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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 3

황산대첩, 1380년, 우왕, 이성계, 지리산 부근 황산(荒山), 고려말왜구퇴치

1380년(우왕 6) 9월에 이성계(李成桂) 등이 전라도 지리산 부근 황산(荒山)에서 왜구에게 크게 이긴 전투. 14세기 후반에 극심하던 왜구의 노략질은 1376년 홍산(鴻山)에서 최영(崔瑩)에게 크게 패한 뒤 한동안 잠잠하였다. 그러나 1380년 8월에 5백척의 대선단으로 진포(鎭浦: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금강 어귀)에 침입하였다. 왜구는 타고 온 배를 밧줄로 단단히 묶어놓고 상륙해 충청·전라·경상 3도 연안의 주(州)·군(郡)을 약탈·방화·살육하였다. 이 때 시체가 산야를 덮고, 그들이 운반 중에 흘린 쌀이 길 위에 한자나 깔릴 지경이었다. 조정에서는 나세(羅世)를 상원수로, 최무선(崔茂宣)을 부원수로, 심덕부(沈德符)를 도원수로 하여 왜적을 치도록 하였다. 경과와 결과 진포싸움은 최무선이 만든 신무..

폐가입진, 廢假立眞, 가왕(假王)을 몰아내고 진왕(眞王)을 세운다, 고려 말, 이성계, 창왕, 공양왕, 역성혁명

가왕(假王)을 몰아내고 진왕(眞王)을 세운다는 말로, 고려 말 이성계(李成桂) 등이 창왕(昌王)을 폐위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한 사건. 창왕과 그 아버지 우왕(禑王)이 왕족이 아니라는 의심은 1374년(공민왕 23) 공민왕(恭愍王)이 최만생(崔萬生)·홍륜(洪倫) 등에 의해 시해된 뒤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제기되었다. 이는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辛旽)과 그의 비첩(婢妾) 반야(般若)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역사적 배경 당시 태후와 시중 경복흥(慶復興) 등은 종친으로써 왕위를 잇게 할 것을 주장했으나, 이인임(李仁任) 등이 이미 대군에 봉해져 있던 우왕의 옹립을 고집해 결국 우왕이 즉위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1388년(우왕 14)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직후에 이성계측의 윤소종(尹..

종계변무, 宗系辨誣, 명나라, 이성계, 대명회전, 윤이, 이초

조선 건국 초기부터 선조 때까지 200여년간 명나라에 잘못 기록된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세계(世系)를 시정해 달라고 주청했던 사건. '종계'란 종가의 혈통, '변무'란 사리를 따져서 억울함을 밝힌다 고려 말 1390년(공양왕 2) 이성계의 정적이던 윤이(尹彛)·이초(李初)가 명나라로 도망가서 이성계를 타도하려는 목적으로, 공양왕이 고려 왕실의 후손이 아니고 이성계의 인척이라 한 적이 있다. 이 때 윤이 등은 이들이 공모해 명나라를 치려고 한다면서, 이성계의 가계에 관해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라고 한 일이 있었다. 그 뒤 명나라는 이 이야기를 믿고, 그 내용을 명나라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 大明會典》에 그대로 기록하였다. 조선에서 이러한 종계(宗系)의 기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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