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 한국사/한국사 사전

경신박해(庚申迫害), 천주교,1859년,철종

Jobs 9 2021. 3. 31. 10:54
반응형

1859년(철종 10) 12월말 우변포도대장 신명순(申命淳)과 좌변포도대장 임태영(任泰瑛)이 천주교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으로 서울과 지방의 교인촌을 급습하여 30여 명의 신자들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보다 앞서 신명순은 1859년 2월 14일, 우변포도대장 임태영은 8월 28일에 좌변포도대장으로 임명된 상황이었다. 이 두 포도대장 중 신명순은 신유박해 때 좌변포도대장으로 있던 신대현(申大顯)의 손자였고, 임태영의 아버지는 임성고(任聖皐)였는데 기해박해 때는 좌변포도대장, 병오박해(丙午迫害) 때 우변포도대장으로 있었다. 포졸들을 먹여 살리려고 이런 일을 자행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가족관계를 고려하면 천주교에 대한 반감이 작용했다고 추정하는 것이 타당하겠다.

이런 소식은 베르뇌 주교에게 급보로 전해졌고, 다시 다블뤼(Daveluy,M.N.A.) 주교에게도 전달되었다. 급보가 말해주는 것만큼 재난이 크지 않았지만, 옥에 갇히고 약탈당하고 마을이 파괴되는 상황에서 교인들은 산골로 도망하였다. 한동안 숨어 지내던 베르뇌 주교는 이것이 조선 조정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서울 집으로 돌아와 프랑스 선교사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물건을 보호할 수 있었다.

신명순과 임태영의 기대 그리고 요청과는 달리 천주교도의 체포는 대규모 천주교 박해사건으로 비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포졸들이 천주교인들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재산의 약탈과 방화 등 불미스러운 만행이 야기되고, 이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높아졌다.

그러자 당시의 세도가문인 안동김씨이면서 훈련대장 겸 호조판서인 김병기(金炳冀)는 정조 이후 순조, 헌종에 이르기까지 천주교를 탄압한 임금들에게 전부 상서롭지 못한 일이 생겼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천주교인 체포 문제에 반대하였고, 형조판서 김병운(金炳雲) 은 형조에서 죄인 다스리는 것을 거부하였고 기해박해 때 대왕대비의 하교 를 인용하며 천주교인의 재산·가구·식량을 약탈하거나 약탈하게 내버려 둔 것에 대해서 포도대장을 비난하였다.

포도대장들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그냥 풀어준다면 실책을 자인하는 꼴이 되고, 그렇다고 천주교인들을 마음대로 처형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어떻게든 외국인 선교사를 찾아내어 문제를 확대시키고자 하였다. 그러기 위해 포졸을 지방으로 보내 수색을 확대되었다. 몇몇 신도를 붙잡아 심문하여 선교사들의 조선식 이름이나 여행, 생활, 성사 집행 방식 등을 알아내기는 했지만, 약탈만 되풀이 되었을 뿐 옥사가 더 이상 확대되지는 않았다.

이 사건이 문제가 되어서 결국은 신명순과 임태영은 포도대장의 자리를 사임하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허계(許棨)와 신관호(申觀浩)가 임명되었다. 더 이상의 천주교도의 체포도 금지되었고, 이미 체포되어 있던 신도들도 조금씩 방면하다가 8월 7일 투옥된 교인들이 철종의 명에 의하여 모두 석방됨으로써 9개월간에 걸친 옥사가 종식되었다.

경신박해는 사실상 신명순과 임태영 두 명의 포도대장에 의해 주도된 천주교도 박해 사건이었으나 조정 차원으로 문제가 확대되지 않아 여타의 박해 사건과 마찬가지로 경신박해라고 부르는 것조차 어려워 보인다. 특히 관찬사료에 경신박해와 관련된 어떠한 내용도 기록하고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일종의 해프닝으로 끝났다고 판단된다.

이후로 신명순과 임태영은 포도대장으로 다시 임명된 바 있다. 이것은 이 둘이 소위 경신박해 과정에서 저지른 일에 의해서 정치적으로 실각할 정도의 타격을 입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해프닝에 불과한 경신박해이지만, 고종대에 일어난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 규모의 천주교 탄압 사건인 병인박해에 앞서 철종대라는 특별한 상황 속에서 천주교가 착실히 포교되어 가는 상황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스마트폰 공무원 교재

✽ 책 구매 없이 PDF 제공 가능
✽ adipoman@gmail.com 문의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