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 한국사/조선

조선 후기 신분제, 서얼, 중인

Jobs 9 2024. 1. 2.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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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가), (나) 신분층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오래도록 막혀 있으면 반드시 터놓아야 하고, 원한은 쌓이면 반드시 풀어야 하는 것이 하늘의 이치다. (가) 와/과 (나) 에게 벼슬길이 막히게 된 것은 우리나라의 편벽된 일로 이제 몇백 년이 되었다. (가) 은/는 다행히 조정의 큰 성덕을 입어 문관은 승문원, 무관은 선전관에 임명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들 (나) 은/는 홀로 이 은혜를 함께 입지 못하니 어찌 탄식조차 없겠는가?


① (가)의 신분 상승 운동은 (나)에게 자극을 주었다. 
② (가)는 수차례에 걸친 집단 상소를 통해 관직 진출의 제한을 없애 줄 것을 요구하였다. 
③ (나)에 해당하는 인물로는 정조 때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된 유득공, 박제가, 이덕무 등이 있다. 
④ (나)는 주로 기술직에 종사하며 축적한 재산과 탄탄한 실무 경력을 바탕으로 신분 상승을 추구하였다.

【해설】 정답 ③ 
(가)는 서얼, (나)는 좁은 의미로서의 중인, 즉 기술관
③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된 인물들은 서얼 계층

 


● 중인층의 사회적 제약과 신분상승 운동

(1) 서얼
- 서얼은 양반의 소생으로 인구비중은 높았으나 성리학의 명분론에 따른 서얼금고에 의해 전문기술직 이외에는 벼슬길이 법제적으로 막혀 있었다.
- 양반중심 사회구조에 가장 먼저 도전을 시작하였다.
- 서얼통청운동(청요직 진출)을 전개하여 정조 때 정유서얼허통절목을 발표를 계기로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 등 서얼이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되었다.
- 1851(철종2년) 신해통공조치로 사관등용에 조치가 취하여져 서얼 문과 합격생의 승문원분관이 허용되어 완전한 청요직허통이 이루어졌다.

(2) 중인(기술관, 서리)
 - 중인은 인구 면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였다.
- 중인은 법제상으로는 문, 무과 응시가 가능하고 문관으로 나갈 수 있게 되어 있었으나 중인과 서얼은 전문기술직에 함께 참여하기 때문에 중인과 동류로 취급되어 천대를 받아 실제로는 청요직 임용이 막혀 있었다.
- 가계를 정리하여 족보를 만들었고, 서얼허통에 자극받아 1850년 대대적인 연합상소운동을 벌였으나 그 세력이 미미하여 실패하였다.


● 중인 계층의 성장
 : 지위를 상승시키고 양반으로 진출하는 것이 확산되었고, 향촌사회에서 재력을 이용하여 향안에 오르기도 하고 나아가 수령과 밀착하여 기존의 재지사족의 권위에 맞설 정도로 성정하고 있었다.

(1) 중인들의 성장과정
- 17세기 : 신분 고착화에 따른 비분강개로 표현되는 의식화 과정이 진행됨
- 18세기 : 직접 신분상승 운동을 전개하여 사회적, 문화적 영역을 확대하는 시기
- 19세기 새로운 시대사상으로 부상한 북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받아들이고 시인이나 문사로 자족하던 문화적 자기표현에서 경사까지 아울러 학습하여 지적 역량을 확대함으로써 士로 자처하기에 이르렀다.
- 개항 이후의 중인 : 서구의 근대문물을 수용하는 데 양반보다 앞서 나갔고, 서양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하였다. 급진적 개화파가 대부분 중인층에서 나왔으며 뒷날 친일파가 많이 나타났다. 이것은 중인이 전문가로서의 공리적 출세지향적 기질과 관련이 있다.

(2) 의관, 역관, 산관, 운관, 화원 등의 중인 계층
- 특히 수령으로 진출하였다. 조선 전기에도 의관 같은 중인들은 일정기간을 근무한 후에는 동반으로 올려주거나 간혹 공로에 따라서 수령 등에 임명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조선 후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 조선 후기를 중심으로 중인출신 수령은 217명 이상이 347개 관직 이상을 차지하였다. 그 중 의관출신이 과반수를 차지하였다. 다음으로 역관, 주학(=산학), 운관, 화원출신의 수령이 있었다. 화원은 임금의 초상을 그린 공로로써 특별한 은총으로 수령에 제수되었으나 그때마다 양반들의 혹평을 받았다.

 

● 중인 계층의 신분상승 운동

(1) 세 갈래의 신분상승 운동
- 이들의 신분상승 운동은 상호 밀접한 연계선상에서 상호 지지와 경제적 지원을 통해 연대 발전하고 있었다.
① 서얼들이 주도하는 정치운동 성격의 통청운동
② 기술직 중인들이 주도하는 경제운동
- 한의사, 통역관 등 기술직 중인은 그 직업적 특수성에 힘입어 새 시대에 각광받는 직업적 전문성으로 신분상승의 중요한 요인인 재력의 토대를 닦았다.
- 연행사의 수행원으로 사무역에 종사함으로써 막대한 축재를 한 거부가 출현하였다. 박지원의 허생전에 등장하는 변승업은 이러한 부자로 실존 인물이었다.
 - 이들은 중인 계층의 최상층으로서 지하경제를 좌우하면서 재정적 후원자의 역할까지 담당하였다.
③ 서울의 이서리층인 경아전들이 주도하는 위항문학운동
- 18세기 후반 규장각 서리가 중심이 되어 위항문학운동을 대대적으로 확대시켜 나가 18세기말 옥계시사는 위항문학운동의 정점이었다.

(2) 정부나 양반사대부 계층의 대응
- 기술직 중인의 경제활동에 대해서는 지하경제를 촉진시켜, 국가 경제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반체제적 행위로 간주되었다.
- 서얼층의 통청운동은 당초 이들이 신분 하락시켰던 근본 의도가 양반 사대부층의 특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자기도태 작업이었던 점에 비추어 볼 때 원인 무효를 겨냥하는 위험 부담으로 여겨졌다.
- 이서층인 경아전 중심의 위항문학운동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었다. 이는 조선왕조의 방향성에 부합될 뿐만 아니라 중인계층의 사회운동에 돌파구로 작용할 수 있다는 인식에 기인하였다. 나아가 양식있는 사대부들은 문화의 저변확산이라는 점에서 적극 후원하였다. 이는 문화국가라는 기본 전제에서 전후 복구사업을 추진한 조선 후기 사회가 18세기 영 ∙ 정조시대 문예부흥기를 이루어낸 대세와 표리관계로 그 맥락을 함께 하는 현상이었다.

(3) 의의
 - 특히 중인 중에서도 역관들은 청과의 외교 업무에 종사하면서도 서학을 비롯한 외래문화 수용에 있어서 선구적 역할을 수행하여 성리학적 가치 체계에 도전하는 새로운 사회의 수립을 추구하였다.
- 이들 중간계층의 활동은 농민들의 움직임과 더불어 조선 후기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양반사대부계층에 대체되는 사회세력으로 성장하여 갔다.

(4) 한계
- 기술관료라는 체질적 한계성으로 인하여 자기 학문화하였던 북학을 방법론으로만 이해함으로써 사회변혁세력화에 취약점을 갖고 있었다.
- 북학사상을 완전 체득하고 새로운 사회의 이념 창출이나 방향성 제시에까지 이르려면 상당한 기간이 필요하였는데 일제의 강점으로 그 역동성은 좌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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