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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 4

진주민란(晉州民亂), 1862년, 철종, 반관숙정운동(反官肅正運動)

1862년(철종 13) 2월 18일에 경상도 진주에서 일어난 농민들의 반관숙정운동(反官肅正運動). 철종 때의 임술민란의 도화선이 되었다. 직접 동기는 경상도우병사 백낙신(白樂莘)의 불법 탐학에 있었다. 그는 부임한 이래 갖은 방법으로 농민을 수탈한 금액이 줄잡아 4만∼5만 냥이나 되었다. 그런데도 진주목의 역대 불법 수탈곡인 도결(都結) 8만4000여 냥을 일시에 호별로 배당해 수납하려 하였다. 우병영(右兵營)에서도 이 기회를 이용해 신구범포곡(新舊犯逋穀)인 환포(還逋) 7만2000여 냥을 농가에 분담, 강제로 징수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처사는 그렇지 않아도 파탄 지경에 다다랐던 농민들을 극도로 분격시켰다. 진주에서 서남쪽으로 30리쯤 떨어진 유곡동(杻谷洞)에 사는 유계춘(柳繼春)은 김수만(金守滿)·이귀..

임술민란(壬戌民亂),1862년,철종,삼남지역,농민전쟁,

1862년(철종 13) 삼남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농민전쟁. 1862년 농민항쟁은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에 걸쳐 70여 개 고을에서 일어났다. 최초로 일어난 곳은 2월 4일 진주 바로 위쪽에 있는 작은 고을인 단성이었다. 단성으로부터 시작된 항쟁은 3월에는 경상도 지역으로, 4월에는 전라도로, 5월에는 충청도로 확산되었다. 정부가 조세문제를 개혁하겠다고 약속하자 항쟁이 수그러졌다가 정부가 개혁을 시행하지 못하자 다시 터져 나왔다. 9월부터 제주지역, 함경도 함흥, 경기도 광주, 경상도 및 몇 고을에서 농민항쟁이 발생하였다. 농민항쟁이 발생한 주요한 원인은 삼정문란(三政紊亂)을 비롯한 봉건정부와 관리의 농민들에 대한 억압과 수탈이었다. 또 항쟁 과정에서 고리대나 고을의 소작료를 통해 지..

남해민란(南海民亂),1862년,철종,경상도 남해현

1862년(철종 13) 12월 21일 경상도 남해현(지금의 경상남도 남해군)에서 일어난 민란. 직접적인 원인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12월 23일 난민들이 읍 창고의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 환곡 16석을 향청으로 옮겨가고 문부(文簿)를 불태웠는데, 7개 면민이 낸 등장(等狀)주 01)에 의하면 환곡의 폐단이 원인이었던 것 같다. 28일 남해현령의 첩정(牒呈)주 02)에 의하면 난민들은 흰 수건을 쓰고 몽둥이를 들고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집을 부수거나 불지르거나 하였다. 22일에는 각 면이 일제히 일어나 그 수가 몇 천 명인지 모를 정도였다. 고현면(古縣面)의 향민인 이민형(李敏馨)의 집을 불지르고 곧 성에 들어가 지난날 서리였던 김대일(金大鎰)·정직모(鄭直謨)·박의록(朴義祿) 등의 집과 말단향리인 김약조(..

경신박해(庚申迫害), 천주교,1859년,철종

1859년(철종 10) 12월말 우변포도대장 신명순(申命淳)과 좌변포도대장 임태영(任泰瑛)이 천주교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으로 서울과 지방의 교인촌을 급습하여 30여 명의 신자들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보다 앞서 신명순은 1859년 2월 14일, 우변포도대장 임태영은 8월 28일에 좌변포도대장으로 임명된 상황이었다. 이 두 포도대장 중 신명순은 신유박해 때 좌변포도대장으로 있던 신대현(申大顯)의 손자였고, 임태영의 아버지는 임성고(任聖皐)였는데 기해박해 때는 좌변포도대장, 병오박해(丙午迫害) 때 우변포도대장으로 있었다. 포졸들을 먹여 살리려고 이런 일을 자행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가족관계를 고려하면 천주교에 대한 반감이 작용했다고 추정하는 것이 타당하겠다. 이런 소식은 베르뇌 주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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