 조선을 떠나기 이전과 비교해 변화하거나, 변화하려는 마음가짐이 없었다면, 아담 샬 역시 소현세자의 눈에 헛소리 하는 양이 정도로 보였을 것이며, 아담 샬이 소현세자가 기독교에 호감을 보였다는 기록을 남길 수 있을 리 없다. 이러한 소현세자의 변화는 소현세자가 사망 직후 쓰인 <조선왕조실록> 소현세자 졸기에도 대놓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사관들은 이런 소현세자의 변화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안타까워하며 '까는 논조로' 썼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더더욱 허구이기 어렵다.
소현세자는 점차 변하고 있었지만, 대리청정 때와 마찬가지로 소현세자가 아버지인 국왕이 시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했다. 또 이런 사고방식을 벗어날 길이 없었던 인조에게는, 소현세자가 가지기 시작한 이런, 어쩌면 조선의 미래를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만들 수 있었을지 모를 변화의 씨앗, 즉, 이런 독립적 행보 자체가 부담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또한, 드러난 기록에 따르면, 인조가 소현세자를 미워하게 된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사비를 털어 청으로 끌려간 조선인 노예들을 구출해 낸 것이었다. 소현세자가 애민사상에 입각해 한 행동을, 인조는 자신에게 대항할 사병을 모으는 행위 정도로 상상했다.
이렇게 소현세자는 자기 할 일 열심히 하고, 더 나아가 기존의 조선질서에 대해 비판적인 행보를 남기는 과정에서, 인조의 아들에 대한 두려움은 차곡차곡 적립되었고, 이는 소현세자가 2차례 임시 귀국을 했을 때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삼전도의 굴욕 이후 3년 만에 소현세자는 1차 귀국을 하게 되었다. 청나라에 보낸 조선 사신이 "세자가 3년이나 청에 있었으니 고국 구경이나 시켜달라"며 독단적으로 요구한 것이었다. 청나라는 원손과 인평대군을 볼모로 보내는 것을 조건으로 승낙한다. 비록 원손은 잠시 부모 얼굴만 보고 고국으로 돌아왔고, 인평대군 역시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독단으로 진행된 이 일로 원손까지 청나라의 손아귀에 집어넣을 뻔했다고 판단한 인조는 격분해 사신을 유배보냈으며 환영 행사도 치르지 않았다. 2차 임시 귀국 때는 의심이 더욱 심해져 있었는데 "세자가 여기 오래 있었으니 또 1번 보내주겠다."며 일시 귀국시킨 것을 영구 귀국으로 잘못 이해하고 '중한 것은 버리고 작은 것은 취하니 이 어찌 된 영문인가? 저들이 갑자기 호의를 보이니 내 알 수가 없구나. 조그만 일에도 의심이 생긴다. 1번 화살에 상처 입은 매란 으레 이런 것이다'라면서 노골적으로 의심을 드러냈다. 이러한 의심은 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친정 아버지이고 인조의 사돈이며 소현세자의 장인인 강석기가 화병으로 피를 토하며 죽은 이듬해, 김자점을 비롯한 삼정승이 세자빈이 "아버지 묘를 찾아 곡을 하게 해달라"는 요구를 강경하게 거절하는 것으로 표면화된다. 나중에 강빈의 사사(賜死)에 한몫을 했던 김자점조차 크게 당황해서 "빈궁(민회빈 강씨)이 부친상을 당해서 가보라고 청나라에서 보내줬는데 못 보게 하면 청나라 사람들이 의심을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다시금 청했으나 무시했고 세자가 청나라로 갈 동안 찾아보지도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심기원의 역모까지 터지는데 인조반정의 1등 반정공신 심기원이 회은군으로 바꾸고 이것저것 꾸미다 발각된 사건이다. 심기원이 끝까지 억울함을 호소했다는 사실은 별개로 치더라도, 심기원을 고변한 황익은 심기원이 원래 인조를 상왕(上王)으로 모시고 심양에서 나온 소현세자에게 양위시키는 방안도 강구하였으나, 막상 귀국한 세자를 보니, 그가 응하지 않을 것 같아 시도하지 않았다는 진술까지 덧붙였다. 솔직히 황익의 고변은 소현세자가 아버지를 몰아낼 의도가 없음을 보여주면 보여줬지, 반대의 경우는 아닌 듯하다. 그럼에도 단지 역모 고변 사건에서 소현세자 이름이 지나가듯 잠깐 언급되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인조는 소현세자에 대한 증적 두려움을 더더욱 키우게 되었다.
귀국과 죽음
1644년(인조 22년), 명나라의 수도 북경에 이자성이 이끄는 반란군이 들이닥치면서 명나라는 276년만에 멸망한다. 그러나 이자성의 반란군은 오삼계와 손잡은 청나라에 의해 모조리 쓸려나가고, 청나라는 북경에 무혈입성으로 입관하여 중원을 제패한다.
1645년(인조 23년), 청나라의 실권자인 섭정왕 도르곤은 소현세자 형제의 영구 귀국을 섭정왕의 자격으로 허락했다. 이에 소현세자는 아내 강빈 및 세 명의 아들들과 함께 고국 조선으로 약 9년 만에 영구 귀국했다.
인조가 돌아온 소현세자 내외의 환영 행사를 대대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이때부터 이미 인조가 소현세자 일가를 제거해버릴 마음을 품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소현세자는 환후가 중해 귀국도 지체될 정도로 중환자여서 행사고 뭐고 기뻐할 새가 없었다. 만일 부친 인조가 정말로 흑심을 품고 세자 일가를 죽이려 했다면 오히려 크게 잔치를 대대적으로 벌여서 강제로라도 참석시키는 쪽이 더 빨랐다.
이미 오기 전부터 심했던 지병이 악화된 소현세자는 귀국한지 3달도 못 되어 1645년(인조 23년), 학질로 돌연 세상을 떠났다. 오랫동안 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만 알려져 독살설이 널리 퍼졌으나, 승정원일기, 심양일기를 토대로 한 연구 결과는 지병 악화로 인한 돌연사 가능성도 제기한다. 다만 전근대 기록의 한계로 사망 원인은 여전히 명확히 판명되지 않았다.
믿기지 않겠지만,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세간의 인식과 다르게 소현세자가 사망하자 인조는 도리어 아들의 죽음을 크게 슬퍼해서 소현세자가 사망한 4월 26일부터 5월 2일까지 미음조차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인조의 이후 행적을 보면 결국엔 남의 자식인 며느리와 그 며느리의 피가 섞인 손자들은 배척해도 아들들만은 오롯이 아꼈다.
소현세자의 가족들에 대한 인조의 숙청
소현세자가 죽은 뒤 인조는 원손 석철이 아닌 차남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세웠다. 이는 종법 질서에 맞지 않는 일이라서 신하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당시 원손은 10살이었고, 어릴 때부터 계속해서 군왕 교육을 받아왔다. 그러나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을 밀어붙이며, 봉림대군이 장성했기 때문에 자신이 사망했거나 하는 유사시에 나라의 안정을 꾀할 수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설득하기보단 대신 왕의 권위로 신하들의 반발을 찍어 눌렀다.
소현세자 사후 인조 23년 5월 20일, 송준길이 지평의 벼슬을 사양하면서 상소하여 김상헌을 시켜 원손을 교육하게 하고 의원 이형익을 처형할 것을 청하였으나, 인조는 한마디 비답도 내리지 않고 그를 체직해버렸다. 5월 6일과 5월 27일에는 안시현(安時賢)이 상소를 올려 세손을 책봉할 것을 청했으나, 5월 6일 상소에 대해서는 "이 같은 소인의 행태는 내가 차마 똑바로 볼 수 없다."라고 크게 성을 내면서 물리쳤고, 5월 27일의 상소도 읽씹을 해버렸다. 윤 6월 2일, 인조는 기습적으로 신하들을 소집하여 자신이 늙고 병들어 미약한 원손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을 볼 수 없겠다고 선포하면서 대군들 중 한 사람으로 새로 세자를 세우겠다고 선포해 버린다. 놀란 김류가 신하들에게 물어서 처리하라고 발을 빼자 좌의정 겸 약방도제조 홍서봉이 "옛 역사를 상고해 보건대, 태자(太子)가 없으면 태손(太孫)으로 이었으니, 이것이 곧 바꿀 수 없는 떳떳한 법입니다. 상도를 어기고 권도를 행하는 것은 국가의 복이 아닌 듯합니다."라고 반대했고, 심열도 "홍서봉의 말이 신의 뜻과 정히 부합됩니다. 전하께서 비록 사소한 병환이 있으시기는 하나 아직 춘추가 한창때이시고, 원손이 비록 미약하기는 하나 이미 10세에 이르렀습니다. 예로부터 어린 임금이 왕위를 이은 경우가 어디 한량이 있었습니까. 종통은 매우 중대한 것이니, 가벼이 의논할 수 없을 듯합니다."라고 동조했다. 이경여 역시 홍서봉과 심열에게 동조하면서 "대체로 떳떳한 법을 지키면 비록 어려운 시기를 당하더라도 오히려 나라를 보전할 수 있지만 만일 갑자기 권도를 쓰면 인심이 복종하지 않아서 흔히 환난을 일으키게 됩니다. 지금 온 나라가 원손에게 기대를 건 지 이미 오래인데, 만일 이 말을 듣는다면 중외의 인심이 반드시 모두 소란해질 것이니, 매우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김자점은 반대하지 않고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묻자고 하였고, 인조는 김류에게 영의정인 당신이 결단하라고 그를 압박하였다. 김류가 "신이 비록 수상의 자리에 있기는 하나 어찌 감히 혼자 결단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종사의 존망이 이 일에서 결판난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뭇 신하들 가운데 진실로 감히 다르게 의논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일이 존망에 관계된다고 반드시 볼 수 없는데도 비상한 도리를 행하려고 하시니, 이것이 바로 신들이 감히 함부로 의논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라고 발을 빼려 하자 인조는 태종조 때는 신하들이 양녕대군을 폐하라고 청했는데 니들은 뭐하냐면서 압박하였다. 그리고 덕종이 죽은 후 월산대군이 아니라 예종이 승계한 전례, 예종이 죽은 후 제안대군이 아니라 잘산군이 승계한 전례를 들면서 나이가 찬 임금이 있어야 종사를 보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럼에도 우찬성 이덕형과 이시백은 홍서봉의 의견에 동조하면서 계속 반대했고, 이경석과 이식, 김육, 정태화, 이목, 여이징도 모두 반대했다. 이에 성이 난 인조는 "이 일은 반드시 대신이 결단해야겠다. 경들은 이렇게 평범한 말만 하고 있으니,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죽기라도 한다면 경들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라고 버럭 화를 내어서 좌중이 갑분싸 분위기에 빠졌다.
이쯤되자 김자점이 적극적으로 영합하면서 분위기를 조성하고 나섰고 분위기를 읽은 김류도 슬금슬금 동조하여 "만일 상의 뜻이 이미 정해졌다면 신이 어찌 감히 그 사이에서 가부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다만 "지금은 원손이 어려서 아직 덕망을 잃은 것이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오늘의 하교가 있으므로, 인심이 놀라 의혹하고 뭇 신하들의 의논이 귀일되지 않은 것입니다."이라고 좀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인조가 원손의 사부인 김육을 지목해서 원손이 현명한지 불초한 지를 말해보라고 하였다. 아마도 김육에게 알아서 원손 좀 욕해보라는 의도였겠지만 김육은 꿋꿋하게 "원손이 아직 어려서 덕망을 잃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러자 인조는 원손이 띨띨해서 안된다고 욕을 하기 시작했고, 예조판서 이식이 "진강(進講)할 때에 원손의 재기(才氣)가 드러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라고 반박했다. 이경석도 "신도 강서(講書)의 반열에 나가 참여하고 있으나, 어린 소년에게 어찌 장래의 성취를 미리 점칠 수 있겠습니까."라고 두둔했다. 그러나 답정너 인조는 "한갓 그 현명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이를 가지고 또한 말한 것이다."31라고 선포하더니 이덕형 등이 계속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김류와 김자점을 시켜 분위기를 조성한 다음, 남은 아들 둘이 모두 용렬하지만 그중에서 장자를 삼겠다는 논리로 봉림대군을 세자로 선포하였다. 6월 4일, 봉림대군은 세자 책봉을 사양하는 소를 올리며, 짐짓 원손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야 한다고 청했으나, 인조는 "상소를 살펴보고 너의 간절한 마음을 잘 알았다. 너는 총명하고 효성스럽고 우애 있으며 국량이 좁은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특별히 ‘맏형이 죽으면 그다음 아우가 계통을 잇는다.兄亡弟及’는 예를 썼으니, 너는 사양하지 말고 더욱 효제(孝悌)의 도리를 닦아 형의 자식을 마치 너의 자식처럼 보살피거라."라고 하면서 이를 물리친다. 이후 봉림대군을 세자로 한다고 했지 기존의 원손을 어떻게 한다는 말이 없어 조정에서는 경선군을 계속 원손으로 불렀는데 인조는 한동안은 이를 방관하다가 저주 사건이 터진 8월에 비망기를 내려 "원손의 칭호를 지금까지 그대로 쓰는 것은 매우 해괴한 일이니, 각사의 해당 관리들을 추고하여 치죄하라."라고 원손의 운명을 관짝에 넣어버린다. 이후 원손은 제손(諸孫)으로 부르게 하였다.
이렇게 효종과 현종의 승계 라인을 자기 독단으로 결정지은 인조는, 그 다음엔 며느리 강빈을 역적으로 몰아 죽여버림으로써, 소현세자 적자들의 정통성을 없애는 그의 기준에선 깔끔하고도 효율적인 방식을 택했고, 봉림대군 세자 책봉 후 본격적으로 숙청의 칼날을 빼 들었다. 다만 인조는 이 와중에도 명분과 형식을 꽤나 중시하는 양반이라, 사실상 윗사람에게 찍힌 거 외엔 전혀 잘못한 게 없는 강빈을 죽어 마땅한 악녀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는데, 총애하던 후궁 소용 조씨를 저주했다는 죄목으로 원손 이석철의 유모를 포함한 궁인 두 사람을 고문하다 죽였다. 또한, 여전히 사용되던 원손의 이름도 모든 공문서에서 삭제했다. 이때 강빈은 소현세자의 유복자를 임신 중이었는데, 궁인들이 죽어나간다는 말을 듣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인조가 머무는 창경궁 양화당 앞으로 달려나가 '제발 헤아려 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인조는 불쾌해하기만 했으며, 같은 달 강빈의 남자 형제들, 문성(文星)·문명(文明)·문두(文斗)·문벽(文璧)을 각각 제주(濟州)·진도(珍島)·흡곡(歙谷)·평해(平海)로 귀양 보냈다.
다만 이는 전초전에 불과했다. 이듬해인 1646년(인조 24년) 1월 자신의 수라에 올라온 전복에 독을 탔다는 누명을 씌워 강빈의 궁녀들을 무고했다. 그냥 무고한 정도가 아니라 세자빈의 지시로 임금의 수라에 독을 탔다는 말을 실토할 때까지 고문했다. 하지만 이 과정도 인조 마음대로 순순히 풀리지는 않은 게, 세자빈을 모시던 십 수 명의 궁인들은 고문을 당하다 잔혹하게 죽는 한이 있어도, 강빈을 배반하는 허위 실토는 하지 않았다. 이 무렵, 강빈은 소현세자의 유복자를 유산하고 멘탈이 나가있던 상태였다. 설사 멘탈이 정상이었다고 해도 불가능한데 이때 강빈은 인조의 명령으로 유폐되어 있었다. 어거지를 써서 강빈이 궁인을 시켜 독살시도를 할 수 있었지 않나 싶어도 진짜 왕에 대한 암살 미수사건이면 의금부나 형조를 시켜 수사를 하도록 지시하는데 인조는 내시들을 동원했고 또한 어찌되었던 왕이 먹을 음식에 독이 들었다면 그걸 중간에서 걸러내지 못한 왕의 궁녀들의 잘못임에도 정작 그들은 쏙 빼놓고 고문하지 않았다.
실록에 보면, 인조가 강빈을 죽이기 약 1달 전인 1646년 2월, 김자점과 함께 강빈을 비하하는 내용이 있다. "청나라에서 올 때 비단과 금을 잔뜩 실어왔으니, 그것으로 마음만 먹으면 뭔 짓인들 못하겠느냐고" 인조가 말한다. 그러자 김자점은 "세자가 사냥을 나가거나 하면 사관 보고서를 멋대로 고쳐썼다는데 아녀자가 되어서 바깥일에 이렇게까지 개입할 수 있느냐."는 식으로 맞장구쳤으며, 긴 대화 끝에 "강빈과 소현세자의 아들 셋도 그대로 뒀단 화근에 된다"고 언급한다.
결국 강빈은 '성정이 포악해 국왕이 총애하는 후궁을 저주한 것도 모자라 임금의 수라에 독을 타려 했다'는 죄목으로 폐서인 되었다. 폐서인이 된 강빈은 궁에 들어올 때 탔던 꽃가마 대신 검은 휘장이 둘러쳐진 가마를 타고 사가로 쫓겨났으며 바로 그날 사약을 받았다. 유배를 갔던 강빈의 남자 형제들도 강빈이 사사된 후 곤장을 맞다 죽었으며 심지어 강빈의 친정어머니까지 누명을 쓰고 사형당했다.
강빈이 죽은 후에도 인조는 계속해서 며느리에게 누명을 씌웠다. 세자가 된 봉림대군이 들어올 창경궁 저승전에 강빈이 흉물을 묻어 봉림대군을 저주했다고 단정했는데, 문제는 당시 강빈이 그 저승전에 거주 중이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사관조차 자기가 자기 거처에 흉물을 묻으면 그 저주가 어디로 가겠냐고, 인조의 주장이 어이없다는 의견을 남겼다. 하지만 그러거나말거나, 인조는 저승전을 대대적으로 수리하며, 묻혀있는 흉물들을 많이 찾아올수록 포상하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인조의 당초 계획대로 소현세자와 강빈의 세 아들들(경선군, 경완군, 경안군)도 죄인의 아들이 되었으며, 장남 이석철은 열 살, 차남 이석린은 여섯 살, 삼남 이석견은 두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제주도로 유배형에 처해졌다. 당시 제주도엔 장독이라는 돌림병이 창궐하고 있었는데 장남 석철과 차남 석린은 이 병에 걸려, 각각 열세 살과 아홉 살에 연이어 병사한다. 유배될 당시 만 두 돌이었던 막내 석견만 혼자 살아남았으며 효종 사후 간신히 '경안군'으로 봉군되고 왕족 신분을 다시 회복했지만, 경안군 역시 오랜 유배생활로 인해 겪은 고초와 스트레스 때문에 병상생활을 하다가 22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그나마 경안군은 혼인을 해서 죽기 전 당시 세 살이었던 장남과 한 살이었던 차남을 낳아둔 덕분에, 소현세자의 혈손들은 절멸하지 않고 오히려 갈수록 효종의 혈손들보다 번창하게 되었다. 나중에 가면 효종의 가계는 부계가 완전히 단절되었음에도 소현세자의 가계는 조선 멸망 이후에도 끝까지 살아남아 현재에도 많은 후손들이 살아가고 있다.
소현세자가 죽고 강빈이 숙청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청나라의 용골대는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데려가서 키우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이것이 청나라의 공식적 요청이며, 친청파 조선 왕을 육성하려는 의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소현세자 가계를 통해 조선 왕가를 견제하려는 의도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이 요청이 청나라의 공식 요청이 아닌 용골대의 개인적인 요청이며, 소현세자가 적대적인 입장에도 불구하고, 그간 서로를 존경하고 호감을 느꼈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과 동정심에 아이들을 데려가고 싶다는 소회를 밝혔다는 시각도 있다. 용골대의 의도가 어찌 되었건, 인조는 셋 중 둘은 이미 죽었다는 거짓말로 변명해 둘러댔다. 인조의 거짓말은 곧 진실이 되어, 석철과 석린은 유배지에서 돌림병에 걸려 죽었다.
효종 역시 아버지 인조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아 형수인 강빈을 '역강'「逆姜」(반역자 강씨라는 뜻)으로 비하했다. 또한 조금이라도 강빈을 비호하거나 그녀의 억울함을 주장하는 신하들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잡아 고문해 죽이는 등, 매우 철저하게 강빈을 모독하고 배척했다. 또한 자신의 정통성을 수호하기 위해서였는지 죽기 직전까지 형 소현세자의 아들과 딸들을 왕족으로 신원회복 시켜주지 않았다.
이래저래 소현세자는 심지어 대한제국 때에도 추존왕으로 추존되지는 못하였다.
소현세자의 묘
소현세자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의 서삼릉 내에 있는데, 그 묘를 소경원(昭慶園)이라고 한다. 본래는 소현묘(昭顯墓)라 불리었으니, 고종때 세자'묘(墓)'를 '원(園)'으로 격상하는 조치로 소경원으로 바뀌었다. 정자각은 한국 전쟁 때 불타 초석만 남아 있다.
이 묘는 비공개라 들어가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소경원 구역이 농협 사유재산 부지이기 때문. 단 아예 볼 수 없는 것은 아니고 서삼릉에 가면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해설사의 인솔 하에 비공개 능역을 들어갈 수 있는데, 소경원을 답사하고 싶으면 이때 시간 맞춰서 서삼릉을 방문하면 된다. 또 근처의 군 부대에서 정훈교육 기간에 맞추어 단체 방문한다. 비공개 능역 답사 때 인종과 인성왕후의 능인 '효릉(孝陵)'과 폐비 윤씨의 묘인 '회묘(懷墓)'도 돌아볼 수 있다.
소현세자 죽음의 원인에 대한 고찰
승정원일기가 전산화되기 이전 실록에 의존해야 했을 때 이덕일이 제시한 수많은 독살설 중에 실록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되었고, 인조의 행동 때문에 연구자들도 한때 독살을 비롯한 타살 가능성에 동의했던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가 소현세자다. 실록에만 의존하던 시절, 타살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청나라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소현세자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내의원에서는 세자의 병이 학질(말라리아)이라고 했다. 침을 놓는 시술이 시작됐지만, 소현세자는 불과 사흘 만에 창경궁 환경전에서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러나 세자의 죽음은 의문투성이였다. 일단 '학질(말라리아)'이라는 병이 의심스러웠다. 모기를 통해 감염되는 말라리아는 여름에 걸리는 전염병인데, 세자는 늦겨울 2월에 돌아왔기 때문이다. 병증이 학질이 맞다 하더라도 약 처방이 아닌 침을 놓는 시술을 시행한 것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소현세자는 이렇다 할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청국에서 돌아온 지 두 달만에 숨을 거뒀다. 그래서 소현세자가 독살당했다는 건 한때 학계 정설로까지 굳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방대한 승정원일기가 전산화되고, 세자의 질병을 상세히 기록한 심양일기와, 시강원 스승들이 작성한 소현세자의 학창생활, 즉, 2만 페이지에 달하는 소현동궁일기의 국역과 출간이 이뤄진 시점에 당시 정세를 단편적으로나마 훨씬 디테일하게 엿볼 수 있게 되어, 의학적 관점에서의 연구도 더해졌다. 이후, 위의 추론된 근거만으론 독살을 단언할 수 없게 되었고, 대신 다른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평소 지병이 있던 소현세자가 17세기 한의학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지병의 급성 악화로 사망했고, 당시 인조는 그런 상황을 철저히 이용했다는 것이다. 다만, 소현세자의 돌연사를 유발한 그 지병이 무엇이었는지 규명하는 것 역시 17세기 의학 기록의 한계로 결국 추론의 영역에 머물게 되었고, 워낙 인조, 혹은 귀인조씨가 소현세자를 숙청하고도 남을 맥락과 앞뒤 정황이 있다 보니, 독살, 혹은 타살설 역시 정황상, 그리고 대중적으로는 설득력을 잃진 않은 상태다.
독살설을 비롯해 실증적 가능성이 크게 낮아진 타살의 경우를 배제하면 아무래도 상술했던 병사의 가능성이 높다. 서울대 법의학자, 부검의로 활동중인 유성호 교수는 한 방송에서 제1형 당뇨성 케톤산증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제1형 당뇨는 자가면역질환의 일종으로 급격한 스트레스나 감염 등의 사유로 발현되며 주로 30대 초반에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소현세자가 청으로 잡혀간 20대 후반에서도 표본이 많고 오히려 의료 접근성이 높아진 현대의학에서 20대 후반에 진단을 받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에 연령 측면에서도 충족하며 청으로 잡혀간 후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임은 당연지사이므로 조건에 부합한다. 소현세자의 병상일지를 보면 청에서 지낼 당시에 비뇨계 질환과 갈증 등을 호소했고 귀국 후 식후혼곤증과 기침, 천식 등의 기관지질환이 수 차례 기록돼있다. 거기다 당시 학질이라고 기록했던 말라리아의 주요 증상인 발열 또한 자가면역질환의 주요 증상이다. 전후 상황을 고려했을 때 제1형 당뇨를 앓고 있던 소현세자가 극심한 스트레스로 병세가 악화되었고 3개월에 걸친 귀국길에서의 여독 및 당시 인조의 증으로 인한 압박 등 심신이 한계치에 임박하자 합병증으로 케톤산증이 나타나 사망에 이르렀다는 유추가 가능하다. 당시 의학으로는 진단할 수 없는 내용이고, 제1형 당뇨의 치료는 현대의학에서도 오로지 인슐린 투여 뿐이기에 만약 이러한 내용이 사실이라면 병세가 외부로 드러나기 시작했을 시점에 소현세자의 죽음은 확정적이었던 셈이다. 다만, 유성호 교수가 말했듯 이는 어디까지나 제한적인 근거와 현대의학에 기반한 추론에 불과하다. 같은 방송에서는 쇼그렌 증후군을 의심하는 소견도 소개되었다.
소현세자 독살설의 허점
일단 상술된 이전 독살 논리의 허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전통 의학에서 학질은 모기에 물린 말라리아만을 의미하지 않았고. 고열과 주기적인 발작이 동반되는 병증을 통틀어 학질로 칭했다.41 따라서 2월의 겨울 날씨라 해도 소현세자가 넓은 의미의 학질 증상을 보일 수 있었다.42
두번째로, 소현세자가 고국으로 영구 귀국 후 병세가 악화되었을 때 '이렇다 할 제대로 된 진료도 받지 못했다'는 말은 매우 위험한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귀국한 소현세자가 아플 때마다 내의원에서는 매번 여러 명의 어의를 파견했으며, 사망직전 급격히 사경을 헤맬 때는, 인조가 어의들의 의견을 수용해 침의(鍼醫) 2명만 자신옆에 남기고 모든 어의를 동궁에 보내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이렇다 할 제대로 된 진료도 받지 못했다'는 표현은 실록 기록을 근거로 한 것으로, 소현세자가 귀국길에 아팠다가, 어의들의 처방으로 회복되었던 일을 생략한 것이다. 소현세자는 이후 약 한달 반 정도 건강한 모습을 보였다. 문제는 이후 갑자기 쓰러져 여러 어의들의 다양한 처방에도 불구하고 그저 악화 일변도만 걷다 3~5일 만에 사망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사망 순간 효과적인 치료를 받지 못했다 =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면 모르되, 국본인 소현세자가 사경을 헤매며 어의도 없이 방치되었다 이해하면 그것은 왕실 시스템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사실 왜곡이다.
세번째로, 전통 한의학은 학질 치료에 침술도 주된 치료로 활용하였다.43 전통 한의학에선 학질을 외감병, 몸 내부가 아닌 밖에서 사기가 침투해 발병한다고 보았고, 밖에서부터 들어온 병은 빼내는 걸 기본으로 하기에 침을 써서 안에 머물고 있는 사기를 빼내는 개념으로 침술 치료를 시행했다. 또한 승정원일기의 소현세자 치료기록을 면밀히 살펴보면 이형익이 시술한 번침은 메인이 아니었고, 이형익은 소현세자를 진료한 유일한 어의도 아니었다. 조선에 돌아와 처음 증세를 보일 때, 기존 약 처방을 써봤는데 차도가 없어서, 이형익이 응급조치로 침을 놓았고, 그때 침술이 효과를 내서 병세가 호전되었다. 이후 한동안 소현세자는 병세가 사라져 건강한 모습을 유지했다. 그러다 느닷없이 병이 재발하고 순식간에 심각한 단계에 이르렀다. 이때 기존에 신임을 얻었던 이형익이 침을 놓았는데, 이때 소현세자가 사망에 이른 것이다.
새로 연구된 소현세자 질병에 대한 상세한 기록
승정원일기, 심양일기 등 새로 연구된 방대한 사료에서 발견한 소현세자에 대한 기록 중 질병 관련 내용들만 발췌해 모아보면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1. 소현세자는 10대 동궁 시절부터,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위장 계통에 탈이 나는 체질이었다. 1625년(인조 3년) 6월 경엔 머리는 좋아 배운걸 잘 기억하나, 그것만 믿고 집중하지 않아 기본자세가 틀려먹었단 꾸사리를 연달아 먹더니, 오밤중에 느닷없이 토하고 난리가 났다. 어의들도 난리가 났고 시강원 스승들도 당황해 병문안을 들락거렸지만, 세자는 매우 창피해 했다.
2. 스트레스성 속병 증세가 어의가 원정 파견될 정도의 중증으로 처음 기록된 건 1637년(인조 15년), 삼전도 항복 이후 볼모로 청나라로 끌려간 직후다. 심리적 고통과 달라진 환경에 기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는 소현세자 뿐 아니라 세자빈도 함께 스트레스성 속병을 얻어, 심양에 도착하자마자 나란히 몸져 앓아누웠고, 세자빈의 증세가 더 심했다고 기록되었다. 다만, 그 상황에서도 세자빈은 경숙군주로 추증된 셋째 딸을 출산했다.
3. 심양에 머물며 청과 조선을 중재하던 시절, 소현세자는 확실히 동궁에 있던 시절에 비하면 병치레를 자주 했다. 1637년(인조 15년)엔 산증이라 불리는 비뇨기 계통, 소화기 계통 속병으로 해석되는 지병이 생긴거로 추정되며, 그 외에도 감기, 안질, 말을 타다 생긴 부상 등으로 부쩍 어의들의 진료 기록이 잦아졌다. 또, 증세가 심각해지면 조선에서 처방전, 어의, 약재를 파견받곤 했다. 8년의 볼모생활 중 어의가 파견된 건 총 세차례로, 청나라에 도착한 이듬해인 1638년(인조 16년) 5월, 3년 후인 1640년(인조 18년) 10월 16일. 그리고 그로부터 4년 후인 1644년(인조 22년) 3월이다.44 게다가 1644년에는 특히 소현세자의 몸을 망가뜨릴 일이 있었는데, 바로 장거리 행군이었다. 인조의 병환이 심해지자 소현세자는 병문안을 위해 청 측에 간절히 부탁해서 임시 귀국을 허락받아 한양에 다녀왔다가 곧바로 산해관 전투에 가야 했다. 이 때 소현세자는 심양에서 산해관, 북경으로 이어지는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강행군을 강요해야 했다.심양일기에 따르면 행군길에 제대로 된 숙소도 만들지 못해서 신하들은 말 그대로 땅바닥에 그냥 누워서 자야 했고, 세자 본인은 겨우 청군에게 임시 천막을 빌려서 쉴 수 있었다. 이러니 몸 상태가 어땠을지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4. 소현세자 건강에 다시 이상이 생긴건, 북경에서, 귀국을 허락받고 영구 귀국길에 오른 1644년(인조 22년) 11월 18일 이다. 본래는 1645년(인조 23년) 1월 6일 심양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예정보다 3일 늦은 1월 9일 심양에 도착했다. 이후 소현세자는 보름 정도 심양에서 요양, 치료하며 병세가 호전되길 기다렸고, 1월 말에 심양을 떠나게 되었다. 이후 2월 18일 한양에 도착했지만, 증세가 호전되지 않아, 20일부터 어의들이 파견되어 침과 약을 처방했고, 3월 14일 이후 엔 거의 완치되었다.
4_1. 승정원일기를 토대로 당시 어의들이 소현세자를 치료한 진료 기록을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처음 소현세자를 진료하고 치료한 이들은 최득룡, 유후성, 박군이란 다른 어의들이었다. 2월 20일부터 24일까지 이들이 처방한 이모영수탕(二母寧嗽湯) 5첩을 복용했으나 딱히 차도가 없었다.45 이후 약간의 약재를 가감해 다시 이모영수탕 5첩을 복용했지만 역시 차도가 없었다. 이로 인해 2월 26일 진료부터 이형익이 새로 투입되었고, 3월 5일에는 세자의 요청으로 박태원이 추가로 참여했다. 어의들은 탕재를 바꿔 소시호탕(小柴胡湯)을 새로 처방했고 이에 3월 5일 진찰에서 세자는 증상이 크게 호전되는 모습을 보였고, 3월 6일부터 탕재 복용과 이형익의 시침이 병행되었다. 세자는 더욱 호전되었다. 어의들은 이형익이 3차례 시침하였는데 경과가 좋으니 2차례 더 시침하겠다는 의견을 내었다. 이렇게 3월 14일까지 세자는 5차례에 걸쳐 침을 맞았고 미열을 제외한 다른 증상이 완화되어 3월 14일부터는 침을 맞지 않았다.
5. 이후 한달간 세자는 완치는 아니었지만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다. 4월 15일 인조는 세자의 기력을 돋우기 위해 타락죽을 하루걸러 하루씩 동궁에 올리게 했다.46 그리고 처음 주치의였던 박군은 4월 16일 세자에게 거의 다 나았다는 진단을 내렸다.
6. 소현세자의 건강에 마지막으로, 그리고 본격적으로 이상이 생긴 건, 더는 침을 맞지 않게 된 지 약 한달 반이 지난 4월 21일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 이틀간은 증세가 경미해 모두가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24일부터 갑자기 위중증으로 치달았다. 이후 이뤄진 모든 처방은 효험이 없었고, 그로부터 3일 후, 세자는 사망했다.
이때의 처방 과정을 또 소상히 옮기면 다음과 같다. 처음엔 오한과 한전(寒戰)48 증세를 보였다. 다만 그날 증세는 두어 시간 후에 없어졌고 다음날에는 아무런 증상도 나타나지 않아, 세자 본인이나 약방에서는 이 증세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23일 오전에 다시 동일한 증세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그 증세가 한나절이나 지속되었다. 이에 약방에서는 23일에 어의 박군 등을 시켜 세자를 진찰하게 했는데, 박군은 학질(瘧疾) 증세로 진단했다. 처음엔 박군 혼자에게만 진찰과 치료를 맡겼는데, 세자에게 차도가 없자 다시 최득룡을 추가 투입하고, 탕약만으로는 금방 효과를볼 수가 없다며, 24일 새벽부터, 지난번에도 투입되어 효과가 있었던 이형익의 침을 맞도록 요청했다.49
25일에 이형익까지 투입되었다. 이형익의 번침(燔針)을 맞은 소현 세자는 어의 박군이 처방한 시호지모탕(柴胡知母湯)을 들었다. 그러나 증세는 여전히 호전되지 않았다. 26일 오전에 어의 최득룡이 처방한 시호탕(柴胡湯)을 들었으나 탕약을 복용한후 더욱 위중해졌다. 이때 인조는 어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세자를 진료할때 침의(鍼醫) 2명만 자신옆에 남기고 모든 어의를 동궁에 보내라는 지시를 하달했다.50 세자의 증세가 심상찮자, 어의들은 다시 이형익의 번침을 처방했다. 하지만 이 침을 맞은 직후인 4월 26일 정오. 소현세자는 결국 사망했다.
그것이 알고싶다 유튜브 내 프로그램인 사인의 추억 ep2에서 법의학자 유성호 교수가 소현세자의 증상을 분석했을 때 제1형 당뇨의 가능성이 있다고 추론했다. 인슐린이 전혀 분비되지 않는 제1형 당뇨의 합병증인 당뇨병성 케톤산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51 소현세자의 사망직전 증상이 쇼그렌증후군의 증상과도 일치하나 주요 발병대상이 40대 여성인 점에서 제외. 독살의 근거로 제시되는 시신이 검고 일곱 구멍에서 피가 흐른다는 실록의 기록은 소현세자 사후 2개월 후(음력 6월27일 한여름)의 기사인데다, 기사에 기록된 "소현세자의 피부가 검어지고 이목구비에서 피가 터져나오는 현상"은 부패한 시신의 특징이라 부검을 하는 법의학자들은 꽤 자주 보는 현상이라고 한다. 뱀의 혈액독에 당하면 유사한 시체가 될 수 있지만 이목구비에서 피가 나오지는 않는다고...
반론: 소현세자 질병 사망설의 한계와 위험성
승정원일기, 심양일기, 동궁일기 등이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부터였다. 왕조 실록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한 분량의 자료들을 변역하는 과정에서 학자들은,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기존에 정설로 굳어진 것들이 뭐라도 하나 뒤집히는 성과를 기대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소현세자의 병증에 대한 일련의 기록들이 엄청난 반전으로 다가온 것이 분명하다. 당대 사가들이 중요하다 여겨지는 것들만 발췌해서 실은 조선왕조 실록만 보면, 소현세자는 건강한 30대 초중반의 젊은이가 느닷없이 앓아누워, 3일만에 사망했고, 시신은 급격히 시커멓게 변했으며, 그 과정에서, 소용 조씨의 사람인 이형익이 하필 어의로 참여했기에, 그의 마수가 개입되었다는 그림을 그리게 한다.
하지만 보다 자세하고 방대한 사료들은 다른 이야기를 제시한다. 3일간 본격적으로 이상 증세를 보이기 이전부터도 소현세자가, 귀국하는 과정에서 이미 건강에 문제가 생겼던 점, 그리고 이를 회복해가던 중 불과 1달 반 후 갑작스럽게 쓰러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단 맥락이다. 당시 소현세자는 17세기 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심각하고 중대한 질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겉으로는 호전된 것처럼 보여도 사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골병이 들어 있었다가 그것이 마지막 순간 터져 나왔다고도 볼 수 있다. 이는 17세기 뿐 아니라 현대에도 장기간 입원와 퇴원치료를 반복하는 중환자나 고령자가 사망직전 이따금 보이는 패턴이기도 하다. 유가족 입장에서 보면 멀쩡하게 나아가던 환자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니, 어처구니가 없고, 주치의나 병원이 사람을 죽였다며 소송이라도 걸고픈 기분이라도 들 것이다.
또 심양일기와 승정원일기를 통해, 소현세자가 훗날 시한폭탄이 되는 지병을 볼모생활 중 얻었을 거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이 두 기록은 소현세자가 청에 볼모로 끌려온 후 확실히, 이런저런 크고 작은 질환과 부상으로 어의들의 처방을 받은 기록이 예전에 비해 증가함을 보여준다. 심양일기는 시스템이 무너진 상황에서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동궁일기에 비해 진료기록이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그러하다. 또한, 산증이나 손마비 증세 같은 질병들에 대해,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겨 치료를 안하려 했거나 몇개월간 차도가 없어 재차 처방했다는 기록들이 눈에 띈다. 이는 예전 동궁에 있었을 때 어의들이 세자가 조금만 아파도 난리 부르스를 치는 패턴과는 확연히 다르다. 때문에 소현세자가 볼모 생활 내내, 여건상 불편함을 참고 무시하다, 나중에 급성 위중증으로 치달을 위험이 있는 어떤 신체적 이상을 장기적으로 방치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소현세자 질병 사망설에도 한계는 있다. 일단 상술된 글에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된 논문52들은 일단, 병사설로 결론 내리되, 병이 나아가던 소현세자를 갑작스럽게 죽음으로 몰 정도의 지병이 무엇이었는지는 답을 내리지 못한다. 물론 이는 17세기 병증에 관한 기록 자체의 모호성이 가진 한계이기도 하다. 단지, 현대에 존재하는 병 기준으로 여러 가지의 질환이 중증으로 겹쳐야 나올 수 있는 증상이 아닐까, 라고 추론하는 정도이다. 경희대 한의과대학원 출신 한의사들이 모여 저술한 <조선왕조 건강실록>에서는 종친부인이 목격했다는 출혈과 피부병변의 원인이 만성 간기능 저하라는 예측을 내놓기도 했다. 한의사 방성혜의 경우, 소현세자가 앓던 질병이 폐렴, 혹은 혈관염이었다고 예측한다. 셋은 각각 다른 질병이며, 모두 가설이다.
이런 상황에서, 질병 사망을 '진실'이라 단정짓기 위해, 실록과 당대 맥락을 토대로 한 기존의 타살설은 공부도 안하는 이들의 감상적 헛소리라고 단정짓는 논조 역시 그다지 객관적으로 진실에 다가가는 방법론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더 나아가 타살설을 확신하는 것 못지않게, 위험한 확증 편향을 낳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현세자 병사설이 낳은 위험한 확증 편향은 다음과 같다.
소현세자가 겉으로 보기에 한동안 멀쩡하다, 급격한 사망에 이를 정도의 심각한 지병으로 사망했다는 설을 하나의 가설이 아닌 '진실'이라는 도그마를 세우기 위해선, 소현세자가 일상생활 영위가 힘겨울 수준의 병약자였다고 단정지어야 논리적으로 매끄럽다. 기왕이면 그 병을 앓은 기간이 길고 오래될수록 논리엔 설득력이 생긴다. 그러다 보니 소현세자 병사설을 진실로 밀어붙이는 주장엔 소현세자 = 병약자 이미지가 포함된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 소현세자 졸기는 소현세자의 국본으로서의 자질과 장단점을 적나라하게 써 놓긴 하지만 '병약했다'는 묘사는 1도 없다. 오히려 볼모생활 후기로 갈수록 청나라인들처럼 승마를 좋아하고, 무인이나 노비들과 어울렸다는 묘사가 눈에 띈다. 또 소현세자 사후 3개월이 지나 온통 칭송 일색으로 쓰여진 쓰여진 지문(誌文 :추모글)에선, 소현세자가 병사하거나, 혹은 의원들이 약을 잘못 썼을 거라고 나름 수습하나, 최소한 겉보기엔 태연했으며, 병색이 있거나 골골거렸단 흔적은 찾아볼 수 없음을 언급한다. 즉, 볼모생활 내내 소현세자는 정상적이고, 조선에 있을 때보다 활동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물론 건강하다고 병이 안걸리는건 절대 아니지만, 그러기에는 지병을 달고있음에도 더욱 활동적으로 생활한 청나라시절이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병사설 자체와 별개로, 확증편향을 뒷받침하기 위한 소현세자 병약자 이미지의 근거는, 심양일기나 승정원일기에서, 당대 어의들이 소현세자 진료기록만 발췌해 쭉 연결하고 강조한 논문들이다. 논문들 자체는 소현세자의 병증을 심도있게 파고들고, 현대적 관점에서 명확히 규명해, 독살인지 병사인지 밝히겠다는 시도로서 매우 훌륭하다.
하지만 이 논문들 역시 아쉽게도 소현세자 타살 의혹을 제거할 만큼 실체를 규명해 내진 못했으며, 무엇보다 이 논문들만 읽고 소현세자가 허약체질 병약자였다고 단정해 확증편향된 논지를 갈겨대는 건 그냥 사실 왜곡에 가깝다. 왜냐하면 이 1차 사료들이 날씨 기록과 서연을 했는지 여부 다음으로 부지런히 기록하는 게 세자가 약간의 병증이라도 호소하면 어의들이 달라붙어 질병을 처방한 진료기록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수년간 쌓인 병원 기록만 한꺼번에, 그것도 디테일한 기록을 생짜 그대로 가져와 쭉 붙여서 나열해 놓으면 어떤 멀쩡한 사람도 병약체질 환자로 보이는 게 하는 게 가능 하며, 소현세자를 볼모생활 내내 병을 달고 살았던 골병환자로 왜곡하는 건 일도 아니다.53 또, 이 과정에서 나름 천수를 누렸던 왕이나 세자들의 병증 기록들과 동일선상에서 충분히 비교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예컨데 심양일기를 보면, 볼모로 있을 때 건강이 나빠졌던 건 강빈이나 봉림대군도 마찬가지다. 특히 강빈의 경우, 볼모생활 초, 조선에서 파견된 어의가 필요할 정도로 아픈 적이 있는데, 이후 세번째 딸을 무사히 출산했다. 또, 조선왕조실톡에서 나온 이미지와 달리, 소현세자 뿐 아니라 봉림대군도 병 때문에 청나라 군대를 못 따라간 기록들이 있으며, 형제간에 이런 일은 번갈아가며 있는 편이었다. 참고로 효종이 10년 후 사망한 건 지병 악화가 아닌 과다출혈로 인한 의료사고였다. 또 동궁일기에는 당시 한창 멀쩡히 활동중이었던 인조의 병에 관한 기록도 보이는데, 그것들도 소현세자 진료기록만큼 집중해서 모아보면 인조 역시 언제 쓰러져 급사해도 이상하지 않은 중증 환자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소현세자 병약자설을 확증편향하다보면, 모순이 생긴다. 귀국 후 갑작스럽게 병사할 만큼, 중대한 병을 달고 살던 소현세자는, 이 때문에 8년이라는 볼모생활동안 어의들이 한번도 아니고 두번도 아닌 무려 세차례나 오가게 하며, 외교활동, 전쟁 최전선 참전과 더불어, 아내 강빈과의 사이에서 무려 자식을 다섯이나 추가로 더 만들게 된 것이다. 54
엄연히 실제했던 인조의 소현세자에 대한 견제와 냉대를 마치 없었던 일인양 왜곡하거나, 인조의 본심에 대해 근거도 없이 선의로 해석하려 애쓰는 무리수를 둔다. 더 나아가, 심지어 소현세자 사후 강빈과 자식들에 대한 숙청, 전근대 사회에서도 '이건 부당하고 비인간적이다'고 여겨져 꾸준히 상소와 탄원이 올랐던 대대적인 숙청 역시 '조선을 지키기 위한 현군의 선택'이라는 논조로 정당화하려 하는 일관되게 섬뜩한 가치전도를 보인다. 하지만 병사설 확증편향 논리대로 정말로 인조가 단지 급작스럽게 장자를 잃고 차남 효종의 정통성을 세워주기 위해 '괴롭지만 본인의 선택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강빈에게 억지 누명을 씌워 죽이고, 손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밖에 없던 게 전근대 사회의 숙명이라면, 마찬가지로 아버지였던 세자가 일찍 죽는 바람에 삼촌이 먼저 재위에 올랐던 성종은 무사했다.
이제 와서 조선왕조실록만 토대로 소현세자의 죽음을 독살로 확정하는 것은 분명히 무리가 있으며, 특히 그것을 이형익이 마지막 순간에 놓았던 침 때문이라고 단정하는 것 역시 무리가 있다. 승정원일기같은 새로운 사료들은 충분히 반전이 될 만한 새로운 가설을 제공했다.
결론적으로, 소현세자의 죽음은 원인이 규명되지 않은 돌연사라고 정리하는 것이 현재로선 차라리 객관적으로 보인다. 혹은 일단 병사로 보이지만 의혹이 남는다. 정도가 가장 적합할 것이다.
귀국과정에서 병을 얻었던 소현세자는 이후 여러 어의들의 노력으로 건강을 회복하던 중, 약 한달 반 후 갑작스럽게 사경을 헤매다 삼일만에 손쓸 틈도 없이 사망했으며, 이후 시신은 염을 하기도 전부터 빠르게 참혹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우연히 시신을 본 종친 부인이 마치 약물에 중독된 사람같았다, 고 언급할 만큼. 여기까지가 논란의 여지 없는 사실이다.
소현세자가 사망한 이유는, 지금도 명확히 알 수 없다. 학술적으로는 병사설이 안전하게 지지될 수밖에 없는 게, 동궁일기와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귀국 후 급증한 병증 기록들 때문이다. 다만, 매우 아쉽게도 그 병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한계에 부딪친 거로 보인다. 심지어 소현세자 을유동궁일기 직역자는, 일단은 다른 연구가들처럼 소현세자 병사 가능성에 무게를 두면서도, 앞서 승정원일기를 중심으로 본 결론과 달리, 이형익이 의심받을만 했다는 개인적 의견을 덧붙였다.
여담이지만, 조선왕조실록을 근거로 소현세자가 독살되었다는 가설이 대중화 되기 전인 8-90년대에는 소현세자가 인조에게 청나라에서 선물로 받은 벼루를 자랑하자 분노한 인조가 소현세자의 머리에 벼루를 던졌고, 이에 맞은 소현세자가 상처가 덧나서 죽어버렸다는 식의 야사가 제법 퍼져있었다. 야사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봉림대군은 조선으로 귀환하면서 잡힌 포로들의 송환을 정식 요구했는데 소현세자는 벼루와 붓을 요구했고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한 인조가 벼루를 세자에게 던지니 그 자리에서 맞아 죽었다'라는 식의 내용. 하지만 정작 소현세자가 아버지에게 미움을 받았던 원인 중 하나는, 인조의 허락도 없이 청나라 볼모 생활 중 조선인 포로들을 구출한 탓이다. 아무튼 위의 야사가 소현세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담고 있는 것은, 병자호란 이후 반청기조가 팽배한 상황에서, 외교적 타협과 실용주의로 조선의 안전을 도모했던 소현세자의 행보가 당대 백성들에게 '오랑캐에게 아부한다'는 식의 흑백논리로 비난받게 된 정서를 반영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서양의 최신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던 조선인들에게는 소현세자가 가져온 천주교 성물이나 서양제 과학기기가 '쓸데없는 기물'로 오해받아 '벼루'로 왜곡되어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형익의 시침 직후 소현세자가 사망했음에도, 단지 그것만으로 이형익이 처벌을 안 받은 것은, 승정원일기에 나오는 소현 세자의 진료 기록만 살펴보면 딱히 수상한 일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세자의 마지막 순간에는 여러 의원들이 개입했고, 이형익은 그 전엔 침술을 통해 소현세자의 증세를 완화시킨 적 있었다. 이 때문에 세자의 정적인 소용 조씨와 연결고리가 있음에도, 신임을 얻어 그 다음에도 투입이 되었던 것이다. 다만 상술했듯 을유동궁일기의 기록을 보면, 소현세자의 병세가 승정원일기와 미묘하게 다르기 때문에, 이형익의 결백을 확신하기 좀 어려워 지긴 한다.
그럼에도, 조선 시대엔 의원에 대한 기대치 자체가 낮았다. 특별한 자격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따로 공부해야하는 과목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동네 글방 선생도 지인이나 자신에게 지병이 생기면 의서 몇권 읽고 의원 노릇 할 수 있었다. 그 정도로 의원이 되기 쉬운 만큼 의원에게 많이 바라지도 않았다. 고칠 수 없는 병이 많다는 걸 잘 알았고, 치료 받은 환자가 사망해도 어쩔 수 없다고 납득하고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57 조선시대 의원 중에 가장 유명한 허준의 위인전들이나 창작물들이 허준의 생애에 서스펜스를 더해주기 위해 임금을 살리지 못한 것을 생사기로에 선 절체절명의 위기로 묘사하거나 선조 사후 관직에서 물러난 것을 부당한 탄압으로 묘사하기 위해 오바를 한 이미지가 실제로 그랬던 것처럼 널리 퍼져있으나, 실제로 허준은 선조 사후 책임을 지고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다 복직하였으며, 이처럼 지존인 임금의 승하에 관여되어 있어도 잠시 관직을 떠나는 명목상의 처벌이 전부였으며 그마저나 일반적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어의들은 형식적인 사직조차 없이 관직생활을 이어갔다. 정말 시술이 문제시되어 처벌을 받은 어의는 조선 역사 통틀어 효종대 어의 신가귀 딱 한 명뿐이다. 그 신가귀조차 명백히 본인의 과실로 왕을 과다출혈으로 사망케 했음에도 참형이 아닌 교수형을 당했다. 이런 맥락이 있었기 때문에, 이형익은 뒷날 인조가 승하했을때도 무탈했다.
서인이 소현세자를 죽였다?
한편 조선 폭망의 원인이 노론이었다는 노론 음모론이 소현세자의 비극과 결합하면서 소현세자를 싫어한 서인과 인조가 합작해서 독살했다는 음모론도 나돌았다. 하지만 독살설, 타살설이 설득력이 있는가 없는가를 떠나서 그 배후가 서인이라는 주장은 진실과 매우 매우 거리가 멀다.
물론 소현세자의 독살범으로 강하게 의심받고, 이후 민회빈 강씨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김자점이 공교롭게도 서인이긴 하다. 하지만 김자점은 당시 서인의 주류를 크게 벗어난 일탈행동을 한 것이었다. 서인의 영수가 속한 주류는 청서파였는데, 김자점은 서인 내에서도 소수파인 공서파에 속했고, 심지어 그 공서파 내에서도 소현세자를 지지하는 이들이 더 많았으며, 김자점은 서인에서 보면 외톨이, 아웃사이더에 가까웠다. 당장에 인조 시기 조정을 장악한건 서인이었는데 조정대신들은 김자점, 김류를 제외하면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는데 반대했고 김류 역시도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는건 찬성했지만 민회빈 강씨 처분에 관해서는 왕과 입장을 달리했다가 미움을 샀다.
노론 음모론과 정반대로, 오히려 서인은 소현세자의 강력한 지지층이었다. 소현세자빈의 아버지 강석기부터, 서인들과의 탄탄한 혼맥 구조로 인해 딸인 강빈이 세자빈으로 당첨당한 사례다. 또한 소현세자 상례 때 기년복(1년) 대신 참최복(3년)을 입어야 한다 주장하며, 소현세자-원손 후계구도를 강력히 주장한 것이 사람이 서인의 대표격인 송준길이었다.
다만 서인이 소현세자를 옹호한 이유는, 소현세자 본인의 개인 성향이나 정치적 성향과 무관히, 단지 소현세자가 장자라는 이유에서였다. 이는 서인의 학풍 때문이었다. 서인은 왕과 사대부가 같다는 이기일원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고, 따라서 소현세자와 그 자식들이 가장 정통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이후 인조가 각종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소현세자의 가족들을 숙청하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자 강하게 반발했고, 이후에도 계속해서 강빈 사건의 재조사를 주장했다.
이런 소현세자에 대한 서인들의 옹호는 심지어 소현세자가 사망한지 십수년이 흐른 후에도 이어졌다. 서인들은, 소현세자 막내 아들 경안군과 그가 요절하며 남긴 아들 임창군 임성군 형제로 간신히 이어진 소현세자의 혈손들이 효종, 현종, 숙종 라인으로 이어지는 현 왕가보다 정통성이 있다는 생각을 은연중 비치며, 예송논쟁의 단초를 제공했다. 예송논쟁이 식민사관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하등 쓸모없는 상복 배틀이 아닌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가 상복 입는 기간을 통해 효종을 장남으로 인정하느냐, 차남으로 보느냐는, 효종의 정통성 문제이기도 했고, 소현세자의 죽음 후 일어난 그의 혈손들에 대한 숙청을 떠올리는 매우 민감한 이슈였던 것이다.
또한, 이런 서인들의 옹호가 실제로 소현세자 혈손들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하는데 하등 보템이 되진 않았다. 도리어 현 왕실의 소현세자 혈손들에 대한 견제심만 키워 유배 뺑이 돌리게 하는데만 일조했다.
소현세자의 상례에 관한 실증적 고찰
소현세자 사망후, 인조가 세자빈과 원손을 정적으로 취급해 숙청했다는 큰 맥락은 부인하기 어렵다. 다만, 인조가 소현세자의 상례까지 경우없이 약소하게 치렀다고 보는 시선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인조의 의도가 무엇이었건, 결과적으로 인조가 치른 소현세자의 상례가 왜란이후 간소화된 조선후기 세자 상례의 선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인조 시기가 조선 제도사에서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분기점으로 꼽히는데 국가 의례측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왜란으로 전대 문헌이 대거 소설된 사정과 예학의 발전, 산림의 대두속에 의례 절차들을 새로이 논의하고 만들어 나가야했다. 1645년(인조 23년)에 행해진 소현세자의 상례는 1457년(세조 3년)에 행한 의경세자의 상례와 1563년(명종 18년)에 행한 순회세자의 상례에 이은, 조선 역사상 세번째로 행해진 세자 상례이자 임진왜란 이후 첫번째 행해진 세자 상례 중 하나였다.
인조는 소현세자를 왕위 계승권에서 완전 지워버리기 위해, 그의 권위를 상기시킬 수 있는 행보들을 적극적으로 차단했다.60 다만 그와 별개로 상례 절차는 격식의 틀 내에서 '검약'을 내세워 최대한 단출히 치렀다고 해석된다. 소현세자는 폐세자 되거나, 죄를 지어 죽은 것이 아니었고, 엄연히 국본(왕세자)으로서 사망했다. 이런 소현세자의 장례를 뚜렷한 명분도 없는 상태에서 격하시켜 치른다는 것은, 왕조 시대에 다른 사람도 아닌 왕인 인조 본인의 권위를 실추시킬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소현세자가 아플때 적극적으로 치료케하고 용태를 보고받았던 대목이나 세자 사후 격한 반응을 보면 인조는 남의 자식인 며느리나, 그 며느리 피가 섞인 손자들과 별개로 자기 맏이는 확실히 아꼈다.
소현세자 상례의 절차와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 시대 전체 세자들의 상례 절차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비교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이 같은 과정을 거치면 소현세자 상례는 조선시대 세자 상례가 정형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의미있는 사례다.
소현세자는 1645년(인조 23년) 4월 26일 오시 정각 창경궁 환경당에서 사망했다. 우선 초혼(招魂)하는 복(復)61가 진행되었고 뒤이어 왕과 왕비, 백관은 옷을 갈아입고 거애(擧哀, 왕이나 왕후가 승하한 뒤 비로소 슬픔을 표하는 절차)하였다. 그리고 종묘와 숙녕전(肅寧殿, 사망한 인조 비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에 세자의 상을 고했으며, 임시기구인 장례 도감이 설치되었다. 또한 급히 강화사고로 사관을 파견하여 실록에 나오는 세자상 관련 내용을 등사(騰寫, 베껴오다)해오도록 하였다.
소현세자의 상례는 임진왜란 이후 처음 발생한 세자상으로서, 왕실에서 참고할 만한 기록들이 대거 소실된 상태였다. 가장 기본이 되는 왕실 예법서 <국조오례의>는 왕과 왕비의 의례집으로, 세자 상례에 대한 규정은 빠져있기 때문에 참고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세조실록>과 <명종실록>에 기록된 의경세자와 순회세자의 사례를 참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강화 실록들도 흩어지고 일부 소실되어 모든 기록을 검토하진 못했다. 이에 완전한 실록을 상고하기 위해 5월 4일에 사관을 무주사고로 파견하였다. 5월 18일 무주에서 실록이 올라오면서 실록을 근거로 구체적인 절차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온전한 실록 기록 확보가 늦어지면서 이미 진행된 절차와 실록과의 차이가 또 다른 논점을 낳게 되었고 이는 새로운 규정이 마련되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먼저 한여름에 상례를 치러야 하는데 실록기록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상례는 우선 진행되고 의례를 수행하는데 꼭 필요한 세부사항들은 새로 논의하여 결정해야했다. 인조와 관료들은 상례를 치르면서 왕실의 의례를 전면 재정비해 후세의 전범(典範, 의례규범 편찬서)을 만드는 시대적 요구까지 받들게 된 셈이었다.
세자가 왕보다 낮으니 왕례(王禮)보단 강쇄(降殺, 등급을 깎아 낮추다.)하고 사대부례보다는 높아야 한다는 원칙은 알았지만 세부기준이 전해지지 않으니 낮추고 높이는 정도에 대해선 저마다 의견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일단 입관 절차는 <국조오례의>에서 왕은 5일째 입관하도록 규정한 것에 의거 세자니까 강쇄하여 3일만에 입관하도록 했다.
성복(成服, 시신을 입관한 다음날 상복을 갖춰 입는 절차로, 왕세자, 대군 이하의 왕자, 왕비, 왕세자빈, 내외명부, 종친과 백관 등 모두가 최복이라 불리는 삼베 상복을 입는다.)은 왕은 6일째에 시행하지만 세자이니 4일째에 시행되었다.
그리고 성빈(成殯, 빈소를 차리는 절차)때 왕은 찬궁(欑宮)이라하여 안에 사신도를 그려 붙인 나무 집을 만들어 그안에 관을 보관하는 가매장 절차를 거치나 세자의 예에서는 생략하기로 했다. 이상의 방식은 강쇄의 원칙에 따라 예조가 제안한 것으로 인조는 이를 허가했다.
이리하여 4월 27일 시신에 상복을 입히는 습(襲)과 옷과 천으로 시신을 감싸는 소렴(小殮) 절차가, 4월 28일 수의로 시신을 감싸묶고 입관하는 대렴(大斂) 절차가 끝나고 창경궁 숭문당에 빈소가 차려졌다. 그리고 이날 앞서 언급된 강화사고 실록기록이 확인된다.
3일째 입관하고 4일째 성복하는 절차는 의경세자상(喪)과 동일하여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상복과 찬실(欑室, 세자 사후 관을 모시는 절차)에선 차이가 있었다. 예조는 수정할 것을 제안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찬실은 성빈할 때 세자와 세자빈의 관(梓室)을 모셔두는 곳으로 왕의 찬궁을 낮추어 부른 명칭이다. 찬실을 설치하지 않은 것은 소현세자상이 간략하게 치러졌다는 근거로 제시되는데 한여름인 소현세자상에는 굳이 찬실을 만들지 않아도 되었고 참고할 전례가 부족한 상황에서 왕의 찬궁에서 강쇄한 찬실의 제도를 급히 마련하는 것이 어려웠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세자 상례외에 이전 국상(國喪)에 대한 기록들(각종 등록류)들도 풍부하게 활용되었다. 5월 1일 소현세자 생존시를 형상화하여 백관이 참알례(參謁禮 원래는 중하급 관원이 상급관청을 찾아 인사하는 의식을 말한다. 여기선 백관이 세자를 찾아 인사하는 형식으로 진행)를 행했는데 이건 인열왕후 상례 기록을 근거로 한 것이다.
5월 4일에는 강화 실록 기록에는 빠져있어 알 수 없던 세자 발인시 의물(儀物 의장기물)을 대행왕 상례때 기록을 참고하여 여기서 강쇄하는 방식으로 마련했다.
시책(諡冊 조선시대 국왕과 왕비가 죽은 뒤 시호(諡號)를 올릴 때 사용된 역사서)과 옥책(玉冊 시호나 존호를 올리는 문서)은 의경세자의 상례에 사용되었다는 기록은 있었으나 재료가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왕의 시책과 애책은 옥을 사용하지만, 세자는 생전 책봉할 때도 죽책을 사용하기 때문에 사망 후의 시책과 애책도 대나무로 만들도록 정해졌다.65
시인(諡印 국장에서 사용된 시호를 새긴 도장)은 옥으로 제작해 금으로 제작하는 왕의 시보(諡寶 시호를 새긴 도장)와 차등을 두고 발인에 사용되는 함궤(函樻), 배안(排案 책봉 따위의 의식이 있을 때 책문(册文) 등을 올려 놓는 탁자), 상탁(제상(祭床)과 향탁(香卓))은 검은 옻(黑漆)을 칠하기로 하였는데 이는 임금 상례에 사용될 물건엔 왜주칠을 하는 것에서 차등을 둔 것이다. 소현세자 상에서 정해진 이상의 규정들은 영조대 편찬된 궁중의례서 <국조상례보편>의 세자 상례 절차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5월 16일 세자의 시호가 소현세자로 정해졌다. 묘호(墓號)와 궁호(宮號), 수묘관(왕실의 능과 묘소를 관리하는 관리)은 정하지 못한채 무주사고의 실록 기록이 도착하길 기다렸다. 5월 18일 무주실록 기록이 올라오면서 구체적인 절차가 결정되었다. 의경세자의 상례에 따라 세자의 발인 때에 승지가 호위하여 가도록 하고, 우제(虞祭 장례(葬禮)를 마치고 돌아와서 지내는 제(祭))는 오우제(五虞祭 장사 후 5번 지낸다는 의미다. 왕과 왕비는 칠우제, 사대부는 삼우제)로 정해졌다.
묘호와 궁호의 문제는 의경세자와 순회세자의 사례가 달랐는데, 의경세자는 묘(墓 무덤)는 의묘(懿墓), 묘(廟 사당)는 효정묘(孝靖廟)로 따로 명명했지만 순회세자는 순화묘(順懷墓), 순회묘(順懷廟)로 동일했다. 이 문제는 실록의 전례에 따라 대상(大祥 죽은 지 2년이 되는 달의 기일(忌日)에 지내는 제사)을 지낸후에 정하기로 하여 보류된다.
이상의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관상감제조 김육(金堉)과 예조참의 이덕수(李德洙)는 술관(術官 음양·복서·점술 등의 지식을 가지고 길흉을 점 치는 관리)들을 인솔하여 5월 5일부터 건원릉(태조 릉) 광릉(세조와 정희왕후릉), 희릉(장경왕후릉), 효릉(인종과 인성왕후릉) 등을 면밀히 살펴 장지를 정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그리하여 5월 15일 효릉(孝陵) 우동(右洞) 을좌신향(乙坐辛向)의 언덕이 장지로 정해졌다. 절차는 순회세자의 전례를 받들어 간소하게 진행해 민간의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는 주장이 장지가 정해지기 전부터 강조되었다.
인조는 직접 순회세자묘를 방문해 살폈고 왕릉보다 격을 낮추어 문석(文石 능앞에 세우는 문관형상 석상)과 호랑이, 양, 말 석상을 한쌍씩 배치하고 사대석(莎臺石 봉분 둘레에 세우는 돌)과 홍문(紅門 능(陵), 원(園), 묘(廟) 정면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문) 설치하지 않으며 묘를 수호하는 군졸의 수는 순회세자의 전례와 동일한 30인으로 결정되었다.
너무 간략하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인조는 검약을 숭상하는 뜻을 밝히며 그대로 진행시켰다. 이걸 인조가 세자를 박대했다는 근거로 많이들 활용되는데 이러한 제도는 기본적으로 순회세자묘라는 전례를 따른 것으로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종묘에서 달마다 초하룻날과 보름날에 간략하게 지내는 삭망제(朔望祭)도 거를 정도로 물자 아끼는데 열심이었던 인조대 궁중 의례에서 곧잘 보이는 양상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또한 병풍석을 설치하지 않는 조치는 효장세자 상례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정묘호란 직후에 치러진 강빈의 가례도 예물을 축소했고 인열왕후 상례도 똑같이 검약하게 진행했다. 조선 왕릉은 담백한 억새봉분으로 유명한 태조의 건원릉 이후로 점차 대형, 화려해지는 양상을 보이는데 인열왕후를 위한 장릉(長陵)을 조성할때 건원릉을 참고해서 석물을 간소화하고, 혈(穴)도 얉게 파서 공사부담을 줄이게끔 조치했다.
소현세자가 임진왜란으로 이전 기록이 대거 소실된 상태에서 조선후기 세자 상례의 기본이 되었다면 인열왕후 상례는 조선 후기 왕비 상례의 기본이 되었고 이 둘을 나란히 놓고 보면 공통점이 상당히 보인다.
일부 연구자는 소현세자 묘를 조성하며 격회(隔灰 관을 묻을 때, 먼저 관의 바깥 주위에 석회를 메우는 절차)를 하지 않았으니 인조가 장례를 대충 치른 증거라고 주장하는데 소현세자묘는 엄연한 회곽묘다. 당연히 석회를 둘렀움이 의궤에서 확인된다. 다만 탄격(炭隔)을 생략하긴 했다.
조선 시대식 회곽묘는 일단 무덤이 들어가는 구덩이 광중(壙中)을 파서 목관을 안치한 다음 삼물(三物), 석회, 황토, 세사(細沙 입자 고운 잔모래)를 섞는데 탄격(炭隔)은 삼물과 광중 벽 사이에 숯가루를 추가하는 것이다. 숯, 석회, 황토, 세사의 사물(四物)로 묘를 조성하는 것인데 국조오례의가 제시하는 회곽묘 조성법이다.
고운 숯가루를 그득 쌓아야해서 자원 소모와 공역이 심해서 사대부들 회곽묘 조성에선 생략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에 조성된 사대부가 회곽묘 발굴에서 탄격의 흔적이 나타난 사례는 현재까지 없다. 심한 물자부족을 초래했던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무덤 조성방식이 변화한 것으로 18세기에 이후론 삼물의 구성 비율에서 구하기 힘든 석회 비율을 조정하는 등 묘가 간소화되는 경향이 더욱 강해진다. 그러니까 그냥 물자와 공역을 절약하자는 취지였다.
6월 15일로 발인 날짜가 정해졌고 6월 9일 시책과 시인을 빈궁에 내렸다.
6월 10일에는 명정(銘旌 국상(國喪)을 지낼 때 상여 앞에서 길을 인도하고 하관이 끝난 뒤 관 위에 씌워서 묻는 깃발)을 고쳐 썼다.
6월 11일 발인과 반우(返虞 장사 치른 뒤에 신주를 모시고 돌아와 궁궐에 있는 혼전에 모시는 의식)을 위한 습의(習儀 사전연습)가 진행되었다.
6월 14일 사시에 계빈(啓殯 발인할 준비로 출구(出柩)하려고 빈소(殯所)를 엶) 절차가 진행되고 신시에 조전(祖奠 길의 안전을 담당하는 도신(道神)에게 능지까지 안전하게 무사히 갈 수 있도록 기원하는 제사)을 행했다.
6월 15일 4경 5점에 견전제(遣奠禮 발인(發靷)할 때 문 앞에서 지내는 제사)를 올리고 5경 1점에 발인했다. 명정전 동쪽 뜰을 거쳐 명정문과 홍화문의 왼쪽 협문을 나간 행렬은 19일 축정(丑正 오전 2시)에 천전례(遷奠禮, 발인하기 위하여 영구를 옮길 때 지내는 제사)를 지내고 진정(辰正 오전 8시) 1각에 매장을 시작했다. 사시(巳時)에 입주전(立主奠 신주를 만들어 사당에 모셔 놓고 올리는 의식)을 치른 다음 반우(返虞 장사 치른 뒤에 신주를 모시고 돌아오는 절차)하여 인경궁 중휘당 혼전에 도착했다.
이날 신시에 초우제, 20일 재우제, 22일 삼우제, 24일 사우제, 25일 오우제를 지내고, 27일에 졸곡제(卒哭祭 우제 이후 지내는 제사. 졸곡은 곡을 그친다는 뜻으로 이때부턴 아침과 저녁으로만 하게 되어 있다.)를 지냈다. 수묘관과 혼궁관원을 중심으로 1646년 4월 26일 연제(練祭 사망 첫 기일에 지내는 제사), 이듬해 상제(祥祭 두번째 기일에 지내는 제사)가, 이후 담제(禫祭 3년의 상기를 마친 뒤 상복을 벗고 평상으로 돌아감을 고하는 제사)가 치러졌다.
담제를 마치면 사당을 지어 세자의 신주를 봉안해는 절차가 기다리는데, 소현세자의 경우 별도의 사당을 짓지 않고 순회묘(順懷廟)에 순회세자의 신주와 함께 봉안되도록 했다. 이는 순회세자 때와 다른 조치로, 소현세자상이 간소하게 치러졌다는 중요한 근거로 쓰였다. 하지만 순회세자 입묘시에는 의경세자가 추숭된지라 나란히 봉안할 세자의 사당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놓치고 있다.
왕실의 손이 극히 귀해지는 조선 후기에 효장세자(영조), 문효세자(정조), 효명세자(순조)의 사례가 연달아 나와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는데 세자가 병사하는 사례가 그리 많지 않다. 조선 전기에는 폐세자가 된 의안대군, 양녕대군, 이황, 이지를 제외하고 왕이 되지 못하고 병사한 세자는 소현세자 이전 2백 수십년간 의경세자와 순회세자 단 2명 뿐이었고 순회세자가 사망했을 때 성종의 아버지인 의경세자는 이미 덕종으로 추숭받아 왕으로 종묘에 신주가 봉안 되어 다른 세자 사당이 존재하지 않았다. 때문에 세자 신주를 봉안하는 전례도 없어, 소현세자 신주를 순회묘에 함께 봉안토록 한 조치가 반드시 전례에 어긋난다고 말하긴 어렵다.
영조대 효장세자 입묘시에도 소현세자의 전례를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게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신하들이 자식 잃은 슬픔에 잠긴 영조 앞에서 이런 주장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조도 이를 여러 의견중 하나로 담담히 받았지 예법에 어긋나거나, 잘못된 주장이라고 하진 않았다.
묘호와 궁호도 순회세자의 경우에 따라 소현묘(昭顯墓), 소현묘(昭顯廟)로 정했고 이후 치러진 왕세자, 세자빈 상례 단의왕후, 효장세자, 의소세손도 이러한 방식을 따랐다.
상복 문제의 경우, 소현세자의 상복은 왕과 왕비가 입는 장자복과 신하들이 입는 세자복으로 구분된다.
4월 27일 예조는 왕과 왕비가 입을 상복을 기년복(아내 상 혹은 아버지 생존시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1년 상을 치를 때 입는 상복)으로 간주하고, 구체적인 형식과 절차는 인열왕후의 상례 기록을 따를 것을 제안하였다.
상복은 참최(斬衰), 자최(齊衰), 대공(大功), 소공(小功), 시마(緦麻)의 오복제도로 나뉘는데 인열왕후 상례 복제에 의하면, 자최복을 12일간 입었다가 벗고 공제복(公除服)이라 하여 백목면(白木綿)으로 된 단령(團領)과 생마(生麻)로 짠 띠(布帶), 백피화(白皮靴)를 착용하는데, 이전 12일과 합쳐서 총 30일 만에 복을 완전히 마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머니 상과 큰아들 상에 구분을 둬야지 똑같이 할 수 있냐는 반론이 제기되어 실록의 기록을 기다리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4월 28일 보고된 실록의 의경세자 상례에서 세조의 상복은 기년복으로 30일간 백의와 추포대를 하는 단상임이 확인되었다.
백의는 인열왕후 상례때 언급된 백목면으로 만든 단령으로, 베(布)로 만드는 자최복과는 아예 다르다. 추포대는 위에 언급된 거친 생마로 짠 띠다. 세자가 왕보다 먼저 사망하거나 세종대 소헌왕후처럼 왕비가 왕보다 먼저 사망한 경우 왕은 자최복을 입지 않고 백의와 추포대만으로 30일을 마쳤다. 이게 조선전기 왕실의 기년복제였던 건데 예조는 의경세자상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인조는 “예에 근거가 있으니, 이전대로 마련하여 행하라”고 명하였고 인렬왕후상의 방식으로 복제가 결정되었다.
인열왕후상은 30일만에 복을 마친다는 점에서는 의경세자상과 동일하지만 일단 자최상복을 12일간 입었다가 공제복으로 변복하는 절차를 거쳐 백의와 추포대로 바꾼다는 점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인열왕후의 상례는 선조대 의인왕후 상례를 참고한 것으로, 임진왜란 이후 참고할 자료가 불에 소실되고 부족한 상황에서 국가 전례가 사대부 예학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당시 선조는 예학적 지식을 갖춘 신료들의 의견에 따라 먼저 자최상복을 입었는데 나중에 조선 전기 실록을 확인해서 백의와 추포대만 입었음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입었던 상복을 갑자기 바꿀 수는 없으니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 군주는 국가의 많은 일을 처리해야 하므로 사대부들처럼 상(喪)에 임하여 달수를 다 채울 수 없기에, 편의적으로 달수를 날수로 환산하여 상을 치렀다. 곧 삼년상인 경우는 27개월을 27일로 바꾸어 지내고 기년상인 경우는 12개월을 12일로 바꾸어 지냈다.)를 적용해 12일차에 공제복으로 변복하는 절차가 추가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왕실의 기년복은 자최상복을 입다가 공제복으로 바꾸어 30일만에 마치는 단상으로 확립되었다.
인조는 4월 29일부터 자최상복을 입고, 만 12일만인 5월 12일에 공제복으로 백색목면단령, 생마포대, 백피화를 착용했다. 공제 이후 기존의 자최상복은 전례에 따라 상의원 내시의 책임 하에 후원에 묻었다. 그리고 18일을 더 지낸 후 30일 만인 5월 29일에 복을 마쳤다.
그런데 30일 만에 복을 마치는 단상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은 바로 인조였다. 5월 3일에 인조는 자신이 자최기년복인데, 왜 30일 만에 복을 벗는지 질의했다. 예조는 실록을 근거로 <가례>의 기년복에 30일 휴가를 주는 제도에 맞추어 30일에 상복을 마치도록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인조는 30일에 복을 마치는 단상제를 쓰지 말 것을 명령했다. 예조가 무리하게 고쳐서는 안된다고 반대했다. 인조는 다시 아내의 복과 장자의 복은 다르고 장자의 복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30일에 상복을 마치는 제도를 쓰지 않아야 한다는 입장에서 대신들에게 이 문제를 논의하게 했다.69
5월 7일 예조는 선왕조때부터의 전례를 함부로 바꿀수 없음을 다시 한번 주장했고 이를 인조가 받아들여 인열왕후상과 같이 12일에 공제하고 30일에 마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논의가 조용히 끝나지 않았다. 전기 기록 소실이 심하고, 실록은 상세하지 않으니 왕보다 차등을 둔다는 원칙 아래 신하들마다 자의적인 기준으로 논쟁이 이어졌다.
5월 20일에 송준길은 <의례儀禮>에 따라 장자에게 참최삼년복을 입어야한다는 원칙을 주장했지만, 이건 당시로선 전례가 없는 굉장히 급진적인 주장이라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5월 27일에는 부제학 이목, 교리 유홍, 부수찬 김홍욱이 차자를 올려서 3년짜리 참최복을 행하지 않고 1년짜리 기년으로 낮춘 것도 문제인데, 기년을 채우지도 않고 30일만에 복을 벗는 것은 더욱 심하다고 주장하였다. 일단 이미 12일이 지나 공제복으로 갈아입었으니, 공제복으로 기년을 채울 것을 제안했다.
인조는 예조에 명하여 이 문제를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영의정 김류와 좌의정 홍서봉은 순회세자 상례에 의경세자의 전례를 그대로 따랐고, 당시 퇴계 이황도 제왕가의 상제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았음을 강조하였다. 결국 조종의 성문법을 준수해야 할 것을 주장했고 인조는 이 견해를 받아들였다.
이러한 논의를 거쳐 소현세자를 위한 기년복은 공제가 적용된 30일 단상제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왕조례는 매우 보수적인 속성을 보이는데, 수많은 논쟁을 거쳐도 결국은 조종 전례를 따른다는 명분으로 기존의 관행대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이목, 유홍, 김홍욱이 제안한 공제복으로 기년(1년)을 마치는 방식은 이후 단상제가 폐지되는 단의왕후 상례를 시작으로 효장세자와 문효세자의 상례에 적용되었다. 소현세자 상복 논쟁은 왕실의 단상제 폐지로 나아가는 논의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송준길이 의례를 근거로 참최삼년복을 주장하는 것은 조선 예학의 변화 발전 양상을 대변한다.
당시 세자를 위한 상복은 자최기년이 전례에 합당하였고, 뒷날의 영조도 효장세자 사후 기년복을 입었다. 이는 <경국대전>에서 장자와 중자를 구분하지 않고 “아들을 위한 상복은 기년”이라 규정한데 기반한 것으로 조선 전기부터 세자의 상복은 계속 기년이었다. 송준길이 주장한 참최삼년복은 고례를 중시하던 산림학자들의 원칙론이었을 뿐 조선의 세자에게는 한 번도 시행된 적이 없는 복제였다.
왕의 장자복과 더불어 백관의 세자복에 대해서도 논의가 이루어졌다. 4월 26일에 홍문관은 명나라의 태자 상례 조항을 모방하여 절목을 만들어 올렸는데, 여기에서 백관의 복제는 12일간 자최기년복을 입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예조는 "명의 상례는 날짜로서 달수와 바꾸었으므로 초상이 막 난 때로부터 12일에 이르기까지가 곧 우리나라로 말하면 기년복이 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런데 4월 28일 보고된 세조대 의경세자 상례 절목에 의하면, 백관의 상복은 자최삼월복70이고 여기에 식가(式暇)를 적용하여 7일간 백의, 오사모, 흑각대를 착용했다 벗는 간략한 절차로 치러졌음이 확인된다. 당혹스러워진 인조와 신료들은 자최상복으로 3개월을 채우는 방향으로 정리하려 했다.
삼사는 백관의 세자복은 기년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인조는 전례를 따르기로 결정한다. 그러자 다음에는 신하들은 3개월 내내 자최복을 입냐는 물음이 제기되었다. 자최삼월복은 이일역월하면 한달을 하루로 쳐서 3일만에 갈아입어야 하지만 의경세자 상례때 백관이 7일만에 상복 벗은 전례와 절충해 7일만에 자최상복 벗고 백의, 오사모, 흑각대를 착용하는걸로 정했다. 서연관과 세자를 호위하는 익위사 관원은 차이를 둬서 12일만에 변복케 하고 자최상복은 벗기만 하고 3개월간 그대로 두며 장례때도 자최상복을 입고 참여하게 했다.
역시나 송준길은 의경세자때의 전례는 억측으로 만든 근거없는 사례이며 왕은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부제학 이목은 왕은 기년복으로 채우고 백관도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조종의 전례를 따라야하며 왕의 장자복과 신하의 세자복이 똑같을 수 있냐는 반박에 막혔다.
이때의 논의들은 조선 사대부들의 예학이 점점 정교해짐을 보여줌과 동시에 예송논쟁의 예고편이다.
17세기 소현세자상의 자최삼월복은 국조오례의에도 근거가 적혀 있지 않은 15세기 의경세자상의 백의 7일복보다는 예학적인 진전을 보여주는 변화이며 여기서 더 논의를 거쳐서 18세기 효장세자상에는 백관의 자최기년복으로 이어진다.
소현세자상에서 시행된 상례 절차는 등록과 의궤로 후대에 전해져 세자 상례의 새로운 기준으로서, 숙종대 단의왕후, 영조대 효장세자 등 세자와 세자빈의 상례에 적극 활용됨은 물론 영조대 편찬된 <국조상례보편>에도 상당수 반영되었다. 물론 변경되는 사례들도 다수 있지만, 소현세자 상례는 임진왜란 이후 세자 상례의 기본틀을 구축했다는 점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추후 변화의 과정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것이지 소현세자 상례가 이후의 의식과 다르다고 해서 약소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의 시간성을 간과하는 주장이다.
덧붙여 '능'은 왕과 왕비, '원'은 세자, 세자빈의 무덤이고 '묘'는 기타 나머지 무덤을 뜻한다. 즉 세자인데 원이 아니라 묘라는 것은 세자 취급 안 해준다는 소리다라는 주장이 널리 퍼져있는데 조선 시대 왕실 상례를 살펴보는 대신 기계적으로 암기만 해서 생긴 낭설이다. 조선 시대 세자묘들은 처음에는 묘(墓)였다가 후손이 즉위하면서 추숭되거나 왕실 권위를 높이기 위해 격상시켜 능원(陵園)으로 바뀌었다.
의경세자의 무덤은 '덕종'으로 추숭되어 경릉(敬陵)은 개칭되기 전까진 그냥 의묘(懿墓)였다. 인조대 기준으로 조선에 유일한 세자묘였던 순회세자의 무덤도 '순회묘(順懷墓)'로 명명되었다가 1870년(고종 7년) 12월 10일에 순창원(順昌園)으로 개칭했다. 소현묘란 명칭 자체가 의경세자의 추숭으로 조성 당시 유일한 세자묘였던 순회묘의 전례를 본받아 정해진 명칭이다.
효장세자의 무덤도 효장묘(孝章墓)였다 정조 즉위 직후 '진종'으로 추증되면서 영릉(永陵)으로 바뀌었다. 사도세자의 융릉(隆陵)도 영조대는 수은묘(垂恩墓)로 명명되었고, 사도세자의 첫아들 의소세손의 무덤은 의소묘(懿昭墓)였다가 1870년(고종 7년)에 의령원(懿寧園)으로 격상되었고,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의 무덤도 원래는 효창묘(孝昌墓)였는데 1879년(고종 16년)에 '효창원(孝昌園)'으로 격상되었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무덤은 조성되었을 때는 연경묘(延慶墓)라고 부르다 헌종이 즉위하여 '익종(翼宗)'으로 추존하면서 수릉(綏陵)이 되었다.
고종 이전에 세자묘를 원이라고 부른 사례는 정조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은묘에서 영우원(永祐園) 다시 현륭원(顯隆園)으로 개칭한 사례가 유일했는데 아버지를 어떻게든 왕으로 추숭하고 싶었지만 자기 충신들조차 설득할 명분조차 없었던 정조가 궁여지책으로 개칭한 명칭이다. 사도세자만의 특수한 사례로 단순한 병사(病死)였다면 원으로 불릴 일 없었다.
우리가 조선시대 것이라고 알고 있는 수많은 요소들은 알고보면 오랜 변천을 거쳐 조선 후기에나 굳어진 것들이 많다. 왕실 관혼상제와 능원도 마찬가지다.
참고로 강빈의 오라비 강문명은 세자의 발인 날짜가 외조카인 원손에게 불길한 날이라는 지관의 말을 듣고, 날짜를 바꿔달라 요청했으나 인조가 듣지 않고, 나중에 이 일로 트집잡혀 유배가고 숙청된 사실을 상례를 대충 치른 근거랍시고 가져오기도 하는데 이건 그냥 후계자를 효종으로 정했기 때문에(=강씨와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쳐내기로 했기에) 생긴 일이지 상례를 대충 치러서가 아니다.
소현세자가 죽은 이상 인조의 권위를 흔들 순 없었고 남은 건 효종을 위해 처리해야 하는 그의 가계였는데 처리해야 할 강씨 가문의 견해를 수긍해서 그들의 발언권과 입지를 유지시켜 줘야 할 이유가 없다. 왕실 상례 같은 중요한 행사에서 그 터를 정하는 일에 관여하는 것은 정치적 입지를 되새기는 것이지 단순한 추모나 권유의 의미가 아니다.
그리고 풍수는 기본적으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 팔때 물이라도 나오지 않는 이상 참고 이상의 의미는 없다. 겨우 풍수사 말 안 들었다고 상례를 대충 치른 증거라고 민다면 맏아들 죽을 흉지라는 풍수사 최양선 말을 듣고도 소헌왕후와 자신의 묘를 헌릉 옆 땅으로 정한 세종도 문종과 아내를 아끼지 않아서 아내 상례를 대충 치른 거란 말인가? 원래 파주 운천리에 있던 인조의 장릉은 뱀과 전갈이 출몰하는 흉지라서 영조 때 파주 탄현면 갈현리로 이장했는데 그럼 이것도 효종이 효심이 없어서 대충 상례를 지낸 결과란 말인가?
볼모생활에서 의문의 죽음까지, 비운의 왕세자
1612년(광해군 4) ~ 1645년(인조 23)
인조조선(仁祖)의 맏아들이자 왕세자.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9년 동안 청에서 볼모 생활을 하였으며, 조선에 돌아온 후 사망하였다.
조선에서의 생활 : 병자호란까지
소현세자의 이름은 왕(炡)이며, 1612년(광해군 4년) 1월 4일 당시 아직 능양군이었던 인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선조조선(宣祖)의 증손자이자 후일 원종조선(元宗)으로 추존되는 정원군의 손자로, 그의 어머니는 한준겸(韓浚謙)의 딸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인 인조는 일개 왕자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역시 왕위와는 거리가 먼 입장이었다.
그러나 소현세자가 12살이던 1623년 능양군이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켜 광해군(光海君)을 몰아내고 왕으로 즉위함으로써, 그의 입지는 한순간에 급변하였다. 반정을 일으킨 그 해 소현세자는 원자가 되었으며, 1625년(인조 3년) 14세의 나이로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인조는 세자의 교육에 큰 관심을 기울여, 소현세자가 원자일 때부터 오윤겸(吳允謙), 이정구(李廷龜), 정엽(鄭曄), 정경세(鄭經世)를 원자의 보양관으로 임명하고, 당시 산림으로 이름이 높았던 김장생(金長生)과 장현광(張顯光)을 원자를 가르치는 강학원의 요속(僚屬)으로 삼았다. 소현세자가 정식으로 세자가 된 이후에도 이원익(李元翼), 윤방(尹昉), 이식(李植), 장유(張維) 등을 시강원의 관원으로 삼아 세자의 교육을 보강했다. 소현세자는 명실상부 차기 조선의 왕으로서 길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소현세자가 살았던 시기는 북방의 후금과의 갈등이 고조되던 시기였으며, 그의 일생은 그 영향을 직접적이고도 치명적으로 받게 되었다. 16세이던 1627년(인조 5년) 후금이 정묘호란(丁卯胡亂)을 일으키자, 아버지 인조는 강화도로 들어가고, 자신은 분조를 이끌고 전주로 내려가야 했던 것이다. 소현세자는 남도의 민심을 수습하면서 군량미를 거두고 의병을 모집했으며, 무사를 뽑아서 후금과의 전선으로 올려 보내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의 분조 활동은 『소현분조일기(昭顯分朝日記)』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정묘호란이 끝난 뒤 그는 강석기(姜碩期)의 딸 강빈(姜嬪)과 혼인하였다.
소현세자는 1625년에 이미 왕세자로 책봉되었지만, 이후 칙사를 맞이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 등의 문제로 명의 승인을 오래도록 받지 못하였다. 결국 10년 가까이 지난 1634년(인조 12년)에 명으로부터 정식으로 세자로 책봉을 받음으로써, 그의 위치는 더욱 탄탄해진 것처럼 보였다. 1636년(인조 14년) 3월에는 세자비와의 사이에 원손이 태어나는 경사도 있었다.
그러나 세자로서 첫 시련을 안겨준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꾸어 다시금 소현세자에게 위기를 불러왔다. 원손이 태어난 바로 그 해 12월, 청군이 대대적으로 조선을 침공해 왔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난 것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윤방과 김상용(金尙容)에게 종묘사직의 신주와 빈궁, 원손, 효종(孝宗), 인평대군(麟坪大君)을 데리고 먼저 강화도로 들어가게 하고, 자신도 강화도로 들어가려 했지만, 청군의 선발대가 강화도로 가는 길을 막아 부득이하게 세자와 함께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남한산성은 곧 청군에 포위되었고, 소현세자는 인조와 함께 고립된 성에 틀어박히게 된다.
전황이 갈수록 악화되고, 전세를 타개할 방법이 없게 되자 마침내 조선 조정은 항복을 결심하게 된다. 문제는 항복의 조건이었다. 청은 정묘호란의 경험을 교훈삼아 더욱 철저한 항복조건을 제시하였는데, 그 중에는 세자를 인질로 내놓을 것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청이 제시한 조건에는 왕의 장자와 또 한 명의 아들을 인질로 삼고, 여러 대신들은 아들이나 동생을 인질로 삼으며, 인조의 신상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인질로 삼은 왕자를 세워 왕위를 계승하게 할 것이라고 되어 있었다.
세자를 인질로 보내는 문제는 척화신을 내보내는 것, 인조 스스로가 성 밖으로 나가는 것과 함께 강화협상의 주된 쟁점이 되었다. 그러나 형세가 더욱 불리해지자 조정에서는 적진으로 갈 척화신을 모집하는 등 항복을 준비했고, 소현세자 역시 스스로 성을 나가겠다는 글을 비변사에 내리게 된다.
결국 병자호란이 조선의 패배로 끝이 나면서, 1월 30일 소현세자는 인조와 함께 성을 나서 그길로 청군 진영에 들어갔다. 이어서 2월 8일 빈궁 및 봉림대군을 대동하고 재신(宰臣) 남이웅(南以雄), 좌부빈객 박황(朴潢), 우부빈객 박로, 보덕 이명웅(李命雄), 필선 민응협(閔應協), 문학 이시해(李時楷), 사서 정뇌경(鄭雷卿), 설서 이회(李禬) 등의 시종 관원과 함께 청의 예친왕 도르곤을 따라 심양으로 출발하였다. 조선의 세자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수년에 이르는 장기간 조선을 떠나게 된 것이다. 세자를 전송하면서 인조는 예친왕에게 세자를 온돌방에서 재우도록 부탁하고, 세자에게는 “힘쓰도록 하라. 지나치게 화를 내지도 말고 가볍게 보이지도 말라.”는 간절한 분부를 내렸다.
심양에서의 소현세자 : 조선과 청의 사이에서
소현세자는 4월 10일 심양에 도착하여 조선 사신을 접대하던 동관에 임시로 들어갔다가 5월 7일 새로 지어진 심양관소에 들어갔다. 이후 9년에 이르는, 길고도 험난한 인질 생활의 시작이었다.
소현세자에게 인질 생활은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청은 소현세자를 자신들의 제국의 일부인 조선의 상징으로 여겨 각종 행사에 참여시켰다. 봉림대군과 함께 청 조정의 조회에 참석해야 했으며, 황제 홍타이지가 사냥하러 갈 때도 따라가야 했다. 황제를 비롯한 여러 왕들이 여는 연회에도 자주 참석하였으며, 청의 통제 하에서 그들과 일정한 교류도 해야 했다. 특히 몽골의 왕공 및 티벳 불교 승려와 청 조정의 접촉 광경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소현세자는 청의 풍속 및 의례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세자는 청이 명을 침공하러 원정할 때 역시 동참을 요구받았다. 명에서 노획해 온 물건들을 전시하는 자리에도 소현세자를 불러 직접 노획물을 보게 하였으며, 1642년에는 금주·송산 전투에서 패배하여 항복한 명의 이부상서 홍승주가 변발을 하고 청의 복색을 입고 청 태종에게 항복하는 의식에 참석하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소현세자는 명의 세력이 후퇴일로에 있는 상황을 직접 목격하였다.
1644년에는 예친왕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을 따라 북경에까지 들어가서 명이 멸망하는 현장을 목도하였다. 이때 북경에 머물고 있던 예수회 신부 아담 샬(Adam Schall)과 친교를 맺어 대화를 나누고 서신을 교환하였으며, 이를 통해 얻은 서양의 천문, 수학, 천주교 서적 등을 조선에 가지고 오는 등 서양 과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오랜 인질 생활은 소현세자에게 육체적, 정신적 괴로움을 안겨 주었다. 청의 강요에 의해 사냥이나 원정에 동행하면서 익숙하지 않은 승마를 오래도록 하느라 육체적 피로가 누적되었으며, 음식이나 습관이 너무나도 낯선 심양 땅에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 결과 소현세자는 잦은 병치레에 고생하였다.
청에서 소현세자와 실무상 가장 많이 접촉한 것은 이전부터 조선에 관한 일을 담당해 오던 용골대와 조선 출신으로 청에서 통역을 맡고 있던 정명수(鄭命壽)였는데, 이들은 교섭이 잘 풀리지 않을 경우 세자에게도 위압적인 태도를 취했고, 이는 소현세자에게 정신적으로 피로를 안겨 주었다. 한 번은 용골대가 세자를 협박하다시피 하였고, 소현세자가 화를 내며 자신이 인질로 와 있어도 한 나라의 세자임을 강조하여 용골대가 사과한 일까지 있었다.
1639년에는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시강원의 관원 강효원(姜孝元), 정뇌경 등이 조선에 해를 끼치는 정명수를 제거하려고 시도했으나 오히려 자신들이 처형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 소현세자는 그들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지만 끝내 실패하였고, 이들이 죽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선에서 끌려온 피로인들을 마주치는 것도 세자에게는 고역이었다. 소현세자 개인적으로도 어머니 인열왕후 및 장인 강석기의 사망, 어린 딸의 죽음 등이 큰 상처가 되었다. 이러한 요인들이 쌓이고 쌓여 한 번은 신하들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소현세자를 괴롭힌 것은 조선과 청의 사이에 끼어 양쪽의 입장을 모두 대변해야 하는 난제였다. 청에서는 소현세자를 대 조선 교섭의 주요 창구로 활용하면서, 조선에서 잘못한 일이 있으면 소현세자를 추궁하고, 중요 현안을 세자에게 알려 보다 쉽게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시키고자 했다. 또한 단순히 청의 입장을 조선에 전달하는 역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자의 직권으로 조선 관원들에게 지시를 내림으로써 일을 처리하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1642년에는 용골대가 세자의 직권으로 명과 몰래 결탁했다는 혐의를 받은 전 선천부사 이계(李烓)를 체포하도록 하였다.
반면 조선에서는 소현세자에게 이국에서 굳은 절개를 지킬 것을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심양관소에서 보내오는 정보에 의지하여 대청관계를 꾸려 나갔으며, 세자가 조선의 입장을 전달하고 나아가 가능한 한 문제를 조정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소현세자는 이러한 상반된 기대에 부응해야 했던 것이다.
양국 사이에 끼인 미묘한 입장에서, 소현세자는 나름대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면서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소현세자의 심양관소에서는 꾸준히 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보고하였으며, 그 중 일부는 『심양장계(瀋陽狀啓)』로 남아 있다. 또한 청에 잡혀간 피로인들을 속환하는 데 양국의 입장을 절충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명을 치기 위해 조선의 군병을 징발할 때는 청에 조선의 곤란한 입장을 설명하기도 했다. 일례로 1640년(인조 18년)에는 용골대와 정명수가 조선 내부에서 수군을 징발하는 데 반대하는 자가 있지 않았는지를 묻고, 청에서 도망간 사람들을 조선에서 숨겨주고 있음을 지적하였는데, 세자는 최대한 조선의 입장을 변명하였다.
아울러 1641년 김상헌 등이 청에 적대적인 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청에 끌려오자 청에서는 척화신들을 심문하는 자리에 소현세자를 참여시켰는데, 소현세자는 이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음식을 넣어주는 등 그들의 구호를 위해 신경을 썼다. 소현세자는 척화신들을 구하기 위해 청 태종에게 청원하여 신익성(申翊聖) 등을 구해내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심양관소의 역할이 커지면서 그 규모도 팽창하였다. 소현세자가 있는 심양관소의 인원은 초기부터 500명이 넘는 대규모였으며, 관소를 관리하기 위해 호방, 예방, 병방, 공방을 두어 임무를 나누는 등 하나의 기관으로서의 구색을 갖추었다. 관소에 딸린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일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청과의 외교적 문제를 절충하고, 청의 유력자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이 필요했다. 이 비용은 대부분 조선에 전가되었는데, 이는 병자호란으로 피폐해 있던 조선에 큰 부담이 되었다.
심양관소에서는 비용을 일부 자체적으로 마련하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처음에 청에서는 심양관소의 식량 및 비용을 전액 지원해 주었으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비용을 마련하기를 요구하게 되었다. 1641년 말부터는 땅을 떼어 주고, 관소에서 직접 농사를 지어 식량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심양관소에서는 곤란함을 호소했으나, 결국 조선에서 잡혀 온 피로인들을 사들여 이들로 하여금 땅을 경작하게 하였다. 소현세자가 청에서 돌아왔을 때 심양에 남겨놓은 곡물은 4700여 석, 농사짓는 일꾼은 160여 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과정에서 소현세자 자신은 최대한 민감한 문제를 피하고자 노력했고, 대부분의 경우 부왕 인조에게 결정을 맡기는 태도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역할이 부각되면서 그가 양국 사이에서 일종의 재량권을 행사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청에서는 제반사를 심양관소를 통해 처리하고자 했으며, 실제로 조선에서 보내는 사람과 물자는 대부분 심양관소를 거쳐 청에 들어갔다. 조선에서도 심양관소에서 보내오는 정보에 따라 청에 대한 정책을 결정하였으며, 청과 가까운 지역의 지방관들은 청에 관련한 사안에 대해 그때그때 내려오는 소현세자의 지시를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통해 소현세자는 조청관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조선을 위해 노력한 바가 컸다.
문제는 이렇게 소현세자가 재량권을 행사하게 되면서 점점 부왕 인조의 경계를 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소현세자의 앞날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었다.
부왕 인조와의 갈등과 최후
인조는 소현세자가 심양에서 절개를 지키며 조선의 입장을 잘 대변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경우에 따라서 청의 입장을 조선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청과의 교섭을 위해 많은 비용을 조선에 청구하고 있었고, 그 생활도 절개를 지키는 검소한 것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인조는 이를 매우 못마땅해 하였다. 소현세자가 백랍과 망건을 구하여 의주부윤이 제주도에 공문을 보내어 실어오자, 인조가 화를 내며 강관들이 제대로 간하지 않았음을 꾸짖은 일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조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은 청이 인조를 입조시키고 소현세자를 즉위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청의 입장에서는 인조가 반청적인 신하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으며, 따라서 병자호란 때 잃었어야 할 왕위를 유지시켜 주었는데도 청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고 힐난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심양의 소현세자는 친청적인 행동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인조에게 비쳐지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인조는 청에서 자신을 왕위에서 쫓아내고 소현세자를 대신 세울지도 모른다고 전전긍긍했던 것이다. 청의 압박이 심해지자 이성구(李聖求)는 청이 칙사를 파견하여 병력을 이끌고 와서 인조를 납치해갈지도 모른다고 우려했으며, 홍서봉(洪瑞鳳) 역시 인조가 충혜왕(忠惠王)의 전철을 밟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또한 청 태종의 참모 범문정이 인조가 항복했을 때 세자로 왕위를 교체했어야 한다고 후회했다는 말까지 전해졌다.
인조의 의구심은 점점 더 강해져, 급기야는 소현세자에게 냉정한 태도를 취하고 심양관소를 통제하려고 하였다. 1644년(인조 22년) 초 소현세자는 두 번째로 귀국하였는데, 이는 강빈의 아버지이자 소현세자의 장인인 강석기가 전년에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조는 강빈이 친가에 가서 곡을 하지 못하게 막는 몰인정한 처사를 자행하며 노골적으로 냉대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신료들도 인조를 비판하였으나, 인조는 법 밖의 예이고 외람한 일이라고 대답하였을 뿐이다.
이는 1640년(인조 18년) 소현세자가 첫 번째로 귀국하였을 때 서로 눈물을 흘리며 반가워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인조는 또한 임광(任絖)과 같이 소현세자의 곁에서 잘못을 간할 인물을 심양관소에 보냈으며, 심양관소의 관원들을 대거 교체했다. 아울러 세자에게 꾸지람을 받아도 끝까지 그의 잘못을 깨우친 환관 김언겸을 세자가 귀국할 때 딸려보내기도 했다. 소현세자 역시 부왕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 평양에서 유생들에게 시험을 보아 마치 정식 과거와 같이 하여 부왕을 더욱 자극하였다.
소현세자는 1644년 예친왕 도르곤을 따라 북경에 가서 명의 멸망을 본 뒤, 얼마 되지 않아 귀국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청의 입장에서는 북경을 점령하여 중국 본토로 들어간 이상 조선에 대해 기존보다 경계할 필요성이 줄었으며, 또한 조선에 대한 회유라는 목적도 있었다. 어찌되었든 세자는 오랜 인질 생활을 마치고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고국에 있는 부왕과의 골은 이미 매우 깊어져 있었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도 기뻐하는 기색이 없이 청에서 다른 뜻을 가지고 세자를 내보내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할 지경이었다.
세자는 1645년(인조 23년) 조선에 영구 귀국하였다. 하지만 인조는 그를 그다지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다. 인조는 신하들이 세자를 맞이하여 진하하는 것조차 막았다.
세자는 오랜 인질 생활을 통해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폐해졌으며, 체질도 강건하지 못하여 많은 병을 앓았다. 게다가 부왕인 인조의 냉대는 그의 건강에 해가 되면 되었지 결코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였을지는 몰라도 세자는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4월 23일에 학질에 걸리더니, 불과 사흘 만인 4월 26일에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향년 34세였다. 그가 오랜 고생 끝에 본국에 돌아와 얼마 되지 않아 병에 걸리고, 의관들 역시 함부로 치료하다가 세자가 급사하자 온 나라 사람들이 슬프게 여겼다고 한다.
이때 세자의 시신이 온통 검은 빛이었고 피를 흘리고 있어 마치 약물에 중독된 사람 같았다고 하여, 소현세자가 독살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부르고 있기도 하다.
소현세자가 사망하자 인조는 그의 사망에 책임이 있는 의관 이형익(李馨益)의 처벌을 거부하고, 소현세자의 장례를 박하게 하더니, 급기야는 소현세자의 아들인 원손이 아니라 동생 봉림대군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는 파격적인 행보에 나섰다. 이에 김류(金瑬)와 김자점(金自點) 등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신료들이 반대하였음에도, 인조는 자신의 의사를 밀어붙였다. 나아가 강빈이 역모를 꾸몄다 하여 그녀를 사사하고 그녀의 집안을 멸족시키는 강빈옥사(姜嬪獄事)를 단행하였으며, 소현세자의 아들들이자 자신의 손자들을 제주도에 귀양보내 셋 중 하나만 살아남는 비참한 지경에 빠뜨렸다.
이는 소현세자를 부정적으로 생각한 인조가 자신에게 적대적일지 모를 강빈 및 그의 아들들을 왕위에서 밀어내고, 나아가 제거하려고 한 데서 비롯한 것이다. 또한 인조의 총애를 받는 후궁 조소용(趙昭容)은 강빈과 사이가 나빴는데, 그녀의 획책도 강빈을 사사하는 데 하나의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후 소현세자의 자손들은 왕위에서 멀어졌으나, 종통(宗統)을 잇는 상징적 존재라는 점 때문에 역모 때 추대의 대상으로 자주 거론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이인좌의 난(李麟佐-亂) 때 희생된 밀풍군 탄(密豊君 坦)이다. 또한 소현세자 대신 둘째아들인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한 것은 이후 예송(禮訟)의 단초가 되었다.
소현세자는 조선과 청 사이에서 괴로움을 겪으면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최선을 다해 수행하였으며, 서양 문물을 수용할 가능성을 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정묘호란·병자호란 등 국제정세는 그를 끝까지 괴롭혔고, 결국 그의 능력은 왕위에서 펼쳐보이지 못하고 시들어버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