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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론, 청나라, 효종, 송시열, 윤휴, 나선정벌

Jobs 9 2025. 6. 9.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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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론 (北伐論)

 

 

조선시대사 사건 중원을 차지한 청나라를 정벌함으로써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 중화 질서의 재건을 모색한 조선 후기의 정치 담론.

 

조선 후기

조선, 청나라

효종, 송시열, 윤휴

 

 

북벌론(北伐論)은 중원을 차지한 청나라를 정벌함으로써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 중화 질서의 재건을 모색한 조선 후기의 정치 담론이다. 조선 지배층은 청나라가 중원을 장악하자 큰 충격에 빠졌지만, 명나라가 회복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따라서 명나라의 회복에 적극 동참하자는 북벌론이 대두할 수 있었다. 특히 효종은 국가적 차원에서 북벌계획을 추진하였는데, 공세적 성격의 군비 확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북벌론은 명나라 회복의 가능성이 사라진 17세기 말 이후로는 주로 재야 인물들 사이에서 제기되었다.

 

 

역사적 배경

 

1637년(인조 15) 청나라가 조선을 정복하고 뒤이어 중원을 차지하게 되자, 두 세기 넘게 유지되었던 명나라 중심의 중화 질서는 붕괴되고 말았다. 조선왕조의 경우 중화 질서의 정치적 안정성을 경험하였고 중화의 가치를 명에 버금가게 구비하였다고 자부해 온 전통도 오래되었다.

 

게다가 임진왜란 시기에 명의 군사적인 도움을 받은 사실에 대한 보은의 감정까지 더하여져 명의 멸망은 조선의 지배층에게 ‘하늘과 땅이 뒤집힌’ 참담한 사건이었다. 따라서 조선의 지배층은 당위적 질서와 현실이 괴리되는 모순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정치적, 사상적 모색을 추구하게 되었다. 

 

조선의 지배층은 청에게 군사적으로는 정복되었지만 직접 통치되지는 않았다는 틈을 이용해서 청 중심의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를 정치적으로는 받아들이면서도 화이관에 입각한 명 중심의 중화 질서를 관념상으로는 포기하지 않는 이중적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이중적 자세는 청의 중원 장악이 단시일 내에 종료될 것이며 명이 다시 회복되어 중화 질서도 복구되리라는 기대가 전제된 것이었다.

 

남명 정권의 존재는 이러한 기대의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머지않아 닥칠 당위적 질서의 복구에 조선은 어떤 방식으로 기여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고, 명의 회복에 무력으로 동참하자는 북벌론이 대두할 수 있었다.

 

 

 

효종의 북벌계획

 

소현세자의 급서 이후 정통성에 논란이 있는 채로 등극한 효종은 삼전도의 굴욕으로 추락한 국왕의 위엄을 되찾고 정국 주도력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의도 속에서 친청파를 제거하고 이른바 산당(山黨) 세력들을 등용하고자 하였다. 반면 척화 계열로서 병자호란 후 낙향해 있던 산당 세력들은 다시 정계에 복귀할 정치적 명분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양자의 정치적 이해를 함께 충족시킬 수 있는 상징적 구호로서도 북벌론이 대두할 수 있었다. 효종의 북벌 의지 표명은 손상된 조선 국왕의 위엄이 회복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동시에 새 조정에 대한 산당의 출사 명분을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북벌론은 효종에 의해 국가적인 차원의 북벌계획으로 구체화되었다.

 

효종은 원두표와 이완 등 친위 세력을 중용함으로써 군비 확충을 주도하였다. 구체적인 사례로는 수어청 개혁을 통한 남한산성 군사력 보강, 어영청의 확대 개편, 어영청 내 대포부대 창설, 금군의 편제 개편 및 확충, 영장(營將)의 삼남 파견, 강화도 해안가 진보(鎭堡) 설치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시책들은 대개 중앙군 강화에 치중되었거나 방어적 성격이 강하다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효종의 북벌계획은 국왕의 정국 주도라는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적인 성격을 함께 지녔다고 평가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또한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청나라가 조선의 사정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던 상황을 고려한다면 유의미한 공세적 성격의 계획 수립은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으며, 거듭된 자연재해와 흉년으로 인해 경제적인 여력도 부족하였다.

 

효종 즉위 직후인 1649년에 송시열이 올린 「기축봉사」에서 북벌의 당위성을 설파하면서도 시세와 우리의 강약을 살피고 청나라의 틈을 엿보면서 서서히 북벌을 준비하자고 하였던 것은 이런 사정을 송시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송시열이 보기에도 좀 더 시급한 것은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종의 강력한 의지로 추진되던 북벌계획은 재위 후반기에 들면서 백성들의 궁핍과 불만, 문 · 무신 간의 갈등, 김육을 비롯한 실무 관료들의 강력한 반대까지 일으키면서 효종을 정치적인 고립 상태로 몰아넣었고, 북벌계획의 추진 동력은 점차로 상실되었다. 효종은 중망(衆望)을 받던 송시열을 중용함으로써 이 난국을 타개하고자 했지만, 곧이어 효종이 승하하자 북벌계획은 중단되었다.

 

 

 

북벌론의 추이와 의의

 

효종 승하 후 중단되었던 북벌계획은 현종 말과 숙종 초 삼번의 난을 계기로 잠시 부활되었는데, 이를 주도한 인물은 남인 산림 윤휴였다. 하지만 이때의 북벌계획 역시 출사 명분과 존재감을 부각하려던 윤휴의 정치적 의도가 투사된 결과였다고 이해되며, 그나마도 현실성이 없다고 같은 남인에게까지 비판되었다. 결국 그가 실세하자 논의는 금세 사그라졌다.

 

북벌론은 청의 중원 지배가 반드시 종식될 것이라는 희망 섞인 전망을 전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명 정권이 몰락하고 삼번의 난이 진압되어 청의 중원 지배가 확고해지는 17세기 말 이후로는 태생적으로 사그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명이 멸망한 지 60년이 되는 1704년(숙종 30)에 좌의정 이여가 정세의 변화를 근거로 이제는 북벌을 논할 수 없다고 고백한 것은 이 점을 잘 보여 준다.

 

결국 명의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점점 명확해지는 17세기 말 이후로 조선 지배층이 조선왕조를 중화의 유일한 계승자로 여기는 관념상의 방식을 새롭게 고안하게 되자, 북벌론은 주로 재야 인물들 사이에서 제기될 뿐이었고, 대부분의 조선 지배층에게는 잊지 말고 기념해야 할 가치를 지닌 정신적 유산으로 여겨졌다.

 

북벌론이 중화 계승 의식, 대명 의리론과 상호 표리를 이루면서 일체화되었던 사상적 경향에 균열이 생기면서 18세기 이후 중화 계승 의식과 대명 의리론으로부터 북벌론이 분리되는 경향이 나타난 것은 자연스러웠다. 18세기 후반 북학론주2의 등장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북벌론

北伐論



조선 시대 효종 연간과 숙종 초년의 청나라를 치기 위한 일련의 논의.

 

 

등장 배경

 

중화사상과 소중화에 입각하여 문화수준이 낮은 만주족 오랑캐(청나라)에게 당한 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 등의 수치를 씻고,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중화사상 정통 후계자인 조선이 명나라를 대신하여 복수하자는 주장이다.

 

배경은 임진왜란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럭저럭 선조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동인과 서인의 사이를 조율하며 일본 침략을 대비하긴 했으나, 병력이 수천에서 2만 명쯤이라고 왜구 수준으로 오판했다. 이 때문에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규모와 상층부만 알고 있던 조총을 2할 정도 장착한 일본군에게 개전 초 일방적으로 몰린 조선은 몽진을 통해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오면서 명나라에게 다급히 SOS를 쳤다. 이에 명나라는 '전쟁을 해야 한다면 우리 영토가 아니라 조선의 영토에서 치름이 더 이득'이라 원군을 보냈고, 명군의 지원을 업고 평양성을 탈환한 이후 반격의 실마리를 만들었다. 전쟁 기간에 명나라는 연인원 20만 이상을 병력으로, 은화 900만 냥 이상을 군사비로 지출하여 조선을 지원하였다.

 

당연히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가 조선에 끼치는 정치적 입김은 더욱 강해졌고, 조선에서는 명나라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강조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외교적으로는 명나라와 신흥강국인 누르하치의 후금 사이에서 비교적 유연한 정책으로 또 다른 전쟁을 피하는 데 애써왔지만 서인들의 눈에는 명나라의 은혜를 저버리는 행위로 인식하며 좋게 보지 않았다.

 

서인 세력은 폐모살제의 죄와 칭제 문제를 명분으로 삼아 인조반정을 일으켜 집권 세력으로 거듭났다. 이들도 정권을 잡자마자 집권을 단단히 만들기 전에 싸움을 벌여봤자 이득이 없어서 기미책을 통해 후금과 현상을 유지하는 정책을 취하였으나, 1636년 후금이 영토를 점차 확장하며 명나라를 압도하는 대국이 되자 칭제건원하고 조선에 대해 명나라와의 국교 단절과 신속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고 결국은 병자호란을 맞게 되었다. 국왕이 후금의 칸에게 항복의 예를 행하고, 삼전도 굴욕 이전에는 절대로 함락되지 않으리라 여기던 강화도도 함락되어 소현세자, 봉림대군 등이 볼모로 끌려간 상황은 조선 조야에 충격과 파문을 몰고 왔다.

 

북벌은 이러한 배경에서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봉림대군(효종)에 의해 계획되었다. 그는 장차의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위한 군비 강화를 추진하여 훈련도감의 군액을 증대시키고 어영군과 금군을 정비 개편하였으며, 호란으로 피해를 입었던 성들을 증축해 요새화와 동시에 기마병의 확보에 주력하였다. 지방군으로 전체 병력의 다수를 차지하는 속오군 역시 증강되고 훈련이 강화되었다. 군비 강화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양반에게도 군포를 거두려 하였고, 노비 추쇄를 엄격히 하였다. 또 친청파인 김자점 등을 제거하고 송시열, 송준길, 김집, 이완 등을 등용하여 북벌의 이념적 지주로 삼았다.

 

참고로 이 과정에서 김자점은 역관과 내통해 북벌 준비에 관한 일, 인조의 묘비에 명나라 연호를 사용한 일 등을 청나라에 모조리 일러바쳤다. 영의정 이경석의 활약 덕분에 위기 모면. 효종은 지금 전쟁은 무리니까 북벌 준비는 일본의 침입에 대비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청나라가 어지간히 무섭긴 무서웠던지 성을 수리하고 군사를 훈련하게 허락해 달라고 보낸 주문을 보면,

이제 준동하는 왜인의 동태가 정말 우려스러운데, 혹시 위급한 일을 당하면 어찌할 계책이 없으니 오직 대국에 호소하여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 길뿐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동래와 서울과의 거리는 10일도 채 안 걸리는 길이고, 서울에서 황경(皇京)과의 거리는 까마득히 머니, 소방에서 사신을 선발하여 보내 호소하고 대국에서 군대를 조발하는 동안에, 어떤 성지와 어떤 군대로 구원병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습니까.

- 효종실록 3권, 효종 1년 3월 8일 신유 1번째기사

 

왜란을 연달아 겪은 조선 입장에선 아주 근거 없는 부탁은 아니었고 과거 명나라가 왜란에 막대한 지원을 해주다가 멸망의 요인 중 하나가 된 것을 알고있던 청나라는 조선이 알아서 막아주겠다고 하니 동태를 살피며 묵인하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북벌론을 통해 양성된 군대 어영청이 청나라의 요청으로 나선정벌에 참여했는데, 당시 조선에서 양성한 조총 부대에 의해 청은 러시아를 격퇴하는 데 큰 도움을 얻었다고 한다.

 

 

 

북벌 허구론

 

효종이 과연 실제로 청나라를 치기 위해 북벌론을 계획한 것인가 하는 부분은 오늘날 별로 지지를 얻지 못하며, 현대에 와서는 북벌론은 조카에게 돌아갔어야 할 왕위를 차지한 정통성이 부족한 효종이 내부 지지를 얻고, 인조대에 청의 통제를 받아 제대로 정비되지 못한 조선의 군사체계를 다시 재정비하며 자국 방위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주된 목적으로 언급된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연달아 겪은 조선은 국력에 심각한 타격을 받아 군사력이 약화되었고, 병자호란 이후 청은 각지의 성곽 복구 및 강화에 간섭하면서 조선의 방위력 재건을 통제하였다. 효종은 이런 상황 속에서 북벌을 명분으로 삼아 대동법 등과 같이 내부 제도를 개혁 및 친청파들을 숙청하며 군대를 정비하였으며, 다수의 성곽과 포대를 구축하고 부족한 정통성을 북벌론을 통해 강화하여 지방 산림층의 지지를 받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송시열, 송준길로 대표되는 지방 산림층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조정에 입사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지방 산림층에서는 인조 정권을 '오랑캐에 굴복한 조정'으로 여기고 입사하지 않으려 하는 풍조가 있었고, 이 때문에 인조는 인재난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이 입관에 성공하면서 이런 풍조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고, 인조 말년쯤 되면 이들은 조정에 나올 만한 명분이 있으면 나올 수 있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효종이 내세운 북벌론은 이런 명분을 제공했다. 이후로 조정에서는 종종 북벌에 대한 논의가 나오게 된다. 다만 이런 북벌론을 이용한 군사력 증강은 산림의 지지는 얻었을 지언정 실무 관료층 및 현실정치에 이미 오랫동안 있었던 대신들의 지지는 얻지 못한 듯하다. 특히 이들의 중심 인물인 김육은 대표적인 북벌반대론자로, 이 점에서 효종과 종종 충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육은 죽을 때까지 계속 효종에게 신임받고 중용되었는데, 이는 효종의 북벌론이 실질적인 북벌 계획과는 거리가 있음을 나타내는 한 증거로 꼽힌다.

 

기축봉사를 예로 들어 '서인들은 말만 앞섰고 효종은 약간이라도 군비를 증강시켰다!'는 주장을 그대로 정설로 하기엔 힘든 것이, 송시열이 오히려 이 북벌의 명분 때문에 효종에게 끌려다녔다는 해석도 있다. 현실적으로 청나라와의 국력 격차는 엄연한 사실이고 북벌의 가능성이 높지 않음을 송시열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직접적으로 북벌을 반대하는 것은, 그 명분을 중시함으로서 정치적 기반을 구축한 송시열로선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때 효종이 그 명분을 앞세워서 북벌론을 주장하며 송시열 등 서인 세력을 압박하자, 위에 언급한 정신을 갈고 닦으며 군비를 증강해야 한다는 등의 신중론을 주장하는 수준으로 물러서며 효종의 국정 운영을 지지하게 되었다는 해석이다.

 

세월이 흘러 숙종 초에도 윤휴, 허적 등 남인을 중심으로 북벌론이 다시 제기되었다. 북벌을 담당할 기구로서 도체찰사부를 두고, 산성을 축조하고 무과 합격자를 늘리고 전차를 제조하는 등 군비를 강화하였다. 이는 1674년 청에서 오삼계의 난, 일명 삼번의 난이 일어나 내부혼란이 발생한 것을 이용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청나라가 곧 안정을 되찾고 윤휴 일파가 1680년 실각하면서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당시 청나라는 위세로 보면 현재의 미국 수준의 천조국으로 동아시아를 넘어서 세계적인 초강대국이었으므로 성리학자들도 현실적으로 북벌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676년 삼번의 난이 시작되었을 때 호응해서 동녕 왕국까지 연합해 북벌을 감행했다고 해도 삼번은 의외로 쉽게 제압당했고 당시의 사림층은 무리한 외정보다는 내치를 우선시했기 때문에 말로는 북벌을 외쳤지만 끝내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사실 숙종 연간의 청나라 공격은 가능성이 높았을 수도 있겠으나 당시 황제가 청나라 최고의 명군 강희제 시기라 청나라의 국력은 압도적이었고 그 외 조선의 여러 내부 문제까지 겹쳐서 사실 북벌을 감행했다가는 중원을 재진압하고, 준가르와 티베트, 몽골까지 정복한 청나라에게 병자호란은 저리 가라 할 만큼 처참한 보복을 받고 조선 왕조는 멸망하고, 심지어 한반도 전체가 중국에게 병탄되어서 중화민국이나 중화인민공화국 조선성이 되고 중국과 별개의 국가였지만 결국 중국에 편입된 신장과 티베트, 내몽골, 운남성처럼 한민족 전체가 중국의 소수민족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우리 조상들은 현명했다.

 

어떤 의미로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받기 충분하고, 실제로 조선 후기에 이미 북벌론은 허생전 등에서 볼 수 있듯 명분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운부의 난

 

날이 저문 뒤에 이절(李梲)·유선기(兪選基) 등이 상변(上變) 하기를,

"어느 날 이영창(李榮昌)이 이절의 집에 와서 자면서 갑자기 묻기를, ‘그대가 장지(葬地)를 얻으려고 한다면 우리 스승을 가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스승이란 중은 바로 운부(雲浮)로서, 당시 나이 70세로 송조(宋朝)의 명신(名臣)이었던 왕조(汪藻)의 후손인데, 명나라가 망한 뒤 중국에서 표류하여 우리 나라에 도착하였으며, 머리를 깎고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갔는데, 그 사람은 위로는 천문(天文)을 통달하고 아래로는 지리(地理)를 통찰하고 중간으로는 인사(人事)를 관찰하여 재주가 옛날의 공명(孔明)과 유기(劉基)에 밑돌지 않는다는 자였습니다. 그가 불경(佛經)을 승도(僧徒)들에게 가르쳤는데, 그 중에서 뛰어난 자로는 옥여(玉如)·일여(一如)·묘정(卯定)·대성(大聖)·법주(法主) 등 1백여 인을 얻어 그 술업(術業)을 전수(傳受)시키면서 팔도(八道)의 중들과 체결(締結)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장길산(張吉山)의 무리들과 결탁하고, 또 이른바 진인(眞人) 정(鄭)·최(崔) 두 사람을 얻어 먼저 우리 나라를 평정하여 정성(鄭姓)을 왕으로 세운 뒤에 중국을 공격하여 최성(崔姓)을 왕으로 세우겠다고 하였습니다."

(중략)

임금이 또 국청(鞫廳)에 하교(下敎)하기를,

"극적(劇賊)10 장길산(張吉山)은 날래고 사납기가 견줄 데가 없다. 여러 도(道)로 왕래(往來)하여 그 무리들이 번성한데, 벌써 10년이 지났으나, 아직 잡지 못하고 있다. 지난번 양덕(陽德)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체포하려고 포위하였지만 끝내 잡지 못하였으니, 역시 그 음흉(陰凶)함을 알 만하다. 지금 이영창(李榮昌)의 초사(招辭)를 관찰하니, 더욱 통탄스럽다. 여러 도(道)에 은밀히 신칙(申飭)하여 있는 곳을 상세하게 정탐하게 하고, 별도로 군사를 징발해서 체포하여 뒷날의 근심을 없애는 것도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숙종실록 31권, 숙종 23년 1월 10일 임술 3번째기사 / 반역 모의에 관련된 이절·유선기 등은 복주되고 이익화·장영우 등은 귀양 보내다 중

 

1697년에 운부를 비롯한 1백여 명의 승려들이 집단으로 반란을 일으키려다 실패한 일을 들 수 있다. 당시 운부는 나이 70세의 승려였는데, 자신이 하늘과 땅의 이치를 깨우치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 알고 있어서 그 재주가 옛날 제갈공명이나 유기(주원장을 도와 명나라를 세운 공신)와 같다고 선전하였다. 그리고 운부 자신이 가르친 옥여, 일여, 묘정, 대성, 법주 등 1백여 명의 승려들을 제자로 가르치고 그들을 통해 조선 전국의 승려들과 결탁을 했다.

 

운부와 1백여 명의 승려들은 도적 장길산의 무리들과 결탁하고, 또 이른바 진인인 정씨와 최씨 두 사람을 얻어 먼저 우리나라를 평정하여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을 왕으로 세운 뒤에 중국 청나라를 공격하여 최씨 성을 가진 사람을 왕으로 세우겠다는 계획까지 세웠다. 비록 이 사건은 실패했지만, 조선 민간의 반란 세력들이 북벌을 명분으로 내세워 사람들을 끌어모으려 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열하일기의 내용

 

조선 후기의 학자인 박지원(朴趾源 1737~1805년)은 자신이 직접 청나라를 방문하여 보고 들은 일을 적은 기행문인 열하일기를 썼는데, 이 열하일기를 보면 초반에 많은 조선 사신단이 모이는 자리에서 어느 선비가 "도대체 중국에 볼 만한 것이 뭐가 있느냐? 천자로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오랑캐의 변발을 했지 않았느냐? 만약 나한테 10만 대군이 있다면 산해관을 넘어 중국으로 쳐들어가 오랑캐가 남긴 더러운 유산을 모두 없애버릴 것이다."라고 열변을 토하며 북벌론을 외치자, 모든 사람들이 그 말을 옳다고 여겼다는 내용이 언급된다.

 

 

해도병마(海島兵馬)의 계획

 

1801년에는 김건순이라는 천주교 신도가 청나라 신부 주문모와 만난 자리에서 “서양의 큰 배에다가 총과 대포를 가진 군사들을 태워서, 청나라로 쳐들어가 병자호란 때 우리 조선이 당한 치욕을 씻겠다.”고 말한 사건이 있었다. 거기에 이희영, 강이천과 함께 바다의 한 외딴 섬으로 들어가 군사를 기르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그러나 이 소위 해도병마(海島兵馬)의 계획은 1797년 탄로가 나서 김건순은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고 강이천은 유배형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김건순은 조선 후기에 왕실을 능가하는 최고 권력을 휘둘렀던 명문가인 안동 김씨의 일원인데, 그런 상류층의 귀공자마저 북벌을 계획했던 것이다.

 

 

 

이필제의 난

 

심지어 1869년부터 1871년까지 조선 사회는 북벌론을 명분으로 내세운 이필제(李弼濟 1825~1871년)가 일으킨 이른바 '이필제의 난'에 휘말려 큰 소동을 겪었다. 이필제는 먼저 조선을 장악한 다음, 그 여세를 몰아 청나라로 쳐들어가는 북벌을 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외쳤는데, 이러한 이필제의 주장에 수많은 사람이 동조하여 2년 동안 5번이나 반란이 일어날 정도였다.

 

 

 

 

조선시대 북벌 관련 발언들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늘날의 대사를 말하자는 것이오. 저 오랑캐는 반드시 망하게 될 형편에 처해 있소. 예전의 칸한 청 나라 군주를 낮게 칭하는 말은 그 형제들이 매우 번성했었는데 지금은 점점 줄어들었으며, 예전의 칸은 인재가 매우 많았는데 지금은 모두 용렬하며, 예전의 칸은 오로지 무예와 전쟁만을 숭상했었는데 지금은 점점 무사(무사)를 폐하고 자못 중국의 일을 본받고 있소. 이것이 바로 경이 지난번 주자(주자)의 말씀을 들어 말한바 ‘오랑캐가 중원(중원)의 인재를 얻어 중국의 제도를 배우면 점점 쇠약해진다.’는 것일 것이오. 지금의 칸이 비록 영웅이라고는 하나, 주색(주색)에 깊이 빠져 있어 그 형세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이오. 오랑캐의 일은 내 익히 알고 있소. 신하들은 모두 내가 병사(병사)를 다스리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나, 나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있소. 그 이유는 천시(천시)와 인사(인사)의 좋은 기회가 언제 닥쳐올지 모르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정예화된 포병(포병) 10만을 길러 자식처럼 사랑하고 위무하여 모두 결사적으로 싸우는 용감한 병사로 만든 다음, 기회를 봐서 저들이 예기치 못하였을 때에 곧장 관(관)으로 쳐들어갈 계획이오. 그러면 중원의 의사(의사)와 호걸 중에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소. 아마 곧장 관으로 쳐들어가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오. 저들은 무비(무비)를 힘쓰지 않아 요동(요동)과 심양(심양)의 천 리 길에 활을 잡고 말을 타는 자가 전혀 없으니, 우리가 쳐들어가면 무인지경에 들어가듯 할 수 있을 것이오. 또 하늘의 뜻을 헤아려 보건대, 우리나라의 세폐(세폐)를 저들이 모두 요동과 심양에 쌓아 두고 있으니, 하늘의 뜻은 아마 다시 우리의 물건이 되게 하려는 것인 듯하오. 또 우리나라에서 잡혀간 수만 명의 포로가 그곳에 억류되어 있으니, 어찌 내응하는 자가 없겠소. 오늘날의 일은 과단성 있게 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할 뿐이지,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 효종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마음에 굳게 정하시기를 ‘이 오랑캐는 임금과 아버지의 큰 원수이니, 맹세코 차마 한 하늘 밑에 살 수 없다’고 하시어 원한을 축적하십시오. 그리고 원통을 참고 견디며 말을 공손하게 하는 가운데 분노를 더욱 새기고, 금화를 바치며 와신상담을 더욱 절실히 하여 계책의 비밀은 귀신도 엿보지 못하게 하소서. 또한 의지와 기개의 견고함은 분육(賁育)도 빼앗지 못하도록 하시고, 5~7년 또는 10~20년까지도 마음을 늦추지 말고 우리 힘의 강약을 보며 저들 형세의 성쇠를 관찰하소서. 그러면 비록 창을 들고 죄를 문책하며 중원을 쓸어 말끔히 우리 신종 황제의 망극한 은혜는 갚지 못하더라도, 혹 관문(關門)을 닫고 약속을 끊으며 이름을 바르게 하고 이치를 밝혀 우리 의리의 원만함은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성패와 이둔(利鈍)은 예견할 수 없더라도 우리가 군신⋅부자의 사이에 이미 유감이 없다면, 굴욕을 당하고 구차하게 보존하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 송시열

 

“서쪽으로는 요동을 얻고 동쪽으로는 여진을 평정하고 북으로 흑룡의 원류에 닿고 오른쪽으로 몽고와 다툰다면 이 또한 통쾌한 일”

- 정약용 

 

“북벌의 기회를 이용해 조선이 천하를 통제해야 한다”

- 한원진

 

 

 

 

북벌론이 논의되기 전인 병자호란 당시 평안도 의주부에서 의주부윤으로 있던 임경업이 청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한 틈을 타 청나라의 수도인 심양을 역공한다는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청 태종은 조선 침략에 정예 병력의 거의 대부분을 올인한 상황이었으니 발상 자체는 좋았지만 현실은 암울했다. 우선 임경업의 군은 위에 언급됐듯이 고작 400명 밖에 안됐다. 고로 원래는 아마 명나라의 군대나 김자점의 북방군과 연계하여 적의 심장부를 역공을 가할 계획이었을 듯 한데, 김자점은 애초에 청나라군과 싸울 의지가 없었고 명나라는 국내 각종 도적들의 반란들 때문에 신경을 쓸 여력도 없었다. 그래서 임경업이 평안 병사 유림과 함께 연합 전선을 펴고자 했지만 유림은 어명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이 설을 바탕으로 말하자면 임경업의 심양 역침공 발상은 큰 문제가 3가지가 있었다. 우선 유림이 이끄는 병력조차도 2,000명이었다. 합쳐봐야 2,400명, 그나마 거의 조총수로만 이루어진 병력으로 심양을 침공하는 건 큰 무리였다. 애초에 이 설에서 임경업은 본인에게 5,000명의 군사를 준다면 심양을 치겠다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이는 본인이 본래 생각하고 있던 병력의 반도 채 안되는 숫자다. 다음으로 청군은 한덩어리로 움직이는 상황이 아니었다. 임경업이 인근 병력과 합류해서 북으로 진군하려면 인근의 청군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청군 병력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3-4만명은 족히 나오기 때문에 설사 임경업이 만약 5,000명의 군사를 모았다고 해도 청이 군의 일부만 보내서 때려잡아도 되는 상황이다. 게다가 청이 아직 명나라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수도를 완전 텅텅 비워놓고 갔을 리가 없으니 심양과 주변에 최소한의 예비 병력이 주둔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마지막으로 당시는 이미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포위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것부터 해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되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정작 유림은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와 함께 인조를 구원하기 위해서 남하하던 중에 자모산성 전투에서 4차례에 걸친 청군의 공세를 모조리 격퇴한 활약을 펼쳤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인조가 항복했으니 원대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임경업의 심양 공격론은 2가지 중 하나로 보인다. 하나는 임경업 장군님 만만세 하면서 후대에 지어낸 이야기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임경업이 전략적 상황 파악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후 임경업은 이미 화의를 맺고 철군하던 청나라 황제의 조카 요퇴의 병력 300명을 압록강 인근에서 공격하여 격파하고 포로로 잡힌 남녀 120여 명과 말을 회수한다. 의도와 결과는 좋았지만, 자칫 잘못했으면 이를 빌미로 삼아 청군의 재침을 부를 수도 있는 행동이었고, 조선 조정의 의도도 아니었다.

 

화친을 반대한 삼학사가 청나라로 끌려가는 도중 백마산성에서 머물게 되자 임경업이 찾아가 위로하였다.














북벌론

복수설치(復讐雪恥)의 그날을 꿈꾸며

1649년(효종 1) ~ 1680년(숙종 6)

 

 

북벌은 조선의 제17대 국왕인 효종(孝宗)의 대중국(對中國) 노선이다. 인조조선(仁祖)의 둘째아들이자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동생인 봉림대군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치욕을 겪은 후 청에 끌려가 8년간 인질생활을 거쳐 효종으로 즉위하였는데 이때 ‘대청 복수(對淸 復讐)’의 북벌론을 주창하였다. 당시 집권 서인들은 ‘대명 의리(對明 義理)’의 입장에서 북벌론을 이해, 이로써 북벌론은 ‘대청 복수’와 ‘대명 의리’의 양 측면을 보이게 되었다. 효종 사후 서인(西人)들이 북벌론을 파기하면서 남인(南人)의 당론으로 이어지다가 현종 말·숙종 초 이후 사라졌다.

 

 

 

광해군대 명·후금에 대한 ‘실리외교’와 인조반정 후 ‘명분외교’로의 선회

 

16세기 말 동아시아 사회를 뒤흔들어 놓은 세계대전인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으면서 조선 사회는 크게 와해되었다. 조선왕실을 비롯한 조선 지배층은 임진왜란의 후유증을 치유하고 국가를 재건하기 위한 노력에 사활을 걸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국가 재건의 이념이나 방식을 둘러싼 노선상의 대립이 생겨났다.

 

우선 치열한 생존경쟁인 전쟁을 경험하면서 성리학의 핵심인 의리명분론 보다는 국가와 왕실의 안정을 최우선에 두고 실리를 중시하는 공리주의적(功利主義的), 탈성리학적 성향이 강화되었는데 이러한 선상에서 광해군(光海君)과 대북정권이 성립하였다. 주지하듯이 선조대 성립된 북인세력은 학문적으로 서경덕(徐敬德)·조식(曺植)의 학통에서 연원하였는데 그중에서도 대북세력은 조식의 수제자인 산림 정인홍(鄭仁弘)을 중심으로 하였다. 광해군과 대북정권의 공리주의적 성향은 당시 조선이 당면한 외교적 난제였던 명·후금 관계에서 자주적이고 실리를 우선하는 중립외교 정책에서 잘 드러났다.

 

임진왜란 후 동아시아사회는 명·청 교체라는 새로운 지각 변동을 맞이하고 있었다. 중원의 패자였던 명이 임진왜란 참전으로 국운이 기울게 되자 만주 일대의 여진족이 세력을 확장하였고 급기야는 1616년(광해군 8) 후금(後金)을 건국하여 명을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명·후금 간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명이 후금 정벌을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자 1618년(광해군 10) 광해군은 강홍립(姜弘立)에게 1만 명의 조선군을 거느리고 명군을 원조하게 하면서도 형세를 보아 잘 처신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강홍립은 조·명 연합군이 심하전투(深河戰鬪)에서 패배한 뒤 후금군에게 투항하고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원해준 명의 출병요구에 부득이 응했다고 해명했다. 후금은 이러한 조선의 사정을 이해하고 조선에 친화적인 입장을 보임으로써 광해군 때에는 후금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이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실리를 중시한 뛰어난 외교정책이었으나 명에 대한 사대와 임란시 명의 은혜를 강조하는 사림들에게 큰 질타를 받았다.

 

이처럼 명·후금에 대한 실리외교로 대변되는 광해군과 대북정권의 통치 방식은 조선사회의 입국이념이던 성리학의 의리명분론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어서 사림세력의 이탈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결국 대북정권에 의해 소외되었던 서인과 남인세력이 정치적으로 연대,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키게 된다. 광해군대 대북세력이 학문적으로 탈성리학적인 경향을 보였다면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 및 남인 세력의 경우 서인은 성혼·이이의 학풍, 남인세력은 이황의 학풍에서 연원, 상대적으로 성리학이념에 충실한 경향이었다. 이러한 성향의 서·남인 연합 정권의 성립은 조선사회가 임란으로 인한 혼란과 동요의 시기를 지나 재차 건국이념이자 시대이념인 성리학이념으로 회귀, 다시 보수화하게 됨을 시사한다.

 

인조반정 이후 성립된 서·남인 연합 정권은 성리학의 의리명분론을 내세웠던 반정의 명분만큼이나 광해군대의 실리외교에서 벗어나 명과의 의리를 중시하는 명분외교로 선회하였다. 조선은 요동 등주(登州)의 명군과 연계하여 동남쪽 후금군을 괴롭히는 가도(椵島)의 모문룡(毛文龍) 군대를 지원하는 등 친명배금 정책을 추진하였다.

 

 

 

양차 호란 이후 ‘대청 사대’와 ‘대명 의리’의 공존

 

당시 후금은 명을 공략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고 같은 선상에서 조선의 태도에도 유의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와중에 나온 조선의 친명배금책은 후금을 크게 자극하였다. 후금은 양차에 걸친 조선 정벌을 통해 조선의 친명배금책에 쐐기를 박고자 하였고 결국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공하게 되는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과 그 9년 뒤에 일어난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그것이다.

 

정묘호란에서 조선은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었으나 병자호란에서는 ‘군신의 맹약’을 맺음으로써 오랜 명과의 사대관계를 완전히 청산하고 청과 새로운 사대관계를 맺어야 했다. 이렇게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공식적으로 ‘대청 사대’ 노선을 취하였으나 실제로는 ‘대명 의리’ 노선을 포기하지 않고 양자를 병행하였다. 일차적으로는 명에 대한 사대와 임란시 명의 은혜를 강조하는 여론 때문이었지만 현실적으로 아직까지 건재하고 있는 명의 눈치를 살펴야 했던 사정도 있었다. 조선은 청의 요구에 따라 명·청 전쟁에 조선군을 파병하면서도 명을 돕거나 전투를 회피하는 등의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명 멸망 이후 인조 말 ‘대청 사대’의 우세

 

이처럼 병자호란 이후 조선 조정은 공식적인 ‘대청 사대’ 노선과 함께 ‘대명 의리’ 노선을 병행하였다. 그러나 명·청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청이 승리하고 명이 멸망한 이후 조선의 입장은 달라지게 된다.

 

인조의 경우 개인적으로는 병자호란시 청 태종에 굴욕적인 항복을 행한 처지였기에 청에 대한 적대감이 더할 수 없이 깊었을 것이나 병자호란 이후 청에 의해 조선국왕으로 임명되어 왕권을 보장받고 있는 처지였기에 현실적으로 청에 기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러하였으므로 인조는 점차 사림들의 반청 여론을 비현실적인 명분론으로 기피, 반청적 성향의 인물들을 차츰 멀리하고 김자점(金自點)·김류(金瑬)와 같은 공신세력들을 주로 활용하면서 극히 폐쇄적인 방식으로 정국을 운영하였다. 공신세력들 중에서도 특히 김자점은 병자호란시 도원수로서 전쟁에서 패한 책임을 지고 먼 섬으로 유배되었으나 인조의 부름을 받아 1640년(인조 18) 강화부윤·호위대장으로 복귀한 이래 병조판서·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최고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인조와 김자점 등의 공신세력은 ‘대청 사대’의 현실을 수용, 반청파들을 제어하고 청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하였는데, 특히 1644년(인조 22) 명의 멸망 이후 이러한 경향은 더욱 분명해졌다. 이때에 이르러 청은 명의 수도 북경을 함락한 후 북경으로 천도, 명실상부한 중원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명의 멸망 이후 인조말 조선 조정의 ‘대청 사대’는 더욱 강화되었다.

 

 

 

효종 즉위 후 효종의 ‘북벌론(대청 복수)’ 주창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조 말 조선 조정 내에서는 인조와 공신세력을 중심으로 한 ‘대청 사대’ 노선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였다. 그러나 인조의 둘째아들이자 세자였던 봉림대군의 생각은 부왕과 크게 달랐다.

 

병자호란 후 청은 인조의 첫째 아들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둘째아들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청으로 끌고가 인질로 억류하였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8년간 심양에 체류하면서 청의 유력 인사과 친교를 맺고 조·청 양국간에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고 양국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더하여 서양의 새로운 문물도 접하여 폭넓은 식견을 갖추게 되었다. 특히 이들은 청의 강요에 따라 명·청 전쟁에 참여해야 했는데 봉림대군은 형 소현세자를 수행하여 여러번 전쟁에 참여하였고 이로써 형제간의 우애가 더욱 돈독해지게 되었다.

 

이들 중에서도 특히 소현세자는 조선의 차기 왕위 계승자로서 조선 조정의 입장을 대변, 조·청 관계 개선에 크게 기여하였고 청의 신뢰까지 이끌어내는 등 맹활약을 하였는데 국내의 인조는 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소현세자가 자신을 대신하여 조선왕으로 책봉될 것을 매우 염려하였다.

 

명·청 전쟁에서 청이 승리하여 더 이상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억류해야 할 필요가 없어지자 청은 이들을 본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1645년(인조 23) 2월 먼저 소현세자가 8년간의 인질생활을 끝내고 34세의 나이로 귀국하였다. 예상대로 인조는 소현세자에 대해 극히 냉담한 태도를 취하였고 2개월여 후에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당시 소현세자는 세자빈 강씨와의 사이에 세 아들을 두었으니 당연히 소현세자의 첫째아들이 세손으로 책봉되어야 했지만 인조는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둘째아들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또한 인조는 세자로 책봉된 봉림대군의 지위를 안정시키기 위해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씨를 제거하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소현세자의 첫째와 둘째아들이 죽고 막내아들만이 살아남는 비극이 있었다.

 

봉림대군은 두 차례 호란의 치욕, 심양에서의 8년여의 인질생활, 갑작스러운 형의 죽음과 그 일족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살얼음판 같은 정국을 조심스럽게 견디어갔다. 드디어 1649년(인조 27) 인조가 사망하고 봉림대군이 31세의 나이로 조선의 제17대 국왕으로 즉위하니 효종이다. 선왕 인조는 두 차례의 호란을 겪으면서 극히 소극적이고 현실 안주적 성향으로 변화, 반청론자들을 멀리하고 측근의 공신세력을 중심으로 대청 사대에 안주하였지만 젊고 패기 넘친 효종은 부왕과 전혀 다른 경험과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두 차례의 호란도 겪었지만 8년간의 인질 기간 동안 청에 이끌려 명·청 전쟁에도 직접 참여하면서 중국 전역을 두루 다녔고 이 과정에서 청의 내부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게 되었다. 오랜 전쟁 끝에 결국 청이 승리하였으나 정권 교체 직후 청의 국내외 사정은 매우 불안하였다. 이러한 정세를 잘 알고 있던 효종으로서는 언제 다시 생겨날지도 모르는 위기 상황을 걱정하였다. 이에 효종은 모든 변수들을 고려하여 우선적으로 군비를 증강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부왕인 인조가 친청 정책을 취하고 있었기에 왕자나 세자 시절에는 이러한 속마음을 드러낼 수 없었지만 왕위에 오르고 난 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뜻을 펼치게 된다. 물론 이는 갓 즉위한 신왕으로서 당연히 갖게 되는 왕권강화에 대한 의지와도 하나로 맞물려 있었다. 결국 효종은 군비 증강과 왕권 강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대청 복수’를 목표로 하게 되었으니 이른 바 ‘북벌론’이다.

 

병자호란 후 조선 왕실은 ‘대청 사대’와 함께 ‘대명 의리’를 병행하였는데 이중에서 ‘대청 의리’가 왕실의 입장이었다면 ‘대명 의리’는 조선의 지배층인 사림 일반, 그중에서도 사림들의 여론을 이끌고 있던 산림세력이 주도하였다. 이렇게 효종의 ‘대청 복수(북벌론)’ 노선은 산림들의 ‘대명 의리’ 노선과 상통하였기에 북벌론의 구현을 위해 효종은 선왕의 구신들을 몰아내고 새롭게 산림세력과 연합해야 했다.

 

 

 

효종의 ‘북벌정책’ 경과

 

효종은 즉위 후 곧 ‘대명 의리’를 주장해오던 산림과 척화대신을 불러들이게 되니 서인 산림인 김집(金集)·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이유태(李惟泰)와 서인 척화대신 김상헌(金尙憲), 남인산림 권시(權諰) 등이 그들이다.

 

효종의 개혁정치 표방에 고무된 이들 사림세력은 인조 대 핵심 구신인 김자점의 비리를 공격하였고 이러한 변화에 위협을 느낀 김자점은 역관인 심복 이형장(李馨長)을 시켜 청에 효종이 선왕대의 구신을 몰아내고 북벌을 하려 한다고 고발하고 그 증거로 청의 연호를 쓰지 않은 인조 릉〔장릉(長陵)〕의 지문(誌文)을 제시하였다. 청이 곧 사신을 보내 조사했으나 이경석(李景奭)·이시백(李時白)·원두표 등의 활약으로 김자점의 기도는 실패하고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1652년(효종 3) 김자점의 아들 김식(金鉽)은 원두표·김집·송시열·송준길을 제거하고 인조의 후궁인 귀인 조씨의 아들 숭선군(崇善君)을 추대, 역모를 일으켰는데 이 옥사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김자점 일당이 모두 제거되어 조정내 분위기가 일신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효종은 북벌을 위한 군비 확충을 본격화할 수 있었다. 종래 중앙 군영의 병권은 대체로 국왕의 훈척신들이 장악해왔는데 효종은 이러한 관행을 깨고 이완(李浣)·유혁연(柳赫然)·박경지(朴敬祉) 등 무과 출신의 참신하고 실력있는 무장들을 중용함으로써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이완은 어영대장에 이어 훈련대장에 올라 효종대 북벌 정책의 핵심 역할을 하였다.

 

효종은 북벌의 핵심 군영으로 인조대 군비증강을 위해서 설치된 어영청에 주목하였다. 어영청의 군사는 애초 7천명에 불과하였으나 이때에 이르러 3명의 보인제(保人制)를 통해 재정 문제를 극복, 3배수인 2만 1천명으로 증액되었다. 어영군은 1천명씩 21개조로 나뉘어 관리되었는데 도성에 항상 1천명의 어영군이 상주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로써 어영청은 핵심 중앙군영인 훈련도감에 필적할 정도로 그 위상이 높아지게 되었다. 또한 국왕의 친위병인 금군(禁軍)을 기병화(騎兵化)했으며 모든 금군을 내삼청(內三廳)에 통합하고 군액을 6백명에서 1천명으로 증액하였다. 또한 최강의 중앙군인 훈련도감을 강화하기 위해 군액을 1만명으로 증원하고자 했으나 급료병인 훈련도감군의 증원에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어 현실화되지는 못하였다. 또한 남한산성 수비대인 수어청을 강화하였고 유사시를 대비하여 남한산성에 대포 3백문을 설치하였으며 강화도에는 행궁을 수축했다. 또 능마아청(能亇兒廳)을 설치하여 무장들에게 병법을 교육하였으며, 평야전에 유리한 장병검(長柄劍)을 제작하고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을 통해 조총·화포 제작 등의 무기도 개량하였다. 한편 인조대 설치 이후 유명무실한 상태에 놓여 있던 영장제(營將制)를 실시, 각 지방에 영장을 파견하여 직접 속오군(束伍軍)을 지휘하게 함으로써 지방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군비증강 결과 조선군의 전력은 크게 향상되었는데, 이는 1654년(효종 5)과 1658년(효종 9) 두 차례 청의 요청에 따라 이루어진 나선정벌(羅禪征伐)시 조선군의 활약상에서 잘 알 수 있다.

 

이때 조선군은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조총부대를 파견하여 큰 전과를 올렸는데 이것이 효종 즉위 초 이래의 군비증강의 결과라는데 이견이 없다. 또한 나선정벌 이후에는 남방은 물론 북방에도 나선정벌을 핑계로 산성을 수리하는 등 군비를 확충하였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사회가 아직 깊은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형편이었고 더하여 자연재해가 잦아 군비증강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효종은 재원의 확보를 위해 김육(金堉)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1652년(효종 3) 충청도, 1653년(효종 4) 전라도 산군(山郡) 지역, 1657년(효종 8) 전라도 연해안 각 고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였는데, 이로써 전세(田稅)가 1결(結)당 4두(斗)로 고정되어 백성의 부담이 크게 경감되었다. 대동법의 시행에서 알 수 있듯이 북벌은 효종 대의 시대정신이자 정치·경제·사회 등 제반 정책을 관통해 흐르는 일대 강령이었다.

 

 

 

서인 산림의 ‘북벌론’ : ‘대청 복수’가 아닌 ‘대명 의리’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효종은 어려운 조건 하에서도 북벌 정책에 일로매진하였다. 반면 효종이 북벌을 위한 정치적 동반자로 선택한 산림세력, 그중에서도 특히 송시열로 대표되는 서인 산림들은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1649년(인조 27) 효종 즉위 후 척화파와 산림들이 대거 기용될 때 송시열은 효종의 왕자시절 사부였던 이유도 있어 서인 산림 중에서도 가장 우대되었다. 송시열은 효종의 부름을 받은 직후 밀봉된 기축봉사(己丑封事) 16조항을 올렸는데 이중에서도 특히 ‘정사를 바르게 하여 이적을 물리칠 것(修政事以攘夷狄)’ 조항은 송시열, 더 나아가서는 송시열로 대변되는 서인 산림세력이 생각하는 북벌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여기에서는 ‘오늘날 시세를 헤아리지 않고 경솔히 강로(强虜)를 끊다가 원수를 갚지도 못하고 실패하게 되면 선왕께서 수치를 참고 몸을 굽혀 종사를 연장시킨 본의가 아니다. 마음에 굳게 정하시어 원한을 축적하고 원통을 참고 견디며 말을 공손하게 하는 가운데 분노를 더욱 새기고 금폐(金幣)를 바치는 가운데 와신상담하여 5~7년 또는 10~20년까지도 마음을 늦추지 말고 우리 힘의 강약을 보고 저들 형세를 관찰하라. 그러면 비록 중원을 쓸어 명의 은혜를 갚지 못한다 할지라도 오히려 관문(關門)을 닫고 우리 의리의 온편함은 지킬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이는 송시열의 북벌론이 정벌론이라기 보다는 자강론에 가까운 성격의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는 ‘이 일은 국왕의 한 마음으로 근본을 삼아야 하니 국왕은 반드시 자신을 극복하여 마음을 바르게 가져 집안을 다스려 충직하게 하고 공도(公道)를 넓히며 재용을 절약하고 사치를 혁파하여 민력을 펴 기세가 충만해진 다음에야 말할 수 있으며 그렇지 못하면 (북벌은) 한갓 헛된 말이 될 뿐이다’고 하여 북벌의 핵심은 군주가 마음을 바로잡아 정사를 바르게 하는데서 시작한다고 하였다. 이는 송시열이 북벌론에 앞서 효종의 성학(聖學)을 우선적으로 강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기축봉사는 송시열의 북벌론이 자강론의 차원이며 더하여 군주 성학을 우선하는 준비론의 차원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 이러하였으므로 효종은 송시열에게 계속 관직을 내려 북벌 정책의 실질적인 우군이 되어줄 것을 기대하였지만 송시열은 이를 계속 거부하였다. 송시열은 효종이 생각하는 실제적인 군비증강 정책에는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주로 향리에 머물면서 효종의 정책을 비판적으로 관찰하고 훈수를 두는 역할을 하였다.

 

효종 즉위 초 이래의 군비증강 및 이와 맞물려 진행된 왕권강화 정책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서·남인 집권세력의 불만을 야기하게 되었다. 축성이나 군사훈련 등에 내몰린 백성들의 원성은 당연하다 하더라도 서·남인 집권세력의 비판은 효종의 북벌정책에 대한 적신호였다. 특히 효종 치세 후반기인 1656년(효종 7) 서인 이조정랑 김수항(金壽恒)은 ‘성을 쌓고 조련시키는 일과 무기와 화약을 만드는 역사가 일시에 모두 거행되어 여러 도가 모두 그러한 상황이다. …… 영장(營將) 설치의 경우 폐단이 수없이 많아 군사를 불러 모아 쉬지 않고 연습시키니 백성들은 농사를 폐하게 되고 관문(官門)에 오래 대기하여 굶주리고 고달프기 그지없다. …… 나라의 근본은 한번 흔들리면 다시 견고해질 수 없고 민심은 한번 흩어지면 다시 모을 수 없는데, 비록 훌륭하고 튼튼한 성지(城池)와 견고하고 날카로운 갑병이 있다 하더라도 누구와 더불어 지키겠는가? …… 보장(保障)의 기반은 인심을 얻는 것으로 우선해야 한다.’는 요지의 비판을 하였다.

 

효종의 고집으로 버텨가던 북벌정책에 기류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으로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송시열이 있었다. 1657년(효종 8) 송시열은 효종에게 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려 다시 한번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는 제왕학을 우선할 것’을 강조하였다. ‘나라의 위급한 형세를 말하기 전에 당장 제왕학에 뜻을 기울여 당장 공부에 착수할 것’을 청한 것이다.

 

이러한 송시열의 거조에 호응하여 송준길 또한 ‘병사(兵事)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일은 병행해야 하다. 지금 사세로는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이 더욱 중요한데도 본말이 도치되어 있으니 시골 노인들까지도 이 문제를 이야기 한다.’고 했다.

 

이처럼 서인 집권세력의 영수 송시열·송준길이 나서서 효종의 북벌론을 근원에서부터 흔들어 놓으니 효종은 우선 이 두 사람을 통해 서인세력을 달래게 된다. 1658년(효종 9) 효종은 찬선 송시열·송준길을 불렀는데 이 자리에서 송시열은 효종에게 ‘10년간 간절히 정신을 가다듬어 선치를 이루려 하였지만 효과가 없었으니 이유를 모르겠다.’며 효종의 북벌정책을 과감하게 비판했다. 효종은 ‘내가 정신을 가다듬었다면 다스린 결과가 어찌 이와 같겠는가? 나는 의당 자책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이나, 반드시 인재를 얻어야만 할 수 있다.’며 속내를 숨기고 송시열을 위로하고 그를 정치 일선으로 끌어내고자 했다.

 

그러자 송시열은 ‘근래 경연 석상에서 왕께서 “오늘날 씻기 어려운 수치가 있는데 신하들은 이런 것은 생각지 않고 언제나 나에게 몸을 닦으라고만 한다. 이 수치를 씻지 못하고 있는데 몸을 닦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 하였다 하니 이는 학문이 미진함을 보여 주는 것’이라며 마치 아이처럼 효종을 나무란 후 ‘몸을 닦는 것이 정사의 근본이 됨’을 재차 강조하였다.

 

이 사건 이후 효종은 송시열을 이조판서에 임용하였고 예물로 초모(담비가죽 모자)와 초구(담비가죽 옷)를 하사하기까지 했다. 요컨대 효종은 제동이 걸린 북벌정책을 다시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송시열을 정국으로 끌어들어야 했던 것이다. 효종이 자세를 낮추어 급박하게 요청해 오자 송시열은 이를 기꺼이 수용하고 출사하였으나 효종의 소망대로 북벌 정책을 후원하거나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모습은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

 

송시열·송준길 등 서인 산림의 북벌론은 애초부터 자강론이나 준비론의 차원이었으며 효종의 북벌 의지에 호응하면서 실제로는 그들이 주도하던 성리학의 의리명분론적 질서를 강화, 서인세력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고자 하였다. 요컨대 서인 산림의 북벌론이란 ‘대청 복수’가 아닌 ‘대명 의리’의 차원이었다.

 

이처럼 서인 산림의 북벌론은 ‘대명 의리’라는 명분외교론의 연장선상에서 등장한 것으로 당시 서인 산림들이 주력하던 예치론(禮治論)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주지하듯이 16세기 이래 발달해온 조선예학은 17세기 양란 이후 조선이 택한 명분론적인 사상·정치적 방향과 맞아 떨어짐으로써 최선의 발전 토양을 제공받게 되었고 이러한 배경 하에서 현종~숙종대 조선사회를 뒤흔든 양차의 예송, 곧 기해예송과 갑인예송이 일어났다. 성리학의 의리명분론이 사회윤리론으로 나타난 것이 예학이고 또 국가적 차원의 통치윤리로 나타난 것이 예치론이라면 ‘대명 의리’라는 명분외교론은 예치론의 일환으로 바라보게 된다.

 

 

 

 

효종의 죽음과 서인의 북벌 파기

 

이처럼 효종은 치세말 북벌정책이 난관에 부딪히자 송시열을 통해 북벌정책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자 동분서주하였다. 1659년(효종 10) 3월 효종은 근시를 물리치고 이조판서 송시열과 독대를 행하였는데,

 

이때에도 효종은 ‘신하들 모두 내가 병사(兵事)를 다스리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나 나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있소. 천시와 인사의 좋은 기회가 언제 닥쳐올지 모르기 때문이니 정예화된 포병 10만을 길러 기회를 봐서 곧장 산해관으로 쳐들어갈 계획이오. …… 저들은 무비에 힘쓰지 않아 요동과 심양 천리 길에 활을 잡고 말을 타는 자가 전혀 없으니 무인지경에 들어가듯 할 수 있을 것이오.’라며 변함없는 북벌의 의지를 천명하였다.

 

그러나 이로부터 2개월여 만에 효종은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된다. 31세의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라 10년간을 오로지 북벌에만 매달리다가 41세 한창의 나이에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때 효종은 귀밑의 종기를 제거하기 위한 침을 맞고 급서하였는데,

 

이즈음 효종과 서인세력의 갈등이 극히 고조된 상태에서 효종이 급작스럽게 사망하였던 점, 또 효종의 죽음 이후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 산림세력이 효종의 유지였던 북벌을 미련 없이 중지하였던 점에서 효종의 암살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효종에게 ‘북벌론’은 단순한 이념적 정치적인 구호가 아니라 양란 후 위기에 봉착한 조선의 국력을 강화시키고자 노심초사하는 젊고 열정적인 국왕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정책이었다. 반면 집권 서인들은 그들이 주도하는 성리학적 의리명분론에 의한 예치국가 조선을 꿈꾸었으니 이러한 동상이몽은 오래갈 수 없었다. 결국 효종의 죽음과 함께 서인들은 예정된 북벌 파기의 수순을 밟아갔다.

 

 

 

 

현종 말·숙종 초 남인 산림의 북벌론

 

서인들이 북벌을 파기한 이후 북벌론은 윤휴(尹鑴)·허적(許積) 등 남인들에 의해 명맥이 이어졌다. 효종대 남인들중 가장 강경한 북벌론자였던 윤휴는 서인들에 의해 파기된 북벌론을 계속 고수하였고 현종말·숙종초에는 북벌론을 강력하게 주창하였다.

 

1674년(현종 15) 효종비 인선왕후상을 계기로 갑인예송이 일어났는데 앞서 기해예송에서와 달리 이번에는 윤휴와 허목의 예설을 앞세운 남인의 예설이 승리하여 남인 위주의 정국이 구성되었다. 이렇게 남인이 우세한 정국 하에서 윤휴는 남인 예설의 주창자로서 현종의 신임을 받고 있었기에 평소의 지론인 북벌론을 거리낌 없이 주장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 청이 삼번(三蕃)의 난과 정금(鄭錦)의 난으로 위기에 봉착해 있었던 점도 북벌론 제기의 유력한 배경이 되었다. 이때 윤휴는 현종에게 비밀상소를 올려 효종의 유업 계승을 주청하였다.

 

이때 급작스럽게 현종이 사망하고 숙종이 즉위하게 되는데 윤휴는 신왕에게 다시 한 번 북벌을 주장한다. 곧 1675년(숙종 원년) 성균관 사업 윤휴는 ‘우리나라에는 10만 정병이 있고 식량도 쉽게 마련할 수 있으므로 열흘이 못 되어 심양을 차지할 수 있고 심양을 빼앗고 나면 관내(關內)가 진동할 것이니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염려가 없다’고 하였다.

 

숙종의 즉위와 함께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자 윤휴의 북벌론에도 힘이 실리게 되었다. 그는 특히 북벌을 위한 병거(兵車) 제작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북벌을 주관할 군영으로서 도체찰사부의 설치, 산성 수축, 무과 합격자의 증원 등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북벌론은 현종이나 숙종은 물론 남인들조차도 어려워하였다. 청 내부에서 소요가 일어났다 할지라도 크게 보면 청조는 안정기로 접어들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북벌론은 비현실적이고 극히 위험천만한 주장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윤휴를 지지하던 허적 조차도 ‘신은 윤휴와 견해가 다르니 윤휴는 바로 중원으로 쳐들어가려고 하고 신은 비밀히 준비하여 때를 기다리고자 한다. 누가 명을 위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만 시세로 보아 불가하다’며 북벌 반대론으로 돌아섰고 숙종도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북벌론의 최후 : ‘대의’에서 ‘당론’으로

 

이즈음 종실인 영평정(寧平正) 이사(李泗)가 윤휴의 북벌론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는 숙종초 숙종을 위시한 조선왕실이 북벌론을 바라보는 입장을 보여 주고 있어 주목된다. 여기에서는 ‘국가가 앞에는 양송(兩宋 : 송시열·송준길)에 의해 잘못되었고 뒤에는 허·윤(허목과 윤휴)에서 잘못되었다’고 전제한 후 복수설치론이 나라의 화가 되는 문제, 병거의 문제, 축성으로 인한 민원 등을 지적하였다. 숙종이 이사에게 허·윤을 비난하는 까닭을 물으니 그는 ‘효종조에 양송이 크게 임용되고 예우를 입었음에도 힘쓰는 바가 오직 당론뿐이었는데 지금 허목·윤휴도 마찬가지다’고 답하였다.

 

상기 구문은 오랜 당론 대립의 경험 속에서 조선왕실이 서·남인의 주장에 대해 그 당위성을 논하기에 앞서 우선적으로 당론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던 점을 잘 보여 준다. 애초 북벌론은 패기 가득한 젊은 신왕 효종의 ‘대청 복수’와 서인들의 ‘대명 의리’가 결합, ‘대의’의 차원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서인들이 북벌을 파기한 후 남인들에 의해 계승되는 과정에서 북벌론은 남인의 ‘당론’으로 화하게 되었다.

 

‘대의’에서 ‘당론’으로 격이 떨어진 북벌론은 곧 소멸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곧 숙종은 남인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점차 경계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 : 일명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을 일으켜 남인을 몰아내고 서인정국을 구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윤휴는 죽음을 맞게 되는데 윤휴의 죽음과 함께 북벌론 또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효종의 북벌론, 현실성 있었나

 

효종의 북벌론과 나선정벌

 

북벌론, 효종과 서인 실천 의지에 의구심

국론 통일에 효과적 수단

추후 나선정벌으로 연결돼

 

 

이성계는 1388년 음력 5월 하순. 압록강가에서 말머리를 돌렸다. 그가 탄 말의 눈빛과 꼬리짓, 울음소리는 어땠을까 떠올려 본다. 이후 이종무가 1419년에 잠시 대마도에 발을 디뎠고, 세종 때 김종서와 최윤덕은 멀리서 그림자만을 보았을 뿐이었다. 이후 조선은 ‘남정북벌’의 꿈을 꾼 적은 없다. 한정된 인식과 무능함, 현실 안주의 습성 때문이었다.

 

남한산성에서 청나라군에 포위된 채 울음을 터뜨린 인조는 포로로 끌려가 8년 만에 귀국한 소현세자를 냉대하고 그의 가족을 멸한 후에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훗날 효종)을 세자로 삼았다. 효종은 즉위 후 ‘북벌론’을 정책기조로 삼고, 실권을 장악한 서인 세력들과 추진했다. 왕을 방어하는 어영청군을 강화해 수도에 상주시켰고, 남한산성을 방어하는 수어청군도 재정비했다. 또한 기병전에 대비해 중앙군 중심으로 기병을 재편했고, 신병기들을 제조했다.

 

 

 

북벌론의 실상

 

효종의 북벌론, 현실성 있었나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효종의 ‘북벌론’을 몇 가지 관점에서 살펴본다.

 

첫째, 효종을 비롯한 서인 일파들은 정말로 실천할 의지가 있었을까?

 

함께 포로생활을 겪었지만 소현세자는 조선의 구조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백성의 삶을 위해 청을 학습하는 방식을 택했다. 반면 효종은 원한과 복수심으로 대결하는 방식을 택했다. 서인은 국력과 국제관계의 실상을 외면했고, 전쟁의 참상과 백성들의 희생을 가볍게 여긴 죄로 역사와 백성에 책임져야 할 자들이다. 그런데 반청정책과 자주성의 표방은 피해의식과 복수심, 자주라는 감성을 이용해 정책적인 과오를 반전시키고 면피하는데 효과적인 도구와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재야의 거두이자 권력자인 송시열은 효종에게 올린 《기축봉사》’에서 ‘존주대의(청을 오랑캐로, 명을 정통으로 해 중화사상을 따른다)’와 ‘복수설치(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는다)’란 북벌론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고, 이조판서로 북벌을 추진했다.

 

북벌론은 백성들이 가진 왕과 양반체제에 대한 불신과 저항을 무마하고, 전쟁의 위기의식을 일으켜 국론을 통일하는데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군사력을 재건하고, 정치력을 강화하면서 지지기반을 공고히 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이는 정통성이 부족한 효종의 이해관계와도 일치했다. 물론 이 정책의 긍정적인 점도 몇 가지 있다. 학자적 관료인 송시열은 ‘정치를 개선해 오랑캐를 물리친다(修政事以攘夷狄)’란 명분을 내걸고, 궁정사업과 토목공사를 줄여 국가재정을 건전하게 만들었다. 세금을 줄이는 등 백성들의 삶을 중요시하는 정책들도 건의했다. 하지만 실제로 백성들은 농사철에도 군사훈련에 투입됐고, 성벽과 개수공사 등에 동원되면서 농사에 차질이 많았다.

 

 

둘째, 효종세력들은 북벌정책을 실현? 또는 실천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을까?

 

국내 환경을 고려하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3만명의 전사자, 50만명 이상의 포로로 인한 군사력과 노동력의 막대한 상실, 전답의 파괴와 손실로 인한 경제추락과 국가재정의 부족 등은 전쟁 준비에 장애요인들이다. 또한 불안감과 염전 분위기의 증폭도 문제였다. 따라서 왕과 일부 양반권력자들을 빼놓고는 명분도 희박하고, 승산없는 전쟁에 동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동아시아와 만주의 국제환경

 

국제환경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임진왜란, 병자호란, 청일전쟁, 러일전쟁, 남북분단과 6·25 전쟁 등 사건들처럼 우리 운명은 국제환경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1654년 당시 명나라는 멸망(1644년)한 지 이미 10년이 됐다. 물론 복명운동이 계속됐고, 1658년에는 남쪽에서 정성공이 10만명의 병력과 전선으로 남경 근처까지 공격했다. 북쪽 몽골 지역에서는 준가르 제국이 일어나 청과 갈등을 벌이는 중이었다. 하지만 청나라는 강희제가 등극하기 직전이었고, 통일 제국을 완성하는 단계였다.

 

또한 동아시아 세계는 이미 서양세계의 구심력에 끌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임진왜란의 발생과 과정에 에스파니아와 포르투갈을 비롯한 서양세계의 역할이 있었고, 소현세자는 독일 출신인 아담 샬 등의 선교사와 교류하면서 서양의 신사상을 체험하고, 발달된 과학과 기술문명을 접촉한 후에, 이를 이식하려고 시도했었다. 인조 때 제주도에 표착한 네덜란드인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박연)는 귀화해 무기제조 등에 참여했고, 이어 표착한 동인도회사의 직원인 하멜 등도 군기 개발에 참여했고, 효종도 활용했다. 한편 북쪽에서는 몽골의 지배를 벗어난 러시아가 17세기 중반부터 헤이룽강(아무르강) 일대에 진출해 부가가치가 높은 담비 가죽을 비롯한 모피 등의 자원을 획득하고, 식민단을 정착시켜갔다. 한편 청나라도 북진하면서 북만주의 삼림과 헤이룽강 상류의 다구르족, 예벤크족 등의 소수 종족과 전투를 벌였다(윤명철, 《유라시아 세계와 한민족》).

 

 

따라서 헤이룽강 일대에서 청과 러시아의 충돌은 시간문제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조선은 청나라와 전면전은 고사하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는 전술적인 공격조차 불가능했다. 더구나 명에서 청으로 바뀌었을 뿐 모화사상은 깊게 뿌리내렸기 때문에 절대권력을 가진 왕과 양반 사대부들이라 해도 정치생명과 직결된 모험을 추진했을 가능성은 없다. ’북벌론‘은 명분과 윤리라는 관점에서는 시대의식과 필요한 행위일 수 있지만, 실천이 아닌 명분상의 자존심 회복, 정권안정이라는 내부용일 가능성이 크다. 결국 훗날 숙종과 대원군 등처럼 망상과 백성을 억압하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는 선례를 남겼다.

 

가정해 본다. 만약, 만의 하나라도 북벌론이 추진됐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했을까? 수많은 백성이 살육되고, 포로로 끌려갔으며, 어쩌면 독립마저 상실하고 청 제국의 일개 성(省)으로 변했을지도 모른다.




나선정벌의 발발

 

그런데 역사에서는 때때로 우연이 발생한다.

 

북벌준비는 ’나선정벌‘이라는 기묘한 사건으로 변형됐다. 러시아와 전투를 벌이며 패배하던 청나라는 북벌론으로 강해진 조선군의 화포 등 무기 수준을 시험하고, 전투력을 소진할 목적으로 조창 사용에 능숙한 병사들의 파견을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조선과 러시아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조총군 100명과 초관(哨官) 50여 명은 두만강을 넘어 1651년 1월에 모란강(牧丹江) 상류의 발해 상경성인 영고탑(영안현)에 도착해 청군 3000여 명과 합세했다.

 

연합군은 북상하다가 혼동강(송화강의 하류)에서 러시아군 400~500여 명과 7일간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뒀다. 청나라는 1658년에 다시 파병을 요청했고, 신유(申瀏)는 조총군 200명과 초관 60여 명을 거느리고 출진해 두만강을 건넜다. 영고탑에서 출발한 연합군은 북상해서 6월 10일에 헤이룽강과 송화강이 만나는 동장(同江)시 외곽의 강위에서 10여 척의 선박을 타고 러시아 전선과 맞붙었다. 조선의 제안으로 화공을 가해 적선 12척 가운데 11척을 침몰시키고, 지휘관인 '스테파노프'와 병사 270여 명을 죽였다(계승범,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조선군은 조총의 위력을 실증하면서 실전 경험을 쌓는 전과를 얻었고, 북벌작전에 필수적인 교통망도 샅샅이 탐지했다. 

 

나는 나선정벌을 활용하는 조선 정부의 정책을 이렇게 가정해 본다. 청나라의 붕괴 등 국제질서의 변환기에 동만주, 북만주의 일부, 우수리강, 아무르강 유역으로 진출할 가능성도 점검한다. 자연자원과 종족들을 조사하고, 호란 직후에 개시된 회령개시 등의 북관무역을 확장하고 주도한다. 신유가 표현한 대로 강력한 러시아(신유, 《북정록》)와 외교관계를 맺을 기회도 포착한다. 만약에 이러한 후속 작업을 충실히 실천했다면 나선정벌은 ’꿈‘을 넘어 북벌론을 ’현실‘로 탈바꿈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실용적 사고를 하는 정약용마저 ‘나선 정벌’이라고 말할 정도로 과대평가됐지만, 조선의 변화는 고사하고, 붕괴를 막는 데도 교훈을 주지 못한 단발적인 전투로 끝나버렸다. 

 

냉정하고 과학적이기 그지없는 역사의 세계에서도 때론 터무니없는 ‘꿈’이 현실로 드러난 예들이 적지 않다.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과 헬레니즘 문화, 칭키즈한의 대몽골, 이민자들이 만든 미국,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등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세계는 중국의 분열과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의 실패를 단정했다. 이러한 감성적인 시류에 부화뇌동한 한국의 ‘그들’은 부국강병에 태만했고, 지금은 굴복한 모습마저 보인다. 

 



















북학은 조선 후기, 청나라의 문물·제도 중 일부를 수용하여 조선의 현실 개혁을 추구하였던 기술론이다. 중원을 차지한 청나라의 번영이 예상과 달리 한 세기를 넘어가자 조선 지배층은 청나라가 ‘중화 문물’을 훔쳐서 지니고 있다는 논리를 만들었다. 이런 맥락에서 연암일파는 중화 문물을 도입해야 한다는 논리로 청나라 제도의 도입을 주장하였다. 북학의 내용은 벽돌과 수레의 사용, 농기구의 개량, 대외 무역의 장려 등이었는데, 그 이상의 체계적인 경세론으로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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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 청나라의 문물 · 제도 중 일부를 수용하여 조선의 현실 개혁을 추구하였던 기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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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배경

17세기 전반, 청나라에 의해 군사적으로 정복되고 국왕이 항복하는 치욕을 경험한 데다가, 그렇게 했던 청나라가 명나라를 대신해서 중원을 장악하자 조선의 지배층은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무엇보다 종족, 지역, 문화의 측면에서 중화의 위상을 독점하고 있던 명나라가 사라지고 청나라가 중원을 장악함으로써 중화 질서의 붕괴를 초래하였기에 중화와 이적(夷狄)의 구분에 큰 혼란이 발생하였다.

 

당시의 시점에서 세 가지의 논리가 가능하였다. 첫째, 이적이 중원을 차지하였으므로 중원까지 '오염'되었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논리에는 중원에서 중화가 사라졌기 때문에, 다른 공간에서 중화를 새로 설정해야 한다는 과제가 남는다. 둘째, 이적이 중원에 들어가서 중화되었다는 논리이다. 셋째, 화이관(華夷觀)주1의 폐기 가능성의 논리이다.

 

하지만 조선의 지배층은 시대적인 상상력을 초월해야 하는 셋째는 물론이고, 둘째 논리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복수설치(復讐雪恥)의 대상인 청나라를 중화로 인정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16세기 이후로 중화의 가치를 명나라에 버금가게 구비했다고 자부해 온 조선의 지배층으로서는 중원의 문물 · 제도 · 학술까지 모두 오염되었으며, 이제 조선만이 천하에서 유일하게 남은 중화의 계승자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웠다.

 

이 같은 중화 계승 의식의 전개와 강화 속에서 조선의 지배층은 오직 조선에서만 중화 문물을 징험(徵驗)할 수 있다고 여기면서 타국의 문물은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까지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이적이 중원을 차지하고 있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런데 중원을 차지한 지 한 세기가 지난 18세기 중엽 이후로도 청나라의 번영이 지속되자 조선의 지배층은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청나라의 몰락을 기대하기보다는 청나라가 중원에서 한 세기 넘도록 번영하는 현실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조선 지배층 일부는 청나라와 청나라 문물을 분리해서 이적이 중화 문물을 훔쳐서 지니고 있다는 논리를 제시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면 청나라가 장구하게 번영하고 있는 현실을 청나라가 이적이라는 사실에서 찾아야 하는 곤혹스러움을 피하면서, 그들이 강탈한 중화 문물 덕분으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전통적인 화이관을 견지하면서도 청나라가 백 년 넘게 번영하고 있는 현실을 모순 없이 설명하기 위해 청나라와 청나라 문물을 구분한 것이다.

 

이 같은 논리에서라면, 중원의 문물 · 제도 · 학술이 청나라의 중원 장악과 더불어서 함께 오염되었다는 기존의 인식에는 변화가 불가피하며, 이 논리를 좀 더 확장할 경우 오염되지 않은 중화 문물 덕에 이적이 중화되었을 가능성까지 고려할 수 있었다.

 

중화 문물이 오염되지 않고 중원에 보존되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견이나 청나라가 중화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지 확인해 보라는 당부가 조심스럽게 표출되기 시작한 것은 이런 배경 속에서였으며, 북학 역시 이런 변화된 상황을 등장 배경으로 삼고 있었다. 오염되지 않은 중화의 문물이라면 조선이 그것을 도입하는 데 주저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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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일파의 연행과 현실 인식

청나라의 문물 · 제도 일부를 들여오자고 주장한 인물들을 총칭해서 북학파라고 한다. 가장 잘 알려진 인물군은 홍대용(洪大容), 성대중(成大中),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이덕무(李德懋), 이서구(李書九), 이희경(李喜經) 등을 포함한 연암일파(燕巖一派)이다.

 

북학이라는 용어도 박제가의 저술 『 북학의(北學議)』와 유득공이 지은 「열하관에서 야정시랑에게 화답하며 주다(熱河館中和贈冶亭侍郞)」의 시구 “북학을 생각하다(思北學)”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들은 당색과 적서(嫡庶)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략 1760년대 후반부터 도성의 백탑(白塔)주4을 중심으로 서로 이웃하면서 친밀한 동인 집단을 이루었으며, 연행의 경험도 공유하고 있었다.

 

특히 1778년(정조 2)에는 박제가와 이덕무가, 1790년(정조 14)에는 박제가와 유득공과 이희경이, 1801년(순조 원년)에는 박제가와 유득공이 연행에 동행하였으며,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북학의』, 「입연기(入燕記)」, 『열하기행시주(熱河紀行詩註)』, 『 연대재유록(燕臺再遊錄)』, 『설수외사(雪岫外史)』 등을 남겼다.

 

연암일파의 중심 인물인 홍대용과 박지원은 인간과 사물의 본성을 같다고 여기는 노론 낙론(洛論)주2의 학맥에 속하였는데, 홍대용은 18세기 후반 낙론의 종장(宗匠)이 된 김원행(金元行)의 문인이었고, 박지원은 18세기 전반 낙론을 대표하는 어유봉(魚有鳳)의 사위인 이보천(李普天)의 사위였다. 이런 점 때문에 하늘의 입장에서 인간과 사물을 균등하게 보는 듯한 「 의산문답(毉山問答)」의 관점이나 박지원의 인물막변(人物莫辨)의 논리가 낙론의 사유 구조에서 기인하였으며, 나아가 여기서 청나라에 대한 재인식 및 북학의 논리가 나올 수 있었다는 설명이 제시되었다.

 

하지만 「의산문답」의 저술 의도는 모호하며, 낙론에서의 사물은 외물을 지칭하는 말로 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과 이적 · 금수의 본성이 그대로 같다고 인식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홍양호(洪良浩)와 같은 낙론과 무관한 인물들도 북학을 주장하고 있었고, 이익(李瀷)이나 정범조(丁範祖)와 같은 낙론과 무관한 인물들도 청나라를 재인식하고 있었던 점을 고려할 때 북학의 사상적 배경으로서 낙론만을 강조하기는 어려우며, 연행의 경험 및 18세기 중엽 이후 청나라의 장구한 번영을 설명하려던 문제의식을 먼저 고려할 필요가 있다.

 

홍대용은 연행 이전에 이미 청나라가 백 년 동안 태평을 누렸으니 그 규모와 기상을 볼 만하다고 여겼고, 박지원도 만주인들이 중원에 들어온 지 100년이 되니 한인과 다를 것 없이 맑고 단아해져서 문약(文弱)해졌다고까지 보았다. 결국 청나라의 장구한 번영을 설명하기 위해 성대중과 박지원은 18세기 후반 조선의 다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청나라 문물과 청나라를 구분하면서 청나라의 중원 장악과 장구한 번영이 그들이 강탈한 문물에 기인한 것이라고 정리하였다.

 

박제가 역시 같은 입장이었기에 성대중, 박지원, 박제가에게 있어서 이적이 강탈한 문물은 필요할 경우 이적을 매개로 해서라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되었다. 그것은 이적의 문물이 아니라 예부터의 중화 문물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박지원, 박제가는 북벌의 형식적인 구호조차 견지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그것은 냉철하고 정확하게 청나라의 정세를 관찰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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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의 내용과 평가

북학은 청나라의 장구한 번영을 경험한 18세기 후반의 지식인들이 드러낸 지적 대응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홍대용이 「 임하경륜(林下經綸)」에서 주장한 개혁론이나, 박지원이 「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에서 주장한 한전제(限田制)주5는 근기남인(近畿南人주3)의 경세론(經世論)에 비하면 꼼꼼하지 못하고 간략하며, 독창성이 뛰어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북학이 연암일파가 지닌 학풍의 성격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박지원의 『 열하일기(熱河日記)』와 박제가의 『 북학의(北學議)』는 북학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낸 저술이다.

 

북학의 주 내용은 벽돌과 수레의 사용, 농기구의 개량, 둔전의 설치, 대외 무역의 장려, 서양인의 초빙 등 실제적인 농 · 상업 기술론이었는데 서양의 기술은 배우고 기독교만 막자는 박제가의 주장에서 드러나듯 기술 도입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론은 미비하였으며 조선의 실정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였다.

 

예를 들어서 박지원과 박제가는 수레 사용을 확대함으로써 지역 간의 가격 차이를 해소하여 민간을 이롭게 하고 국가 재정을 확충시키자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17세기 수레를 이용한 평안도 화물 운송 체계의 개선 시도나 18세기 화물용 수레의 토목공사 투입 등에도 불구하고 수레의 사용이 부진하였던 것은 산지가 많은 지리적 조건 및 해 · 수로 중심의 운송 체계가 발달해 있던 조건과 관련된 결과였다. 즉, 수레를 통한 운송은 도로망의 구축과 유지 · 보수는 물론 수레를 끌 가축의 확보가 전제되어 있지 않으면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

 

가축이 확보되어도 먼 거리가 아니면 물품을 그냥 가축에 싣고 가는 게 효율적이었고, 먼 거리라면 선박을 이용하는 것이 나았다. 수레 사용의 확대를 강하게 주장하려면 이런 점에 대한 종합적인 고려가 우선되었어야 하지, 유득공의 말처럼 한번 호령하면 될 일도 아니었고, 박지원과 박제가의 주장처럼 수레가 도입되면 도로는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박지원과 박제가는 조선의 짧은 자루 호미를 이용한 농사일의 비효율성을 비난하면서, 중국식 긴 자루 호미의 편리함과 효율성을 극찬하였다. 그에 비해서 『 천일록(千一錄)』의 저자인 우하영(禹夏永)은 조선식 호미를 활용한 잡초 제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호미질을 많이 함으로써 흙덩이가 부드럽게 되고 곡식의 뿌리가 잘 퍼져나간다고 설명하였다.

 

본디 긴 자루 호미는 지표면 위의 풀을 제거하면서 흙을 움직여 토양 내 수분 증발의 통로가 되는 모세관을 차단하는 한편, 지표면 아래의 흙은 건드리지 않음으로써 땅속의 수분을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된다. 이것으로는 땅을 뒤집어엎음으로써 잡초를 뿌리까지 제거하거나 흙덩이를 연화시키는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다. 오늘날까지 한반도에서 단연 짧은 자루 호미 사용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조선의 실정에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어 사용을 주장할 정도로 모화적(慕華的) 성격이 강했던 박제가에 대해서 이덕무가 우리와 다른 중원의 풍속을 사모하는 것이 한스럽다고 경계하였던 것이나, 서유구가 중국의 농업 기술을 도입할 때도 그 기준은 오직 조선의 현실에 적용 가능한지의 여부에 두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음을 감안하면, 연암일파가 동일한 지향점을 지닌 학술 공동체였는지에 대한 판단은 신중하게 내려야 한다.

 

19세기 이후로도 북학의 유산 일부가 다음 세대에 전해졌지만 이론적 체계를 지닌 경세론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은 이런 한계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중화 계승 의식, 대명 의리론, 북벌론이 일체화되었던 사상적 경향에 균열이 생기고, 18세기 이후 북벌론이 중화 계승 의식과 대명 의리론으로부터 분리되어 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되며, 19세기 말의 개화파와도 인적 계보로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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