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과학 Natural Science/생명 Life sciences

사회생물학 대논쟁, 사회학, 심리학, 뇌과학, 생리학, 생물학, 화학, 물리학, 수학

Jobs 9 2024. 3. 30. 08:49
반응형

사회생물학 대논쟁

사회학, 심리학, 생물학, 화학, 물리학


사회생물학이라 함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사회적 행동을 연구하는 학문을 일컫는다. 여기에서 ‘인간은 과연 다른 동물보다 특별한 존재인가?’ 라는 물음에 대해서, 사회생물학은 ‘아니다’ 라는 대답을 하고, 인문사회학자들은 ‘그렇다. 인간은 절대적으로 다른 존재이다’ 라고 대답을 한다.  

이처럼 현재 사회생물학 분야를 주요한 이슈로 등장하게 한 장본인인 ‘윌슨의 컨실리언스(통섭)’ 에 대해 잠깐 알아보자.  

윌슨은 ‘통섭-지식대통합(번역 최재천, 장대익)’ 이라는 저서에서 인문학, 사회학, 예술, 문화도 인과적 설명으로 자연과학과 연결될 때에만 온전한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 달성을 위해서 분화된 학문간의 경계를 터서, 서로 넘나드는 통섭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우선 유전자와 문화 사이의 관계를 이해해야 하며, 이 두 가지 사이의 공진화를 규명해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시도를 위해서는 인간 본성을 밑받침하고 정신 발달을 지배하는 이른바 ‘후성규칙’ 의 개입을 인식해야 한다. 자연선택에 의해 형성된 후성규칙의 예로는 인간의 근친상간 기피, 뱀에 대한 반사적 혐오, 고소 공포증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인간의 유전과 문화를 연결하는 매개체 구실을 하므로, 유전자와 문화의 공진화를 이해하기 위한 요체가 된다. 이때 뇌는 생존에 적응하도록 선택된 유전자의 산물이며, 따라서 후성규칙을 성실히 수행해 마음을 작동시키며 문화를 형성하고 분화시키는 원천이 된다. 이렇게 형성된 문화는 유전자의 선택압으로 작용하여, 유전자와 문화 사이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공진화가 이뤄지는 것이다. 이를 연구하는 데 필요한 것은 환원주의적 방법론이며, 이 결과는 분석된 결과를 다시 종합하여 전일론적으로 창발성을 설명하는 데 쓰인다. 윌슨에 따르면 만일 뇌와 마음이 기본적으로 생물학적 현상임이 증명된다면, 물리학에서 인문학에 이르는 모든 학문 분과들에 일관성이 확보되어 학문 간의 통일이 이뤄질 것이며, 이때 생물학에는 징검다리로서의 독특한 위치가 부여될 것이다. 이 책에서 윌슨은 물리학, 화학, 생물학, 심리학, 사회학, 인문학, 예술이라는 횡적 연계가 유전자, 의식, 마음, 문화, 종교로 이어지는 종적인 연결의 기제를 설명하는 원리임을 주장하며, 이들을 탐구해나가려면 통섭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찬반논쟁이 뜨겁게 불붙었다.  

주로 인문사회학자들이 반론이 뜨거웠다. 무엇보다 책 전반에 걸친 환원주의가 문제였다. 윤리, 종교, 문화, 인문, 사회학을 생물학으로, 생물을 다시 화학, 물리학으로 쥐어짜놓아서, 과학의 분야들을 위계화시켰다는 점이다.  

둘째로 통섭이라는 용어번역과 해석에 대한 문제였다. ‘통섭’ 에서 ‘통 : 통하다’ 의 의미가 아닌 ‘통 : 다스리다’ 라는 의미로 해석되었다는 점에서 생물학적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의견이 많았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는 ‘통할 통’ 의 의미로 사용되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자연과학과 인문사회학은 방법론상에 큰 차이가 있다. 자연과학이 보편성과 통일성을 끌어내는 학문이라면, 인문/사회학은 특수성, 상대성을 통한 다양성을 추구하는 학문이라는 점이다. 이 둘 사이에 진정한 통섭이 이루어지려면, 누가 누구를 다스리고 계몽하려는 접근보다는, 말 그대로 간학문적으로 서로 소통하고 섭렵해 나가야 하리라 본다. 그렇지만 최재천의 지적처럼 자칫 잘못하면 ‘다학문의 유희’ 에만 그칠 공산도 크다는 점이다. 그러한 점에서 구체적인 어젠다 설정이 대단히 중요하리라 본다. 

분명 ‘윌슨의 컨실리언스’ 가 논쟁이 되고 이슈화되었다는 점에서는 성공적이라 생각한다. 주도권면에서도 생물학이 우위를 선점했다고도 할 수 있다(‘생물학적 환원주의’ 관점의 지식대통합이라는 옳고 그름을 떠나서)  

어찌되었던 간에 통섭에 대해서 논쟁이 시작되고,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는 상당히 고무적이라 생각한다. 다만, 통섭에 대해서 국내 생물학자를 포함한 자연과학자들의 다양한 의견들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대단히 아쉽게 생각한다. (이 저서에서도 ‘윌슨 의 컨실리언스’ 에 대한 반론은 주로 인문사회학자들의 의견 밖에 없다) 또한 한 자리에 모인 마당에, 지금껏 이루어지지 못한 우리나라 과학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기회도 함께 가져봄이 좋을 듯 싶다.


1. 환원주의와 사회생물학 - 필요하지만 꼭 필요한 동거(최재천) 


-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진화생물학자 또는 사회생물학자들은 골수 환원주의자가 아니다. 부분을 아무리 합쳐도 전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어느 분야의 학자들보다 분명히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생물학 제국주의자라는 호칭에 따라오는 생물학적 결정론이라는 비판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유전자가 형태는 물론, 행동 및 사회구조와 문화 패턴까지 결정한다는 유전자 결정론과 생물학적 결정론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존재한다. 만일 동성애나 우울증을 결정하는 유전자가 있다는 식의 논리를 펼친다면, 어떤 진화생물학자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유전자란 그저 단백질 합성에 관한 정보를 지닌 화학물질에 불과하다. 특정한 유전자로부터 특정한 단백질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대체로 별 오차가 발생하지 않지만, 발생 환경에 따라 그리고 후생유전의 법칙에 따라 유전자의 발현에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형태에 의해 행동이 나타나는 만큼 행동도 어느정도 유전자의 결정 범위 내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행동들의 집합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는 문화 역시 궁극적으로는 유전자라는 긴 팔 안에 있는 셈이다. 결국 생물의 생명현상들은 유전자가 깔아 높은 멍석위에서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유전자 결정론은 궁극적으로 생물학적 결정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지만, 그 사이에는 엄청나게 다양한 변수들이 존재한다. 생물학 분야만 보더라도 유전자 결정론이 유전학의 영역이라면, 거기에서 생물학적 결정론에 이르는 과정에는 발생학, 생태학, 사회생물학과 같은 분야들이 버티고 있다. 


- 생물계는 물리학과 화학에서 다루는 ‘계’ 와 달리 위계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하위구조에서 발견한 정보를 아무리 종합해도 상위구조에서 벌어지는 메커니즘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토콘드리아나 엽록체 등 세포 내 소기관들의 구성 성분과 기능을 거의 완벽하게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총집합으로 세포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없고, 각각의 개체들의 기능과 성품을 안다 해도 그들이 모여 이루는 개체군의 속성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이는 바로 위계구조의 단계를 오를 때마다 발생하는 창발적 속성들 때문이라는 걸 진화생물학자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결코 창발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너무 자주 창발성에 기대면서 설명을 마친 것처럼 행동하는 태도의 불합리함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2. 생물학적 환원주의와 사회학적 환원주의를 넘어서 (김환석) 

- 진화심리학은 인간 본성을 홍적세 시기의 환경 속에서 인류 조상들이 반복적으로 부딪히던 문제들을 푸는 과정에서 진화된 보편적인 심리적 적응 기제들의 묶음이라고 보는 접근이다. 진화생물학이 적응주의 논리로 인간의 생리적 기제들(심장, 허파, 면역체계 등) 에 대해 설명하듯이 , 진화심리학은 동일한 적응주의 논리로 인간의 감정 및 인지에 관한 심리적 기제들에 대해서 설명을 하려고 시도한다. 스티븐 핑커는 진화심리학이 단일한 이론이 아니라 커다란 가설 묶음으로서 진화이론을 정신에 적용하는 특정한 방식이며, 적응, 유전자 수준의 선택, 모듈적 성격을 강조한다고 지적한다. 진화심리학에서는 인간 두뇌가 자연선택 과정에 의해 설계된 많은 기능적 기제들, 즉 진화도 심리적 기제들(언어 획득 모듈, 근친상간 회피 모듈, 지능, 짝짓기 선호 등)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데, 흔히 스위스 군대칼과 같다고 비유하곤 한다. 한마디로 인간의 심리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인 두뇌의 구성에 기초해 있으며, 따라서 심리학은 생물학의 한 분과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 생물학적, 심리학적 연구는 인간의 두뇌와 정신을 잘 알게 해주었으나, 사회과학의 목적은 두뇌와 정신 밖의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다. 생물학적, 심리학적 연구 덕분에 우리는 행위자의 의도에 대해서 더 잘 이해하게 되었지만, 사회현상은 반드시 인간 행위의 의도된 산물만이 아니라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로도 이루어진다.
 

-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인간 본성에 대한 생물학적, 심리학적 연구를 사회과학으로부터 배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자연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은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다만 전자를 후자로 환원시키거나, 역으로 후자를 전자로 환원시키는 것은 모두 잘못임을 인식해야 한다 
 

- 생물학적 환원주의는 자연으로 모든 현상을 환원시켜 단순하고 일관되게 설명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나왔고, 반대로 사회학적 환원주의는 사회로 모든 현상을 환원시켜 일관되게 설명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나왔다, 이렇게 보면 두 형태의 환원주의는 서로 대립되는 것 같지만, 사실 모두 한 가지에 파생된 쌍생아 라고 할 수 있다, 세계의 복잡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물학과 사회과학이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둘을 연결하는 방식이 환원주의여서는 곤란하다. 생물학과 사회과학의 연결은 관계적 존재론을 바탕으로 한 비환원주의 경로를 따를 때야 비로소 세계의 복잡성을 부당하게 생략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진정 올바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관계적 존재론은 모든 실재의 창발적 속성을 인정한다, 실재는 고정된 본질을 지닌 사물이 아니라 자신이 맺는 관계에 의해 지속적으로 그 속성이 변화하는 역동적인 실체이다. 세계의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과 이로 인한 불확실성도 따지고 보면 근본적으로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사회생물학과 진화론적 환원주의 (장대익) 

- 첫째 환원의 대상은 무엇인가? 즉 ‘무엇’ 이 다른 ‘무엇’ 을 환원한다고 할 때, 그 ‘무엇’ 이란 어떤 것이냐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표준적인 대답에 의하면 환원 대상은 과학이론이다. 가령 온도라는 현상이 분자들의 평균 운동 에너지로 환원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온도와 관련된 이론인 열역학이 기체 분자들의 평균 운동에너지를 다루는 통계역학과 기체운동론으로 환원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논의는 ‘심리학이 뇌 상태나 속성을 다루는 신경 생리학으로 환원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을 의미 있게 만든다. 일단 환원은 이론 간의 관계이다.  

둘째 환원주의에도 여러 유형이 있다. 우선 존재론적, 인식론적, 방법론적 환원주의로 분류가 가능하다. 첫 번째 유형인 존재론적 환원주의는 잘 알려진 대로 복잡한 전체(속성)는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과 그 속성으로 환원된다는 견해이다. 따라서 환원이 가장 낮은 수준의 기본 요소까지 차례로 이루어진다면, 모든 물질을 몇몇 기본 구성 요소들로 환원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함축한다. 이런 생각은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 대한 현대의 가장 유력한 자연과학적 입장이다. 

환원주의의 두 번째 유형은 인식론적 환원주의이다. 인식론적 환원이란 자연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여러 과학이론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의 일종이다. 그 대표적인 형태인 설명적 환원은, 상위 수준의 이론으로 설명되는 현상을 원칙적으로 하위수준의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있는 경우를 말한다. 가령, 어떤 사람의 행위를 설명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 원자 수준에서 유전자, 세포, 개체, 심리수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이때 환원적 설명이란 가장 낮은 수준에 대한 이론으로 그 행동을 설명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것이 항상 적절하진 않다. 데이트를 하기 전에 설레는 남자의 마음을 양자역학적으로 설명한다고 하면, 그것이 원칙적으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너무 비효율적이고 새로운 통찰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세 번째 유형은 방법론적 환원주의이다. 방법론적 환원이란 복잡한 전체를 파악하기 위해 그것을 가장 작은 부분들로 쪼개서 탐구하는 분석방법과 태도를 뜻한다. 물론 이는 절대 다수의 자연과학자와 다수의 사회과학자가 수용하고 있는 연구방법론이다. 


- 환원주의의 대립항은 반환원주의이다. 창발론은 반환원주의의 대표적 형태이다. 창발론은 표준적으로 세 가지 중심 주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존재론적 물리주의 (시공적 세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물리학에서 인정된 기초 입자들과 그것들의 집합이다) 둘째 속성의 창발 (물리 입자들의 집합이 적절한 단계의 구조적 복잡성을 이루게 될 때, 이 구조 체계를 특징짓기 위해 진정으로 새로운 속성들이 창발한다.) 셋재 창발 속성의 환원 불가능성 (창발된 속성들은 그것들의 창발 기초가 된 아래 단계의 현상들로 환원될 수 없으며 그로부터 예측될 수도 없다.)  

- 흔히 생물학적 환원주의나 유전자 환원주의 대해 논의하면서, 이를 생물학적 결정론이나 유전자 결정론과 같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환원주의와 결정론은 서로 다른 논제이다. ‘무슨 결정론’ 이라고 할 때는 그 ‘무슨’ 이 어떤 대상이나 과정, 현상들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가령 문화 결정론이란 문화적 요인이 인간의 행동, 믿음, 사고를 결정한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유전자 결정론은 유전자가 그것들을 인과적으로 결정한다는 주장이다. 반면, 유전자 환원주의는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유전자 수준에서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유전자 환원주의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반드시 결정론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4. 지식대통합이라는 허망한 주장에 대하여 - 문화를 중심으로(이정덕) 

- 윌슨은 사회성의 진화도 생리학적 관성의 구속 하에 이뤄지는 유전적 반응이라고 본다. 모든 사회적 동물의 행동은 유전자적 코드에 의해 정해지며, 자연선택의 압력을 받고 있다고 본다. 이것이 적응기제이고, 자연선택 기제이며, 진화의 과정이다. 따라서 동물의 사회적 행동은 유전자의 성공적인 복제를 위한 적응, 자연선택, 진화의 결과물일 뿐이다. 더 나아가 사회생물학은 인간의 행동도 유전자적 선택을 통해 진화한 결과이며. 오늘날에도 그러한 압력 하에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유전자 확산에 유리한 행동을 하게 하는 배후의 유전자가 확산되고, 이 유전자가 후손으로 이어지면서 더 많은 생존을 가능케 하여, 결국 세대를 이어 그러한 행동이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유리한 행동은 유전자에 코드화된다. 물론 그들도 인간의 경우에는 유전적으로 결정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거나, 행동의 가능한 범위만 결정된다거나, 극단적인 가소성(회복력)이 있다면서 한 발 후퇴하지만, 결국 인간의 행동 역시 궁극적으로 유전자의 불가피한 표현이라고 본다. 
 

- 이러한 관점의 핵심에는 인간 행동(문화 포함)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유전자의 복제체계의 표현형일 뿐이며, 적응과 선택이라는 진화 논리에 종속된다는 생각이 담겨있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인간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인 존재라고 본다. 인간의 행동도 근본적으로 복제의 핵심체계인 유전자의 확산과 변화 과정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회생물학자의 인간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인간 행동을 진화론적 적응기제(더 많은 유전자 복제)의 결과나 과정으로 설명하는데 집중한다. 이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행동과 의미의 다양성에는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러한 다양성은 유전자 표현형의 일부일 뿐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번식, 공격, 성, 음식 등과 같이 보다 본능적인 영역의 행동 분석에 집중하고 있다. 
 

- 윌슨의 통섭의 저서에서는 인문사회과학이 물리법칙을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지식의 대통합은 물리학이 아니라 사회생물학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제시된다. 사회학은 인류학에 포섭되고(사회학은 인류의 한 측면을 다루기 때문에), 인류학은 영장류학에 포섭되고(인류는 영장류이므로) 영장류학은 사회생물학에 포섭된다고(영장류는 사회적 생물이므로) 설명하는 것이다. 반면에 사회생물학은 생물학에 포섭되고 생물학은 물리학에 포섭되어, 물리학으로 지식대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결국 윌슨의 통섭(지식대통합)은 인문사회과학이 물리법칙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물리학에 대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생물학에 대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 윌슨의 유전자 논리나 후성규칙의 논리로 종교를 믿는 것을 설명했다고 치자. 그러나 왜 이 집단은 기독교를 믿고, 저 집단은 이슬람을 믿는지, 또 다른 집단은 불교를 믿거나 조상 또는 샤머니즘을 믿고, 또 다른 사람은 왜 신은 없다고 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또는 왜 이 집단은 인사를 하기 위해 절을 하고, 다른 집단은 손을 흔들거나 악수를 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즉 지역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문화적 다양성이나 유전자 변화보다 급격한 문화 변화는 인간 유전자나 후성규칙이 문화를 방향 짓는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든다. 오히려 유전자가 아닌 다른 차원의 논리가 작동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어느 부분에서는 뇌가 자율적으로 작동하도록 유전자가 허용하여 다양하고 급변하는 문화가 가능하다고 설명하는 것이 더 적합해 보인다. 문화에 대한 사회생물학적 설명들은 문화보다는 남녀유혹, 음식섭취, 권력 등 본능에 가까운 인류의 보편적인 행동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으며, 실제 문화의 다양성에 대한 설명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사회생물학은 문화에 대한 설명은 제대로 하지 않고 있으며, 실제로 유전자를 기초로 문화의 다양성을 설명하는 글은 보기 어렵다. 사회생물학이 인간 두뇌의 창발성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현재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윌슨의 문제틀은 생물이 유전자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고에 기반하여, 어떻게든 생물의 모든 것을 유전자와 연결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많은 부분에 대해 견강부회하여 어떻게든 유전자와 연결하고 있고, 이 과정에서 윌슨은 인간에 대한 억측성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윌슨의 억측성 발언은 인간 행동을 개체의 유전자 차원에서만 설명하며, 그것이 사회의 존재하는 문화에 강력한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은 철저히 무시한다. 다시 말하면 그가 제안하는 사회생물학에 의한 통섭은, 문화는 유전자가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창조한다는 사실과, 개인이 집단적 사회, 문화에 심각하게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특정 문화를 이해하는 데 개체의 유전자보다 사회적으로 구성된 문화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는다. 즉, 유전적 성향의 중요성에 대한 일방적 믿음에 의존하는 것이다. 
 

- 사회생물학은 문화를 어떻게든 유전자 트랙에 집어넣으려 하지만, 문화연구는 그 부분에 관심이 없다. 이 과정에서 사회생물학은 문화를 설명한다면서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본능과 가까운 일부 행동(성, 음식, 번식, 공격성 등) 에만 집중한다. 즉, 문화의 핵심인 다양한 집단에게 다르게 나타나는 다양한 의미체계(언어의 차이, 종교의 차이, 의미의 차이 등) 는 설명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예를 들어 문화연구에서는 이 집단에서는 어떤 종교를 믿는지, 저 집단에서는 믿는 종교의 내용은 어떻게 다른지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사회생물학은 언어나 종교가 어떻게 유전자적 기초로부터 기원했는가만 설명하고, 왜 차이가 나타나는지는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문화라고 보기 어려운 극히 단순하고 보편적인 성향에 관심을 기울이지, 각각의 실제적인 언어나 종교에는 접근하지 않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회생물학으로 언어와 종교의 내용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실제적인 언어와 종교에 대한 분석을 유전자적 성향과 연결하여 통합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하면서, 인류학자나 사회학자에게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비판한다. 그러나 유전자나 후성규칙이 각 나라의 국민들에게 중국어, 한국어, 영어를 쓰도록 하거나, 기독교나 불교나 힌두교를 믿도록 방향 지을 수는 없다. 아직까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창발성의 발현과 작동이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하위 수준(사회생물학)의 작동과정으로 상위수준(문화)의 현상을 설명 할 수 있다는 억측을 강요하고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문화를 자신들이 설명할 수 있는 일부 본능에 가까운 행동으로 왜곡하고 문화의 나머지 부분들은 의미 없거나 사소한 것으로 간주하여 배제한다. 하지만 문화연구는 바로 이것들을 인간 집단의 이해를 위해서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 자신들이 설명하기 어려운 것을 사소하고 의미 없는 것으로 배제한다는 것은, 바로 자신들이 의미 있다고 간주하는 부분을 마치 전체인 것처럼 다룬다는 뜻이다. 즉, 몇 가지 본능에 가까운 행동들이 문화를 대표하는 것처럼 설명한다. 문화연구에서는 본능에 가까운 행동은 오히려 비문화적인 부분으로 간주한다. 문화의 핵심은 오히려 각각의 사회에 독특한 상징, 언어, 종교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사회생물학에서는 문화 일부로 문화 전체를 치환함으로써 마치 문화 모두를 설명하는 양 과장한다. 게다가 이를 아주 특정한 유전자적 방식으로 설명하면서, 마치 문화 일반을 사회생물학으로 설명했다거나 그러한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사회생물학의 문화에 대한 설명력을 과장하고, 설명 안되는 부분까지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 윌슨은 사회생물학에 터무니없는 독단적 특권을 부여하면서, 사회과학과 인문학이 사회생물학으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의 문제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왜 사회생물학으로 통합해야 하는가이다. 윌슨에 따르면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물리법칙으로 환원될 수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모든 것을 물리과학으로 통합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즉.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 처럼 일관되게 생명체를 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쪽이 훨씬 논리적이다. 그러나 윌슨은 앞으로 오랫동안 물리과학으로 생명체를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면서 사회생물학에 특권을 부여한다. 둘째는 창발성에 관한 문제이다. 윌슨은 복잡성의 측면에서 생물학은 물리학에 비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며 예술은 생물학에 비해 또 그만큼 복잡하다고 말한다. 물리학과 화학으로 세포의 모든 특성을 설명하려는 노력이 있지만 세포가 너무 복잡해 힘들다, 따라서 물리과학의 설명만으로 부족하다고 말한다. 이처럼 그는 한쪽에서는 이전 차원과 다른 현상이 나타나는 창발성을 인정하는 것처럼 발언하다가, 궁극적으로는 창발성을 부정한다. 전체를 관통하는 주장은 인간을 사회생물학이나 생물학으로 환원할 수 있고, 결국 물리법칙으로까지 환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일관성을 가지려면 지식대통합의 기반은 사회생물학이 아니라 물리과학이 되어야 한다. 만약 창발성을 인정한다면 물리학과 생물학을 분리하고, 나아가 생물학과 인간을 분리하는 것이 타당하다. 즉 논리적으로 물리과학에 의한 대통합을 주장하던지, 아니면 각각의 영역에서 창발성이 나타나기 때문에 독자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편이 더 일관성이 있다. 

 

- 유전자는 인간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이고 따라서 인간이 유전자를 벗어날 수는 없지만, 문화의 극단적 다양성과 변화성을 유전자로만 설명하기는 매우 어렵다. 유전자가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토대라고 하더라도, 진화가 다양하고 창조적인 뇌의 활동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문화의 다양성과 창조성을 설명할 수 없다. 즉 유전자가 인간이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작동하도록 허용하여, 뇌를 통해 그러한 창조성이 나타난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 물론 유전자가 방향 짓는 부분도 있지만, 핵심은 허용한 부분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동물과 다른 인간적인 특징을 나타나게 해준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나타났으며 어느 정도까지 허용되는지는 현재 뇌를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에 예단하기 힘들다. 하지만 현생인류의 뇌 진화가 현재처럼 창조적이고 다양한 언어, 종교, 의미, 상징의 출현을 가져왔고, 이러한 창조적 활동을 가능케 한 기제는 허용성이 폭발적으로 작동하는 것과 관련된다고 보는 편이 가장 합리적이다. 이는 소프트웨어와 유비해서 설명할 수 있다. 소프트웨어가 발달할수록 더 다양한 콘텐츠 작업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콘텐츠는 소프트웨어의 영향과 제약을 강력하게 받지만, 동시에 창조적이고 다양한 콘텐츠가 동일 소프트웨어에서 나타날 수 있다. 어느 정도까지 또는 얼마나 높은 차원까지 허용하는가는 소프트웨어의 수준에 달려 있다. 소프트웨어의 논리와 콘텐츠의 논리는 다른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어서 소프트웨어 논리로 콘텐츠 내용을 설명할 수 없지만, 콘텐츠가 소프트웨어를 떠날 수는 없다. 자유롭지만 제한되어 있는 이런 상황에 대해서는 허용이라는 말이 적합하다고 생각된다.   



- 또한 허용성 개념은 유전자를 능동적 주체로 설정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한다. 왜냐하면 인간에서 극단적 가소성이 작동할 때 그 안에서 선택하고 결정하는 주체는 유전자가 아니라 개체이기 때문이다. 즉, 개체의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이 허용되며, 허용된 부분에 대한 작동과 선택은 개체가 능동적으로 수행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보면 인간이라는 개체를 유전자의 외피나 복제기계로 한정할 수 없게 된다, 뇌를 매개로 한 개체의 능동적인 선택과 결정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때로는 유전자와 아무런 관련이 없거나 심지어 유전자에 해로운 것을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유전자에게 해로운 기제가 학습을 통해 확산될 수도 있고, 개체가 유전자를 복제시키거나 변형시킬 수도 있다. 개나 소 혹은 인간을 복제할 수도 있고, 여러 유전자를 삽입하고 바꾸어 새로운 종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대체로 개체가 유전자 보존과 번식에 유리한 선택을 하고, 이와 관련된 문화가 더 널리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유전자로만 생존해 나가는 것보다 훨씬 당양하고 신속하게 생존, 번식의 개선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허용적 기제를 가지지 않은 개체나 집단에 비해 빠르게 변화하고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된다. 동시에 스스로 변화시킨 행동, 의미, 사회조직에 대응하기 위해 또 다시 스스로 변하는 가속적 체계가 작동할 수 있다. 허용성의 관점은 창조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문화의 다양성과 급속한 변화를 설명해 줄 수 있다. 또한 개체가 유전자와 모순적인 활동을 하는 것(예를들어 자살) 을 설명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동시에 유전자 번식과 관련 있다고 추론되어온 행동들이 개체의 능동적인 선택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어디까지가 유전자가 허용한 범위인지 등에 대한 재검토도 요구한다. 즉 행동이 유전자만이 아니라 개인의 창조성과 학습된 문화에 의해서도 영향 받을 가능성을 열어놓게 된다. 의미의 다양성도 개체의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허용성의 관점은 개체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창조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문화를 모방하고 학습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창조보다 모방과 학습이 더 쉽기 때문에, 개체가 집단을 존재한다면 모방과 학습이 더 빈번하게 일어날 것이다. 이 문제는 동시에 개체를 넘어선 집단의 논리를 설명하는 길을 열어준다. 왜냐하면 유전자는 개체로 유전되지만, 문화는 모방과 학습을 통해 집단을 매개로 전승되기 때문이다. 이는 집단의 범위, 작동논리, 조직 구성 등이 유전자를 떠나서 문화를 매개로 형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 5천 년간 인간 집단이 유래가 없을 정도로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고, 빠르게 변화했으며, 동물에게서 볼 수 없는 행정기구, 군대, 정당, 종교기관, 기업, 학교라는 분업적 전문 조직을 발달시켰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 설명이 유전자적 설명보다 합리적이다. 즉, 유전자로 인간의 역사나 정치나 문화나 사회를 설명하는 것보다, 유전자가 허용한 그래서 유전자와 다른 논리를 갖게 된 인간의 창조적 작용 또는 창발성으로 문화의 다양성과 그에 따른 변화를 설명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5. 한국의 통섭현상과 사회생물학 (김동광) 

- 인문학자들은 윌슨의 지지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근본적인 편향 때문에 윌슨의 주장을 배격하지 않으며, 간학문적 협동 자체에 대해 맹목적으로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컨실리언스(통섭)’ 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학문 분과 사이의 경계를 넘어서 함께 새로운 인식을 향해 노력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왜 학문 분과를 모두 통합시켜야 하는지, 그것을 통해 실질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밑에 내재한 철학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다.  



- 윌슨의 컨실리언스가 설득이 아닌 정복을 목적으로 했고, 대상 독자층이 인문사회과학자가 아니라 과학자라고 가정하면, 윌슨의 거침없는 태도는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제는 더 이상 거추장스러운 설득이 필요한 시점이 아니라 생물학을 중심으로 한 수직적 통합이 필요하고, 그것을 직접적으로 설파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셈이다. 일반 대중은 물론 인문학자와 사회학자들은 그가 컨실리언스 앞부분에서 그토록 힘주어 강조했던 ‘계몽’ 의 대상일 뿐이다.  

 

- 국내의 통섭현상 : 왜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 개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가? 왜 통섭 논쟁은 대중적인 차원으로 발전하지 못하는가? 에 대한 몇 가지 요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회생물학에 대한 지식과 성찰의 기회 부재이다. 서구사회는 우생학, 홀로코스트 등의 아픈 역사적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사회생물학과 같은 생물학 중심적 접근방식이 어떤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인식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우리에게는 이러한 성찰의 기회가 없었다. 정작 우리 사회에서는 우생학에 대한 논의가 너무 이루어지지 않았고, 사회생물학이 자칫 인종, 성 등에 다른 차별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악용될 수 있다는 인식이 매우 낮은 편이다. 

둘째, 과학자 사회 내의 미약한 비판적 담론이다. 서구 지성계에서는 사회생물학을 가장 통렬하게 비판한 사람들은 정작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자가 아니라 같은 생물학자이자 하버드에서 한솥 밥을 먹던 ‘리처드 르윈틴’ 과 ‘스티븐 제이굴드’ 였다는 점이다. 이들은 이후에도 유전자결정론과 사회생물학의 주장을 비판하는 담론을 꾸준히 생산해서 건강한 논쟁을 지속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통섭 논쟁은 일부 인문학자의 일방적인 문제제기로 진행되었지만, 정작 생물학자 사이에서는 논쟁이 벌어지지 않았으며, 정작 통섭론자들까지도 소극적 대응으로 일관했다. 그 결과 논쟁이 활성화되지 못해서 통섭을 둘러싼 다양한 쟁점들이 부각되지 못했고, 우리 사회가 사회생물학에 대한 다양한 비판적 담론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 

셋째, 우리 사회에서 과학이 가지는 과도한 권위의 영향이다. 미증유의 황우석 사태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주의에 대한 성찰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박정희 시대의 ‘과학입국’ 이래 우리에게 과학은 빨리 받아들여야 할 무엇이었을 뿐이었고, 경제성장이나 경쟁력 강화와 동의어로 인식되었다. 이 과정에서 과학기술이 국가와 결합하면서, 우리의 과학주의는 독특한 국가주의 성격까지 띠게 되었다. 황우석 사태에서 줄기세포 연구의 윤리문제를 제기했던 반대론자들에게 너무나 쉽게 매국노라는 낙인이 찍힌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 우리 사회가 사회생물학에 취약할 수 있는 이유는 ‘제이굴드’ 가 이야기 했던 불안감 외에도, 과정보다는 결과, 숙의나 성찰보다는 단순한 처방을 선호하는 효율성 지상주의 등 우리 사회를 지배, 압박하는 여러 가지 강박증들과 상호작용하면서 한층 강화되는 양상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복잡한 현상을 단순하게 설명하기를 원하는 경제주의 또는 효율주의가 크게 작용한다. 그 결과 생물학이 생명 현상부터 심리, 사회현상까지 설명해 줄 수 있다는 사회생물학이 그만큼 매력적인 설명 체계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