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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톨트 브레히트 서사극, 낯설게 하기 기법

Jobs9 2022. 9. 26.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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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문단에서 논의되는 작가중에서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를 빼놓을 수 없다. 브레히트는 시, 산문, 희곡, 소설 등 다양한 장르에서 작품활동을 했지만, 브레히트 문학의 중심은 연극이었으므로, 자신도 '극작가'로 불리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희곡분야에서 소위 서사극의 창시자로 전 세계의 영향을 끼쳤다. 

 

그의 천재적인 연극 재능과 재치있는 언어 구사능력은 현실을 예리한 시선으로 풍자하는 것과 더불어 더욱 작품은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구체적인 작품소개에 들어가기 앞서 우선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의 생애를 살펴보겠다.

 

브레히트는 1898년 아우구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중류 이상의 생활환경 가운데서 소년시절을 보낸 브레히트는 1917년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통과하고, 16세 때인 1914년 8월 17일부터 이미 향토지 『신 아우구스부르크』에 그의 글이 게재되기 시작했다.

 

이미 뮌헨대학에서부터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 이후에는 뮌헨과 베를린을 주된 무대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게 된다. 1919년 『민중의 의지』지에 아우구스부루크 시립극단의 연극평을 싣기 시작하였다. 지방도시의 전형적인 부르주아 연극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이미 후년의 브레히트 연극 세계를 예감케한다.

 

1924년 베를린으로 이주한 브레히트에게 대도시의 경험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대도시의 차가움, 비인간성 등의 체험은 그의 최초의 시집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그러나 1926년을 중심으로 브레히트는 『자본론』을 접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대하게 된다. 노동자 계급에 공감하고, 나중에 그의 예술창작을 규정할 기반으로서 마르크스를 연구한 후, 인간이 자본주의 하에서는 노동이란 상품으로 전락했으며 인간의 본질을 잃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브레히트 문학의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된다.

 

이시기의 특징은 유물론적인 시각과 불완전한 변증법, 계급간의 갈등 등을 주로 다루고 있다. 이런 것은 시적 자유주의를 억제하여 브레히트적 문학세계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시기가 된다.

 

이런 브레히트의 자기 독자적인 급진적 입장은 망명 초기인 1933년까지 지속된다. 그러면서 이미 모든 문학장르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게 된다.

 

 

 

1933년 2월, 나치 세력의 권력 장악과 더불어 좌파 지식인 작가에 ?한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몰아쳤다.그리하여 나치 체제에 비판적이던 수많은 지식인 작가들이 나치 세력의 탄압을 피해 조국을 떠나 정처 없는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이미 10여년 전부터 나치 집단의 비인간적인 만행을 신랄하게 풍자하던 브레히트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아내 헬레네 바이겔과 아들 슈테판을 데리고 독일을 떠나 체코의 프라하로 피난, 이 때부터 덴마크, 핀란드, 미국, 스위스 등의 나라들을 넘나들며 15여년 간의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이 망명의 시기는 브레히트의 원숙한 문학론이 결실을 맺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사회주의 국가 자체가 지닌 모순과 싸우면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적 자세는 일관적으로 유지하였다.

 

나치스에 쫓겨 거의 15년 간을 다른 나라에서 떠돌면서 브레히트는 1947년 최종 망명지인 미국에서 유럽으로 다시 돌아 왔다. 분단조국 독일의 사회주의 체제아래 동베를린의 독일 극장, 쉬프바우어담 극장에서 전속 극단에서 자기의 작품들과 서사극 이론을 실제 무대에 적용시키는 작업에 몰두하던 그는 정착한지 10년도 채되지 않아 1956년 8월 14일 『갈릴레이의 생애』연습도중 심근경색증으로 사망하였다.

 

그가 사회주의 체제의 동독으로 간 것은 소망하던 자기 극장과 극단을 제공받은 것과 함께 그의 마르크스주의적 사회 의식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1949년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을 상연하여 서사극적 작품의 '낯설게하기 기법'으로 획기적 성공을 거두었을 때, 서사극은 전후 유럽극계의 새로운 사조가 되었다. 서사극 이론을 무대 실천을 통하여 이루려던 것은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끝나 버렸다.

  

 

'서사극'과 '낯설게 하기' 기법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은 변증법의 연극을 지향한다. 그가 죽음으로써 완성을 보지 못한 '서사극'은 서사적 연극, 혹은 변증법적 연극을 말한다. 기존의 연극이라는 환상을 채워보려는 현실의 좌절이나 불만을 브레히트는 서사성을 가미함으로써 연극에 놓여 있는 상황에 관객이 빠져들지 않도록 감정이입을 중단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서사극은 감정이입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깨우는 연극을 말하며 그런 의미에서 비(非)아리스토텔레스 연극이론이라고도 불리워 진다. 극단적으로 동화되지 않는 표현법이 서사극적이다. 

 

브레히트는 서사극에서 어떤 인물의 행동을 보여주기는 하나 그 행동이나 상황을 낯설게 해서 두드러지게 하는 효과를 추구한다. 어떤 사건이나 행동의 어느 한순간, 혹은 하나의 상황을 두드러지게 돋보이게 만드는 낯설게 하기의 수법은 우리가 일상적인 것으로 넘겨버리기 쉬운 사실에 대하여 한번 더 문제를 제기해 보는 방법이다. 낯설고 두드러져서 우리의 주위와 관심을 환기시키는 이 수법은 일상적인 사실을 역사적 대사건처럼 거리를 두고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새롭게 보이게한다. 동시에 그와 반대로 위대한 인물을 가능한 평범한 사람의 차원으로 끌어내려서 우리의 이웃처럼 가까이에서 바라보게 하는 작용도 한다. 그렇게 하여 우리의 고정관념에 있던 사건이나 인물이나 상황이 더 눈에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그것들은 새로운 관점의 척도에 따라 평가되어진다.

서푼짜리 오페라

  



서푼짜리 오페라 공연장면

 



코카서스의 백묵원 중 재판 장면

 

 

브레히트는 시대에 대응할수 있는 객관적 인식의 각성과 비판의 예술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그의 문학적 이념은 하나의 사조가 되면서 아직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Bertolt Brecht

독일의 극작가, 시인, 연출가


출생 1898년 2월 10일
아우크스부르크
사망 1956년 8월 14일
동베를린
국적 독일 제국
동독 (1949 - )
바이마르 공화국
오스트리아 (1950 - )
언어 독일어
직업 극작가, 작사가, 각본가, 무대 연출가, 시인, 리브레토 작가, 문학 평론가, 작가, 저자, 영화 감독, 감독
활동기간 1918년 ~ 1956년
장르 극작, 희곡, 시문학
자녀 Stefan Brecht, Hanne Hiob, 바바라 브레히트 샬, Michel Berlau, Frank Banholzer

 

Bertolt Brecht (1898 – 1956)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독일의 시인이며 극작가이자 연극 개혁가였다. 소년기에 시를 쓰기 시작한 그는 1917년 가을 뮌헨 대학교 재학 중 1918년 10월-1919년 1월 9일에 걸친 짧은 군복무를 마친 뒤, 의학 공부를 버리고 창작과 연극의 길을 택했다.

1933년 히틀러가 권좌에 오르자 독일을 떠나 15년이라는 긴 망명길에 올랐다. 1947년 미국에서는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아 반미활동조사위원회의 청문회에 서지만, 혐의를 벗고 스위스로 갔다. 브레히트는 1949년 동독을 종착지로 선택하고 동베를린에서 극단 베를린 앙상블을 창설했다.

브레히트는 극작가이기에 앞서 탁월한 시인이었다. 시인 미하엘 호프만은 그의 시가 “지적이고, 압축적이고, 각색이 용이하여 연극에 쓰였더라도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적인 시로서 기능한다”고 평했고,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브레히트는 현존하는 독일 작가 중 가장 위대한 시인이며, 극작가로서는 아마도 전 유럽에서 가장 뛰어날 것”이라고 극찬했다. 

 


독일의 극작가, 시인, 그리고 연출가다. 주로 사회주의적인 작품을 연출했으며, 낯설게 하기라는 개념을 연극 연출에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표현주의를 거친 신즉물주의적(新卽物主義的) 스타일로, 현실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과 풍자를 극화한 니힐리스트이다. 후에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생애
독일 바이에른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지공장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뮌헨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동안은 뮌헨에 있는 병원에서 잠시 일했다.
전쟁이 끝난 뒤 뮌헨에서 극작가·연출가로 출발하여 후일 베를린으로 나가 막스 라인하르트의 독일 극장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첫 희곡 《바르》(1918)와 이어서 제2작 《밤의 북[鼓]》(1919)으로 클라이스트 상을 받았고, 《도시의 정글 속에서》(1923)와 《서푼짜리 오페라》(1928)로 극단에 결정적인 지위를 굳혔는데, 《서푼짜리 오페라》는 무려 100회가 넘는 공연이 베를린에서 있었다. 
초기에는 무정부주의자였으나, 나중에는 전쟁 체험을 통해서 자기의 계급에 등을 돌려 차츰 혁명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인 브레히트는 부르주아의 탐욕을 드러내는 극본과 사회주의 소설 《서푼짜리 소설》을 집필하는 좌파작가로 활동했다. 1933년 극우정당인 나치의 집권과 나치가 좌파탄압을 위해 날조한 사건인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으로 미국에 망명했다. 망명 중에 집필한 《제3제국의 공포와 비참》, 《갈릴레이의 일생》(1938),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1939), 《코카서스의 백묵원》(1944) 등의 상연으로 새로운 연극의 길을 제시하였다. 

세계 대전이 끝난 뒤, 미국에서도 1947년 12월 극단적인 반공주의인 매카시즘이 불어 브레히트는 다시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으로 이주해야 했다. 당시 많은 동료 좌파작가들이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을 택했지만, 그만은 동독을 택했다. 하지만 동독 공산당(SED) 간부들이 관료주의에 물들어 있던 동독도 그에게 만족을 주지는 못하여 풍자시를 쓰기도 했으며, 정부가 인민을 버렸다면서 1953년 동독 노동자 봉기 진압을 비판하기도 했다. 1956년 8월 지병인 심장병으로 숨을 거두었으며, 가족으로는 1929년 결혼한 아내 헬레네 바이겔과 두 자녀(슈테판, 바바라)가 있다. 

주요작품

브레히트의 주요 시 작품으로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 〈1492년〉등이 있다. 그의 작품들은 기존 가치관에 대한 비판의식, 인간에 대한 사랑,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평화주의가 담겨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실례로 시 〈1492년〉은 이민을 심사하는 판사가 일부러 쉬운 문제를 내서, 가난한 이탈리아인 가족의 입국을 허용한다는 내용이다.) 

희곡
브레히트는 처음엔 표현주의 작가로 출발하였으나 후일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추구하게 되었다. 첫작품인 <바알>, 출세작이 된 귀환병극(歸還兵劇) <밤의 북>, 인간소외의 문제를 앞세운 <도시의 정글>에는 아직 안비바렌트한 도취나 익살, 조소의 빛이 강하지만 차츰 마르크스주의로 기울어져, 대상에의 거리적(距離的)인 태도는 사회적인 인식을 구하는 새로운 서사적 연극의 주요한 수법인 이화효과(異化效果)를 낳았다. <사나이는 사나이다> 그리고 실지교시(實地敎示)를 중시한 일련의 교육극의 시도는 이미 그러한 지향(志向)을 보인 것이다. 단순한 정감에 흐르지 않는 음악과 극의 새로운 종합을 구하는 방향은 작곡가 바일의 협력을 얻어 <싸구려 오페라>(1928)와 <마하고니시의 흥망>(1930)을 낳았다. <도살장의 성 요한나>와 <모친>은 정치적으로 가장 첨예한 극이다. 불우한 망명생활 중 그의 연극론은 차츰 체계화되었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걸작 <배짱 센 어머니와 그 아이들> <푼틸라 나리와 하인 마티> <사천(四川; Szechwan)의 선인(善人)> <코카서스의 백묵원(白墨圓)> <갈릴레이의 생애> 등을 연달아 집필, 전후에는 동베를린으로 넘어가 베를리나 앙상블을 결성하고 실제의 연극활동을 통해서 그의 연극의 혁신적인 의의를 무대 위에서 입증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모았으나 변증법적 연극으로 발전시키는 도상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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