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유대인 추방, 알함브라 칙령, 레콩키스타, 무슬림 앞잡이 유대인
레콩키스타 이후의 가톨릭 국가 스페인
한때 이베리아 반도 거의 전체가 이슬람 세력에게 정복당했다는 사실은 스페인인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겼다. 비록 어쩔 수 없이 개종했고, 레콩키스타 이후 가톨릭으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그리스도교의 수호자'로서의 정통성을 강조했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이는 스페인의 정통성과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그래서 스페인은 더욱더 철저한 원리주의적 가톨릭 국가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각지의 유대인이나 무어인을 철저하게 추방하려고 했다. 무어인이야 말할 것도 없고 유대인은 이슬람 지배기간 동안 그리스도인들에 비해 훨씬 많은 자유를 부여받으며 무슬림들의 앞잡이 노릇을 해 왔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들과 무어인들도 감시받았으며 17세기 초에는 펠리페 3세에 의해 약 270,000명의 모리스코(가톨릭으로 개종한 무어인)들이 추방되었다. 금융, 의료, 상업, 공업 등 소위 전문직에 종사하던 유대인들과 무어인들의 대량 추방으로 인해 스페인은 종교적 열망과 국가 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은 세울 수 있었지만 그 대신 경제와 사회 구조가 무너졌다. 당장 <알함브라 칙령> 이후에도 지역 농민 인구의 과반수 가까이가 개종한 무어인, 즉 모리스코였던 발렌시아나 무르시아 같은 지방은 노동 인구부터 급격히 감소했으며 이렇게 경제적 활동도 종교에 따라 분화되어 있었던 이베리아반도에서 전문직들이 다 추방당하자 스페인 고유의 상업적 경쟁력은 기반부터 무너졌다. 이후 스페인은 신대륙 개척의 첨병에 나서 엄청난 양의 귀금속과 이에 맞추어 부상한 카스티야의 양모, 안달루시아의 농작물 등 산업의 부흥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유통하고 관리할 금융, 상업 계층의 부재로 인해 전부 제노바 공화국에 아웃소싱할 수 밖에 없었다. 당장 필요한 자금줄과 상업 행위에서 제노바 상인들과의 동맹은 큰 도움이 되었지만, 대신 제노바 상인들은 카스티야 내부 많은 지방의 조세권부터 시작해 왕실 소유였던 시칠리아 섬, 나폴리 왕국의 경제적 이권 등을 철저하게 챙기며 장기적으로는 현지 민중, 토착 엘리트와 스페인 왕실 사이가 점차적으로 틀어지게 되는 치명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스페인 제국은 그 이전 중세의 종교적 공존, 즉 콘비벤시아(Convivencia)를 박멸하면서 전성기에 오르기 시작했지만 결국 그 몰락의 장기적인 원인 중 많은 부분이 이러한 공존에 기반한 사회•경제적 기반의 상실에서 기인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많은 고찰 대상이다.
알함브라 칙령의 비극…유대인, 스페인 떠나다
1492년 레콩키스타 직후 유대인 추방명령…또다른 디아스포라
1492년 3월 31일, 스페인의 공동국왕 페르디난도 2세와 이사벨라는 스페인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게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4개월 내에 떠날 것을 명령했다. 당시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여왕과 아라곤의 국왕은 페르디난도 2세는 정략결혼을 한 이후 레콩키스타(Reconquista)를 통해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축출해 국토를 수복한 후 통일왕국을 수립한 직후였다.
후세에 알함브라 칙령(Alhambra Decree)이라 불리는 유대인 추방령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신지 1492년째가 되는 해의 3월 31일, 우리의 도시 그라나다에서 이 교서를 반포하노라. 유대인들은 빈부와 귀천, 남녀노소, 거주지역, 현지 출생 여부를 불문하고 모두 떠나라.”
당시 스페인에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는지는 견해가 다양하다. 5만3,000가구, 25만명에 이른다는 게 대체적인 견해지만, 10만명에서 80만명까지 다양한 주장이 있다. 분명한 것은 스페인에는 유럽 어느나라보다 유대인 인구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스페인에 유대인이 많이 살았던 이유는 두 가지로 설명된다.
첫째, 팔레스타인의 유대국가가 고대 로마제국에 의해 멸망한 이후 세계 각지에 유랑하던 유대인들에게 랍비들은 근거도 없이 스페인을 ‘새로운 약속의 땅’이라고 제시했기 때문이다. 구약성서 예언서 ‘오바댜서’에 “예루살람에서 스바랏으로 잡혀 갔던 사람들은 남쪽 유다의 성읍들을 차지할 것이다”고 했는데, 그 스바랏(Sephrad)이 스페인 지역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이베리아 반도에 살던 유대인들을 세파르디(Sephardi)이라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솔로몬 시대부터 이베리아 반도에 유대인들이 살았다는 설도 있지만 유대인들이 많아진 시기는 유대국가가 멸망한 2세기 이후다.
두 번째 이유는 스페인을 차지했던 이슬람 왕국이 유대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스페인 유대인들은 게르만 민족 이동 시기에 기독교로 개종해 이베리아 반도에 정착한 서고트왕국의 모진 박해를 참고 지내다가 이슬람 왕국이 들어선 이후 차별을 받지 않고 지내게 되었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하마드는 “유일신을 믿는 종교는 우대하라”고 가르쳤고, 레콩키스타 이전의 이슬람 왕국은 유대인에게 관대했다. 이슬람 통치 시절에 이베리아반도의 유대인들에겐 말 대신에 노새를 타야 하고, 노란색 터번이나 띠를 둘러야 하며, 요란하게 종교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비교적 느슨한 차별을 받았지만, 그마저 지켜지지도 않았다.
이슬람 왕국인 코르도바 왕국에서 유대인들은 외무장관을 비롯해 고위직까지 진출했고, 이슬람 세력이 쪼개진 이후에 더 큰 기회를 얻었다. 각 세력마다 학식을 갖춘 인재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라나다 왕국에선 군 총사령관을 지낸 유대인도 있었다.
이슬람 치하에서도 11세기에 유대인 박해가 있었지만 유대인의 발전은 멈추지 않았다. 이편 저편 오갈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의 암흑기에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는 잊혀 졌으나, 스페인에선 유대인들이 아라비아어로 번역되어 있던 고대 의학과 철학 서적을 히브리어와 라틴어로 번역했다. 아라비아 수학과 기하학도 스페인 유대인들에 의해 전파되었다. 유대인들은 집과 땅을 소유할수 있었고, 상업과 농업은 물론 어떤 직업도 가질수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기독교 국가인 프랑스와 영국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이베리아 반도로 흘러 들어 인구가 늘어났다. 덕분에 스페인에선 유대인들에 의해 세파르딤(Sephardim) 문화가 꽃피웠다. 세파르디 유대인들은 당대 어느 곳에 있던 유대인들보다 부유했다. 17세기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세파르디 유대인들의 평균소득은 동유럽과 독일 지역의 유대인 아쉬케니지(Ashkenazi)의 소득보다 40배나 많았다는 기록이 있다.
레콩키스타 직후 스페인 왕국의 알함브라 칙령은 유대인들에게 충격적이었다. 공동국왕 페르디난도 2세와 이사벨라는 추방의 이유로 종교를 들었다. 그들은 독실한 기독교도였다. 두 국왕은 유대인들이 사악한 신앙과 음탕한 관습, 율법을 고집하며 성스러운 기독교에 해악과 오욕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부부 국왕에겐 경제적 계산도 있었다. 칙령은 “유대인들의 모든 재산권을 인정하고 보호하며, 동산과 부동산을 자유롭게 처분해 국외로 반출할 권리를 부여한다”고 명시했다. 하지만 단서조항으로 “금과 은, 화폐의 반출을 비롯해 국가가 정한 품목은 금지한다”고 못박았다. 부동산은 4개월의 짧은 시간에 팔리지 않았다. 혹여 사는 사람이 있더라도 헐값이었다. 유대인들은 재산을 거의 잃었다. 두 국왕의 의도는 여기에 있었다.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운 영주와 기사들에게 나눠줄 재화를 유대인들에게서 뺏아 마련하려 한 것이다.
유대인들에겐 시간이 촉박했다. 추방시한은 7월말이었다. 칙령에는 “기일 이후에 머물러 있거나 되돌아오는 유대인 또는 잠시 방문하는 유대인은 법 절차 없이 극형에 처하고 재산은 국고에 귀속한다”고 했다.
유대인들은 빈털터리로 쫓겨났다. 또다시 디아스포라가 벌어졌다. 이주하는 과정에서 2만명이 바다에 빠지거나 병들어 죽었다.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스페인에 남아 있던 유대인이 있었는데 위장 개종의 혐의를 받아 처벌되는 바람에 결국은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금과 은을 가져갈 수 없었으나 보석은 가져갈수 있었다. 그들은 후에 네덜란드에서 대규모 보석상으로 성공하게 된다.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가장 선호한 나라는 이슬람 국가였다. 유스만 투르크에 9만명, 오늘날 모로코 지역에 2만명, 알제리에 1만명이 몰려 들었다. 이슬람이 기독교보다 유대인들에게 상대적으로 관대했다는 경험칙이 그들의 목적지 결정에 크게 작용했다. 오스만투르크의 수도 이스탄불에는 이들로 인해 유대인 타운이 형성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스페인의 이웃나라 포르투갈을 선택한 유대인들이 6만여명이나 되었다는 사실이다. 포르투갈은 당시 해양 개척에 관심이 많았는데, 돈이 필요했다. 포르투갈은 유대인 1명당 1두카트씩 받고 입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얼마후 스페인과 같은 이유로 유대인들을 추방했다. 포르투갈에 간 유대인들은 네덜란드로 건너가 자리잡았다. 그들은 16~17세기 네덜란드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당시 포르투갈에 거주하면서 동족의 이산을 지켜본 유대인 학자 이삭 아브라바넬(Isaac Abrabanel)은 알함브라 칙령에 대해 반박문을 남겼다.
“우리가 당신들에게 해를 끼쳤는가. 당신들을 돕고 거들었을 뿐이다. …… 그렇다. 왕과 여왕은 실수한 것이다. 우리는 비록 떠나도 영혼만큼은 결고 짓밟히지 않을 것이다. 부당한 박해를 받았다는 역사적 사실도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 우리는 떠난다. 그러나 이날은 잊지 않을 것이다.”
유대인이 떠난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흘러들어온 금은 보화로 일시적으로 융성하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대신에 유대인들이 이주한 네덜란드는 상업을 일구며 스페인이 내놓은 세계 패권을 장악하게 된다.
500년이 지난 2015년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알함브라 칙령의 역사를 반성하며, 유대인들에 대해 국적 회복법을 제정했다. 이 법안은 국외에 거주하는 유대인 중 자신이 세파르디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면 스페인·포르투갈 국적을 취득하고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도록 했다.
1492년 유대인 추방령의 비극
추방령, 돈과 금, 은 등 귀중품은 못 가져 나가게 해
10여 년 사이에 유대인 26만 명이 빠져나가다
스페인 왕국의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은 1492년 1월 2일 마지막 이슬람을 그라나다에서 몰아내고 석 달도 되지 않은 3월 31일에 유대인 추방령을 발표했다. 칙령에서 명시한 유대인들의 죄는 “신성한 가톨릭 교리와 신앙 깊은 교도들을 무너뜨리려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 무렵 스페인 왕국 인구 700만 명의 6.5%가 유대인이었다고 한다. 유대인 숫자가 유럽에서 가장 많았다. 특히 유대인들은 장원제도가 발달한 중세에 농촌에 살지 않고 상업이 발달한 도시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도시인구의 1/3을 차지했다. 유독 스페인에 유대인이 많이 살았던 이유는 8세기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했던 이슬람들이 500년 이상 유대인에게 관용을 베풀어 유대인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그 기간에 유대인들은 황금기를 구가하며 ‘유대 문화의 최고 전성기’를 이베리아반도에서 보냈다. 이 시기에 이슬람, 유대교, 기독교가 공존하며 문화적으로도 융성한 시대였다. 그 무렵 수도 코르도바는 문화와 상업이 발달한 유럽에서 가장 크고 강성한 도시였다.
그러다 11세기 초 북아프리카에서 발흥한 교조주의 이슬람이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하여 유대인들에게 개종을 강요하며 학살하기 시작하자 유대인들이 피난 길에 올라 북부 스페인 왕국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이 14~15세기 스페인 왕국의 경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492년 당시 스페인의 재정 고문 아이삭 아브라반넬도 유대인이었다. 스페인을 무역 경제부국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그는 유대인 추방령을 돈으로 막으려 하다가 실각한다.
유대인 추방은 전쟁 후유증으로 불거진 사회적 불안이 크게 작용했다. 왕실은 불안한 민심을 수습하고 기독교 국가의 위엄을 세우려는 의도로 기독교로의 종교 단일화를 제시한 것이다. 그 이면에는 경제적 이유도 도사리고 있었다. 전쟁으로 이완된 민심을 추스르고 바닥난 국고를 채우는 데는 유대인 추방과 재산 몰수가 일거양득의 묘수였다. 뿐만 아니라 콜럼버스 신항로 탐사에 들어갈 왕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도 한몫했다.
추방령, 돈과 금, 은 등 귀중품은 못 가져 나가게 해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4개월 이내에 스페인을 떠나라고 선포한 추방령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재산을 처분해서 가지고 나가는 것은 허용하되 화폐와 금, 은 등 귀중품은 가져 나갈 수 없다고 발표했다. 발각되면 처형이었다. 한마디로 억지였다. 재산은 놔두고 몸만 빠져나가라는 소리였다. 칙령이 발표되자 개종을 거부한 유대인은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몇 달 이내에 헐값으로 팔아 치웠다. 집을 주고 당나귀를 얻었고 포도원이 몇 필의 포목과 교환되었다.
이렇게 재산을 급하게 처분할 수밖에 없었지만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신변의 위험을 안고 사는 유대인들은 모든 재산을 평상시에도 나누어 놓는 습관이 있었다. 1/3은 현찰로, 1/3은 보석이나 골동품 같은 값나가는 재화로, 1/3은 부동산으로 부를 분산시켜 관리했다. 안정적인 재산관리방식인 포트폴리오(Portfolio)는 여기서 유래했다. 그 와중에도 대부업을 했던 유대인들은 담보대출 시 저당 잡은 보석류를 챙겼다. 당시 유대인에게는 토지나 부동산 소유는 법으로 금지당했기 때문에 대부분 저당물이 보석류였다. 당시 보석류는 오늘날과 같이 높은 경제적 가치는 없었지만 이는 후에 유대인들이 이주해 간 안트워프와 암스테르담이 다이아몬드 등 보석시장으로 자리 잡게 된 이유다.
떠나기에 앞서 12살 이상 되는 아이들은 모두 결혼시켜 가족을 이루게 했다. 유대인들은 성인이 되어야 하느님으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유대인이라 여김을 받기 때문이다. 이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수레나 나귀에 짐을 싣고 태어난 나라를 떠났다. 단 4개월만인 8월 초에 이르자 추방은 완결되었다.
10여 년 사이에 유대인 26만 명이 빠져나가다
이리하여 유대인 17만 명이 한꺼번에 추방당했다. 1480년 이래 종교재판을 피해 빠져나간 사람까지 합치면 약 26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10여 년 사이에 스페인을 떠났다. 그 무렵 인구 3만이 넘는 도시가 흔치 않은 유럽에서, 26만 명은 대단한 숫자였다. 당시 스페인에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이 빠져나갔는지는 학자에 따라 13만~80만 명까지 다양하다.
1492년 8월 2일 세비야 근처 항구에서는 마지막으로 추방되는 유대인 무리가 배 위로 탑승하는 동안, 또 다른 세 척의 선박이 그 옆에서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 유명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선단이었다. 바로 그 가련한 유대인들의 후손을 위하여 그가 발견하게 될 신대륙이 피난처를 제공하게 되리라고는 콜럼버스 자신을 비롯해 그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다. 사실 콜럼버스의 계획은 몇몇 유력한 ‘마라노’(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들의 도움을 받아 실행될 수 있었다. 그의 배들은 유대인들에게서 압류한 돈을 가지고 건조되었고, 그의 선원 중에는 종교재판의 마수에서 자유를 얻고자 하는 적잖은 마라노들이 끼여 있었다.
스페인 북부에 살던 1만 2천 명가량의 유대인들은 프랑스에 가까운 나바라 왕국으로 향했다. 그곳 통치자들은 오랫동안 종교재판 제도의 도입을 거절해 왔었다. 그러나 페르난도 왕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나바라 왕국도 결국 종교재판 제도를 받아들여야 했다. 이곳으로 잠시 피신했던 유대인들은 결국 대부분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길을 택했고, 일부는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로 향했다.
결국 포르투갈도 유대인 추방해
스페인 영토에서 추방당한 17만 명의 유대인들 가운데 10만 명은 값을 지불하고 인근 포르투갈로 입국했다. 하지만 그것도 5년간의 체류에 불과했다. 1495년 마누엘 1세 왕이 포르투갈의 권좌에 올랐는데, 그는 페르난도와 이사벨 부부의 왕국을 상속받고 싶은 욕망에서 그들의 딸과 결혼하고자 했다. 이들 부부는 마누엘의 포르투갈 왕국 내에 비기독교인들이 존재하는 한 딸을 줄 수 없다며 결혼을 수락하지 않았다. 1496년 12월 포르투갈 내 유대인들과 무어인들에 대한 추방령이 선포되었다.
그들에게는 1년의 여유 기간이 주어졌다. 그전에 25세 이하의 젊은이들은 모두 강제로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되었다. 마누엘은 경제적 타격을 우려하여 유대인들이 떠나는 길을 방해했다. 마감 날이 지나자 마누엘은 미처 떠나지 못한 유대인들을 노예라고 선언하고는, 가능한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그들을 개종시켰다. 이들 중 다수 역시 비밀리 유대교 의식을 준수하는 마라노가 되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1497년에 포르투갈에서도 추방되고 말았다.
유대인, 플랑드르의 안트워프와 부뤼헤 등으로 향해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몰려간 곳은 종교의 자유가 있으며 비교적 안전한 북해 연안의 저지대 곧 플랑드르의 부뤼헤와 안트워프로 향했다. 그곳에는 1290년 영국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터를 잡고 상업과 교역 그리고 모직물 산업을 발달시킨 곳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을 반겨 맞아 주었던 오스만제국으로 향했고 또 나머지는 북아프리카와 베네치아 등으로 이주했다. 이주 중에 약 2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부는 프랑스로도 이주하여 화려하고 세련된 몽테뉴를 존재케 했다. 그의 어머니가 스페인계 유대인의 직계 후손이다. 모로코에는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유대인 정착촌이 있다. 그들 대부분은 스페인을 떠나온 유대인의 후손들이다. 그들은 “멜라(mellahs)”라고 하는 특별 구역에 격리되어 살았으며 유대인으로 인식케 하는 복장을 입어야만 했다. 한때 모로코에 25만여 명의 유대인들이 살았다.
스페인 애저요리의 유래
그 뒤에도 스페인 왕실은 유대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마라노 무리가 여전히 몰래 유대교 관습을 지킨다고 보았다. 종교재판소를 통해 이들을 색출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지금도 유대인이 가장 많이 살았던 톨레도와 세고비야에는 새끼돼지를 구운 애저요리가 유명하다. 톨레도에는 축제 때 돼지고기를 먹는 행사가 있다. 이는 당시 마라노들이 공개석상에서 유대인들이 금기시 했던 돼지고기를 먹어 보임으로써 그들의 개종을 만천하에 알리는 풍습에서 유래되었다. 애저요리(Cochinillo)는 생후 2주 된 아기 돼지를 통째로 구어서 먹는 스페인의 특선 요리로 접시로도 잘라질 만큼 육질이 부드럽고 맛이 일품이다.
그 뒤에도 종교재판을 피해 약 5만여 명의 유대인들이 추가로 스페인을 떠났다. 결국 많은 유대인들이 안트워프, 암스테르담 등지로 이주하면서 이베리아반도의 경제력이 중부 유럽으로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같은 스페인에서의 유대인 사회의 몰락은 유대사 가운데 가장 중대한 사건 중 하나였다. 페니키아 시대에 이미 스페인 카디스 등에 유대인들이 진출한 기록이 있다. 적어도 솔로몬 시대부터 스페인에는 유대인들이 살았으며 그곳에서 주목할 만한 문화적 황금기를 이룩하며 유대인 사회를 발전시켜 왔다.
유대인 추방으로 금융업과 유통업의 몰락
추방된 유대인들은 당시 스페인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고급 인력들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카스티야에서 재정과 금융을 장악하고 각 지방의 행정기관과 왕실의 요직에도 진출해 있었다. 스페인에서 유대인 추방 결과 그들이 많이 살았던 주요 상업도시의 집세와 가게세는 절반으로 폭락했다. 바르셀로나는 은행들이 대거 파산했다. 이로써 인구의 6.5%가 유대인이었던 아라곤 왕국은 금융업과 상업이 몰락하다시피 타격이 컸다. 전성기에 300개의 작업장을 자랑했던 바르셀로나의 면직물 산업은 15세기 중엽에 10개 정도의 작업장만을 운영하는 초라한 수준으로 전락했다.
게다가 유대인 추방은 한마디로 고급두뇌와 핵심 인재의 유출이었다. 당시 의사는 대부분 유대인이었으며 세금을 징수하는 사람도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주 납세자도 유대인이었다. 그나마 남아있었던 마라노들도 유대인 티를 안내기 위해 전통적인 유대인 직업들을 버리고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았다. 동시에 그들의 재능도 함께 땅에 묻어버렸다.
그 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동인도 제도에서 후추와 향신료를 싣고 와도 유통망이 붕괴되어 소비자가 있는 북유럽으로 유통시킬 방도가 없었다. 동인도 제도로 싣고 갈 교역품도 구할 수 없었다. 이베리아반도의 생산과 유통 기반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유대인 추방은 스페인 경제에 치명적이었다. 유대인들이 떠난 뒤 내수 부진과 더불어 국제교역 감소는 스페인 경제를 피폐케 했다. 이는 국고 수입 감소로 직결되어 스페인 왕국은 중남미에서 대량의 금과 은을 지속적으로 가져왔음에도 수 차례 파산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