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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 4

권근(權近), 공민왕, 우왕, 정몽주(鄭夢周), 정도전(鄭道傳), 배원친명

조선전기 중추원사, 정당문학,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권진(權晉), 자는 가원(可遠)·사숙(思叔), 호는 양촌(陽村)·소오자(小烏子). 권보(權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권고(權皐), 아버지는 검교정승 권희(權僖)이다. 1368년(공민왕 17) 성균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급제해 춘추관검열·성균관직강·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했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배원친명(排元親明)주 01)을 주장했으며,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성균관대사성·지신사(知申事) 등을 거쳐, 1388년(창왕 즉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이은(李垠) 등을 뽑았다. 이듬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로서 문하평리(門下評..

황산대첩, 1380년, 우왕, 이성계, 지리산 부근 황산(荒山), 고려말왜구퇴치

1380년(우왕 6) 9월에 이성계(李成桂) 등이 전라도 지리산 부근 황산(荒山)에서 왜구에게 크게 이긴 전투. 14세기 후반에 극심하던 왜구의 노략질은 1376년 홍산(鴻山)에서 최영(崔瑩)에게 크게 패한 뒤 한동안 잠잠하였다. 그러나 1380년 8월에 5백척의 대선단으로 진포(鎭浦: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금강 어귀)에 침입하였다. 왜구는 타고 온 배를 밧줄로 단단히 묶어놓고 상륙해 충청·전라·경상 3도 연안의 주(州)·군(郡)을 약탈·방화·살육하였다. 이 때 시체가 산야를 덮고, 그들이 운반 중에 흘린 쌀이 길 위에 한자나 깔릴 지경이었다. 조정에서는 나세(羅世)를 상원수로, 최무선(崔茂宣)을 부원수로, 심덕부(沈德符)를 도원수로 하여 왜적을 치도록 하였다. 경과와 결과 진포싸움은 최무선이 만든 신무..

홍산대첩, 1376년, 우왕, 최영, 홍산, 부여, 왜구

1376년(우왕 2) 7월 최영(崔塋)이 홍산(지금의 충청남도 부여 지역)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싸움. 이 싸움은 나세(羅世)·최무선(崔茂宣) 등의 진포싸움, 이성계(李成桂)의 황산대첩, 정지(鄭地)의 남해대첩과 함께 왜구토벌에서 가장 빛나는 전적 중 하나이다. 고려때 왜구 침범은 충정왕 때부터 시작되어 공민왕과 우왕 때 가장 창궐했는데, 특히 우왕 14년 동안 378회에 걸쳐 쳐들어와 최고를 기록하였다. 1376년 7월 왜구가 부여에 침입했다가 공주에 이르렀는데, 이 때 목사 김사혁(金斯革)이 정현(鼎峴)에서 싸우다가 패전해 공주가 함락되었다. 왜구는 다시 연산현(충청남도 논산 지역)의 개태사(開泰寺)로 쳐들어와 이를 맞아 싸우던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도 전사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최영은 출정..

위화도회군,1388년,우왕,이성계정변,요동정벌

1388년(우왕 14) 명나라의 요동(遼東)을 공략하기 위해 출정했던 이성계(李成桂) 등이 위화도에서 회군해 우왕을 폐위시키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 위화도는 의주의 압록강 하류에 있는 섬이다. 당시 고려와 명나라의 관계는 명나라가 무리한 공물을 요구해 매우 긴장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1388년에는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해 철령 이북의 땅을 요동도사(遼東都司)의 관할 아래 두겠다고 통고해 왔다. 이에 고려가 크게 반발해 결국 요동정벌로 이어졌다. 요동정벌이 단행될 때,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성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부적당할 뿐 아니라,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고 왜구가 창궐할 것이며,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므로 활의 아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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